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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열대를 읽다 - 레비스트로스와 인류학을 공부하는 첫걸음 ㅣ 유유 고전강의 13
양자오 지음, 박민호 옮김 / 유유 / 2019년 4월
평점 :
서문
1장 하버드에서 레비스트로스를 만나다
"십자군의 동정東征에서 대항해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근대사상은 끊임없이 시간과 공간에 있어 '인간'의 범위를 확대해 왔다. 공간적으로 보자면, 유럽인은 유럽 이외 지역에도 인간이 존재하며, 그 수가 유럽인을 초월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시간적으로 보자면, 고대 그리스 이전에도 인간이 존재했으며, 그 수가 한둘이 아니고 그 기간도 100~200년에 그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확장된 인류의 범위는 인류학 연구에서 새로운 문제를 촉발했다. 본래의 철학적 방법은 지나치게 서양인의 사고와 자각에 의존했고, 그리스 로마에서 기독교 전통 안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이 발견된' 인간은 철학의 대상에 포함시키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본디 전칭全稱의 특징을 지닌 인류학 개념은 점차 전통 철학의 탐구 영역 밖에 있던 '인간 현상'을 탐구하는 것으로 전환되었고, 새로이 개척된 인간의 영역이 서양인의 관심과 해석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44)
2장 인류학의 대전환
"문명 바깥에는 '야만'이 존재한다. 주류 분과 학문은 각기 여러 인종과 문명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고, 인류학의 연구 대상으로 '야만'과 '야만인'만을 남겨 두었다. 역사, 문학, 철학, 심리학, 사회학은 모두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그러한 분과 학문의 기준에서 야만인은 '인간'에 포함되지 않으며 인간 연구의 범위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인류학은 특별하다. 야만인은 물론 인간이다. 야만인을 인간 연구에 포함할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인간됨'의 최대공약수를 발견할 수 있으며, 제대로 인간을 정의할 수 있다. 야만인을 배제한다면, 우리가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최대 범위란 단지 '문명인'에 불과하게 된다. 심지어 그 문명인이란 특정한 몇 개의 문명에 속하는 인간으로, 진정한 인류와는 논리적 정의에서도 차이가 난다." "'황금' 또는 인류학이 밤낮없이 추구하는 '성배'란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전칭적' 인식을 말한다."(47-8)
"말리노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하나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 지역 사람들의 관점, 그들과 그들의 생활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확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인류학자는 과거의 관찰 태도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참여자'여야 한다. 관찰자는 현지인의 생활을 외부자의 관점으로 바라보므로 객관적 혹은 주관적 편견을 갖게 된다. 반면 참여자는 참여 학습과 현지인의 생활관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그들의 삶을 그들의 입장에서 인식할 수 있다." "(참여자의) 자격을 얻은 인류학자는 늘 두 가지 초점을 가진 안경으로 세상을 본다. 인류학자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에믹emic과 에틱etic이라는 서로 다른 초점거리를 동시에 지녀야 한다. 이 두 개념은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하는데, 각각 '내재'와 '외재' 또는 '집단 내부'와 '집단 외부'라는 의미다. 나아가 그것은 '특수성'과 '보편성' 간의 차이로 이야기될 수도 있다."(51-3)
"현대 문명, 공업화, 도시화는 전통적인 약세 문화를 지속적으로 파괴했고, 도처에서 옛 부락이 사라져 갔다. 이러한 상황은 인류학자에게 참여식 관찰을 통해 그와 같은 문화적 자료를 구출하고 지킬 것을 수시로 요구해 왔다. 그러나 결국 레비스트로스처럼 '보편적 인류 지식'이라는 과거의 몽상을 견지한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시선을 돌려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렇게 쌓아 둔 표본을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하려는가? 이런 표본을 정리해 인류에 관한 보편적 인식을 끄집어낼 수 없다면, 그토록 힘을 들여 그것을 수집하고 기록할 필요가 있는가?〉 레비스트로스는 한 가지 방식을 찾아냈다. 이 방식으로 인류학자들은 다시금 인류의 공통성을 직시하게 되었다." "당시 인류학자들은 문화적 특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했고, 모든 보편성의 주장에 의심을 품었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용감하고 영리하게 '구조'라는 새로운 관념을 제시해 보편성에 대한 인류학자의 관심을 확장시켰다."(69-70)
"이렇게 우리는 레비스트로스와 시 혹은 시학 사이의 첫 번째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시학에는 항상 신비하면서도 동시에 확고한 주장이 포함되었다. 우리는 시가 시인의 독특한 개성을 분출한 것이라 여기지만, 시에서 인류가 공유하는 심층적 경험과 만나기도 한다. 시인은 다른 사람이 한번도 사용한 적 없는 어구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방법을 찾아낸다. 그렇다면 시는 어떻게 개별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을 결합할 수 있을까? 언어 내부는 거의 무한정한 탄성彈性으로 가득 차 있지만, 늘 고정된 구조의 규칙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시가 기록하고 표현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시는 현실을 보여 주는 역사보다 더 진실하다. 그리고 이 진실은 보편적 경험, 이치, 규칙을 대단히 뚜렷하게 지시해 준다." "이것이야말로 레비스트로스가 방대한 민족지 자료를 분석하여 '구조'를 수립하려고 실행했던 바가 아니겠는가?"(70-1)
3장 슬픈 열대로 들어가다
"레비스트로스를 인류학자로 성장케 한 경험은 다른 사람들과 매우 달랐다. 말리노프스키 이래로 일찍이 영미 인류학자들이 받아들인 '통과의례'rite of passage는 원시 부락에서의 참여식 관찰이었다. 이는 인류학자가 되기 위한 일종의 학술적 성인식이었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달랐다." "레비스트로스에게 있어 은폐되고 헤아릴 수 없는 지식은 지질학,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의 교집합을 형성했다. 그는 자신을 이 교집합에 포함시켰다. 또한 인류학을 이 교집합에서 수행하려 했다." "그는 분명 현지 조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레비스트로스는 원주민에 대한 참여식 관찰 방식의 현지 조사를 통해서만 인류학자로 변모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 언어학자(야콥슨)를 알게 되고, 다른 언어학자(소쉬르)의 저작을 꼼꼼히 읽으면서 현지 조사 경험의 대응 방법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73-7)
"(언어를 랑그la langue, the language와 파롤la parole, the speaking로 구분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의 출현은 19세기에 갈수록 쇠퇴하던 언어학 연구를 해방시켰다. 레비스트로스는 소쉬르 이전 언어학이 처했던 곤경이 당시 그가 느끼던 인류학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 시절 언어학자들은 세계의 수많은 언어를 조사하고 연구하면서 풍부한 자료를 집적했다. 그러나 물밀 듯 밀어닥친 언어 자료는 점차 언어학자들을 질식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언어 자료를 어떻게 정리하고 연구를 진척시켜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소쉬르는 명확한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현상인 파롤 안에서 헤매지 말 것을 주장했으며, 현상이 제아무리 많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언어학의 핵심으로 이끌 수 없음을 강조했다. 서로 다른 언어의 구조를 정리하고 채택해 초언어적 거대 구조를 탐구하는 것, 즉 대문자적이고 궁극적인 랑그를 파악하는 것이 바로 소쉬르가 제기하는 바였다."(80-1)
4장 시처럼 모호한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하나의 스타일을 창조해 냈다. 그것은 윌컨이 말한 '단호하고 창조적인 청년 시절의 글'과 '힘찬 문학적 실험'을 인류학과 현지 조사에 연결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그와 같은 문학적 실험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소불위의 문장을 획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그는 글로 기록하기 어려운 특이한 현상,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정서와 이치 등을 분명하게 설명하고자 했다. 언어와 문장에 대한 깊은 신뢰,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기 위한 천착, 표현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 이것은 본래 시인의 태도이자 시적 추구의 태도다." "레비스트로스는 활자라는 시인의 무기와 시인의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그가 보고자 하는 것, 경험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경험과 모험으로부터 가져와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들려주고자 하는 것은 다른 인류학자의 그것과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89-91)
5장 개별 현상과 기본 구조 사이를 오가다
"실존주의는 existence(실존)라는 개념으로 being(존재)이라는 개념을 대체하려 했다. being이란 추상적인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 개인, 구체적 생활, 구체적 감각 경험을 배제하고, 모든 인간과 사물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며, 집단적 존재 원칙을 관철한다. 반면 existence는 구체적 개인이 구체적 삶에서 획득하는 구체적 감각 경험을 지향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 삶의 가장 구체적인 다종다양한 선택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철학이 해석하는 being은, 그것이 아무리 논리정연할지라도 일상의 구체적 상황과 조건에서 맞닥뜨리는 인간관계, 도덕, 삶과 죽음 등과 관련한 중대한 결정을 도와줄 수 없다. 실존주의는 구체적인 존재와 용감하고 결연하게 대면하려 한다. 실존주의는 기존 철학적 문제의 경중과 완급을 뒤바꿔 개인, 개별성, 현재, 변화하는 현상 등을 인간의 본질, 전체성, 영원, 불변의 원리 따위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더욱 사고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본다."(114)
"카뮈의 『이방인』은 추상적 본질적 규정에 의존하지 않은 채 느끼고 반응하는 인간을 묘사한다. 그것은 그만의 '실존'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그의 실존을 직시하려 하지 않고 홀대한다. 그들은 추상적 본질에 따라 그를 바라보고 통제하며, 자신의 실존을 포기하고 추상적 본질을 흉내낼 것을 그에게 강요한다. 카뮈가 볼 때 이는 부조리하다. '개성'은 응당 '공통성'보다 중요하다." "이렇게 '개성의 횃불'이 가장 크게 타오르던 시기에 레비스트로스는 프랑스 사상계에 나타나 냉정하게 실존주의의 열기를 잠재웠다. 레비스트로스는 재차 공통성을 내세웠고, 구조 개념을 통해 인간의 시선을 개인과 구체적 '실존'에서 공통적이고 체계적인 원리로 이끌었다." "구조주의의 약진은 실존주의가 일으킨 개인주의와 다원주의의 광풍을 수습했고, 사람들에게 〈인류 사회의 유희, 몽상과 망상은 개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무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떤 관념의 저장소에서 선택된 몇 가지 조합물〉임을 일깨웠다."(115-6)
# 구조주의의 양상
1. 영미의 구조기능주의 :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은 실타래처럼 얽혀 있으며, 서로 연관된 이 현상들을 조직해주는 '기능'을 발견하면,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를 아울러 발견할 수 있다.
2. 프랑스의 구조주의 : 변화무쌍한 언어 배후에 모든 언어를 관통하는 몇 가지 기본 구조가 존재하듯이, 변화무쌍한 인류 사회와 문화 현상은 몇 가지 기본 구조의 파생과 변화의 결과물이다.
"구조주의로 인해 후에 포스트구조주의가 생겨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포스트구조주의는 무엇인가?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절차를 뒤집어, 현상에서 구조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조 속에서만 현상을 볼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인간은 현상의 진면모에 가닿거나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구조의 개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구조의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왜곡 속에서 살아가야 할 숙명을 영원히 짊어져야 한다. 구조주의 언어학은 언어 내부의 구조를 발굴했지만, 포스트구조주의는 언어 속의 모든 단어와 의미 사이의 관계─보다 폭넓게 말하면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 사이의 관계─를 분석해 그것이 모두 언어의 구조에 의해 규제되고 결정된다는 점을 밝혔다. 우리는 구조가 발견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진리란 특정한 구조 속의 의미가 우리에게 나타난 것일 뿐이다. 특정한 구조의 견제를 받지 않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117)
6장 인류학자는 창조자다
"1955년 『슬픈 열대』가 출판되었을 때, 사르트르와 실존주의는 지성계의 최고봉을 점하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새로운 철학 체계를 수립했지만, 인간이 살아야 할 이유 그리고 인간이 과거에 습관적으로 의존해 왔던 바를 제거해 버렸다. 사르트르의 철학에는 고도의 비판성과 부정성이 있었고, 그 부정과 전복의 제거는 긍정과 구축과 창조를 멀리 뛰어넘는 것이었다. 사르트르와 카뮈를 포함한 여타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이 오랫동안 의지해 왔던 것들을 과감히 제거해 버렸다. 받침목도, 지팡이도, 손을 짚을 난간도 모두 빼앗아 버린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제공했던 과거의 모든 외적 조건을 무정하게 깨뜨렸고, 우리는 의지할 데 없는 삶의 낭떠러지에 외로이 서서 모든 불확실성과 위험에 직면해야 했다. 그들의 분석은 훌륭하고, 그들의 표현 역시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주장은 대부분이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도전이었다."(151-3)
"사르트르 자신도 그 엄혹한 시험을 늘 통과했던 것은 아니다. 스탈린 사후, 스탈린의 폭정이 알려진 후로도 사르트르는 계속해서 (코민테른 내 교조파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공산혁명을 신뢰하고 소련 공산당의 태도를 믿었다." "사르트르는 모든 것을 궁구한 끝에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주체성과 자유를 부여했다. 이제 사람들은 그의 철학이 듣기에는 좋지만 실상 허황되다고 느끼게 되었다." "레비스트로스의 주장과 이론은 이와 같은 시대 배경에서 인간이 그토록 초조해할 필요도, 모든 것을 스스로 모색하고 결정할 필요도 없음을 알려 주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와 실존주의에 거리낌 없이 대응했다. 〈미혹되지 말자. 인간이 어디 그렇게 자유로운가. 당신의 행위는 구조의 한계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이 자유로운 선택이라 여기는 것은 모두 구조적 해석이 가능하다. 소란 떨지 말자. 더 이상 자신의 초조함을 세계적 진리로 확대하지 말자!〉"(153-5)
"인류학을 수학이나 음악에 비유함으로써 레비스트로는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희극적으로 부각시켰다. 그는 인류학자는 수집가여선 안 된다고, 바로 창조자creator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집이라는 행위는 인류학자가 자신의 사회문화로부터 벗어나도록 해 주는 과정일 뿐이다. 다양한 사회와 문화를 관찰하고 그에 관해 수집함으로써, 인류학자는 자신이 몸담았던 사회와 문화로부터 벗어나 해방되어 인류 경험의 대양大洋으로 진입한다. 그 대양은 특정 문화나 사회가 아니라, 인류학자가 모든 안락한 문화와 사회에서 벗어난 뒤 스스로 창조해 낸 '초문화적'trans-cultural 이해 지평을 말한다. 그것은 구체적 문화 현상에서 뽑아낸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규율에 의해 구성된 공간이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다양한 문화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은 구조를 발견하기 위해 부득이 거쳐야 할 노정이지, 그 자체가 인류학 연구의 목적은 아니다."(159-61)
7장 대지식
"통합적인 묘사나 정의가 그러한 구성원이나 현상을 처리하기 곤란할 때, 우리는 별 수 없이 일일이 나열하는 방식으로 분류된 집단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묘사는 집단의 유사성을 다룬다. 묘사는 언어나 문자를 통해 그 집단의 공통점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리스트가 다루는 것은 집단 안의 차이성이다." "따라서 묘사와 리스트의 관계는 '원리'와 '현상'의 관계와 닮아 있다. 원리를 발견하면 우리는 현상을 공통된 원리의 묘사에 통합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상황에서 묘사가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재차 리스트로 돌아가게 된다. 첫 번째 상황은 사물의 차이가 거듭 환원될 수 없으며, 환원하려 하면 그 역할이 상실되는 경우다. 가장 좋은 사례가 바로 원소주기율표다. 100여 개에 달하는 화학 원소는 도표로 열거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원소로서 다시 분리될 수 없는 기본 물질로 제각기 독립성을 갖기 때문이다."(176-7)
"또 다른 상황은 이렇다. 즉 우리는 주관상 각 구성원의 독립성을 제거하는 것에 저항하고, 의도적으로 리스트를 통해 차이가 존재함을 깨달으며, 그것을 존중하려는 태도를 지닌다. 이 상황을 보여 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상단에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미군의 이름이 가득 새겨진) 베트남전 기념비이다. 이 거대한 리스트는 하나의 묘사, 하나의 거대한 분류 속에서 축소되고 상실될 뻔한 살아 숨쉬던 개체들의 개별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는 리스트의 특수한 의의이자 작용이다. 그것은 개체와 차이를 보존하는 동시에 두드러지게 한다. 열거식 리스트는 겉보기에 매우 가지런하고 형식상으로도 일정하다. 그러나 에코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운다. 그처럼 가지런하고 일정한 형식의 외관은 일종의 가상假像이다. 그 안에는 통합적 이성에 의해 수용된 길들여지지 않은 차이들이 숨겨져 있다. 리스트는 항상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이며, 리스트에 수용되지 않은 리스트 바깥의 것을 생각하도록 자극한다."(177-8)
"비록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가장 유명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구호는 본질로부터의 탈피를 요청하는 듯하지만,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사르트르의 철학은 시종 본질론에 머물러 있었다. 사르트르의 사상은 본질을 검토하고 비판하는 한편 이성을 분석한다. 그런데 분석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분류와 묘사를 해야 한다. 우선 문제와 분석 대상을 묘사한 연후에야 비로소 분석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석에 활용되는 그러한 묘사는 총체적 이성에서 나오는 묘사이기에, 그 자체로 이미 본질론적이다." "상대적으로 레비스트로스의 사상 모델은 '유비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서술한 시장처럼) 분류를 통해 '동류'同流의 현상을 한데 모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상도 서로 완전히 동일할 수 없음을 수시로 관찰하고 인식하여 단지 상호 간의 유사성에 의지해 그것을 한데 모아야 한다. 즉, 묘사가 아닌 리스트를 통해 현실의 현상을 처리하는 것이야말로 유비적이라 할 수 있다."(180-1)
8장 야생적 사고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사고가 '신석기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야만인의 숙고'와 함께 '수공예 장인식 연구 방법'을 제시했다. 이 둘은 서로 표현은 다르지만 지향하는 바는 동일하다. 분류와 분업에 반대하고 그 이외에 인류 지식을 조직하는 원칙을 제시한다." "그것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자신의 이론적 필요에 따라 재료와 도구를 직접 찾거나 만드는 작업 방식을 말한다. 현대 과학 이성의 분류 원칙에 따르면, 그러한 재료나 도구는 각기 다른 분과 학문에 속해 있으며 서로 다른 연구 성격을 띤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그러한 분류를 따르지 않았고, 그 자신의 '수공예적' 필요와 유비적 원칙에 따라 여기저기서 재료와 도구를 탐색해 독특한 지적 학문적 체계를 수립했다. 그것은 복제할 수도, 어떤 부류에 포함시킬 수도 없는 거대 이론이었다. 어떤 수공예 장인이 일생을 바쳐 손수 만들어 낸 공예품처럼, 그의 이론은 현대 학술 분업 체계에 편입시킬 수 없는 독특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186-8)
"〈뇌를 먹어 머리를 좋게 한다〉거나 〈간을 먹어 간을 보양한다〉는 전통 관념은 모두 전형적인 유비적 사유에 해당한다. 동물의 뇌와 간과 사람의 뇌와 간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한데 묶어 일련의 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확정, 중복, 예상 가능한 인과관계만을 인정하는) 과학 이성에 비춰 볼 때 얼토당토 않은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탐구하려 했던 총체적 의미, 구조 등은 부분적으로 엄격한 인과론으로 수립될 수도 없고, 그것으로 분석하거나 증명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는 증명할 수 없고 인과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총체적 의미와 구조의 존재 그리고 그 중요성을 부정하기를 거부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의미와 관계가 과학 이성의 분석이나 인과적 추론만으로 모두 설명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야만인, 신석기시대, 수공예 장인의 사유와 그것들이 세계를 보는 시각을 활용했고, 또 그것들을 수호하려 했다."(188-90)
"과학은 끊임없이 사실을 절단하는데, 많은 사실을 절단하고 분석할수록 더욱 예리해지고, 예리해질수록 더 많은 사실을 절단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예리해져 많은 사실을 절단할수록 과학은 본질로부터 점차 멀어진다. 반면 물고기나 벌처럼 과학의 성질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생존 조건을 파악하는 것, 즉 냄새, 깊이, 무게, 명암을 혼동하는 것이야말로 사물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해라 할 수 있다. 〈야만인의 신화나 상징〉도 그러하고 〈화가, 시인, 작곡가의 작품〉 역시 그러하다. 절단의 방식이 아니라 상반된 것을 혼동함으로써 수립한 〈가장 기본적이고 유일한 지식〉이야말로 바로 〈보다 고차원적인 지식〉인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특이하게도 문학예술을 문명 속에 보존된 야만의 특별한 일부라고 보았다. 야만, 야성의 비분석적 사유는 과학 이성으로 뒤덮인 환경에서도 문학이나 예술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201-2)
9장 신세계로 나아가다
"야만에 관한 설명 방식 중 하나는 그곳에는 전기도, 수도도, 장미 정원도 없고 '시詩'도 없다는 것이다. 즉 문명의 성취, 문명의 이기利器가 결여된 것이 바로 야만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와 20세기 초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이러한 대조를 뒤집었다. 야만에 있는 직관, 공포, 활력, 리듬, 자연스러움이 문명에는 전혀 없다고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묻는다. 현대 문명에서는 찾을 수 없는 야만의 요소나 특질이 정말 오로지 야만에만 있으며, 그것은 문명과 공존할 수 없는가?" "그는 야만의 요소와 특질 중 상당 부분이 인류 공통의 자산이라고, 다만 문명에서는 배제되어 보이지 않거나 식별이 어려운 여타 형태로 변형되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 세대의 임무는 일상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후미진 곳을 들추거나 겹겹이 쌓인 안개 속을 헤쳐 야만과 문명 사이의 공통된 부분, 즉 전체 인류에 속한 총체적 의미와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다."(209-10)
10장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 인류학의 주요 분과
1. 고고학
2. 체질인류학 : 과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고대의 유해와 체질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는 분야
3. 사회인류학(문화인류학) : 특정 사회와 문화에 관한 자료를 정리, 귀납, 분석, 해석하는 분야
4. 민족지 : 특정 사회와 문화에 관한 자료를 조사, 수집, 기록하는 분야
"본디 민족학은 모든 야만 문화를 서구인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진화론의 거대 계보 내에서 평가하고 자리 매겼다. 그들에 의하면, 인류는 막 탄생한 0점 단계에서 진화를 거듭해 현대 유럽에 이르러 100점 단계에 도달했다. 이 과정은 대단히 길고 연속적인 계보를 형성한다. 이에 기초하여 민족학자들은 자연스럽게 눈앞의 부락을 평가했고, 도구, 공예, 조직, 자연신에 대한 신앙 등 각종 척도를 사용해 그들의 진화가 어느 지점에 이르렀는지 탐구했다. 민족학이 민족지로 전환되면서 이러한 척도는 한쪽으로 밀려났다. 민족지는 문화의 내적 의미를 강조하며 모든 문화가 서로 다른 내적 의미 체계를 지녔음을 부각했고, 각 문화를 '진화 정도'에 따라 비교하는 태도를 배제했다. 민족지학자는 먼저 해당 문명의 내부로 최대한 진입해 그것을 상세하게 기록하고자 했고, 겉으로 드러난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 사상과 그것이 외적 행위와 맺는 관계 모두를 기술하려 했다."(235-6)
"모든 문화에는 저마다 자신의 체계에서 당연시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평소 당연시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민족지학자나 민족지 조사와 기록 훈련을 받은 인류학자는 〈현대 생활을 인류 생활의 보편적 규범이라 여기는〉 잘못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활동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그와 같은 길을 따라 더 먼 곳까지 이르렀다. 그는 모든 본성과 천성에 대한 논의는 '지식/권력'이 작동한 결과물이며, 가장 큰 권력은 진리를 구축하는 권력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볼 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지식을 진리로 격상시킨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에 부합하지 않는 현상을 배제하고 자신의 생활이나 습관을 진리로 드높여 차이를 제거하거나 억압한다. 레비스트로스는 푸코처럼 극단적인 입장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를 포함한 당시의 많은 인류학자가 인류 행위에 대한 기존의 보편적 준칙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246-7)
11장 이원 대립: 레비스트로스 사상의 핵심
"레비스트로스에게는 '생각하기 좋은 것'good for thinking이 가장 중요하다. 그가 볼 때 특정 문화의 감각적 선호는 내재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세계 분류로부터 결정된다. 카두베오족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신체 그림은 표층적인 시각적 즐거움보다는 심층적인 세계관과 이상理想에 의해 결정된다. 신체 그림의 도안은 그들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내포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진정 'good for looking'(보기 좋은 것)이 아니라 'good for thinking'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훗날 『신화학』에서 레비스트로스는 '날것과 익힌 것'의 기본 대립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우리에게 전한다. 특정 문화에서 어떤 음식은 먹을 수 있고 어떤 음식은 먹을 수 없다고 여기는 기준은 미각이 아니라 그 배후의 세계 분류 의식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음식이 사람들에게 맛있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good for eating'(먹기 좋은 것) 때문이 아니라 'good for thinking' 때문인 것이다."(258)
"우리는 정신분석학의 관점으로 돌아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원적 철학 분석 체계가 레비스트로스의 가장 근원적인 문화 관찰 방법의 배경이 되었다고." "이분법 또는 이원론은 사물을 두 측면으로 나누는데, 이 두 측면이 서로 맺은 다양한 관계는 레비스트로스가 가장 좋아하고 또 가장 잘 운용하는 문화 해석 양식이자 그가 보기에 가장 근본적인 문화적 이미지였다. 인류 문명의 오묘함은 어떻게 그 이원성을 운용해 두 측면을 서로 협력시키거나 대립시켜 보다 고차원적인 새로운 이원 관계를 형성하는가에 있다. 즉 대립 속에 존재하는 협력, 협력 속에 존재하는 대립이 서로 나선형을 그리며 상승해 보다 높은 차원의 이원적 조합을 이루는 것이다. 인류 문명의 모든 기제는 서로 층위가 다른 이원적 대상들의 운동에 포함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 이론의 핵심 역량인 동시에 치명적인 결함은 그 이분법적이고 이원로적인 개념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265-70)
12장 앞을 계승하고 뒤를 잇다
"특히 말리노프스키 이래 인류학은 객관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고,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인류학자의 현대적 편견을 억제하려 했다. 그리고 인류학자에게 멀리 떨어진 야만 문화를 '여실히' 기록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다른 태도를 취했다. 기억이 이후의 경험이 미치는 간섭을 배제할 수 없는 것처럼, 야만에 대한 기록 역시 현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아가 현대의 간섭을 의식하기 때문에, 우리는 도리어 그와 같은 야만 문화의 특수성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후대의) 드뷔시 음악이 일찍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쇼팽 음악의 의미를 도드라지게 했던 것처럼, 현대 문명은 야만인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객관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야만 문화의 가치를 부각시킬 수 있다." "이 역시 현대적 편견인가?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편견을 통해 야만에 가치와 존엄을 부여한 정의正義다. 그것은 '시학적 정의' 혹은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 할 수 있다."(295-6)
13장 먼 여행의 의의
"인류학자의 여정은 출발 전에 이미 결정된다. 대다수 인류학자는 미리 설정된 틀에 따라 탐사의 의의가 높다고 여겨지는 지역으로 떠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달랐다. 그는 여정 중에 억누를 수 없었던 감정을 진실하게 써 내려갔다. 외딴 곳은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다. 외딴 지역에 반드시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그는 그 지역에서 끊임없이 익숙한 현상을 발견했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으며, 심지어 자신을 저주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인류학자들은 자신의 기대가 어긋난 데서 오는 실망감과 허무함을 진실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레비스트로스의 내면에 이미 인류 문화를 하나의 총체로 이해하려는 신념이 줄곧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인류 문화의 구조와 총체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그 구조와 총체적 의미를 발견하고 증명하려 한 것이지, 그들의 문화에서 상이한 면모를 발견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308-9)
"레비스트로스는 고백한다. 진정한 인류학자는 첫 번째 현지 조사를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온 후 다시 현지 조사를 떠나지 않는다고. 한 번은 꼭 가 봐야겠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한 번의 여행으로 특별한 현상에 대해 가졌던 매혹에서 빠져나와 다양한 현상의 한계와 시시함을 냉정하게 꿰뚫어 보고 인류학의 진정한 목적을 발견했다면, 그는 앞으로 탐구해야 할 대상을 원래 살던 환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즉 그는 이제 자신이 살고 있는 익숙한 환경에서도 구조를 볼 수 있는 안목과 재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니 다시 여정을 떠날 이유가 있겠는가? 또다시 현지 조사를 떠나는 인류학자는 여전히 기이한 현상을 조사하고 기록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그 현상의 한계와 시시함을 간파하지 못한 사람이다. 반면 문화와 사회 현상의 유한성을 간파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구조인류학자가 될 수밖에 없다."(313-4)
14장 부단히 확대되는 구조
"레비스트로스 이후 라캉의 구조주의 정신분석이 등장했다. 라캉은 레비스트로스가 언어학에서 차용해 인류 문명을 분석한 방법으로 개인 심리와 정신을 연구했다. 라캉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의 정신은 고정된 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 구조는 외부에서 온 자극을 유형화하고 정리하도록 우리를 지배한다. 또한 그러한 작용은 임의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개별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라캉은 구조언어학과 구조인류학이 고찰한 집단 현상의 기초를 더 파고들었다. 그는 인간이 언어 구조와 문명 구조를 집단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각 개인의 내부에 그러한 정신 구조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 정신 구조가 그와 같이 유한한 구조 형식 속에서만 인간이 감관과 심리 정보를 다루도록 제한하기 때문에 인간과 외부 세계의 관계 양상은 무한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류는 오로지 유한한 형식하에서만 사회와 문명을 구축할 수 있다."(330)
"레비스트로스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예로 푸코의 구조주의 지식사智識史가 있다. 푸코는 구조주의의 핵심 주장을 받아들여 〈관계가 어떠한 개별 구성원이나 개별 요소보다 중요하다〉고 보았고, 이러한 원칙을 통해 지식을 재정리함으로써 기존과는 구별되는 지식사를 수립했다. 그는 분리와 구분의 방식으로 지식을 보지 않았다. 즉 그는 철학, 문학, 예술, 역사 등의 분과를 구분해 연구하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지식 사이의 관계에 주목했고, 지식의 생산에서 성립까지를 결정하는 구조의 연구에 가치를 두었다. 푸코는 이러한 연구를 '지식고고학'이라 불렀다. 그는 칸트, 헤겔, 피히테 등 철학자를 시간순으로 나열해 사상의 변화를 고찰하지 않았다. 마치 고고학자가 유적지를 발굴하듯, 하나의 층위에서 발견된 모든 사물을 하나로 연결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분석을 거쳐 푸코는 서로 다른 지식 간의 관계를 결정하는 요소가 바로 '권력'임을 밝혀냈다."(330-1)
# 그 외 : 롤랑 바르트의 문학구조주의(문학작품이란 심층적인 언어 문법과 문화 문법 간의 상호 교차의 결과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