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현대사 3 - 혁명과 내셔널리즘 1925-1945 중국근현대사 3
이시카와 요시히로 지음, 손승회 옮김 / 삼천리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론


1장 국민혁명 시대


"공산당원의 국민당 가입, 즉 국공합작(國共合作)은 1924년 1월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정식으로 막이 올랐다." "국공합작은 공산당의 세력이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조직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국민당에 가입한 공산당원이 광저우를 비롯한 국민당 지배 지역에서 국민당원이라는 이유로 직책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지방 정권이라 해도 광둥 정권은 어엿한 정부였고 정권이 노농부조(勞農扶助)를 내걸고 사회운동을 지원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박봉이지만 공적 기관에서 월급을 받으며 혁명운동에 몰두할 수 있었다. 재정 기반이 취약했던 초기 공산당은 전문적으로 당 업무에 종사할 다수의 활동가를 지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민당의 지원 아래 '직업혁명가'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은 의미가 컸다. 합작 당시 500명이던 당원 수가 1925년 가을에 2,500~3,000명에 이르게 된 배경에는 국공합작에 따른 이러한 경제적인 간접 효과도 컸다고 할 수 있다."(24-5)


"국공합작은 공산당원이 공산당 당적을 보유한 채 국민당에도 가입하는 형식이었는데, 이런 사정은 특히 국민당의 고참 당원에게는 공산당원이 국민당을 탈취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즉 공산당 쪽에서는 국민당원 가운데 누가 공산당원인지 파악하고 있었지만, 공산당 명부가 없었던 국민당 쪽은 누가 공산당원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국민당 쪽의 의심을 배경으로 쑨원의 측근이기도 했던 다이지타오는 《쑨원주의의 철학적 기초》와 《국민혁명과 중국국민당》 같은 팸플릿을 통해 공산당의 '기생(寄生) 정책'을 비판하고, 철저한 '순정 삼민주의'를 강하게 주장했다. 국민당에게 골치 아픈 것은 적극적으로 국민당의 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자들이 예외 없이 공산당원이라는 현실이었다." "이렇게 하여 국민정부는 연소용공(連蘇容共)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던 왕징웨이와 광둥의 군사적 통일에 성과를 올리고 있던 장제스를, 보로딘을 비롯한 소련 고문단이 지원하는 체제로 유지되었다."(32-3)


"1927년 4월 12일에 벌어진 장제스의 반공 쿠데타와 난징 국민정부 수립(4.18)은 우한의 국민당과 정부를 크게 동요시켰다." "'붉은 도시' 우한의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혼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민중운동에 의해 붕괴된 사회질서였다. 후난과 후베이에서 일어난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은 북벌이 전개되는 과정에 숨은 공로자였지만, 혁명으로 분출된 대중의 에너지는 당초 그것을 조장하고 지원한 공산당의 통제마저 뛰어넘는 '과화'(過火)가 되어 사회질서까지 파괴하고 말았다. 농민운동은 정부가 규정한 지조(地租) 제한이라는 범위를 넘어 토지를 몰수하고 지주를 박해하는 행위가 일상적으로 일어났고 쌀의 유통을 가로막기까지 하였다. 도시에서도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파업이 이어졌다." "이런 현실은 난징과 상하이를 비롯한 난징정부 지배 아래에 있던 지역의 물가가 안정되어 있는 상황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한마디로 우한정부는 내부에서 붕괴되고 있었다."(57-9)


2장 난징 국민정부


"상하이 쿠데타에 이은 우한의 분공(分共) 결정은─국민당을 재개조하라는 스탈린의 5월 지시가 폭로되면서 실행된─공산당에게 혁명운동의 실패 또는 패배를 의미했지만, 이로 인해 '국민혁명'이 붕괴되지는 않았다. 국민당의 입장에서 보면 혁명의 방해자였던 공산당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난징과 우한의 균열을 회복하여 본래의 혁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한의 왕징웨이든, 난징의 장제스든 그 후 자신들을 어디까지나 '혁명파'로 생각하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국공합작 체제 아래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기층 활동을 담당해 온 공산당원이 당밖에서 제거됨으로써, 국민당이 상대적으로 기층 조직이 약한 간부 중심형 정당에 머물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공산당을 대신하여 국민당을 지원한 것은, 북벌 과정에서 귀순한 여러 군대를 아우른 당군(黨軍)과 상하이를 중심으로 하는 도시 지역의 상공업자와 민족자본가, 그리고 치안 회복과 중국 통일을 염원하는 여론이었다."(65)


"지난사변은 중일 관계는 물론 동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정치에도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첫째, 그때까지 영국을 주요 적으로 여겨 온 중국의 반제 운동이 명확하게 일본을 표적으로 삼게 만들었다. 둘째, 장제스 등의 대일 감정을 악화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셋째, 제1차 산둥 출병에 동조를 보인 영국과 미국 두 나라가 국민정부에 접근하는 입장에 서서 일본을 비판하게 되었다. 또 지난사변은 파견된 기관(현지 군)이 사건을 확대하고 격화시켰다. 거기에 군 중앙과 정부가 추종하여 군 증파를 단행하고, 여기에 다시 '폭지응징(暴支應徵)이라는 여론을 배경으로 호응하는 모양새를 띠었다. 그 뒤로 나타나는 일본의 중국 침략 행동의 패턴을 모두 보여 주고 있다. 1931년에 발발한 만주사변에서 일본이 패전하기까지를 중일 15년전쟁이라 하는데, 국민혁명과 국가 통일에 대한 무력간섭이라는 전쟁의 주된 목적과 그 발생 형태를 보면, 지난사변은 훗날 벌어지게 될 전쟁의 예행연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73-4)


# 지난사변(濟南事變) : 1928년, 제2차 북벌이 재개되자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제2차 산둥 출병을 단행했다. 양측 병력이 산둥 성의 성도 지난(濟南)에서 충돌하면서 중국군인과 민간인 3천 명 이상이 사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1928년부터 1930년대 초까지 당내 대립은 '훈정' 체제의 구체적 방법을 둘러싸고 장제스와 대립하는 왕징웨이, 쑨커, 후한민을 비롯한 문민 정치가들의 '이론 투쟁'이 군사 문제에서 장제스와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군사 지도자(리쭝런, 펑위샹, 옌시샨·리지선 등) 각파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내분의 와중에 발발한 만주사변(1931)은 이듬해 1932년 1월 제1차 상하이사변(1·28사변)으로 불똥이 번졌고, 이런 급박한 사태에 영향을 받아 국민정부는 1년 정도 뤄양으로 천도했다(그해 12월 난징으로 돌아왔다). 장제스가 3월에 군사 지도자로 중앙에 복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국난을 수습할 수 있는 실력자가 장제스 말고는 없다는 폭넓은 지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만주사변을 계기로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국난에 대처하자는 호소가 커졌고, 그러기 위해서는 훈정 체제를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헌정으로 조기 이행, 민의를 대표하는 기관 설립)이 더욱더 강화되었다."(85-9)


3장 공산당의 혁명운동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에 있다는 사실은 모스크바에서 전개된 권력투쟁과 노선투쟁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1920년대 중반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에 벌어진 권력투쟁에서는 중국 혁명에 대한 인식이 쟁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북벌기 중국공산당의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령 트로츠키는 우한 국민당의 반동화에 경종을 울리고 노농(勞農) 소비에트의 조직화를 주장했지만, 그에 반대한 스탈린은 우한에서 혁명을 추구하여 좌파 정부를 통한 토지혁명을 중국공산당에 요구했다." "그런데 우한 분공에 의해 사태가 공산당의 '패배'로 끝났을 때, 그 책임 소재는 교묘하게 바뀌어 중국공산당 총서기 천두슈의 '우경 기회주의 노선'으로 돌아갔고 그는 공산당 지도자의 지위에서 쫓겨났다. 그 뒤에도 코민테른의 지시나 정세 판단에 따른 노선과 방침이 실패로 끝났을 때, 모스크바가 아니라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책임을 추궁당했고 그때마다 지도부가 비판을 받아 교체되었다."(128-9)


"공산당의 중앙 조직은 아주 짧은 시기를 빼면 창당 이래 1930년대 초까지 상하이 조계 안에 있었다. 중국 관헌의 간섭이 직접 미치지 않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물론 조계 당국이라고 공산당의 활동을 자유롭게 내버려 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927년의 난징정부 성립 후 국민정부가 조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함에 따라 '안전지대'로서 조계가 지니고 있던 의미는 크게 바뀌었다. 특히 국민정부가 주권 회복의 일환으로서 1930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상하이 조계에 중국 측 특구법원(재판소)을 설치한 것은 의미가 컸다. 중국의 법률과 재판관이 중국인을 당사자로 삼아 직접 재판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의 그림자와 목소리는 거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공산당의 세력은 늘 실제보다도 확실히 크게 보였다. 그것은 공산당이 선전 작업을 중시하는 정치 문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어찌 됐든 (공산당은) 자신들을 실제 이상으로 크게 보이게 하는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132-4)


"공산당이 농촌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공산당이 지닌 조직성과 규율성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사회의 조직성·공동성이 현저하게 낮은 중국 농촌에서 상당히 큰 통합력과 규범성을 지닐 수 있었다는 점이다. 공산당이 근거지를 구축한 화남의 농촌은 화북에 비해 농촌 사회의 결합력이 강했다고 할 수 있지만, 예컨대 근세·근대의 일본 농촌에 견준다면 중국 농촌의 결합력은 보잘것없었다. 따라서 공산당은 적어도 자신의 조직 활동이 촌락 내부 집단의 유대감에 저항을 받아 침투할 수 없는 사태를 우려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포위 공격과 토벌에 직면하면서 근거지의 영역은 수시로 변화되었고, 가장 안전하던 근거지의 중심부에서조차 공산당 통치는 불과 4년밖에 실행되지 못했다. 이 짧은 기간에 추진된 토지혁명이 농촌의 기존 질서 해체와 홍군의 확충을 가져왔지만, 홍군의 보충이 지배 영역의 안정화로 연결될 만한 여유를 당시 농촌 근거지에서 전혀 찾을 수 없었다."(141-3)


4장 제국주의 일본에 맞서


"만주국의 영역 확대를 목표로 1933년 2월 시작된 관동군의 러허(熱河) 작전은 만리장성을 넘어 관내까지 미쳤다. 베이핑·톈진까지 전화가 번질 것을 걱정한 중국 측의 요청으로 5월 말에 허베이성 탕구에서 정전 교섭이 이루어졌다. 결국 일본 측의 일방적인 요구를 받아들이는 형태로 정전협정(탕구 협정)이 이루어졌다. 일본 측의 요구는 기동(冀東, 동허베이성 북동부)을 비무장지대로 하고 앞으로 중국군이 주둔하지 않으며, 일본군은 그 실시 경과를 임의로 사찰할 수 있고 중국이 협정을 준수하는지 확인한 후 만리장성 선까지 철수하기로 했다. 사실 만리장성 선 이북 지역 가운데 일부는 행정구역상 허베이 성과 차하르 성에 속하기 때문에 관동군은 이 협정을 통해 허베이와 차하르 일부까지 점령 아래에 둘 수 있었다. 이로써 9·18사변 이래의 군사행동은 일단락되었고 일본의 만주 영유와 만주국 영역이 '군사 정전' 협정에 의해 사실상 확정되었다."(165)


"〈평화가 절망적이지 않은 때 결코 평화를 포기하지 않는다. 최후 운명의 갈림길이 아니라면 가벼이 희생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화북 분리 공작이 진행되는 시점인 1935년 11월에 장제스가 천명한 대일 외교의 신조였다. 거듭되는 대일 타협으로 '일본 공포증'(恐日病)이라는 험담까지 들어야 했던 장제스였지만, 이러한 대일 타협은 그 나름으로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눈과 일본에 대한 인식을 통해 지탱되었다. 장제스는 중국과 일본의 분쟁이 곧 태평양의 문제, 이어서 세계의 문제로 확대되어 갈 것이라고 판단했다. 중국에는 열강의 권익이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일본이 계속 중국을 침략할 경우 필연적으로 열강의 간섭을 불러올〉 것이고, 장차 예상되는 중일전쟁에서 지구전을 통해 열강의 대일 군사 간섭을 이끌어 내고, 최종적으로 중일전쟁이 원인이 될 세계 전쟁을 통해 일본을 패배시킨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은 중국이 기대한 바와 달리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177)


"다각적인 외교 모색이라는 측면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국내의 공산당 문제와도 밀접한 소련에 대한 대응이었다." "소련은 만주사변을 대소 전쟁을 위한 일본의 준비 활동으로 파악하면서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에 일본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만주사변에 대해서 중립과 불간섭을 선언했을 뿐 아니라 관동군이 중동철도를 이용하는 것에 거듭 양보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대두함에 따라 독일과 일본이 동서 양쪽에서 소련을 협공할 수도 있다는 잠재적 위기가 증대했다. 그러자 중국에서 '일치 항일'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중국으로 침공해 들어오는 일본을 저지시킨다는 구상이 부상하게 되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반파시즘 통일전선 노선이 결정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의 창끝이 소련으로 향할 것이라 기대하는 장제스와, 중국을 후원하여 일본의 압력을 감소시키려는 소련의 판단이 결합한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과 소련 양국은 점차 가까워졌다."(178-9)


5장 항일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일본 정부(고노에 후미마로 내각)는 사건의 '현지 해결·불확대' 방침을 정했고, 군 중앙에도 '확대'와 '불확대'의 두 파가 있었다. 11일에 중국의 중앙군이 북상한다는 정보(실제로는 약간 지체되었다)가 입수되자, 일본 정부는 이 분쟁을 '북지사변'(北支事變)으로 부를 것을 결정하면서, 사변은 중국 측의 '계획적 무력 항일'에 의한 것이라 판단하여 화북에 파병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여전히 '불확대'를 언급하고 있지만 파병이라는 사실 앞에서는 그저 빈말일 뿐이었다. 11일에는 참모본부도 관동군과 조선군에게 파병을 명령했다. 〈포악무도한 지나를 응징〉하기 위해 일격을 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군부와 민간에서 높았고 이는 사태의 확대를 압박하였다. 이리하여 이후에도 현지에서는 정전의 구체적 실현을 위한 교섭이 계속되었지만, 전투는 베이핑 주변에서 톈진으로까지 확대되었고, 7월 28일 일본군은 핑진(平津) 지역에 대한 전면 공격을 시작했다."(203-4)


"1938년 1월 평화 교섭은 깨졌고, 일본 정부는 〈앞으로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고 제국과 진정으로 제휴할 수 있는 신흥 지나 정권의 성립 발전을 기대하며, 그 정권과 양국 교섭을 조정하여 갱생 신지나의 건설에 협조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틀 뒤 성명에 나오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라기보다 강경한 '말살'을 뜻한다고 보충 설명까지 했다. 중국군의 〈포악한 행동을 응징〉하고 난징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하여 시작된 전쟁은 이제 장제스 정권을 말살하고 괴뢰정권을 수립한다는 전략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이러한 지방의 대일 협력 정권에 가담한 사람들은 이미 실력과 명성을 상실한 퇴역 군인이나 정객들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이 기대하는 원활한 점령치 통치 따위는 도무지 기대할 수 없었다. 일본이 점령지에 직접적인 '군정'을 실시하지 않고 이런 괴뢰정권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도 상황이 '전쟁'이 아니라 (선전포고 없는) '사변'이었기 때문이다."(213)


"일본은 우한·광저우를 점령한 1938년 말 시점에 100만에 가까운 군대를 중국에 투입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에는 근위 사단만이 남았고 군사 동원력은 이제 분명한 한계에 도달했다." "지난날 청조에서는 일단 외국군이 베이징에 임박하여 황제가 몽진(蒙塵, 피난)하고 수도가 점령당하면 굴욕적인 강화 조건을 내걸고 굴복했다. 하지만 이번에 국민정부는 수도뿐 아니라 요지 모두를 점령당했지만 항전을 이어 갔다. 일본 점령지에서 도피한 학생과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는 대학이나 기관과 함께 오지로 들어갔고, 그 가운데 많은 수가 지원하여 전선으로 나갔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중화민국 25년 사이에 육성된 중국 내셔널리즘이었다. 일본의 침략은 이런 내셔널리즘이 높아지는 데 결정적인 촉매가 되었다. 따라서 일본이 전쟁을 확대하면 할수록 내셔널리즘은 더불어 높아졌고, 저항은 일본의 예상과 반대로 오히려 강화되었다."(219-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근현대사 2 - 근대국가의 모색 1894-1925 중국근현대사 2
가와시마 신 지음, 천성림 옮김 / 삼천리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론


1장 구국과 정치 개혁


"지금까지 중국근현대사에서는 혁명을 중시하여 '양무(운동, 중체서용中體西用)-변법(개혁)-혁명'이라는 설명 틀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양무-변법-혁명'의 3단계론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본디 양무란 오랑캐(夷)와 관련한 여러 업무를 의미하는 '이무'(夷務)가 전화한 말이다. 특정 시기의 대외 사무, 외국 관련 업무의 총칭이다. 이러한 대외 사무는 곧 외무라 불리게 된다. 요컨대 1860~1870년대에 갑자기 대외 사무로서 양무(洋務)가 생겨난 것도, 또 양무운동이라는 운동이 제창된 것도 아니다. 또한 양무의 시대라고 하는 시기는 '중체서용'의 특징이 짙은 경우도 있지만, 정치와 제도 변혁을 제창하는 의견, 즉 '중체'의 변혁론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변혁론은 보수파의 저항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변법의 시대에는 보수파의 후퇴로 정치와 제도의 개혁이 정책으로 채용되었지만, 공업화와 군비 증강이라는 양무의 과제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신해혁명을 거치고 나서도 변법의 과제는 변함없이 중앙정부의 과제였다."(48-9)


2장 왕조 유지와 '중국'의 형성


"의화단전쟁의 패배가 청조에게 안겨준 엄청난 충격을 살펴보면, 우선 청조의 권위가 하락하고 정치가 출렁인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이홍장의 죽음을 비롯하여 대관들이 타계하고, 그때까지 변법으로 치닫는 움직임을 억제하면서 체제 유지의 원동력이 된 보수 관료의 영향력이 감소한 것은 정치 개혁의 브레이크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후 청은 다소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개혁을 실시해 나가게 된다. 다음으로는 주로 입헌군주정을 지향하는 무술변법의 여러 정책이 다시 채용되어, 재정난 속에서도 근대국가 건설이 추진된 점이다. 거기에는 천황의 강력한 권한을 인정하는 일본 같은 국가가 모델이 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첫 10년 동안 청 자신의 청이라는 국가 건설과 함께, 점차 형성되고 있던 '중국'이라는 국가 상(像)이 '청'을 대신해 다양한 정치 세력을 아우르는 국가의 결집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 지역을 뛰어넘는 '중국인'으로서의 의식도 성장하기 시작했다."(88-9)


"(의화단전쟁 이후 광서제와 서태후가 추진한) 광서신정은 근대국가 건설로서 평가되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문제가 깃들어 있었고, 더욱이 번부(藩部)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측면에서 파악될 여지도 많았다. 예를 들어 한인 엘리트층은 우승열패(優勝劣敗) 사상을 통해 세계에서 멸종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우승열패의 논리를 국내에 들여와 한인과 중앙을 '우월한 자'(優者)에, 한인이 아니거나 변경의 사람들을 '열등한 자'(劣者)로 인식했다. 우열의 근거 가운데 하나는 '근대화'였을 것이다. '서양 근대'는 한편으로 중국을 침략하고 멸종시키려는 열강의 논리였는데, 중국 내부에서는 그것이 한인의 대내적 우위성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청조가 중시해 온 몽골과 티베트는 이 시기가 되면 중국의 '변경'으로 자리가 바뀌게 된다. 몽골과 티베트인이 사는 광대한 번부도 근대 주권국가 영역의 일부이자 실업 진흥의 대상으로서 인식되었다."(104-5)


"1890년대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망국의 위기와 분할의 위기가 문제로 등장하면서 구국은 그야말로 지식인의 과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 '분할의 위기'론은 오히려 국토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논의로서 기능했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잡지 《신민총보》의 표지에는 균일하게 붉은색으로 칠해진 중국 지도가 등장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화이(華夷) 의식이 청산된 것도,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도 완전히 평등한 상태에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국제사회를 만국공법 속의 '열국병립'(列國竝立)으로 보는 경향이 지식인 사이에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청이라고 하는 왕조 이름보다도, '중국'을 국가의 명칭으로 의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중국'은 이제 왕조를 관통하는 국가의 호칭으로서 자리 잡아 가기 시작했다. 국토의 면에서도 본디 통치에 농담의 차이가 있던 번부(藩部)와 토사(土司)의 공간을 모두 한 국토로 파악하고, 거기에 중국사라는 공통의 역사를 가진 중국인을 상정하게 되었다."(108-10)


3장 입헌군주제와 공화제


"청은 러일전쟁에서 거둔 일본의 승리를 전제에 대한 입헌의 승리로 받아들였다. 그 뒤로 재외 공사, 지방 대관 그리고 황족으로부터도 입헌군주제를 위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08년 8월 27일 청조는 예비 헌정에 관한 조서를 발포하여 9년 안에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소집하기로 했다. 아울러 흠정헌법대강(欽定憲法大綱)을 제시했다." "헌법대강은 황제에게는 법률 발포권, 의원(議院) 소집 및 해산권, 육해군의 통솔권, 선전포고 및 강화권을 비롯한 갖가지 권한이 인정되었고, 의회의 권한이 황제의 대권에 미치지 않도록 조치했다." "반면 의회를 억제하여, 의원법요령(議員法要領) 제1조에 〈의원은 건의할 권한만 갖는다. 행정의 책임은 없다. 모든 의결 조건은 반드시 흠정을 기다린 뒤 정부가 시행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헌법대강은 중앙의 황제 권한을 강화해서 의회 권한을 억제하려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지방 대관을 비롯하여 도시부나 해외의 입헌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144-8)


"청말 지역사회에서는 신상(紳商)을 비롯한 새로운 유형의 엘리트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들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었지만 교육 단체와 법정 단체를 결성해 지방 정치에도 관여했다." "청이 '고찰헌정(헌정편사관) 5대신'의 파견을 거쳐 중앙에 국정 자문기관인 자정원,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성 단위의 자의국(諮議局)을 설치한다는 방침을 내걸자, 지역사회에서도 여러 단체가 자의국을 둘러싸고 토론하였다. 중요한 사실은 거기에 모인 지역 엘리트들이 현(縣)의 울타리를 넘어 성(省) 단위로 집결하게 된 것이다." "1908년 11월 14일부터 이튿날까지 자금성에서는 광서제와 서태후가 잇달아 서거했다. 12월 2일 광서제의 조카로서 겨우 세 살밖에 안 된 푸이(선통제)가 즉위했다. 한인 대관으로서 그 무렵 최대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위안스카이는 즈리 총독 및 북양대신 직위를 사임하고 고향인 허난 성 장더에 은거했다. 1909년 10월 14일 지방의회의 기초가 될 것으로 기대된 각 성에 자의국이 개국했다."(150-3)


"1911년 10월에 봉기한 신해혁명은 만주인이 실시하는 입헌에 대한 깊은 실망, 그리고 배만 사상으로 뒷받침된 혁명운동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지만, 정치 과정으로 본다면 중앙정부에 대한 성정부(省政府)의 자립이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중앙에 대한 성의 자립이라는 방향성은 분명히 있었지만, 자립한 성이 집합해서 어떻게 국가를 만들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한편 1911년 말이 되면 화북에서 동북에 걸쳐 여러 성들이 청을 지지하고, 열강도 청을 승인하고 있었다." "(우창봉기 이후) 12월에는 청과 독립 성들 사이에 정전(停戰)이 성립되었다. 위안스카이의 의뢰를 받은 영국 공사 조던이 한커우 영사에게 조정을 부탁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청군이 한양을 함락하여 반란군이 불리해진 시점에서 조정을 알선한 것이므로 반란군도 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국은 중국을 통치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진 정치가, '실력자'로서 위안스카이를 평가하고 기대했다."(168-9)


4장 중화민국의 구조와 위안스카이 정권


"열강의 입장에서는 중국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 안정된 통상 활동을 보장해 줄 인재가 필요했는데, 위안스키아가 거기에 부응하는 인물이었다. '강한 중국'을 바라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고, 입헌제 지지자들 가운데에도 그에게 기대를 건 이들이 있었다. 이 같은 위안스카이에 대한 기대감은 대총통 권한의 제한을 전제로 하는 의회 중심의 공화제 지지자의 지향성과는 달랐다. 중앙집권인가 지방분권인가 하는 문제와 함께, 이 무렵 중국에서는 입헌군주인가 공화인가 하는 정치 구상에 대한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1912년 12월부터 1913년 2월까지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참의원·중의원 모두 국민당이 압승했다. 쑹자오런은 국민당을 통한 정당 내각을 조직하고, 의회의 힘을 이용해 위안스카이에 맞서려고 했다. 의회의 압력을 경계한 위안스카이는 3월 20일에 쑹자오런을 상하이역에서 암살하게 했다. 이때 쑹자오런의 나이는 31세였다."(185-6)


"위안스카이는 공화정체를 중시하는 세력과 지방분권을 요구하는 각 성 세력 양쪽 모두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 결과 각 성과의 합의 형성은 형식적인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제2혁명 후 의회가 작성한 헌법 초안에 대해 의회 권한이 여전히 너무 강한 '국회의 전제(專制)'라고 비판하면서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이윽고 1914년 초에는 국회와 성의회까지 해산시켰다. 그해 5월에는 임시약법도 폐지하고 새로운 중화민국 약법을 정했다. 여기에서는 대총통의 권한이 강화되고 내각을 대신하여 국무경(國務卿)이 설치되었다(쉬스창이 국무경에 취임). 또 의회인 입법원은 소집하지 않은 채 대총통의 자문기관으로서 참정원(參政院)이라고 하는 사실상의 의회를 두었다. 나아가 12월에는 참정원의 의결을 거쳐 대총통 선거법을 개정하고 대총통의 임기를 사실상 철폐했다. 지방 제도에서는 지방의회를 해산시키고 각 성 도독의 권한을 줄이기 위해 성(省) 제도를 폐지하려고 했지만 이루지는 못했다."(187-8)


"1915년, 위안스카이의 제제(帝制) 채용을 둘러싸고 지방분권과 공화제를 주장하는 쪽의 반발은 강력했다. 더구나 중앙집권적인 입헌군주정체 추진을 위해 굳이 '황제'까지 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었다." "1915년 12월 각 성은 중앙정부에 독립을 선언했다. 신해혁명, 제2혁명에 이어 이번에는 남방의 여러 성이 중앙정부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 운동을 가리켜 제3혁명이라고도 한다. 1916년 5월까지 10성이 독립을 선언했다. 더욱이 위안스카이 쪽 지방장관들마저 제제를 정지할 것을 권고했기 때문에 위안스카이는 결국 3월에 중화제국을 폐지했다. 독립을 선언한 여러 성은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사임을 요구했다. 항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위안스카이는 6월 6일 요독증과 신경성 피로로 인해 사망하기에 이른다." "위안스카이의 사망과 리위안훙의 새 정권 성립이 제도적으로는 지방분권과 공화제적인 중화민국을 모색하는 전환점처럼 보이지만, 이후 정국은 극도로 혼미한 상황으로 빠져들게 된다."(200-1)


5장 국제사회의 변모와 중국


"제1차 세계대전은 중국을 둘러싼 국제정치의 구조를 뒤흔들어 놓았다. 1901년 신축화약 이래 열강의 협조에 균열이 생기면서 일본은 단독으로 이권을 확대하여 산둥 이권과 21개조 요구뿐 아니라 푸젠, 장시 등에서 철도 건설에 착수했다. 또 영국이나 프랑스가 일시적이나마 후퇴하고 미국의 발언권이 강화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18년 7월, 미국은 일본, 영국, 프랑스에 신4국차관단(新四國借款團)을 구성하자고 호소했다. 이는 네 나라가 저마다 보유하고 있는 현재와 장래의 대중국 차관을 일원화하려는 시도였다. 일본도 찬성의 뜻을 보이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만몽(滿蒙) 지역을 제외시켜, 일본의 특수 권익 전체를 인정받으려고 했다. 영국과 미국이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에 결국 저마다 제외해야 할 사항을 개별적으로 올려 그 차관에서 제외시키기로 했다. 이는 만몽 전체에 대한 일본의 장래 특수 권익이 자동으로 계승될 수 없음을 의미하지만, 이미 확보하고 있는 특수 권익은 옹호한다는 측면도 있었다."(233-4)


"워싱턴회의로 형성된 영·미·일 협조 체제를 가리켜 '워싱턴 체제'라고 부른다. 중국은 9개국조약을 통해 이 체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워싱턴회의에 참가한 쪽은 베이징정부이며, 1920년대 전반에 점차 세력을 갖게 된 광둥정부는 거기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또한 국내의 국권회수 운동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체제야말로 열강의 기득 권익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워싱턴 체제에서 제외된 것은 광둥정부만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소련과 독일(뒤에 9개국조약에 가맹)이 그러했다. 따라서 이 체제는 영·미·일 간의 협조 체제였는지는 몰라도, 독일이나 소련과도 관계를 맺고 있던 중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이 관련된 국제 관계의 하나일 뿐이었다. 1926년에 광둥정부가 북벌을 개시했을 때, 이 '체제'는 9개국조약에 조인했던 베이징정부를 지원해 주지 않았다. 결국 베이징정부는 1928년에 멸망하고 만다. 그리고 워싱턴 체제는 1931년에 발발한 만주사변으로 사실상 붕괴되었다."(239)


"신해혁명을 전후하여 그 성 출신자가 성을 다스린다고 하는 성 자치의 경향은 1920년대에도 계속되면서 연성자치로 이어졌다. 여기에 찬성하는 각 성은 〈성 사람이 성을 다스려, 지역을 보위하고 민생을 안정시킨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따라서 중앙집권에 부정적이었고, '외성인'(外省人), 즉 다른 성에서 온 군인 등이 '본성'의 내부에 개입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성 연합에 기초한 국가 건설을 이루고자 했다. 이것이 창장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연성자치 운동이다." "이후 1922년 1월 후난성 헌법 발포와 같이 각 자치성은 자치의 경향을 한층 더 강화했다. 또한 연성을 통해 연방공화국을 수립하려는 움직임도 거세지면서, 상하이에서 열린 국시(國是) 회의에서 헌법 초안 채택 같은 성과로 나타났다. 그러나 군사 세력과 관계를 조정하지 못한 데다 연방국가의 그림에도 불명확한 점이 있어 베이징, 광둥을 대신할 전국적인 새로운 정권을 창출해 내지는 못했다."(25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근현대사 1 - 청조와 근대 세계 19세기 중국근현대사 1
요시자와 세이이치로 지음, 정지호 옮김 / 삼천리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론


1장 번영 속의 위기


"19세기 초 영국 동인도회사는 광저우에서 주로 차를 매입하고 영국산 모직물을 판매했지만 판매량이 신통치 않아 결국 차 대금을 은으로 결제할 수밖에 없었다." "동인도회사가 영국 본국과 청조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무역 상인(country trader)은 아편을 팔아 은을 획득해도 광저우에서 사들일 상품이 별로 없었다. 이에 지방무역 상인이 은으로 동인도회사가 발행하는 환어음을 구입해서 영국으로 송금하면, 동인도회사는 그 은으로 차를 구입해 영국에서 판매한 대금으로 환어음을 결제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 미국 상인이 광저우에 등장해 영국인의 버거운 경쟁 상대로 부상하자 동인도회사 무역의 효율성이 문제시되었다. 게다가 영국북부의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한 여론도 독점을 문제 삼는 태도를 보였다. 자유로운 통상을 무모할 정도로 이상화했던 것이다. 이리하여1832년 영국 의회는 동인도회사가 중국 무역을 독점해 온 특권을 이듬해부터 폐지하기로 결정했다."(57-8)


"청조의 관료와 병사는 아편 밀수를 단속해야 할 처지였음에도 뇌물을 받고 눈감아 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렇게 아편 밀무역이 1820년대에는 점점 더 번성해 갔다. 무역 구모가 커지자 동인도회사가 발행하는 어음만으로는 지방무역 상인의 송금을 충당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미국 상인이 개입할 여지가 생겨났다. 그 무렵 미국은 영국에 방적업 원료인 면화를 공급하고 있었는데, 런던에서 지불하는 어음으로 결재를 받았다. 그래서 차를 사려고 미국 상인이 런던에서 지불된 어음(은화가 아니라)을 가지고 광저우에 오면 지방무역 상인은 이 어음을 받아 본국으로 송금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아편 무역은 미국 남부의 노예제 면화 생산, 영국 북부의 방적업, 그리고 런던의 금융시장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아편 무역액이 급격히 증가하자 어음으로 결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청조로부터 은 유출이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어 청조 관료들 사이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60-1)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1842년 8월 29일 난징조약이 체결되었다. 난징조약의 주요 내용은 〈① 다섯 항구(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를 무역을 위해 개항한다, ②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③ 청조는 임칙서가 몰수한 아편을 변상하고 아울러 전쟁배상금을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난징조약은 비교적 간략했기 때문에, 영국과 청조는 5항통상장정과 후먼짜이 추가조약(모두 1843년)을 맺어 내용을 구체화했다. 또한 다른 국가들도 청조와 조약 체결을 희망했기 때문에 청조는 미국과 왕샤조약(1844)을, 프랑스와 황푸조약(1844)을 체결했다. 이 조약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영사재판권이다. 영사재판권을 가진 나라의 시민이 청조의 영토에서 범죄 용의로 체포된 경우, 재판은 그 용의자가 소속된 나라의 영사가 담당한다는 규정이다. 또한 통상에 따른 관세율은 협상을 통해 정한다고 함으로써 청조가 자유롭게 변경할 수 없게 했다. 더욱이 청조는 각국에 대해서 최혜국 대우를 인정했다."(72)


"난징조약은 훗날 '불평등 조약'으로 여겨져, 가령 영사재판권의 철폐는 20세기 전반 중국 외교사의 염원이 되었다. 그러나 1840년대 갖가지 조약이 체결될 무렵에는 '불평등 조약'이라는 발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본디 청조의 입장에서 국가 간 평등이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없었으며, 오히려 외국인을 달래기 위해 일시적으로 양보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조약은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는 그런 은혜가 아니라 상대의 권리로서 존중해야만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청조 관료들은 이 점을 엄밀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디 무력으로 밀어붙여 체결된 조약이기 때문에 그러한 준법정신이 길러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난징조약을 청조의 대외관계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당시 청조 사람들은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다. 또한 아편 무역에 대해서는 난징조약 등 1840년대에 맺은 조약에는 명기되지 않은 채 청조 측이 일정한 범위에서 묵인하는 것으로 되었다."(73-4)


2장 반란과 전쟁의 시대


"1853년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증국번이 조직한 상군(湘軍)은, 그 지역에서 유학을 공부하는 독서인이나 과거 수험생에게 호소하여 친척과 지인 등 연고 관계를 통해 간부를 선발하고, 될 수 있으면 순박한 농민을 모아 병사를 조직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증국번은 태평천국의 사묘(寺廟) 습격과 우상 파괴는 역사사 비적(匪賊)들이 보인 태도와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하면서, 〈모든 묘가 불타고 모든 상이 파괴되었다〉는 점에 대한 분노를 조목조목 들추어내며 전례 없는 위기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이 격문에는 그러한 이념적 입장 표명만이 아니라 기부를 독려하기 위해 상당히 노골적인 거래 조건도 제시하고 있다. 기부액이 은 1천 량 이상인 자는 상주(上奏)해서 보고하고 그 이하는 영수증을 발행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주 보고란 구체적으로는 관위·관직의 추천을 의미하며, 영수증이란 역시 관위·관직을 교환할 수 있다는 점이 전제된 것이다."(88-9)


"19세기 중반은 청조의 처지에서 보면 대규모 반란이 계속된 고난의 시기였다. 물론 각지에서 발생한 반란의 경위는 다양했지만, 모두 지방 사회의 격렬한 생존 경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격렬한 생존 경쟁은 전반적으로 18세기의 인구 급증이 불러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중엽에 일어난 전란으로 사람들이 다수 사망함에 따라 이 시기 전국 인구는 상당히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각지의 반란은 처음에는 산발적으로 일어났지만, 상호 연쇄적으로 발생하면서 청조를 곤경에 빠뜨렸다. 태평천국과 염군처럼 어느 정도 협력관계가 있었던 경우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아도 청조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한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려다 보면 다른 지역에 배치된 군사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제를 지켜냈다는 측면에서 보면, 19세기 중엽부터 청조가 쇠망해 갔다고 보는 시각은 타당하지 않다. 다만 종래의 통치 체제를 수정한 것만은 분명하다."(102-4)


"1866년 12월 (전문 외교 기구인) 총리아문(總理衙門)은 서양 언어를 가르치는 동문관(同文館)에 천문학과 수학을 배우는 특별 과정을 부설할 것을 제언하며 〈서양인이 기계와 무기를 만들고 선박과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모두 천문학과 수학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라고 언급했다." "이에 따라 천문학과 수학을 배우게 될 학생은 과거 최종 시험에 합겨하기 전 단계인 거인(擧人)의 신분이 대부분이었지만, 얼마 후 진사 자격을 지닌 관료들까지 포함하도록 제안되었다. 이러한 계획은 유교를 최상의 가치로 여기던 관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동치제의 스승을 맡고 있던 대학사 왜인(倭仁, 1804~1871)이 반대의 깃발을 들었다. 〈얼마 전 베이징을 침략하고 원명원을 불태워 원한이 깊은 서양인에게 배우라는 것은 무슨 짓인가.〉 기독교의 확산에 대해서도 독서인이 유교의 가르침을 설파하여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국 지식을 수용하는 것에 관료들이 강한 반감을 표시하면서 결국 그 시도는 좌절되었다."(116-8)


"무기공장의 신설은 태평천국과 싸운 청조 관료들이 서양식 군대 장비의 위력을 실감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태평천국군조차 서양무기를 구입하고 있었다는 사정도 한몫했다. 공친왕 혁흔은 상주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아직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중이므로 지금 서양으로부터 무기 제조를 배워서 적을 진압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는다면 자강을 추진하고자 하는 진의를 감출 수 있을 것입니다.〉 청조가 서양 국가들을 가상의 적으로 삼는다면 그들이 순순히 군사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군비 증강의 주된 목적이 외국에 대한 방어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이홍장은 중국에서 기계를 제작하는 것은 마치 곡예라도 부리는 것처럼 인식되어 왔다고 신랄하게 지적하고, 서양을 본받아 군사기술에 뛰어난 인재를 고관으로 등용할 것까지 제언하고 있다. 유교와 과거라는 국가의 기본이야말로 문제의 근원이라는 대담한 견해였다."(119-20)


3장 근대 세계에 도전하다


"1871년, 일본 측은 청조가 서양 국가들과 체결한 조약과 동등한 내용을 희망했지만, 청조는 1860년대 이후 조약 체결 때 자국에 불리한 조항은 되도록 배제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청조는 지난날 서양 국가들과 벌인 교섭과는 달리, 처음으로 조약 원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조약 교섭을 진행해 나갔다. 9월 13일에 조인된 청일수호조규(淸日修好條規)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① 서로 침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에는 서로 돕는다, ② 양국의 수도에 대신을 파견해 주재시킨다, ③ 양국 개항장에는 서로 영사를 설치해 자국민을 관리하고, 자국민 간의 재산에 관한 재판을 담당하게 한다, ④ 형사 사건의 경우 그 사건이 발생한 나라의 관리가 체포하여 영사와 함께 재판한다. 이리하여 청일수호조규는 대체로 두 나라가 대등한 원칙에 따라 체결되었다. 이홍장이 조정에 올린 보고에 따르면, 상호불가침 조약 내용은 일본이 조선 등에 침략할 것을 대비한 것이라고 했다."(132-3)


"1872년, 일본 정부는 류큐를 병합할 구체적인 시책을 진행했다. 우선 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당시 류큐 국왕 쇼타이(尙泰)를 류큐 번왕에 임명하고 이어서 류큐가 미국 등과 체결한 조약에 대해서는 도쿄 외무성이 관할하는 것으로 했다. 1875년 청조와의 책봉·진공 관계를 일본 정부가 중단시키려고 하자 류큐 사족이 강하게 반발했다. 청조의 번속국이라는 것이 류큐를 존속시키는 열쇠가 되었기 때문이다. 류큐 측은 푸저우로 밀사를 파견해 이 사태를 청조에 전달했다. 또한 일본 정부에게는 '신의'의 존중을 근거로 책봉과 진공을 계속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한 노력도 소용없이 1879년 일본 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류큐에 파견해 류큐 번을 폐하고 오키나와 현으로 변경했다(류큐 처분). 한편, 청조는 이러한 일본의 류큐 병합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청조는 그 후에도 일본과 외교 교섭의 장에서 류큐 귀속 문제를 거론했지만, 일본 측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138-9)


"1848년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은 중국의 이민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캘리포니아는 골드러시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광둥 사람들도 일확천금을 위해 몰려들었다. 광둥이라고 해도 지역에 따라 방언의 차이가 매우 컸기 때문에 이민자들은 출신지 별로 동향(同鄕) 회관을 만들었다. 동향 출신이라는 연대감은 새로운 이민자를 불러들여, 특정 장소의 이민은 특정 지역 출신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현상을 보였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동향 회관은 돈을 꾸거나 빌려 주는 일을 보증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가령 귀국할 경우에는 모든 빚을 변제했다는 증명서를 동향 회관에서 발급받아야만 했다. 이는 이동이 잦은 사회에서 동향 회관이 금전적 신용을 보증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동향 회관은 고향과 연락이 닿았기 때문에 채무자는 쉽사리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채무자에게 비교적 안심하고 돈을 빌려줄 수 있었다."(156-7)


"인도주의적 비판에 따라 서양 국가에서 노예제도가 폐기된 일은 19세기 국제적인 노동력 수급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자유주의 여론의 영향으로 영국은 1807년에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1833년에는 노예제도 자체를 폐지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도 뒤를 이었다. 그런데 노예해방은 카리브 해와 신대륙의 노동력 부족 현상을 불러왔다. 따라서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중국 대륙에서 쿨리 무역이 성행하였는데, 쿠바와 페루의 쿨리 무역은 심한 학대로 유명했다." "청조도 쿨리 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1866년 총리아문은 영국·프랑스와 교섭을 벌인 끝에 중국인을 해외로 이주시키는 것에 대한 규정을 만들었다. 지방관의 검사를 통과하지 않으면 노동자의 출국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규정은 조인에 이르렀지만 영국과 프랑스 정부의 비준을 얻지는 못했다. 게다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여하튼 청조 중앙정부도 쿨리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관리하고자 한 것이다."(158-9)


4장 청말의 경제와 사회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골드러시가 일어나고, 이어서 1851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금광이 발견되었다. 이런 상황은 세계 금융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새롭게 산출된 금은 영국을 포함한 유럽으로 흘러들어 가서 화폐 유통량을 증가시키고 경기를 자극했다. 금으로 대체되면서 넘치게 된 은은 아시아 무역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금융 호황을 배경으로 아시아를 주요 무대로 활동하는 영국계 은행이 잇따라 설립되었다. 오리엔탈은행, 차타드은행, 홍콩상하이은행(HSBC) 등이다. 이들 은행은 인도에서는 플랜테이션 비롯한 농업 부문에 투자했지만, 중국에서는 무엇보다 무역 금융을 담당했다. 1860년대 이후에는 운수 관련 사업에 투자하거나 청조 정부에 차관을 제공했다." "이들 은행이나 상사의 경영자와 직원은 조계의 사회생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중국인 직원은 때때로 매판(買辦)이라고 불리며 개항장 사회의 특징을 규정하는 사회계층을 형성했다."(172-3)


"19세기 강남 지역에서는 지역의 신사(紳士)가 기근 구제 등 사회문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구제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지방관이 조달하지 못하고 지역의 기부금에 의지한 것이다. 또한 태평천국과 싸운 단련을 편성하는 가운데 지역 유력자가 군비를 조달하고 방어와 전투에 깊이 관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과정에서 지방의 유통 과세인 이금(釐金)이 중요한 재원이 되었는데, 이금 징수와 운영에서 각지의 신사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신사라는 말에서 '신'이란 본디 고위직 문인 관료(또는 퇴직 관료)를 포함하고 있으며, '사'란 과거를 준비하는 사람, 특히 과거 시험을 볼 수 있는 생원 자격을 갖춘 사람을 가리킨다." "19세기에 들어와 쓰촨에서는 부가적인 징수를 지역 명망가에게 청부시키는 '공국'(公局)이 등장했다. '공국'은 19세기를 통해 사회 구제, 교육, 치안을 비롯한 다양한 업무를 담당했다. 이 공국을 통해 지주층이 지방행정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확보할 수가 있었다."(190-2)


"종족(宗族)은 개별 집안을 뛰어넘은 단위이다. 기본적인 가계 단위인 집안은 가장 단순하게는 부부와 자식으로 구성된다. 예로부터 대가족을 이상화했으나 남자 형제간 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이 화목하게 동거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가족의 규모는 소가족이었다. 동성(同姓) 간에는 결혼을 금지했기 때문에 부부는 반드시 성이 달라야 했다. 결혼해도 여성이 성을 바꾸는 일이 없었던 것은 성이란 남성의 혈통을 의미한다는 관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성들끼리 대체로 인근에 모여서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규모가 큰 종족은 지역사회에서 두드러진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공동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일족에서 과거 합격자를 내기 위해 장학금을 지급하거나 곤궁한 자를 원조하기도 했다." "풍계분은 종족이 개개인을 통합하여 〈다수 세대가 모두 소속을 갖게 하는〉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유대 관게에 바탕을 두어야만 국가도 평안할 수 있다는 것이다."(194)


"그러나 풍계분이 예상한 것과는 다소 다른 변화도 나타났다." "태평천국이 진압된 후 유교는 지역사회를 재건하는 이념으로 표방되었다. 태평천국과 같은 사악한 가르침을 박멸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가르침을 내세울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퍼져나간 것이다. 이는 종족에 기반을 두고 지역에서 세력을 신장시키고 있던 명망가들이 받아들이기 좋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강조된 유교는 일족의 관혼상제 의례를 중시하는 '예교(禮敎)'일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조성된 지방 여론은 기독교를 비롯한 외국 문화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가령 여성이 도시의 공공장소에 등장하는 것을 비판하는 논조도 유교가 이상으로 하는 가족상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교의 이상은 확실히 태평천국 후의 혼란 속에서 사회질서를 재건하는 데에 유용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증국번의 톈진 교안 처리에 대해 비난하고, 개혁이 필요하다는 이홍장의 주장을 일축하는 보수적인 입장으로도 연결되었다."(195-6)


5장 청조 지배의 전환기


"광둥 성 샹산 현(香山縣)에서 남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반도의 끝에 자리 잡은 마카오는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이 관리해 왔다. 아편전쟁 이전에는 마카오가 대청 무역의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영국령이 된 홍콩이 발전하자 별도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한때는 쿨리 무역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1887년 마카오에 대해 청조와 포르투갈이 교섭한 결과 리스본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이를 중개한 것은 청조가 고용한 해관 총세무사 로버트 하트이다." "교섭의 초점은 다름 아닌 마카오의 지위였다. 리스본협정에서 청조는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영구히 머물며 관리하는 것을 인정하고, 포르투갈은 청조와 협의 없이는 제3국에게 마카오를 양도하지 않는다. 그리고 청조의 아편 과세에 협력한다〉는 것을 약속했다. 하트에 따르면, 이 협정이 마카오의 주권을 포르투갈에게 영구히 이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마카오의 법적 지위를 명확히 규정하는 것은 장래의 과제로 넘겨진 것이다."(207-8)


"응우옌아인(재위 1802~1820)은 프랑스인 가톨릭 선교사 피뇨 드 베엔과 시암(태국) 왕의 지지를 받아 떠이선(西山朝) 왕조를 격파하고 1802년 제위에 올라 응우옌 왕조를 세웠다. 이때 청조가 정해준 새로운 국명 '월남'(越南)의 현지 발음이 베트남의 어원이 된다." "나폴레옹 3세는 제2차 아편전쟁에 참가하면서 동시에 1858년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했다. 에스파냐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선교사가 살해된 것을 이유로 함께 참전했다. 그 결과 1826년 사이공조약이 체결되어 사이공을 포함한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 동부 3성이 프랑스령으로 할양되었다. 이어 제3공화정의 프랑스 정부도 1873년 베트남을 침공하여 이듬해 체결한 사이공조약에 의해 코친차이나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의 군사적 보호를 받게 되었으며, 프랑스에 송꼬이 강 항행권도 인정했다. 사이공조약은 베트남을 자주 독립국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청조와의 종속 관계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다."(209-10)


"타이완을 어떻게 통치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19세기 후반 청조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1871년 류큐 선박이 표류하다 타이완에 도착했는데, 여기에 타고 있던 미야코지마의 도민이 타이완 원주민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874년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타이완을 침략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청조에서는 타이완 방어에 대한 논의가 높아져 갔다." "최초로 타이완 성의 통치를 맡은 인물은 청불전쟁 때 타이완 방어를 담당했던 유명전(劉銘傳)이다." "타이완 성을 통치하는 관청은 본디 오늘날의 타이중 시 부근에 있었지만, 유명전은 타이베이에 머물면서 통치했다. 숱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상수도와 전기, 쓰레기 처리 설비 등을 타이베이에 도입했다. 타이완에서 인구가 많은 곳은 타이난 지역이었지만, 19세기 말 타이완 북부에서 차업(茶業)이 발전하면서 경제의 중심이 서서히 북부로 이동했다. 유명전이 타이베이를 중심으로 신규 사업을 추진한 것은 그러한 경제동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229-30)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청일 양국은 각각 조선에 파병하여 전쟁을 벌였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우세로 마감되었고, 이듬해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청조는 조선에 대한 종속 관계를 포기하고 타이완 등을 일본에 할양하며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캉유웨이와 그 제자 량치차오 등은 변법을 위해 새로운 형태의 정치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학회라는 정치 결사를 만들고 잡지를 통해 선전하는 방식으로 운동을 벌였다. 캉유웨이가 생각하는 정치 변혁의 이론적 기초는 공자개제설(孔子改制說)이다. 말하자면 공자는 태고의 성인에 의탁해서 정치제도를 창작한 위대한 인물로서, 오늘날 위기의 시대는 공자가 행한 것과 같은 새로운 제도 구축이 불가결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술년(1889년)의 변볍운동은 2년 전부터 친정을 시작한 광서제의 신임을 얻었을 뿐 지지 기반이 너무나 취약했다. 여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서태후는 군사력으로 변법을 중지시키고 광서제를 유페했다."(23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서울대학교동양사학강의총서 8
로이드 E. 이스트만 지음, 민두기 옮김 / 지식산업사 / 199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론


1장 지방정치地方政治와 중앙정부中央政府 : 운남雲南과 중경重慶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운남의 군벌은 용운(龍雲, 1888~1962)이었다." "대일항전이 시작되고 국민정부가 오지(奧地)로 후퇴하자, 운남과 중앙정부의 관계의 질은 기본적으로 변화하였다. 여태까지는 운남이 중앙정부의 주된 관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중앙정부로서는 운남성당국이 그 뜻을 순순히 그리고 신속하게 따르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전시중국으로서는 운남성은 사천성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성이 된 것이다. 이제 운남은 중앙정부를 위한 인력, 돈, 물자를 위한 요긴한 공급원이 되었다. 그러니 중앙정부로서는 운남이 어떻게 통치되는가 그리고 운남의 통치자가 중앙정부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3년 동안에 아마도 30년래의 것보다 더 큰 변화가 성 안으로 물밀듯 들이닥치자, 누구보다도 운남성정부당국이 지방권력이 침식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1939년 중기에 가면 중앙정부와의 관계는 파열 직전 상태에까지 갔었다."(30-4)


"운남성과 중앙정부의 관계는 주로 경제적인 것이었다. 그 까닭은 분명하다. 국민정부는 오지(奧地)에 전시경제 근거를 마련해야 하였던 것이다. 운남은 일본군의 공격이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는 점, 과장되기는 했으나 뽐낼 만한 자연자원의 부존, 그리고 임시수도 소재성인 사천성에 가깝다는 것 때문에 전략산업을 두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더 나아가, 운남이 하노이와 버마에의 수송로 기점이라는 위치가 운남으로 하여금 갑작스레 중국의 대외교역의 중요한 중재자로 변모하게 하였다. 은행업무와 조세행정면에서도 중요한 갈래가 되었다. 운남 사람들이 이같은 경제적 변화에 적응해 가는 과정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운남의 경제적 자주의 기반이 침식되어 갔기 때문이다. 어떻든 국민정부측으로서는 운남에 대해 재정적으로 보장함으로써 운남을 전시경제체제로 편입하는 목적을 달성하였다. 1939년 10월에 가면 기본적인 경제적 차이가 없어지게 되었다."(40)


"1939년에 국공(國共)의 통일전선 형성 때문에 정치적 조정을 필요로 하는 분위기는 가시기 시작했다. 당(黨)과 군의 군사통계국(軍事統計局)이 주가 되는 중앙정부의 몇몇 비밀경찰기관과 삼민주의청년단이 국민정부 영역에서 사상적, 정치적 획일화를 이루고자 점진적으로 배치되었다. 그러나 용운은 다른 몇몇 지방군벌이 그러한 것처럼 정치적 반대자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이 정치적 반대자들의 중앙정부비판이 중앙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거나 또는 「강(江) 저쪽」의 정부에 대한 비판자를 받아줌으로써 매우 배타적인 운남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높이려 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1941년 홍콩이 피난처 구실을 할 수 없게 되면서 그러하였다." "예를 들자면, 1941년에 성립한 민주정단동맹(民主政團同盟)의 주장의 근저가 국민당의 독재에 대한 반대였는데도 불구하고─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용운은 정단동맹의 친구요, 후원자가 되었다."(42)


"1944년 4월 일본군이 「1호작전」을 시작하였다. 이는 중국전쟁에서 일본군이 행한 가장 강력한 군사작전으로서, 남부중국과 동부중국에 있는 중국군과 미군의 비행장들을 파괴하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었다." "국민정부에 대한 「1호작전」의 정치적 영향은 군사적 영향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일본군의 군사적 성공이 중앙정부의 부패, 무능, 사기저하를 전에 없이 드러내는 결과가 됐기 때문이었다." "「1호작전」을 계기로 하여 성(省)에서의 반장(反蔣)운동이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지방의 군벌들로서 볼 때는, 이제심(李濟深)의 표현을 빌린다면 집권세력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스럽다고 보여지는 남방 지도자들의 군대를 약화시키거나 파괴하기 위해 중앙정부가 미리 짜놓은 계획이 「1호작전」으로 드러나고 만 것이었다. 더 나아가 「1호작전」은 지방 省의 음모자들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니, 중앙정부가 이제 군사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고 정치적으로 약체화되었기 때문이었다."(45-6)


"1945년 봄의 장개석은 전후(戰後)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 유리한 입장에 있는 중앙정부로서는 공산당과의 사생결단 싸움이 임박하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사실이라면 용운이 전후에도 계속하여 운남을 지배한다는 것은 불편스럽고 위험하였다." "10월의 용운에 대한 무력해직(武力解職) 사건의 여운은 몇년 뒤까지도 남았다. 굳이 말한다면 이 사건은 국민정부의 종국적 붕괴의 요인이 되었다 할 수 있다. 이 사건의 즉각적인 효과는 중앙정부의 정보기관원이 마음대로 곤명의 반정부 지식인을 탄압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협상결렬이 확실시되던 1945년 11월에 곤명의 교수와 학생은 내전(內戰)의 재개에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긴 전쟁 끝이라 평화와 안정을 절실히 바랐고, 국민당의 권력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들 지식인들은 중앙정부보다는 공산당에 대해 덜 비판적이었다. 전국 지식인들의 충성은 차차 국민당에서 멀어져가기시작했다."(51-6)


"운남성과 중앙정부와의 관계는 국민당 정권의 정치구조 깊숙이 있는 균열의 하나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즉, 극히 자립적인 지방권력중심이 존재하였고, 그 지도자는 중앙정부 정책목표의 전부에 다 참여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어떤 때는 중앙정부의 존립 그 자체를 위협하기도 하였다. 전국의 권력자원을 제한적으로 그리고 불안정하게밖에 장악하지 못한 정권은 정말 극히 약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장개석의 정치전략은 (세력균형 아닌) 약력균형(弱力均衡)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다른 모든 정치세력을 약하게 해둠으로써 자기 자신과 자기의 정부를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이 전략은 한동안은 성공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인 뜻에서는 실패하였다. 왜냐하면 이 모든 세력들을 약하게 해둠으로써 장개석은 중국이 강할 수 없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국은 패자가 된 것이고 장개석도 결국에는 패자가 되고 말았다."(58-9)


2장 항일전抗日戰 시기時期의 농민農民과 징세徵稅 및 국민당國民黨 지배


"정부의 부담 강요 중에서 전부(田賦, 토지세)가 징병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1928년 이래로 정세(正稅)와 그와 관련된 부가세(附加稅)는 성(省)과 현(縣)의 정부에서 관리되었다. 그러나 1941년 7월에 중앙정부는 전부를 국유화하여 현물(즉, 곡물 또는 다른 농산물)로 징수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농민이나 정부에게까지도 큰 영향을 준 주된 개혁이었다." "미곡 생산이 줄어들고(1940년 6월, 일본이 미곡의 주생산지인 호북성 함락), 가격관계가 불리하고(미곡퇴장과 투기 바람으로 인플레이션 발생), 소작료가 비싸지면서(가치가 하락하던 화폐에서 안전한 곡물로 소작료 변경) 대다수 농민의 경제적 지위는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조세, 기부금, 강제차용과 강제구매, 징병, 징용(노동력 징발) 형태의 부담도 농민의 많은 희생을 강요하였고, 정부권위에 대한 농민의 태도에 영향을 주었다. 이같은 강제적 부담은 그리하여 1949년의 혁명적 대단원을 가져온 복잡한 정치적 역동관계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71-2)


3장 전후기戰後期의 농민農民과 과세課稅부담과 혁명革命


"1943년 9월, 국민정부는 전부면제책(田賦免除策)을 발표하여, 일본군점령하의 24개 성에서 전부 징수를 1945년에서 46년까지 1년간 면제해주었다. 다음해에는 나머지 성에서도 전부가 면제되었다. 전부면제책은 액면 그대로 보면 약은 정치적 조치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써 다가오는 공산당과의 싸움에서 토지소유층의 지지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조치는 재정적으로 결정적인 오산이 되고 말았다. 항일전(抗日戰) 승리 다음해의 현물조세징수는 그전 해의 반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군대나 정부의 양곡 수요는 그에 따라 줄어들기는커녕 일본군 점령지였던 지역으로 정권의 힘이 확대되어가면서 사실은 더 증가하였던 것이다. 더우기 서부중국에서 이들 지역으로 대량의 양곡을 운송한다는 것은 실현성이 없는 일이었다. 그 결과 군대와 지방정부의 여러 단위는 그 지방에서 불법적인 강제징수를 멋대로 행함으로써 양곡 수요를 충당하였고, 그러한 행동은 불만을 넓게 확산하게 만들었다."(95)


"(농민들의 반대가 광범위해질 것이 분명한데도) 1947년 당시의 중앙정부는 농민의 부담을 경감할 수가 없었다. 행정원장 장군(張群)에 따르면 군대와 정부가 다같이 심각한 양곡부족으로 겪고 있었다. 그러므로 양곡의 강제차용은 중단할 수가 없었다. 중앙정부는 양곡강제차용제를 부활시켰을 뿐 아니라, 공산군과의 전투가 계속되면서 양곡의 수요는 더 급박해져 갔다. 1948년에는 중앙정부가 마침내 전부 세율을 올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가 되면 시골에서 자원을 강제징수할 수 있는 능력이 현저하게 감소해 갔다. 공산당의 영향력이 확산됨에 따라 국민정부의 권위가 행사되는 지역은 줄어들어 간 것이다. 형식상으로는 국민정부의 지배하에 있는 마을에서조차도 효과적인 정치적 통제는 사실상 쇠퇴하였고 행정의 능률은 필시 거의 막다른 최하의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1948년에 중앙정부가 거두어 들인 곡물의 실제 양은 1941년 이래 가장 적었다."(102)


"1949년의 중국혁명은 현대 농민혁명의 고전적인 예로 간주되고 있기는 하나 농민의 역할은 프랑스나 러시아에서의 경우와는 크게 다르다. 중국의 경우 농민의 불만은 분명히 깊은 것이었고 그것이 폭동, 전국적인 비적질 그리고 농촌으로부터의 도피 등으로 나타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농민의 반란은 유렵혁명의 경우 농민이 한 것처럼 그 자체로서 농촌의 사회경제적 질서를 뒤엎을 만하지를 못했다. 실로 중국의 농민들은 공산당의 군사적, 정치적 힘 아래서 그것들이 옛 엘리트들로부터의 보복을 막아주겠다고 보장하거나, 또는 공산당이 선전이나 개혁의 성과를 가지고 옛 질서하에서 알고 있는 생활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전망을 주기까지는 기존 사회경제제도를 직접 공격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결과 국민당편에는 압력(또는 지지)이 거의 없었고, 공산당편에는 얼마간의 압력(지지)이 있었다. 공산당편에 기운 부분적인 정치적 공백은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107-10)


4장 정권政權 내부의 정치과정政治過程 : 삼민주의청년단三民主義靑年團


"삼민청년단을 만듦에 있어 장개석이 바란 것은 혁명과 항일전쟁의 모든 진정한 지지자가 각자의 차이를 묻어 두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그 안에서 일할 수 있는 그런 기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그린 삼민청년단은 국민당 안의 모든 경쟁파벌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사천의 기업가 노작부(盧作孚)나 경제전문가 하렴(何廉)과 같은─그들은 국민당이 마음에 안 맞아 국민당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사회적 지도자들을 끌어들이기를 바랐었다. 이같은 노력을 통해 국민당을 상당히 싫어한 청년들을 끌어들일 수 있기를 바랐다." "요컨대 삼민청년단을 만든 장개석의 의도는, 지난날의 분파싸움을 없애고 젊은이들을 끌어들임으로써 국민당이 팽개쳤던 혁명과업을 추진할 수 있는 새로운 혁명조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삼민청년단의 임무는 청년들로 하여금 항전건국강령(抗戰建國綱領)을 실행하게 하며, 혁명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상급혁명세력과 단합을 하는 일이었다."(116)


"삼민청년단이 혁명분자를 통합된 세력으로 규합할 것이라는 장개석의 기대는 (파벌싸움의 폐단이 일어나면서) 이내 깨지고 만다. 얼마 안되어 삼민청년단이 단원모집에 있어 서로 경쟁하고, 당을 공공연히 조롱함으로써 관할권을 둘러싸고 국민당과 싸움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상황이 매우 심각해졌으므로 1939년 5월, 그러니까 삼민청년단의 설립이 공식으로 결정된지 꼭 일년 뒤에 장개석은 삼민청년단에 대한 생각을 전면적으로 바꾸었다. 당초에는 청년단이 국민당정권에 있어─유일하지는 않더라도─하나의 지도적인 정치적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젊은이를 훈련하고 통제하여 국민당의 장차의 당원으로서 준비하는 것으로 기능을 축소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삼민청년단의 일은 불가피하게 정치적 관련이 있지만 그러나 교육을 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삼민청년단을 이같이 새롭게 보게 되면서 장개석은 청년단 단원에게 종속적인 역할을 받아들이도록 훈계하였다."(118-9)


"국민당과 삼민청년단 간의 다툼이 국민당 활동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다는 것, 그리고 삼민청년단의 지도부가 그 다툼에 책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 장개석은 마침내 청년단을 해산하기로 결심하였다. 1947년 6월 30일에 그는 국민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회에 삼민청년단을 국민당 안으로 흡수할 것을 제의하였다." "장개석은 (합병을 결정한) 최종 합의에 매우 만족스럽다는 뜻을 표하였다. 『삼민청년단과 국민당이 통합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생각은 화합되었고, 그들의 정신은 통일되었다. 이제 세력다툼은 없게 되었다. 통합회의의 정신에 나는 깊이 감동하였다』라고 장개석은 말하였다. 그러나 장개석이 구조적인 통일이라는 그러한 형식적 방편이 그의 추종자들간의 다툼을 없앨 수 있다고 정말 믿었다면 그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륙에 남아 있던 그 뒤 2년 동안 실로 통합 자체가 그 갈등을 더 심하게 하였으니, 양쪽이 국민당 안에서 자리와 세력을 놓고 서로 싸웠기 때문이다."(129-31)


5장 당내정치黨內政治 : 「혁신革新」운동


"혁신운동은 1944년 초 국민당정권의 정신적, 물질적 힘이 쇠미해 있을 때 시작되었다." "(주로 CC계 당원들로 구성되어 있던) 혁신그룹이 걱정한 것은 분명 당과 정부의 타락과 비능률이었다. 그들이 보기로는 국민당정권은 불행하게도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었고, 군사적 패배의 주된 원인은 정부의 실책이었으니, 그것은 조세징수액의 감소와 물가의 상승, 그리고 정부의 양곡정책의 실패(아마도 현물조세징수책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에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공격방향이 특정한 파벌이나 개인에도 쏠려 있었으므로 그 운동은 권력투쟁의 요소가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 혁신그룹의 특별한 공격목표의 하나는 정학계(政學系)였다. 정학계는 이념이라는 것을 우선순위에서 낮게 치는 행정적, 기술적 전문가들의 느슨한 집단이었다." "혁신계의 생각으로는 정학계의 사람들은 그저 정치적 원칙이 없는 정치적 기생자(奇生者)로서 자기들의 이익만 된다면 언제든지 당과 나라를 팔아먹을 자들이었다."(134-7)


# CC계 : 국민당 중급간부들의 모임


"「혁신」운동가들이 보기에 국민당의 병의 근본원인은 당원들의 다양한 성격에 있었다. 당의 조직은 적절한 기율, 훈련, 선전활동이 없이 언제나 느슨하였다. 게다가 북벌 이후 군벌과 기회주의자가 당으로 밀어닥쳤다. 그러므로 당원간에 목적의 공통성이 없게 되었다. 당의 혁명원칙에 무관심한 사람이 많았고 권력이나 돈만을 얻으려 하였다." "또한 당내민주주의가 없었기 때문에 당의 지도자들은 늙고, 상상력이 메마르고, 그들의 특권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는 「특수한 계급」이 되어 버렸는데, 그들은 권력을 독점하였지만 그 권력을 가지고 아무것도 해놓은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몇 가지 요인들 때문에─1927년에 기회주의자가 당으로 몰려 들어오고, 당의 조직이 약화되고, 당내에 민주주의 정신이 없고, 당이 정부를 통제할 수 없고 하는─당과 정부는 지금 관료주의, 파벌싸움, 관료자본주의의 병폐를 갖게 되었다. 이것들이 「혁신」운동의 3대 공격 목표였다."(145-6)


"1947년 3월의 제3차 전체회의 이후 「혁신」운동은 자취를 감춘다." "「혁신」운동이 시들게 된 가장 뚜렷한 이유는 삼민청년단과 CC계 사이의 갈등이 증대한 것이었다." "「혁신」운동과 삼민주의청년단은 국민당 국가기구의 내부 분해의 예이며 동시에 증언자이기도 하였다." "이 두 운동의 그 어느 것도 정권을 구하지 못하였으니, 그들이 공격하였던 개인이나 파벌과 마찬가지로 그들 각자도 병(病)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근원은 주로 구조적인 것이었다. 정권의 구성원으로 하여금 그들의 직무수행을 정부 밖의 정치적 지지자나 정치적 세력에게 책임지게 하는 효과적이고 제도적인 방편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개의 공직자들은 정치의 보다 큰 목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권력의 획득 그 자체가 그것에 수반되는 명예와 부와 함께 그들의 우선과제가 되어 버렸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국민당정권 안에 있어서의 정치 행동의 주된 방편인 파벌에 가담하였던 것이다."(149-53)


6장 항일전쟁抗日戰爭과 국민정부군國民政府軍


"국민정부군은 조직, 훈련, 장비면에서 확실히 우세한 적군(일본군)과 8년간의 싸움을 치러냈다. (독일군에 대한 저항이 겨우 6주일간의 전투 끝에 붕괴된) 프랑스군이나 (미국으로부터 대규모의 물자원조를 받은) 영국군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중국 국민정부 군대의 저항은 놀라운 신념과 자족(自足)의 경이였다. 신속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기대하였던 일본군의 계산을 완전히 좌절시킨 국민정부군은 상해, 남경 그리고 북부중국, 중부중국에서 엄청난 손실을 무릅쓰고 활발하게 싸웠다. 그리고 나서 해안지대에서 주요 교통망이 닿지 않은 곳으로 후퇴한 국민정부군은 지구전(持久戰)으로 바꾸어 일본군을 중국의 광대함의 늪 속에 허우적거리게 하였다. 이 완강한 저항은 추축국에 대한 연합국의 전면전에 상당히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국민정부군은 약 100만의 일본군을 아시아대륙에 묶어놓았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태평양에서 섬에서 섬으로 옮겨 싸운 서방 동맹군과 싸우도록 동원되었을 것이다."(155)


"전쟁 기간 내내 장개석 휘하 군대의 소극성과 부패에 대한 서방측 관찰자들의 비판은 장개석의 비위를 몹시 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군대가 싸움을 할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이 숫자상으로 아주 우세한 운남의 국부군으로 하여금 북부버마에 있는 일본군 1개 사단을 공격할 것을 명령하도록 1944년 3월에 간청했을 때 장개석은 반대를 하고 있다. 중국은 군사적으로 아주 무능하고 정치적으로 취약하므로 그같은 대수롭지 않은 일도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7년 동안의 전쟁이 중국의 물질적, 군사적 힘을 그토록 소모해 버렸으므로 중국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간청하는 것은 불행한 일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라고 장개석은 말하였다. 그러므로 장개석의 전략적 목표는 공간으로 시간을 버는 것, 즉 기존의 전선을 유지하고 장차 중국해안에 연합국이 상륙하는 일에 대비하는 데 국한되게 되었다."(163-4)


"국부군의 사병들은 (무능의 상징과도 같았던) 장교와 경우와는 달리 외국 전문가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국부군의 사병들은 일반적으로 너무도 형편없이 다루어졌고 못먹어서, 효과적으로 싸울 능력도 사기도 다 갖고 있지 못하였다. 국부군 병사의 대부분은 징병이었다. 징병법에 의하면 18세에서 45세까지의 모든 남자─독자, 학생, 곤궁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징병에 해당되었다. 정부는 「세 가지 공평원칙(三平原則)」을 강력하게 선전하였는데, 그것은 병역의무는 모든 지역사람과 모든 경제계층 사람이 공평하게 부담한다는 것이다." "원칙은 그러하였지만 실제는 달랐다." "이 징병제도의 근원적인 결함은 병사를 징발하고, 징발된 사람을 모으는 일이 지방당국에 궁극적으로 맡겨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유력자의 아들들은 징병을 면하였고, 그런가 하면 「세 가지 공평원칙」이 완전히 무시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자식들만 군에 어거지로 끌려갔던 것이다."(172-3)


"8년 동안의 일본에 대한 항전기간 동안 전선의 배치 부대에 도달하기 전에 죽은 신병의 총수는 약 140만이었으니, 10명의 신병 중 1명 꼴이었다." "일본군과 싸운 8년 항전의 후반 동안에 국민정부군은 상당히 붕괴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전쟁 초기의 대일항전 전적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적어도 1942년 이후, 아니 그보다 더 일찍부터 국부군은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군사작전을 할 수가 없었다. 하응흠 장군의 표현을 빌린다면, 전쟁 말기에 국부군은 「극도로 피폐」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8개 사단은 13주 동안의 미군식 훈련을 갓 마쳤으며 다른 22개 사단은 그 훈련의 여러 다른 단계에 있었고, 급식상태와 장비가 좋은 이들은 비교적 효과적인 전투단위였다. 그러나 그밖의 300여 중국군 사단은 그대로였다. 국부군이 이렇게 피폐하였고 노후화하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니, 이들이 이내 공산군과의 내전에 참가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78-86)


7장 국부군國府軍의 공산군共産軍과의 싸움


# 국공내전의 승패를 가른 요인

1. 전술과 전략의 착오 : 국부군 병력은 너무 광범위한 지역에 포진되어 있었고, 그 지휘관들은 적의 섬멸보다 스스로의 안전을 더 걱정하였다. 

2. 상호협조의 부족 : 중앙군과 지방군 간의 알력은 지휘체계의 균열을 가져와, 지휘관들은 서로 협조하거나 다른 부대를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3. 군대의 배반 : 지방군을 중심으로 전투 중에 공산군에 투항하는 일이 잦았으며, 공산군은 선전전을 동원하여 국부군 내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4. 첩보활동 : 국부군의 정보활동이 형식적이고 관료적이었던 데 반해, 공산군 첩자들은 국부군 내부의 비밀을 캐고 역정보를 뿌리는 데 능했다.

5. 공산군의 우월성 : 충분한 사전 작전 수립, 전투지휘관에게 부여된 광범위한 결정권, 민간인 지원 획득 등에서 공산군은 국부군을 압도했다.


8장 장경국蔣經國과 금원권金元券 통화개혁


"1948년 8월의 통화개혁 착수 후 3개월 이내에 경제는 완전무결하게 붕괴되었고 중앙정부군은 양자강까지 밀려났다. 그로부터 꼭 2개월 뒤인 1949년 1월에 장개석은 국민정부의 총통자리를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정부의 패배를 금원권통화 개혁이나 한낱 각료 탓으로 돌리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것이다. 통화개혁은 1948년의 경제적 붕괴의 원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통화개혁이 착수되기 전에 시작된 붕괴를 막아보려는, 절망적이기는 하나, 하나의 도박이었던 것이다. 그 도박이 실패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통화개혁의 기도가 국민들의 상당한 부분을 환멸을 느끼게 하고 화를 내게 함으로써─특히 국민당정권의 주된 지지층이었던 중산계급이 그러하였다─국민당정권의 정치적 붕괴를 촉진한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왕운오는 물론 장개석도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보았고, 적어도 약간의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도박이었다."(201-2)


"1947년과 1948년의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국민정부 지배하의 중국의 경제는 엉망이었다." "그러나 1948년 여름에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나라가 막바지 붕괴로 치닫는 듯 보였다. 공산군과의 싸움으로 생긴 예산상의 적자 때문에 법폐발행고는 늘어가 1947년 12월의 34조원(元)에서 1948년 6월에는 250조원이 되었다. 그러더니 단 한 달 반만에 발행고는 600조원에서 700조원으로 늘어났다. 전투지역이 확대되면서 법폐는 격류처럼 북부중국에서 중부 및 남부중국으로 밀려들어왔다. 화폐발행고가 팽창함에 따라 정부와 법폐에 대한 공적 신뢰는 다같이 줄어들어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의 돈이 그래도 아직 갖고 있는 가치를 잃기 전에 무엇이 되었건 앞다투어 사재기에 나섰다. 이같은 통화의 급속한 회전은 통화팽창에 부채질을 하였으며 물가는 정부의 법폐발행 속도보다 더 빨리 치솟았다." "5월 말에서 8월 중순의 단 두 달 반 동안에 상해의 물가는 약 10배가 뛰었다."(202)


"통화개혁을 실시함에 있어 장개석의 계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 작용하였을 것이다─8월의 물가상승은 완전히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경제가 전부 붕괴해 가고 있었다. 만약 경제가 붕괴되면 정치적, 군사적인 붕괴가 곧 그 뒤를 따르게 된다. 통화개혁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절망적인 상황에 최소한 어렴풋이기는 하나 희망을 주었다. 폭발적인 물가상승은 법폐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 때문이라는 통화개혁 옹호론자들의 말은 상당한 정도로 맞는 말이다─그 증거로는 새 돈을 찍어내는 것보다 더 빨리 물가는 올랐던 것이다. 장개석, 옹문호, 왕운호는 이제 새 돈이 적어도 잠정적으로나마─겨우 6개월 정도만이라도─사람들의 신임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단기간 동안이나마 경제적 붕괴를 피할 수 있다면 정부는 그 사이에 통화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보다 항구적인 방안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긴급처분은 인플레를 겨우 5주 동안만 늦추었을 뿐이다."(207-8)


"그렇다면 왜 통화개혁은 실패했는가? 가장 주된 원인은 금원권을 너무 많이 발행함으로써 인플레의 재생을 자극한 것이다. 여기서 두드러진 사실은 9월 30일 현재로 발행된 새 금원권의 23퍼센트만이 정부의 비용과 군사작전을 위해 지출되고, 적어도 63퍼센트는 중앙은행에 신고 제출된 금, 은, 그리고 외환의 대금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금, 은 그리고 외환의 가치는 여태까지는 원형 그대로 소장되어 인플레의 촉진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실로, 1946년과 1947년에 정부는 지폐유통을 줄이고 인플레를 둔화시키기 위해 다량의 금을 의도적으로 「매각」한 바 있다. 8월 19일 이후에는 반대의 정책을 썼다. 이제 정부는 귀금속을 사들여서 고액의 지폐를 유통하게 한 것이다. 이는 정부의 본 뜻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아직까지 시장으로 나오지 않았던 미화 1억 9천만달러 상당의 금, 은, 외환이 갑작스럽게 화폐로 바뀌어 인플레요소로 활발하게 작용하게 된 것이다."(226-7)


"긴급경제조치 실패의 두번째 이유는 국민정부의 행정력이 약하였고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만약 물가통제가 상해에서 그러하였던 것처럼 전국적으로 강력하게 시행됐었다면 인플레는 적어도 6개월 동안은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소망을 달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상해의 경제독도서 관할 권한이 10월 1일에 확대되어 장경국이 상해에서 성취한 바를 강소성, 절강성, 안휘성에서도 성취할 수 있는 권한이 이론적으로는 주어진 뒤에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끝으로, 그래도 얼마간 남아 있었을 지폐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깨버린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그 첫째는 만주와 북부중국에서의 군사적인 상황의 악화였다." "둘째 요인은 10월 2일의 증세(增稅)였으니, 이는 통화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들 새 세금에 담겨져 있는 의의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엄청난 것이어서 금원권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었다."(228-9)


9장 누가 중국中國을 상실하였는가? ─蔣介石의 증언


"1949년 1월 21일에─경제는 전면적으로 파멸되어가고, 사람들은 남경정부에 환멸을 느끼거나 또는 멸시까지 하게 되는데─장개석은 총통의 자리를 물러났다." "이 시기는 장개석에게는─그의 행동을 기록한 조성분의 말을 빌리면─ 『그의 생애 중 가장 걱정스럽고 격한 자기성찰의 시기』였다. 그가 20년 넘게 이끌어 온 운동은 수라장 속에 있었다. 그는 굴욕을 느꼈다. 패배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를 그는 생각하였다." "조성분에 따르면, 3개월 뒤에 장개석이 얻은 회답은 『군과 행정부가 다같이 지난날의 패배에 책임을 저야 한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주된 이유는 당의 마비상태에서 찾아야 한다. 당원자격, 조직상의 구조 그리고 지도의 방법이 모두 문제거리였다. 그리하여 당은 생명 없는 껍데기가 되었고 행정부와 군도 또한 얼이 빠져버렸다. 그 결과 군대는 붕괴되고 사회는 분해되었다』는 것이었다. 1949년 여름 동안 장개석은 다시 중국정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어갔다."(238)


"마침내 공산군이 대륙에서의 지배를 확고히 하자 총통대행 이종인은 1949년 12월에 미국으로 갔고 대만으로 피난간 장개석은 1950년 3월에 국민정부의 총통자리로 되돌아갔다. 장개석은 그의 짧은 은퇴생활에서 얻은 결론 즉, 국민당의 「마비」가 국민당권력 패망의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생각에 따라 행동을 개시하였다. 7월에 광주에서 열린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그는 당개혁안을 제출하였다. 대륙에서의 군사적 파멸이 불러일으킨 수많은 사건들 때문에 1년 뒤에 가서야 이 제안에 따른 행동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대만에서 진성(陳誠)을 위원장으로 하는 고위급 중앙개혁위원회를 당의 총재로서 발족시켰다. 이는 공산당과 타협한 당원 또는 안전을 위해 해외로 도망간 당원의 추방을 포함한 근본적인 당의 정비를 계획하고 관장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불운한 그의 잔여군대에 집중적인 군사훈련과 정치교육을 통해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였다."(238-9)


"1956년에 발행된 자신의 저서 《중국 안의 소련》에서 장개석은 경제적 요인과 공산주의자들의 표리부동에 대해 더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조차 그의 결론은 그가 그 이전에 내린 평가와 일치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우리들의 패배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대륙에 있을 때의 우리의 반공투쟁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은 행정적인 결함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치명적인 타격은 조직, 방법, 정치와 전략에서의 중대한 착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민족적 의지력이 가장 강화되어야 했던 때에 약화된 데에 연유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니 장개석은 그의 정권의 패배원인을 미국정부의 배반, 탄약의 부족, 심지어는 공산군의 힘에서도 구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는 패배의 원인은 국민당정권 그 자체 안에 있었던 것이니, 내전기간 동안의 국민당정권은 단지 부패하고 비능률적이었을 뿐 아니라 사실상 죽어가고 있었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242)


"장개석이 그의 정권의 결점들을 바로잡지 못한 주된 이유는 그가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이 점은 아마도 국가적 지도자로서 주된, 어쩌면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정치적인 문제나 행동상의 문제, 심지어는 경제상의 문제까지도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것으로 본 장개석은 정치제도라는 것이 창조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또한 그가 채택한 정책들은 그의 정권의 약점들의 진정한 원천이었다. 그의 관료들이 그가 만든 정치제도하에서 부패해지고 비능률적이었던 것은 대부분이 외부의 비판과 압력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장개석은 알지 못하였다. 또한 병사가 싸우지 않고 농민들이 자제들을 군대로 보내거나 조세를 내는 데 협력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싸우고 협력할 수 있는 얼마간의 유인동기를 줄 수 있는 정책을 그가 내놓지 못하였기 때문임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1956년까지도 그는 패배의 원인을 여전히 주로 도덕적, 심리적인 용어로 설명하고 있었다."(244-5)


결론 : 폭풍과 혁명들


"손문이 생존하고 있는 동안 군인들은 국민당정권 안에서 비교적 경시된 존재였다. 그러나 장개석 통치하에서는 손문의 상대적 서열─당이 첫째요, 다음이 정부이고, 마지막이 군임─은 거꾸로 뒤집어졌다. 남경에 수도를 정한 뒤로 장개석이 영도하는 군은 국민혁명운동의 가장 지배적인 부분이 되었고 장개석 자신은 정권 내에서 가장 우월한 존재가 되었다." "정치과정에 대한 그의 견해를 보면 그는 매우 전통적이었다. 청(淸)대의 황제처럼 그에게 있어 정치는 우세(엘리트) 분자들끼리의 경쟁이었다. 그러므로 자기의 힘을 근대화하기 위해 그는 한 우세분자집단의 지지를 다른 경쟁적인 우세분자집단의 그것과 경쟁시켜 조종하거나 결합하거나 하였다. 당시의 강대국은 전국민의 중요한 부분을 성공적으로 동원하였지 우세집단만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한 듯싶다. 우세집단 이외에서 지지를 얻어냄으로써 새로운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모택동이 그러한 것처럼─을 이해하지를 못하였다."(248-9)


"물론, 장개석도 민주주의에 대해 자주 말하였고 대중적 지지를 얻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대중적 지지에 대한 그의 개념은, 대중은 병사가 장교의 명령에 복종하듯이 무조건 지도자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개념은 그가 대중정치의 심리적 구조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 개념 때문에 그의 정권에 확고한 사회적 기반을 제공할 수도 있었을 정치적 참여와 경제방안 같은 것을 개발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우세분자들을 주로 한 정치를 떠날 수가 없었고 약한 자들끼리의 균형을 통해 지배한다는 방식에 함몰되어버리고 말았다." "1928~29년의 정권투쟁을 통해 분명해진 것은 장개석은 자립적인 대중조직, 토지개혁, 당내의 민주적 절차, 당에 의한 정부와 군의 지배 등에 대한 (좌파들의) 주장을 침묵시킴으로써 대중적 지지가 있고 유능한 정부가 되기 위한 건전한 기반을 만들 수도 있었을 방안을 배척해버렸다는 것이다."(249)


"공산당은 원시적이고 가난한 오지에서 유력한 정치적, 군사적 운동을 확실히 지탱해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의 근거지에서 보여주었다. 유격전과 대중동원을 발전시켜 나가고 소규모의 공업생산을 발전시켜 나가는 방책을 사용함으로써 공산당은 전쟁이 진행될수록 강화되어갔다." "전쟁이 공산군을 성장하게 하고 강하게 만들었으므로 이 점에서도 국민당에 타격을 주었다. 항일전의 10년 동안 국부군은 공산군을 몰아세워 상당한 손실을 가함으로써 규모가 큰 안정된 작전근거지 획득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1937년 이후부터 국부군의 압력은 줄어들었으며, 공산군은 형식상으로만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서의 유격활동을 통해 전전(戰前)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혁명 조직망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전쟁 동안에 공산당은 조직기술을 발전시켰으며 그 다음의 내전기간 동에 그들에게 도움이 된 군사경험을 획득하였다. 이렇듯 항일전은 국민당정권에 타격을 가하였다."(252-3)


"만약 항일전쟁 후 소련의 만주진공(進攻)이 없었다면 국민정부는 실제보다는 더 오래 지탱했을 것이다." "일단 그 지역을 장악하고 나서 소련은 중국 공산군이 동북(만주)의 여러 성에 침투하는 것을 도와주었고 항복한 일본군이 남긴 대량의 군수물자를 넘겨주었다. 소련은 또한 국민정부가 그곳에서 군사적, 행정적인 힘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지연시켰고 많은 만주의 공업시설을 떼어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소련의 만주점령은 잘해야 국민정부 붕괴의 직접적 원인의 하나일 뿐이다. 기본적인 원인은 보다 깊은 데 있었으니, 그것은 사회적 기반을 상실한 군사독재적 지향이라는 구조적 취약성과 일본과의 전쟁이 가져온 약화요인에 있었다. 이 두 가지 요인 때문에 국민정부는 1945년 당시에 엄청나게 약화되어 있었고, 그 약체성은 국민정부의 정치적 지배권이 제한적으로밖에 행사될 수 없었던 점, 행정의 부패와 무능, 몇 개 파벌끼리의 파멸적인 다툼, 군대에 널리 퍼진 무능과 사기저하 등에 잘 나타나 있었다."(25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 군벌 전쟁 - 현대 중국을 연 군웅의 천하 쟁탈전 1895~1930
권성욱 지음 / 미지북스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들어가며


"나라가 아무리 약해도 주권이 있는 것과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것은 차이가 있는 법이다. 더구나 군벌들이 폭정을 일삼았으리라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북왕 장쭤린張作霖이다. 그는 제 이름 석 자도 쓰지 못하는 토비 출신이었지만 중국을 병들게 한 아편 밀매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교육의 보급과 인재 양성, 근대산업 육성에 힘써 동북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다. 광둥 군벌 천중밍은 민중 계몽가였다. 옌시산閻錫山은 낙후한 산시성을 발전시켜 전국에서 손꼽히는 '모범 성'으로 만들었다. 윈난 군벌 룽윈龍雲은 민주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우페이푸는 대표적인 반일 민족주의자였다. 많은 군벌 지도자들이 젊은 시절 쑨원의 동맹회에 가입했으며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의 선봉장이 되었다. 이들은 도덕군자도 아니었지만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정치 모리배였던 것도 아니었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로 얘기할 수 없는 다양한 얼굴을 가진 현실 정치인들이었다."(20-1)


"군벌 내전이 그다지 파괴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첫째로 이념이나 민족 갈등 같은 증오심에서 비롯된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를 완전히 말살할 요량으로 죽기 살기로 싸울 이유가 없었다. 또한 열강은 1차대전이 끝난 뒤 중국에 무기를 팔아먹는 대신 군축 분위기와 세력균형을 위해 무기 금수 조치를 내렸다. 유럽 전선에서 악명을 떨친 독가스와 잠수함, 대구경 중포, 전차 같은 최신 무기는 중국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또 다른 이유는 중국이 전통적으로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이면서 지방 권력 또한 강력했기 때문이다. 〈산은 높고 황제는 멀다山高黃帝遠〉는 오랜 격언은 중국의 광대한 영토와 막강한 지방 권력을 상징한다. 향촌 정부들은 명목상 중앙에서 파견되는 수령이 절대 권력자이지만 실권은 지역의 존경받는 엘리트들이 쥐고 있었다. 중앙 정권의 교체는 단지 지배자가 A에서 B로 바뀌는 것에 불과했다. 국가는 일반 민중의 생활 방식에 쓸데없이 관여하거나 자유를 제약하는 일이 없었다."(22)


1부 자금성의 황혼


"20세기 중국사에서 위안스카이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신해혁명 이후 장제스가 통일할 때까지 치열하게 벌어진 군벌 내전은 위안스카이가 남겨놓은 유산이었기 때문이다." "위안스카이가 출세의 기회를 잡은 것은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 덕분이었다. 임오군란은 엄연히 조선 내부의 문제였다. 그런데 양무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종주국이라는 자신감을 어느 정도 회복한 청조는 오랫동안 번국으로 취급했던 조선에서 병란이 일어나자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 땅에 떨어진 위신을 되찾을 기회로 여겼다." "위안스카이는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군인으로서의 역량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총명한 두뇌와 사교적인 성격,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재빨리 진압하고 조선을 청나라에 종속시킨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이었다. 고종과 조선의 대신들은 기민하고 능수능란한 위안스카이 앞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73-4)


"1895년 12월 16일 청나라 최초의 신식 군대인 '신건육군新建陸軍'이 창설되었다. 신건육군 창설에는 위안스카이 말고도 회군 출신 간부들과 1885년 북양대신 리홍장이 설립한 중국 최초의 서구식 군사학교인 톈진의 북양무비학당 교관과 생도들이 대거 참여했기에 '북양신군北洋新軍'이라고도 일컬었다." "신해혁명으로 청이 무너진 뒤 중국의 권력은 이들에게 넘어갔다. 위안스카이를 정점으로 하는 거대한 군벌 집단을 '북양군벌'이라고 한다. 이들은 베이징 정부와 각 성의 독군督軍(군사장관)이 되어 군 통수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위안스카이의 참모장이던 쉬스창과 차오쿤은 각각 2대 대총통과 3대 대총통을 지냈으며, 돤치루이는 국무총리를 네 번, 임시 집정(대총통)을 한 번 역임했다. 1915년 당시 군권을 쥔 22명의 독군 중에서 12명이 위안스카이가 직접 키워낸 북양군벌 출신이었다. 나머지 7명 역시 위안스키아의 옛 부하이거나 그의 추천으로 출세했다. 위안스카이와 상관없는 사람은 겨우 3명에 불과했다."(81-3)


"신해혁명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쪽은 쑨원의 혁명파가 아니라 량치차오의 입헌파였다. 혁명파 세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고, 그나마 대부분은 봉기가 일어나기도 전에 죽거나 도망쳐버렸기 때문이다. 우창봉기에서 우두머리가 없는 혁명군 병사들을 수습하고 리위안훙을 설득하여 혁명군의 수장으로 추대한 것도 입헌파인 탕화룽이었다. 만약 입헌파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다면 우창봉기는 한낱 병변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입헌파도 혁명파가 앞장서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이 먼저 조정을 향해 총을 겨누지는 못했을 것이다. 혁명파와 입헌파 어느 한쪽의 역량만으로 청조를 무너뜨리기는 불가능했다. 쑨원과 량치차오 두 지도자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버리지 못한 채 손잡기를 거부했지만, 청조를 무너뜨리고 공화제를 실현한 것은 혁명파와 입헌파의 연합이었다." "그러나 혁명에 아무런 이해도 없었던 위안스카이가 신해혁명을 기회 삼아 권력을 찬탈했다. 그의 정권은 청조의 연장선에 불과했다."(180-1)


"어째서 쑨원은 (충분한 준비도 없이) 그토록 혁명에 매달렸는가. 임시 대총통 자리를 순순히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했다는 점에서 '제2의 홍슈취안'이 되겠다는 야심이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만약 장제스나 마오쩌둥이라면 남에게 내주느니 마지막까지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이려 했을 것이다. 쑨원은 훨씬 담백했다. 문제는 권력을 향한 욕심이 아니라 만주족을 향한 증오심이었다. 야만스러운 오랑캐의 지배를 받는 한족 백성을 자신이 해방하겠다는 영웅 심리에 가까웠다. 그가 말하는 공화제란 청조를 타도하기 위한 명분이지 목적은 아니었다. 공화제를 제대로 이해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도 없었다. '반만흥한'을 외치던 쑨원은 신해혁명 뒤에는 '오족공화'로 말을 바꾸었다. 그 속내는 청제국 시절의 판도를 유지하고 만주족을 포함한 소수민족들의 분리 독립을 억압하기 위함이었다. 소수민족들의 자결권이나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182)


2부 짧았던 공화정의 꿈


"1912년 12월부터 1913년 2월까지 제헌국회의 수립을 위해 전국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선거이자 의회민주주의의 시작이었다. 쑹자오런은 선거를 앞두고 중국동맹회와 여러 정치 단체를 규합해 국민당을 창설했다. 국민당 외에 리위안훙을 수장으로 하는 공화당, 량치차오를 비롯한 입헌파가 중심이 된 민주당 등 여러 정당이 경쟁을 벌였다. 결과는 국민당의 압승이었다. 중의원 596석 중 269석을, 참의원 274석 중 132석을 국민당이 차지하면서 제1당의 자리에 올랐다." "전국 각지를 돌면서 위안스카이 정권의 독선적인 태도를 비판하던 쑹자오런은 3월 20일 밤 베이징행 열차를 타기 위해 상하이역 플랫폼에서 기다리다가 저격을 받아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을 조사한 장쑤성 정부는 암살의 배후에 위안스카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철도 건설을 위한 차관을 얻으려고 일본을 방문 중이던 쑨원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제야 자신이 위안스카이에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25-7)


# 쑹자오런의 국민당은 위안스카이에게 해산당하고 몇 년 뒤 쑨원이 국민당을 새로 창설했기 때문에, 이름만 같을 뿐 같은 정당은 아니다.


# 쑹자오런의 암살 배후에 위안스카이가 있다는 정황 증거만 있을 뿐, 분명한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쑹자오런 암살로 촉발된) 2차 혁명은 고작 한 달 보름여 만에 참담하게 끝났다. 군사력에서도 열세했지만 신해혁명을 이끌었던 향신 계층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향신 계층은 2차 혁명을 이데올로기나 공화정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권력 다툼으로 여겼다." "신해혁명이 쑨원과 위안스카이가 손잡고 청조를 몰락시킨 사건이라면, 2차 혁명은 두 사람이 신해혁명의 연장선에서 '천하'라는 전리품을 놓고 벌인 투쟁이었다." "일본으로 망명한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혁명의 배신자로 규정하고 흩어진 동지들을 모아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참담한 실패를 경험한 쑨원은 스스로를 반성하고 와신상담하는 대신 한층 독선적으로 변했다. 그는 2차 혁명의 실패가 황싱의 우유부단함과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동지들 탓이라며 책임을 떠넘겼다. 쑨원의 이런 태도는 사람들을 더욱 실망시켰을 뿐 아니라, 오랜 맹우였던 황싱마저 곁을 떠나게 했다."(242-7)


"위안스카이는 대총통이 되자 본색을 드러냈다. 1914년 1월 10일에는 참의원과 중의원을 해산하고, 2월 28일에는 지방의 성 의회마저 해산했다." "5월 1일, 중화민국 신약법新約法이 공포되었다. 절차대로라면 국회에서 쑹자오런이 기초했던 약법을 대신하여 정식으로 헌법을 제정해야 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국회를 해산한 다음 어용 세력을 끌어모아서 약법의 내용을 일부 수정한 뒤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 신약법은 의원내각제를 실시하고 대총통의 권한을 제한했던 구약법과 달리 위안스카이에게 선전포고와 강화조약 체결 등 외교대권과 입법권, 모든 문무 관료와 외교관 임명권, 긴급명령권 등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위안스카이는 중국의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위는 취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방의 군사령관들은 중앙의 혼란을 이용해 명목으로만 중앙에 복종할 뿐이었다. 이들은 자체적인 무력을 배경으로 현지 향신과 상인·지주 계층과 결탁하여 독자 세력을 구축했다."(250-1)


"1913년 9월 27일, 쑨원은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조직했다. 중국동맹회의 뒤를 잇는 새로운 혁명 정당이었다." "그러나 중화혁명당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혁명을 향한 의지가 분명하면서 자기 목숨을 걸 만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대부분은 쑨원 옆에 붙어 있으면 운 좋게 출세 기회를 잡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건달들이었다. 무위도식하고 끼리끼리 모여 온종일 잡담이나 하는 일이 전부였다. 또한 파벌을 만들어 중상모략을 일삼았고, 심지어 쑨원이 무능하다면서 비난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런 한심스러운 행태는 쑨원이 자초한 결과였다. 역량이나 자질, 혁명 의식은 따지지 않은 채 맹목적인 충성심만 요구했기 때문이다. 또한 신해혁명 이전부터 참여한 자와 신해혁명 이후에 참여한 자를 구분하고 신분을 나누듯 차별 대우하여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샀다. 이런 모습은 중화혁명당이 국민당으로 바뀐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으며,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뒤에야 어느 정도 체계를 잡게 된다."(280-6)


"그 위세가 황제와 다르지 않았던 위안스카이가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적인 원인은 황제가 되어 옥좌에 앉으려 했기 때문이다. 차이어가 윈난성에서 거병했을 때 명분은 '호국護國'이었다. '호국'이란 국체, 즉 공화제를 지키겠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의 반란이 중국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자 위안스카이는 민심의 이반을 깨닫고 백기를 들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군주제냐 때문이 아니라 위안스카이 정권이 청조만큼이나 무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재정 위기가 있었다. 위안스카이가 물려받은 중국은 파산 직전의 나라였다." "위안스카이는 피를 흘리지 않고 권력을 넘겨받았지만, 그 대가로 9억 냥이나 되는 청조의 채무까지 고스란히 넘겨받았다." "텅 빈 국고를 물려받은 그는 맨 먼저 재정 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지방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면서 실패로 끝났다. 위안스카이의 힘으로도 태평천국의 난 이래 몇십 년 동안 고착화한 지방의 독립성을 누르기는 어려웠다."(336-7)


"위안스카이는 부도 직전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외국에서 더 많은 차관을 빌리고 국채를 남발했다. 그러나 대부분 청조가 남긴 외채를 상환하는 데 쓰였고, 재정의 건실화나 근대화에 쓸 수 있는 돈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위안스카이는 최선을 다했지만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치부해야 할까. 어떤 이유로건 그는 청조의 행태를 답습하여 자신의 무능함을 증명한 꼴이었다. 청조가 파멸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으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셈이다. 위기를 자력으로 극복할 능력이 없는 그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대신 보수 반동화의 길을 걸었다. 민중의 지지를 얻기보다 권모술수로 쑹자오런을 비롯한 반대파를 암살하거나 탄압했다. 군주제의 부활은 추락하는 자신의 권위를 만회하기 위한 마지막 발버둥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이권을 일본에 넘기고 국고를 흥청망청 낭비한 모습은 정치적 자살행위였다. 위안스카이가 보여주는 말기적인 행텡 민심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338-9)


"위안스카이의 죽음으로 중국에는 잠시나마 평화가 왔다. 윈난성을 비롯해 독립을 선언했던 여러 성이 독립을 취소하고 내전 중지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호국군 또한 군비 부족과 병참난으로 더는 싸울 여력이 없었다. 남북 합의가 성사되면서 부총통 리위안훙이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어 새로운 대총통이 되었다." "('북양 3걸'이라 일컬어지던) 펑궈장은 부총통에, 돤치루이는 국무총리에 올랐다. 왕스전은 육군총장 겸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북양군의 총수가 됐지만 정치적인 야욕이 없기에 권력의 중심과는 멀었다. 이들이 사리사욕을 버리고 리위안훙을 보필하는 데 힘을 모았다면 중국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리라. 그러나 펑궈장과 돤치루이는 운 좋게 벼락출세한 리위안훙을 대총통감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야말로 그 자리에 어울리는 그릇이라고 생각했다. 돤치루이와 펑궈장은 서로 견제하면서 기회를 보아 상대를 제거하고 자신이 대총통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342-7)


3부 군웅, 사슴을 좇다


"자금성 하늘에서 비행기가 푸이의 코앞에 폭탄을 떨어뜨린 다음 날인 1917년 7월 6일, 무력으로 북양군벌을 정벌하기로 결심한 쑨원은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에서 1,900킬로미터나 떨어진 중국 최남단의 광저우로 향했다. 광저우는 쑨원이 태어난 고향이자 혁명의 오랜 근거지이기도 했다." "7월 17일 광저우에 도착한 쑨원 일행은 비상 국회를 소집했다. 100여 명의 국회의원들이 참석했다. 그는 국회를 해산한 베이징 정부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이야말로 중화민국의 정통이라고 선언했다. 9월 10일, 중화민국 호법 정부가 수립되고 쑨원을 대원수로 추대했다." "쑨원의 호소에 남방 5성의 비非북양계 군벌들이 일제히 호응했다. 중국 역사에서는 '호법전쟁護法戰爭' 또는 '호법운동護法運動'이라고 한다. 쑨원에게는 앞으로 10년에 걸쳐 이어질 첫 번째 북벌전쟁이기도 했다." "베이징의 북양군벌과 광저우의 서남군벌이 맞서는 남북 대치가 다시 시작되었다."(372-3)


"전세는 갈수록 북벌군에게 불리해졌다. 게다가 루룽팅의 배신으로 쑨원은 궁지에 몰렸다. 탕지야오도 북벌 중지와 쑨원 하야를 요구하고 나섰다. 몇 달 전만 해도 쑨원을 대원수로 추대했던 이들이 이제는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진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면서 끌어내리려 했다." "루룽팅과 탕지야오는 일부 국회의원들을 매수해 광저우 군정부를 개조하라고 지시했다. 1918년 5월 20일, 비상 국회는 호법전쟁 취소를 결정했다. 충격을 받은 쑨원은 실망감을 드러내면서 대원수 자리를 내던졌다." "쑨원이 쫓겨나자 돤치루이도 남벌을 중지하고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국회를 다시 소집하고 대총통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돤치루이는 펑궈장을 쫓아내고 쉬스창을 그 자리에 앉힐 생각이었다. 두 번째는 1차대전 참전이었다. 유럽 전쟁은 이미 막바지였다. 그러나 돤치루이는 참전을 빌미로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 다른 군벌들을 제압할 생각이었다."(385-9)


"호법 전쟁이 끝나고 남북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우페이푸를 비롯해 후난성으로 출동한 북양군은 계속 현지에 남아 있었다. 돤치루이는 즈리파를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으로 보내 세력을 약화할 속셈이었다. 즈리파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그중에서도 우페이푸는 결단력과 정치적 감각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다른 즈리파 독군들을 규합하여 펑궈장이 죽은 뒤 자신의 상관인 차오쿤을 새로운 우두머리로 추대했다. 우페이푸의 공작은 장쭤린에게도 향했다. 장쭤린은 돤치루이가 자신의 영토인 동북에까지 손을 뻗치자 우페이푸의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1920년 4월 9일, 즈리파와 펑톈파가 비밀리에 손잡고 거대한 반反돤치루이 동맹을 맺었다. 즈리성, 장쑤성, 후베이성, 장시성, 허난성, 펑톈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 이른바 '8성 동맹'이었다. 5월 25일, 우페이푸는 드디어 칼을 뽑아들었다. 그는 불복종을 선언하고 군대를 되돌려 북상에 나섰다. 돤치루이와의 일전을 각오한 것이다."(411-3)


"7월 18일, 대총통 쉬스창에게 정전을 요청한 돤치루이는 다음날 국무총리를 사직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우페이푸는 이번 기회에 안후이파를 철저하게 몰락시킬 생각이었지만 뜻밖에도 장쭤린의 반대에 부딪혔다. 장쭤린은 돤치루이를 끌어내리기 위해 즈리파와 손을 잡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즈리파 편은 아니었다. 즈리파를 견제하려면 안후이파를 살려둘 필요가 있었다." "안즈전쟁은 북양군이 둘로 나뉜 채 10만 명 이상이 투입된 전례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전투는 7월 14일부터 18일까지 나흘 만에 싱겁게 끝났다. 전장은 베이징 주변으로 국한되었다." "10만명 가운데 실제로 전장에 투입된 병력은 일부였고 대부분 대치만 하다가 승패가 결정 나자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충성심이 없는 병사들은 죽기로 싸우는 대신 조금만 불리해도 흩어지거나 투항하기 일쑤였다." "이때만 해도 중국군은 여전히 서툴고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안즈전쟁은 앞으로 시작될 진짜 싸움의 서곡일 뿐이었다."(430-1)


"안후이 정권이 무너지고 즈리와 펑톈의 연합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돤치루이를 타도하기 위한 잠깐의 합종연횡일 뿐, 목적을 달성한 이상 오래갈 리 없었다. 중국의 판도가 바뀌면서 요직을 놓고 두 세력은 서로 자파 사람을 심으려고 으르렁거렸다." "장쭤린은 즈리파 와해를 위한 포석을 하나씩 마련해나갔다. 첫 번째는 안후이파와의 동맹이었다. 장쭤린은 돤치루이에게 은밀히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했다. 돤치루이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반反즈리 비밀 동맹을 맺었다." "두 번째 포석은 광저우 군정부의 대원수 쑨원과의 동맹이었다." "북양군벌이 공화정을 파괴했다 하여 광정우에서 혁명정부를 세우고 호법전쟁을 일으켰던 쑨원이 이제 와서 북양군벌과 손을 잡는 것은 엄연한 모순이었다. 그러나 삼각동맹은 완성되었다." "수없이 실패를 반복하고도 새로운 방법을 찾는 대신 구태의연하게 군벌들과의 야합에 매달리는 것이 쑨원의 한계였다."(435-40)


"안즈전쟁이 끝난 지 2년 만에 즈리파와 펑톈파의 연합은 끝장났다. 병력과 무기에서는 일본의 후원을 받는 펑톈군이 훨씬 우세했다. 그러나 제27사단을 비롯해 대부분 마적을 개편한 부대였다. 규율이 형편없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다. 장쭤샹, 장징후이 등 주요 지휘관들도 하나같이 장쭤린이 마적 시절부터 호형호제하던 자들로 매우 무능한 자들이었다." "즈리군은 수적으로 약간 열세하고 장비도 매우 열악했지만 규율과 실전 경험에서는 펑톈군을 압도했다. 안즈전쟁에서 안후이군을 격파하고 승리햇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우페이푸가 보기에 장징후이의 서로군이 펑톈군의 주력부대였다. 장징후이만 격파한다면 나머지 펑톈군은 스스로 무너질 것이었다." "5월 3일 벌어진 격전에서 서로군이 붕괴했다. 장쭤샹의 동로군도 즈리군의 총공격으로 무너졌다. 장쭤린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 4일, 그는 전군에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개전 9일 만이었다."(497-503)


"20세기 초반 제정러시아는 러일전쟁의 전비와 국내 근대화를 명목으로 해외에서 막대한 빚을 끌어다 썼다." "채무액은 1차대전을 거치면서 눈덩이처럼 불었다. 1914년부터 1917년까지 4년 동안의 채무는 33억 8,500만 파운드에 달하여 이자만도 연간 세입을 넘어설 정도였다. 천문학적인 빚이 결국 차르 정권을 붕괴시킨 셈이지만, 제정러시아를 무너뜨린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는 한 푼도 갚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제정러시아의 채무는 대부분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일본에서 빌렸다. 이들이 당장 간섭전쟁에 나선 것도 당연했다. 남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기 권리만 찾겠다는 것이 소련식 논리였다. 소련은 열강의 보복에 대항할 무력이 있지만 중국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련이 떠드는 '민족자결의 원칙'이란 볼셰비키 혁명을 다른 나라에 전파하여 전 세계를 공산화하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 또한 전형적인 제국주의 열강이었으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짓밟기 일쑤였다."(529)


"1920년 5월, 시베리아 구위원회 산하 코민테른 극동국 서기였던 보이틴스키 부부가 베이징으로 왔다. 그의 임무는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중국공산당을 창설하는 일이었다. 보이틴스키는 리다자오·천두슈와 만나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중국 최초의 공산당 소조직을 설립했다. 천두슈가 중국 최초의 공산당 서기가 되었다." "1년 뒤인 1921년 7월 23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망지로 106호에서 전국 6개 도시의 대표 12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참석한 사람들이 앞으로 중국공산당을 이끌고 나갈 지도자들이었다. 첫 모임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자신들의 앞날이 얼마나 파란만장할지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4명이 처형당했고, 7명이 국민당이나 친일 매국노로 전향했다. 바오후이썽까지 포함해 13명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훗날 개국공신이 되고 승리의 열매를 맛본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다. 한 사람이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을 지낸 둥비우, 또 한 사람은 마오쩌둥이었다."(530-1)


"1923년 1월 26일, 상하이에서 '쑨원-요페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소련 특사) 요페는 결단코 중국에서 공산주의혁명을 하지 않을 것이며 쑨원의 삼민주의에 복종하여 중국 혁명을 후원할 것을 약속했다. 소련은 순수하게 쑨원의 혁명전쟁을 도울 뿐, 어떤 내정간섭도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또한 제정러시아 시절 중국에서 강탈한 모든 이권의 포기를 약속했다. 요페가 요구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자 쑨원은 '연소용공聯蘇容共', 소련과 손잡고 중국공산당을 포용하여 중국 혁명을 완수한다는 데 합의했다." "스탈린은 대중 노선을 놓고 국공합작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 반면, 트로츠키는 국민당은 유산계급의 정당이므로 공산당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서 합작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코민테른이 손을 들어준 쪽은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중국의 적화를 자신의 정치적 업적으로 삼아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할 속셈으로 쑨원을 아낌없이 후원했다."(537-9)


"1924년 6월 16일, 국민당 육군군관학교(황푸군관학교)가 문을 열었다.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를 수립하면서 소련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받아들여 소련군의 제도와 교리를 그대로 수용했다. 최고 사령부와 각 군 사령부에는 국민당 대표를 임명하고 사단 단위로 정치부를 두었다. 또한 연대부터 대대에 이르기까지 정치공작지도원을 배치했다. 정치장교들은 지휘권을 견제하고 삼민주의 사상 교육을 맡았다. 원칙적으로 지휘관이 내리는 모든 명령은 정치장교의 서명이 없을 경우 효력이 없었다. 또한 많은 장교들이 국민당에 자발적으로 입당하고 충성과 복종을 맹세했다. 정치장교 제도는 국민당 정권이 군벌 연합군을 혁명군을 개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북벌군은 군벌 군대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며 혁명군이라는 이름은 허울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 점이 쑨원의 호법전쟁 때와 달리 장제스가 북양군벌들을 격파하고 북벌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552)


"제2차 펑즈전쟁(1924년 9월 15일~11월 8일)에서 즈리군과 펑톈군은 산하이관을 무대로 악전고투를 벌였으나, 사전에 모의한 펑위샹의 베이징정변이 성공하면서 승부의 추는 급속히 펑톈군 쪽으로 기울었다. 안즈전쟁 이후 4년 3개월 만에 장쭤린의 대군은 베이징을 향해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우페이푸의 몰락은 위안스키이가 남겨놓은 북양군벌이 시대가 종지부를 찍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장쭤린과 펑위샹은 명목상 북양파로 간주되었지만 엄밀히 말해서 위안스카이가 직접 키워낸 직계는 아니었다. 북양무비학당 출신도 아니었다. 이들은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자기 힘으로 일어선 자들이었다." "펑위샹의 다음 칼끝이 향한 곳은 자금성이었다. 자금성에는 청나라 12대 황제인 선통제 푸이와 만주족 귀족들이 살고 있었다." "펑위샹은 공화제를 실시한 지 10년도 더 지났는데 구시대의 유물인 푸이가 아직도 자금성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엄포를 놓았다." "푸이는 분개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614-6)


"1925년 11월 22일, 펑톈군 제일의 명장이자 최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즈리평원에 주둔한 궈쑹링이 장쭤린 타도의 기치를 올렸다. '반펑톈전쟁反奉戰爭'이었다. 11월 24일부터 12월 24일까지 한 달 동안 중국 대륙을 뒤흔든 궈쑹링의 '반펑전쟁'은 허무하게 끝났다. 비록 패배로 끝났지만 한때 장쭤린의 심장부인 펑톈을 눈앞에 두었을 만큼 궈쑹링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우페이푸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펑톈군은 연전연패하여 달아났으며, 펑톈 서쪽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장쭤린조차 당황하여 다롄으로 달아나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려 했을 정도였다. 관동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동북의 주인이 장쭤린에서 궈쑹린으로 바뀌고, 그 뒤의 중국 역사 또한 전혀 다른 모습으로 흘러갔을지 모른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뒤 중공 정권은 궈쑹링에게 민족주의 이미지를 덧씌워 〈장쭤린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패한 것〉이라면서 성대한 추모식을 치러주고 그의 묘를 펑톈 교외에 안장했다."(664-5)


"궈쑹링의 반란이 난세에 흔히 반복되던 하극상과 다르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이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첫째,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중국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그동안 일본은 21개조 조약이라든가 니시하라 차관, 산둥 출병 등 막후에서 조종했을 뿐 무력으로 개입한 적은 없었다. 열강의 간섭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펑전쟁에서 관동군의 개입은 나쁜 선례를 남겼다. 또한 그전까지 장쭤린 정권은 일본의 간섭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아도 일본과 비교적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발등의 불을 끄는 데 급급한 나머지 장쭤린은 일본의 강압적인 요구를 받아들였고, '일본-펑톈 밀약'을 맺으면서 예속적인 위치로 전락했다. 이런 배경은 그 뒤 황구툰사건과 만주사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장쭤린이 일본과 결탁했기 때문에 궈쑹링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의 반란이 장쭤린을 궁지로 내몰아 일본과의 밀착을 초래하여 결과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가속화한 셈이다."(666)


"둘째, 장제스의 북벌전쟁을 촉발한 계기가 되었다. 장쭤린과 궈쑹링 두 사람의 싸움은 펑위샹과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나중에 옌시산·우페이푸까지 개입하면서 북방 전체로 확산되었다. 장제스는 자신의 일기에 〈북방의 대소 군벌들이 스스로 무너지고 있다. 구시대 붕괴의 조짐이 점점 확실해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북방 군벌들의 분열상을 보면서 북벌 성공에 확신을 품었다. 또한 관동군의 개입은 중국 민중의 격렬한 반감을 샀고, 장쭤린을 '일본의 주구'로 여기게 했다. 이때부터 중국 내전은 더 이상 위안스카이의 유산인 북양군벌들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혁명'과 '반혁명'의 전쟁이 되었다." "중원에서 장제스와 다른 군벌들이 전쟁을 벌이자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아버지의 꿈을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산하이관을 넘었다. 한때 황허 이북의 광대한 지역을 차지했지만 곧 다른 군벌들의 반격을 받으면서 연전연패했다. 그 와중에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하루아침에 모든 기반을 잃고 몰락했다."(666-7)


4부 북벌전쟁


"한편 쑨원이 죽은 뒤 국민정부는 크게 세 개의 파벌, 즉 처음부터 국공합작을 반대한 후한민을 중심으로 하는 반공 우파, 국공합작에 찬성한 랴오중카이의 용공 좌파 그리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회색분자 왕징웨이파로 나뉘었다. 그러나 국공합작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각자의 복잡한 이해관계에 따라 첨예한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보로딘은 왕징웨이를 좌우하면서 눈에 거슬리는 우파 간부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이들의 빈자리는 공산당원들이 차지했다. 1923년 1월 23일, '쑨원-요페 선언'에 따라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뒤 겨우 1년 반, 쑨원이 죽은 지 7개월 만에 국민정부의 중추는 사실상 소련 손으로 넘어갔다. 국공합작은 양당이 대등한 지위에서 합당한 것이 아니라 국민당이 공산당을 하부 조직으로 포용한 것이었다. 따라서 공산당원들은 마땅히 국민당의 강령에 절대 복종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형국이 되면서 오히려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잡아먹힐 판이었다."(707-9)


"과연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인가. 열쇠를 쥔 사람은 장제스였다. 소련과 공산당은 마음만 먹으면 장제스를 끌어내릴 수 있었다. 과격한 혁명가 트로츠키는 장제스를 쫓아내거나 아예 국공합작을 끝장내고 공산당을 지원해 광저우를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반대했다. 국공합작의 총괄을 맡은 스탈린은 그동안 많은 자금과 물자를 쏟아부었는데 이렇다 할 성과 없이 합작이 깨진다면 자기 체면이 깎이는 것은 물론 실패의 책임을 추궁받을 수 있었다. 그는 반드시 국공합작을 유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다소 양보할 필요도 있다고 강조했다. 당내의 주도권은 이미 스탈린에게 넘어갔고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트로츠키는 권력투쟁에서 거의 밀려나 있었다. 지도부는 실세인 스탈린의 손을 들어주었다.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에게 국민당에 잔류하되 우파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일단 국민당 지도부에서 물러나 후일을 기약하라고 지시했다. 공산당은 내심 불만을 품었지만 거역할 수 없었다."(720)


"1926년 7월 9일,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추대받아 북벌군의 지휘봉을 들었다. 프랑스로 달아난 왕징웨이를 대신하여 여러 원로에 의한 집단지도체제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실세는 군권을 장악한 장제스였다. 장제스는 쑨원의 후계자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 공산당 세력은 크게 약해졌고 국민당에 절대 복종하기로 맹세했다. 벼랑 끝에 몰렸던 장제스에게는 실로 회심의 역전이었다." "장제스가 공산당과 정면 승부를 벌이지 않은 이유는 아직은 그만한 힘이 없는 데다, 그럴 경우 소련의 원조 또한 그날로 끝나기 때문이었다. 만약 천중밍처럼 광저우를 자기 지반으로 삼아서 당장의 호의호식을 누리는 데 만족하려 했다면 소련과 손을 끊는 데 아무런 미련이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북벌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중국을 통일해서 군벌 할거를 끝내고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 혁명을 완성하는 일은 쑨원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한 원대한 꿈이었다."(722)


"북방에서 3개월의 혈전 끝에 국민군을 격파한 우페이푸는 승리에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비로소 북벌군이 만만치 않으며,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페이푸는 주력부대를 이끌고 우한으로 향했다." "그러나 〈패배를 모른다〉던 상승장군 우페이푸의 명성도 북벌군의 기세 앞에서 무색해졌다. 10월 10일, 북벌군은 우한 3진의 점령과 함께 후베이성 서부 지역 공격에도 나서 샤시·이창·징저우 등을 점령했다. 우페이푸의 주력부대는 거의 소멸했다." "한편, 9월 17일 소련에서 돌아온 펑위샹은 국민혁명군의 가입과 혁명전쟁을 선언했다. 〈우리는 쑨원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국민혁명과 삼민주의를 실천한다.〉 〈간쑤성을 지키고 샨시성을 원조하며 허난성을 도모한다.〉 이것이 '우위안 선언'이다. 광저우와 함께 우위안에도 혁명의 상징인 청천백일의 깃발이 올랐다. 국민군은 '국민혁명군 연군(국민연군國民聯軍)'이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며, 펑위샹이 총사령관으로 취임했다."(746-56)


"북벌전쟁은 단순한 통일전쟁이 아니라 혁명전쟁이었다. 민중의 지지를 얻고 민중과 손잡는 일은 북벌전쟁에 이데올로기적인 정당성을 부여했다." "농민운동은 국공합작의 최대 성과였다. 공산당이 농민들을 조직하고 이들의 협조를 끌어내지 못했다면 북벌군은 소련이 제공하는 약간의 원조에만 의존하여 10만 명이 채 안되는 병력으로 훨씬 어려운 싸움을 벌여야 했을 것이다. 쑨원을 비롯하여 봉건적인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있던 국민당의 엘리트 간부들은 여전히 민중의 역량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공산당 지도부 중에서도 농민의 잠재성에 주목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그중 한 사람이 마오쩌둥이었다. 국공합작이 깨진 뒤 지하로 숨어든 다른 간부들은 예전에 혁명파가 그러했던 것처럼 무장 반란과 비밀 활동에 하릴없이 매달려 큰 희생만 치렀다. 반면 마오쩌둥은 농촌을 근거지로 농민혁명에 본격적으로 나섰으며, 토벌군을 몇 번이나 격파함으로써 그의 신화를 시작했다."(804-8)


"그러나 중국의 지주계층은 유럽의 귀족 같은 특권계층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국 농촌의 진짜 문제는 토지 집중이 아니라 인구는 넘쳐나는 데 비해 잉여 토지가 거의 없고 생산성이 너무 낮다는 데 있었다. 경작지 대비 인구 밀집도는 유럽의 3~4배나 되었다. 얼마 안되는 대지주한테서 땅을 빼앗아 많은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준다 한들 고양이 이마만 한 땅이 조금 더 늘어나는 정도였다. 게다가 중국에는 땅이 전혀 없는 농민과 실업자, 다른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유랑민들이 넘쳐났다. 토지를 재분배한다면 이들에게도 똑같이 토지를 나눠주어야 하는가. 그럴 경우 농촌 개혁은커녕 전통적인 농촌공동체를 무너뜨릴 뿐 아니라, 전체 농민들의 삶이 하향 평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 간부들은 농촌의 현실을 정확하게 알고 다양한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자신들의 편향된 선입관과 의욕만 앞세워 〈계급투쟁으로 농촌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달려들었다. 그 방법은 설득과 타협이 아닌 강압과 폭력이었다."(810-3)


"프랑스군의 대게릴라전 전문가이자 1차 인도차이나전쟁과 알제리전쟁에 참전했던 다비드 갈륄라 중령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주민들의 지지를 얻을 때는 조용하고 수동적인 다수의 어정쩡한 지지보다 오히려 수는 적어도 가장 적극적이면서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소수의 강력한 지지가 낫다〉고 주장했다. 그것을 실제로 증명해 보인 사람이 마오쩌둥이었다. 공산당은 농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소 지주와 자영농이 아니라 전체의 10퍼센트에 불과한 고농(당시 약 3,000만 명)을 지지 세력으로 삼았다. 내전에 승리한 뒤 이들을 무장 전위대로 앞세워 중국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토지개혁을 강행했다. 그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처형당했다. 현장 간부들은 자신의 실적을 높이는 데 급급하여 경쟁적으로 토지몰수에 나섰다. 중농과 빈농까지 지주라고 몰아붙여서 재산을 함부로 빼앗는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토지개혁은 중국 전체를 전례 없는 대혼란과 보복의 소용돌이에 빠뜨렸다."(817-8)


# 고농雇農 : 자기 땅이 전혀 없어서 지주나 부농에게 고용살이하는 농민


"북벌군이 예상 밖의 선전을 펼치면서 상하이와 난징으로 육박하자 공산당 지도자 천두슈는 급히 상하이봉기를 지시했다. 상하이가 장제스의 수중에 넘어간다면 가뜩이나 국민정부가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의) 우한과 (장제스의) 난창으로 양분된 상황에서 그의 위세가 한층 높아지고 우한 측이 불리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3월 21일 새벽, 드디어 행동에 나섰다. 자베이와 훙커우, 푸둥 등 상하이 주요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일제히 봉기했다. 봉기에 참여한 노동자 수는 30만 명에 달했다. 노동자들은 시가지의 주요 거점을 신속히 장악했다. 다음날 상하이 소비에트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난징에서도 북벌군이 세 방향으로 포위해오자, 이제는 잔여 병력을 최대한 창장 이북으로 철수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창장을 천연의 방어선으로 삼아 북벌군의 북상을 저지할 생각이었다. 언젠가 난징을 되찾을 기회가 오리라. 쑨촨팡은 후일을 기약하며 난징을 떠났다. 3월 23일, 난징은 함락되었다."(840-1)


"북벌군이 난징과 상하이로 육박하고 있던 3월 10일부터 17일까지 우한에서 국민당 제2차 3중 전국대회가 개최되었다. 일주일에 걸친 회의는 장제스에 대한 성토장이었다." "(공산당은) 군을 당에 복속시켜 장제스의 지위와 권한을 낮추고 당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기를 요구했다. 한마디로 장제스에게 백기를 들거나 아니면 군권을 내놓고 물러나라는 소리였다." "4월 1일, 우한 정부는 장제스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서 해임한다고 기습적으로 발표했다." "벼랑 끝에 몰린 장제스는 무력으로 공산당을 끝장내기로 결심했다. 4월 9일, 상하이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는 이미 총사령관에서 파면되어 아무 직위도 없었기에 함부로 병력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엄연한 반란이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느 한쪽이 굴복하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앞으로 20년에 걸쳐 이어질, 국공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서막이었다."(844-51)


"상하이정변이 알려지자 우한 정부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우한 정부의 새로운 수장이 된 왕징웨이는 닷새나 지난 4월 17일에야 장제스를 국민당에서 영구 제명할 것을 선언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나 때늦은 엄포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장제스는 코웃음 치면서 상하이의 우파와 협의하여 우한에 대항하는 신정부 수립에 착수했다. 새로운 수도는 신해혁명 당시 한때 혁명의 수도였던 난징이었다. 많은 국민당 간부들이 장제스에 호응하여 난징으로 모여들었다. 4월 18일 오전, 난징의 옛 장쑤성 의사당에서 국민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어 군무를 총괄했다. 난징 정부는 '전 장병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면서 쑨원의 유지를 받들어 북벌을 재개할 것과 그 역할을 장제스에게 맡긴다고 선언했다. 또한 우한 정부를 〈공산당에 장악당한 가짜 정부〉로 규정하고 타도를 선언했다. 국민정부는 우한과 난징으로 갈라졌다. 이른바 '영한 분열寧漢分裂'이다."(857-8)


"내분 때문에 두 쪽으로 갈라졌어도 북벌군의 힘은 여전히 강력했다. 북방 최강의 실력자 장쭤린조차 북벌군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대로라면 천하의 주인이 바뀌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동안 장쭤린 정권의 후원자로 막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일본은 묵과할 수 없었다. 일본은 장쭤린을 자신들의 주구로 삼아 중국 대륙을 야금야금 먹어나갈 속셈이었다. 그가 몰락한다면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셈이었다." "일본에서는 1927년 4월 17일 중국에 대한 불간섭주의를 고수한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이 무너지고 강경파인 다나카 기이치가 정권을 잡았다. 그는 제일 먼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육군대신에 기용했다. 그는 전 관동군 사령관으로, 2년 전 동북에서 궈쑹링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장쭤린을 도와서 관동군을 출동시켰던 인물이다. 또한 나중에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상하이를 침공하여 제1차 상하이사변을 일으키는 등 중국 침략을 주도했다."(867-8)


"온갖 감언이설과 파격적인 조건으로 펑위샹을 한편으로 끌어들인 장제스는 산시성의 실력자 옌시산까지 회유했다." "그는 북벌군과 장쭤린 사이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 어느 편에 서야 살아남을지 신중하게 관망했다. 장제스는 북벌군 총참의 허청쥔을 타이위안으로 보냈다. 그리고 현재의 영토를 보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즈리성까지 얹어주기로 약속했다.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한 옌시산은 북벌군에 가담하기로 결심했다. 장제스·펑위샹·옌시산의 3자 동맹이 체결되었다. 국민혁명군 제3집단군 총사령관이 된 옌시산은 장쭤린과 손을 끊고 출전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산시의 병력을 세 갈래로 출동시켰다. 산시군은 징쑤이철도와 정타이철도를 따라 즈리성을 침공했으며, 6월 15일 스좌장을 점령하여 펑톈군의 측면을 위협했다. 하지만 장제스가 옌시산에게 즈리성을 약속한 것은 훗날 펑위샹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전리품을 놓고 벌어진 갈등은 북벌전쟁이 끝나자마자 중원대전으로 치닫게 만들었다."(877-8)


5부 천하통일


"공산당 지도부는 군벌들이 싸우는 틈을 이용해 꾸준히 봉기와 소요를 일으키다보면 러시아 10월혁명처럼 언젠가 중국 전역의 노동자·농민들이 소비에트 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뒤엎으리라 믿었다. 난창봉기를 시작으로 1928년 여름까지 1년 동안 각지에서 무장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충분한 준비와 동조 세력 없이 일부 군인들을 선동하여 산발적인 반란을 일으키는 방식으로는 간단하게 진압당하기 일쑤였다. 많은 공산당원들이 무익하게 희생당했다. 쑨원의 혁명당도 이런 방식을 고수하다가 쓴맛을 보았음에도 공산당이 새삼스레 재현하는 꼴이었다." "그 와중에 장시성 일대의 농촌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아 투쟁의 횃불을 드는 데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 마오쩌둥이었다. 그는 흩어진 패잔병들을 모으고 주변 농민들을 규합해 유격전을 벌이고 토벌군을 격파했다." "또한 그의 곁에는 주더·펑더화이·린뱌오·허룽·뤄룽환 등 훗날 중국 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쟁쟁한 장군들이 있었다. '마오쩌둥 신화'의 시작이었다."(957-8)


"1928년 1월 4일,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다시) 취임했다. 하야를 선언한 지 넉 달 반 만이었다." "장제스는 보기 드문 카리스마와 결단력·정치 감각을 두루 갖추었지만 단점도 분명했다. 반대 세력을 쫓아내거나 합종연횡을 할 수는 있어도 링컨처럼 포용해서 자기편으로 만들 만큼 관대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마오쩌둥이나 스탈린처럼 아예 싹을 뿌리째 뽑아버릴 만큼 철두철미하거나 악독하지도 않았다. 충동적이면서 참을성이 부족한 그는 사소한 일에 쉽게 욱해서 주변 사람들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한 입으로 두말하는 반역자나 쓸모없는 부하들을 적당히 눈감아주어 자신의 권위를 실추했다. 참아야 할 때 참지 못하고 무자비해야 할 때 무자비하지 못했다. 장제스의 정적들은 겉으로는 두려운 척하면서도 뒤에서는 그의 이런 성격을 약점으로 여겼다." "그런 어중간함이 그가 천하를 완성하지 못한 채 몇 배 더 냉혹하고 무자비한 마오쩌둥에게 패배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958-60)


"북벌전쟁 재개가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다나카 내각은 제2함대를 산둥성으로 출동시켰다. 일본 함대는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인 4월 1일 칭다오항에 입항했다. 장쭝창·쑨촨팡의 군대가 북벌군에게 패주하여 흩어지던 4월 16일, 칭다오 총영사 후지타 에이스케가 본국에 급전을 보내 육군의 출동을 요구했다. 즉시 각료회의가 소집되어 출병을 결의했다." "일본군의 출동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사전 각본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나카 내각은 한 해 전인 1927년 12월 20일에 열린 각료회의에서 북벌군이 산둥성에 진입할 경우 재차 출병하기로 결정한 바 있었다. 명목은 현지의 일본인 보호와 치안유지였지만, 그 속내는 중국의 통일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북벌군이 제 발로 물러나지 않으면 무력도 불사할 참이었다." "일본군이 출동했다는 소식은 장제스에게도 전해졌다. 장제스가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북벌의 향방은 물론이고 중국의 명운이 걸려 있었다."(985-7)


"장제스는 한편으로는 일본과 교섭을 시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을 우회해서 최대한 신속하게 황허를 건너라고 지시했다. 북벌군이 황허를 건넌다면 일본군은 닭 쫓던 개가 되는 셈이었다. 5일 밤부터 6일 새벽까지 북벌군의 주력은 별다른 방해 없이 황허를 무사히 건너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장제스를 놓친 분풀이 삼아) 지난성을 손에 넣었지만 본래 목적이었던 북벌 저지에는 실패했다. 오히려 중국 전역에서 반일 감정이 들끓게 만들었다." "1929년 3월 28일 양국 정부는 '중일제안협정中日濟案協定'을 체결했다. 그에 따라 일본군은 4월 말까지 산둥성에서 완전히 철수하기로 했고, 쌍방이 주장하는 피해에 대해서는 공동 조사를 거친 후 보상하기로 했다. 1929년 6월에는 일본이 국민정부를 중국의 정통 정부로 정식 승인했으며, 중국의 국명 또한 일본이 임의로 만든 '지나'가 아니라 '중화민국'으로 부르기로 했다. 다나카의 야심찬 출병은 성과는 없고 잃은 것만 있었다."(991-5)


"대세는 결정났다. 지난에서 북벌군과 일본군이 충돌한 1928년 5월 9일, 장쭤린은 전군에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6월 2일 오후 7시, 순승왕부를 나선 장쭤린은 심복들과 함께 전용열차에 올랐다." "(펑톈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역인) 황구툰역에서 펑톈 쪽으로 몇백 미터 가다보면 산둥차오라는 육교가 있었다. 징펑철도와 남만주철도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1905년 12월 22일 만주선후조약滿州善後條約이 체결된 이래 관동군이 관할하는 지역이었다. 장쭤린의 열차가 도착하기 몇 시간 전,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땀을 흘리며 부지런이 뭔가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펑톈 독립수비대 제4중대와 조선주차군 소속 가메야먀 공병대의 공병들이었다. 병사들은 기리하라 사다토시 중위의 지휘 아래 철로에 폭탄을 설치했다." "6월 4일 새벽 5시, 폭탄은 장쭤린이 탄 차량과 식당 차량 중간에서 터졌다. 난세에 태어나 천하를 호령하던 풍운아의 마지막이었다."(995-1000)


"편제상 일개 변방군에 불과했던 관동군의 임무가 적과의 전투보다는 철도 경비라는 지엽적인 임무였다면, 조선군이야말로 유사시 대륙으로 즉시 출동하기 위한 실전 부대이자 신속 대응군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힘은 조선군보다 관동군이 더 컸다. 관동군은 군부 핵심층에서 거대한 파벌을 형성하여 발언권이 막강했다. 관동군 뒤에는 남만주의 철도사업을 담당하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이른바 만철滿鐵이 있었다. 만철은 단순한 철도회사가 아니라 대륙 침략을 위한 첨병이자 식민지 정부로 일본판 '동인도회사'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경영권은 본국 정부가 아니라 관동군이 쥐고 있었다. 만철 운영은 거대한 이권을 좌우했기 때문에 관동군 장교들은 본연의 업무보다 만철과 결탁해서 이런저런 이권에 끼어들어 한몫 잡는 데 혈안이 되었다. 만철에서 나오는 막대한 자금은 일본 정계와 군부로 흘러들어갔다. 만주는 관동군의 '왕국'이었다. 일본군 중에서 관동군이 유독 타락하는 모습을 보인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1004)


"장제스는 동북으로 중앙군을 보낼 수 없었고, 행정권을 행사하거나 세금을 징수할 수도 없었다. 국민당의 활동 또한 금지되었다. 동북은 여전히 장쉐량의 독립 왕국이었다. 장제스는 체면을 지켰고 장쉐량은 실리를 얻었다." "그러나 중국에는 또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북벌군의 4대 수장들이 승리 후의 논공행상으로 으르렁대기 시작한 것이다. 난징의 장제스, 우한의 리쭝런, 타이위안의 옌시산, 시안의 펑위샹. 여기에 동북의 장쉐량까지. 누구에게도 고개 숙일 생각이 없었던 이들은 천하의 주인 자리를 놓고 한판 겨룰 수밖에 없었다. 1929년 2월, 제4집단군의 총수 리쭝런이 제일 먼저 반장제스의 기치를 올렸다. 뒤이어 펑위샹과 장파쿠이가 차례로 반란을 일으켰다. 장제스에게 패하여 일본으로 달아났던 탕성즈도 돌아와서 반란에 가세했다. 광시성에서 시작된 반란의 불길은 마른 장작 타오르듯 순식간에 중원 전체로 퍼져나갔다. 2년에 걸쳐 진행되는 군벌 내전 최대최후의 절정인 '신군벌 내전'이 시작되었다."(1047-8)


"편견이란 '엮고編 내보낸다遣'는 뜻으로 비대한 군대를 줄이고 정예부대 중심으로 재편성하는 것이었다." "북벌 과정에서 비대해진 군대를 크게 줄여서 재정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어렵사리 이룩한 통일정부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또한 군벌들에게서 병권을 회수하지 못한다면 소란이 거듭될 것이 뻔했다." "장제스는 북벌 중에도 전쟁이 끝난 뒤를 대비하여 군대 축소를 꾸준히 제안했다. '재병화공裁兵化工', 즉 병사를 노동자로 전환하자는 얘기였다. 이를 위해 장쑤성에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군축 작업이 결코 순탄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국가를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고 대승적인 결단을 내린 일본의 유신 지도자들과 달리 중국의 군벌들과 정치 지도자들은 말로만 외세의 침략에 분개하고 중국의 허약한 운명을 한탄했다. 국난에 대한 위기의식이나 뭘 어떻게 하겠다는 국가 대계는 없었다. 사고방식이 중국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1120-2)


"펑위샹의 하야, 리쭝런과 바이충시·황사오훙 등 광시파의 도주로 약 반년에 걸친 군벌들의 반란은 일단락되었다. 장제스는 반란에 가담한 지휘관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대신 사면해주었다. 그는 군벌들이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히틀러였다면 패배자들에게 최대한의 굴욕을 준 뒤 가장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했을 것이다. 장제스가 그러지 않은 까닭은 내우외환에 직면한 중국의 현실에서 내전이 끝없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승자는 과거의 일을 잊고 패배자에게 너그러이 관용을 베푸는 것이 중국 사회의 오랜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협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장제스는 이들의 기반과 병권을 빼앗는 대신 중앙의 요직을 나눠주어 국민정부에 참여하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왕국을 계속 통치하기를 원했던 군벌들은 병권의 반환이 곧 장제스의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결국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힘으로 굴복시키는 수밖에 없었다."(1144)


"한때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던 반장연합군 세력은 장제스의 발빠른 대응과 회유 공작으로 차츰 꺼져갔다. 군벌들은 서로 보조가 제대로 맞지 않아 차례로 각개격파당하거나 장제스의 회유에 넘어갔다." "중립을 지키던 옌시산도 장제스가 장제스가 사실상 승리를 굳히자 그제야 난징으로 전보를 보내 자신도 반란군 진압에 가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때 사면초가에 몰렸던 장제스는 무엇보다도 뇌물 공세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는 우세한 자금력을 앞세워 막대한 돈을 사방에 뿌려대며 군벌들을 회유했다. 군벌들이 하나같이 군비 부족에 허덕인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장제스는 이들을 매수하기 위해 거액의 공채를 발행하고 자기 재산까지 털었다. 덕분에 병사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형세를 뒤엎을 수는 있었지만 군벌들의 진정한 충섬심을 살 수는 없었다. 오히려 군벌들이 돈맛에 익숙해지면서 중국의 오랜 병폐인 도덕적 타락을 부추겼고, 이는 국민정부의 부패와 무능함으로 이어졌다."(1155-6)


"한동안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혼란스러운 상황은 8월 말이 되자 승패가 장제스 쪽으로 기울면서 가닥을 잡았다. 산둥성에서 산시군은 괴멸하여 투항하거나 퇴각했다." "장제스가 강력한 반격을 시작한 가운데, 동북군의 출병은 펑위샹·옌시산에게는 허를 찔린 것이자 대세에 쐐기를 박는 결정타였다. 그들은 장쉐량이 기회주의적이기는 하지만 장제스와 손잡는 일은 없으리라 마음을 놓고 있었다. 따라서 모든 전력을 장제스와의 전투에 투입하고 장쉐량에 대해서는 아무 대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북군이 진격해오자) 옌시산과 왕징웨이 등 베이징 정부 수장들은 남쪽의 스좌장으로 피신하고 정부기관은 타이위안으로 이전했지만 이미 붕괴된 것과 다름없었다." "장제스는 시안은 물론이고 간쑤성과 칭하이성까지 진격하여 이번 기회에 서북군을 완전히 결딴내겠다고 별렀지만, 장쉐량이 중재하자 정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11월 4일, 옌시산과 펑위샹은 하야를 선언했다. 이로써 중원대전은 막을 내렸다."(1184-8)


"(중원대전 이후) 동북군 내부의 파벌 싸움이 격화되자 관동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장쉐량과 반목하던 동북의 원로들은 친일파로 전향하여 관동군의 동북 지배에 협조했다. 장쉐량은 군대를 돌려 반격하는 대신 관동군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부저항 정책'을 지시하여 부하들로 하여금 무기를 내려놓게 하고 일본과의 협상에 나섰다. 중국인들의 오랜 관념마냥 장제스가 장쉐량을 파멸시킬 요량으로 압박해서가 아니라 장쉐량 스스로 관동군의 야심을 오판했고, 동북군 내부가 분열했으며, 어렵사리 확보한 영토를 포기할 수 없다는 장쉐량의 개인적인 아집 때문이었다." "이듬해 1월에는 일본군이 러허사변을 일으켜 만리장성으로 밀고 내려왔다. 동북군은 싸우지도 않고 무너져버렸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머나먼 샨시성으로 쫓아버렸다. 장쉐량은 공산군 토벌 작전에 투입됐지만 여기서도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궁지에 몰린 그는 1936년 12월 12일 시안사건을 일으켰다."(1189-90)


"장제스는 중원대전의 승리로 명실상부한 중국의 주인이 되었다. 펑위샹과 탕성즈는 몰락했고 옌시산은 겁에 질렸다. 리쭝런은 여전히 광시성을 지배했지만 큰 타격을 입었다. 북벌전쟁에서 장제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군벌들은 더 이상 천하 패권을 놓고 다툴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렇지만 장제스의 패업은 절반만 완성됐을 뿐이었다. 펑위샹·옌시산의 하야에도 불구하고 산시파와 서북파는 아직 건재하여 무시 못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장쉐량은 새로운 화북의 지배자가 되어 중국의 반쪽을 장악했다. 천지탕을 비롯한 광둥 군벌들 또한 장제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쓰촨성과 윈난성 등 광대한 서부 지방은 반半독립적인 군벌들이 차지한 채 할거하고 있었다. 이들은 장제스의 대등한 동맹자이지 주종 관계가 아니었다. 싸움의 단초가 된 편견(군축) 문제도 흐지부지되었다." "중원대전이 끝난 지 1년 뒤인 1931년 9월 18일에는 만주사변이 일어나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했다."(1194-5)


"중원을 평정한 장제스의 눈은 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마오쩌둥-주더가 지휘하는 홍군이 있었다. 한동안 실패를 거듭하던 중국공산당은 농촌을 새로운 투쟁 근거지로 삼아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건의를 받아들여 후베이성과 후난성·장시성 변경의 농촌 지역을 빠르게 잠식해나갔다. 중원대전이 한창이던 1930년 여름에는 장제스의 눈의 중원에 쏠린 것을 이용해 홍군 부대가 난창과 장사, 우한을 공격했다. 홍군의 성급한 공격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만, 세를 불려가는 속도와 조직력은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었다. 장제스는 이번 기회에 이 오합지졸 농민 군대를 토벌하고 쓰촨성·구이저우성·윈난성 등 아직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 서부 변경의 군벌들까지 한꺼번에 손보기로 결심했다. 1930년 12월 19일, 장시성 주석 겸 제9로군 사령관 루디핑의 지휘 아래 5개 사단 4만 4,000명이 홍군 토벌 작전을 시작했다. 중국 대륙의 패권을 놓고 앞으로 20년 동안 이어질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첫 번째 싸움이었다."(119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