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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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소설은 처음이다. 지난달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궁금해한 나머지 구입한 것은 아니었고, 예전에 씨네큐브 주변을 배회하던 중 동명의 영화를 보려다가 그러지 못했던 생각이 나가도 했고, 며칠 전 지인과 커트 보네거트 얘기를 하던 중 필립 로스라는 이름이 내 입에서 정말 우연히(왜 그런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나왔고, 대화를 하던 상대방으로부터 그의 소설이 '괜찮다'는 평을 듣기도 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내게는, 흡입력이 있는 소설은 아니었다.그럼에도 왜 그가 '괜찮다'고 평을 했는지를 알고 싶어 꾹 참으며 책장을 넘겼다. 완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히 책이 꽤 얇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한 남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설적 요소가 될만큼 화려하거나 굴곡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차분했다고나 할까. 제목이 암시하듯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혹은 '아무나' 대상이 될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이다. 그의 장례식으로부터 시작되는 회고와 회상, 관조적인 작가의 태도와 어조를 따라가며,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작가는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소재를 이끌고 나가면서, 그 막연한 종말 앞에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욕망과 혼란, 미련을 매우 건조하게 서술하고 있다. 내 머릿속에 꽉 박힐만한 소설은 아니었지만, 한장 한장을 넘길 때마다 펼쳐지는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은, 책을 읽을 때보다 책을 덮은 후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아직도 내게 삶과 죽음은 너무 추상적이고, 시간은 너무 구체적이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 23

오랜만에 비로소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이 순간에 왜 내가 내 삶을 불신해야 할까? 차분하게, 똑바로 생각해보면 앞으로 훨씬 더 견실한 삶이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왜 내가 소멸의 가장자리에 있다는 상상을 할까? - 37

아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하고 다닌 이야기와는 반대로, 그는 어떤 일이든지, 무슨 일이든지 멋대로 하고 다닐 자유에 굶주렸던 것이 아니다. 정반대였다. 그는 자신이 놓인 처지를 혐오하면서 내내 뭔가 안정된 것에 굶주려 있었다. 그는 두 삶을 살고 싶어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순응에 따르는 한계나 그것이 주는 안락 어느 쪽에도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저 질질 끄는 수치스러운 결혼 전쟁이 잔뜩 낳아놓은 그 모든 추한 생각을 마음에서 비워버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는 특별하고자 한 적이 없었다. 다만 나약했고 공격에 무방비 상태였고 혼란에 빠져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한 평범한 인간으로서, 인생의 반을 발광 상태에서 살지 않으려다보니 죄 없는 자식들에게 큰 박탈감을 안겨주었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자신도 사면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확신했다. - 39

그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1센티미터씩 사라지는 것을 다 지켜보았다. 맨 끝까지 그 과정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죽음 같았다. 그렇다고 첫 번째 죽음보다 덜 끔직하지도 않은 죽음. - 67

그는 그저 살아 있기 위해 그가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뿐이었다. 늘 그랬지만,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도 대부분 그렇겠지만, 그는 종말이 꼭 와야 하는 순간보다 일 분이라도 더 일찍 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 72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이 열 살, 열한 살, 열두 살, 열세 살 때의 아버지이기를 바랐다. 장애도 없고 무력하지도 않은 아버지. 그 마음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것을 원하는 마음이라면 누구도 그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슬픔이 딸의 슬픔보다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을 알았다. 뭔가 부드러운 말을 해서 딸의 두려움을 덜어주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마치 다시 옛날로 돌아가 그녀가 둘 중 더 약한 쪽이 된 것처럼. - 80, 81

"하지만 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해." 그는 작은 소리로 말하며 딸의 등을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품 안의 그녀를 살며시 흔들었다.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 83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 86

젊을 때는 중요한 게 몸의 외부지. 겉으로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거야. 하지만 나이가 들면 중요한 건 내부야.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데는 관심을 갖지 않아. - 89

사실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지는 포옹은 혹독한 슬픔을 자아내, 견딜 수 없는 외로움만 더 사무치게 할 뿐이었다. 물론 외롭게 살겠다고 스스로 선택한 건 그였지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외롭게 살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외로운 상태의 가장 나쁜 점은 그것을 어떻게든 견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끝장이니까. 과다하다 싶을 정도로 넘쳐났던 과거를 게걸스럽게 돌아보다 마음이 사보타주를 일으키는 것을 막으려면 열심히 일을 해야만 했다. - 106, 107

"뭐든지 견딜 수 있어." 피비가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설령 신뢰가 깨져도 말이야. 솔직하게 말만 한다면. 그때는 다른 방식으로 인생의 파트너가 되겠지만, 그래도 파트너로 남는 건 가능하단 말이야. 하지만 거짓말이라니... 거짓말은 정말 경멸스러운 방식으로 값싸게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거야. 다른 사람이 불완전한 정보에 따라 행동하는 걸 지켜보는 거야. 다른 사람이 수모를 겪는 걸 지켜보는 거라고. 거짓말을 아주 흔하지만, 당하는 쪽이 되어보면, 그건 정말 경악스러운 거야. 당신 같은 거짓말쟁이들에게 배신을 당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은 수모를 겪게 돼. 그러다보면 마침내 당신도 그 사람들을 전보다 하찮게 여길 수밖에 없어, 안 그래? 당신처럼 능숙하고 집요하고 사악한 거짓말쟁이들은 언젠가는 틀림없이 자신에게 심각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거짓말을 하는 상대한테 그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 126, 127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사랑하던 바다라 한들, 오직 그 바다만 보며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조수가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것을 한참 지켜보다보면, 바다를 바라보며 백일몽에 빠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렇듯이 자신에게도 삶이 우연히, 예기치 않게 주어졌으며, 그것도 한 번만 주어졌으며, 거기에는 알려진 또는 알 수 있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 130, 131

그는 다 젖은 채 맨발로 소금기를 풍기며 집으로 달려가면서, 여전히 두 귓속에서 들끓고 있는 거대한 바다의 강력한 힘을 기억하며 팔뚝을 핥아 물기가 가시지 않은 채 햇볕에 달구어지는 피부의 맛을 보았다. 그는 하루 종일 멍청해질 만큼 바다에 두들겨 맞은 덕분에 환희에 젖은 데다 그 맛과 냄새에도 취해 있었다. 자신의 몸 한 조각을 이로 물어뜯어 살로 이루어진 자신의 존재를 맛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 132, 133

삼십 년 전이라면 그는, 비록 젊은 여자라고는 하나, 이 여자를 쫓아갔을 때 그 결과가 어떨지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치스럽게 거부당할 가능성은 떠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자신감이 주던 기쁨은 사라졌다. 그와 더불어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말을 주고받는 장난스러움도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불안 – 그리고 만지고 싶은 충동 – 그리고 바로 그런 몸에 대한 갈망 –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부질없음 – 그리고 자신의 비루함을 감추려고 최선을 다했고, 겉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 139

노년은 전투에요. 이런 게 아니라도, 또다른 걸로 말이에요. 가차 없는 전투죠. 하필이면 가장 약하고, 예전처럼 투지를 불태우는 게 가장 어려울 때 말이에요. - 149

자신이 없애버린 모든 것, 이렇다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스스로 없애버린 모든 것, 더 심각한 일이지만, 자신의 모든 의도와는 반대로,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없애버린 모든 것을 깨닫자, 자신에게 한 번도 가혹하지 않았던, 늘 그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던 형에게 가혹했던 것을 깨닫자, 자신이 가족을 버린 것이 자식들에게 주었을 영향을 깨닫자, 자신이 이제 단지 신체적으로만 전에 원치 않았던 모습으로 쪼그라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깨닫자,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 164

자신에게 무엇인지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할 것 같았다. 목적 없는 낮과 불확실한 밤과 신체적 쇠약을 무력하게 견디는 일과 말기에 이른 슬픔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그는 생각했다. 이거야 미리 알 도리가 없는 거지. - 167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충만함을 버리고 그 무한한 무(無)를 선택할 수 있을까? 나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냥 차분하게 누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까? - 170

우리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죠. ‘네 손이 아직 따뜻할 때 주는 게 최선이다’." - 186

그는 쓰러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불길한 운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느낌으로, 다시 충만해지기를 갈망하며 밑으로 내려갔지만, 결국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심장마비.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 -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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