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타이 교역로의 기점은 ‘흑해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아조프 해입니다. 그 연안에는 그리스 식민도시가 포진해 있었는데, 주로 이오니아의 식민지였습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시대(이를테면 헤로도토스의 시대)의 스키타이는 세력이 강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흑해나 아조프 해 연안의그리스 식민도시들을 공략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과 우호 관계를 맺어 통상을 통한 이득을 도모했습니다.
스키타이는 그리스의 여러 세력 중에서 이오니아를 카운터파트너로 택했습니다. 앞서 말한 전쟁에서 본 이오니아인은 소아시아(터키) 연안의 그리스 식민도시에서 차출돼 온 군인들이기 때문에, 그리스 본토의 이오니아인 혹은 이제 우리가 다루려는 흑해 연안의 이오니아인과는 다릅니다. - P131

스키타이의 공예품으로는 동물들이 서로 물고 뜯는 투쟁 장면은 투조 기법으로 처리한 동물 의장이 유명합니다. 재료는 주로 황금 등 귀금속을 사용했습니다.
스키타이 공예품의 특색은 시기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데, 전기가 자연주의적인 흐름을, 후기가 장식적인 흐름을 보여 줍니다. 부연하면 전기 유물은 사실적 표현을 잃지 않으면서 장식한 데 반해, 후기유물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양식화하거나 도안화한 것입니다.
전기 유물은 쿠반 강 유역에서 나오는 것이 대부분이며, 후기 유물은 드네프르 강 유역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키타이의 중심 지역이 전기와 후기 사이에 이동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알렉산드로스(재위 BC 356~323)의 원정은 스키타이의 미술 공예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른바 스키타이 문양의 완성형이 알렉산드로스 원정 이후에 창출되는데, 탈그렌에 따르면 기원전 350-250 년 사이 스키타이 문화는 절정기를 구가합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이후에 나타난 헬레니즘의 영향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스키타이 미술품의 독자성이 훼손될 수밖에 없습니다 . - P135


스키타이의 미술 양식은 거듭 말하지만 일차적으로는 스키타이인의 사회와 이들의 삶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스키타이인은 정착을 하지 않고 이동 생활을 하기 때문에 정해진 주거지가 없습니다. 따라서벽화를 그리고 조각을 세우며 부조를 할 고정된 공간이 없습니다. 정주 환경의 공간이 사실적 표현을 요구한다면, 이동하는 삶은 장식을위해 도안화된 표현을 요구합니다. 유목민이 할 수 있는 사치는 옷의치장, 개인의 꾸미기, 그리고 장비와 마구 등의 장식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초원의 끝없는 들판에서는 야생의 동물들이 쫓고 쫓기며 생존을 위해 투쟁합니다. 유목민은 이런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야 하고 사냥감을 구하며 가축들을 돌봐야 합니다. 유목민은 생산 시스템이 열악하기 때문에, 부족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정주민들을 약탈하는 것이 중요한 생산 활동의 하나가 됩니다. 유목 집단 사이의전투도 생존 환경이 야수적인 만큼 야생 동물들처럼 격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 P137


동물 투쟁 의장으로 대표되는 스키타이 문양은 신기하게 파미르이동의 동방에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서시베리아, 남시베리아, 중알아지아와 몽골 초원, 그리고 중국의 북방에 동일한 재료와 동일한 문양이 나타나는데, 이 현상을 두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스키타이가초원 루트를 통해 흉노에게 이 양식을 전파한 것으로 봅니다.
한편, 스키타이 의장의 기원에 대한 전혀 새로운 연구가 있습니다.
보로브카(Borovka) 등의 학자들은 알타이 산맥 북쪽의 미누신스크를 주목합니다. 이들은 초원 미술의 발상지를 미누신스크로 보고, 이곳에서 동서로 갈라져 유라시아 대륙의 남서 지역(러시아 남부 초원 등)에서는 아시리아와 페르시아의 양식이 스키타이에 영향을 주고, 남동쪽 중국 북방 초원 등)에서는 중국의 양식이 흉노에 수입되어서 초원 미술이 더 풍부해졌다는 것입니다.
스키타이 문양의 가장 원시적인 조형이 미누신스크에서 출토된 이래, 이 가설을 입증해 주는 유물들의 분포가 속속 드러나자 기존의 학설은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학설에 따르면 스키타이와 흉노는 같은 종족이 됩니다. 스키타이를 이란계 유목민, 흉노를 몽골로이드 유목민으로 보는 기존의 학설과는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스키타이와 우리 나라의 관계 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밀접합니다. - P139

한반도 동남부(고신라)에 중국이나 일본 등 동아시아의 어느 지역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풍부한 스키타이 계통의 유산이 현존합니다. 고대 유라시아 유목 민족에 대한 연구가 한국 고대사에서 반드시 필요함을 보여 주는 사안입니다.
- P140

이란의 역대 왕조
BC 550~BC 330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BC 247~AD 226 파르티아
AD 220~ AD 651 사산조 페르시아
AD 651이후~ 이슬람의 시대

파르티아는 멸망한 페르시아의 뒤를 이어 이란인이 세운 제국이며,
실크로드의 중심 교역국으로서 대단한 활약을 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와 중국 사이에서 비단 교역을 중개하며 큰 이익을 남겼습니다. 장건이 착공한 실크로드는 파르티아를 통해 로마로 연결됐습니다.
기원전 129년 장건이 월지를 방문했을 때 월지는 대하를 박트리아로 쫓아냈습니다. (당시 파르티아는 박트리아의 그리스 왕국을 점령하고있었는데) 쫓겨난 대하가 파르티아를 쳐서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월지는 겨우 자리잡은 대하를 또다시 공략하고 더욱 남하하여 간다라를 중심으로 쿠샨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이 쿠샨 왕국에서 불상이 탄생했으며, 간다라 불교 미술도 실크로드를 따라 유라시아 대륙에 전파됐습니다.
이처럼 실크로드는 전쟁의 산물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중앙 유라시아 지역만 국한해 보아도 유목 세력인 사카족(월지 · 대하)이 정주 세력(박트리아그리스 · 파르티아 · 인도)과 상쟁하면서 힘의 각축을 벌였던 것입니다.
- P154

실크로드 하면 비단 무역을 중계하는 푸른 눈의 카라반이 떠오릅니다. 당나라 장안에서 만나는 이들은 대부분 소그드 상인이었습니다. 고대의 실크로드 무역은 소그드 상인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그드(sugd)란 ‘불로 정화된‘ 혹은 ‘청정한 ‘이란 의미입니다. 동부 이란의 방언인 소그드어를 사용한 그들은 아무다리아와 시르다리아 사이의 땅에서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소그드인이 점재해 사는 이 땅을 소그디아나라고 합니다.
그들의 생김새는 우리 속담에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난다"
는 말이 있듯이 그런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강인하고 빈틈없는 모습입니다.
- P155

약소 민족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찬란한 족적을 유라시아 대륙에 남긴 소그드 상인도 8세기 중반 몰아닥친 이슬람이란 거대한 파도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후로 우리는 그들을 역사 안에서만 만나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그드의 역사를 개괄하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한 속주(州)였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당했으며, 대월지 쿠샨 왕조의지를 받았고 다시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역에 들어갔으며, 에프탈에 이어 투르크의 우산 아래 놓였다가 당의 기미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이슬람 속으로 녹아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실크로드의 메신저라 할 수 있는 소그드 상인들의 명멸을 보면서 역사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동서 교역을 강조하는 실크로드관에서보면, 이들이야말로 중요한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소그드에 대한 연구는 미미하며 이들에 대한 지식도 거의 피상적인 수준을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낙타 등에 동서의 문물을 싣고는 목숨을 걸고 유라시아 대륙을 종횡하는 소그드인의 모습은 실크로드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실크로드의 화면은 이 장면 없이는 구성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의활약은, 마치 초(超)대기업의 국제 영업사원처럼 로마와 중국을 잇는정상의 무역 노선 실크로드를 빛내기 위해 존재한 국제 상인들로만보이게 합니다.
이들은 어쩌면 오늘날 그러한 그림을 생산하는 전문가들에게도 이용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살아남기 위해 유목민과 공생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소그드인은 오히려 이 구조를 통해 세계에 실로 위대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 P1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