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비잔티움 연대기>를 다시 읽고 있다. 지금 2권을 읽고 있는데 소생은 일명 '크리스마스의 비극'부분에 이르러서 그만 무릎을 탁! 치고 '하!'하면서 깊은 탄식을 터뜨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예전에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다시 읽어도 역시 놀랍다. 사람들은 마치 천세만세만만세를 살듯이 날뛰지만 인간사란 정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다. 아하!! 역사를 읽는 것이 과연 누구에게 무엇이 이로운가 모르겠따. 일없는 호사가들의 흥미와 호기심만 부질없이 자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럼 크리스마스의 비극이란 대체 무엇인가?
‘2009년 서울 LGBT 영화제’ 개막작으로 《크리스마스에 생긴 일》이라는 미국 영화가 있었다. 원제는 ‘Make The Yuletide Gay’.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내세요’ 라는 말인데 중의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gay는 ‘즐거운, 명랑한’의 뜻이지만 다들 잘 아시다시피 ‘남자동성애자’라는 뜻도 있는 것이다. 그럼 LGBT는 뭔가? ‘성소수자’라는 말이다. 소생도 이 글을 쓰면서 처음 알았다. 흔히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단어로는 ‘이상한’, ‘색다른’의 뜻을 가진 ‘퀴어(Queer)’를 많이 사용한다. LGBT는 보다 사전적인 의미여서 조금 딱딱한 느낌이다.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성전환자(Transgender)의 머릿글자를 딴 것이다. 무슨 퀴어 축제도 있고 LGBT 영화제도 있다. ‘세상이 어찌 될려고 이러는지....쯔쯔즈’ 하는 어르신들의 걱정과 탄식에도 나름의 일리는 있을 것이나 역시 마이너는 메이저보다 좀 더 외롭고 좀 더 아프고 좀 더 슬프고 좀 더 쓸쓸하기는 한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대학 졸업반인 올라프는 게이다. 크리스마스 휴일을 부모님과 함께 보내기 위해 고향집을 찾는다. 올라프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커밍아웃을 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고 있다. ‘엄마, 아빠 저.... 사실은 게이에요....’이런 심각한 고백을 하기에 크리스마스가 뭐 적당한 길일은 아닌 것 같지만(써프라이즈를 하기에 크리스마스는 이미 놀라운 날이 아닌가 말이다.) 어쨌든 올라프는 그렇게 하기로 작정을 했던 것이다. 고향집에 도착한 올라프에게 남의 속도 모르는 엄마는 자꾸만 한때 여자 친구였던 애비와 올라프를 엮어보려고 애를 쓴다. 설상가상으로 올라프의 남자친구(그러니까 애인) 네이단이 갑자기 올라프를 찾아오면서 일이 꼬이게 되는데... 커밍아웃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잃게되지는 않을까 고민하는 올라프는 과연 크리스마스에 가슴아픈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소생은 이 영화를 못봐서 결말을 모른다. 코미디 영화여서 결말이 그리 심각하지는 않는 듯하다. 우리식으로 하자면 ‘아이고 이 자식아! 그기 무슨 소리고? 고마 니 죽고 내 죽자’, ‘아이고, 폭폭해서 나는 못살겟네...어쩌고 저쩌고’ 엄마는 아들의 등짝을 후려치고 방바닥을 내려치고 발을 구르고 울고 짜고, 아버지는 돌아서서 금붕어마냥 담배만 뻐꿈뻐꿈굼거리고 이리 되었을 것인데 뭐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다. 나름의 반전이 있는 훈훈한 결말이라고 인터넷에 소개되어 있다.
어쨌든 올라프에게는 뭐 그리 나쁜 크리스마스는 아니었던 것인데, 세상일이란 것이 또 대충 그렇듯이 크리스마스라고 다 훈훈할 수는 없다. 늙은 구두쇠 스크루지는 크리스마스에 교훈적인 꿈을 꾸면서 개과천선하고, 어린 소년 막걸리 컬킨은 홀로 남겨진 집에서 흥미진진한 크리스마스를 보냈지만 1200여년전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 레오5세가 맞이한 크리스마스는 악몽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바로 죽음이었다. 아마 서기 820년의 성탄절은 동로마제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크리스마스일 것이다. 배신과 음모, 시해와 찬탈에 대한 그 놀라운 스토리는 후세의 감수성 풍부한 어느 사가가 조금 손을 댄 듯도 하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고대 희랍의 비극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군대생활을 시작할 무렵부터 레오에게는 미카일이라는 절친한 동료 장교가 있었다. 프리지아의 아모리움 태생인 미카일은 일자무식에, 시골 촌놈에, 발성기관에 문제가 있어 ‘말더듬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다. 하지만 군사적 재능은 뛰어났던 모양이다. 이런 저런 사태에서 미카일은 레오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고 마침내 미카일의 도움으로 레오는 제위에 오르고 미카일은 황궁 경비대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레오가 처음 황궁에 입성하는 날에는 황제가 말에서 내릴 때 미카일은 실수로 황제를 외투를 밟는 작은 사건이 있었다. 어쨌든 황제의 절친 동료로서 미카일은 부와 명예, 군대의 지휘권으로 보상을 받았으나 동료가 가진 제국이라는 큰 떡에 비하면 자신이 가진 것이 너무 초라하다고 느끼게 되었는지 점차 현실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공공연하게 황제를 잔인한 전제자라고 강력하게 비난하고 다녔다. 황제는 전우의 잘못을 지적하고 경고하고 또 거듭 사면하는 등 관용을 보였으나 미카일은 반성하거나 자중하지 않았다. 급기야 크리스마스 이브날 미카일이 주도하고 고위 장교들이 연루된 반란 음모가 발각되었다. 황제는 믿었던 친구이자 동료의 반역에 불같이 화를 내면서 미카일을 당장 황궁의 목욕탕 아궁이에 쳐넣어 태워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일이 그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이 소식을 들은 레오의 아내가 버선발로 남편에게 달려와서 이제 조금 있으면 크리스마스인데 그런 끔직한 짓을 하고 어떻게 성탄설의 성사에 참석하겠느냐며 황제를 극구 만류했다. 아내의 만류가 없었다면 그날이 성탄절이든 석가탄신일이든 시간이 한밤중이든 꼭두새벽이든 간에 황제의 명령은 엄정하게 집행되었을 것이다. 미카엘은 아궁이에 쳐넣어지고 따라서 크리스마스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애원에 레오는 마음을 바꾸었다. 뒤에 보게 되겠지만 이 순간의 변심이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
황제는 미카일을 쇠사슬에 묶어 황궁의 지하 감옥에 가두고 엄중히 감시하라고 명령했다. 그러고는 잠자리에 들었으나 황제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미카일이 자신의 외투를 밟아 황제의 기장이 떨어질 뻔 했던 일과 또 최근에 읽은 예언서에 그리스 문자인 카이(X)와 파이(Φ) 사이에 칼에 목이 찔린 사자가 그려진 그림을 보지 않았던가. 사자가 황제를 가리키고 카이가 크리스마스를 나타내고 파이가 예수공현축일을 나타낸다면 본인이 두 축일사이에 죽는다는 예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저런 잡생각으로 전전반측하던 황제는 갑자기 미카일이 어떻게 있는지 궁금했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황제는 한밤중에 촛대에 불을 켜들도 옷자락을 끌며 구불구불한 황궁의 복도를 지나 깊은 돌층계를 타고 내려갔다. 감방 안으로 들어서니 간수는 바닥에 누워 잠들어 있고 죄수도 자기 침상에서 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않아 황제는 미카일의 가슴에 가만히 손을 대어보았다. 심장은 뛰고 있었다. 레오는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나 레오는 감방 안에 제3의 인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미카일의 시종 한 명이 같이 있었는데, 이 시종은 누군가 오고 있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재빨리 미카일의 침상 밑으로 숨었다. 침상 밑에서 시종은 황제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으나 황제만이 신을 수 있는 자주색 장화를 보고는 그가 누군지 바로 알수 있었다.
황제가 돌아간 후 시종은 즉시 주인과 간수를 깨우고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했다. 죄수는 근무태만으로 처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 기꺼이 죄수를 돕겠다고 나섰다. 미카일은 충직한 시종 한 명을 급히 시내로 보내 추종 세력을 규합하여 황제를 시해하고 자신을 구해내도록 음모를 꾸몄다. 하인은 신속하게 움직였고 반역의 음모는 곧 실행되었다. 크리스마스 새벽에 음모자들은 수도사의 복장을 하고 황궁 예배당으로 들어가 합창단원들 틈에 끼었다. 수도사의 넉넉한 복장은 칼 따위의 무기를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고 머리에 쓰는 큰 고깔같은 모자는 얼굴을 숨기기에 적합했다. 합창이 시작되자 황제가 도착했고 사제와 함께 자리에 앉아 찬송가를 불렀다. 주를 찬양하는 찬송가의 노랫소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암살자들은 공격을 개시했다. 머리에 덮어쓴 고깔모자 때문에 처음에 자객들은 사제를 황제로 오인해서 헛된 칼질을 했고 그 틈을 이용해서 비무장에 호위도 없던 황제는 제단의 무거운 십자가를 들고 자신을 방어하려고 했다. 황제는 자객들에게 자비를 요청했으나 암살자들은 무시했다. 한 자객의 일격에 십자가를 잡고 저항하던 황제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다. 연이어 다른 칼날들이 황제의 목과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황제의 몸에서 뿜어져나온 피는 황궁 예배당의 돌바닥을 적시며 흘렀다. 레오5세는 성탄절날 새벽에 예배당 제단 바로 아래에서 살해되었다. 시신은 예배당의 공동 변소에 버려졌다. 이로서 레오5세의 치세는 끝났다. 서기 820년 12월 25일 새벽4시경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있었던 일이다.
<추신>
그 후 암살자들은 서둘러 미카일이 갇혀있는 감옥으로 가서 그를 구해내었으나 안타깝게도 두 발목에 채워진 족쇄는 풀 수가 없었다. 제국의 새 황제는 양 발목에 무거운 쇠사슬 족쇄를 찬 몸으로 제위에 올랐다. 정오가 되어서야 대장장이가 와서 족쇄를 끊었다. 이전에도 황제가 시해된 경우는 있었으나 이번처럼 별다른 명분이나 구실도 없이 무자비하게 해치운 적은 없었다. 시해의 동기는 오로지 미카일 개인의 시기심과 야심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새 황제 미카일이 촌스럽고 무식하다고 비웃었다. 자기이름인 그리스 철자 여섯 자를 쓰는 시간에 다른 사람은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한 점은 이 일자무식인 비열한 찬탈자의 치세가 그리 허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면, 미카일에게는 어쩌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황후 테오도시아는 어떻게 되었나? 《비잔티움 연대기2》에는 그 후일담이 자세하게 나와 있지는 않다. 아마 마르마라해에 있는 프린키포 섬에 유배된 듯 하다. 레오의 네 아들에게는 거세의 명령이 떨어졌다. 막내는 수술 도중에 죽었고 살아남은 세 아들 중 한명은 나중에 시라쿠사 대주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