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의미에서 엠마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기인 수도원 시절의 분위기와 당시 엠마의 심리와 행동을 묘사하는 소설의 제1부 제6장은 매우 중요하다. 이른바 엠마 특유의 ‘보바리즘‘
이 그 진정한 모습을 갖추어 가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세계관에 토대를 이루는 ‘보바리즘‘이야말로 ‘마담 보바리』를 숙명의 소설, 실패와 환멸의 소설로 만들어 놓는 요인인 것이다. 현실과 자아의 모습을 실제와 다르게 보이도록 만드는 환상의 작용, 이것에 쥘고티에는 ‘보바리즘‘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에 따르면 보바리즘이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능력"이다. 이런 성격을 가진 인물은 이상의 안경을 쓰고 현실을 바라봄으로써 현실의 모습을 변형시켜 버린다. 그는 일종의 상상력 비대증 환자다. 그병은 현실을 이상의 모습으로 왜곡함으로써 현실의 참모습을 볼 수없게 만든다. 상상에 의해 왜곡된 시선은 타자를 변형시키고, 결국은자기 자신까지도 변형된 모습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 병적인 ‘능력‘은 눈앞의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불만을 유발한다. 엠마에게 있어 불만의 대상이 되는 현실은 눈앞의 남편이며, 권태로운 시골이고, 그런 어리석음과 권태의 환경 속에 매몰된 자기 자신이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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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계기로서의 목로주점

목로주점은 <루공마카르 총서>의 일곱 번째 소설로 ‘나나』, 『제르미날」, 「인간 야수와 더불어 총서 중에서도 가장 큰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4대 역작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의 성공을 통해 졸라는문단과 일반 대중으로부터 폭넓은 명성을 확보했고, ‘자연주의 유파를 대표하는 작가인 동시에 이론가로서의 지위를 굳힌다. 1877년4월 레스토랑 ‘트립‘에서 졸라가 당대의 젊은 작가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일과, 1880년 이 모임의 결과로 발표된 사화집 『메당의 저녁은 파리 문단에서 차지하는 그의 확고한 위치를 여실히 말해 준다.
발표하자마자 3만 5000부가 판매된 소설 목로주점의 성공은 장차 그의 모든 발표작과 관련된 출판사와의 계약에 유리한 입지를 확보해 주는 동시에 작가에게 상당한 수입을 안겨 주어, 1878년에는 드디어 파리 근교 ‘메당‘에 별장을 구입할 수 있게 된다. - P182

어느 비평가는 망원경과 현미경이 동시에 작동하는 듯한 이 소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한 시대의 역사인 동시에 한 의식의 역사다. 이와 같은 이중성과 그 양면의 결합이 바로 이 작품의 깊고도 경탄할만한 독창성을 이루고 있다.


한 시대와 그 시대의 인간들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프루스트는 다른 작가들과 공통된 면을 보이지만, 그것을 기록하는 작가의 눈은표면에만 머물지 않고 마치 ‘X레이 광선‘처럼 또는 내시경처럼 내면으로 깊숙이 침투해 미시적으로 조명한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프루스트는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인물과 모든 사태를 묘사하는 동시에 치밀하게 분석했다. 극도로 예민하고 지적인 의식이 한 시대를 바라보며 묘사하고 비평하고 분석하는 이 소설은, 그래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을 초월해 만인에게 공감을 자아내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 P248

많은 독자들은 자신만의 카뮈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카뮈는 『결혼』의 첫 페이지 첫 문단에서 다음과 같은 빛나는문장으로 매혹했던 위대한 산문가다.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 더미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 카뮈는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는 시대의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부조리의 감정‘
을 간파해 내고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인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라는 비수 같은 - P317

문장으로 시지프 신화』를 시작했고, 반항하는 인간에서 관용과 상대적 감각과 인간의 한계를 상기시키면서 밤과 낮이 서로 대립하는 "긴장의 절정에 이를 때 곧은 화살이 더없이 단단하고 자유롭게 퉁겨져 날아가는 정오의 사상을 역설했던 인물이었다. 냉전이한창이던 그 시기에 좌파 지식인 진영에 발 딛고 서서 이데올로기적절대주의 사상, 즉 전체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모든 형태의 종교·재판을 고발하며 좌파 쪽이든 우파 쪽이든, 동이든 서든, 모든 곳에서 벌어지는 야만성을 소리 높여 거부하자면 예외적인 통찰과 논리의 궁극에 이르고자 하는 불굴의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카뮈는 또한 시대를 증언하고자 하는 기자였다는 사실을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재능이 넘치면서도 통찰력을 갖춘 그 정의의 사람‘의 붓은 프랑스가 지배하던 알제리 원주민 지역 카빌리의
비참과 히로시마 원폭 투하의 소름 끼치는 공포를 고발했고, 동시에사형 제도의 폐지를 호소했다. 카뮈는 맹목적으로 역사에 봉사하기를 거부했고, 맹목적인 역사의 힘에 굴복하기를 거부했다. 자신의 조국인 알제리가 야만적인 전쟁의 무대가 되자, 먼저 양 진영의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같은 나라 안에서 두 민족이 동등한 자격으로 공존할 수 있는 ‘시민 휴전‘을 호소했다. 그러나 양 진영에서는 다 같이 그에게 돌을 던지며 그를 회색분자로 매도했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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