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서울대학교동양사학강의총서 8
로이드 E. 이스트만 지음, 민두기 옮김 / 지식산업사 / 199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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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지방정치地方政治와 중앙정부中央政府 : 운남雲南과 중경重慶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운남의 군벌은 용운(龍雲, 1888~1962)이었다." "대일항전이 시작되고 국민정부가 오지(奧地)로 후퇴하자, 운남과 중앙정부의 관계의 질은 기본적으로 변화하였다. 여태까지는 운남이 중앙정부의 주된 관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중앙정부로서는 운남성당국이 그 뜻을 순순히 그리고 신속하게 따르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전시중국으로서는 운남성은 사천성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성이 된 것이다. 이제 운남은 중앙정부를 위한 인력, 돈, 물자를 위한 요긴한 공급원이 되었다. 그러니 중앙정부로서는 운남이 어떻게 통치되는가 그리고 운남의 통치자가 중앙정부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3년 동안에 아마도 30년래의 것보다 더 큰 변화가 성 안으로 물밀듯 들이닥치자, 누구보다도 운남성정부당국이 지방권력이 침식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1939년 중기에 가면 중앙정부와의 관계는 파열 직전 상태에까지 갔었다."(30-4)


"운남성과 중앙정부의 관계는 주로 경제적인 것이었다. 그 까닭은 분명하다. 국민정부는 오지(奧地)에 전시경제 근거를 마련해야 하였던 것이다. 운남은 일본군의 공격이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는 점, 과장되기는 했으나 뽐낼 만한 자연자원의 부존, 그리고 임시수도 소재성인 사천성에 가깝다는 것 때문에 전략산업을 두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더 나아가, 운남이 하노이와 버마에의 수송로 기점이라는 위치가 운남으로 하여금 갑작스레 중국의 대외교역의 중요한 중재자로 변모하게 하였다. 은행업무와 조세행정면에서도 중요한 갈래가 되었다. 운남 사람들이 이같은 경제적 변화에 적응해 가는 과정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운남의 경제적 자주의 기반이 침식되어 갔기 때문이다. 어떻든 국민정부측으로서는 운남에 대해 재정적으로 보장함으로써 운남을 전시경제체제로 편입하는 목적을 달성하였다. 1939년 10월에 가면 기본적인 경제적 차이가 없어지게 되었다."(40)


"1939년에 국공(國共)의 통일전선 형성 때문에 정치적 조정을 필요로 하는 분위기는 가시기 시작했다. 당(黨)과 군의 군사통계국(軍事統計局)이 주가 되는 중앙정부의 몇몇 비밀경찰기관과 삼민주의청년단이 국민정부 영역에서 사상적, 정치적 획일화를 이루고자 점진적으로 배치되었다. 그러나 용운은 다른 몇몇 지방군벌이 그러한 것처럼 정치적 반대자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이 정치적 반대자들의 중앙정부비판이 중앙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거나 또는 「강(江) 저쪽」의 정부에 대한 비판자를 받아줌으로써 매우 배타적인 운남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높이려 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1941년 홍콩이 피난처 구실을 할 수 없게 되면서 그러하였다." "예를 들자면, 1941년에 성립한 민주정단동맹(民主政團同盟)의 주장의 근저가 국민당의 독재에 대한 반대였는데도 불구하고─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용운은 정단동맹의 친구요, 후원자가 되었다."(42)


"1944년 4월 일본군이 「1호작전」을 시작하였다. 이는 중국전쟁에서 일본군이 행한 가장 강력한 군사작전으로서, 남부중국과 동부중국에 있는 중국군과 미군의 비행장들을 파괴하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었다." "국민정부에 대한 「1호작전」의 정치적 영향은 군사적 영향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일본군의 군사적 성공이 중앙정부의 부패, 무능, 사기저하를 전에 없이 드러내는 결과가 됐기 때문이었다." "「1호작전」을 계기로 하여 성(省)에서의 반장(反蔣)운동이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지방의 군벌들로서 볼 때는, 이제심(李濟深)의 표현을 빌린다면 집권세력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스럽다고 보여지는 남방 지도자들의 군대를 약화시키거나 파괴하기 위해 중앙정부가 미리 짜놓은 계획이 「1호작전」으로 드러나고 만 것이었다. 더 나아가 「1호작전」은 지방 省의 음모자들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니, 중앙정부가 이제 군사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고 정치적으로 약체화되었기 때문이었다."(45-6)


"1945년 봄의 장개석은 전후(戰後)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 유리한 입장에 있는 중앙정부로서는 공산당과의 사생결단 싸움이 임박하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사실이라면 용운이 전후에도 계속하여 운남을 지배한다는 것은 불편스럽고 위험하였다." "10월의 용운에 대한 무력해직(武力解職) 사건의 여운은 몇년 뒤까지도 남았다. 굳이 말한다면 이 사건은 국민정부의 종국적 붕괴의 요인이 되었다 할 수 있다. 이 사건의 즉각적인 효과는 중앙정부의 정보기관원이 마음대로 곤명의 반정부 지식인을 탄압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협상결렬이 확실시되던 1945년 11월에 곤명의 교수와 학생은 내전(內戰)의 재개에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긴 전쟁 끝이라 평화와 안정을 절실히 바랐고, 국민당의 권력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들 지식인들은 중앙정부보다는 공산당에 대해 덜 비판적이었다. 전국 지식인들의 충성은 차차 국민당에서 멀어져가기시작했다."(51-6)


"운남성과 중앙정부와의 관계는 국민당 정권의 정치구조 깊숙이 있는 균열의 하나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즉, 극히 자립적인 지방권력중심이 존재하였고, 그 지도자는 중앙정부 정책목표의 전부에 다 참여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어떤 때는 중앙정부의 존립 그 자체를 위협하기도 하였다. 전국의 권력자원을 제한적으로 그리고 불안정하게밖에 장악하지 못한 정권은 정말 극히 약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장개석의 정치전략은 (세력균형 아닌) 약력균형(弱力均衡)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다른 모든 정치세력을 약하게 해둠으로써 자기 자신과 자기의 정부를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이 전략은 한동안은 성공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인 뜻에서는 실패하였다. 왜냐하면 이 모든 세력들을 약하게 해둠으로써 장개석은 중국이 강할 수 없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국은 패자가 된 것이고 장개석도 결국에는 패자가 되고 말았다."(58-9)


2장 항일전抗日戰 시기時期의 농민農民과 징세徵稅 및 국민당國民黨 지배


"정부의 부담 강요 중에서 전부(田賦, 토지세)가 징병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1928년 이래로 정세(正稅)와 그와 관련된 부가세(附加稅)는 성(省)과 현(縣)의 정부에서 관리되었다. 그러나 1941년 7월에 중앙정부는 전부를 국유화하여 현물(즉, 곡물 또는 다른 농산물)로 징수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농민이나 정부에게까지도 큰 영향을 준 주된 개혁이었다." "미곡 생산이 줄어들고(1940년 6월, 일본이 미곡의 주생산지인 호북성 함락), 가격관계가 불리하고(미곡퇴장과 투기 바람으로 인플레이션 발생), 소작료가 비싸지면서(가치가 하락하던 화폐에서 안전한 곡물로 소작료 변경) 대다수 농민의 경제적 지위는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조세, 기부금, 강제차용과 강제구매, 징병, 징용(노동력 징발) 형태의 부담도 농민의 많은 희생을 강요하였고, 정부권위에 대한 농민의 태도에 영향을 주었다. 이같은 강제적 부담은 그리하여 1949년의 혁명적 대단원을 가져온 복잡한 정치적 역동관계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71-2)


3장 전후기戰後期의 농민農民과 과세課稅부담과 혁명革命


"1943년 9월, 국민정부는 전부면제책(田賦免除策)을 발표하여, 일본군점령하의 24개 성에서 전부 징수를 1945년에서 46년까지 1년간 면제해주었다. 다음해에는 나머지 성에서도 전부가 면제되었다. 전부면제책은 액면 그대로 보면 약은 정치적 조치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써 다가오는 공산당과의 싸움에서 토지소유층의 지지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조치는 재정적으로 결정적인 오산이 되고 말았다. 항일전(抗日戰) 승리 다음해의 현물조세징수는 그전 해의 반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군대나 정부의 양곡 수요는 그에 따라 줄어들기는커녕 일본군 점령지였던 지역으로 정권의 힘이 확대되어가면서 사실은 더 증가하였던 것이다. 더우기 서부중국에서 이들 지역으로 대량의 양곡을 운송한다는 것은 실현성이 없는 일이었다. 그 결과 군대와 지방정부의 여러 단위는 그 지방에서 불법적인 강제징수를 멋대로 행함으로써 양곡 수요를 충당하였고, 그러한 행동은 불만을 넓게 확산하게 만들었다."(95)


"(농민들의 반대가 광범위해질 것이 분명한데도) 1947년 당시의 중앙정부는 농민의 부담을 경감할 수가 없었다. 행정원장 장군(張群)에 따르면 군대와 정부가 다같이 심각한 양곡부족으로 겪고 있었다. 그러므로 양곡의 강제차용은 중단할 수가 없었다. 중앙정부는 양곡강제차용제를 부활시켰을 뿐 아니라, 공산군과의 전투가 계속되면서 양곡의 수요는 더 급박해져 갔다. 1948년에는 중앙정부가 마침내 전부 세율을 올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가 되면 시골에서 자원을 강제징수할 수 있는 능력이 현저하게 감소해 갔다. 공산당의 영향력이 확산됨에 따라 국민정부의 권위가 행사되는 지역은 줄어들어 간 것이다. 형식상으로는 국민정부의 지배하에 있는 마을에서조차도 효과적인 정치적 통제는 사실상 쇠퇴하였고 행정의 능률은 필시 거의 막다른 최하의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1948년에 중앙정부가 거두어 들인 곡물의 실제 양은 1941년 이래 가장 적었다."(102)


"1949년의 중국혁명은 현대 농민혁명의 고전적인 예로 간주되고 있기는 하나 농민의 역할은 프랑스나 러시아에서의 경우와는 크게 다르다. 중국의 경우 농민의 불만은 분명히 깊은 것이었고 그것이 폭동, 전국적인 비적질 그리고 농촌으로부터의 도피 등으로 나타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농민의 반란은 유렵혁명의 경우 농민이 한 것처럼 그 자체로서 농촌의 사회경제적 질서를 뒤엎을 만하지를 못했다. 실로 중국의 농민들은 공산당의 군사적, 정치적 힘 아래서 그것들이 옛 엘리트들로부터의 보복을 막아주겠다고 보장하거나, 또는 공산당이 선전이나 개혁의 성과를 가지고 옛 질서하에서 알고 있는 생활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전망을 주기까지는 기존 사회경제제도를 직접 공격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결과 국민당편에는 압력(또는 지지)이 거의 없었고, 공산당편에는 얼마간의 압력(지지)이 있었다. 공산당편에 기운 부분적인 정치적 공백은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107-10)


4장 정권政權 내부의 정치과정政治過程 : 삼민주의청년단三民主義靑年團


"삼민청년단을 만듦에 있어 장개석이 바란 것은 혁명과 항일전쟁의 모든 진정한 지지자가 각자의 차이를 묻어 두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그 안에서 일할 수 있는 그런 기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그린 삼민청년단은 국민당 안의 모든 경쟁파벌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사천의 기업가 노작부(盧作孚)나 경제전문가 하렴(何廉)과 같은─그들은 국민당이 마음에 안 맞아 국민당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사회적 지도자들을 끌어들이기를 바랐었다. 이같은 노력을 통해 국민당을 상당히 싫어한 청년들을 끌어들일 수 있기를 바랐다." "요컨대 삼민청년단을 만든 장개석의 의도는, 지난날의 분파싸움을 없애고 젊은이들을 끌어들임으로써 국민당이 팽개쳤던 혁명과업을 추진할 수 있는 새로운 혁명조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삼민청년단의 임무는 청년들로 하여금 항전건국강령(抗戰建國綱領)을 실행하게 하며, 혁명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상급혁명세력과 단합을 하는 일이었다."(116)


"삼민청년단이 혁명분자를 통합된 세력으로 규합할 것이라는 장개석의 기대는 (파벌싸움의 폐단이 일어나면서) 이내 깨지고 만다. 얼마 안되어 삼민청년단이 단원모집에 있어 서로 경쟁하고, 당을 공공연히 조롱함으로써 관할권을 둘러싸고 국민당과 싸움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상황이 매우 심각해졌으므로 1939년 5월, 그러니까 삼민청년단의 설립이 공식으로 결정된지 꼭 일년 뒤에 장개석은 삼민청년단에 대한 생각을 전면적으로 바꾸었다. 당초에는 청년단이 국민당정권에 있어─유일하지는 않더라도─하나의 지도적인 정치적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젊은이를 훈련하고 통제하여 국민당의 장차의 당원으로서 준비하는 것으로 기능을 축소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삼민청년단의 일은 불가피하게 정치적 관련이 있지만 그러나 교육을 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삼민청년단을 이같이 새롭게 보게 되면서 장개석은 청년단 단원에게 종속적인 역할을 받아들이도록 훈계하였다."(118-9)


"국민당과 삼민청년단 간의 다툼이 국민당 활동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다는 것, 그리고 삼민청년단의 지도부가 그 다툼에 책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 장개석은 마침내 청년단을 해산하기로 결심하였다. 1947년 6월 30일에 그는 국민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회에 삼민청년단을 국민당 안으로 흡수할 것을 제의하였다." "장개석은 (합병을 결정한) 최종 합의에 매우 만족스럽다는 뜻을 표하였다. 『삼민청년단과 국민당이 통합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생각은 화합되었고, 그들의 정신은 통일되었다. 이제 세력다툼은 없게 되었다. 통합회의의 정신에 나는 깊이 감동하였다』라고 장개석은 말하였다. 그러나 장개석이 구조적인 통일이라는 그러한 형식적 방편이 그의 추종자들간의 다툼을 없앨 수 있다고 정말 믿었다면 그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륙에 남아 있던 그 뒤 2년 동안 실로 통합 자체가 그 갈등을 더 심하게 하였으니, 양쪽이 국민당 안에서 자리와 세력을 놓고 서로 싸웠기 때문이다."(129-31)


5장 당내정치黨內政治 : 「혁신革新」운동


"혁신운동은 1944년 초 국민당정권의 정신적, 물질적 힘이 쇠미해 있을 때 시작되었다." "(주로 CC계 당원들로 구성되어 있던) 혁신그룹이 걱정한 것은 분명 당과 정부의 타락과 비능률이었다. 그들이 보기로는 국민당정권은 불행하게도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었고, 군사적 패배의 주된 원인은 정부의 실책이었으니, 그것은 조세징수액의 감소와 물가의 상승, 그리고 정부의 양곡정책의 실패(아마도 현물조세징수책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에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공격방향이 특정한 파벌이나 개인에도 쏠려 있었으므로 그 운동은 권력투쟁의 요소가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 혁신그룹의 특별한 공격목표의 하나는 정학계(政學系)였다. 정학계는 이념이라는 것을 우선순위에서 낮게 치는 행정적, 기술적 전문가들의 느슨한 집단이었다." "혁신계의 생각으로는 정학계의 사람들은 그저 정치적 원칙이 없는 정치적 기생자(奇生者)로서 자기들의 이익만 된다면 언제든지 당과 나라를 팔아먹을 자들이었다."(134-7)


# CC계 : 국민당 중급간부들의 모임


"「혁신」운동가들이 보기에 국민당의 병의 근본원인은 당원들의 다양한 성격에 있었다. 당의 조직은 적절한 기율, 훈련, 선전활동이 없이 언제나 느슨하였다. 게다가 북벌 이후 군벌과 기회주의자가 당으로 밀어닥쳤다. 그러므로 당원간에 목적의 공통성이 없게 되었다. 당의 혁명원칙에 무관심한 사람이 많았고 권력이나 돈만을 얻으려 하였다." "또한 당내민주주의가 없었기 때문에 당의 지도자들은 늙고, 상상력이 메마르고, 그들의 특권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는 「특수한 계급」이 되어 버렸는데, 그들은 권력을 독점하였지만 그 권력을 가지고 아무것도 해놓은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몇 가지 요인들 때문에─1927년에 기회주의자가 당으로 몰려 들어오고, 당의 조직이 약화되고, 당내에 민주주의 정신이 없고, 당이 정부를 통제할 수 없고 하는─당과 정부는 지금 관료주의, 파벌싸움, 관료자본주의의 병폐를 갖게 되었다. 이것들이 「혁신」운동의 3대 공격 목표였다."(145-6)


"1947년 3월의 제3차 전체회의 이후 「혁신」운동은 자취를 감춘다." "「혁신」운동이 시들게 된 가장 뚜렷한 이유는 삼민청년단과 CC계 사이의 갈등이 증대한 것이었다." "「혁신」운동과 삼민주의청년단은 국민당 국가기구의 내부 분해의 예이며 동시에 증언자이기도 하였다." "이 두 운동의 그 어느 것도 정권을 구하지 못하였으니, 그들이 공격하였던 개인이나 파벌과 마찬가지로 그들 각자도 병(病)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근원은 주로 구조적인 것이었다. 정권의 구성원으로 하여금 그들의 직무수행을 정부 밖의 정치적 지지자나 정치적 세력에게 책임지게 하는 효과적이고 제도적인 방편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개의 공직자들은 정치의 보다 큰 목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권력의 획득 그 자체가 그것에 수반되는 명예와 부와 함께 그들의 우선과제가 되어 버렸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국민당정권 안에 있어서의 정치 행동의 주된 방편인 파벌에 가담하였던 것이다."(149-53)


6장 항일전쟁抗日戰爭과 국민정부군國民政府軍


"국민정부군은 조직, 훈련, 장비면에서 확실히 우세한 적군(일본군)과 8년간의 싸움을 치러냈다. (독일군에 대한 저항이 겨우 6주일간의 전투 끝에 붕괴된) 프랑스군이나 (미국으로부터 대규모의 물자원조를 받은) 영국군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중국 국민정부 군대의 저항은 놀라운 신념과 자족(自足)의 경이였다. 신속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기대하였던 일본군의 계산을 완전히 좌절시킨 국민정부군은 상해, 남경 그리고 북부중국, 중부중국에서 엄청난 손실을 무릅쓰고 활발하게 싸웠다. 그리고 나서 해안지대에서 주요 교통망이 닿지 않은 곳으로 후퇴한 국민정부군은 지구전(持久戰)으로 바꾸어 일본군을 중국의 광대함의 늪 속에 허우적거리게 하였다. 이 완강한 저항은 추축국에 대한 연합국의 전면전에 상당히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국민정부군은 약 100만의 일본군을 아시아대륙에 묶어놓았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태평양에서 섬에서 섬으로 옮겨 싸운 서방 동맹군과 싸우도록 동원되었을 것이다."(155)


"전쟁 기간 내내 장개석 휘하 군대의 소극성과 부패에 대한 서방측 관찰자들의 비판은 장개석의 비위를 몹시 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군대가 싸움을 할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이 숫자상으로 아주 우세한 운남의 국부군으로 하여금 북부버마에 있는 일본군 1개 사단을 공격할 것을 명령하도록 1944년 3월에 간청했을 때 장개석은 반대를 하고 있다. 중국은 군사적으로 아주 무능하고 정치적으로 취약하므로 그같은 대수롭지 않은 일도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7년 동안의 전쟁이 중국의 물질적, 군사적 힘을 그토록 소모해 버렸으므로 중국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간청하는 것은 불행한 일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라고 장개석은 말하였다. 그러므로 장개석의 전략적 목표는 공간으로 시간을 버는 것, 즉 기존의 전선을 유지하고 장차 중국해안에 연합국이 상륙하는 일에 대비하는 데 국한되게 되었다."(163-4)


"국부군의 사병들은 (무능의 상징과도 같았던) 장교와 경우와는 달리 외국 전문가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국부군의 사병들은 일반적으로 너무도 형편없이 다루어졌고 못먹어서, 효과적으로 싸울 능력도 사기도 다 갖고 있지 못하였다. 국부군 병사의 대부분은 징병이었다. 징병법에 의하면 18세에서 45세까지의 모든 남자─독자, 학생, 곤궁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징병에 해당되었다. 정부는 「세 가지 공평원칙(三平原則)」을 강력하게 선전하였는데, 그것은 병역의무는 모든 지역사람과 모든 경제계층 사람이 공평하게 부담한다는 것이다." "원칙은 그러하였지만 실제는 달랐다." "이 징병제도의 근원적인 결함은 병사를 징발하고, 징발된 사람을 모으는 일이 지방당국에 궁극적으로 맡겨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유력자의 아들들은 징병을 면하였고, 그런가 하면 「세 가지 공평원칙」이 완전히 무시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자식들만 군에 어거지로 끌려갔던 것이다."(172-3)


"8년 동안의 일본에 대한 항전기간 동안 전선의 배치 부대에 도달하기 전에 죽은 신병의 총수는 약 140만이었으니, 10명의 신병 중 1명 꼴이었다." "일본군과 싸운 8년 항전의 후반 동안에 국민정부군은 상당히 붕괴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전쟁 초기의 대일항전 전적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적어도 1942년 이후, 아니 그보다 더 일찍부터 국부군은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군사작전을 할 수가 없었다. 하응흠 장군의 표현을 빌린다면, 전쟁 말기에 국부군은 「극도로 피폐」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8개 사단은 13주 동안의 미군식 훈련을 갓 마쳤으며 다른 22개 사단은 그 훈련의 여러 다른 단계에 있었고, 급식상태와 장비가 좋은 이들은 비교적 효과적인 전투단위였다. 그러나 그밖의 300여 중국군 사단은 그대로였다. 국부군이 이렇게 피폐하였고 노후화하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니, 이들이 이내 공산군과의 내전에 참가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78-86)


7장 국부군國府軍의 공산군共産軍과의 싸움


# 국공내전의 승패를 가른 요인

1. 전술과 전략의 착오 : 국부군 병력은 너무 광범위한 지역에 포진되어 있었고, 그 지휘관들은 적의 섬멸보다 스스로의 안전을 더 걱정하였다. 

2. 상호협조의 부족 : 중앙군과 지방군 간의 알력은 지휘체계의 균열을 가져와, 지휘관들은 서로 협조하거나 다른 부대를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3. 군대의 배반 : 지방군을 중심으로 전투 중에 공산군에 투항하는 일이 잦았으며, 공산군은 선전전을 동원하여 국부군 내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4. 첩보활동 : 국부군의 정보활동이 형식적이고 관료적이었던 데 반해, 공산군 첩자들은 국부군 내부의 비밀을 캐고 역정보를 뿌리는 데 능했다.

5. 공산군의 우월성 : 충분한 사전 작전 수립, 전투지휘관에게 부여된 광범위한 결정권, 민간인 지원 획득 등에서 공산군은 국부군을 압도했다.


8장 장경국蔣經國과 금원권金元券 통화개혁


"1948년 8월의 통화개혁 착수 후 3개월 이내에 경제는 완전무결하게 붕괴되었고 중앙정부군은 양자강까지 밀려났다. 그로부터 꼭 2개월 뒤인 1949년 1월에 장개석은 국민정부의 총통자리를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정부의 패배를 금원권통화 개혁이나 한낱 각료 탓으로 돌리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것이다. 통화개혁은 1948년의 경제적 붕괴의 원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통화개혁이 착수되기 전에 시작된 붕괴를 막아보려는, 절망적이기는 하나, 하나의 도박이었던 것이다. 그 도박이 실패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통화개혁의 기도가 국민들의 상당한 부분을 환멸을 느끼게 하고 화를 내게 함으로써─특히 국민당정권의 주된 지지층이었던 중산계급이 그러하였다─국민당정권의 정치적 붕괴를 촉진한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왕운오는 물론 장개석도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보았고, 적어도 약간의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도박이었다."(201-2)


"1947년과 1948년의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국민정부 지배하의 중국의 경제는 엉망이었다." "그러나 1948년 여름에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나라가 막바지 붕괴로 치닫는 듯 보였다. 공산군과의 싸움으로 생긴 예산상의 적자 때문에 법폐발행고는 늘어가 1947년 12월의 34조원(元)에서 1948년 6월에는 250조원이 되었다. 그러더니 단 한 달 반만에 발행고는 600조원에서 700조원으로 늘어났다. 전투지역이 확대되면서 법폐는 격류처럼 북부중국에서 중부 및 남부중국으로 밀려들어왔다. 화폐발행고가 팽창함에 따라 정부와 법폐에 대한 공적 신뢰는 다같이 줄어들어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의 돈이 그래도 아직 갖고 있는 가치를 잃기 전에 무엇이 되었건 앞다투어 사재기에 나섰다. 이같은 통화의 급속한 회전은 통화팽창에 부채질을 하였으며 물가는 정부의 법폐발행 속도보다 더 빨리 치솟았다." "5월 말에서 8월 중순의 단 두 달 반 동안에 상해의 물가는 약 10배가 뛰었다."(202)


"통화개혁을 실시함에 있어 장개석의 계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 작용하였을 것이다─8월의 물가상승은 완전히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경제가 전부 붕괴해 가고 있었다. 만약 경제가 붕괴되면 정치적, 군사적인 붕괴가 곧 그 뒤를 따르게 된다. 통화개혁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절망적인 상황에 최소한 어렴풋이기는 하나 희망을 주었다. 폭발적인 물가상승은 법폐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 때문이라는 통화개혁 옹호론자들의 말은 상당한 정도로 맞는 말이다─그 증거로는 새 돈을 찍어내는 것보다 더 빨리 물가는 올랐던 것이다. 장개석, 옹문호, 왕운호는 이제 새 돈이 적어도 잠정적으로나마─겨우 6개월 정도만이라도─사람들의 신임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단기간 동안이나마 경제적 붕괴를 피할 수 있다면 정부는 그 사이에 통화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보다 항구적인 방안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긴급처분은 인플레를 겨우 5주 동안만 늦추었을 뿐이다."(207-8)


"그렇다면 왜 통화개혁은 실패했는가? 가장 주된 원인은 금원권을 너무 많이 발행함으로써 인플레의 재생을 자극한 것이다. 여기서 두드러진 사실은 9월 30일 현재로 발행된 새 금원권의 23퍼센트만이 정부의 비용과 군사작전을 위해 지출되고, 적어도 63퍼센트는 중앙은행에 신고 제출된 금, 은, 그리고 외환의 대금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금, 은 그리고 외환의 가치는 여태까지는 원형 그대로 소장되어 인플레의 촉진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실로, 1946년과 1947년에 정부는 지폐유통을 줄이고 인플레를 둔화시키기 위해 다량의 금을 의도적으로 「매각」한 바 있다. 8월 19일 이후에는 반대의 정책을 썼다. 이제 정부는 귀금속을 사들여서 고액의 지폐를 유통하게 한 것이다. 이는 정부의 본 뜻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아직까지 시장으로 나오지 않았던 미화 1억 9천만달러 상당의 금, 은, 외환이 갑작스럽게 화폐로 바뀌어 인플레요소로 활발하게 작용하게 된 것이다."(226-7)


"긴급경제조치 실패의 두번째 이유는 국민정부의 행정력이 약하였고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만약 물가통제가 상해에서 그러하였던 것처럼 전국적으로 강력하게 시행됐었다면 인플레는 적어도 6개월 동안은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소망을 달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상해의 경제독도서 관할 권한이 10월 1일에 확대되어 장경국이 상해에서 성취한 바를 강소성, 절강성, 안휘성에서도 성취할 수 있는 권한이 이론적으로는 주어진 뒤에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끝으로, 그래도 얼마간 남아 있었을 지폐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깨버린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그 첫째는 만주와 북부중국에서의 군사적인 상황의 악화였다." "둘째 요인은 10월 2일의 증세(增稅)였으니, 이는 통화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들 새 세금에 담겨져 있는 의의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엄청난 것이어서 금원권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었다."(228-9)


9장 누가 중국中國을 상실하였는가? ─蔣介石의 증언


"1949년 1월 21일에─경제는 전면적으로 파멸되어가고, 사람들은 남경정부에 환멸을 느끼거나 또는 멸시까지 하게 되는데─장개석은 총통의 자리를 물러났다." "이 시기는 장개석에게는─그의 행동을 기록한 조성분의 말을 빌리면─ 『그의 생애 중 가장 걱정스럽고 격한 자기성찰의 시기』였다. 그가 20년 넘게 이끌어 온 운동은 수라장 속에 있었다. 그는 굴욕을 느꼈다. 패배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를 그는 생각하였다." "조성분에 따르면, 3개월 뒤에 장개석이 얻은 회답은 『군과 행정부가 다같이 지난날의 패배에 책임을 저야 한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주된 이유는 당의 마비상태에서 찾아야 한다. 당원자격, 조직상의 구조 그리고 지도의 방법이 모두 문제거리였다. 그리하여 당은 생명 없는 껍데기가 되었고 행정부와 군도 또한 얼이 빠져버렸다. 그 결과 군대는 붕괴되고 사회는 분해되었다』는 것이었다. 1949년 여름 동안 장개석은 다시 중국정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어갔다."(238)


"마침내 공산군이 대륙에서의 지배를 확고히 하자 총통대행 이종인은 1949년 12월에 미국으로 갔고 대만으로 피난간 장개석은 1950년 3월에 국민정부의 총통자리로 되돌아갔다. 장개석은 그의 짧은 은퇴생활에서 얻은 결론 즉, 국민당의 「마비」가 국민당권력 패망의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생각에 따라 행동을 개시하였다. 7월에 광주에서 열린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그는 당개혁안을 제출하였다. 대륙에서의 군사적 파멸이 불러일으킨 수많은 사건들 때문에 1년 뒤에 가서야 이 제안에 따른 행동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대만에서 진성(陳誠)을 위원장으로 하는 고위급 중앙개혁위원회를 당의 총재로서 발족시켰다. 이는 공산당과 타협한 당원 또는 안전을 위해 해외로 도망간 당원의 추방을 포함한 근본적인 당의 정비를 계획하고 관장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불운한 그의 잔여군대에 집중적인 군사훈련과 정치교육을 통해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였다."(238-9)


"1956년에 발행된 자신의 저서 《중국 안의 소련》에서 장개석은 경제적 요인과 공산주의자들의 표리부동에 대해 더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조차 그의 결론은 그가 그 이전에 내린 평가와 일치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우리들의 패배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대륙에 있을 때의 우리의 반공투쟁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은 행정적인 결함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치명적인 타격은 조직, 방법, 정치와 전략에서의 중대한 착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민족적 의지력이 가장 강화되어야 했던 때에 약화된 데에 연유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니 장개석은 그의 정권의 패배원인을 미국정부의 배반, 탄약의 부족, 심지어는 공산군의 힘에서도 구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는 패배의 원인은 국민당정권 그 자체 안에 있었던 것이니, 내전기간 동안의 국민당정권은 단지 부패하고 비능률적이었을 뿐 아니라 사실상 죽어가고 있었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242)


"장개석이 그의 정권의 결점들을 바로잡지 못한 주된 이유는 그가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이 점은 아마도 국가적 지도자로서 주된, 어쩌면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정치적인 문제나 행동상의 문제, 심지어는 경제상의 문제까지도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것으로 본 장개석은 정치제도라는 것이 창조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또한 그가 채택한 정책들은 그의 정권의 약점들의 진정한 원천이었다. 그의 관료들이 그가 만든 정치제도하에서 부패해지고 비능률적이었던 것은 대부분이 외부의 비판과 압력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장개석은 알지 못하였다. 또한 병사가 싸우지 않고 농민들이 자제들을 군대로 보내거나 조세를 내는 데 협력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싸우고 협력할 수 있는 얼마간의 유인동기를 줄 수 있는 정책을 그가 내놓지 못하였기 때문임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1956년까지도 그는 패배의 원인을 여전히 주로 도덕적, 심리적인 용어로 설명하고 있었다."(244-5)


결론 : 폭풍과 혁명들


"손문이 생존하고 있는 동안 군인들은 국민당정권 안에서 비교적 경시된 존재였다. 그러나 장개석 통치하에서는 손문의 상대적 서열─당이 첫째요, 다음이 정부이고, 마지막이 군임─은 거꾸로 뒤집어졌다. 남경에 수도를 정한 뒤로 장개석이 영도하는 군은 국민혁명운동의 가장 지배적인 부분이 되었고 장개석 자신은 정권 내에서 가장 우월한 존재가 되었다." "정치과정에 대한 그의 견해를 보면 그는 매우 전통적이었다. 청(淸)대의 황제처럼 그에게 있어 정치는 우세(엘리트) 분자들끼리의 경쟁이었다. 그러므로 자기의 힘을 근대화하기 위해 그는 한 우세분자집단의 지지를 다른 경쟁적인 우세분자집단의 그것과 경쟁시켜 조종하거나 결합하거나 하였다. 당시의 강대국은 전국민의 중요한 부분을 성공적으로 동원하였지 우세집단만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한 듯싶다. 우세집단 이외에서 지지를 얻어냄으로써 새로운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모택동이 그러한 것처럼─을 이해하지를 못하였다."(248-9)


"물론, 장개석도 민주주의에 대해 자주 말하였고 대중적 지지를 얻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대중적 지지에 대한 그의 개념은, 대중은 병사가 장교의 명령에 복종하듯이 무조건 지도자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개념은 그가 대중정치의 심리적 구조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 개념 때문에 그의 정권에 확고한 사회적 기반을 제공할 수도 있었을 정치적 참여와 경제방안 같은 것을 개발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우세분자들을 주로 한 정치를 떠날 수가 없었고 약한 자들끼리의 균형을 통해 지배한다는 방식에 함몰되어버리고 말았다." "1928~29년의 정권투쟁을 통해 분명해진 것은 장개석은 자립적인 대중조직, 토지개혁, 당내의 민주적 절차, 당에 의한 정부와 군의 지배 등에 대한 (좌파들의) 주장을 침묵시킴으로써 대중적 지지가 있고 유능한 정부가 되기 위한 건전한 기반을 만들 수도 있었을 방안을 배척해버렸다는 것이다."(249)


"공산당은 원시적이고 가난한 오지에서 유력한 정치적, 군사적 운동을 확실히 지탱해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의 근거지에서 보여주었다. 유격전과 대중동원을 발전시켜 나가고 소규모의 공업생산을 발전시켜 나가는 방책을 사용함으로써 공산당은 전쟁이 진행될수록 강화되어갔다." "전쟁이 공산군을 성장하게 하고 강하게 만들었으므로 이 점에서도 국민당에 타격을 주었다. 항일전의 10년 동안 국부군은 공산군을 몰아세워 상당한 손실을 가함으로써 규모가 큰 안정된 작전근거지 획득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1937년 이후부터 국부군의 압력은 줄어들었으며, 공산군은 형식상으로만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서의 유격활동을 통해 전전(戰前)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혁명 조직망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전쟁 동안에 공산당은 조직기술을 발전시켰으며 그 다음의 내전기간 동에 그들에게 도움이 된 군사경험을 획득하였다. 이렇듯 항일전은 국민당정권에 타격을 가하였다."(252-3)


"만약 항일전쟁 후 소련의 만주진공(進攻)이 없었다면 국민정부는 실제보다는 더 오래 지탱했을 것이다." "일단 그 지역을 장악하고 나서 소련은 중국 공산군이 동북(만주)의 여러 성에 침투하는 것을 도와주었고 항복한 일본군이 남긴 대량의 군수물자를 넘겨주었다. 소련은 또한 국민정부가 그곳에서 군사적, 행정적인 힘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지연시켰고 많은 만주의 공업시설을 떼어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소련의 만주점령은 잘해야 국민정부 붕괴의 직접적 원인의 하나일 뿐이다. 기본적인 원인은 보다 깊은 데 있었으니, 그것은 사회적 기반을 상실한 군사독재적 지향이라는 구조적 취약성과 일본과의 전쟁이 가져온 약화요인에 있었다. 이 두 가지 요인 때문에 국민정부는 1945년 당시에 엄청나게 약화되어 있었고, 그 약체성은 국민정부의 정치적 지배권이 제한적으로밖에 행사될 수 없었던 점, 행정의 부패와 무능, 몇 개 파벌끼리의 파멸적인 다툼, 군대에 널리 퍼진 무능과 사기저하 등에 잘 나타나 있었다."(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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