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때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눈도 한쪽은 백내장이라 수술했고
다른 한쪽은
치유가 안 된다는 황반 뭐라는 병
초점이 맞지 않아서
곧잘 비틀거린다
하지만 억울할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더 살았으니당연하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산다는 것 중에서------- - P13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 집 중에서--------- - P16

여행


나는 거의 여행을 하지 않았다
피치 못할 일로 외출해야 할 때도
그 전날부터 어수선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나다니기를 싫어한 나를
구멍지기라 하며 어머니는 꾸중했다.
바깥 세상이 두려웠는지
낯설어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도 남 못지 않은 나그네였다.
내 방식대로 진종일 대부분의 시간
혼자서 여행을 했다
꿈속에서도 여행을 했고
서산 바라보면서도 여행을 했고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면서도,
서억서억 톱이 움직이며
나무의 살갗이 찢기는 것을,
그럴 때도 여행을 했고
밭을 맬 때도 - P23

설거지를 할 때도 여행을 했다.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혹은 배를 타고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보다 은밀하게 내면으로 내면으로
촘촘하고 섬세했으며,
다양하고 풍성했다.


행선지도 있었고 귀착지도 있었다.
바이칼 호수도 있었으며
밤 하늘의 별이 크다는 사하라사막
작가이기도 했던 어떤 여자가
사막을 건너면서 신의 계시를 받아
메테르니히와 러시아 황제 사이를 오가며
신성동맹을 주선했다는 사연이 있는
그 별이 큰 사막의 밤하늘 - P24

히말라야의 검진 노새와 야크의 슬픈 풍경
마음의 여행이든 현실적인 여행이든
사라졌다간 되돌아오기도 하는
기억의 눈보라
안개이며 구름이며 몽환이긴 매일반
다만 내 글 모두가
정처 없던 그 여행기
여행의 기록일 것이다 - P25

모순


물은 어떠한 불도 다 꺼 버리고
불은 어떠한 물도 다 말려 버린다
절대적 이 상극의 틈새에서
절대적인 이 상극으로 말미암아
생명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절묘한 질서인가

초나라 무기상이 말하기를
나의 창은 어떠한 방패도 뚫는다
다시 말하기를
나의 방패는 어떠한 창도 막는다

한 사람이 묻기를
당신의 창이 당신의 방패를 찌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무기상의 대답은 없었다고 했다

세상에는 결론이 없다
우주 그 어디에서도 결론은 없다 - P120

결론은 삼라만상의 끝을 의미하고
만물은 상극의 긴장 속에서 존재한다.

어리석은 지식인들이
곧잘 논쟁에 끌고 나오는 모순
방어와 공격을 겸한 용어이지만
그 자신이 모순적 존재인 것을
알지 못한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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