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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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하루키만큼 많은 화제와 논란과 선호를 갖고 있는 소설가가 또 어디 있을까? 발간 당시 대학가를 휩쓴 <상실의 시대>는 지금까지도 스테디 셀러로 남아 있고, 몇 해전에 나온 <1Q84>는 팬덤을 형성했을 정도로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이후 발간된 <색체가 없는 다자키 스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여자 없는 남자들>도 꾸준한 사랑받고 있는 걸 보면, 그가 한국 소설계에서 갖는 힘은 실로 막대하다.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바(bar), LP, 비틀즈의 음악, 재즈, 칼스버그 맥주, 온 더 락 위스키 등은 하나의 유행이 되었던 적이 있었고(심지어 야나체크까지도), 그의 소설에서 나타난 모호한 상징(태엽감는 새), 독특한 비유(봄날의 곰), 설명이 없는 불친절한 결말(<1Q84>의 난쟁이들은 도대체 뭐냐고)은 계속되는 이슈를 낳았다. 게다가 숱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소설가인 그에 대한 궁금증은 결코 시들지 않고 있다.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핫'한 소설가임은 틀림 없다.


베일에 쌓여 있는 그가 소설가에 대해 말한다. 그가 진구 구장에서 야구를 보다가 소설가가 되어야 겠다고 결심한 에피소드나 매일 규칙적으로 일정 분량의 글을 쓴다는 것, 체력 관리를 위해 마라톤을 한다는 것은 이전에 그가 한 인터뷰나 <작가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이미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기는 해도, 이런 그의 생각과 습관이 그가 소설가를 업(業)으로 삼고 있는 것에는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인지를 그에게 직접 듣는다는 유혹을 뿌리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소설이라는 진입이 쉬운 장르에서 한번 반짝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십년 간을 소설가라는 직업으로 버텨올 수 있었던 특별함, 전업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개인사, <군조> 신인상에 대한 에피소드, 그와 아쿠타가와상을 둘러싼 풍문에 대한 생각, 문학상 심사를 맡지 않는 이유, 오리지널리티를 갖추기 위한 요건, 소설가가 되기 위한 약간의 팁(소설가로서 무엇을 쓰고, 어떻게 쓰고, 누구를 위해 쓰고, 독자의 범주를 어떻게 넓혀 갔는지)까지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했던 독서는 읽는 동안 글쓰기에 대한 대작가의 생각을 듣는 기쁨으로 변했다.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깎아내는 방법으로서의 소설 영작, 많은 독서, 글쓰기 외의 다른 일에 대한 정리, 슬럼프 없는 글쓰기, 200자 원고지 20매 라는 꾸준하고 규칙적인 집필활동, 퇴고와 양생 그리고 퇴고, 충분한 시간의 확보와 같이 글을 쓰기 위한 세세한 경험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실제 경험이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글쓰기에 대한 팁'과 같이 기술적인 것을 강조한 것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하루키라는 작가가 소설이라는 것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어떻게 누구를 위하여 글을 쓰고 무엇을 전달하려 하는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그의 개인적 삶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집필한 것이다. 그가 표현한 대로 '한없이 개인적이고 피지컬한 업(業)'으로서 말이다.

즉 소설이라는 장르는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 같은 것입니다. 로프는 틈새가 넓고 편리한 발판도 준비되었습니다. 링도 상당히 널찍합니다. 참여를 저지하고자 대기하는 경비원도 없고 심판도 그리 빡빡하게 굴지 않습니다. 현역 레슬링 선수도-즉 이 경우는 소설가에 해당하는데-그런 쪽으로는 애초에 어느 정도 포기해버린 상태라서 `좋아요, 누가라도 다올라오십쇼`라는 기풍(氣風)이 있습니다. 개방적이라고 할까, 손쉽다고 할까, 융통성이 있다고 할까, 한마디로 상당히 `대충대충`입니다. - 16쪽

하지만 링에 오르기는 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습니다. 소설가는 물론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소설 한두 편을 써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 이건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은 일단 못할 짓, 이라고 말해버려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거기에는 뭐랄까, `어떤 특별한 것`이 점점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나름의 재능은 물론 필요하고 그만그만한 기개도 필요합니다. 또한 인생의 다른 다양한 일들과 마찬가지로 운이나 인연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어떤 종류의 `자격` 같은 것이 요구됩니다. 이건 갖춰진 사람에게는 갖춰져 있고, 갖춰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런 것이 갖춰진 사람도 있는가 하면 후천적으로 고생고생 해가며 습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16, 17쪽

맨 처음의 테마를 그대로 척척 명확히, 지적으로 언어화할 수 있다면 ‘이를테면’이라는 치환 작업은 전혀 필요 없으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설가란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바로 그런 불필요한 면, 멀리 에둘러 가는 점에 진실, 진리가 가득 잠재되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어쩐지 강변(强辯)을 늘어놓는 것 같지만 소설가는 대체로 그렇게 믿고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소설 따위는 없어도 상관없다’라는 의견이 있어도 당연한 것이고, 그와 동시에 ‘이 세상에는 반드시 소설이 필요하다’라는 의견도 당연합니다. 그건 각자 염두에 둔 시간의 스팬(span)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의 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효율성 떨어지는 우회하기와 효율성 뛰어난 기민함이 앞면과 뒷면이 되어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중층적으로 성립합니다. 그중 어느 쪽이 빠져도(혹은 압도적인 열세여도) 세계는 필시 일그러진 것이 되고 맙니다. - 23, 24쪽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아고타 크리스토프라는 작가가 그 비슷한 효과의 문체를 사용해 몇 편의 뛰어난 소설을 썼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헝가리 사람인데 1956년의 헝가리 혁명 때 스위스로 망명해 거기서 반쯤은 어쩔 수 없이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헝가리어로 소설을 써서는 도저히 먹고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어는 그녀에게는 후천적으로 학습한(학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외국어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외국어를 창작에 채용하는 것을 통해 그녀만의 새로운 문체를 고안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짧은 문장을 조합하는 리듬감, 번거롭게 배배 꼬지 않는 솔직한 말투, 자신의 감정이 담기지 않은 적확한 묘사, 그러면서도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일부러 쓰지 않고 깊숙이 감춰둔 듯한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 한참 나중에야 그녀의 소설을 처음으로 읽어보고 거기서 뭔가 그리움 같은 것을 느꼈던 게 또렷이 기억납니다. - 50, 51쪽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문학상의 심사위원을 맡은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부탁받은 적도 없지는 않지만, 그때마다 "죄송하지만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해왔습니다. 문학상 심사위원을 맡을 자격이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유는 간단한데, 나는 너무도 개인적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인간 속에는 나 자신의 고유한 비전이 있고 거기에 형태를 부여해나가는 고유한 프로세스가 있습니다. 그 프로세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포괄적인 삶의 방식에서부터 개인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글을 쓸수 없는 것입니다. - 78, 79쪽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척도이기 때문에 나한테는 맞아도 그대로 다른 작가에게도 맞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방식 이외의 모든 방식을 배제한다’는 건 결코 아니지만(내 방식과는 다르더라도 경의를 품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세상에 수없이 많습니다), 개중에는 ‘이건 도저히 나와 맞지 않는다’ 혹은 ‘이건 이해할 수 없다’라는 것도 있습니다. 어떻든 나는 나 자신이라는 축에 의해서 뭔가를 바라보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게 말하면 개인주의지만 다른 말로 하면 자기 본위고 내 멋대로겠지요. 그래서 내가 그런 내 멋대로의 축이나 척도를 들고 거기에 맞춰 타인의 작품을 평가했다가는 그걸 당하는 쪽은 도저히 못 견딜 일이 될 거라는 마음이 듭니다. 이미 작가로서의 지위가 어느 정도 정착된 사람이라면 또 모르지만, 이제 막 나온 신인 작가의 명운을 나만의 선입견이 걸린 세계관으로 좌지우지하는 그런 일은 무서워서 도저히 못 합니다. - 79쪽

그처럼 과거에 ‘오리지널이었던’ 것을 콕 집어내 현재의 시점에서 분석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라질 것은 이미 사라져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뒤에 남은 것만 집어내 마음 놓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실제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시대적으로 존재하는 오리지널한 표현 형태에 감응하고 그것을 현재진행형으로 정당하게 평가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시대 사람들의 눈에는 불쾌하고 부자연스럽고 비상식적인-경우에 따라서는 반사회적인-양상을 띤 것처럼 보이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은 그저 단순히 어리석은 것으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어떤 경우든 그것은 종종 경악과 동시에 쇼크와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본능적으로 혐오하고, 특히 기성의 표현 형태에 푹 잠겨 그 속에서 지반을 구축해온 기성 권력(establishment)에게는 타기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들이 다져둔 지반을 그것이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94, 95쪽

내 생각에는 이렇다는 얘기입니다만, 특정한 표현자를 ‘오리지널’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건이 채워져야 합니다.
(1) 다른 표현자와는 명백히 다른 독자적 스타일(사운드든 문체든 형식(form)이든 색채든)을 갖고 있다. 잠깐 보면(들으면) 그 사람의 표현이라고 (대체적으로)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2) 그 스타일을 스스로의 힘으로 버전 업 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의 경과와 함께 그 스타일은 성장해간다. 언제까지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그런 자발적 내재적인 자기 혁신력을 갖고 있다.
(3) 그 독자적인 스타일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일반화하고 사람들의 정신에 흡수되어 가치판단 기준의 일부로 편입되어야 한다. 혹은 다음 세대의 표현자의 풍부한 인용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 97, 98쪽

내가 작가로 등단한 게 1979년인데, 그 무렵에도 아직 그런 좌표축은 문학계에서 상당히 견고하게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즉 시스템의 ‘관례’는 여전히 힘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건 전례가 없다’ ‘그게 관례다’라는 식의 말을 편집자에게서 자주 들었습니다. 나는 작가란 제약 따위 없이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직업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왜 이러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원래는 분쟁이나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정말입니다) 그런 ‘관례’ ‘문학계의 불문율’을 거스르겠다는 식의 의식은 딱히 없었습니다. 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라서 어렵사리 이렇게 (일단은) 소설가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니까,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나가자고 처음부터 마음을 정했습니다. 시스템은 시스템대로 해나가면 될 것이고 내 쪽은 내 쪽대로 해나가면 된다. - 104, 105쪽

나는 1960년대 말의 이른바 ‘반란의 시대’를 뚫고 나온 세대의 사람이라서 ‘체제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의식은 나름대로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라고 할까, 그보다는 우선, 그래도 명색이 표현자의 말단으로서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내게 맞는 스케줄에 따라 내가 원하는 대로 쓰고 싶다. 그것이 작가인 내가 가져야 할 최저한의 자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그 개략은 처음부터 상당히 확실했습니다. ‘아직은 잘 쓰지 못하지만 나중에 실력이 붙기 시작하면 사실은 이러저러한 소설을 쓰고 싶다’라는, 합당한 내 모습이 머릿속에 있었습니다. 그 이미지가 항상 하늘 한복판에 북극성처럼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그냥 머리 위를 올려다보면 됩니다. 그러면 나 자신의 지금 서 있는 위치며 나아가야 할 방향이 잘 보였습니다. 만일 그런 정점(定點)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곳곳에서 상당히 헤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104, 105쪽

그런 나 자신의 체험에 따라 생각한 것인데, 자신만의 오리지널 문체나 화법을 발견하는 데는 우선 출발점으로서 ‘나에게 무엇을 플러스해간다’는 것보다 오히려 ‘나에게서 무언가를 마이너스 해간다’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 105쪽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얘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힘이 없는 문장은 사람을-혹은 자기 자신까지도-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롭습니다. 손바닥을 펼쳐 그 나비를 자유롭게 날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문장도 쭉쭉 커나갑니다. 생각해보면, 굳이 자기표현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보통으로, 당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뭔가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자연스러운 문맥 속에서 우리는 의외로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 110, 111쪽

나는 삼십오 년 동안 계속해서 소설을 써왔지만 영어에서 말하는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 즉 소설이 써지지 않는 슬럼프 기간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쓰고 싶은데 써지지 않는 경험은 한 번도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재능이 넘친다’는 식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럴 리는 없고요, 실은 매우 단순한 얘기인데, 내 경우에는 소설을 쓰고 싶지 않을 때, 혹은 쓰고 싶은 마음이 퐁퐁 샘솟지 않을 때는 전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쓰고 싶을 때만 ‘자, 써보자’라고 마음먹고 소설을 씁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대개는 번역(영어->일본어)을 합니다. 번역은 기본적으로 기술적인 작업이라서 표현 의욕과는 관계없이 거의 일상적으로 할 수 있고 동시에 글쓰기에 아주 좋은 공부가 됩니다(만일 번역을 하지 않았다면 뭔가 그런 쪽의 다른 작업을 찾아냈을 겁니다). - 111쪽

아무래도 나는 그런 유형인 것 같습니다. 물론 두뇌 회전이 그리 빠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겠지만(상당히 많음), 어느 시점에 조급하게 결론을 내렸는데 나중에 보니 그때 내렸던 결론이 올바르지 않은(혹은 부정확한, 불충분한) 것으로 판명되는 씁쓸한 경험을 지금까지 수없이 되풀이했기 때문입니다. 그 바람에 몹시 창피하거나 식은땀을 흘리거나 쓸데없이 멀리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의 결론을 즉각 내리지 않도록 하자’ ‘가능한 한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라는 습관이 서서히 내 안에 형성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건 타고난 성향이라기보다 오히려 후천적으로, 경험적으로 따끔한 일을 겪어가며 몸에 밴 습관입니다. - 120, 121쪽

그래서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에 대해 즉각 어떤 결론을 내리는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내가 목격한 광경을, 만난 사람들을, 혹은 경험한 사상(事象)을 어디까지나 하나의 ‘사례’로서, 말하자면 표본으로서,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형태로 기억에 담아두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것에 대해 나중에 좀 더 마음이 침착해졌을 때, 시간 여유가 있을 때, 다양한 방향에서 들여다보고 주의 깊게 검증하고 필요에 따라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경험을 통해 말씀드리자면, 결론을 내릴 필요에 몰릴 만한 일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결론이라는 것을 사실은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신문 가사를 읽거나 텔레비전 뉴스를 볼 때마다 나로서는 ‘저렇게 자꾸자꾸 결론만 내려놓고 대체 어쩌려는 거지?’하고 고개를 갸윳거리게 됩니다. - 120, 121쪽

제임스 조이스는 ‘상상력(imagination)이란 기억이다’라고 실로 간결하게 정의했습니다.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임스 조이스, 완전 정답입니다. 상상력이란 그야말로 맥락 없는 단편적인 기억의 조합(combination)을 말합니다. 단어의 의미상으로는 좀 모순된 표현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유효하게 조합된 맥락 없는 기억’은 그 자체의 직관을 갖고 예견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스토리의 올바른 동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125, 126쪽

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 맥(Mac) 화면으로 말하자면 대략 두 화면 반이지만, 옛날부터의 습관으로 200자 원고지로 계산합니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잘 안된다 싶어도 어떻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씁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쓸 수 있을 때는 그 기세를 몰아 많이 써버린다, 써지지 않을 때는 쉰다, 라는 것으로는 규칙성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임카드를 찍듯이 하루에 거의 정확하게 20매를 씁니다. - 150쪽

이사크 디네센은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매일매일 20매의 원고를 씁니다. 아주 담담하게. ‘희망도 절망도 없다’는 것은 실로 훌륭한 표현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네 시간이나 다섯 시간, 책상을 마주합니다. 하루에 20매의 원고를 쓰면 한 달에 600매를 쓸 수 있습니다. 단순 계산하면 반년에 3,600매를 쓰게 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해변의 카프카>라는 작품의 초고가 3,600매였습니다. - 151쪽

그녀의 비평에는 ‘아닌 게 아니라 그렇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고 수긍이 가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수긍하기까지 며칠씩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또한 ‘아니, 그렇지 않아. 내 생각이 옳아’라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 삼자 도입’ 과정에서 내게는 한 가지 개인적인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트집 잡힌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어찌 됐건 고친다’는 것입니다. 비판을 수긍할 수 없더라도 어쨌든 지적받은 부분이 있으면 그곳을 처음부터 다시 고쳐 씁니다. 지적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에는 상대의 조언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고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방향성이야 어찌 됐든,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그 부분을 고쳐 쓴 다음에 원고를 재차 읽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전보다 좋아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생각건대, 읽은 사람이 어떤 부분에 대해 지적할 때, 지적의 방향성은 어찌 됐건, 거기에는 뭔가 문제가 내포된 경우가 많습니다. 즉 그 부분에서 소설의 흐름이 많든 적든 턱턱 걸린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은 그 걸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제거하느냐는 작가 스스로 결정하면 됩니다. - 157

물론 타인의 의견을 모두 다 덥석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개중에는 잘못짚은 의견, 부당한 의견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의견이든 그것이 제정신에서 나온 것이라면 거기에는 뭔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견은 당신의 머리를 조금씩 냉각시켜 적절한 온도로 이끌어줍니다. 그들의 의견이란 즉 세상 사람들의 의견이고, 당신의 책을 읽는 건 결국 세상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신이 세상 사람들을 무시하려고 한다면 아마도 세상 사람들도 똑같이 당신을 무시할 것입니다. - 162, 163쪽

그래서 나는 내 작품이 간행되고 그것이 설령 혹독한-생각도 못할 만큼 혹독한-비판을 받는다고 해도 ‘뭐, 어쩔 수 없지’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할 만큼은 했다’는 실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전 작업에도 양생에도 진득하게 시간을 들였고, 망치질에도 충분히 시간을 들였다는. 그래서 아무리 혹독한 비판을 받아도 그것 때문에 위축되거나 자신감을 잃는 일은 일단 없습니다. 물론 약간 불쾌해지는 정도의 일은 가끔 있지만,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시간에 의해 쟁취해낸 것은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면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확신이 내 안에 없었다면 아무리 베짱 좋고 태평한 나라도 어쩌면 침울해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똑 부러지게 했다’는 확실한 실감만 있으면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습니다. 그다음은 시간의 손에 맡기면 됩니다. 시간을 소중하게, 신중하게,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것은 곧 시간을 내편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성을 대할 때와 똑같은 일이지요. - 167,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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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5-19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출판사 서평에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는 책”이라고 소개했어요. 아무리 소설을 쓰고 싶어도 하루키처럼 따라하지 못할 것 같아요.

붉은눈 2016-05-19 17:00   좋아요 0 | URL
출판사의 실제 의도도 그러했군요. 몰랐습니다. 이 책도 책이지만 어제 cyrus님의 서평을 읽으니 하루키가 더 대단해 보였습니다.

희망여행 2016-05-22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도 개인적인 작가가 쓰는 글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매혹되는 이유는 누구나 개인주의적인 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개인적 성향을 편히 드러낼 수 있는 환경인지 아닌지의 차이일뿐..
서평이 너무 자세하고 좋아서 책을 다 읽은 것 같네요.

붉은눈 2016-05-25 11:31   좋아요 0 | URL
그의 반향처럼 어쩌면 그의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개인주의적인 삶을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서평이랄 것도 없는 부족한 글을 칭찬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루키는 뭔가 특정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작가이죠. 그를 기점으로 많은 이들이 그를 흉내내기는 해도, 그와 같은 작가를 또 만나기란 당분간은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희망여행 2016-05-22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곧 읽을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