어설픈 프로포즈
괴테 외 지음, 황내도 옮김 / 청어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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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정리하다가 발견했다. 한창 이런 류의 책이 인기를 모은 적이 있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같은 책을 중심으로 출처를 알 수 없는 감동적인 이야기나 유익한 교훈들을 모아놓은(나쁘게 말하면 '짜집기한') 책들이 다수 출간되었다. 이 책도 그런 분위기에 동참한(나쁘게 말하면 '편승한') 책인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측면이 몇 군데 있다. 크게 두 가지만 지적하면,  

1. 책 표지에는 저자의 이름이 적힌 것이 아니라 '괴테, 베르나르 베르베르 외 일화'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이 매우 인기 있을 때 편승하여 발간한 책인가 보다. 그렇다고 저자가 쓰여져야 할 부분에 이런 식으로 표기하는 것은 독자들이 베르베르의 책인줄로 오해하고 구입할 여지가 있는 좋지 않은 마케팅이다. 

2. 제목 '어설픈 프로포즈'는 이 책 4장에 있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일화 제목이기도 하다. 표지에는 괴테와 베르베르를 내세우더니 제목은 구로자와 아키라?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럼 '구로자와 아키라의 일화'라고 하던지. 모름지기 한 책의 제목이 되려면 그 제목이 책 전체의 내용을 종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책을 절반 이상을 읽으면서 도대체 왜 '어설픈 프로포즈'가 제목인지를 알 수 없었다.


제목처럼 '어설픈' 구성의 책이다.

"이보게, 처음부터 대작을 쓰려고 하지 말게. 날개가 여물어야 날 수 있지 않겠나? 미래에나 가능한 대작을 꿈꾸지 말고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것을 자연스럽고 생생하게 써 보게. 그럼 언젠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작이 만들어져 있을 걸세. 날기에 앞서 날갯짓 연습이 필요하지 않겠나?"
그는 괴테의 말을 가슴 속 깊이 새겨 넣었다. - 16,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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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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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광고 문구처럼 "그녀가 돌아왔다!" (그리 끌리지 않은 책표지와 함께...) 


정유정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28>이후 그의 소설을 무척이나 기다렸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7년의 밤>에서 보여준 치밀한 서술과 묘사는 읽는 내내 계속 가슴이 뛰게 만들었다. 그녀가 사실적으로 묘사한 저수지와 댐은 실제 눈에 그릴 수 있을 것 같을 정도였다. 그밖에도 등장인물의 생생한 말투와 행동은 외부의 시선으로 책을 읽던 나를 어느새 소설에 개입시켜 그들을 안타까워 하기도 하고 응원하기도 하는 감정적 동화를 일으키기도 했었다. 작가는 <종의 기원>에서도 여전한 흡입력으로 독자들을 소설의 한 가운데로 이끌지만, 전작에 비해서는 사건의 전개와 반전, 그에 따른 긴장감 같은 것이 다소 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이것은 전작이 너무 훌륭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나 <내 심장을 쏴라>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좌충우돌을 통하여 이야기 사이사이에 유머러스한 부분을 많이 삽입하였지만, <7년의 밤>이나 <28>과 같은 전작에서는 '악인(惡人)'에 대해 주된 이야기를 풀어 나갔고,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책을 읽기 전에 <종의 기원>의 '종(種)'을 '악(惡)'으로 치환하여 '악의 기원'으로 읽기 시작한 것도 그때문이다. 그런데 읽고 보니 이것은 이분적으로 ('선(善)'이 아닌) '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 작가는 "<종의기원>은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라고 하였지만, 내가 보기에 여기서의 '악인'은 평범한 사람들과 구별되는 의미의 악인이 아니었다. 만약 통상적인 의미의 악인을 가정하였다면, 악인의 탄생에는 원인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별다른 원인이 필요하지 않은, 즉 타고난 본성이 사이코패스인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 원인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운명? 특수성? 돌연변이? 어떠한 것도 답이 되지 않는다. 저자가 제시한 답은 바로 '생존'이다. 


'작가의 말'에서 인용하였듯이, 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을 뿐이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진화과정에 적응해야 했고, 선이나 악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선과 악이 공진화했으며, 그들에게 살인은 진화적 성공(유전자 번식의 성공), 즉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고 한다면, '악'이란 이미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이 지배하고 있는 비중이 어느 정도이며, 그것이 언제 발현되는가에 따라 그는 사회적인 악인이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스토리를 '도덕성이 교육으로 습득되지 않는 어느 사이코패스가 결국에는 그 본성대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운명적으로 살인마가 되어 계속 살아간다', 라고 한 줄로 줄이기에는 뭔가 부족함이 있다.


작은 아들이 큰 아들과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임을 알면서도, 그가 사이코패스임을 알면서도, 그가 결국에는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엄마는 아들을 돌보기로 한다. 하지만 그를 '본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해야 하는데, 이것을 위해서는 적절한 관리와 통제(훈육, 약물)를 통하여 그를 평범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유진은 엄마와 이모가 맞춰놓은 틀 안에서 관리받고 훈육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도 일종의 '폭력'이 작용한다. 약을 먹으라는 폭력, 규율을 지키라는 폭력,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폭력. 절망해야 할 상황에서 '핏줄의 저주'를 거부하지 못한 엄마는, 얼마 전 읽은 <채식주의자>에서 동생을 정신병원에 맡겨서라도 살게 하려 했던 언니과 겹쳐보인다. 평범하게 살도록 하는 것, 죽지 않고 계속 살게 하는 것 이 두 가지 행위에 수반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폭력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폭력이 유진의 생각과 행동에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오직 그의 본성만을 탓할 수 있을까? 


소설을 읽다가 몇 가지 의문이 들었는데, 그 중 가장 강한 의문은 작가가 과연 치유될 수 없는 사이코패스의 성질을 유진에게 그대로 대입한 것인지였다. 중반 이후까지 당연하게 인식되었던 생각들, 즉 유진은 사이코패스여서 정말 그런 것일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 유진은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하며 맞선다. 종탑에서 형을 밀어 넘어뜨릴 수밖에 없었던 '원인'. 물론 형의 죽음 이후에 그려진 그의 담담함과 무심함은 놀랄만 하지만, 형과의 서바이벌 게임에서 당한 분노로 먼저 종탑에 올라간 형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은 미성숙한 소년들에게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며, 결국 형이 추락해서 사망하였지만 거기에 살인의 의도가 있었는지는 유진의 회상과 독백만으로는 불분명하다. 그렇다면 형의 죽음은 사이코패스로서 유진의 생존을 위한 것이나 살인이라는 흥분에 눈을 떠 자기 통제력을 상실해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사이코패스로서의 악의 탄생을 그리고자 하였다면, 후반부 유진의 관점에서 서술된 형을 종탑에서 밀어버릴 때의 회상부분은 왜 필요했던 것일까?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은 유진이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의붓형인 해진을 이전의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사이코패스도 자신이 죽이기 쉬운 대상을 선별하였기 때문에 여성이 아닌 남성인 해진을 살해할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나'로 서술되는 1인칭 시점에서(유진의 속마음까지 고스란히 노출되도록 서술하고 있는데도) 해진의 살해의도는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바다로 뛰어들기 전의 최후에는 '생존'에 대한 방어적 기재가 작용한 것은 아닐까? 


그가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하여 그의 본성이 어느 정도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지, 그를 훈육한 엄마와 이모의 잘못은 없는지를 논하는 것은 그리 의미 있는 일은 아닐지 모른다. 다만, (실제 사이코패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소설에서만 보자면) 살인이라는 결과와 살해라는 행위의 상관관계를 전적으로 유진에 내재된 사이코패스라는 본성에 의지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작가는 왜 (위의 의문들처럼) 불분명하게 남을 수도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일까. 작가가 의도한 소설 본연의 의도와는 달리, 나는 절대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사이코패스라는 그의 본성이 아니라 그를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이들(훈육과 의학)의 확고한 '관념'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덧붙임: 사소하지만(?) 정말 궁금한 또 하나의 의문은 이모가 죽을 때 왜 유진을 보며 "유민"이라고 했는지이다. 나는 이것이 후반부에 있을 반전의 복선인줄로만 알았으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누구 아시는 분이 있으시면 좀 알려주시길...)



"행복한 이야기는 대부분 진실이 아니에요."
해진은 잠시 틈을 두었다가 대꾸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해진을 봤다.
"희망을 가진다고 절망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요. 세상은 사칙연산처럼 분명하지 않아요. 인간은 연산보다 더 복잡하니까요."
해진은 나와 시선을 맞대왔다. 그렇지?라고 묻는 눈이었으나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뭔 예기를 하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다만 녀석의 덩치가 나보다 두어 뼘쯤 커 보였다. 나와 불과 한 살 차이였건만, 열 살쯤 차이가 나는 형 같았다. 심지어 어머니와 대등해 보이기까지 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니?"
어머니가 물었다. 해진은 다시 시간을 두었다가 대답했다.
"그래도 한 번쯤 공평해지는 시점이 올 거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그러려고 애쓰면요." - 67쪽

`규칙에는 예외가 있었고, 예외는 곧 규칙이 되었다.` - 68쪽

인간이 늘 `정답`을 선택하지 않는 건 그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의 눈금을 조금 낮추자 간단한 해결법이 보였다. - 135쪽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 139쪽

누가 그랬던가. "인간은 생의 1/3을 몽상하는 데 쓰고, 꿈을 꿀 때에는 깨어 있을 때 감춰두었던 전혀 다른 삶을 살며, 마음의 극장에서는 헛되고 폭력적이고 지저분한 온갖 소망이 실현된다"고. - 272쪽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하는 법과 더불어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먹는 법과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굶는 법을 동시에 터득하는 것이다. 오로지 인간만 굶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생물이었다. 오만 가지 것을 먹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먹으며, 매일 매 순간 먹는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먹을 것을 향한 저 광기는 포식포르노와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이 지상의 생명체 중 자기 욕망에 대해 가장 참을성이 없는 종이었다. - 275쪽

나는 숨을 멈췄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분노가 와르르 무너졌다. 나를 지배하던 충동이 일순간에 가라앉았다. 핏줄의 저주에 걸려든 순간이었다. 내가 얼마나 아이를 사랑하는지 새삼스레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결코 용서하지 못하리라는 걸 예감한 순간이었다. 평생토록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리라고 생각하던 순간이며, 내가 누구인지 자각하던 순간이기도 했다. - 308쪽

"나는 죽음에 대해 그런 식으로 낭만적인 치장을 하는 게 싫어."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해진이 불쑥 말을 꺼냈다. 아마 광명역을 막 통과한 후였을 것이다. 나는 껌껌한 차창에 시선을 대고 있다가 멍하니 물었다.
"왜?"
"수류탄에 초콜릿을 바르는 꼴이니까."
"수류탄을 쥐고 있다고 꼭 진지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 - 330쪽

"어떤 책에서 본 얘긴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데는 세 가지 방식이 있대. 하나는 억압이야. 죽음이 다가온다는 걸 잊어버리고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양 행동하는 거. 우리는 대부분 이렇게 살아. 두 번째는 항상 죽음을 마음에 새겨놓고 잊지 않는 거야. 오늘을 생애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할 때 삶은 가장 큰 축복이라는 거지. 세 번째는 수용이래.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대. 모든 것을 잃을 처지에 놓여도 초월적인 평정을 얻는다는 거야. 이 세 가지 전략의 공통점이 뭔 줄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답은커녕 생각하는 시늉조차 하기 싫었다. 그런 이상한 문제로 고민하는 것보다 그냥 죽어버리는 게 쉽고 편할 것 같았다. 해진은 스스로 대답했다.
"모두 거짓말이라는 거야. 셋 다 치장된 두려움에 지나지 않아."
"그럼 뭐가 진실인데?"
"두려움이겠지. 그게 가장 정직한 감정이니까." - 330, 331쪽

진화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버스는 그의 저서 <이웃집 살인마(The Murderer Next Door)>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주장을 펼쳤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 것도, 선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진화과정에 적응해야 했고, 선이나 악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선과 악이 공진화했으며, 그들에게 살인은 진화적 성공(유전자 번식의 성공), 즉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 무자비한 `적응구조`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우리의 조상이다.
그에 따르면,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다. 그리고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 - 379쪽

처음 소설을 시작할 때, 나는 내가 작가로서 충분히 자유롭게 사고한다고 믿었다. 두 번째 다시 쓸 때까지도 그렇다고 우겼다. 세 번째로 다시 쓸 때에야 비로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인 `나`가 어린 시절부터 학습돼온 도덕과 교육, 윤리적 세계관을 깨버리지 못했다는 걸. 주인공인 `나`는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맹수`인데. 더 나쁜 건, 그 틀이 깨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선대의 작가들, 스승으로 삼았던 작가들을 통해, 작가는 자기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한 두려움과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배웠으면서도. - 382쪽

이제 내가 왜 인간의 `악`에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 대답할 차례다.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의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 3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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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2016-06-30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왜 이모가 죽기전에 유민이라고 말했는지 너무 궁금해요..
 
걸음아 날 살려라 장생보법
이승헌 지음 / 한문화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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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창 집에 늘어놓은 책 정리를 하는 중인데, 정리를 하다보면 '이런 책을 내가 샀었나?'라는 의문이 드는 책이 더러 있기 마련이다. 취향상으로는 절대 내가 샀을리가 없는 책인데 어찌하여 여기까지 흘러 들어온 것이지? 예전에는 책 모으는 것이 취미였던지라 책이라면 무조건 받고 보았는데, 그때 딸려온 것일까? 아무튼 읽지 않는 오래된 책들을 정리하면서 그냥 보내기 아쉬워 몇 장 넘겨보다가 다 읽고 말았다. 


무언가를 절대적인 만병통치의 도구로 믿게 하는 일종의 사술에는 거부감이 있기 마련인데, 이 책은 올바른 걸음을 통하여 건강을 회복하자는 취지여서 이상한 기(氣)와 같은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접할 수 있었다. 더욱이 초중반에 제시하고 있는 건강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일부 새겨들을 부분이 있었다.


장생보법은 바르게 선 자세에서 몸을 1도 정도 앞으로 기울이고, 몸의 중심을 발바닥 용천에 두어 발을 내디딜 때 발가락까지 힘을 주고 11자가 되도록 걷는 것을 말한다. 아무래도 글만으로는 느낌이 잘 와닿지 않지만, 평소 의식하지 않는 걸음걸이부터 신경써야 한다는 것에는 수긍이 간다.

장수 시대에는 새로운 장생의 철학이 필요하다. `어떻게 건강하게 잘 살 것인가`에 스스로의 답을 찾아야 한다.
흔히 `장생`이라고 하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불로장생을 꿈꾸던 진시황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데, 원래 `불로장생(不老長生)`이라는 말은 우리 민족의 선도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선도의 본질이 현대에 와서는 많이 훼손됐지만 옛말에는 그 의미가 조금은 남아 있다. `불로(不老)`란 늙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동사로서의 불(不)과 목적어로서의 노(老)의 문장으로 `늙지 않게 한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장생이란 말도 그저 오래 산다는 뜻이 아니라 자연과 하나되는 이치를 터득하면 하늘에서 받은 생명까지도 자유롭게 연장할 수 있다는 뜻으로 쓰였다. - 22, 23쪽

뇌를 젊게 만드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뇌를 잘 속이기만 하면 된다. - 26쪽

삶에 대한 목표나 비전은 삶을 건강하고 활기차게 만든다. 비전이 없는 삶이 편안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아무런 꿈이나 목표가 없을 때 삶은 무감각해지고 무질서해진다. 변화가 없는 삶, 타성에 젖은 삶, 도전하지 않는 삶은 뇌를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 37쪽

먼저 `감정은 내가 아니라 내 것`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감정이 `내 것`이면 내가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이 나`라고 하면 평생 감정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 - 41쪽

생각은 절대 생각을 이길 수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잡생각으로 에너지를 소모해서는 안 된다. 제멋대로 떠오르는 생각은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관조함으로써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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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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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는 사회적으로 <채식주의자>의 한 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스컴에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해 이 책의 수상에 대해 다루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이 책에 푹 빠져 지냈다. 내 기억으로 <파이 이야기>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또한 맨 부커상 수상작이었던 것 같은데, 이 책들을 만족스럽게 읽었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채식주의자>에 대한 기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책을 읽고자 하는 동기는 부족했다. 한강의 책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을 e북으로 사 놓은지는 꽤 되었지만, 맛있는 간식을 아껴놓는 심정이랄까? 꼭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한 책들을 웬만하면 급하게 바로 펼쳐보지 않는 이상한 습성 때문에 <채식주의자> 또한 e북 창고에 잘 저장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유일한 절친이라 할 수 있는 그가 '좋다'는 평가를 하였기에 읽던 책을 덮어 두고 <채식주의자>를 펴보게 되었다. 어찌보면 내게는 맨 부커상보다는 친구의 평이 더 신뢰가 가는 지도 모른다. 그처럼 나도 단 하루만에 단숨에 빨려들어 읽은 걸 보면, "나직한 목소리지만 숨 막힐 듯한 흡인력이 돋보이는"이라는 수식어는 이 책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한 말이다. 

 

이 책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라는 각각의 단편을 합한 것이다. 이 3편의 단편들은 모두 '채식주의자'인 영혜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다. 각각이 단편이면서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녔음에도 3편이 합쳐져 또 다른 이야기의 배경과 흐름, 총괄적 완결성을 주는 구성은 자못 신선하다.


평범함과 무난함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남들과 '다른' 혹은 '구별되는' 채식주의자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무리와 집단 내 다수와 같지 않다는 이질감은 끝끝내 다수의 불편함이 되어 그를 둘러싼 주변인들까지도 영혜(채식주의자)와 유사하게 낯선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고통(?)을 안긴다. 이런 낯섦에 반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불편함과 고통을 쉽게 극복해 낼 수 있는 주변인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당연하게도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은 모두 그녀가 택한 방식을 바꾸려고 한다. 그래서 고기를 먹으라 하고, 억지로 먹이려 하고, 심지어 뺨을 때리기 까지 한다. 남의 살을 먹는다는 '육식'이 잘 숨겨왔던 불편함, 포장된 진열대 위의 고기가 주지 못하는 폭력성이 비로소 행위적인 강압과 폭력으로 현실화 되는 순간이다.   


불필요한 폭력으로 타인의 죽음을 섭취하며 살아가지 않으려는 채식주의자는 식물이 되고자 했나보다. 형부에 의해 그녀의 몸에 그려진 줄기와 화려한 잎사귀들은 아예 그녀에게 각인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몽고반점이라는, 어린 애의 티를 벗은 어른들이면 갖고 있지 않은, 상징은 어찌보면 영혜에게 아직 남아 있는 인간 본연의 순수함이었을 것이다. 모두들 그것을 잃어버렸지만, 누구도 상실감을 느끼지 않은 채 살아가는... 그러나 예술가인 형부는 몽고반점을 통해 그녀의 '무엇'을 발견한다. 그것은 처제라는 여자의 몸에 대한 욕망이기도 하지만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작품(바디페인팅을 통한 비디오 아트)의 완결이자, 그가 읽어낸 '식물의 욕망'이었을테다.


영혜는 자신이 이제 곧 나무가 될 거라며 식음을 전폐한다. 동물로서 살아가는 것을 그만두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언니를 비롯한 병원 의료진은 그녀를 살리려 하고, 살리기 위해 먹이려 한다. 이번에도 고기를 먹이려는 1부의 장면과 동일한 폭력이 자행된다. 읽을 수록 가슴이 답답해지는 생명의 존중으로 치장된 이들의 생명연장 노력 앞에서, 내가 과연 타인의 삶을 어느 정도까지 관여할 수 있는지를 되묻게 된다. 그러면 그것은 과연 누구의 인생인가?


내게 채식주의자는 단순히 육식을 하지 않는 한 여자의 에피소드로 읽히지 않았다. 내가 읽은 <채식주의자>는 삶의 다른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굳은 관념들과 냉담한 시선, 실제 '그녀'가 느끼는 불편함이 아니라 자신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이겨내지 못하는 이기심, 그리고 관용을 잃은 폭력과 그 폭력에 물들어 있음에도 자각하지 못하는 이들로 구성된 이 사회에 대한 자화상이었다. 순수는 추구될 수 없다. 그것은 내재되어 있을 뿐이니. 그런데 우리는 그 몽고반점을 잃어버린 것조차 알지 못한 채 당연한 육식주의자로 살아간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 49쪽

그녀가 살았으면 하고 그는 바랐지만, 동시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그는 의문했다.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버리려 했던 순간은 인생의 코너 같은 거였을 것이다. 아무도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강제로 고기를 먹이는 부모, 그것을 방관한 남편이나 형제자매까지도-철저한 타인, 혹은 적이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가 다시 깨어난다 한들 그 상황이 변해 있을 리는 없다. 이번의 시도는 충동적이었지만 그녀는 다시 시도할 수도 있따. 그때에는 좀더 주도면밀하게 모든 것을 진행해, 이렇게 방해받는 일 따위는 없을 수도 있다. 문득 그는 차라리 그녀가 깨어나지 않길 바라고 있다는 것을, 다시 깨어난다는 상황이 오히려 막연하고 지긋지긋해, 눈을 뜬 그녀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 90, 91쪽

아이를 통해 연결된, 군더디기없는, 일종의 동업자의 관계가 이즈음 아내와 그의 관계였다. - 110쪽

그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제 동서라고 부를 필요도 없게 된 그녀의 옛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가치 외의 어떤 것도 믿지 않는 듯 건조한 얼굴, 상투적이지 않은 어떤 말도 뱉어본 적 없을 속된 입술이 그녀의 몸을 탐했을 거란 상상만으로도 그는 일종의 수치를 느꼈다. 둔감한 그는 그녀의 몽고반점을 알기나 했을까. 알몸의 두 사람을 상상한 순간, 그것은 모욕이라고, 더럽힘이라고, 폭력이라고 그는 느꼈다. - 117쪽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렀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 212쪽

그 순간 그녀는 뜻밖의 고통을 느꼈다. 살아야 할 시간이 다시 기한 없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한달 동안 염려했던 큰병의 가능성은 오히려 사소한 번민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 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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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여행 2016-05-25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보다 서평이 더 좋네요.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글에 관해 이렇게 깊게 생각해보고 토론해보고 기록까지 한다는 것을 알면 그 작가도 한 없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읽고 싶은 소설이 많지 않던 요즘에 참 인상적인 책이었습니다. 이 서평으로 다시 한번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붉은눈 2016-05-26 23:35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에 과찬을 해주셔서 부끄럽습니다. 그냥 제가 생각한 관점인데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제가 감사합니다.

희망여행 2016-05-25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평에 감동 받는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cyrus 2016-05-25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한국소설을 잘 안 읽는 편인데, 정말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은 한국소설이 <채식주의자>였습니다. ^^

붉은눈 2016-05-26 23:38   좋아요 0 | URL
앗, cyrus님이 잘 안 읽으시는 분야도 있군요. ^^
저도 한동안 먹을 수 없었던 좋아하는 음식을 허겁지겁 먹듯 읽은 소설이었습니다.

가람과 뫼 2016-05-26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을 다 읽을 때까지도 무슨 뜻인지 작가의 의도를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이 서평을 읽고난 후 이 책의 출판의도를 알 것 같읍니다. 물론 읽는 사람마다 각자 느끼는 바가 다르긴 하겠지만 말이죠. 좋은 서평 감사드립니다.

붉은눈 2016-05-27 01:19   좋아요 0 | URL
작가는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까, 제가 나름대로 더듬거리며 읽어낸 작품의 뜻은 이 정도 밖에 안됩니다.
또 다른 분들이 새로운 관점이나 더 깊은 뜻을 읽어내셨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게 무척 궁금하기도 합니다.
부족한 글인데도 좋게 봐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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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하루키만큼 많은 화제와 논란과 선호를 갖고 있는 소설가가 또 어디 있을까? 발간 당시 대학가를 휩쓴 <상실의 시대>는 지금까지도 스테디 셀러로 남아 있고, 몇 해전에 나온 <1Q84>는 팬덤을 형성했을 정도로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이후 발간된 <색체가 없는 다자키 스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여자 없는 남자들>도 꾸준한 사랑받고 있는 걸 보면, 그가 한국 소설계에서 갖는 힘은 실로 막대하다.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바(bar), LP, 비틀즈의 음악, 재즈, 칼스버그 맥주, 온 더 락 위스키 등은 하나의 유행이 되었던 적이 있었고(심지어 야나체크까지도), 그의 소설에서 나타난 모호한 상징(태엽감는 새), 독특한 비유(봄날의 곰), 설명이 없는 불친절한 결말(<1Q84>의 난쟁이들은 도대체 뭐냐고)은 계속되는 이슈를 낳았다. 게다가 숱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소설가인 그에 대한 궁금증은 결코 시들지 않고 있다.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핫'한 소설가임은 틀림 없다.


베일에 쌓여 있는 그가 소설가에 대해 말한다. 그가 진구 구장에서 야구를 보다가 소설가가 되어야 겠다고 결심한 에피소드나 매일 규칙적으로 일정 분량의 글을 쓴다는 것, 체력 관리를 위해 마라톤을 한다는 것은 이전에 그가 한 인터뷰나 <작가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이미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기는 해도, 이런 그의 생각과 습관이 그가 소설가를 업(業)으로 삼고 있는 것에는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인지를 그에게 직접 듣는다는 유혹을 뿌리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소설이라는 진입이 쉬운 장르에서 한번 반짝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십년 간을 소설가라는 직업으로 버텨올 수 있었던 특별함, 전업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개인사, <군조> 신인상에 대한 에피소드, 그와 아쿠타가와상을 둘러싼 풍문에 대한 생각, 문학상 심사를 맡지 않는 이유, 오리지널리티를 갖추기 위한 요건, 소설가가 되기 위한 약간의 팁(소설가로서 무엇을 쓰고, 어떻게 쓰고, 누구를 위해 쓰고, 독자의 범주를 어떻게 넓혀 갔는지)까지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했던 독서는 읽는 동안 글쓰기에 대한 대작가의 생각을 듣는 기쁨으로 변했다.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깎아내는 방법으로서의 소설 영작, 많은 독서, 글쓰기 외의 다른 일에 대한 정리, 슬럼프 없는 글쓰기, 200자 원고지 20매 라는 꾸준하고 규칙적인 집필활동, 퇴고와 양생 그리고 퇴고, 충분한 시간의 확보와 같이 글을 쓰기 위한 세세한 경험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실제 경험이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글쓰기에 대한 팁'과 같이 기술적인 것을 강조한 것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하루키라는 작가가 소설이라는 것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어떻게 누구를 위하여 글을 쓰고 무엇을 전달하려 하는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그의 개인적 삶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집필한 것이다. 그가 표현한 대로 '한없이 개인적이고 피지컬한 업(業)'으로서 말이다.

즉 소설이라는 장르는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 같은 것입니다. 로프는 틈새가 넓고 편리한 발판도 준비되었습니다. 링도 상당히 널찍합니다. 참여를 저지하고자 대기하는 경비원도 없고 심판도 그리 빡빡하게 굴지 않습니다. 현역 레슬링 선수도-즉 이 경우는 소설가에 해당하는데-그런 쪽으로는 애초에 어느 정도 포기해버린 상태라서 `좋아요, 누가라도 다올라오십쇼`라는 기풍(氣風)이 있습니다. 개방적이라고 할까, 손쉽다고 할까, 융통성이 있다고 할까, 한마디로 상당히 `대충대충`입니다. - 16쪽

하지만 링에 오르기는 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습니다. 소설가는 물론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소설 한두 편을 써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 이건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은 일단 못할 짓, 이라고 말해버려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거기에는 뭐랄까, `어떤 특별한 것`이 점점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나름의 재능은 물론 필요하고 그만그만한 기개도 필요합니다. 또한 인생의 다른 다양한 일들과 마찬가지로 운이나 인연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어떤 종류의 `자격` 같은 것이 요구됩니다. 이건 갖춰진 사람에게는 갖춰져 있고, 갖춰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런 것이 갖춰진 사람도 있는가 하면 후천적으로 고생고생 해가며 습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16, 17쪽

맨 처음의 테마를 그대로 척척 명확히, 지적으로 언어화할 수 있다면 ‘이를테면’이라는 치환 작업은 전혀 필요 없으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설가란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바로 그런 불필요한 면, 멀리 에둘러 가는 점에 진실, 진리가 가득 잠재되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어쩐지 강변(强辯)을 늘어놓는 것 같지만 소설가는 대체로 그렇게 믿고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소설 따위는 없어도 상관없다’라는 의견이 있어도 당연한 것이고, 그와 동시에 ‘이 세상에는 반드시 소설이 필요하다’라는 의견도 당연합니다. 그건 각자 염두에 둔 시간의 스팬(span)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의 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효율성 떨어지는 우회하기와 효율성 뛰어난 기민함이 앞면과 뒷면이 되어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중층적으로 성립합니다. 그중 어느 쪽이 빠져도(혹은 압도적인 열세여도) 세계는 필시 일그러진 것이 되고 맙니다. - 23, 24쪽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아고타 크리스토프라는 작가가 그 비슷한 효과의 문체를 사용해 몇 편의 뛰어난 소설을 썼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헝가리 사람인데 1956년의 헝가리 혁명 때 스위스로 망명해 거기서 반쯤은 어쩔 수 없이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헝가리어로 소설을 써서는 도저히 먹고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어는 그녀에게는 후천적으로 학습한(학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외국어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외국어를 창작에 채용하는 것을 통해 그녀만의 새로운 문체를 고안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짧은 문장을 조합하는 리듬감, 번거롭게 배배 꼬지 않는 솔직한 말투, 자신의 감정이 담기지 않은 적확한 묘사, 그러면서도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일부러 쓰지 않고 깊숙이 감춰둔 듯한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 한참 나중에야 그녀의 소설을 처음으로 읽어보고 거기서 뭔가 그리움 같은 것을 느꼈던 게 또렷이 기억납니다. - 50, 51쪽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문학상의 심사위원을 맡은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부탁받은 적도 없지는 않지만, 그때마다 "죄송하지만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해왔습니다. 문학상 심사위원을 맡을 자격이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유는 간단한데, 나는 너무도 개인적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인간 속에는 나 자신의 고유한 비전이 있고 거기에 형태를 부여해나가는 고유한 프로세스가 있습니다. 그 프로세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포괄적인 삶의 방식에서부터 개인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글을 쓸수 없는 것입니다. - 78, 79쪽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척도이기 때문에 나한테는 맞아도 그대로 다른 작가에게도 맞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방식 이외의 모든 방식을 배제한다’는 건 결코 아니지만(내 방식과는 다르더라도 경의를 품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세상에 수없이 많습니다), 개중에는 ‘이건 도저히 나와 맞지 않는다’ 혹은 ‘이건 이해할 수 없다’라는 것도 있습니다. 어떻든 나는 나 자신이라는 축에 의해서 뭔가를 바라보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게 말하면 개인주의지만 다른 말로 하면 자기 본위고 내 멋대로겠지요. 그래서 내가 그런 내 멋대로의 축이나 척도를 들고 거기에 맞춰 타인의 작품을 평가했다가는 그걸 당하는 쪽은 도저히 못 견딜 일이 될 거라는 마음이 듭니다. 이미 작가로서의 지위가 어느 정도 정착된 사람이라면 또 모르지만, 이제 막 나온 신인 작가의 명운을 나만의 선입견이 걸린 세계관으로 좌지우지하는 그런 일은 무서워서 도저히 못 합니다. - 79쪽

그처럼 과거에 ‘오리지널이었던’ 것을 콕 집어내 현재의 시점에서 분석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라질 것은 이미 사라져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뒤에 남은 것만 집어내 마음 놓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실제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시대적으로 존재하는 오리지널한 표현 형태에 감응하고 그것을 현재진행형으로 정당하게 평가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시대 사람들의 눈에는 불쾌하고 부자연스럽고 비상식적인-경우에 따라서는 반사회적인-양상을 띤 것처럼 보이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은 그저 단순히 어리석은 것으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어떤 경우든 그것은 종종 경악과 동시에 쇼크와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본능적으로 혐오하고, 특히 기성의 표현 형태에 푹 잠겨 그 속에서 지반을 구축해온 기성 권력(establishment)에게는 타기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들이 다져둔 지반을 그것이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94, 95쪽

내 생각에는 이렇다는 얘기입니다만, 특정한 표현자를 ‘오리지널’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건이 채워져야 합니다.
(1) 다른 표현자와는 명백히 다른 독자적 스타일(사운드든 문체든 형식(form)이든 색채든)을 갖고 있다. 잠깐 보면(들으면) 그 사람의 표현이라고 (대체적으로)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2) 그 스타일을 스스로의 힘으로 버전 업 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의 경과와 함께 그 스타일은 성장해간다. 언제까지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그런 자발적 내재적인 자기 혁신력을 갖고 있다.
(3) 그 독자적인 스타일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일반화하고 사람들의 정신에 흡수되어 가치판단 기준의 일부로 편입되어야 한다. 혹은 다음 세대의 표현자의 풍부한 인용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 97, 98쪽

내가 작가로 등단한 게 1979년인데, 그 무렵에도 아직 그런 좌표축은 문학계에서 상당히 견고하게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즉 시스템의 ‘관례’는 여전히 힘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건 전례가 없다’ ‘그게 관례다’라는 식의 말을 편집자에게서 자주 들었습니다. 나는 작가란 제약 따위 없이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직업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왜 이러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원래는 분쟁이나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정말입니다) 그런 ‘관례’ ‘문학계의 불문율’을 거스르겠다는 식의 의식은 딱히 없었습니다. 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라서 어렵사리 이렇게 (일단은) 소설가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니까,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나가자고 처음부터 마음을 정했습니다. 시스템은 시스템대로 해나가면 될 것이고 내 쪽은 내 쪽대로 해나가면 된다. - 104, 105쪽

나는 1960년대 말의 이른바 ‘반란의 시대’를 뚫고 나온 세대의 사람이라서 ‘체제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의식은 나름대로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라고 할까, 그보다는 우선, 그래도 명색이 표현자의 말단으로서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내게 맞는 스케줄에 따라 내가 원하는 대로 쓰고 싶다. 그것이 작가인 내가 가져야 할 최저한의 자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그 개략은 처음부터 상당히 확실했습니다. ‘아직은 잘 쓰지 못하지만 나중에 실력이 붙기 시작하면 사실은 이러저러한 소설을 쓰고 싶다’라는, 합당한 내 모습이 머릿속에 있었습니다. 그 이미지가 항상 하늘 한복판에 북극성처럼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그냥 머리 위를 올려다보면 됩니다. 그러면 나 자신의 지금 서 있는 위치며 나아가야 할 방향이 잘 보였습니다. 만일 그런 정점(定點)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곳곳에서 상당히 헤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104, 105쪽

그런 나 자신의 체험에 따라 생각한 것인데, 자신만의 오리지널 문체나 화법을 발견하는 데는 우선 출발점으로서 ‘나에게 무엇을 플러스해간다’는 것보다 오히려 ‘나에게서 무언가를 마이너스 해간다’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 105쪽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얘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힘이 없는 문장은 사람을-혹은 자기 자신까지도-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롭습니다. 손바닥을 펼쳐 그 나비를 자유롭게 날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문장도 쭉쭉 커나갑니다. 생각해보면, 굳이 자기표현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보통으로, 당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뭔가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자연스러운 문맥 속에서 우리는 의외로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 110, 111쪽

나는 삼십오 년 동안 계속해서 소설을 써왔지만 영어에서 말하는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 즉 소설이 써지지 않는 슬럼프 기간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쓰고 싶은데 써지지 않는 경험은 한 번도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재능이 넘친다’는 식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럴 리는 없고요, 실은 매우 단순한 얘기인데, 내 경우에는 소설을 쓰고 싶지 않을 때, 혹은 쓰고 싶은 마음이 퐁퐁 샘솟지 않을 때는 전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쓰고 싶을 때만 ‘자, 써보자’라고 마음먹고 소설을 씁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대개는 번역(영어->일본어)을 합니다. 번역은 기본적으로 기술적인 작업이라서 표현 의욕과는 관계없이 거의 일상적으로 할 수 있고 동시에 글쓰기에 아주 좋은 공부가 됩니다(만일 번역을 하지 않았다면 뭔가 그런 쪽의 다른 작업을 찾아냈을 겁니다). - 111쪽

아무래도 나는 그런 유형인 것 같습니다. 물론 두뇌 회전이 그리 빠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겠지만(상당히 많음), 어느 시점에 조급하게 결론을 내렸는데 나중에 보니 그때 내렸던 결론이 올바르지 않은(혹은 부정확한, 불충분한) 것으로 판명되는 씁쓸한 경험을 지금까지 수없이 되풀이했기 때문입니다. 그 바람에 몹시 창피하거나 식은땀을 흘리거나 쓸데없이 멀리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의 결론을 즉각 내리지 않도록 하자’ ‘가능한 한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라는 습관이 서서히 내 안에 형성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건 타고난 성향이라기보다 오히려 후천적으로, 경험적으로 따끔한 일을 겪어가며 몸에 밴 습관입니다. - 120, 121쪽

그래서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에 대해 즉각 어떤 결론을 내리는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내가 목격한 광경을, 만난 사람들을, 혹은 경험한 사상(事象)을 어디까지나 하나의 ‘사례’로서, 말하자면 표본으로서,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형태로 기억에 담아두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것에 대해 나중에 좀 더 마음이 침착해졌을 때, 시간 여유가 있을 때, 다양한 방향에서 들여다보고 주의 깊게 검증하고 필요에 따라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경험을 통해 말씀드리자면, 결론을 내릴 필요에 몰릴 만한 일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결론이라는 것을 사실은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신문 가사를 읽거나 텔레비전 뉴스를 볼 때마다 나로서는 ‘저렇게 자꾸자꾸 결론만 내려놓고 대체 어쩌려는 거지?’하고 고개를 갸윳거리게 됩니다. - 120, 121쪽

제임스 조이스는 ‘상상력(imagination)이란 기억이다’라고 실로 간결하게 정의했습니다.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임스 조이스, 완전 정답입니다. 상상력이란 그야말로 맥락 없는 단편적인 기억의 조합(combination)을 말합니다. 단어의 의미상으로는 좀 모순된 표현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유효하게 조합된 맥락 없는 기억’은 그 자체의 직관을 갖고 예견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스토리의 올바른 동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125, 126쪽

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 맥(Mac) 화면으로 말하자면 대략 두 화면 반이지만, 옛날부터의 습관으로 200자 원고지로 계산합니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잘 안된다 싶어도 어떻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씁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쓸 수 있을 때는 그 기세를 몰아 많이 써버린다, 써지지 않을 때는 쉰다, 라는 것으로는 규칙성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임카드를 찍듯이 하루에 거의 정확하게 20매를 씁니다. - 150쪽

이사크 디네센은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매일매일 20매의 원고를 씁니다. 아주 담담하게. ‘희망도 절망도 없다’는 것은 실로 훌륭한 표현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네 시간이나 다섯 시간, 책상을 마주합니다. 하루에 20매의 원고를 쓰면 한 달에 600매를 쓸 수 있습니다. 단순 계산하면 반년에 3,600매를 쓰게 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해변의 카프카>라는 작품의 초고가 3,600매였습니다. - 151쪽

그녀의 비평에는 ‘아닌 게 아니라 그렇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고 수긍이 가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수긍하기까지 며칠씩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또한 ‘아니, 그렇지 않아. 내 생각이 옳아’라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 삼자 도입’ 과정에서 내게는 한 가지 개인적인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트집 잡힌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어찌 됐건 고친다’는 것입니다. 비판을 수긍할 수 없더라도 어쨌든 지적받은 부분이 있으면 그곳을 처음부터 다시 고쳐 씁니다. 지적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에는 상대의 조언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고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방향성이야 어찌 됐든,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그 부분을 고쳐 쓴 다음에 원고를 재차 읽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전보다 좋아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생각건대, 읽은 사람이 어떤 부분에 대해 지적할 때, 지적의 방향성은 어찌 됐건, 거기에는 뭔가 문제가 내포된 경우가 많습니다. 즉 그 부분에서 소설의 흐름이 많든 적든 턱턱 걸린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은 그 걸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제거하느냐는 작가 스스로 결정하면 됩니다. - 157

물론 타인의 의견을 모두 다 덥석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개중에는 잘못짚은 의견, 부당한 의견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의견이든 그것이 제정신에서 나온 것이라면 거기에는 뭔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견은 당신의 머리를 조금씩 냉각시켜 적절한 온도로 이끌어줍니다. 그들의 의견이란 즉 세상 사람들의 의견이고, 당신의 책을 읽는 건 결국 세상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신이 세상 사람들을 무시하려고 한다면 아마도 세상 사람들도 똑같이 당신을 무시할 것입니다. - 162, 163쪽

그래서 나는 내 작품이 간행되고 그것이 설령 혹독한-생각도 못할 만큼 혹독한-비판을 받는다고 해도 ‘뭐, 어쩔 수 없지’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할 만큼은 했다’는 실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전 작업에도 양생에도 진득하게 시간을 들였고, 망치질에도 충분히 시간을 들였다는. 그래서 아무리 혹독한 비판을 받아도 그것 때문에 위축되거나 자신감을 잃는 일은 일단 없습니다. 물론 약간 불쾌해지는 정도의 일은 가끔 있지만,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시간에 의해 쟁취해낸 것은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면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확신이 내 안에 없었다면 아무리 베짱 좋고 태평한 나라도 어쩌면 침울해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똑 부러지게 했다’는 확실한 실감만 있으면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습니다. 그다음은 시간의 손에 맡기면 됩니다. 시간을 소중하게, 신중하게,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것은 곧 시간을 내편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성을 대할 때와 똑같은 일이지요. - 167,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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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5-19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출판사 서평에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는 책”이라고 소개했어요. 아무리 소설을 쓰고 싶어도 하루키처럼 따라하지 못할 것 같아요.

붉은눈 2016-05-19 17:00   좋아요 0 | URL
출판사의 실제 의도도 그러했군요. 몰랐습니다. 이 책도 책이지만 어제 cyrus님의 서평을 읽으니 하루키가 더 대단해 보였습니다.

희망여행 2016-05-22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도 개인적인 작가가 쓰는 글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매혹되는 이유는 누구나 개인주의적인 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개인적 성향을 편히 드러낼 수 있는 환경인지 아닌지의 차이일뿐..
서평이 너무 자세하고 좋아서 책을 다 읽은 것 같네요.

붉은눈 2016-05-25 11:31   좋아요 0 | URL
그의 반향처럼 어쩌면 그의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개인주의적인 삶을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서평이랄 것도 없는 부족한 글을 칭찬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루키는 뭔가 특정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작가이죠. 그를 기점으로 많은 이들이 그를 흉내내기는 해도, 그와 같은 작가를 또 만나기란 당분간은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희망여행 2016-05-22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곧 읽을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