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 폭탄 만들기 1
리처드 로즈 지음, 문신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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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헛소리


"가벼운 원자핵들을 이용하여 무거운 원자핵들을 깨뜨려 버릴 수가 있다. 이것은 영국의 실험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이미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그러나 이 원자핵들은 모두 강한 양전기를 띠므로 날아가는 원자핵은 충돌을 당하는 원자핵을 비껴가게 된다. 그러므로 물리학자들은 원자핵이 전기적 척력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속도를 갖도로 가속시키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1932년 제임스 채드윅이 발견한 중성자(Neutron)는 양전기를 가진 양자와 거의 같은 질량을 갖고 있으며 전기적으로 중성이므로 핵 주위의 전기적 장애를 통과하여 핵에 도달할 수 있는 입자이다." "중성자가 핵의 전기적 장벽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헝가리 출신의 이론 물리학자인 레오 실라르드가 최초로 알아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성자를 핵과 충돌시켜, 중성자가 공급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 것은 실라르드가 처음이었다."(24-31)


2 / 원자와 빈 공간


"열역학 제2법칙은 시스템에 어떤 변화가 없이는 열이 차가운 물체로부터 뜨거운 물체로 저절로 이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플랑크 자신이 1897년 뮌헨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논문으로 일반화했듯이 열전도 과정은 결코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완전히 가역화될 수 없다. 열역학 제2법칙은 영구기관의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외에도 플랑크의 선배 루돌프 클라우지우스가 엔트로피라고 명명한 것을 정의하기도 한다. 일을 할 때마다 에너지는 다시 유용한 형태로 수집될 수 없는 열로 소모되므로 우주는 서서히 무작위의 불규칙한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이 점증하는 혼란은 우주가 일상적인 것이지 가역적인 것이 아님을 뜻한다. 열역학 제2법칙은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물리학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기계적인 원자론을 설명하는) 고전 물리학의 방정식들은 우주의 전진과 후진을 동등하게 허용하고 있다."(35)


"알파 입자의 산란 실험을 하던 러더퍼드는 알파 입자가 곧바로 되돌아 튕겨져 나온다는 것은 단 한 차례의 충돌에 의한 것임을 깨달았다." "러더퍼드는 원자의 핵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전자들의 위치를 선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1911년, 맨체스터 발표에서 그는 한 점에 집중되어 있는 전하가 균일하게 구 모양의 분포를 갖는 반대 전하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계산을 하기 위하여 이상화한 것일 뿐, 반대 전하가 전자 속에 둘러싸여 있어야 한다는 물리적 사실을 간과한 결과였다. 원자가 고전 물리학의 운동 법칙들, 즉 행성들 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뉴턴의 법칙에 따라 작동된다면, 러더퍼드의 모델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원자는 단순히 이론적으로만 설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수행된 물리학적 실험의 결과였다." "누군가가 고전 역학과 러더퍼드가 실험적으로 시험한 원자 사이의 모순을 해결해야 했다."(64-6)


3 / 보어의 원자


"고전 이론에 의하면 가마솥과 같이 가열된 공동 내에는 무한대의 에너지가 존재해야 한다. 고전 이론에서는 가열된 가마솥의 벽에 있는 입자들이 진동에 의하여 주파수가 무한대에 걸쳐 빛을 방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이런 경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공동 속에 있는 에너지가 원자외선으로 제한 없이 바뀌는 것을 막는 것일까?" "플랑크는 진동하는 입자는 어떤 특정한 에너지에서만 복사 에너지를 방출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이 고질적인 문제를 풀었다. 복사가 허용된 에너지는 새로운 수, 〈하나의 우주 상수〉에 의하여 결정된다. 〈나는 이 수를 h라고 불렀다. 이것은 작용(에너지X시간)의 차원을 가지므로, 나는 그것을 기본 작용 양자(quantum은 라틴어 quantus의 중성명사이며 '얼마나 큰가'를 뜻한다)라고 불렀다.〉 h의 정수배(플랑크의 hX주파수 v)가 되는 유한한 에너지만이 나타날 수 있다. 우주 상수 h는 곧 플랑크 상수 불리기 시작했다."(86)


"이런 지식으로 무장한 보어는 러더퍼드의 원자 모델이 갖고 있는 불안정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러더퍼드 원자의 어려움은 안정성을 설명하지 못하는 데 있다. 단 한 개의 전자를 갖고 있는 수소 원자라 할지라도 고전 이론에 따르면 전자는 핵의 주위를 돌며 운동 방향을 바꾸어 빛을 방출하게 되므로 에너지를 잃고 궤도의 반경이 점점 줄어들어 결국에는 핵과 충돌하게 된다. 뉴턴 역학적 관점에서 볼 때 러더퍼드 원자는 태양계의 축소형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크거나 작아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보어는 원자의 '정상 또는 불변 상태'가 존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즉 전자가 불안정하지도 않고, 빛을 복사하지도 않으며 핵과 충돌하지 않는 궤도를 갖고 있어야 된다." "보어에게 명백한 것은 그의 궤도를 도는 전자들과 스펙트럼 선들 사이의 관계였다. 보어는 핵에 묶여 있는 전자는 정상적으로 안정한 바닥 상태라고 불리는 기본 궤도를 돌고 있다고 제안했다."(87-91)


4 / 이미 파기 시작한 무덤


"표면상의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제1차 세계대전의 결말은 시체의 양산이었다. 본질적으로 산업적이었던 조직의 운용은 장군들에 의하여 소모 전술로 바뀌었다. 영국인은 독일인을 죽이려 했고, 독일인은 영국인과 프랑스인을 죽이려 했으며 그리고·····. 이 전술은 이제는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해져서 정상적으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914년 이전 유럽에서는 그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미국 남북전쟁의 교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변해 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일단 참호 진지가 구축되면 긴 무덤은 이미 파진 것이며, 전쟁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되고 죽음을 만드는 일이 어떤 합리적인 반응도 압도해 버린다. 법, 조직, 생산, 이동, 과학, 기술적 천재성에 뿌리를 두고, 1,500일에 걸쳐 매일 6,000명의 주검을 생산해 낸 전쟁 기계는 영구적이고 현실적인 요소였으며 인간의 변화에 의해 약간 변경될 뿐이다."(126)


5 / 화성에서 온 방문자들


"1926년 초 교양 있는 비엔나의 이론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원자 규모의 물질은 마치 파동으로 구성된 것처럼 행동한다는 물질의 파동 이론을 발표했다. 슈뢰딩거의 이론은 간결하고 누구나 접근 가능하며 그리고 완벽하게 모순점 없이 앞뒤가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고전물리학에 동감하는 슈뢰딩거는 그의 파동역학이 원자 내부의 실체를 나타낸다고 지나친 주장을 했다. 원자의 내부에 입자가 아니라 정지한 물질파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여 연속적인 과정과 절대적인 결정이 가능한 고전물리학 속으로 다시 원자를 끌어들여왔다. 보어의 원자에서는 정상 상태에서 항해하는 전자들의 양자 도약에 의하여 광자가 방출된다. 대신에 슈뢰딩거는 건설적인 간섭이라고 알려진 과정에 의하여 파동들의 크기가 서로 합쳐져 빛을 방출한다고 설명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가정이 진실이기에는 너무 훌륭하다고 말했다."(156-7)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물리학에서 엄밀한 결정주의의 종말을 의미한다. 만일 원자적 사건이 원래부터 불분명하고 개개의 입자에 대하여 시간과 공간에서의 완전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면 그들의 미래의 행동에 대한 예측은 통계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8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였던 라플라스의 꿈은 만일 그가 어떤 순간 우주의 모든 입자들의 시간과 공간에서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면 그는 영원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꿈은 그날 밤 코펜하겐에서 해답을 얻었다. 자연은 신의 특권에 대한 비밀을 인간에게 나누어주지 않는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의 원자 내부의 평등화라는 구상을 좋아하면서도, 불확정성 원리가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에 기초를 두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보어는 전에 슈뢰딩거에게 향했던 그의 집요함으로 이번에는 하이젠베르크를 겨냥했다."(160)


6 / 기계


"당시 러더퍼드의 선구자적인 연구 때문에 실험물리학자들에게는 원자핵물리학이 첨단 영역으로 여겨지고 있었지만, 러더퍼드의 실험 방법은 본질적으로 매우 지루한 것이어서 전망 있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쉽게 뛰어들지 못했다. 간단한 계산에 의하면, 전기적으로 전기적으로 가속된 가벼운 원자들 1마이크로 암페어는 세계의 라듐 총공급량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다. 방전관에서 나오는 알파 입자와 양자는 전기적으로 밀고 당김으로 가속시킬 수 있다. 무거운 핵의 전기적 장벽을 통과하는 데는 100만 볼트 정도의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아무도 일정 시간 동안 스파크나 과열에 의한 전기 방전 없이 한 군데에 입자를 모아둘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지 못했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기계적인 것이고 실험적인 것이었다. 이 문제가 작은 마을의 농가에서 라디오를 가지고 실험을 하며 성장한 미국 실험물리학자들의 젊은 세대를 매혹시켰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179)


"중성자는 양자와 질량은 거의 같으나 전하가 없으므로 핵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에 의한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또한 핵의 전기적 장벽이 진로를 막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뛰어난 투과력은 핵을 조사하는 새로운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필립 모리슨은 〈음속으로 운동하는 열중성자들은 40분의 1전자볼트 정도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수백만 전자볼트의 에너지로 수천 배나 더 빠르게 운동하는 양자보다 훨씬 쉽게 많은 물질들과 핵반응을 일으킨다〉라고 했다. 채드윅이 그의 운명적인 중성자를 발견한 2월에 로렌스의 사이클로트론은 처음으로 양자를 100만 볼트 에너지로 가속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채드윅의 중성자는 핵을 자세하게 조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한스 베테는 1932년 이전의 모든 것은 〈핵물리학의 유사 이전의 것이고 1932년부터는 핵물리학의 역사〉라고 말했다. 이 차이는 중성자의 발견이었다."(201-2)


7 / 대이동


"1933년 1월 30일, 독일 총통직에 오른 아돌프 히틀러는 얼마 있지 않아 반유대운동을 합법화시키고 독일계 유대인의 민권을 정지시켰다." "공직 회복을 위한 법률은 나치가 앞으로 발표하게 될 400여 가지의 반유대주의 법률과 명령의 전조였으며 텔러, 파울리, 프리슈 그리고 이들의 유대인 동료들의 생애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비(非)아리아 계통의 공직자는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 비아리안을 정의하는 명령은 4월 11일에 발표됐다. 누구든 부모나 조부모가 비아리아인 후손, 특히 유대인은 모두 아리아 계통이 아니다. 대학교는 국가기관이었으므로 교수들은 공직자에 속했다. 새로운 법률은 이미 노벨상을 받았거나 받게 될 11명을 포함하여 독일 물리학자들의 사분의 일의 지위와 생계를 박탈해 버렸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총 1,600명에 달하는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이민을 떠나야 했다."(218-9)


8 / 고무적인 연구


"실라르드는 중성자가 인공적으로 방사선 붕괴를 일으킬 것이라는 이론에 근거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필요한 실험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졸리오-퀴리 부부만이 알파 입자를 이용하여 이런 실험을 했다. 실라르드는 인공 방사능 물질 이상의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는 연쇄 반응에 의하여 핵에너지를 방출시켜 원자탄을 만드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원소들이 한 개의 중성자를 포획하고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중성자를 방출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원소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해 보는 것이 합리적인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에는 92가지의 원소들이 있다." "그러나 실라르드는 이런 실험을 하기 위한 실험실, 헌신적인 일꾼 그리고 충분한 재정적 지원 등 모두가 결핍되어 있었다." "대신에 그 기회는 로마에 있는 엔리코 페르미와 그의 젊은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페르미는 실라르드가 갖고 있지 못한 것들을 모두 갖고 있었다."(242)


"실라르드가 '산업 목적을 위한 에너지'를 넘어서서 전쟁 무기의 가능성까지 내다보았다는 사실은 1934년 6월 28일과 7월 4일에 제출한 특허 출원서의 수정안에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다. 먼젓번에는 '화학 원소의 변환'이라고 기술했던 것을 이번에는 '핵변환을 통한 전력 생산과 다른 목적을 위한 핵에너지의 방출'이란 표현을 추가했다. 그는 최초로 중성자에 의한 연쇄 반응을 제안했다. 그리고 '임계 질량'이라고 알려지게 된 연쇄 반응이 스스로 유지되는 데 필요한 반응 물질의 체적에 관한 중요한 특성들을 기술했다. 구 모양의 연쇄 반응 물질을 무거운 금속, 예를 들면 납으로 둘러싸면 임계 질량을 줄일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그는 또한 임계 질량이 형성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그의 출원서 4쪽에 적어놓았다. 〈만일 두께가 임계치보다 크면······ 나는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254-5)


9 / 우라늄의 파열


"핵 속에서 서로 반대로 작용하는 두 힘─강력과 전기적 척력─은 서로를 상쇄한다. 프리슈와 마이트너는 액체 방울같이 헐렁하게 결합되어 흔들흔들 출렁거리는 우라늄 원자핵이 약하긴 하지만 우라늄 원자핵을 교란시키는 데에는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저속 중성자와 충돌하는 그림을 얻게 됐다. 중성자는 우라늄 원자핵에 에너지를 전해 준다. 핵은 진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어느 한 방향으로 길쭉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강력은 극히 짧은 거리 내에서만 작용하므로 한쪽으로 길쭉이 늘어난 핵에는 전기적 척력이 우세해지게 된다. 양쪽으로 불룩하게 된 부분은 서로 더 멀리 밀어내고, 그 사이에는 허리 부분이 생기게 된다. 양 끝쪽의 각각의 구내에서는 강력이 다시 우세해진다. 마치 표면장력이 액체 방울을 구형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동시에 전기적 척력은 두 개의 구를 더 멀리 떼어놓도록 작용한다."(307)


"마침내 허리 부분이 잘라진다. 두 개의 작은 핵, 예를 들면, 바륨과 크립톤이 나타난다. 마이트너는 두 개의 파편이 형성된다면 그들은 큰 에너지로 서로 밀어낼 것이라고 했다. 각각의 구 속에 있는 양자들의 양전하가 이 구들을 빛의 속도의 삼십분의 일의 속도로 서로 밀어낸다. 이 에너지가 약 200MeV(2억 전자볼트)가 된다고 계산했다. 1전자볼트는 전자가 1볼트의 전위차 사이에서 가속될 때 얻는 에너지이다. 2억 전자볼트는 많은 에너지는 아니지만, 한 개의 원자에서 나오는 에너지로는 매우 큰 양이다. 가장 강력한 화학 반응은 원자당 5eV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프리슈는 나중에 우라늄 원자핵이 부서질 때 나오는 에너지가 눈에 보일 수 있는 모래알이 식별할 수 있게 튀어오르게 하는 데 충분한 에너지라고 계산했다. 우라늄 1그램에는 약 2.5X10^21개의 원자가 있다. 25 뒤에 0이 20개 붙은,  2,500,000,000,000,000,000,000! 어마어마한 수이다."(307-8)


"1909년, 마이트너가 서른한 살 때, 그녀는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과학 학술 회의에서 처음으로 아인슈타인을 만났다. 그는 복사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관점의 발전에 대한 강연을 했다. 강의 중 아인슈타인은 질량을 에너지로 환산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1938년 크리스마스 전날에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머릿 속에 채우기 비율(packing fraction)의 개념을 갖고 있었다고 프리슈는 말했다. 그녀는 핵의 질량 결손에 대한 에스턴의 숫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만일 커다란 우라늄 원자핵이 두 개의 작은 원자핵으로 쪼개진다면 두 개의 작은 원자핵들의 질량의 합은 우라늄 원자핵의 질량보다 적다. 얼마나 적은가? 그녀는 쉽게 이 계산을 해낼 수 있었다. 양자 질량의 5분의 1정도가 적었다. E=MC^2을 이용하여 계산하면 양자 질량의 5분의 1을 약 200MeV이다. 이것이 에너지의 공급원이다.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308-9)


10 / 중성자를 쫓아서


"보어는 몇 가지 반응의 난해한 에너지 관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토륨 232는 우라늄 235보다 가볍고, 우라늄 235는 우라늄 238보다 가볍다. 그러나 우라늄 235는 또 다른 중요한 점에서 상당히 다르다. 토륨 232가 한 개의 중성자를 흡수하면 질량 번호가 기수인 원자핵 토륨 233이 된다. 우라늄 238이 한 개의 중성자를 흡수하면 역시 질량 번호가 기수인 우라늄 239 핵이 된다. 그러나 우라늄 235가 한 개의 중성자를 흡수하면 질량 번호가 우수인 우라늄 236이 된다. 페르미가 어느 날 강의에서 설명하게 되지만, 핵의 재조정에 의한 변화는 기수의 중성자들이 우수의 중성자들로 바뀔 때 1 내지 2Me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이것은 우라늄 235가 다른 두 경쟁자보다 에너지 측면에서 내재적인 유리함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히 질량의 변화만으로도 분열에 가용한 에너지를 얻게 된다. 다른 두 원소는 그렇지 못하다."(344)


"실라르드는 중성자로 유도된 분열에서 적어도 두 개의 이차 중성자가 나온다고─즉, 연쇄 반응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고─말하면서, 〈분열연구는 계속하되, 실험 결과는 발표하지 않고 비밀로 해야 한다. 우리는 나치가 먼저 핵폭발을 일으키지 못하게 해야 된다〉라고 주장했다." "보어의 회의론은 '필요한 양의 우라늄 235를 분리해 내는 어마어마한 어려움'과 관계된 것이었다고 윌러는 기억했다." "보어는 프린스턴 모임에서 〈미국을 하나의 거대한 공장으로 바꾸지 않는 한 그것은 결코 완수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보어에게 더 중요한 것은 비밀 문제였다. 그는 수십 년 동안 물리학을 하나의 국제적인 공동 사회의 것으로 만드는 데 노력을 경주해 왔다. 민주주의에 언론의 자유가 필수적인 것처럼, 본질적 특권인 공개성이 과학자의 사회를 운용해 나가는 데 필요한 것이다. 완전한 공개는 절대적 정직성을 요구한다."(354-5)


"해당 내용의 공개 여부를 놓고 실라르드와 페르미 사이에 논쟁이 오가던 중에, 졸리오, 할반 그리고 코왈스키가 1939년 3월 18일자 《네이처》에 하나의 논문을 발표했다." "다음 달인 4월 22일, 세 사람은 이차 중성자에 대한 두 번째 논문을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 논문의 제목은 「우라늄의 핵분열에서 방출된 중성자의 수」였다. 먼저 발표된 실험을 근거로 계산한 바에 의하면 프랑스 팀은 평균 3.5개의 이차 중성자들을 발견했다. 〈연쇄 핵반응을 일으키는 수단으로 여기에서 토의한 현상에 대한 관심은 이미 우리의 지난번 논문에서 언급됐다〉라고 썼다. 이제 그들은 충분한 양의 우라늄을 적절한 감속제 속에 넣는다면 〈연쇄 분열은 스스로 계속되어 물질이 모두 소진된 뒤에나 끝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실험 결과는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결론지었다. 우라늄이 연쇄 반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356-7)


11 / 플루토늄의 등장


"1940년 7월, 하이젠베르크와 바이츠재커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생물학과 세균연구소의 운동장에 목조실험실 건물을 지었다. 그들은 임계상태에 도달하지 않는 우라늄 연소기를 만들 생각이었다. 독일은 세계의 유일한 중수공장과 벨기에 및 벨기에령 콩고에서 확보한 수천 톤의 우라늄 광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최고의 화학공장과 유능한 물리학자들, 화학자와 엔지니어들을 갖고 있었다. 독일은 핵의 상수를 측정할 사이클로트론만 갖고 있지 못했다. 프랑스가 무너지고, 6월 14일 파리를 점령하고 6월 22일 휴전이 조인되자 이 필요가 충족됐다. 독일 육군성의 핵물리학 전문가 쿠르트 디프너가 파리로 달려갔다. 페랭, 할반 그리고 코왈스키는 중수가 들어 있는 26개의 깡통을 가지고 영국으로 도망갔다. 졸리오는 프랑스에 남아 있었다(이 노벨상 수상자는 가장 큰 레지스탕스 조직의 운영위원회 의장이 됐다)."(421)


"1940년 10월, 스즈키 중령은 야수다 중장에게 핵개발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그의 보고서를 기본적인 문제에만 한정시켰다. 즉, 사용 가능한 우라늄 광석에 대한 보고였다. 그는 일본, 조선 그리고 버마 등지를 조사하고 충분한 우라늄광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폭탄은 가능한 것이다. 야수다는 일본의 이화학 연구소와 접촉하여 일본의 물리학 권위자 니시나 요시오와 협의했다. 니시나는 메이지시대 말기에 태어나 1940년에 50세였으며 콤프턴 효과에 대한 이론연구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코펜하겐에서 보어와 같이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세계주의자이며 보통이 아닌 특별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는 버클리에서 훈련 받은 조수의 도움을 받으며 작은 사이클로트론을 제작하고 있었다." "1941년 4월, 공식적인 명령이 떨어졌다. 제국 육군의 항공대는 원자 폭탄의 개발을 위한 연구를 승인했다."(425)


"세그레와 페르미는 원소 94에 대해 생각해 왔다. 〈우리는 원소 94가 저속 중성자에 의하여 분열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우라늄 235 대신 원자 폭탄에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보통 우라늄을 사용하는 원자로를 이용하여 이 새로운 원소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핵폭탄 개발에 전적으로 새로운 전망을 가져왔다. 당시에는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되던 우라늄 동위원소의 분리도 필요 없게 된다.〉" "1941년에 시보그 팀이 마침내 알파 입자를 방출하는 원소 94를 분리, 추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들은 1942년에 새로운 원소의 이름을 제안했다. 마틴 클라프로스가 1789년 새로 발견된 원소를 우라누스(Uranus, 천왕성)와 연계시켰듯이 그리고 넵튠(Neptune, 해왕성)까지 확장시킨 맥밀런의 제안을 본따서 시보그는 원소 94를 1930년에 발견된 아홉 번째 행성 플루토(Pluto, 명왕성)를 따라 플루토늄(Plutonium)이라고 이름지었다."(433-7)


12 / 영국에서 온 소식


"한 과학자는 원자무기를 만드는 일을 돕든지 또는 돕지 않든지 자기가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이 그의 단 한 가지 길이다. 이제 별도의 분리된 주권을 갖는 조직에 속하는 대가로 그는 자기의 정책에 관한 주장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이 별도의 조직은 대통령과 그가 승인하는 단 한 사람을 통하여 공개된 주권국가인 미국에 연결될 것이다. 애국심이 선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많은 물리학자들에게는, 그들의 발언을 통하여 볼 때, 독일에 대한 두려움이 더 깊은 동기였다. 그러나 두려움보다도 더 깊은 동기는 숙명론이다. 어떤 국가든지 그것을 만들어 사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단지 독일과의 경쟁만이 아니다. 루스벨트는 경쟁이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루스벨트는 새로운 파괴 무기가 개발됐을 때 가져올 영향, 즉 세계의 정치적인 조직을 바꾸어 놓을 것이 분명한 군사적 개발의 장기적인 영향력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4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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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거인들의 만남


"양자(quantum)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막스 플랑크였다. 1900년에 그는 빛을 포함한 모든 전자기 복사가 다양한 크기의 에너지 덩어리로 방출되거나 흡수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플랑크는 그런 에너지 덩어리를 〈quantum〉이라고 부르고, 복수로 〈quanta〉라고 썼다. 에너지가 양자라는 아이디어는, 에너지가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나오듯이 연속적으로 방출되거나 흡수된다는 오랜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뉴턴의 물리학이 지배하는 거시적 일상의 세계에서는 에너지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여러 크기의 방울로 교환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원자와 원자보다 작은 세상은 양자의 영역이다." "결국 원자 내부에 존재하는 전자의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양자물리학(quantum physics)에 따르면, 원자 속에 들어 있는 전자는 중간을 거치지 않고도 마술적으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양자화된 에너지를 방출하거나 흡수한다."(10-2)


"1920년대 초에 이르자, 즉흥적이고 단편적인 근거에서 시작된 양자물리학에 확실한 기초나 논리적 구조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런 혼란과 위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이라고 알려지게 될 용감한 새로운 이론이었다. 전자들이 원자핵 주위를 회전하는 작은 태양계라고 생각하던 원자 모형은 시각화할 수 없는 새로운 모형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1927년에 독일의 양자역학 신동으로 알려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자신도 그 중요성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식에 어긋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에 따르면, 입자의 정확한 속도를 알게 되면 그 입자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게 된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양자역학의 방정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고, 양자 수준에서 실재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12-3)


1장 양자


"클라우지우스에 따르면, 엔트로피는 물체나 시스템을 드나드는 열의 양을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온도로 나눈 값으로 정의된다. 500도의 뜨거운 물체가 250도의 차가운 물체에 1000단위의 에너지를 빼앗기는 경우에 뜨거운 물체의 엔트로피는 -1000/500=-2만큼 줄어든다. 250도의 차가운 물체는 1000단위의 에너지를 얻기 때문에 엔트로피가 +1000/250=+4만큼 늘어난다. 그래서 뜨거운 물체와 차가운 물체를 합친 시스템의 전체 엔트로피는 2엔트로피 단위(에너지/온도)만큼 늘어난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실제 변화는 엔트로피의 증가 때문에 비가역적이 된다. 그것이 바로 열이 차가운 것에서 뜨거운 것으로 자발적으로 또는 저절로 이동하는 변화를 막아주는 자연의 방법이다. 엔트로피가 변하지 않는 이상적인 과정만 가역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가역적 과정은 물리학자의 마음에서는 일어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의 엔트로피는 언제나 최댓값을 향해서 증가한다."(28)


"볼츠만 법칙에 따르면, 엔트로피는 시스템이 특별한 상태에 있을 확률을 나타내는 척도이다. 예를 들어 카드를 잘 섞으면 엔트로피가 큰 값을 가지는 무질서한 상태가 된다. 에이스에서 킹에 이르는 순서로 배열된 상자에서 꺼낸 새 카드는 엔트로피가 작은 값에 해당하는 잘 정리된 상태이다. 볼츠만에게 열역학 제2법칙은 낮은 확률과 낮은 엔트로피의 시스템이 확률이 더 큰 높은 엔트로피의 시스템으로 진화하는 변화에 대한 것이었다. 제2법칙은 절대적인 법칙이 아니다. 뒤섞은 카드를 다시 섞으면 정리가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스템도 무질서한 상태에서 더 정돈된 상태로 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천문학적으로 낮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기까지는 우주 나이의 몇 배에 해당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플랑크는 열역학 제2법칙이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엔트로피는 언제나 증가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볼츠만의 통계적 해석에서는 엔트로피가 거의 언제나 증가한다."(42)


"볼츠만의 기법을 응용한 플랑크는 진동자가 진동수에 비례하는 에너지의 덩어리를 흡수하거나 방출하는 경우에만 자신의 흑체 복사 분포 공식을 유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플랑크에 따르면, 훗날 그가 양자라고 부른 몇 개의 동일하고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에너지 요소〉가 주어진 진동수로 방출되는 에너지를 구성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체 계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플랑크는 자신의 공식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에너지(E)를 hv 크기의 덩어리로 잘라야만 했다. 여기서 v는 진동자의 진동수이고, h는 상수이다. 예를 들어, E=hv 공식에서 진동수가 20이고, h가 2라면, 에너지의 양자는 각각 20*2=40의 크기를 갖게 된다. 이 진동수에서 가능한 총 에너지가 3,600이라면, 3600/40=90개의 양자가 그 진동수의 진동자 10개에 분포하게 된다. 플랑크는 볼츠만으로부터 이 양자들이 진동자들 사이에 분포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분포를 알아내는 방법을 배웠다."(43)


# 흑체 복사 : 한 물체가 뜨거워지면 열을 내게 되는데, 이를 복사(radiation)라고 부른다. 고체에서 방출되는 복사를 조사하면 여러 가지 파장 또는 진동수를 가진 빛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물체나 그 표면에 부딪히는 복사열의 일부는 흡수하고 나머지는 반사한다. 특히 표면에 부딪히는 모든 복사를 흡수하는 경우 이런 물체를 흑체(black body)라고 부른다. 물론 흑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 즉 복사열을 방출도 한다. 19세기말에 물리학자들은 흑체에서 어떻게 여러 가지 진동수를 가진 복사가 나오며 이들은 표면의 온도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를 많이 연구하였고 여기서 양자론이 시작되었다.


"플랑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너무나도 훌륭하고 기대하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했던 탓에 그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의 진동자는 수도꼭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처럼 연속적으로 에너지를 흡수하거나 방출할 수 없다. 그 대신 작고 쪼갤 수 없는 E=hv를 단위로 하는 불연속적인 방법으로 에너지를 얻거나 잃을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v는 진동자의 진동수인데, 진동자가 흡수하거나 방출할 수 있는 복사가 가지고 있는 진동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거시적 규모의 진동자들이 플랑크의 원자 규모의 진동자처럼 행동하지 않는 이유는 h가 0.000000000000000000000000006626 에르그 초 또는 6.626을 1,000조의 조로 나눈 값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플랑크 공식에 따르면, 에너지의 증가나 감소에서 h보다 더 작은 간격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h의 값이 지나치게 작기 때문에 진동자나 아이들의 그네나 진동하는 추와 같은 일상의 세상에서는 양자 효과가 나타나지 않게 된다."(44-5)


"아인슈타인 본인이 〈아주 혁명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상대성이 아니라 플랑크의 양자 개념을 빛과 복사(輻射)에까지 확장한 이론이었다." "빛이 파동 현상이라는 것은 반세기 이상 보편적으로 인정되어왔던 사실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생성과 변환에 대한 발견적 견해」라는 논문에서 빛이 파동이 아니라 입자형의 양자로 구성된 것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플랑크는 흑체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에너지가 불연속적인 덩어리인 양자로 흡수되거나 방출된다는 아이디어를 도입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전자기 복사 자체는 물질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교환하는 메커니즘에 상관없이 연속적인 파동 현상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혁명적인 견해에서는 빛을 포함한 모든 전자기 복사가 파동적인 것이 아니라 작은 조각인 광양자로 쪼개져 있다는 것이다. 그후 20년 동안 그가 제시한 광양자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51)


"1907년에 방사성 붕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토륨과 라디오토륨이라는 두 원소가 물리적으로는 다르지만 화학적으로는 동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모든 화학적 시험에서 두 원소를 구별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5년 동안 화학적으로 구분할 수 없는 원소들이 계속해서 추가로 발견되었다. 당시 글래스고 대학교에 근무하던 소디는 새로운 라디오원소들과 〈완벽한 화학적 동등성〉을 공유하는 원소들 사이의 유일한 차이가 원자량이라고 주장했다. 체중이 조금 다른 점을 빼면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쌍둥이와 같다는 것이다. 1910년에 소디는 훗날 자신이 〈동위원소(isotope)〉라고 부르게 된 화학적으로 구별할 수 없는 라디오원소들이 사실은 똑같은 원소의 서로 다른 형식일 뿐이기 때문에 주기율표에서 같은 위치를 공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런 제안은 수소에서 우라늄에 이르는 원소들을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로 나열해놓은 주기율표로 표현되는 원소에 대한 기존의 조직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109-10)


"닐스 보어는 방사능이 원자가 아니라 핵 현상이라는 핵심적인 사실을 파악했다. 그가 한 종의 라디오원소가 알파선, 베타선, 또는 감마선을 방출하면서 다른 종으로 붕괴하는 과정을 핵 내부의 사건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보어는 방사능이 핵에서 비롯된다면 +92의 전하를 가진 우라늄이 알파 입자를 방출하면서 우라늄-X로 변하는 과정에서 양전하 2단위를 잃어버리면서 +90의 전하를 가진 핵이 남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핵은 본래의 92개 원자적 전자 모두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곧바로 2개의 전자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중성 원자가 된다. 방사성 붕괴의 결과로 만들어진 모든 새로운 원자는 곧바로 전자를 얻거나 잃어버려서 전기적 중성을 회복하게 된다. +90의 핵 전하를 가진 우라늄-X는 토륨의 동위원소이다. 보어는 그런 원소들이 모두 〈똑같은 핵 전하를 가지고 있으면서 핵의 질량과 고유 구조에서만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112)


"보어는, 완벽하게 적용되어왔던 뉴턴과 맥스웰의 물리학에 따르면, 전자가 핵에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안정성의 문제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러더퍼드 원자를 구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소극적인 플랑크에 의해서 발견되어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널리 알려지게 된 양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복사와 물질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에너지가 연속적인 양이 아니라 여러 크기의 덩어리로 흡수되거나 방출된다는 사실은 유서 깊은 '고전'물리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보어도 아인슈타인의 광양자를 믿지 않았지만, 보어가 보기에는 원자가 〈어떤 식으로든지 양자에 의해서 통제된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보어는 전자가 고전물리학에서 허용되는 모든 가능한 궤도 중에서 몇 개의 선택된 〈정상 상태(stationary state)〉의 궤도만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21-2)


"보어는 고전물리학과 양자물리학의 멋진 칵테일을 이용해서 자신의 원자를 만들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기존 물리학의 교리에 어긋나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원자 내부의 전자들이 정상 상태에 해당하는 특정한 궤도만 차지할 수 있고, 전자들이 그런 궤도에 있는 동안에는 에너지를 방출할 수 없고, 원자는 가장 낮은 에너지의 〈바닥 상태〉를 포함하는 일련의 불연속적인 에너지 상태 중 하나에만 있을 수 있고, 전자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높은 에너지의 정상 상태에서 낮은 에너지의 정상 상태로 도약할 수 있고, 두 상태 사이의 에너지 차이가 에너지의 양자로 방출된다는 것이다. 그의 모형은 원자 반지름과 같은 수소 원자의 다양한 성질을 정확하게 예측했고, 선 스펙트럼의 생성에 대한 물리적 설명을 제공했다. 훗날 러더퍼드는 양자원자가 〈물질에 대한 인간의 승리〉이고, 보어가 그것을 밝혀내지 못했다면, 선 스펙트럼의 신비를 해결하기까지에는 〈몇 세기가 걸렸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했다."(132-3)


"뉴턴 이전부터 시간과 공간은 고정되어 있고,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이고, 우주의 끝없는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라고 알려져 있었다. 우주는 질량, 길이, 시간이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무대였고, 모든 관찰자에게 사건들 사이의 공간적 거리와 시간 간격이 동일하게 보이는 극장이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질량, 길이, 시간이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공간적 거리와 시간 간격은 관찰자의 상대적 움직임에 따라서 달라진다. 지구에 남아 있는 한 쌍둥이에 비해서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여행하는 또다른 쌍둥이 우주인에게 시간은 느려지고(움직이는 시계 바늘이 느려진다), 공간은 수축되고(움직이는 물체의 길이가 줄어든다), 움직이는 물체의 질량은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 '특수'상대성의 이런 결과는 모두 20세기에 수행된 실험을 통해서 확인되었지만, '특수'이론에는 가속(加速)이 포함되지 않았다. '일반'상대성에는 가속이 포함되었다."(148-9)


"양자가 원자 영역의 실재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바로잡기 위한 도전이었던 것처럼,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인류는 공간과 시간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할 수 있었다. 중력에 대한 그의 일반상대성은 다른 사람들을 우주의 시작인 빅뱅으로 데려다주었다. 뉴턴의 중력이론에서는, 태양과 지구의 경우처럼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의 크기가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두 물체의 질량 중심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뉴턴 물리학에서 서로 접촉하지 않은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은 신비스러운 〈원격작용〉의 힘이다. 그러나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중력은 큰 질량의 존재 때문에 생기는 공간의 휘어짐에 의해서 나타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것은 어떤 신비스럽고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끌어당기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의 거대한 질량에 의해서 공간이 휘어지기(warp)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물질은 공간을 휘어지게 만들고, 휘어진 공간은 물질에게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알려준다."(149)


"미국의 젊은 실험학자 콤프턴은 산란된 X-선의 파장이 언제나 '1차' 또는 입사 X-선보다 조금씩 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파동이론에 따르면, 산란된 빛의 파장은 언제나 정확하게 같아야만 한다. 콤프턴은 파장(진동수)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2차 X-선이 표적에 쪼인 1차 X-선과 같지 않다는 뜻이라고 이해했다." "X-선이 양자로 나타난다면, X-선의 양자는 그런 충돌에 의해 산란되면서 에너지를 잃게 되고, 충돌에 의해서 전자가 튕겨져나가게 된다. X-선 양자의 에너지는 E=hv(h는 플랑크 상수, v는 진동수)로 주어지기 때문에 에너지의 손실은 진동수의 감소로 나타나고, 진동수는 파장에 반비례하기 때문에 산란된 X-선 양자의 파장은 늘어나게 된다." "X-선이 전자에 의해 산란되면서, 파장이 늘어나는 〈콤프턴 효과〉는 그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공상으로 치부하던 광양자의 존재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였다." "결국 아인슈타인의 광양자(light-quantum)는 광자(photon)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167-9)


2장 청년 물리학


"하이젠베르크는 1924년 2월 보어에게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의문은 정상 상태에 있는 전자의 궤도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라고 했다. 이미 배타원리를 찾아내는 길에 들어서서 전자 껍질이 채워지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파울리는 12월에 보어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서 자신이 제기한 의문에 대한 답을 밝혔다. 〈우리는 원자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편견의 사슬에 묶어두지 말아야 합니다. 제 의견으로는 전자 궤도가 일상적인 역학적 의미에서 존재한다는 가정도 그런 편견에 속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의 개념을 경험에 맞추어야만 합니다.〉 이제 타협을 포기하고, 편안하고 익숙한 고전물리학의 틀 안에서 양자 개념을 받아들이려는 노력도 그만두어야 했다. 과학은 관찰할 수 있는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만 하고, 오직 관찰할 수 있는 양만을 근거로 이론을 구축해야 한다는 실증주의의 신조를 진보적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인물이 바로 하이젠베르크였다."(220)


"슈뢰딩거는 1926년 2월 20일에 자신의 새 이론에 파동역학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했다. 슈뢰딩거는 물리학자들에게 조금의 시각화조차 허용하지 않는 차갑고 소박한 행렬역학과는 전혀 달리 하이젠베르크의 고도로 추상적인 형식보다 19세기 물리학에 더 가까운 방법으로 양자 세계를 설명할 수 있도록 해주는 편하고 안심할 수 있는 대안을 제공했다. 슈뢰딩거는 신비스러운 행렬 대신 모든 물리학자들이 사용하는 수학 도구 상자의 필수품인 미분 공식을 이용했다.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에서 제시되는 양자 도약과 불연속성은 원자의 내부 작동을 살펴보려는 사람들이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슈뢰딩거는 물리학자들에게 더 이상 〈직관을 억누르고, 전이 확률이나 에너지 레벨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만 이용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들이 파동역학을 열렬하게 환영하고, 곧바로 그것을 받아들였던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242-3)


"같은 문제에 적용하면 두 이론 모두 똑같은 답을 주었다. 행렬역학과 파동역학 사이에 관계가 있다면,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슈뢰딩거는 획기적인 첫 논문을 완성하자마자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파동 방정식과 행렬 대수를 이용함으로써 형식과 내용에서 전혀 다른 것처럼 보였던 두 이론은 사실 수학적으로 동등한 것이었다. 두 이론이 정확하게 똑같은 답을 주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이론의 수학적 표현 방식에서 물리적 해석으로 바뀌면서, 두 이론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란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부터 힘을 잃어버렸다. 두 이론이 기술적으로 동등할 수 있겠지만, 수학 너머에 있는 실재(reality)의 본질은, 슈뢰딩거의 경우에는 파동과 연속적인 것이었고, 하이젠베르크의 경우에는 입자와 불연속적인 것으로 전혀 다른 것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이론이 실재의 진정한 본질을 담고 있다고 확신했다.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옳을 수가 없었다."(244-5)


"슈뢰딩거는 입자의 존재를 포기했지만, 보른은 입자 개념을 구해내기 위한 시도로 파동함수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물리학의 핵심 교리였던 결정론(determinism)에 도전했다." "보른은 원자와 전자의 충돌이 일어난 후에는 전자가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물리학으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전자가 주어진 각도를 통해서 산란될 확률을 계산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즉, 파동함수 자체는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고, 신비스럽고 유령 같은 가능성의 영역에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전자가 원자와 충돌한 후에 산란될 수 있는 모든 각도와 같은 추상적인 가능성을 다루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보른의 확률 해석을 묵살해버렸다. 그는 전자나 알파 입자가 원자와 충돌하는 것이 〈절대적 우연〉, 즉 〈완전히 비결정론적〉이라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보른의 주장이 옳다면, 양자 도약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인과성은 다시 위협받게 된다."(253-5)


"어느 늦은 저녁,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이론이다〉라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떠올린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이 주어진 순간에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모두를 정확하게 결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 또는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지만,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둘 중 하나를 정확하게 알아낸 것에 대해서 자연이 요구하는 대가였다. 양자적 타협의 춤에서 하나를 더 정확하게 측정할수록 나머지 하나는 정확하지 않게 측정되거나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이 옳다면, 하이젠베르크는 그것이 원자 세계를 탐구하는 어떤 실험으로도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서 주어지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뜻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그런 주장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그런 실험이 포함된 모든 과정이 〈양자역학 법칙을 반드시 만족시켜야〉 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268-9)


"하이젠베르크는 전자의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결정할 수 없는 것은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는 행위 때문이라고 믿었다. 전자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전자 보기〉에서 사용된 광자에 충돌한 전자는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산란된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인으로 파악한 것은 측정 행위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교란(disturbance)이었다." "그것은 p x q가 q x p와 같지 않다는 비교환성에 감춰진 자연의 고유한 불확정이었다. 전자의 위치를 알아내는 실험에 이어서 전자의 속도(따라서 운동량)를 측정하는 실험을 하면, 두 개의 정밀한 값이 주어진다. 두 값을 함께 곱하면 그 결과는 A가 된다. 그러나 실험을 반대 순서로 수행해서 속도를 먼저 측정한 후에 이어서 위치를 측정하면 전혀 다른 결과 B가 된다. 어떤 경우이든 첫 번째 측정이 두 번째 결과에 영향을 주는 교란을 만들어낸다. 실험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교란이 없었다면 p x q는 q x p와 같아질 것이다."(271-2)


"양자 영역에서 〈위치〉는 무엇인가? 하이젠베르크의 입장에서는 위치나 운동량을 측정하는 실험이 없으면 분명한 위치나 분명한 운동량을 가진 전자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는 것이 〈위치를 가진 전자〉를 만들고, 운동량의 측정이 〈운동량을 가진 전자〉를 만든다. 분명한 '위치'나 분명한 '운동량'을 가진 전자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그것을 측정하는 실험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의미가 없다." "움직이는 물체는 실제로 측정을 하는지에 상관없이 주어진 시각에 공간에서의 정확한 위치와 정확한 운동량을 가진다는 것이 고전물리학의 명백한 기본 교리였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절대적으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전자가 동시에 '위치'와 '운동량'이 정확한 값을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전자가 그런 값을 가지거나 '궤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관찰이나 측정의 영역을 넘어서는 실재의 본질에 대한 추론은 의미가 없다."(273-4)


"보어는 전자나 광선이나 물질이나 복사가 입자나 파동의 측면을 드러내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실험을 사용하는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에 대해서 완고했다. 입자와 파동은 현상이 나타나도록 해주는 상보적이면서 상호 배타적인 측면이기 때문에 실제 실험이나 가상적인 실험이거나 상관없이 두 측면이 모두 드러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 "보어는 양자 세계에서 현상을 관찰하는 행위에 의해서 교란이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1927년 10월에 그는 논문 초고에서 더 구체적으로 〈중요한 영향이 없이는 원자 현상의 관찰이 불가능하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축약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이런 영향의 원인이 측정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측정을 수행하기 위해서 파동-입자 이중성의 어느 한 면을 선택해야만 하는 실험자에게 있다고 믿었다. 보어는, 불확정성은 그런 선택을 위해서 자연에게 치러야 할 대가라고 주장했다."(282-3)


3장 실재에 대한 거인들의 격돌


"과학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관찰하고 있는 것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자연의 수동적 관찰자라는 무언의 가정을 근거로 실험을 수행한다. 대상과 주체,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에는 면도날처럼 분명한 구분이 있었다. 그런데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원자 영역에서는 그런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보어는 그것을 새로운 물리학의 '핵심'인 〈양자가설(quantum postulate)〉이라고 불렀다. 자연에서 양자의 비(非)분할성 때문에 나타나는 불연속성의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서 도입한 용어였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입장에서는 '가능성'에서 '실재'로의 전환은 관찰의 행위 과정에서 일어난다. 관찰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본적인 양자적 실재는 없다. 아인슈타인의 입장에서는 관찰자와 독립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 과학적 추구의 핵심이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 사이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논쟁은 물리학의 영혼과 실재의 본질에 대한 것이었다."(300-1)


"아인슈타인이 여전히 보어와 코펜하겐 해석에 도전하는 동안, 이론에 의지하게 된 더 젊은 세대의 물리학자들에게는 양자역학이 〈물리학의 대부분과 화학의 전부〉를 설명해준다는 폴 디랙의 평가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넓게 확산되고 있었다. 이론이 현실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상황에서 연장자 몇 명이 이론의 의미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원자물리학의 문제들이 차례로 해결되고 있던 1920년대 말에 이르자 관심은 원자에서 원자핵으로 옮겨갔다. 1930년대 초에는 케임브리지의 제임스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하고, 로마의 엔리코 페르미와 그의 연구팀이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킬 때 일어나는 반응을 연구하면서 핵물리학의 새로운 프론티어가 열리기 시작했다. 1932년에는 러더퍼드의 캐번디시 연구실에서 채드윅의 동료였던 존 콕크로프트와 어니스트 월턴이 최초의 입자가속기를 만들어 원자의 핵을 깨뜨리는 실험에 사용했다."(341-2)


"보어와 아인슈타인 사이에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두 사람이 모두 알고 있었다. 양자역학의 해석에 대한 그들의 논쟁은 실재의 위상에 대한 철학적 신념에까지 이어졌다. 그런 것이 정말로 존재할까? 보어는 양자역학이 자연에 대한 완전한 근본이론이라고 믿고, 그 위에 자신의 철학적 세계관을 세웠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양자적 세상은 없다. 추상적인 양자역학적 서술이 있을 뿐이다. 물리학의 역할이 자연이 어떤 것인지를 찾아내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물리학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반대로 아인슈타인은 대안적 접근을 선택했다. 그가 양자역학의 평가에 이용한 근거는 인과적이고 관찰자와 관계가 없는 실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확고한 믿음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했다."(362-3)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최고의 이론이라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힘과 물질점(物質點)이라는 기본 개념으로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것(고전역학의 양자 보정)이지만 실재 사물에 대해서는 불완전한 표현〉이었다. 그러면서도 아인슈타인은 고전물리학의 개념들이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보어는 거시적 세계가 고전물리학과 그 개념들로 서술되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시간 낭비라고 주장했다. 그는 고전적 개념을 지키기 위해서 상보성의 틀을 개발했다. 보어에게는 측정 도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본적인 물리적 실재는 없었고, 하이젠베르크가 지적했듯이 그것은 〈우리가 양자이론의 역설, 즉 고전적 개념을 사용해야 하는 필요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고전적 개념을 지키려는 보어-하이젠베르크의 요구였고, 아인슈타인은 그것을 〈안정제 철학(tranquilizing philosophy)〉이라고 불렀다."(364)


4장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할까?


"1964년에는 전파 천체물리학자 아노 펜지어스와 로버트 우드로가 대폭발(빅뱅)의 메아리를 탐지했고, 진화생물학자 빌 해밀턴은 사회적 행동의 유전적 진화이론을 발표했고, 이론물리학자 머리 겔만이 쿼크라고 부르는 새로운 기본입자들의 존재를 예측했다. 그해에 등장한 기념비적인 과학적 돌파구는 이들 세 가지만이 아니었다. 물리학자이자 과학사학자인 헨리 스태프에 따르면, 〈과학에서 가장 심오한 발견〉인 벨 정리(Bell's theorem)에 대적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을 이용해서 성과를 올리는 일에 너무 바빠서 아인슈타인과 보어가 그 의미와 해석에 대해서 벌였던 미묘한 논쟁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른네 살의 아일랜드 물리학자 존 스튜어트 벨이 서로 상반되는 두 철학적 세계관을 구별해줄 수 있는 수학적 정리를 발견한 것이다."(375-6)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물리적으로 서로 상호작용할 수 없는 한 쌍의 상관된 입자 A와 B를 대상으로 하는 가상의 실험을 생각해냈다. EPR은 입자 A에 대한 측정이 물리적으로 입자 B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EPR은 두 입자 중 하나에 대해서만 이루어지는 측정 행위가 〈물리적 교란〉을 일으킨다는 보어의 역공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두 입자의 성질이 서로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위치 같은 입자 A의 성질을 측정함으로써 입자를 교란시키지 않고도 B의 대응하는 성질을 측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EPR의 목표는 입자 B가 측정되는 것과는 독립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런 사실을 서술하지 못하는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보어는 한 쌍의 입자는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하나의 시스템(界)을 구성한다고 분명하게 반박했다. 즉 어느 입자를 측정하면 다른 입자도 측정하게 된다는 것이다."(378)


# EPR 논문 : 1935년,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이 함께 작성한 「물리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은 완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Can Quantum 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라는 제목의 논문


"EPR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이라는 두 가지 성질을 이용했지만, 데이비드 봄은 양자 스핀 하나만을 사용했다. 1925년에 젊은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헤오르헤 올렌베크와 사무엘 하우드슈미트가 처음 제안했던 입자의 양자 스핀은 고전물리학에서는 대응하는 개념을 찾을 수 없었다. 전자는 오직 두 개의 가능한 스핀 상태, 〈스핀-업〉과 〈스핀-다운〉의 상태를 가지고 있다. 봄이 수정한 EPR 실험에서는 스핀 0인 입자가 자발적으로 붕괴되는 과정에서 두 개의 전자 A와 B가 만들어진다. A와 B가 결합한 스핀은 최초의 입자가 가졌던 스핀 0이어야 하기 때문에, 한 전자가 스핀-업이면, 다른 전자는 반드시 스핀-다운이 되어야만 한다. 두 입자 사이에 물리적 상호작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충분히 멀리 떨어질 때까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날아간 후에 스핀 검지기로 개별 전자의 양자 스핀을 정확하게 같은 시간에 측정한다. 벨은 그런 전자쌍에 대해서 수행된 동시 측정의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관계에 관심이 있었다."(386-7)


"보어에 따르면, 측정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전자 A와 전자 B는 모두 어떤 방향으로 미리 정해진 스핀값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관찰되기 전에는 전자들이 동시에 스핀-업과 스핀-다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유령 같은 겹침 상태에 있다." "전자 A는 그것을 결정하기 위한 측정이 A와 B로 구성된 시스템의 파동함수가 붕괴될 때까지 스핀의 x-성분을 가지고 있지 않다가, 붕괴가 일어나고 나면 비로소 스핀-업이나 스핀-다운이 된다. 바로 그 순간에 얽힌 짝 B는 우주의 반대쪽에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방향으로 반대의 스핀을 가지고 된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은 비국소적인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입자가 먼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부터 순간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없고, 그 성질은 측정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국소적 실재론'을 믿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 모두 그런 실험의 결과를 설명할 수 없었지만, 벨은 두 스핀 검지기의 상대적 방향을 변화시켜서 교착 상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냈다."(388-9)


"실험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과학이론은 수정되거나 폐기된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그동안의 모든 시험을 통과했다. 이론과 실험 사이에는 어떠한 문제도 없었다. 벨의 동료들은 거의 대부분, 나이에 상관없이 양자역학의 정확한 해석에 대한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은 물리학이라기보다는 철학의 문제─〈바늘 끝에 몇 명의 천사가 앉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 같은─라고 생각했다." "벨 정리는 그런 상황을 바꿔놓았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에서 아인슈타인이 강조하던 양자 세계가 관찰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물리적 효과는 빛보다 빨리 전달될 수 없다는 국소적 실재를 시험해볼 수 있게 되었다. 벨은 아인슈타인-보어 논쟁을 실험철학이라는 새로운 장으로 끌어들였다. 벨의 부등식이 성립한다면,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옳은 것이 될 것이다. 부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보어가 승자가 될 것이다. 이제 실험실에서 아인슈타인 대 보어의 경쟁이 시작되었다."(391)


"1981년과 1982년에 아스페와 그의 동료들이 레이저와 컴퓨터를 포함한 최신 기술 혁신을 이용해서 벨의 부등식을 시험할 수 있는 정교한 실험을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나 수행했다." "벨은 1983년 아스페가 박사학위를 받을 때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여전히 몇 가지 의혹이 남아 있었다. 양자적 실재의 본질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모든 가능한 틈새를 고려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검지기들이 어떤 식으로든지 서로 신호를 주고받을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광자가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 검지기의 바양을 무작위적으로 바꾸어주었다. 결정적인 실험이 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지만, 그 이후로 몇 년에 걸친 추가적인 개선과 다른 연구로 아스페의 최초 결과가 확인되었다. 모든 가능한 틈새가 메워진 실험은 아무도 하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벨의 부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인정했다."(394-5)


"벨은 오직 두 가지 가정을 사용해서 부등식을 유도했다. 첫째는, 관찰자와 관계가 없는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입자가 측정되기 전에도 스핀과 같은 확실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국소성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빛보다 빠른 영향을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저 멀리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순간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아스페의 결과는 이 두 가지 가정 중에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느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인가? 벨은 국소성을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은 세계가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관측되지 않더라도 세계가 실재하는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990년 10월 뇌종양으로 62세에 사망한 벨은 〈양자이론은 일시적 처방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더 나은 이론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의 정리는 아인슈타인과 국소적 실재에 조종(弔鐘)을 울렸다."(394-5)


"이제 코펜하겐 해석과 양자역학이 동의어로 간주되었지만, 휴 에버렛 3세처럼 여기에 도전하는 이들도 간혹 있었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우주 바깥에서 우주를 관찰하는 관찰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신 외에는 그런 관찰자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우주는 영원히 수많은 가능성의 겹침으로 남아 있을 뿐 실제로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이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측정의 문제이다. 양자적 실재를 가능성의 겹침으로 서술하고, 각각의 가능성에 확률을 부여하는 슈뢰딩거 공식에는 측정 행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양자역학의 수학에는 관찰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이론은 양자 시스템의 상태가 관찰이나 측정에 의해서 가능성이 사실로 바뀌는 과정에서 갑작스럽고 불연속적으로 변하는 파동함수의 붕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에버렛의 다중세계 해석에서는 모든 가능한 양자 가능성이 수많은 평행 우주에서 현실적인 존재로 공존하기 때문에 관찰이나 측정이 파동함수를 붕괴시켜야 할 필요가 없다."(403)


"다른 해석의 등장과 양자역학의 완전성이 심각하게 의심스럽다는 지적 때문에 보어와의 오랜 논쟁에서 아인슈타인에게 불리했던 오랜 판결 역시 재검토되면서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명예를 회복했다. 영국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즈 경은 〈보어의 추종자들이 주장했듯이 아인슈타인이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심각하게 '틀렸다'는 것이 정말 사실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1900년 12월에는 고전물리학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고, 거의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스 플랑크가 우연히 양자를 만나게 되었고, 물리학자들은 아직도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5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친 〈의식적인 고민〉으로도 자신이 양자를 더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의 희곡작가이며 철학자였던 고트홀트 레싱의 말을 위안 삼아 마지막까지 노력을 계속했다. 〈진실에 대한 열망은 진실에 대한 확실한 소유보다 더 소중하다.〉"(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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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열대를 읽다 - 레비스트로스와 인류학을 공부하는 첫걸음 유유 고전강의 13
양자오 지음, 박민호 옮김 / 유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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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장 하버드에서 레비스트로스를 만나다


"십자군의 동정東征에서 대항해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근대사상은 끊임없이 시간과 공간에 있어 '인간'의 범위를 확대해 왔다. 공간적으로 보자면, 유럽인은 유럽 이외 지역에도 인간이 존재하며, 그 수가 유럽인을 초월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시간적으로 보자면, 고대 그리스 이전에도 인간이 존재했으며, 그 수가 한둘이 아니고 그 기간도 100~200년에 그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확장된 인류의 범위는 인류학 연구에서 새로운 문제를 촉발했다. 본래의 철학적 방법은 지나치게 서양인의 사고와 자각에 의존했고, 그리스 로마에서 기독교 전통 안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이 발견된' 인간은 철학의 대상에 포함시키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본디 전칭全稱의 특징을 지닌 인류학 개념은 점차 전통 철학의 탐구 영역 밖에 있던 '인간 현상'을 탐구하는 것으로 전환되었고, 새로이 개척된 인간의 영역이 서양인의 관심과 해석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44)


2장 인류학의 대전환


"문명 바깥에는 '야만'이 존재한다. 주류 분과 학문은 각기 여러 인종과 문명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고, 인류학의 연구 대상으로 '야만'과 '야만인'만을 남겨 두었다. 역사, 문학, 철학, 심리학, 사회학은 모두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그러한 분과 학문의 기준에서 야만인은 '인간'에 포함되지 않으며 인간 연구의 범위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인류학은 특별하다. 야만인은 물론 인간이다. 야만인을 인간 연구에 포함할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인간됨'의 최대공약수를 발견할 수 있으며, 제대로 인간을 정의할 수 있다. 야만인을 배제한다면, 우리가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최대 범위란 단지 '문명인'에 불과하게 된다. 심지어 그 문명인이란 특정한 몇 개의 문명에 속하는 인간으로, 진정한 인류와는 논리적 정의에서도 차이가 난다." "'황금' 또는 인류학이 밤낮없이 추구하는 '성배'란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전칭적' 인식을 말한다."(47-8)


"말리노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하나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 지역 사람들의 관점, 그들과 그들의 생활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확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인류학자는 과거의 관찰 태도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참여자'여야 한다. 관찰자는 현지인의 생활을 외부자의 관점으로 바라보므로 객관적 혹은 주관적 편견을 갖게 된다. 반면 참여자는 참여 학습과 현지인의 생활관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그들의 삶을 그들의 입장에서 인식할 수 있다." "(참여자의) 자격을 얻은 인류학자는 늘 두 가지 초점을 가진 안경으로 세상을 본다. 인류학자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에믹emic과 에틱etic이라는 서로 다른 초점거리를 동시에 지녀야 한다. 이 두 개념은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하는데, 각각 '내재'와 '외재' 또는 '집단 내부'와 '집단 외부'라는 의미다. 나아가 그것은 '특수성'과 '보편성' 간의 차이로 이야기될 수도 있다."(51-3)


"현대 문명, 공업화, 도시화는 전통적인 약세 문화를 지속적으로 파괴했고, 도처에서 옛 부락이 사라져 갔다. 이러한 상황은 인류학자에게 참여식 관찰을 통해 그와 같은 문화적 자료를 구출하고 지킬 것을 수시로 요구해 왔다. 그러나 결국 레비스트로스처럼 '보편적 인류 지식'이라는 과거의 몽상을 견지한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시선을 돌려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렇게 쌓아 둔 표본을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하려는가? 이런 표본을 정리해 인류에 관한 보편적 인식을 끄집어낼 수 없다면, 그토록 힘을 들여 그것을 수집하고 기록할 필요가 있는가?〉 레비스트로스는 한 가지 방식을 찾아냈다. 이 방식으로 인류학자들은 다시금 인류의 공통성을 직시하게 되었다." "당시 인류학자들은 문화적 특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했고, 모든 보편성의 주장에 의심을 품었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용감하고 영리하게 '구조'라는 새로운 관념을 제시해 보편성에 대한 인류학자의 관심을 확장시켰다."(69-70)


"이렇게 우리는 레비스트로스와 시 혹은 시학 사이의 첫 번째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시학에는 항상 신비하면서도 동시에 확고한 주장이 포함되었다. 우리는 시가 시인의 독특한 개성을 분출한 것이라 여기지만, 시에서 인류가 공유하는 심층적 경험과 만나기도 한다. 시인은 다른 사람이 한번도 사용한 적 없는 어구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방법을 찾아낸다. 그렇다면 시는 어떻게 개별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을 결합할 수 있을까? 언어 내부는 거의 무한정한 탄성彈性으로 가득 차 있지만, 늘 고정된 구조의 규칙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시가 기록하고 표현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시는 현실을 보여 주는 역사보다 더 진실하다. 그리고 이 진실은 보편적 경험, 이치, 규칙을 대단히 뚜렷하게 지시해 준다." "이것이야말로 레비스트로스가 방대한 민족지 자료를 분석하여 '구조'를 수립하려고 실행했던 바가 아니겠는가?"(70-1)


3장 슬픈 열대로 들어가다


"레비스트로스를 인류학자로 성장케 한 경험은 다른 사람들과 매우 달랐다. 말리노프스키 이래로 일찍이 영미 인류학자들이 받아들인 '통과의례'rite of passage는 원시 부락에서의 참여식 관찰이었다. 이는 인류학자가 되기 위한 일종의 학술적 성인식이었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달랐다." "레비스트로스에게 있어 은폐되고 헤아릴 수 없는 지식은 지질학,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의 교집합을 형성했다. 그는 자신을 이 교집합에 포함시켰다. 또한 인류학을 이 교집합에서 수행하려 했다." "그는 분명 현지 조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레비스트로스는 원주민에 대한 참여식 관찰 방식의 현지 조사를 통해서만 인류학자로 변모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 언어학자(야콥슨)를 알게 되고, 다른 언어학자(소쉬르)의 저작을 꼼꼼히 읽으면서 현지 조사 경험의 대응 방법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73-7)


"(언어를 랑그la langue, the language와 파롤la parole, the speaking로 구분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의 출현은 19세기에 갈수록 쇠퇴하던 언어학 연구를 해방시켰다. 레비스트로스는 소쉬르 이전 언어학이 처했던 곤경이 당시 그가 느끼던 인류학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 시절 언어학자들은 세계의 수많은 언어를 조사하고 연구하면서 풍부한 자료를 집적했다. 그러나 물밀 듯 밀어닥친 언어 자료는 점차 언어학자들을 질식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언어 자료를 어떻게 정리하고 연구를 진척시켜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소쉬르는 명확한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현상인 파롤 안에서 헤매지 말 것을 주장했으며, 현상이 제아무리 많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언어학의 핵심으로 이끌 수 없음을 강조했다. 서로 다른 언어의 구조를 정리하고 채택해 초언어적 거대 구조를 탐구하는 것, 즉 대문자적이고 궁극적인 랑그를 파악하는 것이 바로 소쉬르가 제기하는 바였다."(80-1)


4장 시처럼 모호한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하나의 스타일을 창조해 냈다. 그것은 윌컨이 말한 '단호하고 창조적인 청년 시절의 글'과 '힘찬 문학적 실험'을 인류학과 현지 조사에 연결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그와 같은 문학적 실험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소불위의 문장을 획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그는 글로 기록하기 어려운 특이한 현상,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정서와 이치 등을 분명하게 설명하고자 했다. 언어와 문장에 대한 깊은 신뢰,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기 위한 천착, 표현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 이것은 본래 시인의 태도이자 시적 추구의 태도다." "레비스트로스는 활자라는 시인의 무기와 시인의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그가 보고자 하는 것, 경험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경험과 모험으로부터 가져와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들려주고자 하는 것은 다른 인류학자의 그것과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89-91)


5장 개별 현상과 기본 구조 사이를 오가다


"실존주의는 existence(실존)라는 개념으로 being(존재)이라는 개념을 대체하려 했다. being이란 추상적인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 개인, 구체적 생활, 구체적 감각 경험을 배제하고, 모든 인간과 사물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며, 집단적 존재 원칙을 관철한다. 반면 existence는 구체적 개인이 구체적 삶에서 획득하는 구체적 감각 경험을 지향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 삶의 가장 구체적인 다종다양한 선택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철학이 해석하는 being은, 그것이 아무리 논리정연할지라도 일상의 구체적 상황과 조건에서 맞닥뜨리는 인간관계, 도덕, 삶과 죽음 등과 관련한 중대한 결정을 도와줄 수 없다. 실존주의는 구체적인 존재와 용감하고 결연하게 대면하려 한다. 실존주의는 기존 철학적 문제의 경중과 완급을 뒤바꿔 개인, 개별성, 현재, 변화하는 현상 등을 인간의 본질, 전체성, 영원, 불변의 원리 따위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더욱 사고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본다."(114)


"카뮈의 『이방인』은 추상적 본질적 규정에 의존하지 않은 채 느끼고 반응하는 인간을 묘사한다. 그것은 그만의 '실존'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그의 실존을 직시하려 하지 않고 홀대한다. 그들은 추상적 본질에 따라 그를 바라보고 통제하며, 자신의 실존을 포기하고 추상적 본질을 흉내낼 것을 그에게 강요한다. 카뮈가 볼 때 이는 부조리하다. '개성'은 응당 '공통성'보다 중요하다." "이렇게 '개성의 횃불'이 가장 크게 타오르던 시기에 레비스트로스는 프랑스 사상계에 나타나 냉정하게 실존주의의 열기를 잠재웠다. 레비스트로스는 재차 공통성을 내세웠고, 구조 개념을 통해 인간의 시선을 개인과 구체적 '실존'에서 공통적이고 체계적인 원리로 이끌었다." "구조주의의 약진은 실존주의가 일으킨 개인주의와 다원주의의 광풍을 수습했고, 사람들에게 〈인류 사회의 유희, 몽상과 망상은 개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무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떤 관념의 저장소에서 선택된 몇 가지 조합물〉임을 일깨웠다."(115-6)


# 구조주의의 양상

1. 영미의 구조기능주의 :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은 실타래처럼 얽혀 있으며, 서로 연관된 이 현상들을 조직해주는 '기능'을 발견하면,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를 아울러 발견할 수 있다.

2. 프랑스의 구조주의 : 변화무쌍한 언어 배후에 모든 언어를 관통하는 몇 가지 기본 구조가 존재하듯이, 변화무쌍한 인류 사회와 문화 현상은 몇 가지 기본 구조의 파생과 변화의 결과물이다.


"구조주의로 인해 후에 포스트구조주의가 생겨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포스트구조주의는 무엇인가?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절차를 뒤집어, 현상에서 구조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조 속에서만 현상을 볼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인간은 현상의 진면모에 가닿거나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구조의 개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구조의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왜곡 속에서 살아가야 할 숙명을 영원히 짊어져야 한다. 구조주의 언어학은 언어 내부의 구조를 발굴했지만, 포스트구조주의는 언어 속의 모든 단어와 의미 사이의 관계─보다 폭넓게 말하면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 사이의 관계─를 분석해 그것이 모두 언어의 구조에 의해 규제되고 결정된다는 점을 밝혔다. 우리는 구조가 발견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진리란 특정한 구조 속의 의미가 우리에게 나타난 것일 뿐이다. 특정한 구조의 견제를 받지 않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117)


6장 인류학자는 창조자다


"1955년 『슬픈 열대』가 출판되었을 때, 사르트르와 실존주의는 지성계의 최고봉을 점하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새로운 철학 체계를 수립했지만, 인간이 살아야 할 이유 그리고 인간이 과거에 습관적으로 의존해 왔던 바를 제거해 버렸다. 사르트르의 철학에는 고도의 비판성과 부정성이 있었고, 그 부정과 전복의 제거는 긍정과 구축과 창조를 멀리 뛰어넘는 것이었다. 사르트르와 카뮈를 포함한 여타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이 오랫동안 의지해 왔던 것들을 과감히 제거해 버렸다. 받침목도, 지팡이도, 손을 짚을 난간도 모두 빼앗아 버린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제공했던 과거의 모든 외적 조건을 무정하게 깨뜨렸고, 우리는 의지할 데 없는 삶의 낭떠러지에 외로이 서서 모든 불확실성과 위험에 직면해야 했다. 그들의 분석은 훌륭하고, 그들의 표현 역시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주장은 대부분이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도전이었다."(151-3)


"사르트르 자신도 그 엄혹한 시험을 늘 통과했던 것은 아니다. 스탈린 사후, 스탈린의 폭정이 알려진 후로도 사르트르는 계속해서 (코민테른 내 교조파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공산혁명을 신뢰하고 소련 공산당의 태도를 믿었다." "사르트르는 모든 것을 궁구한 끝에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주체성과 자유를 부여했다. 이제 사람들은 그의 철학이 듣기에는 좋지만 실상 허황되다고 느끼게 되었다." "레비스트로스의 주장과 이론은 이와 같은 시대 배경에서 인간이 그토록 초조해할 필요도, 모든 것을 스스로 모색하고 결정할 필요도 없음을 알려 주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와 실존주의에 거리낌 없이 대응했다. 〈미혹되지 말자. 인간이 어디 그렇게 자유로운가. 당신의 행위는 구조의 한계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이 자유로운 선택이라 여기는 것은 모두 구조적 해석이 가능하다. 소란 떨지 말자. 더 이상 자신의 초조함을 세계적 진리로 확대하지 말자!〉"(153-5)


"인류학을 수학이나 음악에 비유함으로써 레비스트로는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희극적으로 부각시켰다. 그는 인류학자는 수집가여선 안 된다고, 바로 창조자creator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집이라는 행위는 인류학자가 자신의 사회문화로부터 벗어나도록 해 주는 과정일 뿐이다. 다양한 사회와 문화를 관찰하고 그에 관해 수집함으로써, 인류학자는 자신이 몸담았던 사회와 문화로부터 벗어나 해방되어 인류 경험의 대양大洋으로 진입한다. 그 대양은 특정 문화나 사회가 아니라, 인류학자가 모든 안락한 문화와 사회에서 벗어난 뒤 스스로 창조해 낸 '초문화적'trans-cultural 이해 지평을 말한다. 그것은 구체적 문화 현상에서 뽑아낸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규율에 의해 구성된 공간이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다양한 문화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은 구조를 발견하기 위해 부득이 거쳐야 할 노정이지, 그 자체가 인류학 연구의 목적은 아니다."(159-61)


7장 대지식


"통합적인 묘사나 정의가 그러한 구성원이나 현상을 처리하기 곤란할 때, 우리는 별 수 없이 일일이 나열하는 방식으로 분류된 집단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묘사는 집단의 유사성을 다룬다. 묘사는 언어나 문자를 통해 그 집단의 공통점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리스트가 다루는 것은 집단 안의 차이성이다." "따라서 묘사와 리스트의 관계는 '원리'와 '현상'의 관계와 닮아 있다. 원리를 발견하면 우리는 현상을 공통된 원리의 묘사에 통합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상황에서 묘사가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재차 리스트로 돌아가게 된다. 첫 번째 상황은 사물의 차이가 거듭 환원될 수 없으며, 환원하려 하면 그 역할이 상실되는 경우다. 가장 좋은 사례가 바로 원소주기율표다. 100여 개에 달하는 화학 원소는 도표로 열거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원소로서 다시 분리될 수 없는 기본 물질로 제각기 독립성을 갖기 때문이다."(176-7)


"또 다른 상황은 이렇다. 즉 우리는 주관상 각 구성원의 독립성을 제거하는 것에 저항하고, 의도적으로 리스트를 통해 차이가 존재함을 깨달으며, 그것을 존중하려는 태도를 지닌다. 이 상황을 보여 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상단에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미군의 이름이 가득 새겨진) 베트남전 기념비이다. 이 거대한 리스트는 하나의 묘사, 하나의 거대한 분류 속에서 축소되고 상실될 뻔한 살아 숨쉬던 개체들의 개별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는 리스트의 특수한 의의이자 작용이다. 그것은 개체와 차이를 보존하는 동시에 두드러지게 한다. 열거식 리스트는 겉보기에 매우 가지런하고 형식상으로도 일정하다. 그러나 에코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운다. 그처럼 가지런하고 일정한 형식의 외관은 일종의 가상假像이다. 그 안에는 통합적 이성에 의해 수용된 길들여지지 않은 차이들이 숨겨져 있다. 리스트는 항상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이며, 리스트에 수용되지 않은 리스트 바깥의 것을 생각하도록 자극한다."(177-8)


"비록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가장 유명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구호는 본질로부터의 탈피를 요청하는 듯하지만,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사르트르의 철학은 시종 본질론에 머물러 있었다. 사르트르의 사상은 본질을 검토하고 비판하는 한편 이성을 분석한다. 그런데 분석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분류와 묘사를 해야 한다. 우선 문제와 분석 대상을 묘사한 연후에야 비로소 분석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석에 활용되는 그러한 묘사는 총체적 이성에서 나오는 묘사이기에, 그 자체로 이미 본질론적이다." "상대적으로 레비스트로스의 사상 모델은 '유비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서술한 시장처럼) 분류를 통해 '동류'同流의 현상을 한데 모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상도 서로 완전히 동일할 수 없음을 수시로 관찰하고 인식하여 단지 상호 간의 유사성에 의지해 그것을 한데 모아야 한다. 즉, 묘사가 아닌 리스트를 통해 현실의 현상을 처리하는 것이야말로 유비적이라 할 수 있다."(180-1)


8장 야생적 사고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사고가 '신석기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야만인의 숙고'와 함께 '수공예 장인식 연구 방법'을 제시했다. 이 둘은 서로 표현은 다르지만 지향하는 바는 동일하다. 분류와 분업에 반대하고 그 이외에 인류 지식을 조직하는 원칙을 제시한다." "그것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자신의 이론적 필요에 따라 재료와 도구를 직접 찾거나 만드는 작업 방식을 말한다. 현대 과학 이성의 분류 원칙에 따르면, 그러한 재료나 도구는 각기 다른 분과 학문에 속해 있으며 서로 다른 연구 성격을 띤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그러한 분류를 따르지 않았고, 그 자신의 '수공예적' 필요와 유비적 원칙에 따라 여기저기서 재료와 도구를 탐색해 독특한 지적 학문적 체계를 수립했다. 그것은 복제할 수도, 어떤 부류에 포함시킬 수도 없는 거대 이론이었다. 어떤 수공예 장인이 일생을 바쳐 손수 만들어 낸 공예품처럼, 그의 이론은 현대 학술 분업 체계에 편입시킬 수 없는 독특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186-8)


"〈뇌를 먹어 머리를 좋게 한다〉거나 〈간을 먹어 간을 보양한다〉는 전통 관념은 모두 전형적인 유비적 사유에 해당한다. 동물의 뇌와 간과 사람의 뇌와 간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한데 묶어 일련의 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확정, 중복, 예상 가능한 인과관계만을 인정하는) 과학 이성에 비춰 볼 때 얼토당토 않은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탐구하려 했던 총체적 의미, 구조 등은 부분적으로 엄격한 인과론으로 수립될 수도 없고, 그것으로 분석하거나 증명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는 증명할 수 없고 인과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총체적 의미와 구조의 존재 그리고 그 중요성을 부정하기를 거부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의미와 관계가 과학 이성의 분석이나 인과적 추론만으로 모두 설명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야만인, 신석기시대, 수공예 장인의 사유와 그것들이 세계를 보는 시각을 활용했고, 또 그것들을 수호하려 했다."(188-90)


"과학은 끊임없이 사실을 절단하는데, 많은 사실을 절단하고 분석할수록 더욱 예리해지고, 예리해질수록 더 많은 사실을 절단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예리해져 많은 사실을 절단할수록 과학은 본질로부터 점차 멀어진다. 반면 물고기나 벌처럼 과학의 성질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생존 조건을 파악하는 것, 즉 냄새, 깊이, 무게, 명암을 혼동하는 것이야말로 사물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해라 할 수 있다. 〈야만인의 신화나 상징〉도 그러하고 〈화가, 시인, 작곡가의 작품〉 역시 그러하다. 절단의 방식이 아니라 상반된 것을 혼동함으로써 수립한 〈가장 기본적이고 유일한 지식〉이야말로 바로 〈보다 고차원적인 지식〉인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특이하게도 문학예술을 문명 속에 보존된 야만의 특별한 일부라고 보았다. 야만, 야성의 비분석적 사유는 과학 이성으로 뒤덮인 환경에서도 문학이나 예술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201-2)


9장 신세계로 나아가다


"야만에 관한 설명 방식 중 하나는 그곳에는 전기도, 수도도, 장미 정원도 없고 '시詩'도 없다는 것이다. 즉 문명의 성취, 문명의 이기利器가 결여된 것이 바로 야만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와 20세기 초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이러한 대조를 뒤집었다. 야만에 있는 직관, 공포, 활력, 리듬, 자연스러움이 문명에는 전혀 없다고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묻는다. 현대 문명에서는 찾을 수 없는 야만의 요소나 특질이 정말 오로지 야만에만 있으며, 그것은 문명과 공존할 수 없는가?" "그는 야만의 요소와 특질 중 상당 부분이 인류 공통의 자산이라고, 다만 문명에서는 배제되어 보이지 않거나 식별이 어려운 여타 형태로 변형되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 세대의 임무는 일상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후미진 곳을 들추거나 겹겹이 쌓인 안개 속을 헤쳐 야만과 문명 사이의 공통된 부분, 즉 전체 인류에 속한 총체적 의미와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다."(209-10)


10장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 인류학의 주요 분과

1. 고고학

2. 체질인류학 : 과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고대의 유해와 체질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는 분야

3. 사회인류학(문화인류학) : 특정 사회와 문화에 관한 자료를 정리, 귀납, 분석, 해석하는 분야

4. 민족지 : 특정 사회와 문화에 관한 자료를 조사, 수집, 기록하는 분야


"본디 민족학은 모든 야만 문화를 서구인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진화론의 거대 계보 내에서 평가하고 자리 매겼다. 그들에 의하면, 인류는 막 탄생한 0점 단계에서 진화를 거듭해 현대 유럽에 이르러 100점 단계에 도달했다. 이 과정은 대단히 길고 연속적인 계보를 형성한다. 이에 기초하여 민족학자들은 자연스럽게 눈앞의 부락을 평가했고, 도구, 공예, 조직, 자연신에 대한 신앙 등 각종 척도를 사용해 그들의 진화가 어느 지점에 이르렀는지 탐구했다. 민족학이 민족지로 전환되면서 이러한 척도는 한쪽으로 밀려났다. 민족지는 문화의 내적 의미를 강조하며 모든 문화가 서로 다른 내적 의미 체계를 지녔음을 부각했고, 각 문화를 '진화 정도'에 따라 비교하는 태도를 배제했다. 민족지학자는 먼저 해당 문명의 내부로 최대한 진입해 그것을 상세하게 기록하고자 했고, 겉으로 드러난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 사상과 그것이 외적 행위와 맺는 관계 모두를 기술하려 했다."(235-6)


"모든 문화에는 저마다 자신의 체계에서 당연시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평소 당연시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민족지학자나 민족지 조사와 기록 훈련을 받은 인류학자는 〈현대 생활을 인류 생활의 보편적 규범이라 여기는〉 잘못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활동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그와 같은 길을 따라 더 먼 곳까지 이르렀다. 그는 모든 본성과 천성에 대한 논의는 '지식/권력'이 작동한 결과물이며, 가장 큰 권력은 진리를 구축하는 권력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볼 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지식을 진리로 격상시킨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에 부합하지 않는 현상을 배제하고 자신의 생활이나 습관을 진리로 드높여 차이를 제거하거나 억압한다. 레비스트로스는 푸코처럼 극단적인 입장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를 포함한 당시의 많은 인류학자가 인류 행위에 대한 기존의 보편적 준칙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246-7)


11장 이원 대립: 레비스트로스 사상의 핵심


"레비스트로스에게는 '생각하기 좋은 것'good for thinking이 가장 중요하다. 그가 볼 때 특정 문화의 감각적 선호는 내재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세계 분류로부터 결정된다. 카두베오족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신체 그림은 표층적인 시각적 즐거움보다는 심층적인 세계관과 이상理想에 의해 결정된다. 신체 그림의 도안은 그들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내포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진정 'good for looking'(보기 좋은 것)이 아니라 'good for thinking'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훗날 『신화학』에서 레비스트로스는 '날것과 익힌 것'의 기본 대립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우리에게 전한다. 특정 문화에서 어떤 음식은 먹을 수 있고 어떤 음식은 먹을 수 없다고 여기는 기준은 미각이 아니라 그 배후의 세계 분류 의식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음식이 사람들에게 맛있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good for eating'(먹기 좋은 것) 때문이 아니라 'good for thinking' 때문인 것이다."(258)


"우리는 정신분석학의 관점으로 돌아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원적 철학 분석 체계가 레비스트로스의 가장 근원적인 문화 관찰 방법의 배경이 되었다고." "이분법 또는 이원론은 사물을 두 측면으로 나누는데, 이 두 측면이 서로 맺은 다양한 관계는 레비스트로스가 가장 좋아하고 또 가장 잘 운용하는 문화 해석 양식이자 그가 보기에 가장 근본적인 문화적 이미지였다. 인류 문명의 오묘함은 어떻게 그 이원성을 운용해 두 측면을 서로 협력시키거나 대립시켜 보다 고차원적인 새로운 이원 관계를 형성하는가에 있다. 즉 대립 속에 존재하는 협력, 협력 속에 존재하는 대립이 서로 나선형을 그리며 상승해 보다 높은 차원의 이원적 조합을 이루는 것이다. 인류 문명의 모든 기제는 서로 층위가 다른 이원적 대상들의 운동에 포함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 이론의 핵심 역량인 동시에 치명적인 결함은 그 이분법적이고 이원로적인 개념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265-70)


12장 앞을 계승하고 뒤를 잇다


"특히 말리노프스키 이래 인류학은 객관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고,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인류학자의 현대적 편견을 억제하려 했다. 그리고 인류학자에게 멀리 떨어진 야만 문화를 '여실히' 기록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다른 태도를 취했다. 기억이 이후의 경험이 미치는 간섭을 배제할 수 없는 것처럼, 야만에 대한 기록 역시 현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아가 현대의 간섭을 의식하기 때문에, 우리는 도리어 그와 같은 야만 문화의 특수성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후대의) 드뷔시 음악이 일찍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쇼팽 음악의 의미를 도드라지게 했던 것처럼, 현대 문명은 야만인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객관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야만 문화의 가치를 부각시킬 수 있다." "이 역시 현대적 편견인가?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편견을 통해 야만에 가치와 존엄을 부여한 정의正義다. 그것은 '시학적 정의' 혹은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 할 수 있다."(295-6)


13장 먼 여행의 의의


"인류학자의 여정은 출발 전에 이미 결정된다. 대다수 인류학자는 미리 설정된 틀에 따라 탐사의 의의가 높다고 여겨지는 지역으로 떠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달랐다. 그는 여정 중에 억누를 수 없었던 감정을 진실하게 써 내려갔다. 외딴 곳은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다. 외딴 지역에 반드시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그는 그 지역에서 끊임없이 익숙한 현상을 발견했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으며, 심지어 자신을 저주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인류학자들은 자신의 기대가 어긋난 데서 오는 실망감과 허무함을 진실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레비스트로스의 내면에 이미 인류 문화를 하나의 총체로 이해하려는 신념이 줄곧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인류 문화의 구조와 총체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그 구조와 총체적 의미를 발견하고 증명하려 한 것이지, 그들의 문화에서 상이한 면모를 발견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308-9)


"레비스트로스는 고백한다. 진정한 인류학자는 첫 번째 현지 조사를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온 후 다시 현지 조사를 떠나지 않는다고. 한 번은 꼭 가 봐야겠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한 번의 여행으로 특별한 현상에 대해 가졌던 매혹에서 빠져나와 다양한 현상의 한계와 시시함을 냉정하게 꿰뚫어 보고 인류학의 진정한 목적을 발견했다면, 그는 앞으로 탐구해야 할 대상을 원래 살던 환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즉 그는 이제 자신이 살고 있는 익숙한 환경에서도 구조를 볼 수 있는 안목과 재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니 다시 여정을 떠날 이유가 있겠는가? 또다시 현지 조사를 떠나는 인류학자는 여전히 기이한 현상을 조사하고 기록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그 현상의 한계와 시시함을 간파하지 못한 사람이다. 반면 문화와 사회 현상의 유한성을 간파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구조인류학자가 될 수밖에 없다."(313-4)


14장 부단히 확대되는 구조


"레비스트로스 이후 라캉의 구조주의 정신분석이 등장했다. 라캉은 레비스트로스가 언어학에서 차용해 인류 문명을 분석한 방법으로 개인 심리와 정신을 연구했다. 라캉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의 정신은 고정된 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 구조는 외부에서 온 자극을 유형화하고 정리하도록 우리를 지배한다. 또한 그러한 작용은 임의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개별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라캉은 구조언어학과 구조인류학이 고찰한 집단 현상의 기초를 더 파고들었다. 그는 인간이 언어 구조와 문명 구조를 집단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각 개인의 내부에 그러한 정신 구조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 정신 구조가 그와 같이 유한한 구조 형식 속에서만 인간이 감관과 심리 정보를 다루도록 제한하기 때문에 인간과 외부 세계의 관계 양상은 무한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류는 오로지 유한한 형식하에서만 사회와 문명을 구축할 수 있다."(330)


"레비스트로스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예로 푸코의 구조주의 지식사智識史가 있다. 푸코는 구조주의의 핵심 주장을 받아들여 〈관계가 어떠한 개별 구성원이나 개별 요소보다 중요하다〉고 보았고, 이러한 원칙을 통해 지식을 재정리함으로써 기존과는 구별되는 지식사를 수립했다. 그는 분리와 구분의 방식으로 지식을 보지 않았다. 즉 그는 철학, 문학, 예술, 역사 등의 분과를 구분해 연구하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지식 사이의 관계에 주목했고, 지식의 생산에서 성립까지를 결정하는 구조의 연구에 가치를 두었다. 푸코는 이러한 연구를 '지식고고학'이라 불렀다. 그는 칸트, 헤겔, 피히테 등 철학자를 시간순으로 나열해 사상의 변화를 고찰하지 않았다. 마치 고고학자가 유적지를 발굴하듯, 하나의 층위에서 발견된 모든 사물을 하나로 연결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분석을 거쳐 푸코는 서로 다른 지식 간의 관계를 결정하는 요소가 바로 '권력'임을 밝혀냈다."(330-1)


# 그 외 : 롤랑 바르트의 문학구조주의(문학작품이란 심층적인 언어 문법과 문화 문법 간의 상호 교차의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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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유유 서양고전강의 5
양자오 지음, 조필 옮김 / 유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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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권과 분권 사이에서 계속된 실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설계하고 배치한 정치 제도 가운데 핵심 내용 하나는 '각 주 분권제'입니다." "영국의 상하원은 귀족 제도의 유산으로, 국왕의 지위를 상징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하원은 국민이 투표해 선출하지만 상원은 명예직으로 임명됩니다." "그러나 미국의 상원과 하원은 연방 정부와 각 주의 권력을 나누기 위해 안배된 것입니다. 하원은 인구수에 따라 선출하는데, 전 미국 3억 인구를 400여 개 선거구로 나누고 선거구마다 하원 의원을 한 명씩 뽑습니다. 모든 하원 의원은 동등하게 국민의 뜻을 대표합니다. 그렇다면 상원은 어떨까요? 상원에는 모두 100개의 자리가 있습니다. 50개 주에서 각 주마다 두 자리씩 할당됩니다." "땅이 넓고 인구가 많고 경제가 발달한 큰 주를 위해 작은 주가 자기의 이익을 희생하지 않도록 한 거지요. 연방법은 상원의 인준을 받아야 법률이 됩니다. 따라서 큰 주는 작은 주의 반대를 무시하고 법을 만들 수 없습니다."(36-8)


# 선거인단 제도 역시 각 주 분권의 원칙 아래 유지되고 있다.


"민주주의 원칙을 가진 연방제에 기반하고 있는 미국은 또 다른 방향에서 국가의 정의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국가를 조직할 때 변화를 가함으로써 (아래층이 위층에 예속되어 있던) 일반적인 국가와 국민의 관계에 충격을 준 겁니다." "미국의 제도는 다른 종류의 조직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조직 원리도 철저하게 뒤집어 놓았습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국민은 국가를 이루는 형식을 결정합니다. 권력의 분배와 지배가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이루어집니다. 각 지방의 주민 회의에서 어떠한 형태의 주 정부가 필요한지, 어떤 사무를 주 정부가 관할하도록 할지, 또 어떤 사무는 주 정부에서 개입하거나 침범할 수 없는지를 결정합니다. 각 주의 주 의회와 주 정부는 연방정부의 권력 범위와 권력 집행 방식을 결정합니다. 이러한 국가는 미국 이전에는 이론으로만 있었지 현실 세계에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45-6)


"대통령제는 미국 민주주의의 특수한 발명품입니다." "연방 정부는 직접 미국 시민을 통치하지 않고, 또 시민이 선출한 대표가 연방의 권력을 행사하도록 해서도 안 됩니다. 연방 대통령의 역할을 기본적으로 각 주 정부 사이의 조정자이고, 연방 정부의 역할은 각 주 정부에 봉사하는 것이지 미국 시민을 통할統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연방 대통령의 역할은 어쩔 수 없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대외적으로 미국의 대표이고 연방군을 지도할 책임이 있는 데다 주 사이의 업무를 총괄하는 사람입니다. 각 주가 여러 가지 사정상 쉽게 인식을 공유하지 못하면 현실적으로 대통령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연방의 조직력을 이용해 그 결정이 관철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설계가 어찌 됐든, 대통령이 된 사람의 태도가 어떻든, 미국 연방이 존재하고 운영되며 발전하려면 대통령의 권력을 갈수록 강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48-9)


"연방에는 연방 헌법이 있고, 각 주에는 각 주의 헌법이 있습니다. 또한 각 주의 독립적 권력 범위에 속하는 수많은 법률과 제도가 규정되어 있어서 연방은 이를 침범할 수 없습니다." "각 주를 독립된 단위로 보는 분권제는 역사적으로 엄청난 역할을 했고, 미국이라는 방대한 규모의 나라에 민주주의를 적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연방과 각 주 사이에는 복잡하게 밀고 당기는 집권集權과 분권 관계가 존재합니다. 상대적으로 주 정부와 그 아래 있는 시나 카운티 정부 사이에도 비슷한 집권과 분권의 변증 관계가 있습니다. 분권 덕분에 민주주의가 실현되어 모든 시민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집권 덕분에 국가는 그 방대한 규모를 유지하면서 붕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0여 년간 미국은 집권과 분권 사이에서 실험을 지속해 왔습니다. 실험의 성패는 미국의 성쇠뿐 아니라 민주주의 제도의 효과와 타당성을 결정했습니다."(55-8)


2 미국에 온 두 프랑스인


"미국이 발흥하기 전 유럽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역사성을 띠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의 뇌리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은 어떤 현실의 국가나 정권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와 로마 초기의 공화 제도였습니다. 역사에서 얻은 지식에 따라 유럽인은 민주주의가 작은 정치체에만 적용될 수 있다고 보편적으로 믿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납니다. 이어서 미국 헌법도 나타나지요. 북미 신대륙에서는 유럽의 상식에 어긋나는, 상대적으로 방대한 토지와 많은 인구를 민주적 방식으로 조직하고 다스리고자 하는 정치 실험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토크빌이 책을 쓴 1830년대에는 대규모 민주 공화제가 가능하다는 미국 정치 실험의 성과가 기본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류는 정치 문제를 두고 반드시 미국의 경험을 철저히 새롭게 생각해 봐야만 했습니다."(63-6)


"토크빌이 보기에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 사이의 선택은 이미 흘러간 역사가 됐습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두 가지 민주주의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혼란으로 점철되고 폭력과 비이성이 충돌하는 민주주의냐, 아니면 조금이나마 질서와 도덕이 있고 이성적으로 인식하고 안배할 수 있는 민주주의냐." "토크빌이 쓰고자 한 것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미국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프랑스인에게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미국의 민주주의 경험을 기본으로 삼아 프랑스인이 거기에서 배우도록 돕고 미래에 반드시 가야만 하는 민주주의의 길을 준비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토크빌이 책을 쓴 진정한 의도이고, 우리가 200여 년 뒤인 지금 이 책을 읽을 때도 여전히 기억해야 하는 전제입니다."(88-90)


3 미국의 두 가지 키워드 이해하기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쓰고 출판한 시기는 19세기 초이므로 당시 주류였던 '진보 사관'을 반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토크빌 또한 인간이 끊임없이 진보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가장 뚜렷한 진보의 표지는 평등이었습니다. 인간이 진보한다는 믿음을 가진 것은 그도 당시 절대다수 유럽인과 마찬가지였는데, 진보의 초점을 평등에 맞춘 것이 그만의 독특성이었습니다. 사실 토크빌은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가치관을 제시한 것입니다. 불평등은 좋지 않다, 불평등은 원시적이고 낙후한 것이다, 평등만이 진보다, 이로 인해 인류는 끊임없이 원시적이고 낙후한 불평등한 상태에서 진보한 평등의 상태로 점차 나아가는 것입니다." "당시에 유행한 진보 사관이 없었다면 토크빌의 논증은 발 딛고 설 수 없었을 테고, 의심받고 논파되기 십상이었을 겁니다. 토크빌의 책이 당시 진보 사관을 믿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96-9)


"토크빌의 기본 관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귀족은 기본적으로 토지가 희소해 발생한 경쟁 상황에서 나타난, 토지를 확보하고 장악하는 자였습니다. 귀족의 토대는 토지에서 나온 이익이었지요. 토지가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충분히 많은 토지를 확보하고 장악하는 사람은 땅이 없는 사람에게 땅을 빌려주고 그가 농사지어 얻은 성과를 앉아서 편히 받아먹습니다. 이렇게 부를 모은 사람은 그 부를 권력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까지 얻습니다. 귀족의 권력은 그 뿌리를 파헤쳐 보면 토지, 정확히는 토지 부족에서 온 것입니다. 신대륙에서는 이렇게 토지로 인한 귀족이 생겨날 수 없었습니다. 토지가 너무 많고 컸으니까요." "미국은 토지 귀족이 없는 상황에서 세워진 나라이고 건국 후에도 일정 시간 동안,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쓰고 있을 때까지도 토지가 부족하다거나 토지를 빼앗는다거나 토지 자원을 독점한다든가 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108-9)


"두 번째 키워드는 청교도입니다. 청교도의 종교 신앙과 교육적 태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아이들이 정확한 행동, 그러니까 규칙을 잘 따르고, 교리문답을 암송하며, 예배법을 익히도록 하는 데에서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내면의 진실한 신앙을 더욱 중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겉으로 꾸민 행위나 의식에 극도로 민감했습니다. 그들은 교육이 내면에 파고들어서 아이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근본적인 가치관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한 지 불과 16년 만에) 신학교를 세운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북미 대륙에 온 사람들이 청교도가 아니라 생활이나 경제적 동기로 온, 남미 대륙의 식민 침략자 같은 이들이었다면 그들은 신대륙에 머물려고 고집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울러 청교도들이 그토록 강력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자신들의 무리를 유지하고, 자신들만의 강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겁니다."(117-8)


4 현실 속의 민주주의


"은근함, 실용성, 과장하지 않음, 뽐내지 않음 같은 청교도의 기본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토크빌이 말한 (미국의) 민주주의의 특색입니다. 종교 이민자가 세운 뉴잉글랜드에서는 큰 교회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규모가 큰 교회 자체가 소수인데, 그마저도 훗날 가톨릭교나 영국 국교회에서 지은 교회입니다." "북미 식민지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없습니다. 그러나 토크빌은 이렇게 일깨웁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채가 사라지면 그와 함께 비참한 생활도 사라진다.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채를 지닌 프랑스 사회에는 빅토르 위고가 쓴 『레미제라블』이 공존한다.〉 광채와 비참은 서로 손을 잡고 함께합니다. 미국의 민주주의 사회를 프랑스의 귀족주의 사회와 비교하면 광채가 줄어든 만큼 비참도 줄어듭니다. 귀족의 영광은 없지만 귀족의 발아래 밟힌 비참한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도 없습니다."(127-9)


"토크빌은 일방적으로 민주주의를 찬미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상반된 양쪽 관점의 균형을 맞춥니다. 그가 비교하는 내용을 보면 우리는 토크빌이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평가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중간의 좋음과 선량을 만들어 내면서 가장 탁월한 부분과 가장 사악한 부분을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가는 토크빌 자신이 귀족 가문 출신이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귀족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즐거움을 누린 사람이었고, 이 신분을 지니고 반세기나 혼란스러웠던 프랑스 사회를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민주주의는 그들이 누렸던 화려한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없앨 테지만 상대적으로 평등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결국 민주주의는 비교적 정확하고 수지타산이 맞는다고 본 거지요. 민주주의는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섭리적 사실'이라고 생각한 겁니다."(133)


5 두 가지 자유를 구분하다


"프랑스 대혁명은 악독한 징세인의 폐단과 정부의 불가사의할 정도로 엄청난 무능에서 비롯됐지만 그러한 혁명의 열정 속에는 또 하나의 갈망, 곧 유능한 정부, 그럴듯한 정부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 갈망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구호로 수용되지 않고 무시됐지만, 당시 현실에서는 자유, 평등, 박애와 똑같이 중요했습니다. 혁명의 충동, 집단적 열정이 격앙되는 와중에 사람들은 자유, 특히 고도의 개인적 자유와 유능한 정부라는 이 두 가지 요소가 기본적으로 모순된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유능한 정부는 먼저 공공질서를 만들어내야 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개인 행위를 구속함으로써 개인 행위가 집단이 추구하는 목표에 합치되도록 요구합니다. 집단에 유리한 일이 반드시 개인에게도 유리하리라는 법은 없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집단의 이익을 창출할 수 없습니다."(149-50)


"토크빌은 자유를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자연적 자유natural liberty, 다른 하나는 시민적 자유civil liberty, 또는 공민적 자유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발생한 모순과 충돌이 대단히 컸던 까닭에 프랑스인은 그들의 구호 중 자유를 자연적 자유, 곧 구속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하는 자유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혁명 전의 사회에서 수많은 불합리한 제한과 압박을 받았고, 혁명으로 이 제한과 압박을 깨부쉈으므로 그 결과 모두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토크빌은 미국은 자유로운 국가이지만 미국인이 자기 국가에서 누리는 자유는 결코 자연적 자유가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미국인의 자유는 처음부터 영국인에게서 쟁취한 것, 곧 시민적 자유, 공민적 자유라고 본 것입니다." 청교도 윤리를 내면화한 미국인들은 자기 멋대로 하는 자연적 자유가 아니라 엄격한 도덕의식의 제한과 관리를 받는 자유를 원했습니다.(154-5)


6 섬세한 삼권 배치


"미국이 독립전쟁에 이긴 걸 두고 감탄할 필요는 없다고 토크빌은 말합니다. 핵심을 놓쳐선 안 된다는 거지요. 미국인에게 감탄할 대목은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후라고 말합니다. 영국인에게 맞서 독립전쟁을 치를 때 13개 주는 임시로 합쳐서 외교와 군사 영역에서 함께 행동합니다. 전쟁에서 이겼고, 적은 사라졌습니다. 이젠 더 이상 뭉쳐야 할 이유가 없었지요. 그러나 지혜롭고 용기 있는 미국인은 국가를 세운 지 10년 후 국가 성립의 기본 원칙을 전면적으로 재고하기로 결정합니다. 국가의 대강령과 가장 중요한 법을 다시금 설계하기 위해 잠시 멈추어 2년이라는 시간을 씁니다. 당시 북미에서 가장 똑똑한 두뇌, 가장 정직한 인격을 모아 미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합니다. 그 내용을 13개 주에 전달하고 일일이 투표를 거쳐 통과시킵니다. 이 작업의 의미는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능가한다고 토크빌은 주장합니다."(181)


"삼권의 구조를 다루며, 토크빌은 책에서 가장 먼저 헌법에 대해 말한 후 삼권을 나누어 이야기합니다. 처음으로 논하는 것은 사법이고 그 다음은 입법이며 마지막으로 행정을 다루는데 이 순서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간단하고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미국에 가서 조사하려 한 것이 사법에 속하는 감옥 행정이므로 당연히 미국 사법에 가장 익숙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심층적인 이유는 토크빌이 삼권 가운데 사법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가장 특수한 정신은 법에 의해 통치하고 관리한다는 정신이므로, 위계 또한 법률이 가장 높고 모든 법률 중에서도 헌법이 으뜸이라는 것이지요. 주의할 것은 헌법은 진리가 아니므로 수정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만 정해진 순서에 따라 수정하기 전까지 헌법은 국가 정치상의 진리입니다. 이는 또한 매우 중요한 자리매김으로, 예전의 인류 정치사에는 이런 경우가 없었습니다."(185-6)


"이론상 의회는 언제든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가 쥐를 희롱하듯이 불시에 대통령을 희롱하면서 '엄중한 행위'에 걸릴 만한 온갖 이유를 대 대통령을 번거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 사이에서 움직이는 핵심 요인이 바로 정당입니다. 미국 헌법은 숱한 문제를 낳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헌법상 규정하지 않은 중요한 문제 중 큰 부분을 정당이 처리합니다. 예컨대 행정권과 입법권은 헌법상 날카롭게 대립합니다. 이 둘의 관계는 수많은 충돌 가능성을 품고 있지요. 그러나 미국의 실제 민주주의 운용에서는 그렇게 많이 충돌하지 않습니다. 정당이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중재하고 조정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과 집권당의 밀접한 이익 관계는) 헌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현시에서 권력 분배에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192-3)


"미국의 민주주의는 청교도 전통에서 발원했습니다. 하지만 민주 제도가 건설된 후에는 점차 한 걸음씩 청교도 전통 외의 것으로 독립해 발전했습니다." "민주주의가 미국에서 세워진 것은 여러 가지 역사적 우연에 기대고 있지만 민주주의가 다른 제도와 차별되는 지점은 바로 이 민주주의가 모든 인류가 설계한 정치 제도 중 자기 수정 능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원래 고도로 동질적인 성격을 가진 집단에서 생겨났지만, 민주주의는 다원적인 발전 가능성이 열려 있고, 다원적인 사회에 맞추어 변화합니다. 사회가 다원화할수록 직접 민주주의는 공감대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민주 제도는 점차 대의적인 성격이 강해졌고, 대의를 통한 정책 결정의 범위도 갈수록 넓어졌지요. 이러한 내재적인 수정은 민주주의의 일부입니다. 미국에서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그 범위를 넓혔고, 넓힐 때마다 민주주의 내부의 시스템도 조정됐습니다. 이것은 미국 역사에서 무척 중요한 부분입니다."(194-5)


7 사회학적 시각


"『미국의 민주주의』 2권에서 토크빌은 평등과 관련된 두 가지 문제를 설정하고 분석합니다. 첫 번째 문제는 평등과 민주주의에 어떠한 사회 기초가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폭과 둘레는 바로 사회 전체이고, 따라서 민주주의에는 특정한 사회 기초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 좀 더 큽니다. 정치에서 민주 제도를 채택하면 사회에 어떠한 효과를 만들어 낼까요? 어떤 사회가 생겨날까요? 토크빌의 분석은 여전히 미국과 프랑스를 대조하며 진행됩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관점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곧 '민주주의는 혁명에서 온다'는 관점입니다. 말하자면 혁명이라는 수단으로 원래 있던 비민주적인 정치 구조를 깨뜨린 후에야 그 공간을 민주주의로 대체할 수 있고, 혁명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는 관점이지요." "반면 토크빌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미국이 민주주의 사회가 된 것은 미국에서 혁명이 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08-10)


"미국은 프랑스 식의 대파괴, 대소동을 거친 후 민주주의를 이룩한 게 아닙니다. 미국이 건국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겪은 의혹과 전복은 영국 식민지와 관련된 사항이었습니다. 영국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미국인 자신이 갖고 있던 이념과 신앙은 동요하거나 파괴되지 않았고, 되레 강화됐습니다. 공동의 적과 맞서면서 단결 의식이 더 강해졌고, 이 강화된 공동 이념과 신앙에 의지해서 힘을 모아 승리를 얻어 냈습니다." "이처럼 미국인의 표면적인 자유 뒤에는 더 깊고 강력한 공동의 신앙이라는 제약이 있습니다." "단순히 기원을 살펴보면 민주주의가 성립하는 조건은 모두가 상당히 공감하는 공통된 신념을 갖는 겁니다. 개신교는 당시 미국인이 논쟁할 수도, 논쟁할 필요도 없는 공통의 기반이었습니다. 그 사회의 공감대의 범위가 넓었기 때문에 민주주의 실험을 할 유한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겁니다."(210-1)


"토크빌은 이미 언어가 사고의 도구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말하는지가 직접적으로 그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머릿속에 어떤 언어를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그 생각을 하는 거라고 여겼습니다. 사람은 언어가 없으면 사고를 할 수 없습니다." "1830년대에 토크빌은 이미 언어와 사고의 긴밀한 관계를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를 분석하고, 그 과정에서 미국인의 다른 생각과 논리, 사고방식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영어가 미국에 건너간 뒤 변화가 늘어나고 그중 '비기능성'을 띤 변화가 많다는 점을 알아챘습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환경에 처해 새로운 현상을 묘사하고 새로운 사물에 대해 논의하려다 보니 언어에 새로운 부분이 추가됐다는 것입니다. '비기능성'의 변화는 변화를 위한 변화입니다. 곧 변하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지만 미국 같은 사회에서는 변화한 것이지요."(228-30)


"언어와 문자는 집단 규율이 있고 규율을 세우고 양성하는 기제도 있습니다. 평등과 민주의 효과 중 하나는 고정된 전범이 사라진다는 겁니다. 원래 모든 사람이 꼭 읽어야 하거나 학습해야 하는 언어와 문자의 본보기가 없어지거나 또는 원래 본보기가 존재한다 해도 그 규범의 강도가 크게 약화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100여 년 전 미국에서 나타났습니다. 토크빌의 말을 빌리면 이런 상황이 됐습니다. 〈모든 세대의 미국인은 새로운 사람이고 새로운 종의 사람이다. 그들은 옛사람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 전범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세대는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으므로 진정한 구속력을 가진 정전正典, canon이란 것은 사라졌다. 정전이 없으니 내면화되고 일치된 언어 규율이 없어지고, 언어와 문자를 운용하기 위한 연구도 없어지며, 과거 유럽의 정확하고 연구된 언어, 문자와 문학도 없다.〉"(232-3)


8 모든 곳에 미치게 된 '평등'의 효과


"『미국의 민주주의』  2권에서 토크빌은 평등이 왜 자유보다 중요하며 어째서 평등이 사람 마음 속에 자유보다 더 높은 열정을 자극하는지 설명합니다. 이 장에서 대혁명 때 그토록 유명하고 그토록 쩌렁쩌렁 울렸던 구호를 회상하는 내용을 읽노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큰 문제가 떠오릅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대혁명의 구호 중에 '박애'는 어디로 갔는가?" "박애의 문제는 인간의 마음을 위반하는 고답적인 평등의 이상을 가정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행인을 형제로 여기는 것은 선하고 고귀한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상에 불과합니다. 현실에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은 행인을 형제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형제를 행인처럼 보는 겁니다." "대혁명의 교훈은 보편적인 사랑인 '박애'를 보편적인 잔혹, 평등한 잔혹으로 왜곡하고 변형시켰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현실적 능력을 뛰어넘는 부분을 없애고 고고한 이상을 평지로 끌어내리면 평등만이 남아 모든 사람이 같아집니다."(244-6)


"토크빌은 200여 년 전에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각기 다른 모든 영역을 평준화하면 원래 있던 높고 낮음의 구분이 사라져, 구사회에서 볼 때는 높은 곳에 있던 정치 영역이 추락하고 상업, 제조업, 교육 등의 업무와 뚜렷한 차별이 없어지면서 정치 영역이 우수한 인재를 얻을 수 없게 된다고요. 한 사회에서 특별한 재능이 있고 높은 성과를 거둔 사람은 우선적으로 정치 영역에 들어가서 재능을 이용해 높은 지위를 얻고자 하는데, 민주주의 상황 아래의 정치 분야는 이러한 유인 요소가 사라져 좋은 인재를 흡수할 수 없습니다. 토크빌은 200여 년 전에 이 점을 지적했습니다. 경제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은 재능과 품격 면에서 정치 영역의 사람을 신속하게 추월한다고요. 그의 화법은 실로 악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민주적인 사회에서는 보통 자기 재산을 처리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어야 국가의 재산을 처리할 수 있다.〉"(256)


"토크빌은 특히 인간이 물질을 추구하는 현상을 중시했습니다." "민주적인 사회에서는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고 기회를 제한하는 어떤 구조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재산을 늘리고 쌓을 권리와 기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평등한 사회에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은 사라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분 차이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귀족, 평민, 승려, 장인, 농부 등이 모두 같아집니다. 그래서 사회의 지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재산이 많고 적음에 따르게 되는 경향을 피할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부러움을 받고 존경을 얻을 수 있는데, 이는 평등한 사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불평등이 됩니다. 민주적인 사회에서 사람들의 신분은 여전히 다릅니다." "형식적인 평등 아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지위 고하의 구분, 온갖 시기와 부러움, 차별 대우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재산이 신분을 대신해 사회에서 지위 고하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됩니다."(259-60)


"평등은 고정된 범위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사람이 정치권력상 평등한 대우를 획득하면 이러한 평등의 경험은 반드시 다른 생활 영역까지 확장되므로 평등은 고정된 범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평등은 그 발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평등의 확장력은 일단 긍정적 가치가 되고 나면 모든 불평등에 설명과 해설을 요구하게 합니다. 더 이상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되는 거지요. 이것이 평등이 담고 있는 개조와 진보의 운동 에너지입니다. 평등은 과거에는 평등하지 않거나 불필요하다고 여기던 수많은 일에 끊임없이 도전합니다. 평등의 보편성은 갈수록 높아집니다. 토크빌은 보지 못했지만 우리 시대에는 이미 전 인류의 범주에서 평등해야 한다는 주장이 세워졌습니다. 바로 '인권'입니다. 인권은 사람이라면 가져야 할 기본 권리이며, '사람'이라는 사실 말고는 어떠한 자격 제한도 없습니다. 인권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합니다."(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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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Ⅱ - 문명의 수수께끼를 풀다 1915~1939
피터 게이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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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문명의 해부학자 1915~1939


8장 전쟁과 인간


"메타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심리학 가운데 의식을 넘어서는, 또는 프로이트의 표현대로 하자면 의식 '뒤'에 있는 부분을 해명하려고 계획된 것이었다." "프로이트가 1915년에 '억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방식을 따르자면, 이 말은 주로 본능적인 소망을 의식에서 배제하기 위해 고안된 다양한 정신 활동을 뜻한다. 프로이트는 물었다. 애초에 왜 억압이 일어나는가? 충동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사실 쾌락을 주는 일이다. 따라서 정신이 만족을 주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이상해 보인다. 프로이트는 그 답을 자세하기 밝히지는 않지만, 답은 정신을 전장으로 보는 그의 입장에 함축되어 있다. 예상되는 쾌락 가운데 많은 수는 고통으로 변한다. 인간 정신은 한 덩어리로 이루어진 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은 자신이 몹시 원하는 것을 동시에 몹시 경멸하거나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다양하게 나타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런 내적 갈등의 가장 분명한 예다."(30-4)


"억압의 원초적 형태는 유아의 삶의 초기에 생기는데, 이후에 가지를 뻗어 나가며 그 검열 작업 속에 표현을 거부당하는 충동들만이 아니라 그 파생물들도 포함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정력적인 작업이 계속 반복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억압은 끊임없는 에너지의 소비를 요구한다.〉 억압된 것은 지운 것이 아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옛 속담은 틀린 것이다. 억압된 자료는 접근 불가능한 무의식의 다락방에 저장되며, 이곳에서 계속 번성하면서 만족시켜 달라고 다그친다. 따라서 억압의 승리는 기껏해야 일시적이며, 늘 의심스러운 것이다. 억압된 것은 대체물 형성 또는 신경증 증상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인간이라는 동물을 괴롭히는 갈등이 기본적으로 완화불가능하고 영속적이라고 본 것이다. 프로이트는 메타심리학에 관한 자신의 세 번째 논문인 〈무의식〉에서 그런 갈등이 벌어지는 무대의 지도를 그런대로 자세하게 그렸다."(34-5)


"무의식 이론은 일반 심리학에 대한 프로이트의 가장 독창적인 기여로 꼽힌다." "프로이트는 진짜 무의식적인 것과 그 순간에 우리 정신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명확하게 구별하기 위해 《꿈의 해석》에서 이미 했던 구분, 즉 전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을 다시 꺼내들었다. 억압된 생각과 감정, 나아가서 충동들을 그 원시적 형태로 보존하고 있는 곳은 무의식, 즉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막론하고 가장 폭발력이 강한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는 지저분한 창고였다. 프로이트는 충동이 매개 또는 위장 없이는 절대 의식이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역동적인 무의식은 이상한 곳이다. 소망들이 꽉 차서 넘칠 것 같으면서도, 의심을 환영하지 못하고 자연을 참지 못하고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무의식은 직접적인 조사로는 접근 불가능하지만, 정신분석가는 곳곳에서 무의식의 흔적을 발견한다. 프로이트는 빠른 속도로 써내는 메타심리학 논문에서 무의식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확실히 못 박아 두려 했다."(35-7)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루어진 대학살은 전장의 실제 전투에서뿐만 아니라 신문 지상의 호전적인 논설에서도 인간의 잔혹성에 관한 가혹한 진실을 보여주었으며, 프로이트도 그것을 보면서 공격성에 더 높은 지위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1915년 겨울 학기에 빈 대학에서 강연을 하면서 청중에게 문명화된 세계에 확산되고 있는 야만성, 잔혹성, 허위를 생각해보고, 기본적인 인간 본성에서 악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1914년 전쟁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공격성의 힘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쟁은 분석가들이 공격성에 관하여 그동안 해 오던 이야기를 확인해주었을 뿐이다." "프로이트는 훗날 그런 개념이 처음 정신분석 문헌에 나타났을 때 그 자신이 방어적으로 그런 충동을 거부했다고 회고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덧붙였다."(85-7)


"프로이트가 지체한 데에는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하필이면 아들러가 남성적 저항이라는 개념─프로이트의 훗날의 정의와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을 주창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선뜻 파괴적 충동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보다 앞서 리비도가 삶 못지않게 죽음도 목표로 삼는다는 점을 밝혔다는 융의 주장 또한 프로이트가 그것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소가 되었다. 또 그가 주저한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주제가 자신의 공격적 태도에 맞서 자기 보호적인 방어 작전을 구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공격성을 근본적 충동으로 보는 것이 인간 본성을 모독하는 낮은 평가라며 거부한다는 이유로 현대 문화를 비난했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주저하는 태도 또한 그 자신의 부인(否認)을 다른 사람들 탓으로 돌리는 투사의 한 조각처럼 읽힌다."(87-8)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보편적 에너지로 희석할─그는 융이 그렇게 했다고 비난했다─의도는 전혀 없었다. 또 리비도의 자리에 보편적인 공격적 힘을 대신 앉혀놓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그것이 아들러의 치명적인 실수라는 것이 프로이트의 주장이었다. 프로이트는 《쾌락 원칙을 넘어서》에서 융의 '일원론적' 리비도 이론을 분명하게 집어내, 이것을 자신의 '이원론적' 구도와 대비하고 비판했다. 프로이트는 임상적, 이론적, 미학적 이유 때문에 끝까지 확고한 이원론자의 자세를 유지한다. 더욱이 정신분석 이론의 초석인 억압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신 작용의 근본적인 분리를 전제한다. 프로이트는 억압하는 에너지와 억압당하는 내용을 분리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이원론에는 금방 파악되지 않는 미학적인 영역이 있다." "그의 글에는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사랑과 갈망, 그리고 전쟁 뒤에 등장한 삶과 죽음 등 대립들이 넘쳐난다."(88-9)


"모든 정신분석 치료에서 만나는 저항이라는 현상은 프로이트가 오래전에 밝혀낸 어려운 이론적 수수께끼를 제기한다. 저항을 하는 환자는 비참한 신경증 상태에 빠져들어 자신이 분석 과정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거나, 희미하게만 짐작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항과 억압의 발생지인 자아가 완전히 의식적일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일 그렇다면,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사이의 갈등에서 신경증을 끌어내는 전통적인 정신분석 공식에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해서, 〈정신 생활에 관한 메타심리학적 관점으로 가는 길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한, 우리는 '의식'이라는 증후의 의미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1915년에 쓴 이 구절은 프로이트의 이론화 속에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 있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그의 통찰의 전체적 결과물을 끌어내게 된 것은 《자아와 이드》에 와서였다."(113)


"프로이트가 말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자아를 〈세 겹으로 예속되어 있으며, 그 결과 세 겹의 위험에 시달리는 가엾은 존재〉로 본다. 자아는 〈외부 세계, 이드의 리비도, 가혹한 초자아에 시달리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이런 위험에 상응하는 불안에 시달리는 자아는 자신을 위협하면서 서로 전쟁을 벌이는 힘들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전능한 협상가와는 거리가 멀다. 자아는 이드가 세상과 초자아의 압력에 유순하게 굴복하게 하려고 애쓰는 동시에, 세상과 초자아가 이드의 소망을 따르게 하려고 노력한다. 자아는 이드와 현실 중간에 있기 때문에 〈아첨을 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거짓말을 하고자 하는 유혹에 굴복〉할 위험에 처해 있다. 〈훌륭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지지를 받는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정치가와 비슷한 것이다.〉" "자아는 가엾은 존재일지 모르지만, 내부와 외부의 요구에 대처하는 인류 최고의 도구인 것이다."(114-5)


"프로이트는 이렇게 썼다. 〈정상적이고 의식적인 죄책감(양심)은 해석에 어려움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비판적 재판관에 의한 자아 심판의 표현이다.〉 그러나 초자아는 더 복잡한 정신적 장치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초자아는 한편에서는 개인의 윤리적 가치를 품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행위를 관찰하고 판단하고 승인하고 벌한다. 강박 신경증 환자와 우울증 환자의 경우 그 결과로 초래된 죄책감이 의식에까지 떠오르지만, 다른 대부분의 경우에는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정신분석가는 상대적으로 접근이 어려운 괴로운 도덕적 불편함의 원천을 의식하게 되는데, 이것은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간신히 판독할 수 있는 단편적인 자취만 남긴다." "여기서 정신분석가는 〈정상적인 인간은 자신이 믿는 것보다 훨씬 부도덕할 뿐 아니라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도덕적이기도 하다〉는 언뜻 보기에 역설적인 진술을 기쁜 마음으로 인정할 수 있다."(116-7)


9장 프로이트의 안티고네


"프로이트가 (자신을 모범 삼아 정신분석가의 길에 들어선 막내딸) 〈안네를〉을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 딸은 그의 여생 동안 늘 가장 가까운 동맹자였으며 거의 동등한 동료였다. 1920년대 말 안나의 아동 분석에 관한 견해가 심한 공격을 당하자 프로이트는 사납게 딸을 방어했다. 반대로 안나 프로이트는 1930년대 중반에 발표한 자아심리학과 방어 기제에 관한 고전적인 논문에서 자신의 임상 경험에 의존하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글을 자신의 이론적 통찰의 주요한 권위적 전거로 삼았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소유욕이 강했으며, 남들이 아버지의 작업에 비판을 하는 기미만 있어도 민감하게 반응했고, 자신의 특권을 축소시킬 수도 있는 사람들─형제, 환자, 친구─을 질투했다. 1920년대 초에 두 사람은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그 뒤로도 계속 그런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167)


"말년에 프로이트는 딸 안나를 그의 안티고네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비록 사랑스러운 비유에 불과하더라도) '안티고네'의 의미는 너무 풍부하여 완전히 무시하고 갈 수는 없다. 이 이름은 프로이트와 오이디푸스의 동일시를 강조한다. 오이디푸스는 인류 비밀의 대담한 발견자였으며, 정신분석의 '핵심 콤플렉스'에 이름을 빌려준 영웅이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사랑한 자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이디푸스이 자식들이 모두 예외적으로 그와 가까웠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낳은 자식들이었으므로, 그들은 오이디푸스의 후손인 동시에 형제이기도 했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자식들 가운데 특출했다. 그녀는 오이디푸스의 용감하고 풍성스러운 동반자였다. 안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아버지에게 선택된 동지 역할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녀는 프로이트의 삶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가 되었고, 죽음에 대항하여 그의 동맹자가 되었다."(167-8)


10장 여성과 정신분석


"《억제, 증후, 불안》에서 정식화된 프로이트의 정의에 따르면, 불안은 분명한 신체적 감각을 동반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출생 트라우마는 모든 불안 상태의 원형이다. 이것은 훗날의 불안들이 모방할 반응─뚜렷한 생리적 변화─을 일으킨다. 프로이트는 유아가 불안에 대해 어떤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불안 반응은 한마디로 타고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어둠에 대한 공포, 그들의 요구를 보살펴줄 사람의 부재에 대한 공포 등 출생 경험에서만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많은 불안을 겪는다. 프로이트는 정확한 시간표를 그리지는 않았지만, 정신 발달의 각 단계에는 그 단계 특유의 불안이 그림자를 드리운다고 믿었다. 출생 트라우마 뒤에는 분리 불안이 따르고, 그 뒤에는 사랑의 상실에 대한 공포, 거세 불안, 죄책감,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이 나타난다. 따라서 징벌적인 초자아가 만들어내는 불안은 다른 불안들이 이미 자기 할 일을 한 뒤에만 나타난다."(245-6)


"프로이트는 한 유형의 불안이 다른 모든 유형을 대체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각 유형은 평생 무의식 속에 집요하게 살아남아 언제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러나 일찍 나타나든 나중에 나타나든 모든 불안은 공포, 소망, 감정 등 압도적인 자극을 감당할 수 없다는 느낌, 즉 무력감이라는 매우 불편한 느낌을 공유한다. 다시 요약하면, 프로이트가 가장 중시하는 공식은 이런 것이다. 불안은 앞에 위험이 있다는 경고다. 이 위험이 현실이냐 상상한 것이냐, 합리적으로 평가한 것이냐 히스테리 때문에 과장한 것이냐 하는 문제는 느낌 자체와는 상관이 없다. 그 원인은 엄청나게 다양하며, 생리학적, 심리학적 결과도 마찬가지다." "점차 프로이트는 불안을 인간이 삶의 위험들을 헤쳐 나가도록 안내하는 신호로 묘사하면서 전문화된 정신병리학 탐사에서 끌어낸 결론들을 신경증 환자든 아니든 모두에게 적용 가능한 심리학적 법칙으로 번역했다."(246)


"프로이트가 《억제, 증후, 불안》 여기저기에 흩어놓은 발언 중에 1926년에 분명하게 이야기한 것은 불안과 방어가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 정도였다. 불안이 경보음을 내는 탑의 보초라면, 방어는 침입자를 확인하기 위해 동원된 부대다. 방어 작전은 불안보다 파악이 훨씬 힘들 수도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무의식이라는 거의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보호 덮개 밑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어도 불안과 마찬가지로 자아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또 불안과 마찬가지로 꼭 필요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인간적이면서 너무나 오류가 많은 관리 방법이다. 사실 방어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점 한 가지는 이것이 적응의 부지런한 하인이 되었다가 반대로 적응의 비타협적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제 방어는 신경증을 낳을 수도 있는 갈등에서 자아가 이용하는 〈모든 기법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고, 반면 〈'억압'은 방어의 한 가지 방법의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247-8)


# 또 다른 방어 전술 : 경험 자체를 날려버리는 취소(undoing), (불쾌한) 기억과 거기에 연관되는 감정을 서로 차단하는 분리(isolating)


"1920년대 중반 프로이트는 여성에 관한 자신의 관점이 여자들의 갈망에 비우호적이며 남성 편향이라는 비판이 나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의 예측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격렬한 방식으로 현실이 되었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여자에 관해 매우 불쾌한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의 이론적 견해와 개인적 의견이 모두 적대적이거나 생색을 내는 식이었던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여성 심리에 관하여 때로는 거의 불가지론적 입장을 택했다." "그는 물었다. 〈여자는 무엇을 원합니까?〉 여자는 암흑의 대륙이라는 말과 짝을 이루는 이 유명한 말은 현대적으로 포장되었지만 사실 오래된 상투적 질문이었다. 남자들은 오랫동안 여자 전체를 불가해하다고 묘사함으로써 여자의 감추어진 힘에 대한 모호한 공포에 대항하여 자신을 방어해 왔다. 그러나 이 표현은 프로이트의 입장에서는 자기 이론의 구멍에 불만을 표시하며 무력하게 어깨를 으쓱하는 것이기도 했다."(268-70)


"1910년 빈 정신분석협회의 회원들이 내규를 검토할 때 이지도어 자드거는 여자들의 가입에 반대했지만, 프로이트는 단호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원칙적으로 여자들을 배제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모순으로 보일 것〉이라는 이유였다. 나중에 프로이트는 잔 랑플-드 그로와 헬레네 도이치 같은 '여성 분석가들'이 자신 같은 남성 분석가보다 여자 환자들의 유아기─〈나이가 들면서 잿빛으로 변하고, 어두워지는〉─를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망설임 없이 이야기했다. 전이에서 그들이 남자보다 어머니 대리 역할을 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분석 진료의 중요한 측면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유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 나름의 신랄함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더라도 이것은 상당한 찬사였다. 굽힐 줄 모르는 반(反)페미니즘적 편견과 더불어 그런 편견의 은근한 표현으로 악명이 높은 사람으로서는 주목할 만한 양보였다."(272-3)


"여자는 천성적으로 성적인 면에서 수동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프로이트는 여자의 성적 수동성 가운데 많은 부분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강요한 것임을 인식하여, 그런 대중적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여자들에게서 어떤 정신적 결함이 발견될지 몰라도 그것은 자연적 자질의 차이가 아니라 문화적 억압의 결과라는 오래된, 디포와 디드로와 스탕달만큼이나 오래된 통찰의 힘을 알았다. 여자에 관한 이런 생각들이나 다른 생각들은 불편하게 공존을 하거나 때로는 서로 모순을 일으키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그의 발언에 등장했다. 게다가 남성 우월성과 관련된 관념 가운데 일부가 그의 마음의 전면을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남성적 소유욕과 문화적 보수주의를 갖춘, 사교, 윤리, 복식 스타일에서 전혀 개조되지 않은 19세기 신사였다. 프로이트의 여성에 대한 태도는 더 넓은 문화적 충성심, 즉 그의 빅토리아 여왕 시대 스타일의 한 부분이었다."(280-1)


"여자라는 민감한 문제에서 프로이트는 우경화했다. 프로이트는 강건하고 통렬한 언어를 사용하여 페미니스트들의 비위에 맞았던 생각, 즉 인간 남성과 여성은 매우 비슷한 심리적 역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뒤집어버렸다." "1920년대 초에 이르면 프로이트는 어린 소녀는 실패한 소년이고, 성인 여자는 일종의 거세된 남자라는 입장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1923년에 인간의 성 역사의 단계들을 제시할 때는 구순기와 항문기 다음에 나오는 단계를 남근기라고 불렀다. 어린 소년은 어린 소녀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어머니를 포함한 모두에게 음경이 있다고 믿으며, 이 문제에서 사실에 눈을 뜨는 과정은 소년에게 트라우마를 남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남자가 프로이트의 척도였다. 이 무렵 프로이트는 소년과 소녀의 성 발달을 유사하게 다루던 이전의 방식을 버렸다. 그는 정치에 관한 나폴레옹의 유명한 말을 살짝 바꾸어 도발적인 경구를 남겼다. 〈해부학이 운명이다.〉"(292-3)


11장 문명 속의 불만


"프로이트는 평생 설명이 필요한 것은 무신론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1905년에 메모해 둔 것들 가운데는 이런 간결하고 암시적인 내용이 있다. 〈강박 신경증으로서 종교-강박 신경증은 개인적 종교〉. 2년 뒤 그는 이런 맹아와 같은 생각을 예비적 논문 〈강박 행동과 종교 의식〉으로 풀어냈다. 종교와 신경증을 하나의 굴레에 묶으려는 우아하면서도 감질나는 시도였다. 프로이트는 강박 신경증 환자에게 필수적인 '의식(Ceremonies)'이나 '제의(Rituals)'가 모든 신앙의 핵심 요소인 식전(式典, Observances)과 비슷하다는 점은 금방 눈에 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신경증과 종교, 양쪽의 관행이 충동의 포기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둘 다 방어적이고 자기 보호적인 수단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일치와 유사성에 비추어 강박 신경증을 종교적 구성물의 병리적 대응물로, 신경증을 개인적 종교로, 종교를 보편적인 강박 신경증으로 과감하게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312)


"1927년에 출간된 《환상의 미래》는 시작부터 커다란 주장을 한다. 여기서 내건 주제는 종교지만, 의미심장하게도 문화의 본질에 대한 숙고에서 시작한다. 마치 3년 후 출간된 《문명 속의 불만》을 위한 예행 연습처럼 읽힌다. 이런 식의 출발은 자신의 과제에 대한 프로이트의 인식을 드러낸다. 종교를 최대한 넓은 맥락 안에 자리 잡게 하여, 인간의 모든 행동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자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프로이트가 동시대 대부분의 종교심리학자나 종교사회학자와 공유하고 있는 비타협적인 세속주의는 신앙의 문제에 어떤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며, 분석에서 면제받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성역을 존중하지 않았다. 연구자로서 그가 들어갈 없는 신전은 없다고 보았다." "그의 친구 피스터는 솔직하게 말했다. 〈교수님의 대체 종교는 본질적으로 당당하고, 신선하고, 현대적인 모습의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입니다.〉"(314)


"프로이트의 에세이는 문화에 관한 논의로 시작한다. 그의 간결한 정의에 따르면 문화는 외적인 자연을 정복하고 인간들의 상호 관계를 규제하려는 집단적 노력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불쾌하고 어려운 희생에, 소망의 지연과 쾌감의 박탈에 노출된다는 뜻이다." "분명한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자신의 주된 과제, 즉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방어하는 과제를 이행하는 방법을 상당히 잘 습득했다고 프로이트는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이 이미 정복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프로이트는 인간에 대한 자연의 적대 행위의 놀라운 목록을 나열했다. 지진, 홍수, 폭풍, 질병 그리고 프로이트 자신의 절박한 관심사에 더 다가가,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수수께끼〉를 들었다." "프로이트가 개인적인 소회를 감추지 않고 〈인류 전체에게나 개인에게나 삶은 견디기 힘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도 당연하다. 무력함이야말로 공동의 운명인 것이다."9316-8)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는 교묘하게 종교를 그의 분석에 집어넣었다." "물론 종교는 예술이나 윤리와 더불어 인류의 가장 귀중한 소유물에 속하지만, 그 기원은 유아의 심리에 있다. 아이는 부모의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부모가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아이가 성장하면서 부모─특히 아버지─의 힘에 대한 느낌, 위험하면서도 가능성이 있는 자연 세계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생각을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어른도 아이와 마찬가지로 소망에 굴복하고 가장 공상적인 장식으로 자신의 환상을 꾸민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생존자들이다. 아이의 요구, 취약한 상태, 의존은 어른이 되어서까지 계속 존재하며, 따라서 정신분석가는 종교가 존재하게 된 방식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종교적인 개념은 다른 모든 문화적 성취와 똑같은 요구, 즉 자연의 압도적 우위에 대항하여 자신을 보호할 필요〉, 그리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문화의 불완전성을 교정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왔다.〉"(318-9)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늑대다.〉 따라서 인간은 제도로 길들여야 한다." "인류는 국가에 독점적 강제 권한을 부여하는 사회 계약에 도달함으로써 비로소 문명화된 인간 관계에 들어설 수 있었다.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은 이런 홉스적인 전통 속에서 탄생했다. 공동체가 권력을 쥐고 개인이 직접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포기했을 때 문화를 향한 거대한 진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처음으로 적을 향해 창이 아니라 욕을 던진 사람이 문명의 진정한 건설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는 불가결하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불만이 표출될 무대도 마련되었으며, 모든 사회은 이런 불만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사회는 개인의 강렬한 욕망에 매우 철저하게 간섭했으며, 본능적 욕구를 억제하고 억압했는데, 이런 욕망과 욕구는 계속 무의식에서 곪으면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올 길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346-7)


"《문명 속의 불만》은 프로이트의 더 큰 생각의 중요한 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의 정신분석학적 사고방식을 배경으로 보았을 때에만 그 영향력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이 에세이는 어떤 문화든 문화 속에서 프로이트적인 인간이 형성되는 방식을 요약한다. 프로이트적인 인간은 무의식적 요구에 시달리고, 치유 불가능한 양가적 태도와 원시적이고 정열적인 사랑과 증오를 드러내고, 외적인 제약과 내밀한 죄책감 때문에 간신히 제어되고 있다. 사회 제도는 프로이트에게 많은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살인, 강간, 근친상간을 막는 댐 역할을 한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문명 이론은 사회 속의 삶을 강요된 타협이자, 본질적으로 해소 불가능한 곤경으로 본다.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 자체가 불만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완전하지 않은 상태로, 인간이 나아진다는 점에 관해서는 최소한의 기대만 하고 살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348)


"그러나 프로이트의 주된 관심은 문화가 공격성을 억제하는 방식이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한 가지 방법은 내면화(internalization), 즉 공격적인 감정들을 원래 출발지인 정신 속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런 행동, 또는 일련의 행동은 프로이트가 '문화적 초자아'라고 부르는 것의 기초다. 처음에 아이는 권위를 두려워하며, 아버지로부터 예상되는 징벌적 보복을 계산하여 딱 그만큼 얌전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아이가 어른의 행동 기준을 내면화하면 외적인 위협은 불필요해진다. 아이의 초자아가 아이를 바르게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과 증오 사이의 투쟁은 문명 자체의 기초에 놓여 있듯이 초자아의 기초에도 놓여 있다. 개인의 이런 심리적 발달은 종종 사회의 역사에서 복제된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비난할 예언자들을 배출했으며, 신의 법을 어겼다는 집단적 느낌으로부터, 가혹한 계명을 갖춘 지나치게 엄격한 종교를 키워 나갔다."(354)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 그의 체계의 주요한 가닥들을 서로 엮어 나갔다." "감동적인 동시에 강건한 결론 부분의 사유도 오래된 내적 갈등을 다시 짚어 나간다. 이 사유는 프로이트가 지나침을 경계하면서도 사변의 요구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문화적 초자아라는 관념에 기초하여 신경증적 문화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환자에게 하듯이 그런 문화에 치료자로서 권고를 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이 문제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개인과 그가 속한 문화 사이의 유추는 긴밀하고 유익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유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보적 태도는 중요하다. 이 덕분에 프로이트가 자신을 사회 개혁가라기보다는 연구자로 규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병에 대한 처방을 손에 쥔 사회의 의사로 나서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는 점을 더 분명할 수 없게 밝혀 놓았다."(355)


12장 인간 모세의 최후


"강력한 이웃인 파시즘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포위가 점점 강해지고 위협적이 되면서 빈 생활은 점점 위태로워졌다. 히틀러 정권 첫 해에 쓴 프로이트의 편지들은 비록 쓸쓸함과 분노가 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낙관주의의 영향이 남아 있었다. 1933년 페렌치는 프로이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들 가운데 한 통에서 다정하게, 그러나 미친 듯한 목소리로 프로이트에게 어서 오스트리아를 떠나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너무 늙고, 너무 아프고, 의사와 안락한 생활에 너무 심하게 의존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우파 정당들이 오스트리아 나치즘을 반드시 제어할 것이라고 낙관한 프로이트는 물론 우파정당들의 독재가 유대인들에게 매우 불쾌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차별적인 법률은 상상하지 못했다. 평화 조약이 명시적으로 그런 법을 금지했으므로 국제 연맹이 분명히 개입할 것이라고 보았다."(426-8)


"역설적으로 이때는 프로이트에게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이 기분 좋은 시기였다. 그는 힘든 시기가 유대인에게는 '인종적' 충성심을 선언하는 데 특히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때야말로 유대인에게 힘든 시기였다. 대공황과 정치적 혼란은 합리적인 해법들의 인기를 떨어뜨렸으며, 이것은 특히 중유럽에서 반유대주의의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그러나 신교로 개종한 아들러, 잠깐 로마가톨릭에 의지한 랑크와는 달리 프로이트는 결코 자신의 조상을 거부하거나 감추지 않았다. 우리는 1924년에 쓴 〈나의 이력서〉에서 그가 분명하게, 심지어 약간 공격적으로, 자신의 부모가 유대인이며, 자기 또한 늘 유대인이었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의 유독한 분위기 속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이 유대인 출신임을 부정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유대인 출신임을 널리 과시하기까지 한 것이다."(434-5)


"유대적인 면의 본질, 또는 그의 개인적인 유대인적 정체성이 분석에 저항했는지는 몰라도, 프로이트는 그의 사회에서 유대인이라는 것의 함의는 분명하게 알았다. 그는 조상의 신앙에 낯선 동시에 그가 살고 일해야 하는 오스트리아의 강력한 반유대주의적 요소에 분개했기 때문에 이중으로 소외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프로이트는 자신을 주변인으로 보았고, 이런 위치가 자신에게 측량할 수 없는 이점을 준다고 생각했다." "이런 측면에서 독실한 유대인 또는 기독교인은 절대 정신분석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프로이트의 발언에는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정신분석은 우상 파괴적이고, 종교적 신앙을 무시하고, 기독교 변증론을 경멸하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종교적 신앙─유대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적 신앙─을 정신분석적 연구의 주제로 여겼기 때문에, 오직 무신론자의 관점에서만 그런 신앙에 접근할 수 있었다."(443-5)


"더욱이 프로이트의 기질에는 도전의 분위기도 스며들어 있었다. 그는 반대파의 지도자, 가짜의 껍질을 벗겨내는 자, 자기 기만과 착각에 벌을 주는 자라는 지위에서 기쁨을 맛보았다. 그는 박해하는 로마가톨릭교회, 위선적인 부르주아지, 우둔한 정신의학 기성체제, 물질주의적인 미국인들이 자신의 적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 자부심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이 적들은 그의 마음 속에서 실제보다 훨씬 사악하고 강한, 또 서로 엉겨 붙은 유령으로 커 갔다. 그는 자신을 한니발, 아하수에로스(크세르크세스 1세), 요셉, 모세에 비유했다. 이들 모두 역사적 사명을 띠고, 강한 적과 마주하고, 괴로운 운명을 감내한 인물들이었다. 프로이트는 자주 인용되는 초기 편지에서 약혼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보아서는 잘 알기 힘들겠지만, 나는 이미 학생 때부터 늘 용감한 반대자였고, 늘 극단을 고백하는 자리에 있었으며, 대개 그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446)


"1938년 3월 12일과 그 다음 날, 프로이트는 라디오 옆에 앉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장악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곧 시작된 공포 정치 하에서, 독일인들이 갖추거나 표현하는 데 5년이 걸린 편협한 태도나 사디즘적인 복수심을 오스트리아인은 불과 닷새 만에 행동에 옮겼다. 많은 독일인들이 가차 없이 쏟아지는 폭탄 같은 선전에 굴복했고, 가혹한 국가, 방심하지 않는 당, 통제된 언론에 겁을 먹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인의 경우에는 전혀 압력이 필요 없었다. 그들이 행동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나치 테러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것이라고 설명되거나 변명될 수 있을 뿐이었다. 유대인의 아파트를 약탈하거나 유대인 상점주들에게 테러를 한 군중은 공식적인 명령 없이 그런 일을 하면서 자신들이 하는 일을 철저하게 숨겼다. 로마가톨릭 양심의 수호자인 오스트리아의 고위 성직자들은 여전히 남아 있던, 깨어 있는 정신과 품위를 갖춘 세력들을 동원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471-2)


"새로운 통치자들은 오스트리아를 히틀러의 제국에 합병하는 작업에서 신속하고 무자비한 효율성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작업은 말 그대로 오스트리아의 종말(finis Austriae)을 의미했다. 일주일이 안 되어 오스트리아 군, 법, 공적 제도는 독일의 해당 부문에 편입되었고, 오스트리아는 한 나라가 아니라 독일의 동부 지방이 되어, 일부러 고어로 '오스트마르크(Ostmark, 동쪽의 변경)'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대인 판사, 관료, 산업가, 은행가, 교수, 저널리스트, 음악가는 바로 숙청당했다. 몇 주가 안 되어 오페라, 신문, 실업계, 고급 문화, 커피하우스는 간절한 목소리로 자신이 〈순수한 아리안〉이라고 선전했다. 중요하고 책임 있는 자리는 모두 믿을 만한 나치들에게 돌아갔다. 거의 아무런 저항도, 심지어 이의 제기도 없었다. 저항을 했다 해도 효과도 없고 비이성적이었다." "국외로 탈출한 소수는 바깥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개입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478-9)


# 프로이트 역시 1938년 6월 4일에 빈을 떠나 6월 6일 망명지 영국에 도착


"슈어는 (궤양이 일어난 구개암으로 고통받던) 프로이트가 위엄 있게, 자기 연민 없이 죽음과 마주하는 것을 목격하며 눈물을 흘릴 뻔했다. 9월 21일 슈어는 프로이트에게 모르핀 3센티그램을 주사했다. 22일 마지막 주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져든 프로이트는 1939년 9월 23일 새벽 3시에 죽었다. 거의 40년 전 프로이트는 오스카어 피스터에게 앞으로 언젠가 〈생각을 못하고 말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이 가능성 앞에서 불안〉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직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운명 앞에 완전히 체념하는 마음으로, 나는 한 가지 정말 비밀스러운 소원을 품고 있네. 숙환이 생기는 것, 신체적인 비참한 상태로 인하여 능력이 마비되는 것만은 싫다는 걸세. 맥베스 왕이 말한 대로, 평소처럼 일하다 죽게 해 달라는 거야.〉 프로이트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빈틈없이 대비해놓았다. 늙은 금욕주의자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통제한 것이다."(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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