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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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스타일리쉬한 소설이다. 한국을 배경으로 한 킬러의 이야기, 라고만 하더라도 흔치 않은 소재일텐데(내가 읽은 킬러를 소재로 한 소설은 김언수의 <설계자들>이나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 정도이다), 그 킬러가 노년 여성이라는 점은 이 소설을 더욱 독특하게 만든다. 수려한 만연체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조각이라는 여성과 젊은 남성 킬러의 대치, 구원(舊怨)에 의해 서로 얽히게 된 관계, 차가운 마음을 비집고 들어선 소중한 사람의 존재는 박진감 넘치는 전개, 현실 사회의 파편, 노회한 시선과 더불어 읽는 내내 감각적 요소들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이런 소재들은 대체적으로 불행하거나 허무한 죽음으로 끝나기 일쑤인데 어찌보면 그런 판에 박힌(새드 엔딩이 오히려 뻔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론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러니까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이란 으레 그렇다.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사람은 이거 오래 못 해. 그것이 분노가 되었든, 거짓말에서 비롯한 긴장이나 후회가 되었든 상관없어. 특히 모욕을 견디는 일이 제일 중요하지. 왜냐면 너는 여자고, 그만큼 현장에서 모욕을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할 일이 많을 테니까. - 48

바닥을 구르는 마른 낙엽 같은 인간들이라도 너 자신의 모든 역량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려서 상대해. 자꾸 얕봐가면서 식은 죽 먹기라고 팔랑팔랑 덤비다간 쓰지 않은 힘의 양만큼 너에게 되돌아올 테니까. 그것들이 내 명줄하고 돈줄을 쥐고 있는 고객이라고 생각해봐. - 74, 75

아이의 뺨과 귀 사이에 난 작고 귀여운 점을 보고 조각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린다. 아이의 팽팽한 뺨에 우주의 입자가 퍼져 있다. 한 존재 안에 수렴된 시간들, 응축된 언어들이 아이의 몸에서 리듬을 입고 튕겨 나온다. 누가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한 게 아닌데도, 손주를 가져본 적 없는 노부인이라도 어린 소녀를 보면 자연히 이런 감정이 심장에 고이는 걸까.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과 채워지지 않는 감각을 향한 대상화. - 96

노인은 그녀가 내민 백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떤 말이나 신호가 없이 누르퉁퉁한 손으로 받아 껍질도 까지 않고 베어 문다. 군데군데 검은 구멍이 보이는 노인의 잇새로 껍질과 살이 밀려들어가며, 한 세계가 그의 입속에서 부서지는 풍경과 함께, 입가에서부터 흥건한 즙이 흘러 손목을 타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돌아선다. - 102

정확하게는 그 의뢰인이 한때 갖고 있었던 가족, 그것을 불의의 방식으로 잃었을 때 한 사람의 정신이 얼마만 한 손상을 입는지, 과육에서 떨어져 나온 사과껍질 같은 생의 잔여를 가까이서 들여다본 것이다. - 178

그가 물 한 잔을 완전히 비우는 동안 조각은 시선을 줄곧 발아래로 떨어뜨리고 있었는데, 이런 때에 더욱 선명해지는 죄악감이란 이를테면 물을 삼키는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 같은 사소한 것에조차 심장이 술렁인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마음은 어디에도 파종할 수 없이 차가운 자갈 위에서 말라비틀어져 마땅할 터였다. - 240

한번 구축된 조직은 이미 더 큰 질서 안에 포섭이 되어버리고, 그다음부터는 그 질서가 조직을 움직이는 것일세. 기계의 부품이 모두 빠지고 더 이상 대체할 게 없어지기 전까지는 말일세. 물론 대체품은 소모되는 속도 못지 않게 양산 속도도 빠르지. - 263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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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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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Shape of Love>를 연상시키는 - 하지만 전혀 다른 종의 생물은 아닌 - '아가미'가 달린 소년(곤)이라는 독특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 소설은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세상에 홀로 남아버린 소년 앞에, 자신들과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상대를 아끼지만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또 다른 소년이 나타난다. 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중에서 '강하'라는 소년이 유독 눈길을 끄는 이유이다. 그의 거친 태도, 냉랭한 말투는 사실 증오가 아닌 사랑이었음을, 누구보다도 그를 아끼지만, 제대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자가 보여줄 수 있는 표현이라는 것이 그토록 서툴거나 심지어 반대의 의미로까지 보일 수가 있다는 것을, 작가는 이야기한다.

헤엄쳐야지 별수 있나요.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없는 물이기도 하고. - 22

곤은 자신이 언제부터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살아왔는지를 헤아리지 않았다. 비좁은 세상을 포화 상태로 채우는 수많은 일들을 꼭 당일 속보로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 없고 속도를 내면화하여 자기가 곧 속도 그 자체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아다지오와 같은 삶. 그 어떤 행동도 현재를 투영하거나 미래를 예측하지 않고 어떤 경우라도 과거가 반성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 어느 순간에도 속하지 않는 삶이었다. - 49

모두 어제가 되어 부질없어진 인물과 사건의 나열들. 현재까지 여파를 미치고는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역사라 부르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한 흐름들. 그는 과거를 명시하는 글자들을 단지 무료함으로 죽지 않기 위해서만 내려다보았다. 그가 어제의 세계를 읽는 동안 실제 세계는 변화와 요동과 전복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는 무언가를 숨 가쁘게 따라잡는 삶과 거리가 멀었다. 고인 물이나 응결된 얼음만큼의 비중을 간직하며 급속 냉각되어 빙산에 갇힌 의식만을 유지하고 살아갈, 꼭 그만큼의 열량만 있으면 되는 나날들. - 49, 50

"네? 정말로 슬프거나 최악의 상황에 놓여 더 이상 아무것도 지킬 것도 버릴 것도 없는 사람은 저렇게 술에 취해 소리칠 기운도 없을걸요. 제 눈에는 약간 불행을 전시하는 걸로 비치기도 해요."
곤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슬프다고 한 건, 저렇게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만큼 사람들마다 삶의 무게가 비슷하구나 싶어서입니다."
"그건 그러네요." - 54

조금 전까지 오감을 장착한 존재였을 살점들이 신속하게 허공을 날아 종이 접시에 착륙하여 따놓은 꽃잎 무더기처럼 소복하게 쌓이는 광경은 비현실적이었고, 곤의 눈에는 그 모든 과정이 대자연에 대한 공정치 못한 착취나 무분별한 도륙으로 보였다. - 105

남과 같지 않은 것은 그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증오의 대상이 돼요. 아니면 잘해야 동정의 대상이 되는데, 그것은 타인이 시혜하는 동정과 그에 수반하는 불편한 시선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수혜자의 합의 아래에서 보통 이루어지곤 해요. - 118, 119

다만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따로 있어요. 강하가 예전에 당신을 어떤 방식으로 싫어했든 간에, 그 삶음이 곧 증오를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걸. 그건 차라리 혼돈에 가까운 막연함이라는 걸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매 순간 흔들리고 기울어지는 물 위의 뗏목 같아요. 그 불안정함과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이 마음과 앞으로의 운명에 확신이라곤 없다는 사실뿐이지 않을까요. - 194

강하는 그 이름을 일상적으로 부르는 것조차 두려웠던 거에요. 한 번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존재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한 음절이 혈관을 부풀어 오르게 하고 마침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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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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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빨간책방>이라는 팟캐스트를 즐겨들을 때, 박준의 시 '환절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멍해졌던 기억이 있었다. 각 에피소드 맨 마지막에는 시를 낭독해주는 코너가 있었는데, 2시간이 넘는 팟캐스트 녹음의 막바지여서 그랬는지 진행자인 이동진의 다소 지친 목소리가 그날 따라 이 시의 느낌과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로 시작하는 시를 듣고서, 연예세포가 거의 전멸되다시피 한 나라고는 하지만 이런 류의 시를 접해본지도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먹먹해진 감정을 추스리기도 전에 시구를 검색하였고,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샀다.


이 책을 산 것은 그 시집을 사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시인의 첫 산문집이 나온다는 광고를 보고 예약구매를 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장을 넘겼는데 어째 잘 읽을 수가 없었다. 시를 읽고 산문집을 구매한 그 짧은 시간 차에 다시 감정이 무뎌진 것일까? 어쨌든 이 책은 미쳐 값지 못한 빚처럼 내 책장에 고이 꽂혀있었다. 해가 바뀌었고 늘 그렇듯 '정리'라는 미명 하에 책장에 꽂힌 책을 나름의 분류기준에 따라 이리저리 옮기는 짓을 하고 있을 때, 이 책을 다시 보았다. 그제서야 내가 이 책을 부푼 기대를 갖고, 그것도 '예약구매'까지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책을 옮기다 말고 표지를 열어 가볍게 훑어보기 시작했는데, 어쩐지 지금은 다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천천히 가끔은 빠르게 그의 시와 글과 생각을 읽어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장소를 기억하며 엮어낸 시나 산문이 눈에 띄었다. 인천, 경주, 여수, 협재, 벽제, 화암, 묵호, 해남, 혜화동, 삼척... 돌아다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 장소에 가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 혹은 그 사람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장소가 이토록 많다는 것은 생경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시인의 기억과 후회와 원망과 그리움을 적어 놓은 한 줄의 글귀에는 적잖은 공감이 갔다. 사람이 사는 일이라는 것이 누구를 만나, 설레고, 기쁘고, 뜨겁다가 일상이 되고, 당연시되고, 식은 줄 모르게 식어버린 것을 뒤늦게야 알고, 힘들어 하고, 멀어지고, 괴로워하고, 추억하는 것의 반복이기는 하겠지만, 몇 번을 반복한 관계라는 것이 왜 이리 매번 낯설고 어려운지.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꼭 나처럼 습관적으로 타인의 말을 기억해두는 버릇이 없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에 꽤나 많은 말을 쌓아두고 지낸다.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은 설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 19

떠나는 이를 기억하는 일은, 아직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과 꼭 닮아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 23

그해 밤 별빛은
우리가 있던 자리를 밝힐 수는 없었지만
서로의 눈으로 들어와 빛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해 여수」 - 27

환절기를 지나며 나는 더 아팠어야 했는데, 아프지 않으려 하지 말고, 일을 접어두고 병원에 가지 말고, 따듯한 물을 많이 마시지 말고, 구깃구깃한 약봉지를 뜯어 입에 털어넣지 말고, 밀린 걱정들을 떠올려가며 더 아팠어야 했는데. - 30

어떤 일을 바라거나 무엇을 빌지 않아도
더없이 좋았던 시절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날들이 다 지나자
다시는 아무것도 빌지 않게 해달라고
스스로에게 빌어야 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지금은」 - 47

마음처럼 되지 않았던 과거의 일들과 마음만으로는 될 수 없을 미래의 일들을 생각한다. 독선의 끝에는 더욱 날 선 독선이 기다리고 있음을 목격한다. "나는 시간 속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영원을 향해 몸을 돌려보았다. 발을 딛고 설 수조차 없는 곳이었다"라는 에밀 시오랑의 문장을 종종 떠올려보기도 한다.
그렇게 며칠 동안 고립의 시간을 보내다보면 그제야 내가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고 무겁게만 여겨졌던 내 인연들의 귀함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맑은 눈빛을 다시 보고 싶어한다. - 50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감정 같아.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일 텐데,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드는 그 감정이 외로움일 거야. 반면에 고독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고독해지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외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러나 다시 금세 고독해지기도 하면서." - 51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돼." - 63

어쩌면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 사랑했던 상대가 아니라,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 나의 옛 모습일지도 모른다. - 82

상대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그 누군가’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 혹은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그 사랑이 과거 ‘그 누군가’가 받았던 것이라거나, 훗날 다른 ‘그 누군가’가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로 사랑을 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은 곧잘 상한다.
하지만 생각을 한번 더 깊이 가져가보면 그리 억울해할 일은 아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대상은 ‘그 누군가’가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은 감정을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겠으나, 내가 나에게 유일해지고 싶은 감정은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라면 부를 방법이 없다. - 92, 93

나와 당신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의 사랑을 어렵게 만든다. 그 수많은 다름을 견주어보는 동시에 그 다름을 감내해내야 한다는 점이 우리의 사랑을 아프게 만든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평소 자신에게 조차 내색하지 않던 스스로의 속마음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은 대개 오랜 상처나 열등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사랑을 외롭게 한다.
하지만 나와 당신이 다르지 않다면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당신의 외모와 성격과 목소리가 자라온 환경과 어떤 것에 대해 품고 있는 마음이 나와 다르다는 점에서 사랑이 탄생한다. - 94

작은 일들은 작은 일로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큰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 101

사람에게 미움받고.
시간에게 용서받았던. 「그해 행신」 - 103

여정을 마치고 다시 돌아오던 날, 나는 처음 각오했던 한권 분량의 원고를 쓰기는커녕 몇 개의 단상만을 메모해둔 채 별 소득 없이 서울로 향해야 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낯설기만 했던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이 더없이 친숙해졌다는 것, 얼굴과 목이 많이 탔다는 것, 그리고 평소 지겹고 답답하기만 했던 원래의 내 삶의 일상과 거처가 조금 그리워졌다는 사실이었다.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 110

음식을 대하는 일이 마치 사람을 만나는 일처럼 느껴지곤 한다. 나의 오랜 버릇 중 하나는 한번 갔던 식당이 마음에 들면 몇 번이고 그곳을 찾아 매번 같은 메뉴를 먹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 인간관계를 넓히는 일 앞에서 늘 서름서름해하는 내 성격과 꼭 닮아 있다. - 112

가난 자체보다 가난에서 멀어지려는 욕망이 삶을 언제나 낯설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 136

사상까지는 못 되지만 사유하며 살아가고 혁명은 어렵지만 무엇인가를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내가 가닿고 싶어하는 어른됨 또한 그리 비범한 것은 아니다. - 146

그런데 나이를 한참 먹다가 생각한 것인데 원래 삶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겠더라고요. 다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나이 먹는 일 생각보다 괜찮아요. - 148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 157

하지만 아무리 무겁고 날 선 마음이라 해도 시간에게만큼은 흔쾌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 여긴다. -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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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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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타 크리스토프. 저자의 이름만으로 책을 살 이유는 충분했다. 출간소식을 듣고 집 근처 서점에 갔는데, 아직 구비가 되지 않아 알라딘에 주문을 했다. 기다리는 내내 마음이 설랬다. 이름만으로 설렘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작가가 그리 많지 않은 요즘이다. <문맹>을 기다리면서, 그의 전작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다시 조금 읽다가 덮었다. <문맹>을 완독한 후 다시 읽어볼 요량으로. 모든 책은 다시 읽혀야 한다는데, 이번에는 <문맹>이 그 분수령이 될 것 같았다.


책을 받았다. 표지도, 제목도, 저자의 이름도 마음에 든다. 책을 폈다. 그런데... 어? 


예쁘장한 양장본인 것까지는 좋은데 12x18(cm) 크기의 책에 좌우 2cm, 상하 각각 2, 3.5cm씩 큼지막한 여백을 두었다. 그리고 페이지 안에 (그다지 예쁘지도 않은) 테두리를 두었다. 그 한 페이지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있는 글자수가 250자 정도는 될까? 너무나도 쉽게 넘어가는 책장의 느낌이 내 갈급했던 기다림도, 작가의 진중한 고백도, 가볍게 희석시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쓸데 없는 여백과 디자인을 줄이면 책은 절반정도의 분량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독자들이 책의 디자인을 중시하고, 문고본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이런 낭비스러운 편집은 오히려 책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 같다. 아무튼, 책을 받았을 때의 기쁨은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반감되었고, 그 기분은 꽤 오래 갔다.


'모든 소설은 결국 자전적'이라는 말을 곱씹어본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었을 때에는 심리적인 묘사나 등장인물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사건과 행동만을 서술하면서도, 서사만으로 완벽하게 감정까지도 잡아낼 수 있다는 것에 적잖이 놀랐었는데, 그 책을 읽고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아고타 크리스토프라는 사람, 그가 속해있던 국가인 헝가리, 그가 처해 있던 사회인 스위스, 그가 몰린 상황에서 미숙한 외국어인 프랑스어(그의 말에 따르면 '적의 언어')로 써내려간 소설의 배경을 알게 됨으로써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전쟁이라는 물리적 상황으로 인해 분열된 내적 자아, 감정을 배제한 채 짧고 간결할 수밖에 없었던 언어적 사회적 한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은 덕에 탄생한 이야기. 


이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모든 것을 읽는다. - 9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 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내 곁을 맴돌다, 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 - 34

그렇게 해서 스물한 살 나이로 스위스에, 그 중에서도 전적으로 우연히 프랑스어를 쓰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벽한 미지의 언어와 맞서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이 언어를 정복하려는 나의 전투, 내 평생 동안 지속될 길고 격렬한 전투가 시작된다. - 52

사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사막, 문화적 사막,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열광이 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사적인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 - 89

우리는 이곳에 오면서 무엇인가를 기대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몰랐지만 틀림없이 이런 것, 활기 없는 작업의 나날들, 조용한 저녁들, 변화도 없고 놀랄 일도 없고 희망도 없는 부동의 삶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 90, 91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더 이상 슬퍼할 필요도 없고, 내가 지금 안전하다고 말한다. 나는 웃는다. 나는 그에게 소련인들이 무섭지 않고 만약 내가 슬프다면 그것은 오히려 지금 너무 많이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직장과 공장, 장보기, 세제, 식사 말고는 달리 생각할 것도, 할 것도 없기 때문이라고, 잠을 자고 내 나라 꿈을 조금 더 오래 꿀 수 있는 일요일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에게 말하지 못한다. - 90, 91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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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내전 - 생활형 검사의 사람 공부, 세상 공부
김웅 지음 / 부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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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을 그대로 따서 살짝 바꾼 제목의 무성의함, 표지 디자인, 게다가 저자가 검사... 내가 좋아할 요소는 하나도 갖추지 않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사서 읽은 것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꽤 오래 머물러 있는 책이라면 괜찮은 책일 가능성이 높다는 알라딘 독자들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철지난 베스트셀러를 읽어본 결과 이러한 나의 편향을 실제로 몇차례 깨뜨렸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심스러움(?) 때문에, 유행이 지난 책을 뒤늦게 읽곤 하지만...


우선, 저자의 소개를 보았다. 문유석 판사도 그렇지만 요즘 법조계에서는, 누구보다 조직적일 것 같은 분들이 실상 '조직에 적응 못'한다는 커밍아웃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곤 한다. 이런 책을 쓰기 위해서는 조직에 적응 못한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는 분들이 이런 책을 쓰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책 날개를 보았을 때만해도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저자에 대한 의심, 몇몇 사건 이야기와 더불어 간단한 팁과 함께 훈장질이나 했을 것이라는 내 예상은 처참하게 무너졌고,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들어 '낄낄'거리며 책장을 넘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개체 수로만 따진다면 개미가 지구의 왕이다", "만만한 데 말뚝 박고, 생가지보다 마른 가지를 꺾는 법이다", "18급 100명이 머리를 짜낸다고 이창호 국수를 이기는 것은 아니다"라는 참신한 표현들 앞에서는 무장해제가 되어버렸고, "논리와 이성의 천적은 부조리가 아니라 욕심이다", "제대로 충고하려면 애정을 빼고, 주저하지 말고, 심장을 향해 칼을 뻗듯 명확하고 고통스럽게 해야 한다", "좋은 것을 굳이 광고까지 해서 당신에게 알려주는 선의란 없으며, 만약 그런 게 있다 해도 절대 당신의 순번까지 돌아오지는 않는다"라는 충고들은 읽는 내내 머릿속에 박혀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1장 '사기 공화국의 풍경'에서는 우리의 탐욕이 빚어낸 이 시대의 자화상을 날카롭고 재치 있게 그려낸다. 읽을 때는 재미있게 읽지만 그 뒷맛은 씁쓸하면서도 안타깝기만 한 사건 이면의 이야기들은 2장 '사람들, 이야기들'에서 이어진다. 3장 '검사의 사생활'에서는 그가 프로필에서 밝혔던 조직 부적응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도 대한민국 검사라면 자신도 모르게 조직과 자기 스스로에 대한 권위의식이 굳건히 쌓였을 법도 한데, 스스로를 '당청꼴지 또라이'라 칭하면서 민낯을 보여준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4장'법의 본질'에서는 죄와 벌의 가장 심층적인 관계인으로서 법이 갖는 의미를 설명한다. 3장까지의 흐름에 비해 보다 진지하고 학술적인 서술이어서 흥미가 다소 떨어지는 감이 없지는 않으나, 에피소드로만 일관하여 책 한권을 끝맺었다면 다 읽고 난 후의 느낌 또한 허무했으리라. 초반에는 독자들에게 거부감 없이 사건에 대한 에피소드로 시작하여, 마지막은 이러한 에피소드와 그에 따른 교훈이 갖는 의미를 법, 재판, 국민참여, 형벌, 형평 등 피상으로서가 아닌 본질로서 법을 비롯한 관련 이념과 제도의 의미를 한번 더 생각해보자는 것은 괜찮은 시도였다고 본다.


추천사를 쓴 김민섭 작가의 권유대로 "나는 어떤 물음표를 가지고 살고 있는지, 어떤 눈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지"와 같은 심도 깊은 성찰까지는 무리였지만, 그의 표현대로 '아, 역시 잘하는 놈들은...'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에세이라고 생각한다.

곤경에 처했을 때 가장 쉽고 효과적인 해결책은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모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함은 터무니없을수록 효과적이다. - 49

숫자는 때로 별 의미가 없고 오히려 본질을 흐릴 때도 있다. 개체 수로만 따진다면 개미가 지구의 왕이다. - 56

우리는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꽤 오랜 기간 동안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흔히 수학, 과학을 배우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 굳이 수학과 과학을 배우는 이유는 이성과 논리에 따라 판단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함이다. 물론 대부분 그런 과학적인 사고체계는 졸업장 속에 남겨두고 나온다. 그래서 고등교육 과정을 마쳤음에도 우리는 미신과 우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오류와 맹신의 순교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 62, 63

논리와 이성의 천적은 부조리가 아니라 욕심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주성분은 욕심, 욕망, 욕정이다. 우리는 ‘욕심’이라는 거친 바다 위를 구멍 뚫린 ‘합리’라는 배를 타고 가는 불안한 존재들이다. 마땅히 쉼 없이 구멍을 메우고 차오르는 욕심을 퍼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욕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허세를 부린다. 그래서 우리는 욕심으로부터 논리와 이성을 지켜내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그 결과 아무리 허술한 속임수라도 피해자의 욕심과 만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된다. - 63

최근 뇌과학에 따르면 감정이 시성에 우선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한다. 외부 자극에 대한 감정적 반응은 이성적 반응에 비해 짧은 회로로 진행하기 때문에 이성적 인식이 나오기 전에 이미 감정이 결론을 내리고 인식은 그에 따를 뿐이라고 한다. 우리가 저지르는 오류도 마찬가지다. 감정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목사님이 허술한 사기에 속은 것은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치밀한 수에 속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에 당한 것이다. 인식의 오작동을 낳는 것은 그보다 재빠른 감정, 즉 욕심 때문일지 모른다. 오류에 빠진 사람들이 어떠한 사실과 증거에도 결코 그 오류를 수정하지 않는 강한 변화 저항성을 지니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 70

흔히 사람들은 여럿이 모이면 좀 더 나은 판단을 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집단지성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18급 100명이 머리를 짜낸다고 이창호 국수를 이기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여럿이 모일수록 그 집단이 빠진 오류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오류에 빠진 사람이 같은 오류에 빠진 사람을 만나면 서로가 서로에게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 78

선의는 자신이 베풀어야 하는 것이지 타인에게 바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기도 마찬가지다. 사기꾼은 없는 사람, 약한 사람, 힘든 사람, 타인의 선의를 근거 없이 믿는 사람들을 노린다. - 86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가소로웠다. 일단 우리에게 꽃다운 청춘이란 것은 없었다. 꽃다운 청춘이란 드라마 주인공이나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젊었을 때도 지금처럼 구질구질했고 늘 허덕거렸다. 게다가 목 좋은 곳의 카페와 함께하는 여유로운 노년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건 서울의 건물 같은 것이다. 지천으로 깔렸는데 우리 몫은 없다. 그런 망상에 가까운 희망은 망하는 게 당연한 우리나라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87

제대로 충고하려면 애정을 빼고, 주저하지 말고, 심장을 향해 칼을 뻗듯 명확하고 고통스럽게 해야 한다. 듣는 사람의 기분까지 감안해서 애매하게 할 거면 아예 안 하는 것이 낫다. - 96

그냥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은 모조리 거짓말이다. 좋은 것을 굳이 광고까지 해서 당신에게 알려주는 선의란 없으며, 만약 그런 게 있다 해도 절대 당신의 순번까지 돌아오지는 않는다. - 97

그러나 사건들은 시나리오처럼 뚜렷한 모습을 가진 것이 아니다. 선과 악이, 원인과 결과가 그렇게 쉽게 구분될 수 없다. 만약 쉽게 구분된다면 그건 감정 탓이다. 감정이 이끄는 결론과 확신은 편하지만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 112

피해자와 목격자 두 명의 진술이 할아버지 한 명의 진술보다 우월하다고 볼 수는 없다. 진실은 다수결이 아니다. - 127

사람들은 늘 진실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분노할 대상이 필요한 것뿐이다. 그래서 언론은 공정한 수사와 재판보다는 대부분 흥밋거리에 집착한다. 위기관리 전문가 에릭 데젠홀(Eric Dezenhall)은 이렇게 말했다. "뉴스 매체는 결코 타락할 수 없는 공명정대한 존재가 아니라 진실과 아무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상처 입히려는 강한 욕구를 가진 영리 기업일 뿐이다." - 164

애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정의를 강제적으로 지키기 위해서 자연은 인간의 뇌 속에 정의를 침범했을 때 동반되는 처벌에 상당하는 의식, 상응하는 처벌에 대한 공포를 인류 결합의 위대한 보증으로서 심어둔 것이며, 이것이 약자를 보호하고 폭력을 누르고 죄를 응징하게 하는 것이다." - 190

그런데 여기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란 눈물 흘리기 좋은 감성적인 소재가 아니다.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냉철하고 엄중한 과제이자 요구이다. 존엄한 것은 함부로 대할 수 없고, 훼손될 경우 반드시 응분의 대가가 따라야 한다. 마음대로 짓밟고 아무런 책임도지지 않는다면 그건 존엄한 것이 아니다. 짓밟힌 것이 오히려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간청해야 한다면 그건 존엄한 것이 아니다. 존엄한 것은 두려운 것이고 원시적인 것이다. 지켜지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 193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말했다. "진정 용서하고 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응징 혹은 정당한 징벌을 가하는 것이다. 죄인이 적절하게 징벌되고 나서야 나는 앞으로 움직일 수 있고, 그 모든 일과 작별할 수 있다." - 194

충언은 몸에 해롭다. 왕의 몸이 아니라 충신의 몸에. - 231

양념과 아부는 비슷하다. 재료가 좋으면 별로 필요 없다. 원물의 질이 떨어지니 양념으로 미각을 속이는 것이다. 게다가 양념과 아부는 한번 넣기 시작하면 점점 더 많이 들어간다. - 233

사실 의지로 되는 것은 거의 없다. 의지란 아주 극단적인 상황에서 예외적으로만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고, 대부분은 여러 가지 여건이 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우연한 행운을 마치 노력의 대가인 것처럼 속이기 위해 동원하는 말이다. - 242, 243

모든 현상에는 이면과 원인이 있다. 대개 여러 개의 원인들이 경합하며, 그것들이 화학적인 결합을 하여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현상에서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인터넷 댓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인을 찾아내는 능력이 아니라,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무척 어려운 과학적 추론이 필요하며 자신은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실패에 대한 인식이다. 원인을 찾아내는 것보다 자신이 틀릴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 258

선의가 꼭 좋은 결과만 낳는 것이 아니다. 물론 부작용은 시차를 두고 발생하기 때문에 정상배들은 늘 선의만 강조한다. 표는 지금 받는 것이고, 책임은 나중에 지면 되기 때문이다. - 286

프로이트가 말하길 이 세상의 현상을 알고자 한다면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의 공감과 반감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두 극단적인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게다가 정치인들이 연출해낸 적대적인 상황은 ‘무관심도 적으로 간주’하는 문화와 ‘공격을 참여라고 생각’하는 돌림병을 낳았다. 적대적인 정치 환경은 무관심할 자유도 주지 않는다. 잘못된 정치에 동조하지 않고 거기에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할 자유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때만 되면 투표가 세상을 바꾸고, 투표율이 높을수록 선진국이라는 말이 아무런 고려도 없이 주술처럼 떠돈다. -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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