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레---오페라도 보러 가셨나요?
뒤라스-----오페라는 내겐 진력나는 부르주아들의 사교 행사였어요.
막이 오르자마자 질려버렸죠. 지나친 스펙터클 장치로 인해 시각은 포화 상태에 음악적 효과는 빈약해졌죠. 음악은, 진정한 음악은 절대 다른 무엇의 배경이 될 수 없거든요. 음악만으로 우리를 전부 채워야 또는 전부 비워야 하죠.
- P36

"인간의 의식을 단순화하려는 그 모든 시도가그 자체로 파시스트적이었죠. 그런 의미에서는스탈린주의나 나치즘이나 다를 바 없어요."
- P39

토레--저널리즘은 어떤 기능을 해야 할까요?
뒤라스--언론이 없다면 모르는 채로 지나칠 사건들에 대해 여론을 조성해야겠죠.
직업인의 객관성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어요. 난 그보다는 명확한 ‘입장 표명‘이 더 낫다는 쪽이에요. 일종의 도덕적 스탠스라고 할까요. 작가도 자신의 책들을 통해 완벽하게 드러낼 수 있죠.
토레--선생님은 각종 사건, 사고 들에 늘 깊은 관심을 보이셨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데요. 종종 텔레비전이나 일간지들을 통해 입장을 밝혀서 여론의 혹독한 질타를 받기도하셨어요.
뒤라스--생각한 걸 이야기하고, 사회적 부당함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묵과를 고발하기 위한 시도예요. 알제리전쟁이라든가 전체주의 체제의 부상, 지구촌의 군국주의화, 사회의 도덕성 강요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기를 촉구하고 싶은거죠. 난 늘 그런 시도를 해왔어요.
내게 가장 흥미로운 건, 그 모든 것이 개개인에게 미치는영향이에요. 개인에게 내재된 광기나 동기 없는 충동적 행위, 치정이나 분노로 인한 범죄 같은 거요. 아니면 그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사건들처럼 사법 시스템에 의해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인간의 다양한 면모에 관심이 집중되기도 하고요. - P51

토레--인류의 미래와 진보에 대해선 어떤 그림을 그리시는지요?
뒤라스--자동화, 원거리통신, 정보화 등이 인간의 수고를 덜어준 끝에 결국 창의력을 둔화시킬 거예요. 기억을 잃은 납작하고 밋밋한 인류가 될 위험이 있죠.
하지만 인류의 문제점에 대해선 아무리 떠들어대봤자 소용없어요. 우리는 하루하루,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이어가고 있으니까요. 해결할 수 없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하면서, 아니면 늘 그렇듯 신의 문제에 직면하면서.
- P55

토레--인류의 행복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사람들의 불안감은 스스로 자기 인생의 심판이 아니며 원하던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했다는비극의 자각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뒤라스--그 말, 그 행복이란 말은 절대 내뱉어선 안 돼요. 우리가 단어에 부여한 의미 자체로 예외적인 것으로 들릴 수 있고, 사정거리 바깥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니까요. 닿을 수없고, 대단히 신비롭게 말이에요.
- P56

뒤라스--
사람들은 흔히 삶이 사건별로 연대순으로 식별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실은 사건들의 사정거리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알지 못해요. 우리의 잃어버린 감각을 되살리는건 기억이죠.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경험한 것들의 표면, 외피에 불과해요. 나머지는 되살려낼 수 없을 만큼 우리 안에 어둡고 깊숙하게 도사리고 있조.. 기억이 강렬할수록, 통째로 드러내기가 어려워져요..
난 전통적인 의미의 기억 되살리기는 관심 없어요.우린 구미대로 자료를 파내는 보관소가 아니니까요. 더구나 기억을 잊는 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만일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의 80퍼센트가 기억 저편으로 물러나 있지 않는다.
면, 사는 게 참을 수 없어질 거예요. 망각과 구멍이야말로 진정한 기억이죠. 우리를 회상과 맹목적인 고통의 압박에서 구해주는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잊어요.
- P87

뒤라스--글쓰기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 아니에요. 그보다는 이야기를 둘러싼 것들을 환기시켜, 이야기를 중심으로 순간을 창조하고, 이어서 또 다른 순간을 계속해서 창조하는 작업이에요. 거기엔 모든 것이 있고,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으며, 두 경우가 교환 가능할 수도 있죠.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처럼 말이에요.
토레--그걸 선생님의 반복적이고 돌발적인 조건법 시제 사용에 대한 설명으로 보아도 될까요?
뒤라스--조건법은 영화만큼이나 문학의 바탕이 되는 작위적인 아이디어를, 다른 어떤 시제보다도 그럴듯하게 만들어줘요.
모든 사건이 다른 무엇의 잠재적이고 있을 법한 결과로 보이게 되죠. 그래서 아이들이 허구의 결말을 의식하는 동시에 가벼운 게임을 즐기는 기분으로, 끊임없이 조건법 동사를 변형하며 노는 거예요. - P88

"인간 존재는 그저 단절된 충동들의한 묶음일 뿐이에요.
문학은 그 상태 그대로를 복원해야 하죠."
- P120

 욕망은 잠재적인 활동이고, 그래서 글쓰기와 흡사해요. 우리는 늘 글을 쓰듯 욕망하죠.
실제로 난 글을 쓰는 순간보다. 글을 쓰려고 자세를잡는 순간에 더 글쓰기에 사로잡힌 기분을 느끼거든요. 욕망과 쾌락 사이의 차이점은, 글쓰기가 시작될 때의 카오스와 종이 위에서 가벼워지고 환해지는 카오스의 결과물 사이의 차이점과 똑같아요.
카오스는 욕망 속에 있죠. 쾌락은 우리가 이룬 것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에요. 나머지는, 우리가 욕망한 것의 대부분은 그대로 남아요. 영원히 잃어버린 채로.
- P174

"우리는 늘 우리 본연의 모습인 단일성에 도달하기 위해 기를 쓰지만,
우리의 풍요로움은 바로 그 범람에 있는 거예요."
- P183

토레--혼자라고 느끼시나요?
뒤라스--모든 사람들처럼요. 우리 모두가 두려워서 끝까지 감추려고 애쓰는 그 궁극의 고독을 느끼죠. 하지만 하루도 혼자만의 시간이 없다면, 그런 환경이라면, 숨쉬기도 힘들 것 같아요. - P186

토레--페미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뒤라스--나는 진정한 여성해방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다소 근시안적인 모든 형태의 투쟁을 경계해요. 거기엔 이데올로기 자체보다 더 제도화된 반이데올로기가 존재하거든요. 의식이 있고 정보가 있는 여성은 그 자체로 당연히 정치적인 여성이에요.. 자신의 육체를 대표적인 순교지로 만들면서, 게토 속에 틀어박히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말이에요.
토레--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침묵은, 침묵의 실행과 이해는,
여성다움의 척도가 될 수 있을까요?
뒤라스--여성은 모호함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는 대신, 자신의 말속에 담긴 침묵까지도 통째로 번역하고, 포용해요. 반면에 남성은 침묵의 힘을 조금도 못 견딘다는 듯이, 말해야만할 필요성을 느끼죠..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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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스페인 극문학은 시와 소설의 혁신적 분위기에 크게 영향을 받아 세찬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즉 다양한 형태의 극문학 가운데서 새로운 개념이 나타나는데, 도피와 거짓된 이상화를 지양하고 사실주의적 성격을 지향하고자 하는 특징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희곡을 대표하는 극작가가 바로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로서, 그는 주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믿음의 바닥에 깔린 불안감을 작품으로 형상화한다.
- P181

그의 작품은 여러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부에로 바예호의 가장 큰 관심은 인간과 그들의 비극적 삶이다. 작가에게 비극은 인간 본질을 알아내는 방법의 하나이고, 그는 이를 위해 모든 관심을 쏟아 붓는다. 이는 스페인 문학에 한 획을 그은 98세대 작가 우나무노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비극적 삶이란 원조적으로 한계를 지닌 인간이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며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부에로 바예호는 작품들을 통해 자아 실현, 자유에 대한 열망, 사랑, 그리고 내면의 갈등 등을 보여줌으로써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하고자 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결속된 존재이며,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와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의 모든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둘째, 부에로 바예호는 주로 상징을 통해 독자와 관객들에게 본인의 의도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가 가장 즐겨 쓰는 상징들은 신체 장애인과 빛과 어둠의 대립이다. 신체 장애인들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빛은 희망과 진실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행동을, 어둠은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이를 무시하고 발전 없는 편안한 삶에 안주하려는 자들을 상징한다. 그의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거나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데 실패하지만, 다른 주위 사람들에게 그들의 끔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희망을 준다.
......
셋째 그는 작품의 결론을 확실하게 내리지 않는다. 독자와 관객에게 결론을 맡김으로써 그들이 다시 한번 상황을 짚어보고 생각하게 하여 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도록 한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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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생이 깜깜한 밤중을 헤맬 것 아니냐. 저 하나만 그러고 마는것이 아니라 대대손손 엄하고 혹독하게 서러운 굴레를 써야 하니,
불행히도 그런 사람을 선조로 둔 후손은 누구를 원망할 것이냐. 상고(上古)에서는, 살인한 죄인을 참수하고 그 처자를 몰수해서 노비로 삼었다는데, 백제에서는, 간음한 여자를 노비로 만드는 형법이있었다더라."
그러니 죄(罪)의 씨가 종인가.
이렇게 죄를 지어 그 벌로 한번 노비가 되면 그는 종의 조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신분을 물려받은 신분 노예가 생기고, 또 다른 곳에서는 지은 빚 때문에 몸이 잡힌 부채(負債) 노예가 생겨났으며, 나라가 멸망하면서 끌려간 포로들이 노예의 멍에를 쓰기도 하였다.
또한 역모를 꾀한 자의 집안 가솔들도 공천(公賤) ·사천(私賤) 노비로 곳곳에 박히었다. 심지어 몹시 곤궁한 집에서는 제 가족을 노비로 팔기도 하였으며, 일반 양인(良人)의 붙이라 할지라도 어쩌다가족을 잃고 저 혼자 떨어져 궁글어 다니다가, 할 수 없이 누구네 종으로 주저앉는 경우도 있었다.
그 연유 곡절이야 어떤 것이든, 한번 사내종 노(奴)와 계집종 비(婢)가 되어 신분에 낙인이 찍히면 그들은 그날로 저의 주인 상전의 마소(馬牛)나 전답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리고 세습되었다.
백 년, 이백 년이 아니고, 천 년, 이천 년만이 아닌 기나긴 세월을두고, ...... - P18

역사도 마찬가지야.
이미 지나간 시대, 죽은 자들의 넋두리라고 휴지처럼 구겨서 쓸어내 버리면 시간의 배설물, 한 더미 두엄만도 못한 것이 역사고,
그것이 몇천 년 혹은 몇백 년 전의 이야기일지라도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근본이요, 과정이라고 믿는다면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역사지.
그러나, 역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이야.
오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오늘의 ‘나‘다.
강태는 진진하게 말을 하다가 주먹 쥔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펴자기 가슴팍을 쿡쿡 찌르며 가리켰다.
"오늘은 역사가 될 현실이거든."
기차는 공중에 떠 강바닥을 드러낸 한내의 다리 위, 철교를 지난다.
나는 이상해. 왜 오늘이라는 현실, 현실이라는 오늘은 늘 그렇게 몽상적일까. 삶이 실감나지 않아요. 내 몸이 구체적으로 그 어떤 사건을 겪고 있을 때에도, 그것은 꼭 감각 없는 껍데기가 저 혼자 몽유하는 것 같고, 그 몽유 혼몽의 무감각 안쪽에 오히려 눈뜬 내가 또 하나 냉소로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으니, 그 두 사람이 서로 일치해 본 일이 나는 없어요.
유체(體)와 신체(身體) 사이.
그 중간에 나는 떠 있습니다.
"막막해요."
"무엇이 …?"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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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적 탐정소설 <마인>의 독자 소통 방식

추리소설의 근대성

한국의 추리소설은 조선시대 송사소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최초의 근대적 추리소설은 ‘명탐소설‘이라고 명명하였던 이해조의 <쌍옥적> (< 제국신문>, 1908, 12. 4~1909. 2. 12)이다. 이 소설은 살인 사건이 거듭 발생하자 탐정이 등장하여 사건의 진상을 추리력과 논리로 풀어내고 있지만, 범인 탐색보다 살해자의 고통 묘사에 주력함으로써추론의 논리성이 미약하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이후1918년 < 태서문예신보>에 아서 코넌 도일(Arthur ConanDoyle, 1859~1930)의 < 얼룩끈> 이 번안되면서, 논리적추론이 강화된 서구의 추리소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다. 이런 경향에 힘입어 1925년 방정환의 <동생을 찾으러>, 1931년 최독견의 <사형수>, 1934년 최유범의<약혼녀의 악마성 > 과 채만식의 《 염마》 등 치밀한 논리적 추론과 서사구조를 지닌 추리소설이 발표된다. 그러나추리를 결말까지 끈질기게 이어가지 못하고, 범인을 추적체포하는 과정의 반전이 그다지 신통치 못하다는 한계를 보인다.
이에 비해 김내성은 1935년 탐정소설가로 당당하게 문단에 등장하여 추리소설을 발표한다는 점에서 아주 이채롭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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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은 1930년대 후반 신세대 작가의 한 명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밀도 있는 문장과 치밀한 묘사로 식민지 현실 문제를 예리하고 세련된 형식으로 포착한 그는 현실에 대한 사실적 형상화와 고도의 예술성 모두를 성취한 신예 소설가로,
평가받았다. 현덕은 해방 이전까지 8편의 소설과 440여 편의동화, 그리고 10여 편의 소년소설을 발표했다. 최근 현덕의 동화와 소년소설이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지만, 공동제의 해체와 모럴의 상실을 통해서 타락하고 병든 현실에 주목한그의 소설들 또한 1930년대 후반 한국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수작들이다. 현덕의 소설은 주로 유년의 가난 체험을 근간으로 하여 궁핍한 식민지 현실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그 속에서 훼손 일로로 치닫는 불구적이고 속악한 세계의 현실을 어린아이의 시선을 통해 비판적으로 조망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현덕이 해방 이전에 발표한 소설들( <남생이>, <경칩>, <층>, <두꺼비가 먹은 돈>, <갓을 까는 집><독성좌)에는 동일하게 어린아이가 등장한다. 현덕 소설에 어린이가 등장하고, 그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것은 그의 소설이 지닌 주요한 특질 가운데 하나다.  - P11

그리고 아동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은 <녹성좌 > 를 제외하고는 모두 도시가 아닌 농촌이나 해안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남생이>, < 경칩>, < 두꺼비가 먹은 돈> 에는 동일하게 ‘노마‘라는 소년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서사의 내용과 작품의 발표 순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이다. 가령 <두꺼비가 먹은 돈> 에서 노마는 아주 어린 아이로 그려지고 있다. 이 소설에서 노마의 아버지는 기동 아저씨와 양철집 학원을 짓고, 그 학원에서 서울로 붙들려 간 것으로 묘사된다.
마름 김오장이 노마 아버지가 지은 양철집 학원을 소유하고싶어서 온갖 트집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노마의 집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을 정도로 그려지고 있다. 한편 < 경칩>은 소작권을 둘러싼 부조리한 농촌 현실과 인간성 상실의 속악한 현실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이 소설에서 노마 아버지는 병들어 소작권을 잃은 농민으로 등장한다. < 경칩>은 생존의 본능 앞에서 도덕이나 의리보다 동물의 논리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는 지극히 비관적인 전망을 담고 있다. 노마 아버지가 병마에 노동력을 빼앗기고, 이어서 아내마저 잃게 되는절망적 한계 상황에서 적극적인 자기 각성이 없었다는 서사적 암시는 비관적인 전망에 덧붙여 경제적인 몰락과 빈곤의폭력이 인간성마저 위태롭게 만든다는 부정적 인식을 보여준다. 일제 후반기의 소설사에서 현덕의 존재가 빛을 발하는 것은 식민지적 · 자본주의적 현실이 공동체적 인간관계의 해체와 윤리 의식의 파탄을 연루되는 과정을 가장 극적으로 형상화했다는 데서 기인한다. - P12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남생이 > 에 이르면 더욱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 소설에서 노마네 집은 가난에 허덕이고, 노마의 어머니는 정부(情夫)를 얻으며, 남편에게는 빨리 죽으라고 윽박지른다.
< 경칩 > 에서 병을 앓던 노마 아버지는 <남생이 에 이르르러 소금을 나르는 일을 하다가 골병이 들어 죽고, 경칩에서 남편을 위해 치성을 드리던 노마 어머니는 ‘항구의 들병이‘가 되어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린다. 이처럼 ‘노마‘라는 어린아이가 등장하는 세 편의 소설( < 남생이>, <경칩>,
<두꺼비가 먹은 돈> )은 서사적 연속성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연속성은 공간적인 배경에서도 확인된다. 가령 <두꺼비가 먹은 돈>과 < 경칩>의 공간적 배경이 농촌인 반면, < 남생이>는 도시 근처의 빈민굴이 배경이다. 이는 일제 후반기 조선 민중의 몰락 과정, 즉 자작농이었던 농민이 소작농으로, 다시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하는 과정의 형상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잣을 까는 집>과 <층> 역시 어린아이가 등장하는소설들이다. < 짓을 까는 집 > 에서 옥이 아버지는 채석장에서 일을 하다가 실직을 한 상태이고, 가족의 생계는 옥이 어머니가 잣을 까는 일로 해결하고 있다. 옥이 아버지와 함께일을 하던 삼봉 아버지는 그나마 실직을 하지 않고 계속 채석장에 다니는데, 그때부터 그는 옥이 아버지와의 만남을 피하게 된다. - P13

<경칩>과 < 남생이 > 가 경제적인 궁핍에 연루된 모럴의 해체를 형상화했다면, <잣을 까는 집>은 경제적인 환경의 변화가 우정의 파괴를 불러오는 현실을 보여준다. 특히 생존과 우정의 상관성이라는 문제 설정은 <경칩 > 에서 노마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그의 땅을 빼앗으려고 덤비는 흥서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육체적인 불구 상태의 거지 아이가 부잣집 도령을 짝사랑하는 이야기인 <층> 역시 여러 가지 면에서 < 남생이 > 와 유사하다. 우선 공간적인 배경이 그러하며, 다음으로 인물들이 도시의 빈민굴에 흘러들어 온 이유가 동일하다. 이들 작품에서 농촌은 땅을 잃어버린 이들이 살 수 없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이처럼 어린아이가 등장하는 현덕의 소설들은 모두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고, 인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의 변두리와 빈민촌으로 이주하는 몰락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소설적 인식이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조망에서 비롯된 것인지,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균열되기 시작한 농촌 사회의 문제에서시작된 것인지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소설이 1930년대후반의 식민지 현실을 가장 사실적이고 적나라하게 그려냈다는 것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현덕의 소설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어린아이‘ 라는 존재다. 일반적으로 소설에서 어린아이의시선이 등장하는 경우 해당 텍스트의 현실 인식은 일정한 한계를 띠게 마련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 P14

그것은 아이의 순진한 시선이 때로 속악한 어른들의 세계를 사실적으로 폭로하는 순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복잡다단한 현실을 지나치게 인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덕의 소설에서 아이의 시선은 어른들의 세계가 얼마나 몰가치적인 세계이며 타락한 세계인가를 비판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쓰이기도 한다. 알다시피, 병약한 아버지 또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모티프의 반복은 현덕 소설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아버지의 자리가 늘 비어 있거나 생활 능력을 상실한 초라한 아버지의 형상은 현덕 문학의 뿌리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을 듯하다. 현덕의 소설에서 아버지들은 몸과 마음 모두가 병들어 있는 존재들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버지는 더 이상 가장으로서의 위엄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아이들과 동등하거나, 심지어는 아이들이 돌봐줘야 하는 병약하고 불쌍한 인물로 그려지기 일쓰다. 당연히 아이들은 그런 아버지의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며, 바로 이 위계의 전도가 아이들에게 혼란의경험을 가져다준다. 단적으로 < 경칩 >과 < 남생이 > 가 바로 그렇다. 소설 < 남생이 > 에서 어린 노마는 한 방에 앉아있는 두 남자를 본다. 한 사람은 노마의 아버지이고, 다른 한사람은 어머니의 정부(情夫)인 털보다. 전자가 생물학적인 아버지라면, 후자는 가정 경제를 책임진 사회적 아버지다.
<두꺼비가 먹은 돈>에 등장하는 "한쪽 귀가 떨어져 찌그러진 지도는 상징적인 권위를 모두 상실한 아버지의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 P15

 현덕의 소설에서 아버지의 부재와 무능력은 한 가족을 빈곤이라는 경제적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결정적인 원인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는 아버지들의 무능력이 자본주의 경제 구조 안에서 역할을 상실한 데서 연유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들의 무능력은 도덕적인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경제적인 것인데, 이는 곧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이 식민지 민중들의 삶을 옥죄는 원인이 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하여, < 잣을 까는 집>에서 남편은 돈을 벌지 못한다는 이유로 아내에게 구박을 받는다. 이러한 아버지들의 경제적 무능력을 통해서 현덕은 경제적인 능력의 파산이 결국 모든 가치의 타락과 파멸을 불러오는 원인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현덕의 소설에 등장하는병든 아버지들이 실상은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자들이며, 근대 자본주의 안에서 더 이상 가치를 획득하지 못한, 소멸되어 가는 상징적인 질서의 체현자임을 깨달을 수 있다. 현덕의 소설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가부장적 권위가 아니라 동정적이고 인간적인 관계로 그려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덕의 소설에서 아버지의 죽음과 기존 질서의 붕괴는교묘하게 연동되어 있다. 이것은 < 남생이 > 에서 노마 아버지가 남생이라는 전근대적인 미신에 심취해 삶의 마지막 열정을 태우는 장면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한편 도시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현덕의 소설들에는 대부분 어린아이가 등장하지 않는다.  - P16

이들 소설에서 아이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은 타락한 어른들과 무기력한 지식인이다. < 골목>은 왜소해진 지식인의 형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 기운데 하나다. 이 소설에서 김씨는 전문학교를 다녔지만 현재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실업자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그런 김씨를 더 왜소하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그의 아내다. 허영심이 강한 김씨의 아내는 이웃들에게 자신의 남편이 회사원이라고 떠들고 다니는데, 이는 그녀가 타자의 시선에 사로잡혀 있음을 뜻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인물들은 타인의 시선에 포착된 자신의 모습에 늘 신경을 쓰며,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속이기까지 한다.
김씨의 아내가 신식 여성인 것처럼 꾸미는 장면이 바로 그렇다.
그래서 더욱 그들 부처의 존재는 이웃 여인들 눈에 설고,
그리고 여자는 더욱 남의 눈에 자기 존재를 똑똑이 할려는 것처럼 날마다 하는 몸치장이 곧 나드리를 나갈 사람같다. 몇 번이고 경대 앞에 앉어 얼굴을 두들긴다. 머리를 다듬는다. 방 안에서도 긴 목다리 양말을 신고 사나이처럼 다리를 모고 앉는다. 말하면 근처 무식하고 가난한 여인과 자기를 구별하여 신교육을 받은 바 아는 사람이라는 번분을 분명이 하려는 듯싶다.
-----<골목> 중에서
- P17

김씨의 아내는 교양이 없고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땅장사로 큰돈을 번 사내의 첩으로 들어온 푸른 대문집 여자를 무시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경제적인 힘앞에서 번번이 왜소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릴 때마다 그녀는 남편에게 순사 시험을 볼 것을 강제하는데, 그것은 ‘순사‘라는 직책이 그녀의 허영심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허영심이 가득한 김씨의 아내는 타인의 시선에 자신이 "학교 공부생" 으로 보여지기를 원하며,
타인의 시선이 자신을 그렇게 볼 때마다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녀는 심지어 남편이 많은 월급을 받는 회사원이라고 이웃에게 거짓말을 한 후 남편으로 하여금 남들이출근하는 시간에 집을 나갔다가 퇴근하는 시간에 돌아올 것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런 연극적인 삶이야말로 현덕이 바라본 도시적 · 자본주의적인 삶의 일면이다. 온갖 시선이 교차되고, 더불어 자본주의적인 물신 욕망이 지배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보다는 타자의 욕망에, 자신의 시선보다는 타인의 시선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며 살아가는 곳이바로 도시인 것이다. 현덕의 소설에서 이 타인의 시선과 욕망은 인물들을 식민화한다. 현덕의 소설에서 이런 상호 식민화 과정에는 탈출구가 없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현덕의 소설들은 암울하고 절망적인 느낌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공간적 배경이 도시로 설정될 때 이러한 느낌은 한층증폭되는 듯하다. 소설 < 남생이 > 에서 아버지의 죽음과 노마의 성장이 교묘하게 교차되고 있는 것처럼, 현덕의 소설에 등장하는 아이들에게는 일말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 P18

그러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들에서는 이런 일말의 긍정성도 찾기 어려운데, 바로 그런 이유로 도시를 배경으로 한 현덕의 소설에는 아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농촌과 달리, 생존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도시 공간에서 ‘아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인식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동대문 밖의 빈민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군맹 > 에서 이 암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는 다분히 병적인 방식으로 표출된다. 이 소설은 마을 사람 전체의 생존권이 걸린 철거 문제를 철저하게 자신의 욕망에 맞춰 실행하려는 만성과 마을사람들의 갈등, 그리고 만수의 연인인 점숙이를 놓고 형 만성과 동생 만수가 벌이는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결국 소설은 마을 사람들 편에 섰던 최 의사가 만성이 제시한 유혹에 넘어가 마을 사람들을 배신하고, 만성이 술집에 팔아넘기려던 점숙이 만수와 도망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극도의 무기력감에 빠져 살아가는 동생 만수는 불특정 다수에게 폭행을 당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이는 암울하고 절망적으로 인식되는 현실에서 돌파구를 발견하지 못한 개인이 자신의 신체를혹사함으로써 살아 있음을 확인하려는 병적인 심리 상태다.
바로 이런 심리 상태 때문에 도시를 배경으로 한 현덕의 소설에는 아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두꺼비가 먹은 돈>에서 노마는 백동전 한 닢을 찾아 헤맨다.  - P19

표면적으로 이 이야기는 노마가 어제 얻은 동전을 잃어버렸음을 깨닫고 동전을 찾으러 다닌다는 사소한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이이야기는 ‘동전‘으로 상징되는 아버지를 찾아다니는 노마의 성장담으로 읽을 수도 있다. 소설의 곳곳에서 드러나는 아버지의 흔적이나 노마가 찾고 있는 동전이 실은 어머니가 서울로 아버지를 보러 가는 데 쓰일 소중한 돈이라는 진술이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처럼 현덕의 소설에서 ‘아이‘라는 존재는 아버지의 부재라는 현실에서도 포기하지 않고아버지를 찾으려는 노력을 보여주는데, 도시에서의 절망적인 삶은 바로 이 가능성마저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처럼 인식된다. 이 불가능성이야말로 1930년대 후반에 등장한 현덕이 소설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보여주는 증거의 하나다.
현실에 대한 사실적 형상화와 고도의 예술성이란 결국 이 불가능성을 인식하는 그의 문학적 역량을 일컫는 말에 다름 아니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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