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때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눈도 한쪽은 백내장이라 수술했고
다른 한쪽은
치유가 안 된다는 황반 뭐라는 병
초점이 맞지 않아서
곧잘 비틀거린다
하지만 억울할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더 살았으니당연하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산다는 것 중에서------- - P13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 집 중에서--------- - P16

여행


나는 거의 여행을 하지 않았다
피치 못할 일로 외출해야 할 때도
그 전날부터 어수선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나다니기를 싫어한 나를
구멍지기라 하며 어머니는 꾸중했다.
바깥 세상이 두려웠는지
낯설어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도 남 못지 않은 나그네였다.
내 방식대로 진종일 대부분의 시간
혼자서 여행을 했다
꿈속에서도 여행을 했고
서산 바라보면서도 여행을 했고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면서도,
서억서억 톱이 움직이며
나무의 살갗이 찢기는 것을,
그럴 때도 여행을 했고
밭을 맬 때도 - P23

설거지를 할 때도 여행을 했다.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혹은 배를 타고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보다 은밀하게 내면으로 내면으로
촘촘하고 섬세했으며,
다양하고 풍성했다.


행선지도 있었고 귀착지도 있었다.
바이칼 호수도 있었으며
밤 하늘의 별이 크다는 사하라사막
작가이기도 했던 어떤 여자가
사막을 건너면서 신의 계시를 받아
메테르니히와 러시아 황제 사이를 오가며
신성동맹을 주선했다는 사연이 있는
그 별이 큰 사막의 밤하늘 - P24

히말라야의 검진 노새와 야크의 슬픈 풍경
마음의 여행이든 현실적인 여행이든
사라졌다간 되돌아오기도 하는
기억의 눈보라
안개이며 구름이며 몽환이긴 매일반
다만 내 글 모두가
정처 없던 그 여행기
여행의 기록일 것이다 - P25

모순


물은 어떠한 불도 다 꺼 버리고
불은 어떠한 물도 다 말려 버린다
절대적 이 상극의 틈새에서
절대적인 이 상극으로 말미암아
생명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절묘한 질서인가

초나라 무기상이 말하기를
나의 창은 어떠한 방패도 뚫는다
다시 말하기를
나의 방패는 어떠한 창도 막는다

한 사람이 묻기를
당신의 창이 당신의 방패를 찌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무기상의 대답은 없었다고 했다

세상에는 결론이 없다
우주 그 어디에서도 결론은 없다 - P120

결론은 삼라만상의 끝을 의미하고
만물은 상극의 긴장 속에서 존재한다.

어리석은 지식인들이
곧잘 논쟁에 끌고 나오는 모순
방어와 공격을 겸한 용어이지만
그 자신이 모순적 존재인 것을
알지 못한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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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사랑이여 ! 오, 삶이여!
삶이 아니라 차라리 죽음 속의 사랑을.
- <로미오와 줄리엣》, 4막5장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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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와 <개황력>

광개토대왕릉비를 바탕으로 오늘 여러 박물관을 다니며 확인한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볼 때 금관가야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무역을 중시했던 국가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광개토대왕릉비‘ ‘중국 역사서‘ 이외의 문헌 기록 속 가야를 살펴볼까? 결국 ‘고고학 + 문헌 기록‘이 되어야더 완벽한 가야의 모습과 함께 시조 수로왕을 그려낼 수 있을 테니까.
우선 12세기 중반 김부식이 완성한 《삼국사기》에는 아쉽게도 가야 역사가 그리 많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가 고구려,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역사를정리하면서 가야는 주변부 역사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 P163

이에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역사 등에 가야가조금 언급되는 정도로 그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익숙히 들었던 가야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출처가 어디일까? 예를 들어 알에서 태어난 수로왕의 전설, 석탈해와의 대립,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후와 결혼, 수로왕의 후손 이야기 등등. 그것은 다름 아닌 《삼국유사》다.
유교적 관점에 따라 나라를 세운 시조 설화 이외에는 가능한 정치, 외교적인 내용 중심의 기록을 정리한 <삼국사기>와 달리 13세기 후반 일연이 쓴 《삼국유사>는 고려 시대까지 남아있던 삼국 시대의 다양한 전설 및 민간 이야기까지 담은 책이다. 이에<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결합하여 읽으면 동일한 사건도 다양한 관점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지.
음. 그보다 더 강한 표현으로 주장해 볼까? 그래, 내경험상 필수적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함께 읽어봐야 이 시대 역사의 구체적인 그림이 그나마 잡히는 것 같다.
《삼국유사》 기이(紀異篇)에 가야 역사를 담은
‘가락국기‘라는 부분이 있다. 한자로 駕洛國記이니말 그대로 가야국의 역사라는 의미. 다만 유독 수많은 가야국 중에서 금관가야 역사가 중심이 되어 담겨 있다는 사실. 이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 P164

금관가야 후손이 정리한 기록을 바탕으로 일연이<삼국유사> 가락국기를 썼기 때문.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라 그런지 사실 + 설화가 함께하는 가야 이야기인지라 이 부분 역시 어느 정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여기서 하나 더 알아두어야 할 부분은 ‘가락국기‘라는 같은 제목의 책이 <삼국유사>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점이다. 11세기인 고려 문종 때 금관주지사(州事), 즉 김해에 파견된 지방관을 지낸 문인(文人)이 편찬한 책이 다름 아닌 《가락국기》였다. 이를 미루어볼 때 학자들은 13세기에 일연이<삼국유사》를 집필하면서 11세기의 <가락국기》의기록을 바탕으로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남긴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즉 11세기 <가락국기> 내용을 사료로 하여 일연이 <삼국유사>에 어느 정도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다. 한데 11세기의 《가락국기》는 《개황력(開皇曆)>이라는 책을 인용하여 정리한 것으로본다. <삼국유사》 안에 11세기 <가락국기>의 글을그대로 옮겨오며 <개황력>이라는 책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
결국 전체적으로 볼 때 가야 역사가 담긴 13세기<삼국유사>의 가락국기‘ 부분은 11세기 고려의 한문인이 편찬한 <가락국기>를 요약한 것이고,  - P165

<가락국기>는 <개황력>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여러 내용이 덧붙여 정리된 것임을 의미한다. 이에 가장 앞선기록으로 보이는 <개황력>이 무엇인지 파악해 보아야겠군.
<개황력>은 이미 사라진 자료여서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원천이 된책이니, 가야의 역사, 더 정확히는 금관가야의 역사를 담은 책임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개황력(開皇曆) 이라는 명칭을 통해 학자들은 책이 나온 시점에대한 다양한 의견을 보이고 있다. 하나씩 보자면,

1. <개화력》의 개황(開皇)은 수나라가 581~600년동안 사용한 연호이다. 이에 금관가야가 신라에 편입되고 난 뒤 신라 진평왕 시점 (579~632년)에 나온책으로 판단하는 의견

2. <개황력>이 금관가야 역사를 담은 책인 것으로볼 때 김유신 등 금관가야계 신라인이 가장 전성기시점이었던 문무왕 시점 (661~681년)에 나온 책이나그 권위를 위해 그보다 앞선 개황 시기(581-600)에쓴 것으로 널리 알렸다고 판단하는 의견

- P166

3. 신라 말에서 고려 초 무렵에 지역 각지에 발호한 호족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숭배하는 과정 중 김해 지역은 수로왕의 건국 설화를 중심으로 구형왕에 이르기까지의 연대기를 편찬한 것이 개황력》이라는 의견, 이에 개황은 "금관가야라는 황국(皇國)을 개창(開創)하였다."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개황력>이라는 책이 완성된 시기에 대해 학자마다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하나 주목할 부분은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책이 나온 가장 빠른 시기라 할지라도 6세기 후반이며, 이는 곧 가야가 멸망하고난 후의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시조 수로왕을포함한 금관가야 역사서 《개황력》은 신라 시대에 작업된 책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신라 시대 들어와전체 역사가 정리되었어도 그 근본 내용은 분명 가야 시대에 이미 존재했을 테지만.
여기까지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개황력》이라는 금관가야 역사책이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최종정리된 것인지 궁금해지는군. 사실상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금관가야 관련한 문헌 기록 중 70% 이상을차지하는 것이 다름 아닌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이고, 해당 가락국기의 원천은 <개황력》이니까 말이지. - P167

이렇게 된 김에 광개토대왕릉비처럼 《개황력》을주인공으로 잡고 다시 한 번 추적을 시작해 볼까?
<개황력>을 인용한 글에서 "수로왕의 성은 김 씨라하는데, 즉 나라의 조상이 금색 알로부터 나온 까닭으로 금으로 성을 삼았다." 라 나와 있으니 아무래도수로왕의 난생 설화 비밀도 <개황력>을 통해 파악하면 더 명확해질 것이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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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엠마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기인 수도원 시절의 분위기와 당시 엠마의 심리와 행동을 묘사하는 소설의 제1부 제6장은 매우 중요하다. 이른바 엠마 특유의 ‘보바리즘‘
이 그 진정한 모습을 갖추어 가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세계관에 토대를 이루는 ‘보바리즘‘이야말로 ‘마담 보바리』를 숙명의 소설, 실패와 환멸의 소설로 만들어 놓는 요인인 것이다. 현실과 자아의 모습을 실제와 다르게 보이도록 만드는 환상의 작용, 이것에 쥘고티에는 ‘보바리즘‘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에 따르면 보바리즘이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능력"이다. 이런 성격을 가진 인물은 이상의 안경을 쓰고 현실을 바라봄으로써 현실의 모습을 변형시켜 버린다. 그는 일종의 상상력 비대증 환자다. 그병은 현실을 이상의 모습으로 왜곡함으로써 현실의 참모습을 볼 수없게 만든다. 상상에 의해 왜곡된 시선은 타자를 변형시키고, 결국은자기 자신까지도 변형된 모습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 병적인 ‘능력‘은 눈앞의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불만을 유발한다. 엠마에게 있어 불만의 대상이 되는 현실은 눈앞의 남편이며, 권태로운 시골이고, 그런 어리석음과 권태의 환경 속에 매몰된 자기 자신이다. - P160

.
성공의 계기로서의 목로주점

목로주점은 <루공마카르 총서>의 일곱 번째 소설로 ‘나나』, 『제르미날」, 「인간 야수와 더불어 총서 중에서도 가장 큰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4대 역작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의 성공을 통해 졸라는문단과 일반 대중으로부터 폭넓은 명성을 확보했고, ‘자연주의 유파를 대표하는 작가인 동시에 이론가로서의 지위를 굳힌다. 1877년4월 레스토랑 ‘트립‘에서 졸라가 당대의 젊은 작가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일과, 1880년 이 모임의 결과로 발표된 사화집 『메당의 저녁은 파리 문단에서 차지하는 그의 확고한 위치를 여실히 말해 준다.
발표하자마자 3만 5000부가 판매된 소설 목로주점의 성공은 장차 그의 모든 발표작과 관련된 출판사와의 계약에 유리한 입지를 확보해 주는 동시에 작가에게 상당한 수입을 안겨 주어, 1878년에는 드디어 파리 근교 ‘메당‘에 별장을 구입할 수 있게 된다. - P182

어느 비평가는 망원경과 현미경이 동시에 작동하는 듯한 이 소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한 시대의 역사인 동시에 한 의식의 역사다. 이와 같은 이중성과 그 양면의 결합이 바로 이 작품의 깊고도 경탄할만한 독창성을 이루고 있다.


한 시대와 그 시대의 인간들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프루스트는 다른 작가들과 공통된 면을 보이지만, 그것을 기록하는 작가의 눈은표면에만 머물지 않고 마치 ‘X레이 광선‘처럼 또는 내시경처럼 내면으로 깊숙이 침투해 미시적으로 조명한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프루스트는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인물과 모든 사태를 묘사하는 동시에 치밀하게 분석했다. 극도로 예민하고 지적인 의식이 한 시대를 바라보며 묘사하고 비평하고 분석하는 이 소설은, 그래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을 초월해 만인에게 공감을 자아내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 P248

많은 독자들은 자신만의 카뮈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카뮈는 『결혼』의 첫 페이지 첫 문단에서 다음과 같은 빛나는문장으로 매혹했던 위대한 산문가다.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 더미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 카뮈는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는 시대의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부조리의 감정‘
을 간파해 내고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인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라는 비수 같은 - P317

문장으로 시지프 신화』를 시작했고, 반항하는 인간에서 관용과 상대적 감각과 인간의 한계를 상기시키면서 밤과 낮이 서로 대립하는 "긴장의 절정에 이를 때 곧은 화살이 더없이 단단하고 자유롭게 퉁겨져 날아가는 정오의 사상을 역설했던 인물이었다. 냉전이한창이던 그 시기에 좌파 지식인 진영에 발 딛고 서서 이데올로기적절대주의 사상, 즉 전체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모든 형태의 종교·재판을 고발하며 좌파 쪽이든 우파 쪽이든, 동이든 서든, 모든 곳에서 벌어지는 야만성을 소리 높여 거부하자면 예외적인 통찰과 논리의 궁극에 이르고자 하는 불굴의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카뮈는 또한 시대를 증언하고자 하는 기자였다는 사실을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재능이 넘치면서도 통찰력을 갖춘 그 정의의 사람‘의 붓은 프랑스가 지배하던 알제리 원주민 지역 카빌리의
비참과 히로시마 원폭 투하의 소름 끼치는 공포를 고발했고, 동시에사형 제도의 폐지를 호소했다. 카뮈는 맹목적으로 역사에 봉사하기를 거부했고, 맹목적인 역사의 힘에 굴복하기를 거부했다. 자신의 조국인 알제리가 야만적인 전쟁의 무대가 되자, 먼저 양 진영의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같은 나라 안에서 두 민족이 동등한 자격으로 공존할 수 있는 ‘시민 휴전‘을 호소했다. 그러나 양 진영에서는 다 같이 그에게 돌을 던지며 그를 회색분자로 매도했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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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의 구상과 소설의 배경

「제르미날』의 배경이 된 1866~1867년을 전후로 프랑스의 탄광들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과 파업이 잇따라 발생했다. 1862년과 1864년에는 카르뱅Carvin과 비쿠아뉴Vicoigne에서 임금과 작업 시간 단축 문제로 파업이 발생했다. 1867년에는 레 부슈뒤론es Bouches-du-Rhine지방의 퓌보 Fuveau 탄전에서 300여 명의 광부들이 국제노동자협회 지부를 결성했다. 1869년에는 오Aubin 의 광부들이 대표단의 이름으로임금과 퇴직연금, 의료 체계와 관련된 요구 사항을 적은 편지를 졸라가 기고가로 활동하던 <라 트리퀸>에 보냈다. 1870년에는 크리조Creuzot 탄전의 광부들이 파업에 실패한 후 졸라의 소설을 예고하는듯한 어조로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중 몇몇 충돌 과정에서는 유혈 사태가 빚어졌다.  - P381

1867년 6월 16일,  리카마리 La Ricamarie의 생테티엔 Saint Etienne 단전에서는 군인들이 파업중인 광부들에게 발포해 두 명의 여성을 포함한 열세 명의 사망자와 아홉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1869년 10월 7일, 아베롱Aveyron 지방의 오빵 탄광에서는 "제르미날의 제6부 5장서 펼쳐지는 광부들과 군인들의 대치 장면을 예고하는 듯한 유혈 충돌이 발생했다. 그 결과로 모두 열네 명의 사망자와 스무 명의 부상자가 생겨났다.
그 무렵,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도래에서 비롯된 사회적인 혼란과 때를 같이하여 새로운 경제적, 정치적 이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864년 5월에는 노동자들에게 파업과 동맹의 권리가 처음으로 부여되고, 9월 28일에는 영국 런던에서 최초의 국제적인 노동운동 조직인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가 결성되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결성 선언문과 규약을 작성하는 등 국제노동자협회의 결성을 적극적으로 지도했다. 1867년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1권이 출간되었으며, 1875년부터 프랑스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는 1883 년 출간된 라블레예Laveleye의 저서 『현대 사회주의Le Socialisme contemporain』에서 언급된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흐름으로 나타났다. 졸라는 제르미날의 등장인물들인 에티엔, 라스뇌르, 수바린이 정치적 논쟁을 벌이면서 제시한 논거를 위해 이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1850년경부터 프랑스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좌파의 다양한 경향은 대체로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사상과 프루동의 이론에서 비롯된 무정부주의적 사상으로 대표되는 두 가지 이데올로기적 흐흠으로 요약할 수 있다. - P382

사회주의사상은 1881~1882년부터 두 개의 조직으로 뚜렷이 나뉘었다. 쥘 게드가 이끄는 ‘프랑스 노동당(PartiNouvrier français, 약칭 POF)‘은 집산주의를 내세워 강경하고 권위적인 태도(소설 속에서 에티엔에 의해 대변되는)를 취했으며, 브루스와 조프랭Joffrin이 이끄는 ‘프랑스사회주의노동자연맹(Fédération des travailleurs socialistes de France, FTSF)Brousse개혁은 가능한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진화론적 기능주의 정치 (라스뇌르의 주장의 근거가 되는 이론)를 구현하고자 했다.
한편 수바린에 의해 대변되는 무정부주의 운동은 19세기 말 수많은 테러를 야기했다. 1878년에는 이탈리아 왕, 1879년에는 스페인 왕에 대한 테러 시도가 있었고, 1881년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 테러로 사망하기도 했다.
졸라는 특히 1871년에 발생한 피비린내 나는 파리코뮌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정치적‘인 색채를 띤 두번째 노동자(민중) 소설을 써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에는 파리를 배경으로 구상되었던 두번째 민중 소설은 1880년경 탄전 지역에서 발생한 중대한 파업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다. 1878년 프랑스 북부 앙쟁Anzin에서 파업이 발생했고, 그에 관한 기사가 1878년 7월 23~28일자 <르볼테르>에 상세하게 실렸다. 1882년에는 몽소레민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감행했고, 의회에는 탄광법에 관한 법안들이 날로 쌓여갔다. 그리고 마침내 1883년, 프랑스 광부들의 청원서 Les Cahiers de doléancesdes mincurs français가 발표되었다.  - P383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졸라는 제2제정기(1852~1870)에 발생했던 피비린내 나는 파업들에 대한기억을 떠올리게 되었고, 1880년 모리스 탈메르Maurice Talmeyr의 『갱내 가스Le Grisou』를 비롯해 광부들의 세계에 관한 몇몇 소설의 출간에 주목하기도 했다.
졸라가 탄광에 관한 소설을 진지하게 구상한 것은 1883년 무렵부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졸라는 소설의 배경으로부르고뉴 지방에 있는 크뢰조 탄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다1883년 여름, 졸라는 휴가차 떠난 브르타뉴의 베노데Bénodet에서 우연히 발랑시엔의 사회주의자 하원의원 알프레드 지아르Alfred Giard를 만나게 된다. 그는 졸라에게 프랑스 북부 탄광에 관한 자료 수집차 자신의 집에 머물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 1884년 2월앙쟁에서 또다시 파업이 발생했다. 1만 2천 명의 광부가 참여해 두 달씩이나 이어진 역사상 가장 길고 거대한 규모의 파업 중 하나였다.
알프레드 지아르는 졸라에게 편지를 보내 다시 그를 초대했고, 졸라는 며칠 후 발랑시엔을 방문했다. 졸라는 지아르의 집에 머물면서,
그의 비서로 자신을 소개해 탄광촌과 탄광회사 건물들과 갱들을 방문하고 조사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드냉 부근에 있는 르나르Renard 갱을 방문해, 극심한 폐소공포증에도 불구하고 675미터아래 땅속까지 내려가 갱도 내의 상황을 세밀하게 살펴보았고(졸라는이러한 체험을 "지옥으로의 하강"이라고 표현했다), 탄광촌을 방문해 그곳의 실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그 모든 사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나갔다. 이처럼 치밀한 현장 답사와 상세한 기록으로부터 제르미날』의 집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이자 작가의 상상력의 원천이 된 <앙쟁에 관한 노트>가 탄생했던 것이다. - P384

‘제르미날‘은 말 그 자체로 역사적이고 혁명적인 울림을 담고 있다.
제르미날은 공화력의 일곱번째 달(3월 21(22) 일~4월 19(20) 일로서
‘싹트는germer 달‘을 의미하며, 굶주린 민중이 국민공회에 빵을 요구한 것도 혁명력 3년, 제르미날의 열두번째 날(1795년 4월 1일이었다. 배고픔과 반란을 상징하는 ‘제르미날‘은 소설 『제르미날』을 혁명의 위대한 신화가 되게 했다. 또한 ‘제르미날‘이라는 말은 그것이 포함한 암시적인 의미 외에도 단어 구성의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
‘Germinal‘이라는 단어에는 싹이 튼다는 의미의 ‘germer‘, 탄광을 뜻하는 ‘mine‘, 그리고 공화력을 의미하는 ‘al (almanach)‘이 포함되어있다.  - P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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