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저 유명한 카이사르 장군(BC 100~44)은 극장에 올 때면 당시 최고로 호화로운 의상인 비단옷을 꼭 입고 나타났는데, 그를 본떠서 로마의 남녀 귀족들이 다투어 비단옷을 입는 풍조가 생겨나 비단이 고갈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티베리우스 황제(재위 AD 14~37)는 급기야 남자들이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하는 칙령까지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비단 값만 치솟고 암시장에서 더욱 왕성하게 팔리는 결과만 초래했습니다.
결국은 욕망이 규제를 풀었습니다. 전문 비단 시장이 개설되고, 수입한 비단을 여러 형태로 가공하는 공장도 생겨났습니다. 심지어 2세기에는 로마 제국의 서쪽 끝인 런던에서 비단이 성행한 정도가 중국의 낙양에 뒤지지 않았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380년경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귀족들에게만 허용되던 비단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최하층까지 퍼졌다" 고 4세기 로마의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첼리누스가 기록했습니다. 또 410년에 거행된 황제의 세례식에는 모든 시민이 비단을 몸에 걸치고 참석했다고 합니다.
기원전 31년부터 서기 192년까지 약 220년 동안 로마가 동방 무역(주로 비단 무역)으로 소모한 금액은 총 1억 영국 파운드(1931년 당시의 가치로 환산)에 달했으며, 후일 이러한 사치성 소비로 국가 재정이 탕진된 것이 바로 로마 제국 붕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 P191

서방에서는 비단의 민족.
동방에서는 옥의 민족으로 알려진 월지

선사 시대 이래 호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옥을 생산하는 나라였습니다. 고대의 중국인들은 옥을 어떠한 물질보다도 귀중하게여겼습니다. 명품의 옥을 구하려는 중국은 월지와 비단을 대가로 교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월지는 호탄의 옥으로 구입한 비단을 서방에 되팔았습니다. 이는 흉노에게 쫓겨서 고향을 떠나기 전의 일로, 월지의 비단 교역은 흉노보다 시대가 앞섭니다. 이 때문에 비단을 뜻하는 세레스란 말이 월지어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월지가 서방에서는 비단의 민족으로, 동방에서는 옥의 민족으로 알려진 것은 이 때문입니다. - P197

우리가 어느 절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불상은 서기 1세기 간다라지방에서 처음 조성되었습니다. 당시 간다라 지방은 유목 왕조인 사카 왕조가 통치하고 있었고, 3대 왕인 카니슈카는 불교를 크게 번성시켜 호불왕(불교를 보호하는 왕)이라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간다라에서 불상을 조성한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에 따라 왔던 그리스인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간다라미술을 말할 때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 교류의 관점에서 서양 고전미술 양식이 동양으로 전파된 결과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게다가 선진문명이 후진 문명으로 전파된다는 일반론을 근거로 종종 서양 문명이 동양 문명에 비해 우월하다는 서양 중심주의의 근거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필자는 앞에서도 일관되게 피력한 바와 같이, 양식의 전파보다는 당시 불상을 조성했던 이들의 삶과 그들이 속한 사회 환경, 그리고 거기서 형성된 미의식이 더 근본적이고 중요하다고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간다라가 아닌 인도 본토에서는 불상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왜 하필 카니슈카 왕 시기에 특별히 불상 조성이 본격화되었을까요?
사실 인도 본토에 있는 마투라에서도 간다라에서와 거의 같은 시기에 불상이 만들어졌습니다. 간다라의 불상이 서방인의 용모인 데반해, 마투라의 불상은 생김새가 훨씬 인도인을 닮았습니다. 인도의 전통적인 풍요의 신 약샤를 본떴기 때문인데, 마투라 유형(오른쪽의보살 입상)은 한 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간다라 유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이 유형은 주류를 이루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카니슈카 왕은 자기가 다스리는 광대한 제국에 불교를 적극적으로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그를 제2의 아소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원이나 불탑 건립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아서 불교 미술은 이때 황금기를 맞게 됩니다. 그러면 왜 카니슈카는 제2의 아소카가 되어 불교를 진작시켰으며, 왜 불상이 그의 재위 기간에 본격적으로 제작되었을까요?
- P210


이제 군주가 된 카니슈가에게는 월지의 다른 세 씨족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왕권 정쟁으로 갈라진 구산의 귀족들을 단결시키며, 제국 내의 여러 민족들을 통합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카니슈카는 불교를 이 이데올로기로 했으니, 자신이 호불왕이 되어 전국적으로 불교를 흥륭하게 일으 켰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왕권을 강화하고 제제를 정비할 이올로기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파르티아 문화를 도입했습니다(화폐에 중기이란어 [BC 3세기~AD 세기]가 등장한 것은 카니슈카 배이다. 그의 여러 예로 볼 때 가니슈카의 왕실에서는 중기 이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통일신라의 경우를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귀족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삼국을 통합하는 데 불교가 정신적으로 대한기여를 했고, 왕권과 국가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는 중국 문화가 그에 못지않은 역할을 한 것입니다.
카니슈카 정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불교는 통합을 위해, 마아 문화는 왕권 강화를 위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상에 이란적 요소가 강하게 반영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P213

미얀마의 왕이 한나라 황제에게 헌상한 마술사는 불을 토하고, 자신의 팔다리를 자르며, 소와 말의 머리를 바꾸고,
또 1000개나 되는 공을 공중에 띄워 묘기를 부렸다고 합니다.
중국에는 일찍부터 불교 · 조로아스터교 · 마니기독교 등 여러 외래 종교가 들어왔는데, 이들은 포교를 위해 번화가에서 곡예를 부렸습니다.
곡예의 종류는 무척 다양했습니다. 몸을 공중에 가볍게 날리기, 칼 삼키기, 여러 개의 공을 공중에 띄우기, 불내뿜기, 참외 심기, 나무 심어 기르기, 배 가르기, 신체의 일부를 자유롭게 자르기도 하고 붙이기도 하기, 줄타기, 머리위에 장대를 세우고 그 위에서 몸을 날리기 따위였습니다.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열린 곡예는 폭발적 인기를 끌어서 상설 공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궁중에 불려 가는 스타급곡예사도 생겼습니다. 지금도 북경이나 평양을 방문한 외국 사절이 서커스를 보면서뜨거운 박수와 찬사를 보내는 것처럼, 당시에도 외국 사신들을 위한 접대용으로 곡예는 무척 사랑을받았습니다.
실크로드를 타고 들어온 곡예는 우리 나라와 일본 에도 전해졌는데, 벽화 등의 미술품에 멋지게 표현돼있습니다.
- P228


포도의 원산지는 이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포도가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온 것도 장건이 실크로드를 착공한 이후였습니다. 한혈마가 있는 대원을 방문한 한나라 사신은 대원의 이웃 나라들이 포도주를 빚어 마신다는 소식을 천자에게 전했습니다. 부잣집에서는 1만여 석에 이르는 술을 저장해 두고 지내며, 오래된 것은 몇십 년이 지나도 상하지 않을뿐더러 맛이 더욱 기막히다면서, 그는 씨앗을 천자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외국의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무제는 궁궐 안의 경치가 좋고 비옥한 터에 포도씨를 심어 온통 포도나무로 뒤덮었습니다. 그가 외국의사신들을 불러서 한혈마와 함께 이를 보여 주며 자랑했다고 하니, 당시에 포도를 얼마나 귀히 여겼는지 가히 짐작이 갑니다. 이렇게 포도가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들어온 이래로, 투르판은 중국 황실에포도를 진상하는 고장이 되었습니다.
포도 말고도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식물이 무척 많은데, 대체로이름 앞에 ‘호胡)‘자가 붙습니다. 호도(호두), 호두(누에콩), 호산(마늘),
호마(참깨), 호초(후추), 호유(완두콩), 호라복(당근), 호과(오이) 등이 그것입니다.
호는 원래 흉노가 자기 자신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흉노의 칸이 한나라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남쪽에는 큰 한(漢)이 있고, 북쪽에는 강한 호(胡)가 있소, 호는 하늘의 자손이오" 라고 한 글귀입니다.
역사적으로 ‘호‘는 한나라 때부터 흉노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하다가, 당나라 때 와서는 이란과 인도까지 가리키는 말로 확대되었습니다. - P232


실크로드를 통해 동방에 들어온 무늬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당초 무늬일 것입니다. 여러 가지 덩굴풀이 비꼬여 뻗어 가는 모양의무늬를 말하는데, 글자 뜻으로 보면 당(唐) + 초(草)의 무늬, 즉 당나라풍의 풀 무늬를 가리킵니다.
실크로드의 정점을 구가한 당나라풍이란 바로 서역풍 · 이국풍을말합니다. 덩굴풀 무늬가 서역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서역풍의 대표인 당풍을 이 무늬의 출전처럼 붙여 당초 무늬라 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당초 무늬는 하나의 패턴으로서, 주제 식물을 무엇으로 하느냐에따라 연꽃당초 무늬 · 인동당초 무늬, 포도당초 무늬 등이 있는데,
판별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주제 식물을 장식화하기도 합니다.
포도당초 무늬는 포도를 영생의 과일로 신앙한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초로 출현했습니다.
- P244

대항해 시대에 왜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포르투갈 과 에스파냐가 지리상 발견의 대부분을 독점했을까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그것은 711년 이후 8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이슬람이 지배한 결과였습니다. 페르시아에 이어 실크로드의 중계 무역을 담당했던이슬람 제국의 항해술은 당시 세계 정상이었습니다.
대해와는 달리 원양으로 나가는 항해술은 과학적 기초 없이는 불가능한 까닭에 수학과 천문학, 지구 물리학 등의 지식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당시 이슬람의 과학은 마치 오늘날 우주선 속에 현대 과학의모든 것이 들어 있듯이, 대향을 항해하는 함선에서 고스란히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원양 항해에 없어서는 안 되는 천문 관측의, 사분원,
십자형 측량대 등은 이슬람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발명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원양 항해를 위해 혁신적으로 제조된 카라벨(쾌속 범선)도 아랍인의 카라크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한편, 정신 문화의 측면을 살펴보면 아랍 문화가 르네상스에 미친 경로 역시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서였습니다. 10세기, 칼리프 알하감 2세 때 수도 코르도바에 세워진 도서관에는 당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장서 40만 권이 소장돼 있었는데, 이곳은 그리스 철학 연구소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1085년 국토 회복 운동을 위해 에스파냐에 들어온 기독교 군대가 톨레도를 점령하여 세운 번역 학교에서 아랍의 과학 저술과 철학 저술들이 번역돼 유럽에 소개되었는데,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으로 저명한 이븐 루쉬드(서구에서는 아베로에스로 알려짐)의 저작이 번역돼 서유럽의 대학들에 알려지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 P285


이 두 영사관은 중앙아시아의 유물 수집에 불을 당긴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탐험 경쟁이 본격화되기 전인 19세기 후반까지는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지리 · 지질 · 전략의 측면에 국한돼 있었습니다.
19세기 러시아의 남진 정책과 영국의 북진 정책이 가장 첨예하게 충돌한 중앙아시아는 양국이 전쟁에 유리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불꽃 튀기는 스파이 경쟁을 하던 무대였습니다. 대항해 시대 이후 해양으로 팽창하던 서구와 달리 러시아는 대륙으로 팽창했는데, 서구가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서였다면 러시아는 모피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16세기) 시베리아 정복과 더불어 시작한 동진 · 남하 정책은 19세기에 이르면 영국의 북진 정책과 대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결과 흑해의 그림 반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걸텨 이른바 1차 냉전이라고 일컬어지는 거대한 전선이 형성됩니다.
- P297

유를 쟁탈전의 서막

타림 분지의 쿠차에서 최초로 고대 문서가 발견됐는데, 이 문서가 열강들의 유물 쟁탈전에 불을 붙였습니다. 전에도 물론 불길이 번질 소지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원주민들은 오래전부터내려오는 전설을 믿고 있었습니다. 사막 속의 사라진 도시에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가 묻혀 있는데, 신의 노여움을 사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가지고 나올수 없다는 풍문들이었습니다.
원주민 탐험가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사막 속으로 들어갔으나 돌아오지 못한 자가 부지기수였습니다. 비록 가뭄에 콩 나듯 했지만,
이들이 가져온 골동품은 상인들의 손을 거쳐 유럽인에게 비싼 값에 팔렸습니다. 매우 수지맞는 사업이라는 것이 서서히 알려지면서 골동품 사업은 유망 업종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후에 서양인들은 이들을 ‘원주민 유물 사냥꾼‘이라고 불렀습니다.
1889년 원주민 탐험가들이 쿠차 부근에서 탑에 굴을 뚫고 들어가가져온 (앞서 말한 열강들의 유물 쟁탈전에 불을 붙인) 고문서 뭉치가 영국의 저명한 언어학자 훼른레의 손으로 들어가 해독되었습니다. 이문서가 5세기경 브라흐미 알파벳을 사용해 산스크리트어로 쓴 의술과 강신술에 관한 내용으로, 인도에서 발견된 어떤 것보다 오래된 문자로 판명되자, 세상은 놀라고 말았습니다. - P300

진보와 문명을 다시 생각하며

여러분은 어떤 방식이 있다고 봅니까?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기서 역시에 대한 태도가 결정됩니다. 잃고 그름이 문제, 즉 점의의 문제가 근대 역사학의 대상이 아니라면 역사학은 추진력을 잃고맙니다.
진화론적 발전관에 뿌리를 둔 근대 역시학은 시실의 해서을 진보와 연관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진보란 무엇인가? 그것은 후진성을 전제할 때 가능하기 때문에 한 역사 안에서, 그리고 복수의 역사체들사이에 단계를 설정합니다.
이때 진보의 기준은 자연 상태를 인공화한 정도가 됩니다. 여기서의 인공화를 문명이라고 일컫는데,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근대 역사학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면서 문명이 시작된 것으로 규정합니다.
자연진화론처럼 근대 역사학도 역사체들을 안팎으로 계서화합니다. 그 결과 계서화는 정착되고 역사 연구는 이 틀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역사 연구의 방법으로 실증주의가 선호되는데, 이것은 사실(史實)을 이른바 과학적 방법, 즉 객관주의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체계화하도록 요구합니다.
이 방법이 가지고 있는 결정적 결함은 ‘이미 주어진 계서화된 틀‘을 거부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 버리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실증 사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근대 학문의 방법론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속성이자 함정입니다.
앞서 질문한 두 종류의 탐사 방식, 즉 약탈적 방식과 과학적 방식중에서 만일 선택을 망설이고 있다면, 아마도 학문적 방법에 숙달돼 있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겠지만, 그것은 역사에서 정의의 문제를 기존의 고정괸 틀 안에서만 고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 P322

어떤 방식이 옳은가? 에 대해 일단 ‘근대적 틀 안에서‘ 답을 하려면, 최소한 정의가 적용되는 틀의 범위를 공정하게 확장하고, 문명이인공화의 결과뿐 아니라 인공화의 과정과 방식까지 포괄하는 것임을 승인해야 합니다. 후자는 다른 식으로 말하면 실크로드학 안에 내재화되어 있는 서구와 미국의 헤게모니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전자는원시적 단계를 설정하여 원주민 사회와 원주민 유물 수색자들의 역할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혁명을 할 수 있다면 틀을 부수고 새로운 대안을 세우는 것일테지만 말입니다.
- P323

금관

신라의 초원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금관입니다. 신라의 금관과 가장 유사한 최초의 형태는 남러시아 초원의 사르마트족 묘에서 출토된 기원전 2세기의 금관(도판 2)입니다.
금관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돼 있습니다(도판 3), 나무와 녹각입니다. 둘 다 고대의 샤머니즘에서 핵심적 상징이었는데, 나무는 우주수(宇宙樹)로서 신(태양)에 닿을 수 있는 일종의 계단이고, 사슴은 생명을 주는 신이었습니다.
한국인에게 밥이 하늘인 것처럼 시베리아인에게 사슴은 주식이자 하늘이었습니다. 사슴은 죽어서 인간을 살찌우며, 하늘로 올라간 그의 영혼은 또다시 더 좋은 뿔과 가죽과 고기를 가지고 돌아와 인간의후손을 풍요롭게 합니다. 초원 문화의 대표자인 스키타이인에게도사슴은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일 정도로 신성한 것이었습니다(이 책의135쪽 참조),
이 두 요소에 새를 추가하면 금관의 상징은 더 풍부해집니다. 우주수에 앉아 있는 새는 인간과 신 사이를 오가는 전령입니다. 신라 서봉총의 금관(도판 4), 흉노의 금관, 스키타이 황금 인간의 모자 장식에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금관의 소재는 왜 금이었을까요? 초원 문화에서 황금은태양의 분신이었습니다. 태양 숭배 사상 때문입니다. 스키타이와 흉노가 남긴 유물의 주류가 황금을 소재로 했다는 사실은 초원 문화에서 황금이 가지는 비중을 짐작케 해줍니다.
- P326

기마 문화

초원 민족은 말이 언제나 삶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기마 궁사를 태운 말은 종족의 생존을 좌우했으며, 전투력의 핵심이었습니다. 흑해에서 만주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을 종횡으로 누비던 말은 주인 따라 무덤까지 함께 갔습니다. 쿠르간(스키타이나 흉노의 무덤) 속에는 마상의 도시가 재현됐습니다.
신라 천마총에서 나온 하얀 자작나무 껍질 위의 천마도〉(도판 1)는 말에 대한 이들의 정신 세계를 보여 줍니다. 백마는 붉게 타고 있는 하늘을 건너는 불사조처럼 보입니다. 이 천마의 위용은 ‘비주(飛走)‘의 기능성에 머물지 않고 이를 뛰어넘어 신격화되어 있습니다.
신령스러운 천마는 사자의 영혼을 태우고 (질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눈부신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해 저승의 하늘을 건너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황남대총에서는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한 아름다운 말 안장을 비롯해 많은 마구류가 나왔습니다. 금령총의 기마인물형 토기(도판 3)는당시 신라인 자신의 얼굴인지도 모릅니다. 말 무덤에서는 말뼈들이출토돼 말을 희생 제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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