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공부 - 매일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핼 스테빈스 지음, 이지연 옮김 / 윌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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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공들여 출판한 책에 혹평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뭘 말하려는 책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원제인 Copy Capsule을 '카피 공부'라고 번역한 것에서부터 문제가 있다. 제목만으로는 마치 이 책이 광고 카피 공부를 위한 이론서 혹은 실용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평을 보니 나처럼 생각하고 기대했다가 실망한 독자들이 꽤 되는 것 같다. 그 평을 미리 확인했어야 했는데...). 막상 책을 펼쳐보면 제목과는 너무 다르게, 광고문구, 저자의 충고나 격언, 유명인들의 인용구 몇 줄로 구성되어 있다. 원제 그대로 정말 '캡슐'인 것이다.


차례에 등장하는 '광고의 기본', '광고에 관한 조언', 헤드라인을 쓰는 기술' 같은 제목들도 몇가지 유사한 문구들을 인위적으로 묶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다(이러한 문구들이 별 구분 없이 중간중간에 반복된다). 마지막 장인 '인간의 위트와 지혜'에 유명인들의 말을 짜집기한 부분은 무성의함의 극치였다.


말장난 같은 표현도 많지만 '언어유희'라고 받아들이고, 등장하는 격언들 중 일부는 '광고'가 아닌 '인생'을 위한 격언으로 여겨도 될 부분이 있다는 점, 원서만으로 접했을 때는 그 뉘앙스를 알 수 없을 법한 부분을 번역자가 약간의 설명을 해주었다는 점을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그 정도다. 

광고쟁이는 팩트(fact)를 ‘아이디어’로 바꾸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감정’으로, 그 감정을 다시 ‘사람’으로, 그 사람을 다시 ‘판매’로 바꾸어놓는 사람이다. 팩트를 아이디어로 바꾸려면 무언가를 봤을 때 그게 팩트임을 알아봐야 한다. 아이디어를 감정으로 바꾸려면 마음에 품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사갈까?’라는 질문의 답은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게 뭘까?’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제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어떻게 해야 사람을 움직이고 상품을 움직일까?’ - 6

감정(emotion) 속에 움직임(motion)이 그토록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결국 뿌리는 같다. - 20

광고는 메시지(message)가 되든가 쓰레기(mess)가 되든가, 둘 중 하나다. - 22

정신적으로 예리해지고 싶다면 모든 것에 꾸준한 호기심을 키워라. 머릿속으로 세상을 돌아다녀라. 요컨대 머리는 집시처럼 거침없이 돌아가게 하고 두 발은 단단한 땅을 딛고 서라. - 41

똑똑한 작가는 꽃을 심기 전에 잡초부터 제거한다. - 42

두 번째 문장은 독자가 세 번째 나오는 문장을 읽도록 만들어야지, 첫 번째 문장으로 되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의사들은 이것을 ‘리버스 연동 운동’이라고 부르고, 나는 이것을 ‘잉크 역류’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흐름을 깨지 마라’! - 50

망설여질 때는 빼라. - 56

항상 기억하라. 계속해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그러니 계속 불을 지펴라. - 68

성공을 지속하려면 머리만으로는 부족하다. 버팀목이 필요하다. - 81

젊음을 유지하고 싶다면 계속해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 녹슬고 싶지 않다면 부단히 노력하라(To stay youthful, stay useful. To stay rustless, stay restless). - 83

표현의 자유에 관한 판결로 유명한 홈즈 판사는 구체적인 것을 크게 강조했다. "모든 일반화는 진실이 아니다. 이 문장도 마찬가지다." - 149

"반복이 평판을 만든다(Repetition makes reputation)" - 200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을 사용하지 마라. 가장 마지막에 떠오르는 생각을 사용해라. (만약 그게 하나로 같다면 내가 옳다는 것을 두 배로 확신할 수 있다.) - 209

구멍을 뚫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발견하는 것은 석유일까, 분노일까? - 230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마음은 바뀐다. 기분은 바뀐다. 옷은 바뀐다. 직업은 바뀐다. 아내와 남편, 집은 바뀐다. 하지만 사람들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 238

사람들은 ‘사고’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느낌’으로 생각한다. 그게 바로 감정이다. - 238

프랑스의 저명한 성직자이자 설교가인 자크 보쉬에는 카피라이터들이 가슴에 새길 만한 말을 남겼다. "가슴은 논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갖고 있다." - 283

조지 엘리엇은 이런 혜안을 덧붙였다. "하늘의 빛이 될 수 없다면 방 안의 등불이 되라." - 284

프랑스 속담이다. "훌륭한 궁수는 화살 때문에 유명한 것이 아니라 과녁 때문에 유명하다." - 286

알렉산더 해밀턴은 말했다.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라기보다 합리적 이유를 찾는 동물이다." - 293

올리버 크롬웰은 말했다. "더 훌륭해지려는 노력을 멈추는 사람은 더 이상 훌륭하지 않다." -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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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6-12 1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약 제 주변에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전 이런 말을 꼭 하고 싶어요. 의도가 아니어도 여성을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의미를 줄 수 있는 카피를 만들 수 있으니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만들어 달라고요. ^^
 
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
서미애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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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추리소설을 읽고 싶어 이책 저책을 뒤적거리다가 발견한 책이다. 독자들평도 좋은 것 같았고, "진범은 따로 있다"라는 띠지의 문구가 상상하기 힘든 반전의 예고처럼 보여, 간만에 괜찮은 추리소설을 보게 된다며 기대를 많이 하며 책장을 넘겼다. 작가의 문체도 내가 좋아하는 류이고, 인물의 관점을 달리한 서술, 인물의 심리묘사,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설명 등 뭐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데, 뭔가 많이 허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딸과 아내의 죽음을 추적하는 아빠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딸과 아내의 부재의 상황에 처한 남자의 비참함이나 우울함, 범인을 찾기 위해 추적을 시작하는 비장함 같은 것들이 다른 추리소설에 비해 상당히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요새 너무 자극적이어서 이 소설에서의 사건 전개가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느꼈는지, 반전을 기대하는 마음에 스토리나 결말이 미치지를 못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소설의 중반을 넘어서자 초반에 의문을 품은 채 긴장하며 읽던 마음이 첫장을 펼 때의 기대와 함께 슬슬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스릴러라기보다는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소설이었다. 

오려내듯 딸만 사라진 일상 속에서 그 아픔을 이기는 방법이라고는 자신을 고통에 몰아넣거나 화석처럼 굳어져 무감각해지는 수밖에 없다. 아내는 자신의 몸을 괴롭혀 암세포를 키웠고 우진은 거북의 등껍질처럼 딱딱한 방어막을 만들고 안으로 숨어들었다. - 47

죽음은 한 번으로 끝나는 상황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밀려들고 반복되는 무간지옥의 시간이다. 고통의 파도는 죽을 때까지 그의 뺨을 후려갈길 것이다. - 47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달라졌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 216

사람들은 생각한다.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고. 그러면 잘못된 일들을 바꿀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야 모든 것이 전과 같아질까? 잘못된 길로 가기 시작했다고 느끼는 그 순간으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한다고 결과가 달라질까?
어느 때로 돌아가든 답은 같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달라지는 것은 없다. - 377

누군가 그랬다.
우리가 사는 이곳이 지옥이 된 이유는 악마들이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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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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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소설은 처음이다. 지난달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궁금해한 나머지 구입한 것은 아니었고, 예전에 씨네큐브 주변을 배회하던 중 동명의 영화를 보려다가 그러지 못했던 생각이 나가도 했고, 며칠 전 지인과 커트 보네거트 얘기를 하던 중 필립 로스라는 이름이 내 입에서 정말 우연히(왜 그런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나왔고, 대화를 하던 상대방으로부터 그의 소설이 '괜찮다'는 평을 듣기도 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내게는, 흡입력이 있는 소설은 아니었다.그럼에도 왜 그가 '괜찮다'고 평을 했는지를 알고 싶어 꾹 참으며 책장을 넘겼다. 완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히 책이 꽤 얇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한 남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설적 요소가 될만큼 화려하거나 굴곡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차분했다고나 할까. 제목이 암시하듯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혹은 '아무나' 대상이 될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이다. 그의 장례식으로부터 시작되는 회고와 회상, 관조적인 작가의 태도와 어조를 따라가며,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작가는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소재를 이끌고 나가면서, 그 막연한 종말 앞에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욕망과 혼란, 미련을 매우 건조하게 서술하고 있다. 내 머릿속에 꽉 박힐만한 소설은 아니었지만, 한장 한장을 넘길 때마다 펼쳐지는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은, 책을 읽을 때보다 책을 덮은 후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아직도 내게 삶과 죽음은 너무 추상적이고, 시간은 너무 구체적이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 23

오랜만에 비로소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이 순간에 왜 내가 내 삶을 불신해야 할까? 차분하게, 똑바로 생각해보면 앞으로 훨씬 더 견실한 삶이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왜 내가 소멸의 가장자리에 있다는 상상을 할까? - 37

아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하고 다닌 이야기와는 반대로, 그는 어떤 일이든지, 무슨 일이든지 멋대로 하고 다닐 자유에 굶주렸던 것이 아니다. 정반대였다. 그는 자신이 놓인 처지를 혐오하면서 내내 뭔가 안정된 것에 굶주려 있었다. 그는 두 삶을 살고 싶어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순응에 따르는 한계나 그것이 주는 안락 어느 쪽에도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저 질질 끄는 수치스러운 결혼 전쟁이 잔뜩 낳아놓은 그 모든 추한 생각을 마음에서 비워버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는 특별하고자 한 적이 없었다. 다만 나약했고 공격에 무방비 상태였고 혼란에 빠져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한 평범한 인간으로서, 인생의 반을 발광 상태에서 살지 않으려다보니 죄 없는 자식들에게 큰 박탈감을 안겨주었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자신도 사면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확신했다. - 39

그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1센티미터씩 사라지는 것을 다 지켜보았다. 맨 끝까지 그 과정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죽음 같았다. 그렇다고 첫 번째 죽음보다 덜 끔직하지도 않은 죽음. - 67

그는 그저 살아 있기 위해 그가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뿐이었다. 늘 그랬지만,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도 대부분 그렇겠지만, 그는 종말이 꼭 와야 하는 순간보다 일 분이라도 더 일찍 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 72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이 열 살, 열한 살, 열두 살, 열세 살 때의 아버지이기를 바랐다. 장애도 없고 무력하지도 않은 아버지. 그 마음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것을 원하는 마음이라면 누구도 그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슬픔이 딸의 슬픔보다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을 알았다. 뭔가 부드러운 말을 해서 딸의 두려움을 덜어주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마치 다시 옛날로 돌아가 그녀가 둘 중 더 약한 쪽이 된 것처럼. - 80, 81

"하지만 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해." 그는 작은 소리로 말하며 딸의 등을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품 안의 그녀를 살며시 흔들었다.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 83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 86

젊을 때는 중요한 게 몸의 외부지. 겉으로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거야. 하지만 나이가 들면 중요한 건 내부야.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데는 관심을 갖지 않아. - 89

사실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지는 포옹은 혹독한 슬픔을 자아내, 견딜 수 없는 외로움만 더 사무치게 할 뿐이었다. 물론 외롭게 살겠다고 스스로 선택한 건 그였지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외롭게 살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외로운 상태의 가장 나쁜 점은 그것을 어떻게든 견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끝장이니까. 과다하다 싶을 정도로 넘쳐났던 과거를 게걸스럽게 돌아보다 마음이 사보타주를 일으키는 것을 막으려면 열심히 일을 해야만 했다. - 106, 107

"뭐든지 견딜 수 있어." 피비가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설령 신뢰가 깨져도 말이야. 솔직하게 말만 한다면. 그때는 다른 방식으로 인생의 파트너가 되겠지만, 그래도 파트너로 남는 건 가능하단 말이야. 하지만 거짓말이라니... 거짓말은 정말 경멸스러운 방식으로 값싸게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거야. 다른 사람이 불완전한 정보에 따라 행동하는 걸 지켜보는 거야. 다른 사람이 수모를 겪는 걸 지켜보는 거라고. 거짓말을 아주 흔하지만, 당하는 쪽이 되어보면, 그건 정말 경악스러운 거야. 당신 같은 거짓말쟁이들에게 배신을 당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은 수모를 겪게 돼. 그러다보면 마침내 당신도 그 사람들을 전보다 하찮게 여길 수밖에 없어, 안 그래? 당신처럼 능숙하고 집요하고 사악한 거짓말쟁이들은 언젠가는 틀림없이 자신에게 심각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거짓말을 하는 상대한테 그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 126, 127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사랑하던 바다라 한들, 오직 그 바다만 보며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조수가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것을 한참 지켜보다보면, 바다를 바라보며 백일몽에 빠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렇듯이 자신에게도 삶이 우연히, 예기치 않게 주어졌으며, 그것도 한 번만 주어졌으며, 거기에는 알려진 또는 알 수 있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 130, 131

그는 다 젖은 채 맨발로 소금기를 풍기며 집으로 달려가면서, 여전히 두 귓속에서 들끓고 있는 거대한 바다의 강력한 힘을 기억하며 팔뚝을 핥아 물기가 가시지 않은 채 햇볕에 달구어지는 피부의 맛을 보았다. 그는 하루 종일 멍청해질 만큼 바다에 두들겨 맞은 덕분에 환희에 젖은 데다 그 맛과 냄새에도 취해 있었다. 자신의 몸 한 조각을 이로 물어뜯어 살로 이루어진 자신의 존재를 맛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 132, 133

삼십 년 전이라면 그는, 비록 젊은 여자라고는 하나, 이 여자를 쫓아갔을 때 그 결과가 어떨지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치스럽게 거부당할 가능성은 떠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자신감이 주던 기쁨은 사라졌다. 그와 더불어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말을 주고받는 장난스러움도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불안 – 그리고 만지고 싶은 충동 – 그리고 바로 그런 몸에 대한 갈망 –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부질없음 – 그리고 자신의 비루함을 감추려고 최선을 다했고, 겉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 139

노년은 전투에요. 이런 게 아니라도, 또다른 걸로 말이에요. 가차 없는 전투죠. 하필이면 가장 약하고, 예전처럼 투지를 불태우는 게 가장 어려울 때 말이에요. - 149

자신이 없애버린 모든 것, 이렇다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스스로 없애버린 모든 것, 더 심각한 일이지만, 자신의 모든 의도와는 반대로,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없애버린 모든 것을 깨닫자, 자신에게 한 번도 가혹하지 않았던, 늘 그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던 형에게 가혹했던 것을 깨닫자, 자신이 가족을 버린 것이 자식들에게 주었을 영향을 깨닫자, 자신이 이제 단지 신체적으로만 전에 원치 않았던 모습으로 쪼그라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깨닫자,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 164

자신에게 무엇인지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할 것 같았다. 목적 없는 낮과 불확실한 밤과 신체적 쇠약을 무력하게 견디는 일과 말기에 이른 슬픔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그는 생각했다. 이거야 미리 알 도리가 없는 거지. - 167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충만함을 버리고 그 무한한 무(無)를 선택할 수 있을까? 나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냥 차분하게 누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까? - 170

우리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죠. ‘네 손이 아직 따뜻할 때 주는 게 최선이다’." - 186

그는 쓰러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불길한 운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느낌으로, 다시 충만해지기를 갈망하며 밑으로 내려갔지만, 결국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심장마비.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 -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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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준비생의 도쿄 - 여행에서 찾은 비즈니스 인사이트 퇴사준비생의 여행 시리즈
이동진 외 지음 / 더퀘스트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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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직도 우리 산업의 미래를 일본에서 찾는군.' 제목을 보고 든 생각이다. 흔히 하는 말로 우리나라 산업이나 유행은 일본에 10년 정도 뒤쳐져 있으니,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뜨는 사업을 하려면 일본을 참고하면 된다고 하지 않던가. '퇴사준비생'이라는 단어 때문에 평범한 샐러리맨들이 퇴사를 준비하면서 참고할 수 있는 신사업에 초점을 맞추었는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퇴사준비생이라는 용어가 갖는 다양한 가능성에 대비하여, '퇴사준비 = 자영업준비'라는 등식을 전제로 소매 점포나 외식업 위주의 업체가 주로 선정되거나, 퇴사준비생인 개인이 할 수 없는 규모('취향'편엔 지브리 미술관을 넣어놓았다)를 소개한 점은 아쉽다. 반면, 기존 사업모델만을 소개한 책들에 비하여 사업의 차별성과 전략, 경역철학에 관한 부분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는 것이 특징이기는 하다. 개인이 아닌 중소, 중견기업이라면 참고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전반적으로는 일본에서 새롭게 유행하는 분야를 소개한 기존의 책들과 크게 다르다는 느낌을 들지 않았다. 아무리 일본에서 뜨는 핫한 사업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일본인들의 구매 성향이 우리와는 다르기 때문에 성공한 것인지, 우리나라에서도 성공가능성이 있을지에 대한 필터링이 필요할텐데, 독특함을 강조하다보니 실제 적용가능성에 대한 분석이 약했던 것 같다. 일례로 저자들은 아코메야라는 쌀가게를 책의 제일 처음에 배치하였는데, 생산지에 대한 구분, 밥 한상을 꾸밀 수 있는 반찬 판매 등 쌀가게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이 업종이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궁금하다. 요리사 없이 통조림만으로 하는 요식업, 고기의 특수부위를 경매하는 가게와 같은 업종도 그렇다. 


아무튼 일본의 신산업에 대한 소개를 받고자 하는 차원에서는 좋은 사례들이 많은 책이지만, '퇴사준비생'을 대상으로 한 기존 일본 관련 서적들과 차별화까지는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선배들의 현재가 자신의 5년, 10년 후 모습일 텐데 본받고 싶은 상사를 찾는 것이 퇴사 후 할 일을 찾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습니다. 회사에 다닐수록 성장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미래를 마주합니다. 직장인들의 내일에서 안녕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 6쪽

"10년 후의 변화를 예측하기보다 10년 뒤에도 변치 않는 걸 고민해야 합니다." - 9쪽

시루카페는 온라인 리쿠르팅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창업자 유스케 카키모토는 채용의 온라인화를 바람직하다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채용 과정에서는 신속도보다 정확도가 더 중요한데 온라인 채용에서는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온라인 채용의 부작용을 덜고, 기업의 수요와 인재의 공급 간 불일치를 해소하고자 시루카페를 만든 것입니다. 어쩌면 ‘알다’라는 뜻을 가진 ‘시루’카페의 가장 중요한 숨은 의미는 기업과 인재가 서로를 알아보는 장소라는 점일지도 모릅니다. - 59쪽

필름을 만들던 회사에서 화장품을 출시한 것이 낯설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필름과 화장품 사이에는 콜라겐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콜라겐은 필름의 산화 현상을 막는 역할뿐만 아니라 피부 노화를 방지하는 역할도 합니다. 70년 넘게 필름을 연구하며 콜라겐 성분을 개발했던 후지필름이 화장품 사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핵심역량을 정의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남달랐기에 회생이 가능했습니다. - 97쪽

"전구가 발명됐지만 양초는 사라지지 않았다. 양초는 예술의 영역으로 이동해 낭만적인 물건으로 용도가 달라졌다."
<문구의 모험>의 저자 제임스 워드의 설명입니다. 그의 말처럼 신기술이 제품의 구세대의 제품을 완전히 도태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자기만의 가치를 찾아 변화에 적응한다면 세월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습니다. - 104쪽

호우잔의 가격 전략은 일반 판매를 통해 더 높은 수익을 챙기고, 경매판매를 통해 고객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반대로 고객 입장에서 생각하면 일반 주문만 해서 고기를 먹으면 손해고, 경매 참여를 해서 고기를 낙찰받으면 이득입니다. 그래서 경매가 열리면 손님들은 수동적인 자세로 관망하지 않습니다. 승자가 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손을 듭니다. - 111, 112쪽

롯폰기 힐즈는 부동산 개발 업체인 모리빌딩그룹에서 개발한 복합시설입니다. 모리빌딩그룹의 회장 모리 미노루는 ‘수직도시론’이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롯폰기 힐즈를 개발했습니다. 수직도시론은 단순히 땅값이 비싸니까 높이 짓자는 것이 아닙니다. 탈공업사회, 지식산업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공간 디자인입니다. 공업사회에서는 일터와 주거가 분리되어 있었고, 그랬기에 근로시간이 끝나면 일을 잊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식산업사회에서는 머리와 감성을 가지고 가치를 창출하는 만큼 일하는 시간뿐만 아니라 여가시간도 중요해집니다. 여가시간은 휴식의 기능도 하지만 일을 위한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132쪽

공감은 공간에 반비례합니다.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심리적인 거리는 가까워진다는 뜻입니다. 격투기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관심은 있지만 용기가 없는 초보자들도 눈앞에서 스파링을 하는 모습이나 경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 없던 관심과 용기가 저절로 생깁니다. 파이트 클럽 428은 링과 바를 바로 붙여놓음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하였습니다. 편하게 칵테일을 마시면서도 시각적으로는 강력한 펀치에 자극을 받고, 청각적으로는 미트를 강타하는 소리에 빨려들어 갑니다. 칵테일 한잔을 마시면 격투기를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이유입니다. - 142쪽

글로벌 브랜드로 쇄신하기 위해 하라 켄야가 세운 방향성은 2가지입니다. 하나는 제조 과정 단순화를 통해 저렴한 가격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담은 디자인으로 합리적 가격의 제품을 만드는 것, 그리고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목표를 가지고 궁극의 디자인 제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156쪽

무인양품답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철학적인 사상을 구체적으로 성문화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무인양품은 리브랜딩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하고자 여러 시도를 합니다. 그중 하나가 ‘파운드 무지(Found MUJI)’입니다.

‘시대와 국경을 넘어, 무인양품을 찾는 여행을 시작합니다.’ - 159쪽

쿠시야 모노카타리는 가장 재밌는 프로세스만 고객에게 넘겨줍니다. 재료 손질, 기름 청소 등 앞뒤의 귀찮은 일들은 쿠시야 모노가타리가 전담합니다. 고객은 튀기는 데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부차적인 프로세스만 손님에게 넘기거나 전체를 맡겨버리는 일반적인 셀프서비스와는 사뭇 다른 행보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고객이 맡은 프로세스를 더 수월하게 해낼 수 있도록 돕습니다. 적정 온도를 유지하고 기름이 바깥으로 튀지 않도록 하는 특제 튀김기는 피수고, 튀김가루를 미세하게 갈아 초보자도 얇고 바삭하면서도 속재료와 엉기지 않도록 튀김옷을 입힐 수 있습니다. 또한 재료에 따른 적정 튀김 시간 등을 알려주는 튀김 매뉴얼을 테이블마다 비치해 쉽게 따라 할 수 있습니다. 모두 셀프로 해도 퀄리티 차이가 크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결과가 좋아야 과정에서의 즐거움이 의미가 있습니다. - 206, 207쪽

츠타야 티사이트에서는 책, 영화, 음악을 한곳에서 판매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제안에 신경을 씁니다. 츠타야를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시대의 흐름을 보는 마스다 무네아키의 통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의 시대를 소비사회의 ‘서드 스테이지(3rd stage)’로 봤습니다. 퍼스트 스테이지는 물건이 부족한 시기로 어떤 상품이건 용도만 충족하면 팔리는 시기입니다. 세컨드 스테이지는 물건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구매하는 장소가 선택의 기준이 되는 시기로 고객 접근성이 중요했습니다. 반면 현재의 서드 스테이지에서는 물건도 넘쳐나고 구매할 수 있는 장소도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넘치는 정보 속에서 삶의 가치를 높여주고 고객의 선택을 돕는 제안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 232, 233쪽

퍼스트 스테이자와 세컨드 스테이지에서는 ‘자본’이 중요합니다. 충분한 상품과 유통망을 만들려면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드 스테이지에서는 자본만으로는 경쟁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돈이 많다로 해도 고객의 가치를 높이는 제안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드 스테이지에선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할 수 있는 ‘지적 자본’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지적 자본이 회사의 사활을 결정하는 핵심역량이라는 뜻입니다. - 233쪽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것들 안에는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기본이 담겨 있습니다." - 303쪽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새로운 정보를 얻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서 온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꼽히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입니다. 문제해결 여부는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313쪽

"디자이너가 하는 일은 기발한 행태를 만드는 것도, 무언가를 멋있게 보이도록 하는 것도 아니다. 디자인이란 문제 해결을 위해 새로운 길을 찾는 작업이다."

넨도 디자인을 이끌고 있는 사토 오오키의 말입니다. - 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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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죽음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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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좋아하는 편인데, 이 작가의 글이 국내에서 왜 이렇게 인기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혹자는 전작인 <사는 게 뭐라고>가 더 낫다고 하던데, 전작을 읽지 않고 바로 이 책을 읽어서일까? 모르긴 몰라도 전작에서는 광고에서 붙이는 '시크한', '거침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리는 글이 많은가보다. 제목과 부제만 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초월한 어느 작가의 당당하고 거침없는 철학을 그려놓은 느낌이 든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마련인데, 죽음 앞에서 너무 소란스럽게 호들갑 떨거나, 고통을 참아가며 삶을 연장하고 싶지는 않다던 태도에는 공감가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런데 책을 다 읽은 후 원제인 '죽을 의욕 가득'이라는 말을 곱씹어 보면, 번역된 '죽는 게 뭐라고'와는 뉘앙스 차이가 크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에 대한 관조적인 태도를 넘어서 자신의 바로 눈 앞에 닥친 죽음을 적극 수용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약간의 허세가 섞인) 원제가 더 그 맛을 잘 살린 것 같다는 생각이다.


글을 읽다보면, 작가가 매우 자주 인용하는 "돈과 목숨을 아끼지 말거라"라는 아버지의 인생관이 작가의 삶에도 그리고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동생과 오빠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지극히도 가난했던 어린시절의 삶은 죽음은 언제나 그녀 곁에 있는 것임을 깊이 각인시켰을 것도 같다. 이러한 배경이 그녀를 '시크한' 독거 작가로 성장시켜, 일흔 가까운 나이에 암 선고를 받고도 그렇게 초연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삶도 그렇지만 죽음에 대한 인식도 우리는 다분히 사적일 수밖에 없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이 정도의 솔직한 글을 쓴다는 것이 우리의 관점에서는 특이하고 독특할 수는 있겠지만, 죽음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매우 스타일리쉬한 것은 맞지만, 죽음에 관한 매우 색다른 관점이나 죽음을 대하는 지혜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어서 막상 읽어보니 읽기 전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에세이 한 편을 읽으면서 뭐 그리 큰 것을 바라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내 입장에서는 웬일인지 작가의 글에 별로 이입되지 못한 채 각 장의 에피소드를 건조하게 눈으로 쫓는 독서를 하고 말았다. 덕분에 전체적인 느낌에 집중하기보다는, 무엇이라도 남기려고 한 문장 한 문장에 집착하여 의도와는 다르게 밑줄 친 부분이 많아졌다. 



일평생 돈을 얼마나 벌고 얼마나 썼는지를 생각해보니, 지금껏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도 꺼림칙하고 무서웠다. - 16쪽

나는 암 투병기가 너무 싫다. 암과 장렬한 싸움을 하는 사람도 너무 싫다. 비쩍 말라서는 현장에서 죽는 게 소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너무 싫다. - 24쪽

동물들은 고독을 견디는 강인하고도 적막한 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은 고독한 눈을 잃어버렸다. 그런 눈은 온갖 욕망을 표현하는 도구로 전락하여 탐욕스럽게 번들거린다.
우리 인간은 숙명적으로 그렇게 변해버렸다. - 50쪽

장례를 치를 절(寺)을 정하는 등의 준비를 해봐도, 살아 있으면 그만 잊어버리고 만다. 내가 죽는 다는 사실을. - 54쪽

지금이 인생 중 가장 행복하다.
일흔은 죽기에 딱 적당한 나이다.
미련 따윈 없다. 일을 싫어하니 반드시 하고 싶은 일도 당연히 없다. 어린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을 때 괴롭지 않도록 호스피스도 예약해두었다.
집 안이 난장판인 것은 알아서 처리해주면 좋겠다.
저세상을 믿진 않지만, 만약 저세상이 있어서 아버지를 만난다 해도 지금의 나는 아버지보다 스무 살이나 많으니 정말로 곤란하다.
찢어지게 가난했다. 나는 모든 것을 가난으로부터 배웠다.
부자는 돈을 자랑하지만, 가난뱅이는 가난을 자랑한다.
모두들 자랑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 - 62, 63쪽

내가 생각하기로 사람은 집에서 죽어야 한다.
병원에서 죽는 게 당연해진 세상이지만, 사실은 자기 집 다다미 위에서 죽어야 마땅하다.
그때는 목숨이 지구보다 중하다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은 일본 아이들의 목숨보다 이라크 아이들의 목숨이 더 가벼운 세상이다.
다다시와 오빠의 목숨도 혼불이 되어 훌쩍 사라질 정도로 가벼웠다. 하지만 모든 목숨은 저울로 잴 수도 돈으로 바꿀 수도 없다. - 70, 71쪽

나는 죽을 때까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단, 병과의 장렬한 싸움만은 싫다.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연극배우가 나날이 야위어가는 모습으로 등장했던 무대는 싫었다. 관객에게 실례가 아닌가. 나는 통증이 시작되면 곧바로 마취제를 놓아주었으면 한다. 지체 없이 놓아주었으면 좋겠다. - 72쪽

나는 저세상을 믿지 않는다.
저세상은 이 세상의 상상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저세상은 이 세상에 있다. - 73쪽

아무리 냉정하고 침착한 사람이라도, 생각의 가장 안쪽과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는 본인조차 알 수 없다.
막상 부닥쳐보지 않으면 모른다.
환자의 언어 건너편에 있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누구도 부닥쳐보지 않으면 모른다. 이성이나 언어는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는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 150쪽

어릴 적에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게 된 유리구슬 하나를 아무래도 찾을 수 없었을 때 느꼈던, 어쩔 도리 없는 쓸쓸함과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린 나의 작은 우주에서 소중한 물건이 사라질 때면 그 물건이 어딘가에 섞여 들었다가 다시 나온다거나, 오빠가 장난으로 훔쳐 간 것이라서 결국 호주머니에서 발견된다는 식의 희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의 작은 우주에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지만, 그 감정은 소중한 물건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걸 깨닫는 쓸쓸함이었다. - 152쪽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 이제는 결코 투명한 모습으로 고요히 내 앞을 스쳐 갈 일이 없어진 것이다.
단지 나를 스쳤던 사람이 영영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마치 이 세상에서 소중한 존재가 사라진 양 돌이킬 수 없는 쓸쓸함을 느낀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 153쪽

제가 의사한테 남은 날이 1년이라는 말을 들어서, 남편이 그때부터 절대로 저한테 고함치지 않기로 약속했어요.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저한테 가장 기뿐 순간은, 제가 아프다는 걸 잊어버린 채 남편이 또 고함을 칠 때예요. 그건 제 병을 남편도 까먹고 있다는 거잖아요? 그게 가장 기뻐요. 전 뭐든 다 하면서 지내요. 병 걸리기 전이랑 완전히 똑같아요. 제가 생각해도 신기해요. 아무 데도 안 아프거든요. 왠지 이건 내 힘이 아닌 것 같아요.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힘이 아닌 다른 힘에 의해 살아가는 것 같아요. - 161, 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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