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오로지 하얗고 막막한 광목필을 밟으며, 방문에서 마당까지가 이렇게 먼 길인가 하였을 뿐이었다.
그 막막함이 마음을 짓누른다. 짓눌리는 것은 마음만이 아니었다.
몇몇 겹으로 싸고 감으며 갑옷처럼 입고 앉은 옷의 압박과 무게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조차도 쉽지 않은 것이다.
그네는 다리속곳, 속속곳, 단속곳, 고쟁이를 입고, 그 위에 또 너른바지를 입었는데, 너른바지 위에 대슘치마를 입었다.
대슘치마는 모시 속치마였다.
모시 열두 폭에 주름을 잡아 만든 이 속치마의 단에는 창호지 받친흰 비단이 손바닥만한 넓이만큼 대어져 있어, 그러지 않아도 풀을 먹여 날이 선 모시 바탕에 힘을 받쳐 주는 것이었다.
수모인 당숙모는 효원의 가슴을 동여매듯이 치마 말기를 힘 주어묶었다. 무명 말기가 나무 판자처럼 가슴을 압박했다.
그 대슘치마 위에, 드디어, 속옷으로는 마지막인 무지기를 입었다.
무지기는 빳빳하게 풀을 먹인 모시 열두 폭을 층층이 폭을 넓혀가며한 허리에 달아 붙인 것이라, 예닐곱 가지나 포개 입은 속옷 위에 더욱더 부하게 부풀어 보였다. 길이가 짧아서 발등까지 내려오지 않는 까닭에 ‘발 없는 치마‘ 무족(無足)치마라고도 하는 이 무지기는 치마허리에서 무릎까지 닿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삼층짜리도 있고 오층짜리도 있는데 신부옷이라 효원은 호사스럽게 일곱층짜리를 입는다.
‘무족‘이 치마라서 무지기인가, 무지개같이 물들어서 무지기인가.
층층마다 엷은 일곱 색의 물감을 들여 은은한 그 빛깔은 이름 그대로 마치 무지개처럼 고와서 보는 사람을 취하게 하였다.
- P37

그래서 어느 날은 참지 못하고 대문까지 내려왔다가, 작은집의 검은 살구나무 둥치에 마음이 부딪치면서 덜컥, 자물쇠통 잠기는 소리가 나 더는 못 가고 그대로 돌아서곤 하였다.
- P66

혼례를 올린 후 인재행(引再行)을 마치고 삼 일 만에 신랑과 함께 신부가 시댁으로 신행을 오는 집안도 더러 있기는 하였지만, 반가(班家)의 법도로는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삼일신행(三日新行)은 상민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양반 가문의 신부는 신랑을 홀로 보낸 후 친정에 남아 있다가, 다시 좋은 날을 받아 우귀(于歸)를 하는 것이다. 시댁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그날까지 보통은 일 년이 걸리기도하고, 길면 삼 년도 걸린다. 물론 양가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는 몇달 만에 신행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웬만한 경우에는 일 년 정도는 묵히는 것이 상례였다.
사람들은 그런 풍습을 ‘묵신행‘이라 불렀다. - P69

"혼행길은, 무사하.….… 셨어요?"
그 더듬거리는 말의 끄트머리 때문에, 강모는 순간 아찔하였다.
무사하....… 셨어요?
..... 셨어요....?
마음이 서늘하게 식으며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렇게 강실이가 멀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강모의 탓이 아니라, 그네가 그만큼 멀찍이 비켜서 버린 탓이었을까.
강모의 혼인으로 인하여 강실이의 말투가 바뀐 것이다. 그것은 그를 어른으로 대접하는 당연한 절차였건만, 얼마나 어색한 일이었던가. 무거운 덩어리 하나를 삼킨 것 같았었다.
- P71

그러나 시부는 명색이 초례청에서 신부와 마주 서 있다가, 느닷없이 머리에 쓰고 있던 사모의 오른쪽 뿔을 쑥 잡아 뽑아 버렸다.
"아니, 저런…."
사람들은 깜짝 놀라 실색을 했다.
혼례 때 신랑이 사모의 뿔을 뽑으면, 신부는 그만 소실(室)로 격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삼취는 번듯한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것이 관례인데, 뭇사람이 둘러서 지켜보는 자리에서 그처럼 부러지게 표를 내고 마니. 내리뜬 눈으로 그 거동을 훔쳐본 신부의 낯색이 창백하게 질렸다가 벌겋게 달아올라, 나중에는 흙빛이 되었다.
사람이 음양간에 한 번 만나 작배하면, 전생의 인연이 지중하니 백년을 같이 누려 해로하고, 슬하에 올바른 자식을 많이 두어 후생(後生)을 기약하는 것이 복록이겠지만, 그리하지 못하고 상처(喪妻)를 하는경우 재취를 맞이하게 되면, 두번째 아내인 이 부인은 물론 적처(妻)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재취마저 죽어서 다시 혼인해야 할 때, 세번째 맞이하는 삼취의 여인은 가문이나 지체와 상관없이 무조건 소실로취급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니 자연 삼취 소생은 엄연한 부모 밑에 태어났어도 서자가 될수밖에 없었으며, 삼취 부인은 죽어 제사를 지낼 때, 위패도 없이, 제상조차 한 단 낮게 차려 차등을 두었다.
본처가 있는데 첩으로 들어앉는 것도 아니며, 뒷골방에 냉수 한 그릇 떠 놓고 도둑장가를 드는 것도 아니요, 버젓이 육례(六體)를 갖추어혼인하는 사이건만, 그 어인 까닭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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