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 혁명 - 양자물리학 100년사
만지트 쿠마르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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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거인들의 만남


"양자(quantum)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막스 플랑크였다. 1900년에 그는 빛을 포함한 모든 전자기 복사가 다양한 크기의 에너지 덩어리로 방출되거나 흡수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플랑크는 그런 에너지 덩어리를 〈quantum〉이라고 부르고, 복수로 〈quanta〉라고 썼다. 에너지가 양자라는 아이디어는, 에너지가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나오듯이 연속적으로 방출되거나 흡수된다는 오랜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뉴턴의 물리학이 지배하는 거시적 일상의 세계에서는 에너지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여러 크기의 방울로 교환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원자와 원자보다 작은 세상은 양자의 영역이다." "결국 원자 내부에 존재하는 전자의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양자물리학(quantum physics)에 따르면, 원자 속에 들어 있는 전자는 중간을 거치지 않고도 마술적으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양자화된 에너지를 방출하거나 흡수한다."(10-2)


"1920년대 초에 이르자, 즉흥적이고 단편적인 근거에서 시작된 양자물리학에 확실한 기초나 논리적 구조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런 혼란과 위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이라고 알려지게 될 용감한 새로운 이론이었다. 전자들이 원자핵 주위를 회전하는 작은 태양계라고 생각하던 원자 모형은 시각화할 수 없는 새로운 모형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1927년에 독일의 양자역학 신동으로 알려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자신도 그 중요성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식에 어긋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에 따르면, 입자의 정확한 속도를 알게 되면 그 입자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게 된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양자역학의 방정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고, 양자 수준에서 실재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12-3)


1장 양자


"클라우지우스에 따르면, 엔트로피는 물체나 시스템을 드나드는 열의 양을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온도로 나눈 값으로 정의된다. 500도의 뜨거운 물체가 250도의 차가운 물체에 1000단위의 에너지를 빼앗기는 경우에 뜨거운 물체의 엔트로피는 -1000/500=-2만큼 줄어든다. 250도의 차가운 물체는 1000단위의 에너지를 얻기 때문에 엔트로피가 +1000/250=+4만큼 늘어난다. 그래서 뜨거운 물체와 차가운 물체를 합친 시스템의 전체 엔트로피는 2엔트로피 단위(에너지/온도)만큼 늘어난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실제 변화는 엔트로피의 증가 때문에 비가역적이 된다. 그것이 바로 열이 차가운 것에서 뜨거운 것으로 자발적으로 또는 저절로 이동하는 변화를 막아주는 자연의 방법이다. 엔트로피가 변하지 않는 이상적인 과정만 가역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가역적 과정은 물리학자의 마음에서는 일어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의 엔트로피는 언제나 최댓값을 향해서 증가한다."(28)


"볼츠만 법칙에 따르면, 엔트로피는 시스템이 특별한 상태에 있을 확률을 나타내는 척도이다. 예를 들어 카드를 잘 섞으면 엔트로피가 큰 값을 가지는 무질서한 상태가 된다. 에이스에서 킹에 이르는 순서로 배열된 상자에서 꺼낸 새 카드는 엔트로피가 작은 값에 해당하는 잘 정리된 상태이다. 볼츠만에게 열역학 제2법칙은 낮은 확률과 낮은 엔트로피의 시스템이 확률이 더 큰 높은 엔트로피의 시스템으로 진화하는 변화에 대한 것이었다. 제2법칙은 절대적인 법칙이 아니다. 뒤섞은 카드를 다시 섞으면 정리가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스템도 무질서한 상태에서 더 정돈된 상태로 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천문학적으로 낮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기까지는 우주 나이의 몇 배에 해당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플랑크는 열역학 제2법칙이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엔트로피는 언제나 증가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볼츠만의 통계적 해석에서는 엔트로피가 거의 언제나 증가한다."(42)


"볼츠만의 기법을 응용한 플랑크는 진동자가 진동수에 비례하는 에너지의 덩어리를 흡수하거나 방출하는 경우에만 자신의 흑체 복사 분포 공식을 유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플랑크에 따르면, 훗날 그가 양자라고 부른 몇 개의 동일하고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에너지 요소〉가 주어진 진동수로 방출되는 에너지를 구성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체 계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플랑크는 자신의 공식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에너지(E)를 hv 크기의 덩어리로 잘라야만 했다. 여기서 v는 진동자의 진동수이고, h는 상수이다. 예를 들어, E=hv 공식에서 진동수가 20이고, h가 2라면, 에너지의 양자는 각각 20*2=40의 크기를 갖게 된다. 이 진동수에서 가능한 총 에너지가 3,600이라면, 3600/40=90개의 양자가 그 진동수의 진동자 10개에 분포하게 된다. 플랑크는 볼츠만으로부터 이 양자들이 진동자들 사이에 분포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분포를 알아내는 방법을 배웠다."(43)


# 흑체 복사 : 한 물체가 뜨거워지면 열을 내게 되는데, 이를 복사(radiation)라고 부른다. 고체에서 방출되는 복사를 조사하면 여러 가지 파장 또는 진동수를 가진 빛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물체나 그 표면에 부딪히는 복사열의 일부는 흡수하고 나머지는 반사한다. 특히 표면에 부딪히는 모든 복사를 흡수하는 경우 이런 물체를 흑체(black body)라고 부른다. 물론 흑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 즉 복사열을 방출도 한다. 19세기말에 물리학자들은 흑체에서 어떻게 여러 가지 진동수를 가진 복사가 나오며 이들은 표면의 온도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를 많이 연구하였고 여기서 양자론이 시작되었다.


"플랑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너무나도 훌륭하고 기대하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했던 탓에 그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의 진동자는 수도꼭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처럼 연속적으로 에너지를 흡수하거나 방출할 수 없다. 그 대신 작고 쪼갤 수 없는 E=hv를 단위로 하는 불연속적인 방법으로 에너지를 얻거나 잃을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v는 진동자의 진동수인데, 진동자가 흡수하거나 방출할 수 있는 복사가 가지고 있는 진동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거시적 규모의 진동자들이 플랑크의 원자 규모의 진동자처럼 행동하지 않는 이유는 h가 0.000000000000000000000000006626 에르그 초 또는 6.626을 1,000조의 조로 나눈 값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플랑크 공식에 따르면, 에너지의 증가나 감소에서 h보다 더 작은 간격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h의 값이 지나치게 작기 때문에 진동자나 아이들의 그네나 진동하는 추와 같은 일상의 세상에서는 양자 효과가 나타나지 않게 된다."(44-5)


"아인슈타인 본인이 〈아주 혁명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상대성이 아니라 플랑크의 양자 개념을 빛과 복사(輻射)에까지 확장한 이론이었다." "빛이 파동 현상이라는 것은 반세기 이상 보편적으로 인정되어왔던 사실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생성과 변환에 대한 발견적 견해」라는 논문에서 빛이 파동이 아니라 입자형의 양자로 구성된 것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플랑크는 흑체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에너지가 불연속적인 덩어리인 양자로 흡수되거나 방출된다는 아이디어를 도입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전자기 복사 자체는 물질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교환하는 메커니즘에 상관없이 연속적인 파동 현상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혁명적인 견해에서는 빛을 포함한 모든 전자기 복사가 파동적인 것이 아니라 작은 조각인 광양자로 쪼개져 있다는 것이다. 그후 20년 동안 그가 제시한 광양자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51)


"1907년에 방사성 붕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토륨과 라디오토륨이라는 두 원소가 물리적으로는 다르지만 화학적으로는 동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모든 화학적 시험에서 두 원소를 구별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5년 동안 화학적으로 구분할 수 없는 원소들이 계속해서 추가로 발견되었다. 당시 글래스고 대학교에 근무하던 소디는 새로운 라디오원소들과 〈완벽한 화학적 동등성〉을 공유하는 원소들 사이의 유일한 차이가 원자량이라고 주장했다. 체중이 조금 다른 점을 빼면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쌍둥이와 같다는 것이다. 1910년에 소디는 훗날 자신이 〈동위원소(isotope)〉라고 부르게 된 화학적으로 구별할 수 없는 라디오원소들이 사실은 똑같은 원소의 서로 다른 형식일 뿐이기 때문에 주기율표에서 같은 위치를 공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런 제안은 수소에서 우라늄에 이르는 원소들을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로 나열해놓은 주기율표로 표현되는 원소에 대한 기존의 조직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109-10)


"닐스 보어는 방사능이 원자가 아니라 핵 현상이라는 핵심적인 사실을 파악했다. 그가 한 종의 라디오원소가 알파선, 베타선, 또는 감마선을 방출하면서 다른 종으로 붕괴하는 과정을 핵 내부의 사건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보어는 방사능이 핵에서 비롯된다면 +92의 전하를 가진 우라늄이 알파 입자를 방출하면서 우라늄-X로 변하는 과정에서 양전하 2단위를 잃어버리면서 +90의 전하를 가진 핵이 남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핵은 본래의 92개 원자적 전자 모두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곧바로 2개의 전자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중성 원자가 된다. 방사성 붕괴의 결과로 만들어진 모든 새로운 원자는 곧바로 전자를 얻거나 잃어버려서 전기적 중성을 회복하게 된다. +90의 핵 전하를 가진 우라늄-X는 토륨의 동위원소이다. 보어는 그런 원소들이 모두 〈똑같은 핵 전하를 가지고 있으면서 핵의 질량과 고유 구조에서만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112)


"보어는, 완벽하게 적용되어왔던 뉴턴과 맥스웰의 물리학에 따르면, 전자가 핵에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안정성의 문제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러더퍼드 원자를 구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소극적인 플랑크에 의해서 발견되어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널리 알려지게 된 양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복사와 물질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에너지가 연속적인 양이 아니라 여러 크기의 덩어리로 흡수되거나 방출된다는 사실은 유서 깊은 '고전'물리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보어도 아인슈타인의 광양자를 믿지 않았지만, 보어가 보기에는 원자가 〈어떤 식으로든지 양자에 의해서 통제된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보어는 전자가 고전물리학에서 허용되는 모든 가능한 궤도 중에서 몇 개의 선택된 〈정상 상태(stationary state)〉의 궤도만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21-2)


"보어는 고전물리학과 양자물리학의 멋진 칵테일을 이용해서 자신의 원자를 만들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기존 물리학의 교리에 어긋나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원자 내부의 전자들이 정상 상태에 해당하는 특정한 궤도만 차지할 수 있고, 전자들이 그런 궤도에 있는 동안에는 에너지를 방출할 수 없고, 원자는 가장 낮은 에너지의 〈바닥 상태〉를 포함하는 일련의 불연속적인 에너지 상태 중 하나에만 있을 수 있고, 전자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높은 에너지의 정상 상태에서 낮은 에너지의 정상 상태로 도약할 수 있고, 두 상태 사이의 에너지 차이가 에너지의 양자로 방출된다는 것이다. 그의 모형은 원자 반지름과 같은 수소 원자의 다양한 성질을 정확하게 예측했고, 선 스펙트럼의 생성에 대한 물리적 설명을 제공했다. 훗날 러더퍼드는 양자원자가 〈물질에 대한 인간의 승리〉이고, 보어가 그것을 밝혀내지 못했다면, 선 스펙트럼의 신비를 해결하기까지에는 〈몇 세기가 걸렸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했다."(132-3)


"뉴턴 이전부터 시간과 공간은 고정되어 있고,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이고, 우주의 끝없는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라고 알려져 있었다. 우주는 질량, 길이, 시간이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무대였고, 모든 관찰자에게 사건들 사이의 공간적 거리와 시간 간격이 동일하게 보이는 극장이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질량, 길이, 시간이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공간적 거리와 시간 간격은 관찰자의 상대적 움직임에 따라서 달라진다. 지구에 남아 있는 한 쌍둥이에 비해서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여행하는 또다른 쌍둥이 우주인에게 시간은 느려지고(움직이는 시계 바늘이 느려진다), 공간은 수축되고(움직이는 물체의 길이가 줄어든다), 움직이는 물체의 질량은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 '특수'상대성의 이런 결과는 모두 20세기에 수행된 실험을 통해서 확인되었지만, '특수'이론에는 가속(加速)이 포함되지 않았다. '일반'상대성에는 가속이 포함되었다."(148-9)


"양자가 원자 영역의 실재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바로잡기 위한 도전이었던 것처럼,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인류는 공간과 시간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할 수 있었다. 중력에 대한 그의 일반상대성은 다른 사람들을 우주의 시작인 빅뱅으로 데려다주었다. 뉴턴의 중력이론에서는, 태양과 지구의 경우처럼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의 크기가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두 물체의 질량 중심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뉴턴 물리학에서 서로 접촉하지 않은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은 신비스러운 〈원격작용〉의 힘이다. 그러나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중력은 큰 질량의 존재 때문에 생기는 공간의 휘어짐에 의해서 나타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것은 어떤 신비스럽고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끌어당기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의 거대한 질량에 의해서 공간이 휘어지기(warp)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물질은 공간을 휘어지게 만들고, 휘어진 공간은 물질에게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알려준다."(149)


"미국의 젊은 실험학자 콤프턴은 산란된 X-선의 파장이 언제나 '1차' 또는 입사 X-선보다 조금씩 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파동이론에 따르면, 산란된 빛의 파장은 언제나 정확하게 같아야만 한다. 콤프턴은 파장(진동수)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2차 X-선이 표적에 쪼인 1차 X-선과 같지 않다는 뜻이라고 이해했다." "X-선이 양자로 나타난다면, X-선의 양자는 그런 충돌에 의해 산란되면서 에너지를 잃게 되고, 충돌에 의해서 전자가 튕겨져나가게 된다. X-선 양자의 에너지는 E=hv(h는 플랑크 상수, v는 진동수)로 주어지기 때문에 에너지의 손실은 진동수의 감소로 나타나고, 진동수는 파장에 반비례하기 때문에 산란된 X-선 양자의 파장은 늘어나게 된다." "X-선이 전자에 의해 산란되면서, 파장이 늘어나는 〈콤프턴 효과〉는 그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공상으로 치부하던 광양자의 존재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였다." "결국 아인슈타인의 광양자(light-quantum)는 광자(photon)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167-9)


2장 청년 물리학


"하이젠베르크는 1924년 2월 보어에게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의문은 정상 상태에 있는 전자의 궤도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라고 했다. 이미 배타원리를 찾아내는 길에 들어서서 전자 껍질이 채워지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파울리는 12월에 보어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서 자신이 제기한 의문에 대한 답을 밝혔다. 〈우리는 원자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편견의 사슬에 묶어두지 말아야 합니다. 제 의견으로는 전자 궤도가 일상적인 역학적 의미에서 존재한다는 가정도 그런 편견에 속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의 개념을 경험에 맞추어야만 합니다.〉 이제 타협을 포기하고, 편안하고 익숙한 고전물리학의 틀 안에서 양자 개념을 받아들이려는 노력도 그만두어야 했다. 과학은 관찰할 수 있는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만 하고, 오직 관찰할 수 있는 양만을 근거로 이론을 구축해야 한다는 실증주의의 신조를 진보적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인물이 바로 하이젠베르크였다."(220)


"슈뢰딩거는 1926년 2월 20일에 자신의 새 이론에 파동역학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했다. 슈뢰딩거는 물리학자들에게 조금의 시각화조차 허용하지 않는 차갑고 소박한 행렬역학과는 전혀 달리 하이젠베르크의 고도로 추상적인 형식보다 19세기 물리학에 더 가까운 방법으로 양자 세계를 설명할 수 있도록 해주는 편하고 안심할 수 있는 대안을 제공했다. 슈뢰딩거는 신비스러운 행렬 대신 모든 물리학자들이 사용하는 수학 도구 상자의 필수품인 미분 공식을 이용했다.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에서 제시되는 양자 도약과 불연속성은 원자의 내부 작동을 살펴보려는 사람들이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슈뢰딩거는 물리학자들에게 더 이상 〈직관을 억누르고, 전이 확률이나 에너지 레벨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만 이용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들이 파동역학을 열렬하게 환영하고, 곧바로 그것을 받아들였던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242-3)


"같은 문제에 적용하면 두 이론 모두 똑같은 답을 주었다. 행렬역학과 파동역학 사이에 관계가 있다면,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슈뢰딩거는 획기적인 첫 논문을 완성하자마자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파동 방정식과 행렬 대수를 이용함으로써 형식과 내용에서 전혀 다른 것처럼 보였던 두 이론은 사실 수학적으로 동등한 것이었다. 두 이론이 정확하게 똑같은 답을 주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이론의 수학적 표현 방식에서 물리적 해석으로 바뀌면서, 두 이론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란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부터 힘을 잃어버렸다. 두 이론이 기술적으로 동등할 수 있겠지만, 수학 너머에 있는 실재(reality)의 본질은, 슈뢰딩거의 경우에는 파동과 연속적인 것이었고, 하이젠베르크의 경우에는 입자와 불연속적인 것으로 전혀 다른 것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이론이 실재의 진정한 본질을 담고 있다고 확신했다.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옳을 수가 없었다."(244-5)


"슈뢰딩거는 입자의 존재를 포기했지만, 보른은 입자 개념을 구해내기 위한 시도로 파동함수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물리학의 핵심 교리였던 결정론(determinism)에 도전했다." "보른은 원자와 전자의 충돌이 일어난 후에는 전자가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물리학으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전자가 주어진 각도를 통해서 산란될 확률을 계산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즉, 파동함수 자체는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고, 신비스럽고 유령 같은 가능성의 영역에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전자가 원자와 충돌한 후에 산란될 수 있는 모든 각도와 같은 추상적인 가능성을 다루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보른의 확률 해석을 묵살해버렸다. 그는 전자나 알파 입자가 원자와 충돌하는 것이 〈절대적 우연〉, 즉 〈완전히 비결정론적〉이라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보른의 주장이 옳다면, 양자 도약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인과성은 다시 위협받게 된다."(253-5)


"어느 늦은 저녁,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이론이다〉라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떠올린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이 주어진 순간에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모두를 정확하게 결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 또는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지만,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둘 중 하나를 정확하게 알아낸 것에 대해서 자연이 요구하는 대가였다. 양자적 타협의 춤에서 하나를 더 정확하게 측정할수록 나머지 하나는 정확하지 않게 측정되거나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이 옳다면, 하이젠베르크는 그것이 원자 세계를 탐구하는 어떤 실험으로도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서 주어지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뜻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그런 주장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그런 실험이 포함된 모든 과정이 〈양자역학 법칙을 반드시 만족시켜야〉 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268-9)


"하이젠베르크는 전자의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결정할 수 없는 것은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는 행위 때문이라고 믿었다. 전자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전자 보기〉에서 사용된 광자에 충돌한 전자는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산란된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인으로 파악한 것은 측정 행위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교란(disturbance)이었다." "그것은 p x q가 q x p와 같지 않다는 비교환성에 감춰진 자연의 고유한 불확정이었다. 전자의 위치를 알아내는 실험에 이어서 전자의 속도(따라서 운동량)를 측정하는 실험을 하면, 두 개의 정밀한 값이 주어진다. 두 값을 함께 곱하면 그 결과는 A가 된다. 그러나 실험을 반대 순서로 수행해서 속도를 먼저 측정한 후에 이어서 위치를 측정하면 전혀 다른 결과 B가 된다. 어떤 경우이든 첫 번째 측정이 두 번째 결과에 영향을 주는 교란을 만들어낸다. 실험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교란이 없었다면 p x q는 q x p와 같아질 것이다."(271-2)


"양자 영역에서 〈위치〉는 무엇인가? 하이젠베르크의 입장에서는 위치나 운동량을 측정하는 실험이 없으면 분명한 위치나 분명한 운동량을 가진 전자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는 것이 〈위치를 가진 전자〉를 만들고, 운동량의 측정이 〈운동량을 가진 전자〉를 만든다. 분명한 '위치'나 분명한 '운동량'을 가진 전자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그것을 측정하는 실험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의미가 없다." "움직이는 물체는 실제로 측정을 하는지에 상관없이 주어진 시각에 공간에서의 정확한 위치와 정확한 운동량을 가진다는 것이 고전물리학의 명백한 기본 교리였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절대적으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전자가 동시에 '위치'와 '운동량'이 정확한 값을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전자가 그런 값을 가지거나 '궤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관찰이나 측정의 영역을 넘어서는 실재의 본질에 대한 추론은 의미가 없다."(273-4)


"보어는 전자나 광선이나 물질이나 복사가 입자나 파동의 측면을 드러내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실험을 사용하는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에 대해서 완고했다. 입자와 파동은 현상이 나타나도록 해주는 상보적이면서 상호 배타적인 측면이기 때문에 실제 실험이나 가상적인 실험이거나 상관없이 두 측면이 모두 드러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 "보어는 양자 세계에서 현상을 관찰하는 행위에 의해서 교란이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1927년 10월에 그는 논문 초고에서 더 구체적으로 〈중요한 영향이 없이는 원자 현상의 관찰이 불가능하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축약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이런 영향의 원인이 측정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측정을 수행하기 위해서 파동-입자 이중성의 어느 한 면을 선택해야만 하는 실험자에게 있다고 믿었다. 보어는, 불확정성은 그런 선택을 위해서 자연에게 치러야 할 대가라고 주장했다."(282-3)


3장 실재에 대한 거인들의 격돌


"과학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관찰하고 있는 것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자연의 수동적 관찰자라는 무언의 가정을 근거로 실험을 수행한다. 대상과 주체,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에는 면도날처럼 분명한 구분이 있었다. 그런데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원자 영역에서는 그런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보어는 그것을 새로운 물리학의 '핵심'인 〈양자가설(quantum postulate)〉이라고 불렀다. 자연에서 양자의 비(非)분할성 때문에 나타나는 불연속성의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서 도입한 용어였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입장에서는 '가능성'에서 '실재'로의 전환은 관찰의 행위 과정에서 일어난다. 관찰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본적인 양자적 실재는 없다. 아인슈타인의 입장에서는 관찰자와 독립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 과학적 추구의 핵심이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 사이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논쟁은 물리학의 영혼과 실재의 본질에 대한 것이었다."(300-1)


"아인슈타인이 여전히 보어와 코펜하겐 해석에 도전하는 동안, 이론에 의지하게 된 더 젊은 세대의 물리학자들에게는 양자역학이 〈물리학의 대부분과 화학의 전부〉를 설명해준다는 폴 디랙의 평가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넓게 확산되고 있었다. 이론이 현실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상황에서 연장자 몇 명이 이론의 의미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원자물리학의 문제들이 차례로 해결되고 있던 1920년대 말에 이르자 관심은 원자에서 원자핵으로 옮겨갔다. 1930년대 초에는 케임브리지의 제임스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하고, 로마의 엔리코 페르미와 그의 연구팀이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킬 때 일어나는 반응을 연구하면서 핵물리학의 새로운 프론티어가 열리기 시작했다. 1932년에는 러더퍼드의 캐번디시 연구실에서 채드윅의 동료였던 존 콕크로프트와 어니스트 월턴이 최초의 입자가속기를 만들어 원자의 핵을 깨뜨리는 실험에 사용했다."(341-2)


"보어와 아인슈타인 사이에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두 사람이 모두 알고 있었다. 양자역학의 해석에 대한 그들의 논쟁은 실재의 위상에 대한 철학적 신념에까지 이어졌다. 그런 것이 정말로 존재할까? 보어는 양자역학이 자연에 대한 완전한 근본이론이라고 믿고, 그 위에 자신의 철학적 세계관을 세웠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양자적 세상은 없다. 추상적인 양자역학적 서술이 있을 뿐이다. 물리학의 역할이 자연이 어떤 것인지를 찾아내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물리학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반대로 아인슈타인은 대안적 접근을 선택했다. 그가 양자역학의 평가에 이용한 근거는 인과적이고 관찰자와 관계가 없는 실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확고한 믿음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했다."(362-3)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최고의 이론이라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힘과 물질점(物質點)이라는 기본 개념으로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것(고전역학의 양자 보정)이지만 실재 사물에 대해서는 불완전한 표현〉이었다. 그러면서도 아인슈타인은 고전물리학의 개념들이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보어는 거시적 세계가 고전물리학과 그 개념들로 서술되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시간 낭비라고 주장했다. 그는 고전적 개념을 지키기 위해서 상보성의 틀을 개발했다. 보어에게는 측정 도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본적인 물리적 실재는 없었고, 하이젠베르크가 지적했듯이 그것은 〈우리가 양자이론의 역설, 즉 고전적 개념을 사용해야 하는 필요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고전적 개념을 지키려는 보어-하이젠베르크의 요구였고, 아인슈타인은 그것을 〈안정제 철학(tranquilizing philosophy)〉이라고 불렀다."(364)


4장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할까?


"1964년에는 전파 천체물리학자 아노 펜지어스와 로버트 우드로가 대폭발(빅뱅)의 메아리를 탐지했고, 진화생물학자 빌 해밀턴은 사회적 행동의 유전적 진화이론을 발표했고, 이론물리학자 머리 겔만이 쿼크라고 부르는 새로운 기본입자들의 존재를 예측했다. 그해에 등장한 기념비적인 과학적 돌파구는 이들 세 가지만이 아니었다. 물리학자이자 과학사학자인 헨리 스태프에 따르면, 〈과학에서 가장 심오한 발견〉인 벨 정리(Bell's theorem)에 대적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을 이용해서 성과를 올리는 일에 너무 바빠서 아인슈타인과 보어가 그 의미와 해석에 대해서 벌였던 미묘한 논쟁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른네 살의 아일랜드 물리학자 존 스튜어트 벨이 서로 상반되는 두 철학적 세계관을 구별해줄 수 있는 수학적 정리를 발견한 것이다."(375-6)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물리적으로 서로 상호작용할 수 없는 한 쌍의 상관된 입자 A와 B를 대상으로 하는 가상의 실험을 생각해냈다. EPR은 입자 A에 대한 측정이 물리적으로 입자 B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EPR은 두 입자 중 하나에 대해서만 이루어지는 측정 행위가 〈물리적 교란〉을 일으킨다는 보어의 역공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두 입자의 성질이 서로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위치 같은 입자 A의 성질을 측정함으로써 입자를 교란시키지 않고도 B의 대응하는 성질을 측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EPR의 목표는 입자 B가 측정되는 것과는 독립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런 사실을 서술하지 못하는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보어는 한 쌍의 입자는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하나의 시스템(界)을 구성한다고 분명하게 반박했다. 즉 어느 입자를 측정하면 다른 입자도 측정하게 된다는 것이다."(378)


# EPR 논문 : 1935년,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이 함께 작성한 「물리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은 완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Can Quantum 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라는 제목의 논문


"EPR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이라는 두 가지 성질을 이용했지만, 데이비드 봄은 양자 스핀 하나만을 사용했다. 1925년에 젊은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헤오르헤 올렌베크와 사무엘 하우드슈미트가 처음 제안했던 입자의 양자 스핀은 고전물리학에서는 대응하는 개념을 찾을 수 없었다. 전자는 오직 두 개의 가능한 스핀 상태, 〈스핀-업〉과 〈스핀-다운〉의 상태를 가지고 있다. 봄이 수정한 EPR 실험에서는 스핀 0인 입자가 자발적으로 붕괴되는 과정에서 두 개의 전자 A와 B가 만들어진다. A와 B가 결합한 스핀은 최초의 입자가 가졌던 스핀 0이어야 하기 때문에, 한 전자가 스핀-업이면, 다른 전자는 반드시 스핀-다운이 되어야만 한다. 두 입자 사이에 물리적 상호작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충분히 멀리 떨어질 때까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날아간 후에 스핀 검지기로 개별 전자의 양자 스핀을 정확하게 같은 시간에 측정한다. 벨은 그런 전자쌍에 대해서 수행된 동시 측정의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관계에 관심이 있었다."(386-7)


"보어에 따르면, 측정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전자 A와 전자 B는 모두 어떤 방향으로 미리 정해진 스핀값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관찰되기 전에는 전자들이 동시에 스핀-업과 스핀-다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유령 같은 겹침 상태에 있다." "전자 A는 그것을 결정하기 위한 측정이 A와 B로 구성된 시스템의 파동함수가 붕괴될 때까지 스핀의 x-성분을 가지고 있지 않다가, 붕괴가 일어나고 나면 비로소 스핀-업이나 스핀-다운이 된다. 바로 그 순간에 얽힌 짝 B는 우주의 반대쪽에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방향으로 반대의 스핀을 가지고 된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은 비국소적인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입자가 먼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부터 순간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없고, 그 성질은 측정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국소적 실재론'을 믿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 모두 그런 실험의 결과를 설명할 수 없었지만, 벨은 두 스핀 검지기의 상대적 방향을 변화시켜서 교착 상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냈다."(388-9)


"실험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과학이론은 수정되거나 폐기된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그동안의 모든 시험을 통과했다. 이론과 실험 사이에는 어떠한 문제도 없었다. 벨의 동료들은 거의 대부분, 나이에 상관없이 양자역학의 정확한 해석에 대한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은 물리학이라기보다는 철학의 문제─〈바늘 끝에 몇 명의 천사가 앉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 같은─라고 생각했다." "벨 정리는 그런 상황을 바꿔놓았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에서 아인슈타인이 강조하던 양자 세계가 관찰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물리적 효과는 빛보다 빨리 전달될 수 없다는 국소적 실재를 시험해볼 수 있게 되었다. 벨은 아인슈타인-보어 논쟁을 실험철학이라는 새로운 장으로 끌어들였다. 벨의 부등식이 성립한다면,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옳은 것이 될 것이다. 부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보어가 승자가 될 것이다. 이제 실험실에서 아인슈타인 대 보어의 경쟁이 시작되었다."(391)


"1981년과 1982년에 아스페와 그의 동료들이 레이저와 컴퓨터를 포함한 최신 기술 혁신을 이용해서 벨의 부등식을 시험할 수 있는 정교한 실험을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나 수행했다." "벨은 1983년 아스페가 박사학위를 받을 때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여전히 몇 가지 의혹이 남아 있었다. 양자적 실재의 본질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모든 가능한 틈새를 고려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검지기들이 어떤 식으로든지 서로 신호를 주고받을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광자가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 검지기의 바양을 무작위적으로 바꾸어주었다. 결정적인 실험이 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지만, 그 이후로 몇 년에 걸친 추가적인 개선과 다른 연구로 아스페의 최초 결과가 확인되었다. 모든 가능한 틈새가 메워진 실험은 아무도 하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벨의 부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인정했다."(394-5)


"벨은 오직 두 가지 가정을 사용해서 부등식을 유도했다. 첫째는, 관찰자와 관계가 없는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입자가 측정되기 전에도 스핀과 같은 확실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국소성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빛보다 빠른 영향을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저 멀리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순간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아스페의 결과는 이 두 가지 가정 중에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느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인가? 벨은 국소성을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은 세계가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관측되지 않더라도 세계가 실재하는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990년 10월 뇌종양으로 62세에 사망한 벨은 〈양자이론은 일시적 처방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더 나은 이론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의 정리는 아인슈타인과 국소적 실재에 조종(弔鐘)을 울렸다."(394-5)


"이제 코펜하겐 해석과 양자역학이 동의어로 간주되었지만, 휴 에버렛 3세처럼 여기에 도전하는 이들도 간혹 있었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우주 바깥에서 우주를 관찰하는 관찰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신 외에는 그런 관찰자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우주는 영원히 수많은 가능성의 겹침으로 남아 있을 뿐 실제로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이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측정의 문제이다. 양자적 실재를 가능성의 겹침으로 서술하고, 각각의 가능성에 확률을 부여하는 슈뢰딩거 공식에는 측정 행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양자역학의 수학에는 관찰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이론은 양자 시스템의 상태가 관찰이나 측정에 의해서 가능성이 사실로 바뀌는 과정에서 갑작스럽고 불연속적으로 변하는 파동함수의 붕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에버렛의 다중세계 해석에서는 모든 가능한 양자 가능성이 수많은 평행 우주에서 현실적인 존재로 공존하기 때문에 관찰이나 측정이 파동함수를 붕괴시켜야 할 필요가 없다."(403)


"다른 해석의 등장과 양자역학의 완전성이 심각하게 의심스럽다는 지적 때문에 보어와의 오랜 논쟁에서 아인슈타인에게 불리했던 오랜 판결 역시 재검토되면서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명예를 회복했다. 영국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즈 경은 〈보어의 추종자들이 주장했듯이 아인슈타인이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심각하게 '틀렸다'는 것이 정말 사실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1900년 12월에는 고전물리학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고, 거의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스 플랑크가 우연히 양자를 만나게 되었고, 물리학자들은 아직도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5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친 〈의식적인 고민〉으로도 자신이 양자를 더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의 희곡작가이며 철학자였던 고트홀트 레싱의 말을 위안 삼아 마지막까지 노력을 계속했다. 〈진실에 대한 열망은 진실에 대한 확실한 소유보다 더 소중하다.〉"(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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