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Ⅱ - 문명의 수수께끼를 풀다 1915~1939
피터 게이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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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문명의 해부학자 1915~1939


8장 전쟁과 인간


"메타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심리학 가운데 의식을 넘어서는, 또는 프로이트의 표현대로 하자면 의식 '뒤'에 있는 부분을 해명하려고 계획된 것이었다." "프로이트가 1915년에 '억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방식을 따르자면, 이 말은 주로 본능적인 소망을 의식에서 배제하기 위해 고안된 다양한 정신 활동을 뜻한다. 프로이트는 물었다. 애초에 왜 억압이 일어나는가? 충동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사실 쾌락을 주는 일이다. 따라서 정신이 만족을 주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이상해 보인다. 프로이트는 그 답을 자세하기 밝히지는 않지만, 답은 정신을 전장으로 보는 그의 입장에 함축되어 있다. 예상되는 쾌락 가운데 많은 수는 고통으로 변한다. 인간 정신은 한 덩어리로 이루어진 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은 자신이 몹시 원하는 것을 동시에 몹시 경멸하거나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다양하게 나타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런 내적 갈등의 가장 분명한 예다."(30-4)


"억압의 원초적 형태는 유아의 삶의 초기에 생기는데, 이후에 가지를 뻗어 나가며 그 검열 작업 속에 표현을 거부당하는 충동들만이 아니라 그 파생물들도 포함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정력적인 작업이 계속 반복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억압은 끊임없는 에너지의 소비를 요구한다.〉 억압된 것은 지운 것이 아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옛 속담은 틀린 것이다. 억압된 자료는 접근 불가능한 무의식의 다락방에 저장되며, 이곳에서 계속 번성하면서 만족시켜 달라고 다그친다. 따라서 억압의 승리는 기껏해야 일시적이며, 늘 의심스러운 것이다. 억압된 것은 대체물 형성 또는 신경증 증상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인간이라는 동물을 괴롭히는 갈등이 기본적으로 완화불가능하고 영속적이라고 본 것이다. 프로이트는 메타심리학에 관한 자신의 세 번째 논문인 〈무의식〉에서 그런 갈등이 벌어지는 무대의 지도를 그런대로 자세하게 그렸다."(34-5)


"무의식 이론은 일반 심리학에 대한 프로이트의 가장 독창적인 기여로 꼽힌다." "프로이트는 진짜 무의식적인 것과 그 순간에 우리 정신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명확하게 구별하기 위해 《꿈의 해석》에서 이미 했던 구분, 즉 전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을 다시 꺼내들었다. 억압된 생각과 감정, 나아가서 충동들을 그 원시적 형태로 보존하고 있는 곳은 무의식, 즉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막론하고 가장 폭발력이 강한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는 지저분한 창고였다. 프로이트는 충동이 매개 또는 위장 없이는 절대 의식이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역동적인 무의식은 이상한 곳이다. 소망들이 꽉 차서 넘칠 것 같으면서도, 의심을 환영하지 못하고 자연을 참지 못하고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무의식은 직접적인 조사로는 접근 불가능하지만, 정신분석가는 곳곳에서 무의식의 흔적을 발견한다. 프로이트는 빠른 속도로 써내는 메타심리학 논문에서 무의식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확실히 못 박아 두려 했다."(35-7)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루어진 대학살은 전장의 실제 전투에서뿐만 아니라 신문 지상의 호전적인 논설에서도 인간의 잔혹성에 관한 가혹한 진실을 보여주었으며, 프로이트도 그것을 보면서 공격성에 더 높은 지위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1915년 겨울 학기에 빈 대학에서 강연을 하면서 청중에게 문명화된 세계에 확산되고 있는 야만성, 잔혹성, 허위를 생각해보고, 기본적인 인간 본성에서 악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1914년 전쟁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공격성의 힘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쟁은 분석가들이 공격성에 관하여 그동안 해 오던 이야기를 확인해주었을 뿐이다." "프로이트는 훗날 그런 개념이 처음 정신분석 문헌에 나타났을 때 그 자신이 방어적으로 그런 충동을 거부했다고 회고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덧붙였다."(85-7)


"프로이트가 지체한 데에는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하필이면 아들러가 남성적 저항이라는 개념─프로이트의 훗날의 정의와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을 주창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선뜻 파괴적 충동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보다 앞서 리비도가 삶 못지않게 죽음도 목표로 삼는다는 점을 밝혔다는 융의 주장 또한 프로이트가 그것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소가 되었다. 또 그가 주저한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주제가 자신의 공격적 태도에 맞서 자기 보호적인 방어 작전을 구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공격성을 근본적 충동으로 보는 것이 인간 본성을 모독하는 낮은 평가라며 거부한다는 이유로 현대 문화를 비난했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주저하는 태도 또한 그 자신의 부인(否認)을 다른 사람들 탓으로 돌리는 투사의 한 조각처럼 읽힌다."(87-8)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보편적 에너지로 희석할─그는 융이 그렇게 했다고 비난했다─의도는 전혀 없었다. 또 리비도의 자리에 보편적인 공격적 힘을 대신 앉혀놓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그것이 아들러의 치명적인 실수라는 것이 프로이트의 주장이었다. 프로이트는 《쾌락 원칙을 넘어서》에서 융의 '일원론적' 리비도 이론을 분명하게 집어내, 이것을 자신의 '이원론적' 구도와 대비하고 비판했다. 프로이트는 임상적, 이론적, 미학적 이유 때문에 끝까지 확고한 이원론자의 자세를 유지한다. 더욱이 정신분석 이론의 초석인 억압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신 작용의 근본적인 분리를 전제한다. 프로이트는 억압하는 에너지와 억압당하는 내용을 분리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이원론에는 금방 파악되지 않는 미학적인 영역이 있다." "그의 글에는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사랑과 갈망, 그리고 전쟁 뒤에 등장한 삶과 죽음 등 대립들이 넘쳐난다."(88-9)


"모든 정신분석 치료에서 만나는 저항이라는 현상은 프로이트가 오래전에 밝혀낸 어려운 이론적 수수께끼를 제기한다. 저항을 하는 환자는 비참한 신경증 상태에 빠져들어 자신이 분석 과정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거나, 희미하게만 짐작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항과 억압의 발생지인 자아가 완전히 의식적일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일 그렇다면,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사이의 갈등에서 신경증을 끌어내는 전통적인 정신분석 공식에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해서, 〈정신 생활에 관한 메타심리학적 관점으로 가는 길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한, 우리는 '의식'이라는 증후의 의미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1915년에 쓴 이 구절은 프로이트의 이론화 속에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 있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그의 통찰의 전체적 결과물을 끌어내게 된 것은 《자아와 이드》에 와서였다."(113)


"프로이트가 말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자아를 〈세 겹으로 예속되어 있으며, 그 결과 세 겹의 위험에 시달리는 가엾은 존재〉로 본다. 자아는 〈외부 세계, 이드의 리비도, 가혹한 초자아에 시달리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이런 위험에 상응하는 불안에 시달리는 자아는 자신을 위협하면서 서로 전쟁을 벌이는 힘들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전능한 협상가와는 거리가 멀다. 자아는 이드가 세상과 초자아의 압력에 유순하게 굴복하게 하려고 애쓰는 동시에, 세상과 초자아가 이드의 소망을 따르게 하려고 노력한다. 자아는 이드와 현실 중간에 있기 때문에 〈아첨을 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거짓말을 하고자 하는 유혹에 굴복〉할 위험에 처해 있다. 〈훌륭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지지를 받는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정치가와 비슷한 것이다.〉" "자아는 가엾은 존재일지 모르지만, 내부와 외부의 요구에 대처하는 인류 최고의 도구인 것이다."(114-5)


"프로이트는 이렇게 썼다. 〈정상적이고 의식적인 죄책감(양심)은 해석에 어려움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비판적 재판관에 의한 자아 심판의 표현이다.〉 그러나 초자아는 더 복잡한 정신적 장치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초자아는 한편에서는 개인의 윤리적 가치를 품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행위를 관찰하고 판단하고 승인하고 벌한다. 강박 신경증 환자와 우울증 환자의 경우 그 결과로 초래된 죄책감이 의식에까지 떠오르지만, 다른 대부분의 경우에는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정신분석가는 상대적으로 접근이 어려운 괴로운 도덕적 불편함의 원천을 의식하게 되는데, 이것은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간신히 판독할 수 있는 단편적인 자취만 남긴다." "여기서 정신분석가는 〈정상적인 인간은 자신이 믿는 것보다 훨씬 부도덕할 뿐 아니라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도덕적이기도 하다〉는 언뜻 보기에 역설적인 진술을 기쁜 마음으로 인정할 수 있다."(116-7)


9장 프로이트의 안티고네


"프로이트가 (자신을 모범 삼아 정신분석가의 길에 들어선 막내딸) 〈안네를〉을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 딸은 그의 여생 동안 늘 가장 가까운 동맹자였으며 거의 동등한 동료였다. 1920년대 말 안나의 아동 분석에 관한 견해가 심한 공격을 당하자 프로이트는 사납게 딸을 방어했다. 반대로 안나 프로이트는 1930년대 중반에 발표한 자아심리학과 방어 기제에 관한 고전적인 논문에서 자신의 임상 경험에 의존하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글을 자신의 이론적 통찰의 주요한 권위적 전거로 삼았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소유욕이 강했으며, 남들이 아버지의 작업에 비판을 하는 기미만 있어도 민감하게 반응했고, 자신의 특권을 축소시킬 수도 있는 사람들─형제, 환자, 친구─을 질투했다. 1920년대 초에 두 사람은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그 뒤로도 계속 그런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167)


"말년에 프로이트는 딸 안나를 그의 안티고네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비록 사랑스러운 비유에 불과하더라도) '안티고네'의 의미는 너무 풍부하여 완전히 무시하고 갈 수는 없다. 이 이름은 프로이트와 오이디푸스의 동일시를 강조한다. 오이디푸스는 인류 비밀의 대담한 발견자였으며, 정신분석의 '핵심 콤플렉스'에 이름을 빌려준 영웅이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사랑한 자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이디푸스이 자식들이 모두 예외적으로 그와 가까웠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낳은 자식들이었으므로, 그들은 오이디푸스의 후손인 동시에 형제이기도 했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자식들 가운데 특출했다. 그녀는 오이디푸스의 용감하고 풍성스러운 동반자였다. 안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아버지에게 선택된 동지 역할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녀는 프로이트의 삶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가 되었고, 죽음에 대항하여 그의 동맹자가 되었다."(167-8)


10장 여성과 정신분석


"《억제, 증후, 불안》에서 정식화된 프로이트의 정의에 따르면, 불안은 분명한 신체적 감각을 동반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출생 트라우마는 모든 불안 상태의 원형이다. 이것은 훗날의 불안들이 모방할 반응─뚜렷한 생리적 변화─을 일으킨다. 프로이트는 유아가 불안에 대해 어떤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불안 반응은 한마디로 타고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어둠에 대한 공포, 그들의 요구를 보살펴줄 사람의 부재에 대한 공포 등 출생 경험에서만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많은 불안을 겪는다. 프로이트는 정확한 시간표를 그리지는 않았지만, 정신 발달의 각 단계에는 그 단계 특유의 불안이 그림자를 드리운다고 믿었다. 출생 트라우마 뒤에는 분리 불안이 따르고, 그 뒤에는 사랑의 상실에 대한 공포, 거세 불안, 죄책감,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이 나타난다. 따라서 징벌적인 초자아가 만들어내는 불안은 다른 불안들이 이미 자기 할 일을 한 뒤에만 나타난다."(245-6)


"프로이트는 한 유형의 불안이 다른 모든 유형을 대체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각 유형은 평생 무의식 속에 집요하게 살아남아 언제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러나 일찍 나타나든 나중에 나타나든 모든 불안은 공포, 소망, 감정 등 압도적인 자극을 감당할 수 없다는 느낌, 즉 무력감이라는 매우 불편한 느낌을 공유한다. 다시 요약하면, 프로이트가 가장 중시하는 공식은 이런 것이다. 불안은 앞에 위험이 있다는 경고다. 이 위험이 현실이냐 상상한 것이냐, 합리적으로 평가한 것이냐 히스테리 때문에 과장한 것이냐 하는 문제는 느낌 자체와는 상관이 없다. 그 원인은 엄청나게 다양하며, 생리학적, 심리학적 결과도 마찬가지다." "점차 프로이트는 불안을 인간이 삶의 위험들을 헤쳐 나가도록 안내하는 신호로 묘사하면서 전문화된 정신병리학 탐사에서 끌어낸 결론들을 신경증 환자든 아니든 모두에게 적용 가능한 심리학적 법칙으로 번역했다."(246)


"프로이트가 《억제, 증후, 불안》 여기저기에 흩어놓은 발언 중에 1926년에 분명하게 이야기한 것은 불안과 방어가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 정도였다. 불안이 경보음을 내는 탑의 보초라면, 방어는 침입자를 확인하기 위해 동원된 부대다. 방어 작전은 불안보다 파악이 훨씬 힘들 수도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무의식이라는 거의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보호 덮개 밑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어도 불안과 마찬가지로 자아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또 불안과 마찬가지로 꼭 필요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인간적이면서 너무나 오류가 많은 관리 방법이다. 사실 방어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점 한 가지는 이것이 적응의 부지런한 하인이 되었다가 반대로 적응의 비타협적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제 방어는 신경증을 낳을 수도 있는 갈등에서 자아가 이용하는 〈모든 기법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고, 반면 〈'억압'은 방어의 한 가지 방법의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247-8)


# 또 다른 방어 전술 : 경험 자체를 날려버리는 취소(undoing), (불쾌한) 기억과 거기에 연관되는 감정을 서로 차단하는 분리(isolating)


"1920년대 중반 프로이트는 여성에 관한 자신의 관점이 여자들의 갈망에 비우호적이며 남성 편향이라는 비판이 나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의 예측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격렬한 방식으로 현실이 되었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여자에 관해 매우 불쾌한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의 이론적 견해와 개인적 의견이 모두 적대적이거나 생색을 내는 식이었던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여성 심리에 관하여 때로는 거의 불가지론적 입장을 택했다." "그는 물었다. 〈여자는 무엇을 원합니까?〉 여자는 암흑의 대륙이라는 말과 짝을 이루는 이 유명한 말은 현대적으로 포장되었지만 사실 오래된 상투적 질문이었다. 남자들은 오랫동안 여자 전체를 불가해하다고 묘사함으로써 여자의 감추어진 힘에 대한 모호한 공포에 대항하여 자신을 방어해 왔다. 그러나 이 표현은 프로이트의 입장에서는 자기 이론의 구멍에 불만을 표시하며 무력하게 어깨를 으쓱하는 것이기도 했다."(268-70)


"1910년 빈 정신분석협회의 회원들이 내규를 검토할 때 이지도어 자드거는 여자들의 가입에 반대했지만, 프로이트는 단호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원칙적으로 여자들을 배제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모순으로 보일 것〉이라는 이유였다. 나중에 프로이트는 잔 랑플-드 그로와 헬레네 도이치 같은 '여성 분석가들'이 자신 같은 남성 분석가보다 여자 환자들의 유아기─〈나이가 들면서 잿빛으로 변하고, 어두워지는〉─를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망설임 없이 이야기했다. 전이에서 그들이 남자보다 어머니 대리 역할을 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분석 진료의 중요한 측면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유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 나름의 신랄함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더라도 이것은 상당한 찬사였다. 굽힐 줄 모르는 반(反)페미니즘적 편견과 더불어 그런 편견의 은근한 표현으로 악명이 높은 사람으로서는 주목할 만한 양보였다."(272-3)


"여자는 천성적으로 성적인 면에서 수동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프로이트는 여자의 성적 수동성 가운데 많은 부분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강요한 것임을 인식하여, 그런 대중적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여자들에게서 어떤 정신적 결함이 발견될지 몰라도 그것은 자연적 자질의 차이가 아니라 문화적 억압의 결과라는 오래된, 디포와 디드로와 스탕달만큼이나 오래된 통찰의 힘을 알았다. 여자에 관한 이런 생각들이나 다른 생각들은 불편하게 공존을 하거나 때로는 서로 모순을 일으키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그의 발언에 등장했다. 게다가 남성 우월성과 관련된 관념 가운데 일부가 그의 마음의 전면을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남성적 소유욕과 문화적 보수주의를 갖춘, 사교, 윤리, 복식 스타일에서 전혀 개조되지 않은 19세기 신사였다. 프로이트의 여성에 대한 태도는 더 넓은 문화적 충성심, 즉 그의 빅토리아 여왕 시대 스타일의 한 부분이었다."(280-1)


"여자라는 민감한 문제에서 프로이트는 우경화했다. 프로이트는 강건하고 통렬한 언어를 사용하여 페미니스트들의 비위에 맞았던 생각, 즉 인간 남성과 여성은 매우 비슷한 심리적 역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뒤집어버렸다." "1920년대 초에 이르면 프로이트는 어린 소녀는 실패한 소년이고, 성인 여자는 일종의 거세된 남자라는 입장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1923년에 인간의 성 역사의 단계들을 제시할 때는 구순기와 항문기 다음에 나오는 단계를 남근기라고 불렀다. 어린 소년은 어린 소녀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어머니를 포함한 모두에게 음경이 있다고 믿으며, 이 문제에서 사실에 눈을 뜨는 과정은 소년에게 트라우마를 남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남자가 프로이트의 척도였다. 이 무렵 프로이트는 소년과 소녀의 성 발달을 유사하게 다루던 이전의 방식을 버렸다. 그는 정치에 관한 나폴레옹의 유명한 말을 살짝 바꾸어 도발적인 경구를 남겼다. 〈해부학이 운명이다.〉"(292-3)


11장 문명 속의 불만


"프로이트는 평생 설명이 필요한 것은 무신론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1905년에 메모해 둔 것들 가운데는 이런 간결하고 암시적인 내용이 있다. 〈강박 신경증으로서 종교-강박 신경증은 개인적 종교〉. 2년 뒤 그는 이런 맹아와 같은 생각을 예비적 논문 〈강박 행동과 종교 의식〉으로 풀어냈다. 종교와 신경증을 하나의 굴레에 묶으려는 우아하면서도 감질나는 시도였다. 프로이트는 강박 신경증 환자에게 필수적인 '의식(Ceremonies)'이나 '제의(Rituals)'가 모든 신앙의 핵심 요소인 식전(式典, Observances)과 비슷하다는 점은 금방 눈에 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신경증과 종교, 양쪽의 관행이 충동의 포기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둘 다 방어적이고 자기 보호적인 수단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일치와 유사성에 비추어 강박 신경증을 종교적 구성물의 병리적 대응물로, 신경증을 개인적 종교로, 종교를 보편적인 강박 신경증으로 과감하게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312)


"1927년에 출간된 《환상의 미래》는 시작부터 커다란 주장을 한다. 여기서 내건 주제는 종교지만, 의미심장하게도 문화의 본질에 대한 숙고에서 시작한다. 마치 3년 후 출간된 《문명 속의 불만》을 위한 예행 연습처럼 읽힌다. 이런 식의 출발은 자신의 과제에 대한 프로이트의 인식을 드러낸다. 종교를 최대한 넓은 맥락 안에 자리 잡게 하여, 인간의 모든 행동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자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프로이트가 동시대 대부분의 종교심리학자나 종교사회학자와 공유하고 있는 비타협적인 세속주의는 신앙의 문제에 어떤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며, 분석에서 면제받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성역을 존중하지 않았다. 연구자로서 그가 들어갈 없는 신전은 없다고 보았다." "그의 친구 피스터는 솔직하게 말했다. 〈교수님의 대체 종교는 본질적으로 당당하고, 신선하고, 현대적인 모습의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입니다.〉"(314)


"프로이트의 에세이는 문화에 관한 논의로 시작한다. 그의 간결한 정의에 따르면 문화는 외적인 자연을 정복하고 인간들의 상호 관계를 규제하려는 집단적 노력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불쾌하고 어려운 희생에, 소망의 지연과 쾌감의 박탈에 노출된다는 뜻이다." "분명한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자신의 주된 과제, 즉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방어하는 과제를 이행하는 방법을 상당히 잘 습득했다고 프로이트는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이 이미 정복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프로이트는 인간에 대한 자연의 적대 행위의 놀라운 목록을 나열했다. 지진, 홍수, 폭풍, 질병 그리고 프로이트 자신의 절박한 관심사에 더 다가가,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수수께끼〉를 들었다." "프로이트가 개인적인 소회를 감추지 않고 〈인류 전체에게나 개인에게나 삶은 견디기 힘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도 당연하다. 무력함이야말로 공동의 운명인 것이다."9316-8)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는 교묘하게 종교를 그의 분석에 집어넣었다." "물론 종교는 예술이나 윤리와 더불어 인류의 가장 귀중한 소유물에 속하지만, 그 기원은 유아의 심리에 있다. 아이는 부모의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부모가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아이가 성장하면서 부모─특히 아버지─의 힘에 대한 느낌, 위험하면서도 가능성이 있는 자연 세계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생각을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어른도 아이와 마찬가지로 소망에 굴복하고 가장 공상적인 장식으로 자신의 환상을 꾸민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생존자들이다. 아이의 요구, 취약한 상태, 의존은 어른이 되어서까지 계속 존재하며, 따라서 정신분석가는 종교가 존재하게 된 방식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종교적인 개념은 다른 모든 문화적 성취와 똑같은 요구, 즉 자연의 압도적 우위에 대항하여 자신을 보호할 필요〉, 그리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문화의 불완전성을 교정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왔다.〉"(318-9)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늑대다.〉 따라서 인간은 제도로 길들여야 한다." "인류는 국가에 독점적 강제 권한을 부여하는 사회 계약에 도달함으로써 비로소 문명화된 인간 관계에 들어설 수 있었다.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은 이런 홉스적인 전통 속에서 탄생했다. 공동체가 권력을 쥐고 개인이 직접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포기했을 때 문화를 향한 거대한 진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처음으로 적을 향해 창이 아니라 욕을 던진 사람이 문명의 진정한 건설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는 불가결하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불만이 표출될 무대도 마련되었으며, 모든 사회은 이런 불만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사회는 개인의 강렬한 욕망에 매우 철저하게 간섭했으며, 본능적 욕구를 억제하고 억압했는데, 이런 욕망과 욕구는 계속 무의식에서 곪으면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올 길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346-7)


"《문명 속의 불만》은 프로이트의 더 큰 생각의 중요한 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의 정신분석학적 사고방식을 배경으로 보았을 때에만 그 영향력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이 에세이는 어떤 문화든 문화 속에서 프로이트적인 인간이 형성되는 방식을 요약한다. 프로이트적인 인간은 무의식적 요구에 시달리고, 치유 불가능한 양가적 태도와 원시적이고 정열적인 사랑과 증오를 드러내고, 외적인 제약과 내밀한 죄책감 때문에 간신히 제어되고 있다. 사회 제도는 프로이트에게 많은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살인, 강간, 근친상간을 막는 댐 역할을 한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문명 이론은 사회 속의 삶을 강요된 타협이자, 본질적으로 해소 불가능한 곤경으로 본다.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 자체가 불만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완전하지 않은 상태로, 인간이 나아진다는 점에 관해서는 최소한의 기대만 하고 살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348)


"그러나 프로이트의 주된 관심은 문화가 공격성을 억제하는 방식이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한 가지 방법은 내면화(internalization), 즉 공격적인 감정들을 원래 출발지인 정신 속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런 행동, 또는 일련의 행동은 프로이트가 '문화적 초자아'라고 부르는 것의 기초다. 처음에 아이는 권위를 두려워하며, 아버지로부터 예상되는 징벌적 보복을 계산하여 딱 그만큼 얌전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아이가 어른의 행동 기준을 내면화하면 외적인 위협은 불필요해진다. 아이의 초자아가 아이를 바르게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과 증오 사이의 투쟁은 문명 자체의 기초에 놓여 있듯이 초자아의 기초에도 놓여 있다. 개인의 이런 심리적 발달은 종종 사회의 역사에서 복제된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비난할 예언자들을 배출했으며, 신의 법을 어겼다는 집단적 느낌으로부터, 가혹한 계명을 갖춘 지나치게 엄격한 종교를 키워 나갔다."(354)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 그의 체계의 주요한 가닥들을 서로 엮어 나갔다." "감동적인 동시에 강건한 결론 부분의 사유도 오래된 내적 갈등을 다시 짚어 나간다. 이 사유는 프로이트가 지나침을 경계하면서도 사변의 요구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문화적 초자아라는 관념에 기초하여 신경증적 문화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환자에게 하듯이 그런 문화에 치료자로서 권고를 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이 문제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개인과 그가 속한 문화 사이의 유추는 긴밀하고 유익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유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보적 태도는 중요하다. 이 덕분에 프로이트가 자신을 사회 개혁가라기보다는 연구자로 규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병에 대한 처방을 손에 쥔 사회의 의사로 나서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는 점을 더 분명할 수 없게 밝혀 놓았다."(355)


12장 인간 모세의 최후


"강력한 이웃인 파시즘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포위가 점점 강해지고 위협적이 되면서 빈 생활은 점점 위태로워졌다. 히틀러 정권 첫 해에 쓴 프로이트의 편지들은 비록 쓸쓸함과 분노가 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낙관주의의 영향이 남아 있었다. 1933년 페렌치는 프로이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들 가운데 한 통에서 다정하게, 그러나 미친 듯한 목소리로 프로이트에게 어서 오스트리아를 떠나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너무 늙고, 너무 아프고, 의사와 안락한 생활에 너무 심하게 의존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우파 정당들이 오스트리아 나치즘을 반드시 제어할 것이라고 낙관한 프로이트는 물론 우파정당들의 독재가 유대인들에게 매우 불쾌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차별적인 법률은 상상하지 못했다. 평화 조약이 명시적으로 그런 법을 금지했으므로 국제 연맹이 분명히 개입할 것이라고 보았다."(426-8)


"역설적으로 이때는 프로이트에게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이 기분 좋은 시기였다. 그는 힘든 시기가 유대인에게는 '인종적' 충성심을 선언하는 데 특히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때야말로 유대인에게 힘든 시기였다. 대공황과 정치적 혼란은 합리적인 해법들의 인기를 떨어뜨렸으며, 이것은 특히 중유럽에서 반유대주의의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그러나 신교로 개종한 아들러, 잠깐 로마가톨릭에 의지한 랑크와는 달리 프로이트는 결코 자신의 조상을 거부하거나 감추지 않았다. 우리는 1924년에 쓴 〈나의 이력서〉에서 그가 분명하게, 심지어 약간 공격적으로, 자신의 부모가 유대인이며, 자기 또한 늘 유대인이었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의 유독한 분위기 속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이 유대인 출신임을 부정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유대인 출신임을 널리 과시하기까지 한 것이다."(434-5)


"유대적인 면의 본질, 또는 그의 개인적인 유대인적 정체성이 분석에 저항했는지는 몰라도, 프로이트는 그의 사회에서 유대인이라는 것의 함의는 분명하게 알았다. 그는 조상의 신앙에 낯선 동시에 그가 살고 일해야 하는 오스트리아의 강력한 반유대주의적 요소에 분개했기 때문에 이중으로 소외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프로이트는 자신을 주변인으로 보았고, 이런 위치가 자신에게 측량할 수 없는 이점을 준다고 생각했다." "이런 측면에서 독실한 유대인 또는 기독교인은 절대 정신분석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프로이트의 발언에는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정신분석은 우상 파괴적이고, 종교적 신앙을 무시하고, 기독교 변증론을 경멸하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종교적 신앙─유대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적 신앙─을 정신분석적 연구의 주제로 여겼기 때문에, 오직 무신론자의 관점에서만 그런 신앙에 접근할 수 있었다."(443-5)


"더욱이 프로이트의 기질에는 도전의 분위기도 스며들어 있었다. 그는 반대파의 지도자, 가짜의 껍질을 벗겨내는 자, 자기 기만과 착각에 벌을 주는 자라는 지위에서 기쁨을 맛보았다. 그는 박해하는 로마가톨릭교회, 위선적인 부르주아지, 우둔한 정신의학 기성체제, 물질주의적인 미국인들이 자신의 적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 자부심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이 적들은 그의 마음 속에서 실제보다 훨씬 사악하고 강한, 또 서로 엉겨 붙은 유령으로 커 갔다. 그는 자신을 한니발, 아하수에로스(크세르크세스 1세), 요셉, 모세에 비유했다. 이들 모두 역사적 사명을 띠고, 강한 적과 마주하고, 괴로운 운명을 감내한 인물들이었다. 프로이트는 자주 인용되는 초기 편지에서 약혼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보아서는 잘 알기 힘들겠지만, 나는 이미 학생 때부터 늘 용감한 반대자였고, 늘 극단을 고백하는 자리에 있었으며, 대개 그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446)


"1938년 3월 12일과 그 다음 날, 프로이트는 라디오 옆에 앉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장악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곧 시작된 공포 정치 하에서, 독일인들이 갖추거나 표현하는 데 5년이 걸린 편협한 태도나 사디즘적인 복수심을 오스트리아인은 불과 닷새 만에 행동에 옮겼다. 많은 독일인들이 가차 없이 쏟아지는 폭탄 같은 선전에 굴복했고, 가혹한 국가, 방심하지 않는 당, 통제된 언론에 겁을 먹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인의 경우에는 전혀 압력이 필요 없었다. 그들이 행동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나치 테러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것이라고 설명되거나 변명될 수 있을 뿐이었다. 유대인의 아파트를 약탈하거나 유대인 상점주들에게 테러를 한 군중은 공식적인 명령 없이 그런 일을 하면서 자신들이 하는 일을 철저하게 숨겼다. 로마가톨릭 양심의 수호자인 오스트리아의 고위 성직자들은 여전히 남아 있던, 깨어 있는 정신과 품위를 갖춘 세력들을 동원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471-2)


"새로운 통치자들은 오스트리아를 히틀러의 제국에 합병하는 작업에서 신속하고 무자비한 효율성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작업은 말 그대로 오스트리아의 종말(finis Austriae)을 의미했다. 일주일이 안 되어 오스트리아 군, 법, 공적 제도는 독일의 해당 부문에 편입되었고, 오스트리아는 한 나라가 아니라 독일의 동부 지방이 되어, 일부러 고어로 '오스트마르크(Ostmark, 동쪽의 변경)'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대인 판사, 관료, 산업가, 은행가, 교수, 저널리스트, 음악가는 바로 숙청당했다. 몇 주가 안 되어 오페라, 신문, 실업계, 고급 문화, 커피하우스는 간절한 목소리로 자신이 〈순수한 아리안〉이라고 선전했다. 중요하고 책임 있는 자리는 모두 믿을 만한 나치들에게 돌아갔다. 거의 아무런 저항도, 심지어 이의 제기도 없었다. 저항을 했다 해도 효과도 없고 비이성적이었다." "국외로 탈출한 소수는 바깥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개입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478-9)


# 프로이트 역시 1938년 6월 4일에 빈을 떠나 6월 6일 망명지 영국에 도착


"슈어는 (궤양이 일어난 구개암으로 고통받던) 프로이트가 위엄 있게, 자기 연민 없이 죽음과 마주하는 것을 목격하며 눈물을 흘릴 뻔했다. 9월 21일 슈어는 프로이트에게 모르핀 3센티그램을 주사했다. 22일 마지막 주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져든 프로이트는 1939년 9월 23일 새벽 3시에 죽었다. 거의 40년 전 프로이트는 오스카어 피스터에게 앞으로 언젠가 〈생각을 못하고 말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이 가능성 앞에서 불안〉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직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운명 앞에 완전히 체념하는 마음으로, 나는 한 가지 정말 비밀스러운 소원을 품고 있네. 숙환이 생기는 것, 신체적인 비참한 상태로 인하여 능력이 마비되는 것만은 싫다는 걸세. 맥베스 왕이 말한 대로, 평소처럼 일하다 죽게 해 달라는 거야.〉 프로이트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빈틈없이 대비해놓았다. 늙은 금욕주의자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통제한 것이다."(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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