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권위주의 2.0》

왕후닝과 함께 중국 신권위주의를 대표하는 학자인 샤오궁친 상하이사범대 교수는 덩샤오핑의 중국을 신권위주의1.0, 시진핑의 중국을 신권위주의 2.0의 시대로 구분한다. 샤오 교수는 2018년 11월 텐저연구소가 개최한 ‘개혁개방 40주년 토론회‘에서 덩샤오핑이 구축한 중국식 신권위주의 1.0은 공산당의 강권통치를 기초로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려는 것이었지만, 공산당의 통치 지위에 도전하지만 않는다면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모든 체제를 수용할 수 있다는 다원성을 내포한 유연한 신권위주의였다고 평가한다. 장쩌민·후진타오 시기까지는 이 모델에 기초해 경제 체제 전환과 성장의 성과를 거뒀지만, 심각한 부작용도 누적되었다. 권력과 자본이 결탁하면서 부패와 빈부격차, 이익집단끼리의 경쟁과 충돌이 극심해졌다. 이를 해결할 방법을 놓고 문화대혁명의 구호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극단좌파와 서구식 민주혁명을 외치는 극단우파가 거리에서 충돌할 수도 있는 정치적 위험에대한 심각한 인식이 시진핑 시대 신권위주의 2.0의 출현 배경이라는게 샤오궁친의 해석이다.
시진핑 시대 신권위주의 2.0은 강경 신권위주의라고 볼 수 있다. 공산당의 전통 조직과 이념을 강화해 지도자와 당의 중앙에권력을 고도로 집중시키고, (서구식 민주주의 이념 등) 보편가치, 삼권분립
같은 민감한 용어는 아예 거론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강화해 사회의 다원성을 억제하고 통치질서의 안정성을 강화함으로써 개혁에 대한 반발을 억누르고 개혁을 심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 P51

《양날의 칼, 애국주의》
왜 시진핑 시대 들어서 중국 외교는 이토록 공세적으로 변했을까.
중국 외교의 강경함은 국내 정치에서 나온다. 중국공산당 통치의 정당성은 마오쩌둥 시기에는 외세를 몰아내고 통일을 이루어서 건국한 것(站起來), 덩샤오핑-장쩌민-후진타오 시대에는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룬 것(起來)에서 나왔다. 하지만 시진핑 시대들어 초고속 성장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워졌고 화려한 성과 뒤에 가려진 빈부·도농·지역 간의 격차는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는 동시에 공산당 통치의 정통성을 흔들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강해짐(強起来)으로 새 정통성을 만들기로 했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으로 중국의 꿈(중국)을 이루겠다고 선포했다. 그에 따라시진핑 주석은 21세기의 황제로서 천하를 호령하고, 천하가 중국을 떠받드는 강력한 중화제국의 부활을 보여주려 한다. 그러려면 실력을 과시하지 않고 조용히 힘을 기르는 덩샤오핑 시대의 외교전략인 도광양회의 틀에서 벗어나 힘을 과시하며 할 일을 하는 분발유위의 행보로 강한 중국을 과시해야 한다. 한편에선 근대에 들어와 중화민족이 서구와 일본 등 외세의 침략으로 겪은 지난한 고통을 강조하면서 중국공산당이 100년에 걸쳐 중국을 구원했다는 애국주의 서사를 더욱 요란하게 선전한다. 시진핑 시대의
"구호인 ‘네 개의 자신‘은 인민들이 중국의 노선 · 정치 체제·지도 이념•문화에 자신감을 가질 것을 요구하며, 서구의 이념과 체제를 배격한다. - P60

《 ‘국가자본주의를 겨누다‘》
반도체와 통신장비의 기술 우위는 누가 미래 산업의 주도권과 군사적 패권을 쥐게 되느냐와 직결된다. 인공지능, 자율주행차를 비롯한 미래 산업, 금융, 무기 시스템도 모두 네트워크와 반도체 기술이 결정한다. ‘중국제조 2025‘는 중국 정부가 나서 이 분야를 적극 육성하려는 것이고, 미국은 이를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미국은중국의 성장 모델을 국가자본주의로 지목했다. 중국 정부가 국유기업들에 특혜를 주고 금융 시장을 통제하고, 중국 시장에 진출한해외 기업들에게 강제로 기술 이전을 요구하는 등의 불공정한 모델로 초고속 성장을 이루었다고 비난하면서 중국이 이런 모델 자체를 바꿔야만 한다고 요구했다.
미국의 전방위 공세로 중국 경제의 위기감이 고조되자 류허가 추진하던 개혁은 더는 진행될 수 없었다. 당과 국가가 경제 전반을 강하게 통제하면서 미국과의 전면적인 경제 기술 패권 전쟁에 대비하는 일종의 ‘전시 경제‘의 지휘관으로 류허의 역할도 수정되었다.
미중 갈등은 중국 개혁개방 이후 40년에 걸쳐 형성된 두 나라의 경제적 윈윈 관계의 구조 자체가 바뀐 결과다. 흥호펑 존스홉킨스대 정치경제학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1990년대 중국 정부가 국유기업 민영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 월가의 금융기업과 대자본가들이 큰 이익을 얻었고, 중국공산당돠 월가 사이에는 협력 관계가 형성되었다. 중굳은 미국의 주요 기업들에게 중국 시장을 열어주고 생산기지 건설에 특혜를 주면서 이들을 미국 내에서 중국의 이익을 대변해 줄 우군으로 만들었다. 이는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으로 이어졌고,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변신해 초고속 성장을 이어갔다. - P74

시진핑 지도부는 공산당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가장 심각한 기득권 세력이 금융 분야에 있고, 개혁의 최대 난제라고 본다.
하지만 이미 9년 차에 접어든 부패와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라이샤오민의 천문학적 뇌물수수가 보여주듯 부패의 깊은 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만연한 부패의 근본 원인은 공산당과 국유기업에 너무 큰 권력과 자원이 집중된 시스템 자체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감시할 시민사회의 역할은 오히려 더욱 억압되고, 부패와의 전쟁은 반대파에 대한 숙청으로 변질되었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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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쇠락하는 제국 미국을 대신해 중국이 언젠가는 대안적질서와 가치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품고, 오랫동안 중국을 취재해왔다. 시진핑 시대 중국이 점점 오만해지고 강압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며 곤혹스러웠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한-중 협력이 절실한 상황에서 중국에 대한 실망감이 한국의 외교·안보 선택지를 좁히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혐중의 목소리는 넓고 깊게 퍼지고 있다. 혐중은 중국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막고, 중국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 중국인들의 고민을 들으려는 관심까지 차단하는 위험한 현상이다. 혐중을 넘어 중국과 협력은 넓히되 비판할 부분은 비판하고 연대할 부분은 연대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14억 중국인들의 각양각색 고민과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시진핑 시대, 중국과 홍콩, 대만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중국의 현재를 이해할 실마리를 찾아보려 한다. - P23

손인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시진핑 시대의 중국을
"두려움의 정치"로 설명한다. 시진핑 1인 권력의 강화는 그의 권력욕 같은 개인적 요소보다는 통치 엘리트들의 집단적 위협 의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감보다는 두려움이 공격적 본능보다는 방어적 본능이 시진핑으로의 빠른 권력 집중과 공산당의 영도 강화를 추동했다"는 해석이다. 손 교수는 중국 지도부의위협 의식은 권위주의 체제 자체가 지닌 구조적 문제로부터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지배연합으로부터 배제된 대중과의 갈등과 지배연합 내부의 권력 갈등이 엘리트들이 느끼는 위협 의식의 뿌리"라는 것이다.
개혁개방 40년 동안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지만, 부는 불공정하고 불평등하게 분배되었다. 기득권층에 대한대중의 분노는 커졌다. 기득권층의 이익을 제어하고 공정한 부의 재분배를 실현할 개혁이 필요했고 시진핑이 이런 개혁을 해낼 것이란 기대도 컸다. 하지만 점점 개혁보다는 대중의 불만을 통제하고 억누르는 쪽으로 기울었다. 2012년 권력 교체기에 일어난 보시라이 사건‘도 지도부의 불안감을 고조시키면서 권력 집중에 대한 필요성을 뒷받침했다.
서구 자유주의가 중국공산당의 일당통치를 위협한다는 해묵은 두려움도 커졌다. - P27

빈부격차를 원망하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마오쩌둥 시기의 평등에 대한 향수가 커지는 가운데 시진핑은 마오쩌둥의 이미지를 빌려서 듬직한 아버지의 이미지, 공산당의 이상주의적 뿌리를 회복시키고 외세에 단호히 맞서는 강력한 지도자상을 구축해왔다.
마오쩌둥 시대에 대한 향수를 이용하고 부패와의 전쟁으로 인기를 얻는 것은 시진핑의 라이벌인 보시라이가 충칭에서 실험했던 방법인데, 그를 숙청한 시진핑도 이를 고스란히 활용하고 있다.
시 주석은 ‘부패와의 전쟁‘에 이어 농촌과 농민들의 ‘빈곤 탈출‘(脫貧·탈빈)을 주요한 정치적 업적으로 내걸고 있다. 그리고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앞둔 2021년 2월 빈곤 퇴치 완수를 공식 선언했다. - P29

 2021년 7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앞두고 ‘전면적인 샤오캉 사회‘(의식주를 걱정하지 않는 물질적으로 안락한 사회) 달성의 업적을 과시하고, 신중국 수립 100년이 되는 2049년까지 사실상 세계 최강국으로 도약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루겠다는 게 그의 청사진이다. 하지만 리커창 총리가 2020년 5월 28일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 기자회견에서 "중국인 6억명의 월수입이 1000위안(약 17만 원)에 불과하다"고 밝히면서 파문이 일었던 것처럼, 빈곤 퇴치 완수는 아직 현실과는 거리가 먼정치적 구호의 성격이 강하다.
시 주석이 문화대혁명과 마오쩌둥의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노동자와 농민, 학생들이 21세기 홍위병이 되어 아래로부터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두려워하는 문화혁명 트라우마도 깊이 도사리고 있다. 인권운동가들과 변호사들, 소수민족,
농민공(농민호구를 가진 노동자)들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탄압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중국 전역에 설치된 감시카메라, 안면인식 기술을 통한 감시, 인터넷 검열을 통한 디지털 빅브라더 사회에 대한 공포가 커지고 있다.
베이징의 한 학자는 익명을 전제로 현재 중국의 상황에 대해 비관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덩샤오핑 시대에는 광활한 중국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인민들에게 일정 정도 자유로운 공간을 보장해 인민과 지방의 적극성과 열정을 동원했다. 그러나 시진핑 시대에는 지도자와 당이 이미 진리를 모두 장악했으니 인민들은 당과 지도자를 신앙하며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변했다. 지방과 기층 조직들의 탐색 공간도 주어지지 않고, 언론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는다. "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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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으로 인해 난민이 된 사람들을 수용하는 난민 캠프의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본국에서 대립하던 그룹이 같은 장소에서 공동생활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라이베리아 내전은 아메리코 라이베리안이라는 지배 계층에 대해, 원주민인 크란족 출신 군인 새뮤얼 도(후일 대통령이 됨)가 무장봉기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14년에 걸쳐 내전이 벌어졌고,
민족적 동일성을 기반으로 하는 많은 군벌이 등장하여 처참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2003년 내전 종식 후에도 이 민족 간 앙듬은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고, 때때로 이 분쟁의 망령이 떠돌며 부두부람 캡프의 정치 역학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 P192

일반적으로 ‘인도적 지원‘의 대상인 난민은 수용국에서 ‘지원은 감사히 받고 불평은 하지 않는 피해자‘로 지낼 것이 요구된다.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고 권력에 순응하는 난민은 모범적인 ‘착한 난민(Good refugees)‘이며, 캠프를 총괄하는 측에 소중한 존재가 된다.
한편, ‘카운티 대표자 협회‘와 같이 소리 높여 자신들의 권리를주장하는 정치 활동을 하거나 하면 ‘나쁜 난민(Bad refugees)‘이라는 낙인이 찍혀 수용국 정부나 UNHCR과 멀어지게 된다.
난민이라는 ‘피해자‘가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는 행위이며, 하물며 수용국에 비난의 화살을 겨누는 시위는 허용될 수 없는 범죄 행위로 간주되는 것이다.
난민의 정치 활동에 대한 UNHCR의 반응은 내게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본래 난민을 보호하고 이들의 권리를 수호하는 입장에 서야 하는 UNHCR의 스태프는 부두부람 캠프에서 일어난 일련의 시위를 보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UNHCR 스태프 중 한 명에게 2008년에 캠프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한 의견을 물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몇몇 ‘불량한‘ 사람들이 다른 주민들을 선동해서 일어난 거예요. 우리는 시위를 해산하도록 수차례 경고했지만 그들은들으려고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런 행위를 하면 가나 정부도 더 이상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 P204

언론과 표현의 자유, 결사와 집회의 자유는 세계 인권 선언에도 명기된 기본적 권리로, 난민이 되었다고 해서 박탈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라이베리아 난민의 정치 활동에 대한 가나 정부의 극심한 탄압과 UNHCR의 냉정한 반응을 보면 난민의 정치적 권리와 자유가 얼마나 억압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라이베리아 난민의 경제 활동이나 상업 활동에는 큰 제약이 있지만, 그럼에도 캠프 안에서의 활동은 허락된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 활동에 대해서는 ‘어쨌든 안 돼!‘
라는 게 현실이다. - P205

난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가장 많이 머여드는 곳은 세간의 관심과 동정이 쏠리는 긴급 사태가 발생한 곳이다. 요즘 한창 심각한 상황에 놓인 시리아 난민의 대량탈출 사례를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장기화된 난민 상태‘는 이와는 정반대의 상황을 말한다.
이미 이들의 피난을 받아 준 수용국에서 몇 년(혹은 몇 십 년)을보낸 난민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거의 사라졌고, 기삿거리를 찾아 미디어가 찾아오는 일도 없다. 이들의 이야기가 미디어에 오르는 일은 그래 봐야 매년 6월 20일에 돌아오는 ‘세계 난민의 날‘ 즈음이 전부다.
그 결과 공여국으로부터의 원조가 축소되고, 그로 인해 수용국정부 또한 난민에 대한 지원을 줄여 갈 수밖에 없다.
현재 세계 난민의 약 90%는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등 흔히 말하는 개발도상국에 머물고 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수용국은 난민 수용하는 한편, 공여국으로부터 받는 원조의 일부를 난민을 받아들인 지역 사회에 지원하는 식으로, 일종의 교환이 성립하게 된다. 좀 더 직설적으로 얘기하자면 난민을 둘러싸고 도상국인수용국과 선진국인 공여국이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여국의 관심이 떠난 ‘장기화된 난민‘에게는 지원을 모으기가 어렵고, 그렇게 되면 난민 수용국은 ‘원조받는 맛‘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 ‘거래‘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된다.
- P254

부두부람 캠프에서 생활하는 난민들은 앞서 말한 장기화된 난민 상태의 전형적인 사례로, 2003년 내전이 종결된 후 UNHCR과 가나 정부는 이들에게 본국으로 귀환할 것을 강하게 추천하고 있었다.
UNHCR은 2004년에서 2007년에 걸쳐 대규모 ‘라이베리아난민 본국 귀환 추진 프로젝트‘를 실시했고, 이들을 조국인 라이베리아로 귀국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대대적으로 진행된 캠페인이었음에도, 프로젝트가 실시된 3년간 가나에서 라이베리아로 귀국한 난민은 2004년 당시 부두부람 캠프에 체류하던 4만 명의 25%인 1만 명 정도에 그쳤다.
대대적인 본국 귀환 추진 프로젝트가 별 소득 없이 끝나자,
UNHCR은 바로 차선책으로 ‘영구적 해결 방안‘의 하나인 ‘지역통합‘으로 초점을 옮겼다. ‘본국 귀환‘에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라이베리아 난민을 현재 수용국인 가나에 정착시키는 것으로, 20년이나 지속되어 온 라이베리아 난민 문제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가나 정부는 당시 재정착프로젝트 후 잔류 중인 3만명의 라이베리아 난민을 ‘지역 통합‘으로 영구적으로 수용하는 방안에 난색을 표했다. - P255

UNHCR은 가나 국내에서 라이베리아 난민에 대한 비난이 가장 거세진 이 기회를 공교히 활용했다. 2007년에 이제 막 종료된 본국 귀환 추천 프로젝트를 재개하여 귀환하는 난민에게는 라이베리아까지 무료로 이동할 수 있도록 운송·교통 서비스를 지원했고,
한 명당 100달러의 지원금(이때까지는 난민에 대한 지원금이 1인당 고작5달러였다)을 약속하며 다시 한번 본국 귀환 추진에 나선 것이었다.
UNHCR은 가나에 머물고 있는 난민의 수가 대폭 감소하면 난민의 ‘지역 통합‘ 안에 대한 가나 정부의 태도도 유연해지지 않을까 하는 심산으로, 캠프에 설치된 게시판을 통해 "이번 본국 귀환기회를 최대한 이용하여 각자의 미래에 대해 합리적인 결단을 내립시다."라며 난민들에게 재차 호소했다.
2008년 4월에 재개된 본국 귀환 추진 프로젝트의 접수 마감은처음에는 2008년 9월까지였으나, 이를 두 차례 연장하여 최종적으로는 2009년 4월까지 였다. - P257

‘캠프에서 나고 자란‘ 난민 2세, 3세들에게 라이베리아는 ‘낮선 나라‘가 되어 있었다. 한 번도 모국 땅을 밟아 본 일이 없는 이들의 눈에 UNHCR이 추진하는 ‘본국 귀환‘은 큰 모순으로 비칠 뿐이었다.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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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50만 명 ‘
이 숫자는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
UN이 발표한 2017년 말 기준 세계 ‘강제 이주자‘의 총 인구수다. 강제 이주자란 난민, 난민(비호) 신청자, 국내 실향민 등을 말한다. 이들은 무력 분쟁, 내란, 박해, 자연재해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정든 고향을 떠나 국내외에서 피난 생활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이 숫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로, 4년 연속 과거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다.
이 6,850만‘이라는 숫자는 일본 총 인구수의 약 절반에 해당하며, 영국의 총 인구보다도 많은 숫자다. 만약에 강제 이주자들을모아 한 나라를 만든다면 세계에서 21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강제 이주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500만 명가량이 난민이다.
일본에서는 보편적으로 논의되는 경우가 잘 없지만, 난민 문제는 이 시대의 국제 사회가 직면한 가장 중대한 문제 중 하나다.
난민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 P31

이와 같은 난민 문제에 대해 종종 오해를 사는 부분이 있다. 근래의 보도를 보면 ‘유럽 난민 위기‘나 ‘세계 난민 위기‘와 같은 말이 자주 보이면서 마치 세계의 난민들이 선진국으로 밀려드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는데, 유럽과 그 외 선진국에 갈 수 있는 난민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세계에는 2,500만 명이 넘는 난민이 있는데,
그중 90% 가까운 인구가 개발도상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350만명의 난민을 보호하고 있는 터키를 시작으로, 파키스탄, 우간다,
레바논, 이란이 2017년 기준으로 난민 수용 규모 상위 5위까지 차지하고 있다. - P33

난민이 발생하게 된 나라의 절대다수가 개발도상국 으로, 보통 그 주변에 있는 개발도상국이 난민 수용국이 됨과 동시에 그곳에
‘난민 캠프‘가 설치된다. 예를 들어 시리아에서 온 난민의 90%는국경을 맞대고 있는 터키, 레바논, 요르단에 체류하고 있다.
그리고, 난민을 가장 많이 수용하고 있는 곳이 바로 아프리카대륙이다. 현재 세계에는 소규모를 포함, 모두 150곳에 가까운 난민 캠프가 설치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중 약 3분의 2가 아프리카대륙에 위치해 있다. - P35


라이베리아 내전 - 아프리카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분쟁
대서양에 접해 있는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서쪽으로 약 10킬로미터 정도 이동하면 부두부람 난민 캠프가 위치한 고모아 지역(Gomoa District)이 눈에 들어온다.
부두부람 난민 캠프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는데, 라이베리아 내전이 발발하고 그다음 해인 1990년에 라이베리아에서 피난 온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가나 정부가 설치한 시설의 형식으로 문을 열었다.
이 라이베리아 내전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 바로 라이베리아라는 국가가 성립하게 된 매우 특수한 배경이다.
라이베리아는 미합중국의 해방 노예를 이주시키기 위해 1847년에 건국된 사실상의 미국 식민지였다. 이 이주 작업은 1822년부터
‘미국 식민 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라는 단체의 주도로 시작되어, 당시의 토착 원주민들의 땅을 일방적으로 빌리는 형식으로 이곳에 해방 노예들을 보냈다.
‘라이베리아‘라는 국가명은 ‘해방하다‘라는 뜻의 영단어 Liberate‘
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라이베리아의 수도는 해방 노예들이 이주하던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로(James Monroe)‘의 이름을 따 ‘몬로비아‘로 부르게 되었다. - P43

또한 미국으로부터 ‘귀환‘해 온 해방 노예를 ‘아메리코 라이베리안(Americo-Liberian)‘이라고 부른다.
선진국인 미국에서 온 해방 노예들은 라이베리아의 원주민을 멸시하고, 철저히 탄압했다. 소수파였음에도 신생국인 라이베리아에서 부를 축적하고 정치·경제를 장악하여 20세기 후반까지 이나라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수파 엘리트인 ‘아메리코 라이베리안‘의 독재에 불만이 쌓이고 쌓여, 1980년 원주민 출신 장군인 ‘새뮤얼 도(SamuelDoe)‘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다. 당시 라이베리아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톨버트(William Tolbert)‘를 암살한 새뮤얼 도는 스스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100년 넘게 이어진 ‘아메리코 라이베리안‘의 권력 독점은 일단 막을 내린 듯했다.
그러나, 원주민 출신 첫 대통령이라며 기대를 모았던 새뮤얼도는 유감스럽게도 한 나라의 지도자로 전혀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권력을 손에 넣은 새뮤얼 도는 노골적으로 친인척을 편애하고 자신의 출신인 크란족(Krahn)을 우대하면서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사게 되었다. 결국 이 정권도 쿠데타를 맞이하게 되었다.
1989년 크리스마스에 ‘아메리코 라이베리안‘ 출신인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가 일으킨 쿠데타로 새뮤얼 도 정권은 붕괴되었고, 이 나라는 내전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 P44

라이베리아 내전은 아프리카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분쟁으로 일컬어지는데, 시에라리온이나 코트디부아르와 같은 다른 서아프리카 국가들도 말려들었고, 분쟁은 14년간 계속되었다.
분쟁이 계속된 14년간 약 30만 명이 사망했고, 2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분쟁을 피해 주변국으로 피신해 난민이 되었다. 부두부람캠프에서 생활하는 라이베리아 난민의 대부분은 이 장기간 이어진 내전이 한창이던 때 탈출하여 가나로 흘러들어 온 사람들이었다.
라이베리아 내전 자체는 2003년 정전 협정으로 끝이 보이는 듯했지만, 많은 난민들은 라이베리아에 돌아가지 않고 그 후에도 주변국에서 난민 생활을 계속했다. - P45

나는 2012년 난민연구센터에 합류했으며, 현재 전문 분야는 난민의 경제 활동에 대한 조사다. 조국을 떠나 그간의 생업을 잃게된 이들이 어떻게 언어와 법률, 사회 제도가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생계 수단을 구축하는지를 조사하는 것이다. 이 연구 주제는 최근 몇 년간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는 앞서 설명한 ‘난민 상태의 장기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난민에 대한 관심이 가장 높아지는 것은 이들이 분쟁 등으로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비호를 구하는 ‘긴급 사태‘가 발생한 단계일 때다. 이 시점에는 미디어 또한 적극적으로 난민의 고통을 보도하며 공여국도 이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난민들의 수용국 체류기간이 장기화될수록 원조국의 관심은 줄어들고, 지원도 더 이상 모여들지 않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난민들에게는 ‘스스로의 수입원을 확보하여 국제 원조에 기대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된 생활‘을 영위할 것이 요구된다. 탁 터놓고 말하자면, "당신들을 도와줄 돈이 없으니 힘내서 스스로 알아서 살아요."라는 것이다. - P47

어딜 봐도 개업을 위해서는 상당한 자본금이 필요한 곳뿐이었다. 난민 기업가의 대부분은 앞서 만난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는 존처럼 선진국에 가족이 있는 등 해외에서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특권층‘에 속했다. - P104


1990년대 후반부터 이미 UNHCR의 지원은 축소되는 방향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3년에 라이베리아 내전의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2005년에 내전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가 평화적으로 실시되면서, 공여국의 관심은 난민 지원에서 내전으로 폐허가 된 라이베리아의 재건으로 옮겨 갔다.
연간예산의 대부분을 선진국의 자금 협력에 의존하는 UNHCR은, 결과적으로 라이베리아 난민을 위한 예산을 대폭 삭감할 수밖에 없었다.
부두부람 캠프를 위한 예산이 축소되면서 UNHCR은 캠프의수도와 공중화장실 등의 서비스를 모두 유료화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UNHCR은 이러한 기본 서비스에 대한 재정지원은 제공했지만, 그것만으로는 2만 명이 넘는 캠프 주민들 모두의 필요를 충족하는 게 불가능했다. 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난민 스스로 요금을 징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덧붙이자면 내가 캠프에서 머물던 때 공중화장실의 1회 이용료와 물 한 동이의 가격은 각각 5 페세와(약 40원, 100페세와=1세디)였다.
캠프에는 UNHCR이 설립한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었는데, 학비는 6학년 아이의 연수업료가 45세디(약36,000원), 중학교 3학년은 203세디(약162,400원)로, 현지 물가 수준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비싼 금액이었다. - P87

들쑥날쑥한 원조
이처럼 장기화된 난민 캠프에서 난민이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생활을 꾸려 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난민 수용국의 정부로부터 협력을 얻지 못하는 경우는 더욱 큰 문제다.
가나 정부는 라이베리아 난민이 자국민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며 강한 경계심을 나타냈는데, 특히 앞서 설명한 것처럼 노동 허가증 발급을 지체하거나 은행 대출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등 제도적 장벽을 통해 난민이 노동 시장에 유입되는 것을 막고 있었다.
난민을 받아들인 고모아 지구의 경우, 지역 주민들도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데 왜 자국민도 아닌 난민을 지원해야 하느냐는 것이 가나 정부의 입장이었다.
또한, ‘인도적 지원‘과 ‘개발 원조‘를 둘러싼 국제기구의 복잡한 줄다리기 문제가 난민들의 경제생활을 한층 힘들게 하고 있었다.
난민 지원은 본래 인도적 지원의 대상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인도적 지원의 가장 큰 역할은, 분쟁과 재해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생존‘을 돕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제공되는 것은주로 물이나 식료품, 텐트, 약, 담요 등이다.
하지만 장기화된 난민 캠프에서는 이러한 인도적 지원의 역할이 극히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 P121

국제 원조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난민들이 스스로 생계를 꾸려 갈 수 있도록 돕는 개발 원조지만, 이는 인도적 지원에 중점을 두는 UNHCR의 영역에서 벗어나 UNDP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UNDP는 난민 원조의 전반은 어디까지나 UNHCR의영역이라고 보기 때문에 UNDP가 난민의 경제 활동에 대한 지원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일은 없다.
부두부람 캠프에서도 UNHCR이 지금까지 몇 차례 난민의 경제 자립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조직했지만 들쑥날쑥한 부분이 많아 실효성은 미미했다.
예를 들어, 2009년에는 난민 중 희망자에게 6개월간 전기 공사,
석공, 미장이, 재봉, 컴퓨터, 미용 등의 분야에서 직업 훈련을 제공했는데,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UNHCR은 2003년 이후 마이크로 파이낸스 등 대출 프로그램의 운영을 중지했다(106쪽참조).
가나 금융 기관으로부터 사실상 문전박대를 당하는 난민들은 새로운 직업 기술을 익히더라도 이를 실제로 비즈니스로 실현하기 위한 창업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다. 난민을 위한 직업 훈련 프로그램 수강자 사이에선 이러한 현실을 자조하는 말이 있다.
"We were trained but not economically empowered.
기슬만 배웠을 뿐 경제적인 힘을 얻은 건 아니다.)" - P122

난민의 생계 수단 형성을 지원한다는 프로그램의 근본적인 약점을 정확히 지적하는 말이다.
여기에, 제1장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장기화된 난민 캠프에 대한 공여국의 관심 또한 크지 않아 애초에 원조 자금 자체가 모이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조사 기간 중에 UNHCR 가나 사무소의 관리직 스태프들과의미팅 자리에서 캠프 빈곤층의 생활 상태가 너무나도 열악한 점을지적하고, 이러한 빈곤층에게 UNHCR을 포함한 국제기구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점을 강조한 일이 있다. 이에 대해 한 미국인 스태프가 다음과 같이 냉정하게 말했다.
"더 이상 여기(라이베리아 )난민들을 공여국에 ‘세일즈‘해 봐야 소용없어요 내전도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어느 공여국도 돈을 내지않을 겁니다. UNHCR도 곧 가나에서 철수할 예정이고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UNHCR은 2009년부터 2011년에 걸쳐 지원 프로그램을 하나둘 종료하고, 체류 중인 난민들에게 출신국인 라이베리아로 귀환하도록 적극적으로 권했다. - P123

경제 활동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같은 캠프에 사는 난민들 사이에도 상당한 경제적 격차가 존재하고, 생활 수준에도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차차 확연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격차를 야기하는 가장 큰 요인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선진국으로부터 ‘송금‘을 받는지의 여부였다. 개개인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빈부가 결정되는 현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하지만, UNHCR과 같은 원조 기구의 지원이 격감할수록 캠프에서 해외 송금이 갖는 영향력이 커져 가는 것을 목격한 난민들은 미국, 유럽 등에 대한 과장된 꿈을 꾸며 선진국으로의 이주를 갈망하게 되었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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