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행성

 

   나는 지금껏 야행성으로 살아왔다. 저녁밥을 먹고 설거지를 마치는 그 순간부터가 온전히 내 시간이었다. T.V.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곤 했다. 남편이 옆에 있지만 이 시간만큼은 혼자인 것이 좋았다,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남편은 밖에서는 너무 말을 하지 않아서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집에만 오면 나보다 훨씬 더 말을 많이 한다. 이런 용어가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 부부는 그것을 총량불변의 법칙이라 말한다. 오늘 하루 말을 해야 하는 분량이 있는데 밖에서 다 하지 못했으니 집에서라도 그 나머지 부분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하며 살아왔다.

   남편은 아홉 시면 이미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몇 년 전까밤이면 자야지정신이 제일 맑은 시간을 잠으로 때워?’하며 전쟁을 불사했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고 이제 둘 다 제풀에 지쳐서 자는 시간으로 싸우지는 않는다. 서로 편한 시간에 자는 것으로 암묵적인 동의를 한 셈이다.

   그런 내가 얼마 전부터 저녁설거지를 마치자마자 잠자리에 들곤 했다. 남편이 보는 T.V. 소리가 시끄러워 서재방에서 잠을 잤다. 꿈도 없는 잠을 잤다. 며칠 째 그러고 있으니 오늘 새벽에는 새벽기도를 가면서 남편이 서재방문을 열고 말했다. “ㅇㅇㅇ(내 이름), 일찍 자는 건 당신답지 않아. 제발 열두 시까지 영화보고 책 읽어.” 잠결에 대답했다. “다 귀찮아, 메뚜기도 한철인 걸. 그냥 버려두지 왜 옛날엔 일찍 안잔다고 그렇게 구박했어?”

 

  # 보통씨 동물원에 가셨군요?

 

 

 

 

   아홉 시 좀 넘어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별로 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례하게 전화를 받을 수 없는 분에게서 온 전화였다. 예의를 갖춰 삽십 분쯤 대화를 했다, 나는 주로 듣는 쪽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잠이 달아나 버렸다. 읽고 있던 알랭 드 보통의 <동물원에 가기>를 마저 읽었다. ‘피하기 위한 거짓말과 사랑받기 위한 거짓말에 대해 잠시 생각을 했다. 그러나 더 마음에 와닿는 글들은 이것이었다.

 

 

 

 

   이런 감정적인 반응을 보면 작업장에 두 가지 요구가 공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사업의 일차적 목적은 이윤의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경제적 요구다. 또 하나는 경제적 안정, 존중, 종신직, 나아가 형편이 좋을 때는 재미까지도 갈망하는 피고용자의 인간적 요구이다. 이 두 가지 요구가 오랜 기간 이렇다 할 마찰 없이 공존할 수도 있지만 이둘 사이에서 진지하게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상업적 체제의 논리에 따라 언제나 경제적 요구가 선택된다.

   임금에 의존하는 모든 노동자는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서는 불안이 살아질 수가 없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투쟁은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이제 마르크스의 시절처럼 맹렬하지 않다. 그러나 노동 조건의 향상과 고용 관련법에도 불구하고, 생산 과정에서는 노동자들의 행복이나 경제적 복지가 여전히 부차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으며, 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도구 노릇에 머물게 된다.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의 어떤 동지애가 이룩된다 해도, 노동자가 아무리 선의를 보여주고 아무리 오랜 세월 일에 헌신한다 해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지위가 평생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그 지위가 자신의 성과에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경제적 성공에 의존한다는 것, 자신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감정적인 수준에서 늘 갈망하는 바와는 달리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결국 노동자는 늘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p.81

 

   재벌이 동네 빵집까지 마구잡이로 먹어치운다는 지금은 여론에 의해 잠시 꼬리를 내렸지만 기사를 읽고나서인지 마음이 편지 않다. 지난 여름 휴가갔을 때, 저녁 무렵 진안 시가지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먹을 빵을 사기위해서였다. 그 작은 시골 동네에도 유명베이커리가 세 군데나 있었다. 애써 다른 빵집을 찾아갔지만 완전 육십년대식이었다. 조만간 문을 닫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나는 지금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여 직장을 잡거나 결혼을 하는 그런 나이에 와 있다. 그런데 주위의 친구들 중에 아이들이 취업을 한 아이는 별로 없다. 유학을 가거나 대학원에 다니거나 취업 재수, 삼수를 하고 있다. 요즘 말하는 스팩도 괜찮은 아이들이다.

   내가 잠에 취하고 싶은 것은 어쩌면 이런 현실에 눈을 감고 살고싶다는 소극적인 저항이 아닐는지.

 

# 오늘이 214일이지?

 

   재작년부터 안하던 짓을 하고 있다. 남편과 아들에게 초콜릿을 선물했다. 젊어서는 안하던 일을 나이가 들어서 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니 정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는 듯했다. 작은 제스추어라도 하지 않으면 남아있는 나날이 너무 무미건조할 것 같았다.

   이웃에서 해외여행을 간다고 해서 선물하려고 작은 여행 소품들을 인터넷으로 몇 가지 샀더니 초콜렛이 따라왔다. 뒀다가 오늘 아침 식탁 남편의 자리에 올려두고 말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별로 확신이 없어서 좀 슬펐다. 이런 아내의 마음도 모르고 남편은 입이 귀에 걸렸다. 나는 보통씨가 말하는 사랑받기 위한 거짓말을 한 걸까?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사랑받는 것도 귀찮다.

 

 

   # 창 밖에는 비오고요...

 

이런 페이퍼를 쓰게 된 것 순전히 날씨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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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2-14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하하하하~~~~ 웃겨서 배꼽 빠지겠어요. 중전님의 유며 재능의 발견이에요. ㅋ

1. 총량불변의 법칙, 이것 아주 적절한 표현 같네요. 재밌어요.

2.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사랑받는 것도 귀찮다." - 요즘 제가 이래요. 퇴근해 오면 말 받아주고 그래야 하는데, 그냥 조용히 들어가서 자면 좋겠으니... 신혼 때는 남편이 일찍 자면 삐졌는데, 이젠 일찍 자면 고맙죠. 키득키득... 중전님의 마음이 내 마음...

그런데 남편들은 나이 들수록 더 아내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 관심 끌고 싶어하고...아내와 반비례해요. ㅋㅋ

gimssim 2012-02-14 20:45   좋아요 0 | URL
얼마전 아주 부잣집에 시집간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더니 젊었을 때는 제발 일찍 들어와라, 빌어도 늦게 들어오고 아예 안들어오고 하더니만 요즘은 제발 저녁 먹고 와라 그래도 일찍 들어와서 집에서 밥 먹는다고...사람 사는 것은 다 비슷한 것 같아서 웃었습니다.
저도 늦게 들어오는 것은 용서해도 밥 안먹고 들어오는 것은 용서못합니다. ㅋㅋㅋ

굿바이 2012-02-14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마지막 "창 밖에는 비오고요" 이거 송창식씨 노래 맞죠?
정말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서울은 야릇한 날씨입니다. 바람 속에 햇살이 가득하고 햇살 아래 바람이 떠돌고, 뭐 그런 날씨입니다.

gimssim 2012-02-14 20:46   좋아요 0 | URL
오늘은 봄이 오려는 지 봄비 같은 비가 내렸습니다.
네, 창밖에는비오고요, 바람 불고요~~~ 송창식이요.
세월의 강을 훌쩍 건넜습니다. 저는.

프레이야 2012-02-15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륜이 묻어나는 부부 이야기, 늘 재미나게 읽어요, 중전님.
동물원에가기,는 저도 참 좋아하는 책이에요.
알랭 드 보통은 정말 천재 같아요.ㅎㅎ

gimssim 2012-02-16 07:59   좋아요 0 | URL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 찰리 채플린

보통의 글을 읽으면 급 우울해집니다. 질투심이죠.
어떻게 사물을, 사건을, 분위기를 사진을 찍듯 정교하고 정확하게 그려내는지요. 신께 참 특별한 선물을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녀고양이 2012-02-15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 언니.... ^^

그래도 페이퍼 전체에서 뚝뚝 떨어지는 애정은 어떠케 할까요?
저는 너무 좋은걸요... ^^. 옆지기님께서 언니가 가장 편하신가봐요, 그리 말이 많아지신다니... 말이란게 아무한테나 걸기 어려운거더라구요. 받아줄거 같은 상대가 되어야 걸게 되는걸요, 전.

겨울이 이제 슬슬 지겨워요, 전 봄이 너무 그리워요... 에효.

gimssim 2012-02-16 07:58   좋아요 0 | URL
그래요. 겨울이 빨리 지나가고 따뜻한 봄이 왔으면 좋겠어요.
운동 가다 보니 매실나무에 아주 작은 꽃망울이 맺혀있더군요.
녀석들도 준비를 하고있나 봅니다.

순오기 2012-02-16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호나 3호, 부부로 사는 게 별다르지 않을 듯한 일상을 참 재밌게 풀어놓아서 좋아요.
총량불변의 법칙은 말 뿐 아니라 부부의 사랑표현에도 적용되지 않을까요?
우리 남편은 일찌감치 들어와서 TV 드라마 챙겨보는 아줌마화 되어가요.ㅋㅋ

gimssim 2012-02-17 08:05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요즘 많이 바쁘시죠?

아, 사랑도 귀찮다니까요.
한일주일쯤 아무것도 하지않고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올겨울엔 봄이 무척 기다려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