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은 1870 년 10월 23일 러시아 돈 강유역의 보로네시에서 태어났다. 부닌의 초기 작품에는 그가 체험한 아름다운 시골의 자연과 농민들의 삶이 자주 등장한다. 1900년에 《안토노프의 사과》를 발표하며 문단의 관심을 끌었고, 1901년에는 두 번째 시집 《낙엽》으로 푸시킨 상을 받았다. 특히 그의 생애에서 창조적인 창작 시기로 평가받는 1910년대에는 《마을》(1910), 《수호돌》(1911),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1915)와 같은 문단의 주목을 받는 뛰어난 작품들을 발표한다. 그러나 1917년 사회주의혁명에 반대하며 1920년 프랑스로 망명한다.
망명 후 자전적인 소설 《아르세니예프의 생》을 발표하고, 같은 해 1933년 러시아 작가 가운데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37년에는 톨스토이의 삶과 철학, 세계관 등을 조명한 회고집 《톨스토이의 해방》을 출간한다. 그 후 부닌의 관심은 사랑과 고독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로 옮겨간다. 그리고 어두운 가로수 길>, <파리에서>, <갈랴간스카야>, <나탈리>, < 깨끗한 일요일> 등 사랑의 다양한 음영을 담은 주옥같은 단편소설들을 발표한다. 작가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길과 진리에 대해 고민하던 부닌은 제2차 세계 대전후 조국으로 돌아오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1953년 83세를 일기로 파리에서 삶을 마감했다. - P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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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란, 분명히, 하나의 사회적 환경이야, 그것은 사유재산이 될 수없는 것이다. 어느 한 특권 개인이 제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이것은, 이 지표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에게 태초부터 공으로 거저 주어졌던 공공환경이란 말이다. 누구나 필요한 자가 필요한 만큼 누릴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은 모든 사람의 권리다. 토지는 모든 인간의 생존 단위이고 생활 기반인즉, 토지는 ..……."
강태는 말을 잠시 끊고 있더니, 잇사이에 물린 깡깡한 소리로
‘만인이 고루고루 같이 누리고 나누는, 만인의 공유여야만 해."
하고 잘라 말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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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오로지 하얗고 막막한 광목필을 밟으며, 방문에서 마당까지가 이렇게 먼 길인가 하였을 뿐이었다.
그 막막함이 마음을 짓누른다. 짓눌리는 것은 마음만이 아니었다.
몇몇 겹으로 싸고 감으며 갑옷처럼 입고 앉은 옷의 압박과 무게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조차도 쉽지 않은 것이다.
그네는 다리속곳, 속속곳, 단속곳, 고쟁이를 입고, 그 위에 또 너른바지를 입었는데, 너른바지 위에 대슘치마를 입었다.
대슘치마는 모시 속치마였다.
모시 열두 폭에 주름을 잡아 만든 이 속치마의 단에는 창호지 받친흰 비단이 손바닥만한 넓이만큼 대어져 있어, 그러지 않아도 풀을 먹여 날이 선 모시 바탕에 힘을 받쳐 주는 것이었다.
수모인 당숙모는 효원의 가슴을 동여매듯이 치마 말기를 힘 주어묶었다. 무명 말기가 나무 판자처럼 가슴을 압박했다.
그 대슘치마 위에, 드디어, 속옷으로는 마지막인 무지기를 입었다.
무지기는 빳빳하게 풀을 먹인 모시 열두 폭을 층층이 폭을 넓혀가며한 허리에 달아 붙인 것이라, 예닐곱 가지나 포개 입은 속옷 위에 더욱더 부하게 부풀어 보였다. 길이가 짧아서 발등까지 내려오지 않는 까닭에 ‘발 없는 치마‘ 무족(無足)치마라고도 하는 이 무지기는 치마허리에서 무릎까지 닿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삼층짜리도 있고 오층짜리도 있는데 신부옷이라 효원은 호사스럽게 일곱층짜리를 입는다.
‘무족‘이 치마라서 무지기인가, 무지개같이 물들어서 무지기인가.
층층마다 엷은 일곱 색의 물감을 들여 은은한 그 빛깔은 이름 그대로 마치 무지개처럼 고와서 보는 사람을 취하게 하였다.
- P37

그래서 어느 날은 참지 못하고 대문까지 내려왔다가, 작은집의 검은 살구나무 둥치에 마음이 부딪치면서 덜컥, 자물쇠통 잠기는 소리가 나 더는 못 가고 그대로 돌아서곤 하였다.
- P66

혼례를 올린 후 인재행(引再行)을 마치고 삼 일 만에 신랑과 함께 신부가 시댁으로 신행을 오는 집안도 더러 있기는 하였지만, 반가(班家)의 법도로는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삼일신행(三日新行)은 상민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양반 가문의 신부는 신랑을 홀로 보낸 후 친정에 남아 있다가, 다시 좋은 날을 받아 우귀(于歸)를 하는 것이다. 시댁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그날까지 보통은 일 년이 걸리기도하고, 길면 삼 년도 걸린다. 물론 양가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는 몇달 만에 신행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웬만한 경우에는 일 년 정도는 묵히는 것이 상례였다.
사람들은 그런 풍습을 ‘묵신행‘이라 불렀다. - P69

"혼행길은, 무사하.….… 셨어요?"
그 더듬거리는 말의 끄트머리 때문에, 강모는 순간 아찔하였다.
무사하....… 셨어요?
..... 셨어요....?
마음이 서늘하게 식으며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렇게 강실이가 멀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강모의 탓이 아니라, 그네가 그만큼 멀찍이 비켜서 버린 탓이었을까.
강모의 혼인으로 인하여 강실이의 말투가 바뀐 것이다. 그것은 그를 어른으로 대접하는 당연한 절차였건만, 얼마나 어색한 일이었던가. 무거운 덩어리 하나를 삼킨 것 같았었다.
- P71

그러나 시부는 명색이 초례청에서 신부와 마주 서 있다가, 느닷없이 머리에 쓰고 있던 사모의 오른쪽 뿔을 쑥 잡아 뽑아 버렸다.
"아니, 저런…."
사람들은 깜짝 놀라 실색을 했다.
혼례 때 신랑이 사모의 뿔을 뽑으면, 신부는 그만 소실(室)로 격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삼취는 번듯한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것이 관례인데, 뭇사람이 둘러서 지켜보는 자리에서 그처럼 부러지게 표를 내고 마니. 내리뜬 눈으로 그 거동을 훔쳐본 신부의 낯색이 창백하게 질렸다가 벌겋게 달아올라, 나중에는 흙빛이 되었다.
사람이 음양간에 한 번 만나 작배하면, 전생의 인연이 지중하니 백년을 같이 누려 해로하고, 슬하에 올바른 자식을 많이 두어 후생(後生)을 기약하는 것이 복록이겠지만, 그리하지 못하고 상처(喪妻)를 하는경우 재취를 맞이하게 되면, 두번째 아내인 이 부인은 물론 적처(妻)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재취마저 죽어서 다시 혼인해야 할 때, 세번째 맞이하는 삼취의 여인은 가문이나 지체와 상관없이 무조건 소실로취급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니 자연 삼취 소생은 엄연한 부모 밑에 태어났어도 서자가 될수밖에 없었으며, 삼취 부인은 죽어 제사를 지낼 때, 위패도 없이, 제상조차 한 단 낮게 차려 차등을 두었다.
본처가 있는데 첩으로 들어앉는 것도 아니며, 뒷골방에 냉수 한 그릇 떠 놓고 도둑장가를 드는 것도 아니요, 버젓이 육례(六體)를 갖추어혼인하는 사이건만, 그 어인 까닭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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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저 유명한 카이사르 장군(BC 100~44)은 극장에 올 때면 당시 최고로 호화로운 의상인 비단옷을 꼭 입고 나타났는데, 그를 본떠서 로마의 남녀 귀족들이 다투어 비단옷을 입는 풍조가 생겨나 비단이 고갈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티베리우스 황제(재위 AD 14~37)는 급기야 남자들이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하는 칙령까지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비단 값만 치솟고 암시장에서 더욱 왕성하게 팔리는 결과만 초래했습니다.
결국은 욕망이 규제를 풀었습니다. 전문 비단 시장이 개설되고, 수입한 비단을 여러 형태로 가공하는 공장도 생겨났습니다. 심지어 2세기에는 로마 제국의 서쪽 끝인 런던에서 비단이 성행한 정도가 중국의 낙양에 뒤지지 않았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380년경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귀족들에게만 허용되던 비단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최하층까지 퍼졌다" 고 4세기 로마의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첼리누스가 기록했습니다. 또 410년에 거행된 황제의 세례식에는 모든 시민이 비단을 몸에 걸치고 참석했다고 합니다.
기원전 31년부터 서기 192년까지 약 220년 동안 로마가 동방 무역(주로 비단 무역)으로 소모한 금액은 총 1억 영국 파운드(1931년 당시의 가치로 환산)에 달했으며, 후일 이러한 사치성 소비로 국가 재정이 탕진된 것이 바로 로마 제국 붕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 P191

서방에서는 비단의 민족.
동방에서는 옥의 민족으로 알려진 월지

선사 시대 이래 호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옥을 생산하는 나라였습니다. 고대의 중국인들은 옥을 어떠한 물질보다도 귀중하게여겼습니다. 명품의 옥을 구하려는 중국은 월지와 비단을 대가로 교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월지는 호탄의 옥으로 구입한 비단을 서방에 되팔았습니다. 이는 흉노에게 쫓겨서 고향을 떠나기 전의 일로, 월지의 비단 교역은 흉노보다 시대가 앞섭니다. 이 때문에 비단을 뜻하는 세레스란 말이 월지어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월지가 서방에서는 비단의 민족으로, 동방에서는 옥의 민족으로 알려진 것은 이 때문입니다. - P197

우리가 어느 절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불상은 서기 1세기 간다라지방에서 처음 조성되었습니다. 당시 간다라 지방은 유목 왕조인 사카 왕조가 통치하고 있었고, 3대 왕인 카니슈카는 불교를 크게 번성시켜 호불왕(불교를 보호하는 왕)이라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간다라에서 불상을 조성한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에 따라 왔던 그리스인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간다라미술을 말할 때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 교류의 관점에서 서양 고전미술 양식이 동양으로 전파된 결과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게다가 선진문명이 후진 문명으로 전파된다는 일반론을 근거로 종종 서양 문명이 동양 문명에 비해 우월하다는 서양 중심주의의 근거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필자는 앞에서도 일관되게 피력한 바와 같이, 양식의 전파보다는 당시 불상을 조성했던 이들의 삶과 그들이 속한 사회 환경, 그리고 거기서 형성된 미의식이 더 근본적이고 중요하다고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간다라가 아닌 인도 본토에서는 불상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왜 하필 카니슈카 왕 시기에 특별히 불상 조성이 본격화되었을까요?
사실 인도 본토에 있는 마투라에서도 간다라에서와 거의 같은 시기에 불상이 만들어졌습니다. 간다라의 불상이 서방인의 용모인 데반해, 마투라의 불상은 생김새가 훨씬 인도인을 닮았습니다. 인도의 전통적인 풍요의 신 약샤를 본떴기 때문인데, 마투라 유형(오른쪽의보살 입상)은 한 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간다라 유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이 유형은 주류를 이루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카니슈카 왕은 자기가 다스리는 광대한 제국에 불교를 적극적으로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그를 제2의 아소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원이나 불탑 건립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아서 불교 미술은 이때 황금기를 맞게 됩니다. 그러면 왜 카니슈카는 제2의 아소카가 되어 불교를 진작시켰으며, 왜 불상이 그의 재위 기간에 본격적으로 제작되었을까요?
- P210


이제 군주가 된 카니슈가에게는 월지의 다른 세 씨족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왕권 정쟁으로 갈라진 구산의 귀족들을 단결시키며, 제국 내의 여러 민족들을 통합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카니슈카는 불교를 이 이데올로기로 했으니, 자신이 호불왕이 되어 전국적으로 불교를 흥륭하게 일으 켰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왕권을 강화하고 제제를 정비할 이올로기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파르티아 문화를 도입했습니다(화폐에 중기이란어 [BC 3세기~AD 세기]가 등장한 것은 카니슈카 배이다. 그의 여러 예로 볼 때 가니슈카의 왕실에서는 중기 이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통일신라의 경우를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귀족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삼국을 통합하는 데 불교가 정신적으로 대한기여를 했고, 왕권과 국가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는 중국 문화가 그에 못지않은 역할을 한 것입니다.
카니슈카 정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불교는 통합을 위해, 마아 문화는 왕권 강화를 위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상에 이란적 요소가 강하게 반영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P213

미얀마의 왕이 한나라 황제에게 헌상한 마술사는 불을 토하고, 자신의 팔다리를 자르며, 소와 말의 머리를 바꾸고,
또 1000개나 되는 공을 공중에 띄워 묘기를 부렸다고 합니다.
중국에는 일찍부터 불교 · 조로아스터교 · 마니기독교 등 여러 외래 종교가 들어왔는데, 이들은 포교를 위해 번화가에서 곡예를 부렸습니다.
곡예의 종류는 무척 다양했습니다. 몸을 공중에 가볍게 날리기, 칼 삼키기, 여러 개의 공을 공중에 띄우기, 불내뿜기, 참외 심기, 나무 심어 기르기, 배 가르기, 신체의 일부를 자유롭게 자르기도 하고 붙이기도 하기, 줄타기, 머리위에 장대를 세우고 그 위에서 몸을 날리기 따위였습니다.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열린 곡예는 폭발적 인기를 끌어서 상설 공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궁중에 불려 가는 스타급곡예사도 생겼습니다. 지금도 북경이나 평양을 방문한 외국 사절이 서커스를 보면서뜨거운 박수와 찬사를 보내는 것처럼, 당시에도 외국 사신들을 위한 접대용으로 곡예는 무척 사랑을받았습니다.
실크로드를 타고 들어온 곡예는 우리 나라와 일본 에도 전해졌는데, 벽화 등의 미술품에 멋지게 표현돼있습니다.
- P228


포도의 원산지는 이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포도가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온 것도 장건이 실크로드를 착공한 이후였습니다. 한혈마가 있는 대원을 방문한 한나라 사신은 대원의 이웃 나라들이 포도주를 빚어 마신다는 소식을 천자에게 전했습니다. 부잣집에서는 1만여 석에 이르는 술을 저장해 두고 지내며, 오래된 것은 몇십 년이 지나도 상하지 않을뿐더러 맛이 더욱 기막히다면서, 그는 씨앗을 천자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외국의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무제는 궁궐 안의 경치가 좋고 비옥한 터에 포도씨를 심어 온통 포도나무로 뒤덮었습니다. 그가 외국의사신들을 불러서 한혈마와 함께 이를 보여 주며 자랑했다고 하니, 당시에 포도를 얼마나 귀히 여겼는지 가히 짐작이 갑니다. 이렇게 포도가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들어온 이래로, 투르판은 중국 황실에포도를 진상하는 고장이 되었습니다.
포도 말고도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식물이 무척 많은데, 대체로이름 앞에 ‘호胡)‘자가 붙습니다. 호도(호두), 호두(누에콩), 호산(마늘),
호마(참깨), 호초(후추), 호유(완두콩), 호라복(당근), 호과(오이) 등이 그것입니다.
호는 원래 흉노가 자기 자신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흉노의 칸이 한나라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남쪽에는 큰 한(漢)이 있고, 북쪽에는 강한 호(胡)가 있소, 호는 하늘의 자손이오" 라고 한 글귀입니다.
역사적으로 ‘호‘는 한나라 때부터 흉노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하다가, 당나라 때 와서는 이란과 인도까지 가리키는 말로 확대되었습니다. - P232


실크로드를 통해 동방에 들어온 무늬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당초 무늬일 것입니다. 여러 가지 덩굴풀이 비꼬여 뻗어 가는 모양의무늬를 말하는데, 글자 뜻으로 보면 당(唐) + 초(草)의 무늬, 즉 당나라풍의 풀 무늬를 가리킵니다.
실크로드의 정점을 구가한 당나라풍이란 바로 서역풍 · 이국풍을말합니다. 덩굴풀 무늬가 서역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서역풍의 대표인 당풍을 이 무늬의 출전처럼 붙여 당초 무늬라 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당초 무늬는 하나의 패턴으로서, 주제 식물을 무엇으로 하느냐에따라 연꽃당초 무늬 · 인동당초 무늬, 포도당초 무늬 등이 있는데,
판별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주제 식물을 장식화하기도 합니다.
포도당초 무늬는 포도를 영생의 과일로 신앙한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초로 출현했습니다.
- P244

대항해 시대에 왜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포르투갈 과 에스파냐가 지리상 발견의 대부분을 독점했을까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그것은 711년 이후 8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이슬람이 지배한 결과였습니다. 페르시아에 이어 실크로드의 중계 무역을 담당했던이슬람 제국의 항해술은 당시 세계 정상이었습니다.
대해와는 달리 원양으로 나가는 항해술은 과학적 기초 없이는 불가능한 까닭에 수학과 천문학, 지구 물리학 등의 지식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당시 이슬람의 과학은 마치 오늘날 우주선 속에 현대 과학의모든 것이 들어 있듯이, 대향을 항해하는 함선에서 고스란히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원양 항해에 없어서는 안 되는 천문 관측의, 사분원,
십자형 측량대 등은 이슬람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발명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원양 항해를 위해 혁신적으로 제조된 카라벨(쾌속 범선)도 아랍인의 카라크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한편, 정신 문화의 측면을 살펴보면 아랍 문화가 르네상스에 미친 경로 역시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서였습니다. 10세기, 칼리프 알하감 2세 때 수도 코르도바에 세워진 도서관에는 당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장서 40만 권이 소장돼 있었는데, 이곳은 그리스 철학 연구소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1085년 국토 회복 운동을 위해 에스파냐에 들어온 기독교 군대가 톨레도를 점령하여 세운 번역 학교에서 아랍의 과학 저술과 철학 저술들이 번역돼 유럽에 소개되었는데,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으로 저명한 이븐 루쉬드(서구에서는 아베로에스로 알려짐)의 저작이 번역돼 서유럽의 대학들에 알려지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 P285


이 두 영사관은 중앙아시아의 유물 수집에 불을 당긴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탐험 경쟁이 본격화되기 전인 19세기 후반까지는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지리 · 지질 · 전략의 측면에 국한돼 있었습니다.
19세기 러시아의 남진 정책과 영국의 북진 정책이 가장 첨예하게 충돌한 중앙아시아는 양국이 전쟁에 유리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불꽃 튀기는 스파이 경쟁을 하던 무대였습니다. 대항해 시대 이후 해양으로 팽창하던 서구와 달리 러시아는 대륙으로 팽창했는데, 서구가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서였다면 러시아는 모피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16세기) 시베리아 정복과 더불어 시작한 동진 · 남하 정책은 19세기에 이르면 영국의 북진 정책과 대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결과 흑해의 그림 반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걸텨 이른바 1차 냉전이라고 일컬어지는 거대한 전선이 형성됩니다.
- P297

유를 쟁탈전의 서막

타림 분지의 쿠차에서 최초로 고대 문서가 발견됐는데, 이 문서가 열강들의 유물 쟁탈전에 불을 붙였습니다. 전에도 물론 불길이 번질 소지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원주민들은 오래전부터내려오는 전설을 믿고 있었습니다. 사막 속의 사라진 도시에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가 묻혀 있는데, 신의 노여움을 사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가지고 나올수 없다는 풍문들이었습니다.
원주민 탐험가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사막 속으로 들어갔으나 돌아오지 못한 자가 부지기수였습니다. 비록 가뭄에 콩 나듯 했지만,
이들이 가져온 골동품은 상인들의 손을 거쳐 유럽인에게 비싼 값에 팔렸습니다. 매우 수지맞는 사업이라는 것이 서서히 알려지면서 골동품 사업은 유망 업종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후에 서양인들은 이들을 ‘원주민 유물 사냥꾼‘이라고 불렀습니다.
1889년 원주민 탐험가들이 쿠차 부근에서 탑에 굴을 뚫고 들어가가져온 (앞서 말한 열강들의 유물 쟁탈전에 불을 붙인) 고문서 뭉치가 영국의 저명한 언어학자 훼른레의 손으로 들어가 해독되었습니다. 이문서가 5세기경 브라흐미 알파벳을 사용해 산스크리트어로 쓴 의술과 강신술에 관한 내용으로, 인도에서 발견된 어떤 것보다 오래된 문자로 판명되자, 세상은 놀라고 말았습니다. - P300

진보와 문명을 다시 생각하며

여러분은 어떤 방식이 있다고 봅니까?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기서 역시에 대한 태도가 결정됩니다. 잃고 그름이 문제, 즉 점의의 문제가 근대 역사학의 대상이 아니라면 역사학은 추진력을 잃고맙니다.
진화론적 발전관에 뿌리를 둔 근대 역시학은 시실의 해서을 진보와 연관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진보란 무엇인가? 그것은 후진성을 전제할 때 가능하기 때문에 한 역사 안에서, 그리고 복수의 역사체들사이에 단계를 설정합니다.
이때 진보의 기준은 자연 상태를 인공화한 정도가 됩니다. 여기서의 인공화를 문명이라고 일컫는데,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근대 역사학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면서 문명이 시작된 것으로 규정합니다.
자연진화론처럼 근대 역사학도 역사체들을 안팎으로 계서화합니다. 그 결과 계서화는 정착되고 역사 연구는 이 틀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역사 연구의 방법으로 실증주의가 선호되는데, 이것은 사실(史實)을 이른바 과학적 방법, 즉 객관주의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체계화하도록 요구합니다.
이 방법이 가지고 있는 결정적 결함은 ‘이미 주어진 계서화된 틀‘을 거부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 버리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실증 사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근대 학문의 방법론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속성이자 함정입니다.
앞서 질문한 두 종류의 탐사 방식, 즉 약탈적 방식과 과학적 방식중에서 만일 선택을 망설이고 있다면, 아마도 학문적 방법에 숙달돼 있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겠지만, 그것은 역사에서 정의의 문제를 기존의 고정괸 틀 안에서만 고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 P322

어떤 방식이 옳은가? 에 대해 일단 ‘근대적 틀 안에서‘ 답을 하려면, 최소한 정의가 적용되는 틀의 범위를 공정하게 확장하고, 문명이인공화의 결과뿐 아니라 인공화의 과정과 방식까지 포괄하는 것임을 승인해야 합니다. 후자는 다른 식으로 말하면 실크로드학 안에 내재화되어 있는 서구와 미국의 헤게모니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전자는원시적 단계를 설정하여 원주민 사회와 원주민 유물 수색자들의 역할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혁명을 할 수 있다면 틀을 부수고 새로운 대안을 세우는 것일테지만 말입니다.
- P323

금관

신라의 초원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금관입니다. 신라의 금관과 가장 유사한 최초의 형태는 남러시아 초원의 사르마트족 묘에서 출토된 기원전 2세기의 금관(도판 2)입니다.
금관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돼 있습니다(도판 3), 나무와 녹각입니다. 둘 다 고대의 샤머니즘에서 핵심적 상징이었는데, 나무는 우주수(宇宙樹)로서 신(태양)에 닿을 수 있는 일종의 계단이고, 사슴은 생명을 주는 신이었습니다.
한국인에게 밥이 하늘인 것처럼 시베리아인에게 사슴은 주식이자 하늘이었습니다. 사슴은 죽어서 인간을 살찌우며, 하늘로 올라간 그의 영혼은 또다시 더 좋은 뿔과 가죽과 고기를 가지고 돌아와 인간의후손을 풍요롭게 합니다. 초원 문화의 대표자인 스키타이인에게도사슴은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일 정도로 신성한 것이었습니다(이 책의135쪽 참조),
이 두 요소에 새를 추가하면 금관의 상징은 더 풍부해집니다. 우주수에 앉아 있는 새는 인간과 신 사이를 오가는 전령입니다. 신라 서봉총의 금관(도판 4), 흉노의 금관, 스키타이 황금 인간의 모자 장식에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금관의 소재는 왜 금이었을까요? 초원 문화에서 황금은태양의 분신이었습니다. 태양 숭배 사상 때문입니다. 스키타이와 흉노가 남긴 유물의 주류가 황금을 소재로 했다는 사실은 초원 문화에서 황금이 가지는 비중을 짐작케 해줍니다.
- P326

기마 문화

초원 민족은 말이 언제나 삶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기마 궁사를 태운 말은 종족의 생존을 좌우했으며, 전투력의 핵심이었습니다. 흑해에서 만주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을 종횡으로 누비던 말은 주인 따라 무덤까지 함께 갔습니다. 쿠르간(스키타이나 흉노의 무덤) 속에는 마상의 도시가 재현됐습니다.
신라 천마총에서 나온 하얀 자작나무 껍질 위의 천마도〉(도판 1)는 말에 대한 이들의 정신 세계를 보여 줍니다. 백마는 붉게 타고 있는 하늘을 건너는 불사조처럼 보입니다. 이 천마의 위용은 ‘비주(飛走)‘의 기능성에 머물지 않고 이를 뛰어넘어 신격화되어 있습니다.
신령스러운 천마는 사자의 영혼을 태우고 (질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눈부신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해 저승의 하늘을 건너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황남대총에서는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한 아름다운 말 안장을 비롯해 많은 마구류가 나왔습니다. 금령총의 기마인물형 토기(도판 3)는당시 신라인 자신의 얼굴인지도 모릅니다. 말 무덤에서는 말뼈들이출토돼 말을 희생 제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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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교역로의 기점은 ‘흑해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아조프 해입니다. 그 연안에는 그리스 식민도시가 포진해 있었는데, 주로 이오니아의 식민지였습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시대(이를테면 헤로도토스의 시대)의 스키타이는 세력이 강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흑해나 아조프 해 연안의그리스 식민도시들을 공략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과 우호 관계를 맺어 통상을 통한 이득을 도모했습니다.
스키타이는 그리스의 여러 세력 중에서 이오니아를 카운터파트너로 택했습니다. 앞서 말한 전쟁에서 본 이오니아인은 소아시아(터키) 연안의 그리스 식민도시에서 차출돼 온 군인들이기 때문에, 그리스 본토의 이오니아인 혹은 이제 우리가 다루려는 흑해 연안의 이오니아인과는 다릅니다. - P131

스키타이의 공예품으로는 동물들이 서로 물고 뜯는 투쟁 장면은 투조 기법으로 처리한 동물 의장이 유명합니다. 재료는 주로 황금 등 귀금속을 사용했습니다.
스키타이 공예품의 특색은 시기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데, 전기가 자연주의적인 흐름을, 후기가 장식적인 흐름을 보여 줍니다. 부연하면 전기 유물은 사실적 표현을 잃지 않으면서 장식한 데 반해, 후기유물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양식화하거나 도안화한 것입니다.
전기 유물은 쿠반 강 유역에서 나오는 것이 대부분이며, 후기 유물은 드네프르 강 유역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키타이의 중심 지역이 전기와 후기 사이에 이동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알렉산드로스(재위 BC 356~323)의 원정은 스키타이의 미술 공예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른바 스키타이 문양의 완성형이 알렉산드로스 원정 이후에 창출되는데, 탈그렌에 따르면 기원전 350-250 년 사이 스키타이 문화는 절정기를 구가합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이후에 나타난 헬레니즘의 영향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스키타이 미술품의 독자성이 훼손될 수밖에 없습니다 . - P135


스키타이의 미술 양식은 거듭 말하지만 일차적으로는 스키타이인의 사회와 이들의 삶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스키타이인은 정착을 하지 않고 이동 생활을 하기 때문에 정해진 주거지가 없습니다. 따라서벽화를 그리고 조각을 세우며 부조를 할 고정된 공간이 없습니다. 정주 환경의 공간이 사실적 표현을 요구한다면, 이동하는 삶은 장식을위해 도안화된 표현을 요구합니다. 유목민이 할 수 있는 사치는 옷의치장, 개인의 꾸미기, 그리고 장비와 마구 등의 장식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초원의 끝없는 들판에서는 야생의 동물들이 쫓고 쫓기며 생존을 위해 투쟁합니다. 유목민은 이런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야 하고 사냥감을 구하며 가축들을 돌봐야 합니다. 유목민은 생산 시스템이 열악하기 때문에, 부족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정주민들을 약탈하는 것이 중요한 생산 활동의 하나가 됩니다. 유목 집단 사이의전투도 생존 환경이 야수적인 만큼 야생 동물들처럼 격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 P137


동물 투쟁 의장으로 대표되는 스키타이 문양은 신기하게 파미르이동의 동방에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서시베리아, 남시베리아, 중알아지아와 몽골 초원, 그리고 중국의 북방에 동일한 재료와 동일한 문양이 나타나는데, 이 현상을 두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스키타이가초원 루트를 통해 흉노에게 이 양식을 전파한 것으로 봅니다.
한편, 스키타이 의장의 기원에 대한 전혀 새로운 연구가 있습니다.
보로브카(Borovka) 등의 학자들은 알타이 산맥 북쪽의 미누신스크를 주목합니다. 이들은 초원 미술의 발상지를 미누신스크로 보고, 이곳에서 동서로 갈라져 유라시아 대륙의 남서 지역(러시아 남부 초원 등)에서는 아시리아와 페르시아의 양식이 스키타이에 영향을 주고, 남동쪽 중국 북방 초원 등)에서는 중국의 양식이 흉노에 수입되어서 초원 미술이 더 풍부해졌다는 것입니다.
스키타이 문양의 가장 원시적인 조형이 미누신스크에서 출토된 이래, 이 가설을 입증해 주는 유물들의 분포가 속속 드러나자 기존의 학설은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학설에 따르면 스키타이와 흉노는 같은 종족이 됩니다. 스키타이를 이란계 유목민, 흉노를 몽골로이드 유목민으로 보는 기존의 학설과는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스키타이와 우리 나라의 관계 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밀접합니다. - P139

한반도 동남부(고신라)에 중국이나 일본 등 동아시아의 어느 지역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풍부한 스키타이 계통의 유산이 현존합니다. 고대 유라시아 유목 민족에 대한 연구가 한국 고대사에서 반드시 필요함을 보여 주는 사안입니다.
- P140

이란의 역대 왕조
BC 550~BC 330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BC 247~AD 226 파르티아
AD 220~ AD 651 사산조 페르시아
AD 651이후~ 이슬람의 시대

파르티아는 멸망한 페르시아의 뒤를 이어 이란인이 세운 제국이며,
실크로드의 중심 교역국으로서 대단한 활약을 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와 중국 사이에서 비단 교역을 중개하며 큰 이익을 남겼습니다. 장건이 착공한 실크로드는 파르티아를 통해 로마로 연결됐습니다.
기원전 129년 장건이 월지를 방문했을 때 월지는 대하를 박트리아로 쫓아냈습니다. (당시 파르티아는 박트리아의 그리스 왕국을 점령하고있었는데) 쫓겨난 대하가 파르티아를 쳐서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월지는 겨우 자리잡은 대하를 또다시 공략하고 더욱 남하하여 간다라를 중심으로 쿠샨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이 쿠샨 왕국에서 불상이 탄생했으며, 간다라 불교 미술도 실크로드를 따라 유라시아 대륙에 전파됐습니다.
이처럼 실크로드는 전쟁의 산물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중앙 유라시아 지역만 국한해 보아도 유목 세력인 사카족(월지 · 대하)이 정주 세력(박트리아그리스 · 파르티아 · 인도)과 상쟁하면서 힘의 각축을 벌였던 것입니다.
- P154

실크로드 하면 비단 무역을 중계하는 푸른 눈의 카라반이 떠오릅니다. 당나라 장안에서 만나는 이들은 대부분 소그드 상인이었습니다. 고대의 실크로드 무역은 소그드 상인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그드(sugd)란 ‘불로 정화된‘ 혹은 ‘청정한 ‘이란 의미입니다. 동부 이란의 방언인 소그드어를 사용한 그들은 아무다리아와 시르다리아 사이의 땅에서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소그드인이 점재해 사는 이 땅을 소그디아나라고 합니다.
그들의 생김새는 우리 속담에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난다"
는 말이 있듯이 그런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강인하고 빈틈없는 모습입니다.
- P155

약소 민족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찬란한 족적을 유라시아 대륙에 남긴 소그드 상인도 8세기 중반 몰아닥친 이슬람이란 거대한 파도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후로 우리는 그들을 역사 안에서만 만나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그드의 역사를 개괄하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한 속주(州)였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당했으며, 대월지 쿠샨 왕조의지를 받았고 다시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역에 들어갔으며, 에프탈에 이어 투르크의 우산 아래 놓였다가 당의 기미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이슬람 속으로 녹아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실크로드의 메신저라 할 수 있는 소그드 상인들의 명멸을 보면서 역사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동서 교역을 강조하는 실크로드관에서보면, 이들이야말로 중요한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소그드에 대한 연구는 미미하며 이들에 대한 지식도 거의 피상적인 수준을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낙타 등에 동서의 문물을 싣고는 목숨을 걸고 유라시아 대륙을 종횡하는 소그드인의 모습은 실크로드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실크로드의 화면은 이 장면 없이는 구성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의활약은, 마치 초(超)대기업의 국제 영업사원처럼 로마와 중국을 잇는정상의 무역 노선 실크로드를 빛내기 위해 존재한 국제 상인들로만보이게 합니다.
이들은 어쩌면 오늘날 그러한 그림을 생산하는 전문가들에게도 이용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살아남기 위해 유목민과 공생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소그드인은 오히려 이 구조를 통해 세계에 실로 위대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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