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와 <개황력>
광개토대왕릉비를 바탕으로 오늘 여러 박물관을 다니며 확인한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볼 때 금관가야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무역을 중시했던 국가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광개토대왕릉비‘ ‘중국 역사서‘ 이외의 문헌 기록 속 가야를 살펴볼까? 결국 ‘고고학 + 문헌 기록‘이 되어야더 완벽한 가야의 모습과 함께 시조 수로왕을 그려낼 수 있을 테니까. 우선 12세기 중반 김부식이 완성한 《삼국사기》에는 아쉽게도 가야 역사가 그리 많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가 고구려,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역사를정리하면서 가야는 주변부 역사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 P163
이에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역사 등에 가야가조금 언급되는 정도로 그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익숙히 들었던 가야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출처가 어디일까? 예를 들어 알에서 태어난 수로왕의 전설, 석탈해와의 대립,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후와 결혼, 수로왕의 후손 이야기 등등. 그것은 다름 아닌 《삼국유사》다. 유교적 관점에 따라 나라를 세운 시조 설화 이외에는 가능한 정치, 외교적인 내용 중심의 기록을 정리한 <삼국사기>와 달리 13세기 후반 일연이 쓴 《삼국유사>는 고려 시대까지 남아있던 삼국 시대의 다양한 전설 및 민간 이야기까지 담은 책이다. 이에<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결합하여 읽으면 동일한 사건도 다양한 관점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지. 음. 그보다 더 강한 표현으로 주장해 볼까? 그래, 내경험상 필수적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함께 읽어봐야 이 시대 역사의 구체적인 그림이 그나마 잡히는 것 같다. 《삼국유사》 기이(紀異篇)에 가야 역사를 담은 ‘가락국기‘라는 부분이 있다. 한자로 駕洛國記이니말 그대로 가야국의 역사라는 의미. 다만 유독 수많은 가야국 중에서 금관가야 역사가 중심이 되어 담겨 있다는 사실. 이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 P164
금관가야 후손이 정리한 기록을 바탕으로 일연이<삼국유사> 가락국기를 썼기 때문.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라 그런지 사실 + 설화가 함께하는 가야 이야기인지라 이 부분 역시 어느 정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여기서 하나 더 알아두어야 할 부분은 ‘가락국기‘라는 같은 제목의 책이 <삼국유사>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점이다. 11세기인 고려 문종 때 금관주지사(州事), 즉 김해에 파견된 지방관을 지낸 문인(文人)이 편찬한 책이 다름 아닌 《가락국기》였다. 이를 미루어볼 때 학자들은 13세기에 일연이<삼국유사》를 집필하면서 11세기의 <가락국기》의기록을 바탕으로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남긴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즉 11세기 <가락국기> 내용을 사료로 하여 일연이 <삼국유사>에 어느 정도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다. 한데 11세기의 《가락국기》는 《개황력(開皇曆)>이라는 책을 인용하여 정리한 것으로본다. <삼국유사》 안에 11세기 <가락국기>의 글을그대로 옮겨오며 <개황력>이라는 책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 결국 전체적으로 볼 때 가야 역사가 담긴 13세기<삼국유사>의 가락국기‘ 부분은 11세기 고려의 한문인이 편찬한 <가락국기>를 요약한 것이고, - P165
<가락국기>는 <개황력>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여러 내용이 덧붙여 정리된 것임을 의미한다. 이에 가장 앞선기록으로 보이는 <개황력>이 무엇인지 파악해 보아야겠군. <개황력>은 이미 사라진 자료여서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원천이 된책이니, 가야의 역사, 더 정확히는 금관가야의 역사를 담은 책임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개황력(開皇曆) 이라는 명칭을 통해 학자들은 책이 나온 시점에대한 다양한 의견을 보이고 있다. 하나씩 보자면,
1. <개화력》의 개황(開皇)은 수나라가 581~600년동안 사용한 연호이다. 이에 금관가야가 신라에 편입되고 난 뒤 신라 진평왕 시점 (579~632년)에 나온책으로 판단하는 의견
2. <개황력>이 금관가야 역사를 담은 책인 것으로볼 때 김유신 등 금관가야계 신라인이 가장 전성기시점이었던 문무왕 시점 (661~681년)에 나온 책이나그 권위를 위해 그보다 앞선 개황 시기(581-600)에쓴 것으로 널리 알렸다고 판단하는 의견
- P166
3. 신라 말에서 고려 초 무렵에 지역 각지에 발호한 호족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숭배하는 과정 중 김해 지역은 수로왕의 건국 설화를 중심으로 구형왕에 이르기까지의 연대기를 편찬한 것이 개황력》이라는 의견, 이에 개황은 "금관가야라는 황국(皇國)을 개창(開創)하였다."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개황력>이라는 책이 완성된 시기에 대해 학자마다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하나 주목할 부분은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책이 나온 가장 빠른 시기라 할지라도 6세기 후반이며, 이는 곧 가야가 멸망하고난 후의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시조 수로왕을포함한 금관가야 역사서 《개황력》은 신라 시대에 작업된 책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신라 시대 들어와전체 역사가 정리되었어도 그 근본 내용은 분명 가야 시대에 이미 존재했을 테지만. 여기까지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개황력》이라는 금관가야 역사책이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최종정리된 것인지 궁금해지는군. 사실상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금관가야 관련한 문헌 기록 중 70% 이상을차지하는 것이 다름 아닌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이고, 해당 가락국기의 원천은 <개황력》이니까 말이지. - P167
이렇게 된 김에 광개토대왕릉비처럼 《개황력》을주인공으로 잡고 다시 한 번 추적을 시작해 볼까? <개황력>을 인용한 글에서 "수로왕의 성은 김 씨라하는데, 즉 나라의 조상이 금색 알로부터 나온 까닭으로 금으로 성을 삼았다." 라 나와 있으니 아무래도수로왕의 난생 설화 비밀도 <개황력>을 통해 파악하면 더 명확해질 것이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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