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웅의 시집 <마징가 계보학>을 읽다가 옮겨본다. 김종해시인의 공구가 어쩌고 저쩌고 하던 시 <항해일지>가 생각난다. 얼마전에 덕수리오형제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나는 혹시 권혁웅의 이 시가 원작인가 싶어 찾아보니 그건 아니다. 윤상현, 송새벽이 출연하는 코메디 영화인데 관객을 끌지 못한 것 같다. 별이 3개 평점이 6.2다. 옛날에 장정일의 시 <301, 302>도 영화화가 된 적이 있었는데 황신혜가 나오고 음식으로 어쩌고 하는 영화인데 역시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도 옛날에는 시 좀 읽었는데(물론 쓴 것은 아니고) 요즘은 통 손이 가질 않는다. 그 시절에는 창비와 문지 시인선을 모두 사 모으는 것이 꿈이었다. 스러진 꿈을 다시 일으켜 세워볼까하는 생각도 들지만 또 생각해보면 돈은 없고 사 모을 책은 많고 집구석은 좁고...
독수리 오형제 - 권 혁 웅
0. 기지(基地)
정복이네는 우리집 보다 해발 30미터가 더 높은 곳에 살았다 조그만 둥지에서 4남 1녀가 엄마와 눈 없는 곰들과 살았다 곰들에게 눈알을 붙여주면서 바글바글 살았다 가끔 수금하러 아버지가 다녀갔다
1. 독수리
큰 형이 눈 뜬 곰들을 다 잡아 먹었다 혼자 대학을 나온 형은 졸업하자마자 둥지를 떠나 고시원에 들어갔다 형은 작은 집을 나와서 더 작은 집에 들어갔다 그렇게 10년을 보냈다 새끼 곰들이 다 클 만한 세월이었다
2. 콘돌
둘째 형은 이름난 싸움꾼이었다 십대 일로 싸워 이겼다는 무용담이 어깨위에서 별처럼 반짝이곤 했다 형은 곰들이 눈을 뜨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다 둘째형이 큰집에 살러 가느라 집을 비우면 작은집에서 살던 아버지가 찾아왔다
3. 백조
누나는 자주 엄마에게 대들었다 엄마는 왜 그렇게 곰같이 살아! 나는 그렇게 안 살아! 눈알을 박아넣는 엄마 손이 가늘게 떨렸다 누나 손은 미싱을 돌리기에는 너무 우아했다 누나는 술잔을 집었다
4. 제비
정복이는 꼬마 웨이터였다 누나와 이름 모르는 아저씨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소식을 주워 날랐다 봄날은 오지 않고 박꽃도 피지 않았으며 곰들도 겨울잠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정복이만 바빴다
5. 올빼미
하루는 아버지가 작은집에서 뚱뚱한 아이를 데려왔다 인사해라 네 셋째 형이다 새로 생긴 형은 말도 하지 않았고 학교에 가지도 않았다 그저 밤중에 앉아서 눈 뜬 곰들과 노는 게 전부였다 연탄가스를 마셨다고 했다
6. 불새
우리는 정복이네 보다 해발 30미터 낮은 곳에 살았다 길이 점점 좁아졌으므로 그 집에 불이 났을 때 소방차는 우리집 앞에서 멈추었다 그들은 불타는 곰발바닥들을 버려두고, 그렇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 사실 독수리오형제는 독수리들도 아니고 오형제도 아니다. 다섯 조류가 모인 의남매다. 다섯이 모이면 불새로 변해 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