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카프 궁전의 처음 출입문인 황제의 문에서 담장을 따라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이 나온다. 박물관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귈하네 공원 입구다. 세계 5대 고고학박물관 중 하나라는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은 세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유명한 카데쉬 조약 점토판 등 히타이트와 바빌로니아의 유물을 전시한 고대동방박물관과 알렉산더 대왕의 석관 등 그리스와 비잔틴 시대의 조각상들을 모아놓은 고고학 박물관, 그리고 타일 장식품과 도자기 작품들이 전시된 타일 키오스크 박물관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대 동방 박물관에서는 우선 고대 바빌로니아의 느부카드네자르 2세의 궁전에서 가져왔다는 화려한 색채의 타일 부조가 볼만하다. 사자, 유니콘 등이 타일로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 느부카드네자르가 누군가 하면, 유대왕국을 멸망시키고 수십만의 유대민족을 노예로 삼아 바빌론으로 끌고간 바로 그 사람이다. 성경에는 느브갓네살로 등장하는데 말하자면 유대민족의 원수다. 노예로 끌려온 유대인들의 삶은 참담했을 것이다. 역사는 이를 '바빌론 유수'라고 한다. 보니엠이 노래 불렀다. 연식 좀 되신 분들은 알쥬바빌론 강가에서(Rivers of Babylon)는 디스코 풍의 흥겨운 노래지만 가사는 애절하다. (노예로 끌려온 유대인들이) 바빌론 강가에 앉아 떠나온 고향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다는 내용이다. 이게 또 코메디 프로에서는 다들 이불 개고 밥먹어로 개사되어 사람들을 웃겼다. 한 민족의 한 맺힌 역사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씁쓸한 일이기는 하나 뭐 어쩌겠나 너무 깊이 들어가면 모두가 피곤하다

 

 

 

 

 

 

 

 

 

  

 

이 박물관에서는 하이라이트는 역시 카데시 조약 점토판이다. 세계 최초의 성문 국제조약이라고 한다. 물론 발견된 것 중의 최초이리라.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에 깨알같이 작은 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점토판의 크기는 가로 13.8센티미터 세로 17.6센티미터 정도다. 당시의 국제어인 아카드어로 적혀있다고 하는데 소생이 보기에는 무슨 작은 칼자국 같은 걸 빽빽하게 새겨놓은 것만 같다. 이런 걸 볼 때마다 느끼지만 저 글자같지도 않은 것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을 해내었는지 소생같은 아둔한 인사는 몇 번을 죽었다가 깨어나도 모를 일이다. 그저 놀랍고 생각하면 감탄스러울 뿐이다.

 

BC 1286, 한창 뻗어나가던 이집트 왕국의 람세스 2세는 정예부대를 이끌고 장장 1600킬로의 대원정을 감행하여 지금의 시리아 남부에 위치한 카데쉬에서 소아시아지역의 강자인 히타이트 왕국의 무와틸리 2세와 한판 붙었다. 이른바 카데쉬 전투다. 진짜 전투는 오론테스강 서안의 평원에서 벌어졌다. 히타이트의 함정에 빠진 람세스 2세의 이집트군는 거의 몰살당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궤멸 직전에 원군이 도착해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전투로 이집트는 많은 손실을 입었고 히타이트는 사실상 승리를 하긴 했지만 더 이상의 확전을 바라지 않아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무와탈리 2세가 죽고 그 아들 무르실리 3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무와탈리 2세의 동생인 하투실리 3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차지했다. 하투실리 3세는 외교에 능했다. BC 1269년 람세스 2세와 하투실리 3세가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것이 카데쉬 조약인데 내용이 현대의 평화협정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조약 체결 뒤 두 나라는 60여년 동안 평화를 유지했다. BC 1245년에는 하투실리 3세의 딸이 람세스2세에게 시집을 오고 하투실리 3세의 아들 투달리야 4세는 람세스 2세의 누이와 결혼하기도 했다

 

카데쉬 조약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이집트 땅의 대왕 람세스와 히타이트 영토의 대왕 하투실리 사이의 영원한 평화와 우정을 위하여 조약을 맺는다.”로 시작되는 이 조약문은 전쟁의 중단, 요청 시 상호 군사 원조 약속, 상호 약탈 금지, 도망 병사는 본국으로 송환하나 송환된 병사는 사면해야 하며 그 병사와 관련하여 연좌제 등 처벌하진 않는다, 하투실리 자손들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람세스2가 도와준다. 카데쉬와 아무르는 히타이트 지배하에 있다는 등의 내용이다. 도망 병사 사면 및 연좌제 처벌 금지 조항은 인도적 배려가 돋보이기는 하나 내정 간섭적인 면도 없지 않는데 어떻게 이런 조항이 들어갔는지 궁금하고 놀랍다. 카데쉬가 히타이트의 지배하에 있다는 조항은 결국 전쟁에서 히타이트가 이겼다는 뜻일 것이다. 람세스는 카데쉬에서 이집트가 이겼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여러 신전과 무덤에도 그렇게 기록했다. 역사 왜곡은 요즘도 횡횡하고 있으니 고대라고 다를 리가 없다.

 

히타이트는 BC 18세기에서 BC12세기까지 지금의 터키 지역인 아나톨리아의 하튜사를 중심으로 번성한 왕국이다. 최전성기인 BC 14세기에는 아나톨리아 대부분과 시리아, 레바논, 메소포타미아 일부 지역까지 장악한 제국을 형성했다. 이집트가 아직 청동기 무기로 싸울 때 벌써 철제 무기를 사용했으며, 전차 다루는 기술이 아주 뛰어났다. 위용을 떨치던 제국은 동쪽의 아시리아의 압박과 그리스계 해상민족의 침입으로 BC 1180년경 허망하고도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이했다. 그리고.... 3,000여년간 아무도 그 제국을 기억하지 못했다. 제국은 완전히 잊혀졌다. 컴컴한 망각의 늪 속에 침몰해 있던 제국을 인양해 세상에 알린 사람은 바로 독일의 고고학자 빙클러였다.

  

19세기 중엽 유럽의 고고학자들이 터키의 보가즈쾨이에서 고대 도시의 흔적을 처음 찾아냈고 19세기 말엽에 프랑스 고고학자가 비로소 보가즈쾨이를 발굴하고 처음으로 쐐기문자가 적힌 점토판을 발견했다. 1906년 독일과 터키의 합동조사로 보가즈쾨이에서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독일 학자 휴고 빙클러와 테오도르 마크리다는 카데쉬 조약 점토판을 손에 넣었다. 점토판은 당시의 국제어였던 아카드어로 새겨져 있었다. 빙클러의 발굴 작업은 무지막지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미 수메르어와 아카드어의 쐐기문자를 해독했던 그는 자신의 관심대상인 쐐기문자 점토판만 집중적으로 발굴하게 하고는 다른 것들은 망가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이 점토판으로 빙클러는 자신이 사라진 히타이트 제국의 왕실문서보관소를 발굴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보가즈쾨이가 바로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 하투샤였던 것이다.

 

빙클러는 이 곳에서 히타이트어로 된 쐐기문자 점토판도 엄청나게 발굴했다. 히타이트어 쐐기문자는 당시에는 미지의 언어였다. 언어학자들이 풀어야 할 수수께기였는데, 이 중대한 일은 오스트리아 군대에 중위로 근무하고 있던 체코인 베드리히 흐로즈니에게 맡겨쪗다 . 26세에 빈의 아시리아 학과 교수가 된 이 언어학의 천재는 이미 수메르어와 아카드어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여러 고대 언어에 정통해 있었다. 피땀의 노력에 행운 역시 거들어서 흐로즈니는 히타이트어 쐐기문자를 해독해냈다. 남은 것은 발굴된 엄청난 양의 점토판을 해석하고 연구하는 일이었다. 그 일은 하투샤 발굴을 주도한 독일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렇게 해서 밝혀진 히타이트의 역사는 엄청난 것이었다. 말그대로 점토판이 살려낸 역사였다.

 

 

 

 

 

 

 

 

 

 

 

 

원래 카데쉬 조약의 원본은 은판에 새겨졌다고 하는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금은 어데갔는지 찾을 수 없고 빙클러는 복사본 점토판 3개를 발굴했다. 하나는 베를린 박물관에, 둘은 여기 터키의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빙클러가 발굴한 점토판과 똑 같은 내용이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에도 새겨져 있다. 육로로 2000킬로나 떨어진 두 장소에서 3000년이나 지난 동일한 문서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오늘날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 건물 입구에 카데쉬 조약문의 확대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간절한 마음의 표시겠지만 복사판 하나 가져다 놓는다고 뭐 변하는 건 없다. 말하자면 가오잡는 것이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봐도 이미지를 찾을 수 없다. 뉴욕에 직접 한번 가봐야겠다. 갈 수 있다면 말이죠... ㅋㅋㅋ

 

 

 

 

 

 

 

 

 

 

 

 

터키 고고학 박물관 입구

 

 

 

3000살 먹은 돌사자 앞에서 재롱부리는 8살 혜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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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9-10 15: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점토판이 풍화 작용을 견딘 게 참으로 신기해요. 전시된 점토판이 거의 부서지기 직전인데 고대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걸 처음에 발견했다면 하찮은 돌무더기로 봤을 겁니다. ^^

붉은돼지 2015-09-17 12:50   좋아요 0 | URL
저도 그게 정말 신기합니다. 대리석도 아니고 돌도 아닌 점토판이 말이죠....
빙클러는 보가즈쾨이에서 엄청난 양의 점토판을 발굴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히타이트 제국의 왕실 문서고였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