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겨레 신문에 제 글이 실렸어요. 서재님들께 자랑질합니다. 그리고 글을 자주 올리진 못해도 나름 열심히 살고 있어요(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게으름을 변명해 봅니다).
시베리아를 녹인 밥심
중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 매일 학교 도서관에 가서 온종일 책을 읽었다. 꿈 많은 사춘기의 여학생은 이광수의 소설 『유정』을 읽고 며칠 동안 몸살을 앓았다. 최석과 남정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마지막 무대였던 바이칼 호수의 장면을 잊을 수 없었기에... 그곳으로 여행하고 싶었지만 동서냉전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당시 소련 땅에 가는 것이 그야말로 꿈같은 소리였다.
포기하지 않으면 꿈은 이루어진다. 단발머리 중학생 때 꾸었던 꿈을 이루기 위해 무려 35년이 지나서 나는 바이칼 호수로 가는 대장정에 올랐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 위해 세 시간 쯤 날아서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로 갔다. 두꺼운 겨울옷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공항을 나섰지만 시베리아의 바람은 생각보다 힘이 세었다. 일행 모두가 입김이 얼어붙어 만들어진 산타클로스 눈썹을 달고 동태처럼 꽁꽁 얼어서 이북사람이 운영한다는 한식당에 갔다. 1960년대 우리 어머니들이 즐겨 입었을 것 같은 한복을 입은 여성 나와서 <반갑습니다>를 비롯한 여러 곡의 북한 노래를 불러주었다. 아마 남한 동포인 우리들을 위한 특별순서인 것 같았다.
미리 예약을 해두어서 자리에 앉자 음식이 나왔다. 낯선 음식이었다. 곰국도 아니고 그렇다고 맹물도 아닌, 멸치 다시국물 같은 국물에 단단하게 여며진 공기밥을 넣고 잘게 찢어서 양념한 닭고기와 잔치국수 고명을 얹은 것이었다. 닭고기는 잘 보이지도 않았고 맛도 밍밍해서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다 비우고 난 이후에나 내린 결론이었다. 입이 거의 얼어붙기 직전이었던 우리들은 세상에서 제일 맛난 음식인 양 맛있게 먹었다. 그 따스함 때문에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행복함이 몰려왔다.
영하 삼사 십 도의 추위에 맞서고자 겨울 여행을 택했지만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기도 전에 시베리아의 매서운 바람에 잔뜩 겁을 먹고 주눅이 든 우리들을 단숨에 녹여준 것은 바로 온반(溫飯)이었다. 이름 하여 ‘따뜻한 밥'이다. 온반으로 추위를 녹인 우리들은 이렇게 입을 모았다. 대한민국 사람은 역시 밥심으로 산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그때의 향수 때문에 온반을 하는 곳을 알아보았더니 우리가 먹었던 그런 것은 아니고 이북만두와 당면, 팽이버섯, 양념한 닭고기 등을 푸짐하게 넣고 얼큰하게 끓인, 영양과 맛을 첨가한 온반들이어서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보름 동안의 겨울 시베리아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맛도 영양도 보잘 것 없었지만 한 그릇 온반의 힘이 아니었나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