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군벌 전쟁 - 현대 중국을 연 군웅의 천하 쟁탈전 1895~1930
권성욱 지음 / 미지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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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나라가 아무리 약해도 주권이 있는 것과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것은 차이가 있는 법이다. 더구나 군벌들이 폭정을 일삼았으리라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북왕 장쭤린張作霖이다. 그는 제 이름 석 자도 쓰지 못하는 토비 출신이었지만 중국을 병들게 한 아편 밀매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교육의 보급과 인재 양성, 근대산업 육성에 힘써 동북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다. 광둥 군벌 천중밍은 민중 계몽가였다. 옌시산閻錫山은 낙후한 산시성을 발전시켜 전국에서 손꼽히는 '모범 성'으로 만들었다. 윈난 군벌 룽윈龍雲은 민주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우페이푸는 대표적인 반일 민족주의자였다. 많은 군벌 지도자들이 젊은 시절 쑨원의 동맹회에 가입했으며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의 선봉장이 되었다. 이들은 도덕군자도 아니었지만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정치 모리배였던 것도 아니었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로 얘기할 수 없는 다양한 얼굴을 가진 현실 정치인들이었다."(20-1)


"군벌 내전이 그다지 파괴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첫째로 이념이나 민족 갈등 같은 증오심에서 비롯된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를 완전히 말살할 요량으로 죽기 살기로 싸울 이유가 없었다. 또한 열강은 1차대전이 끝난 뒤 중국에 무기를 팔아먹는 대신 군축 분위기와 세력균형을 위해 무기 금수 조치를 내렸다. 유럽 전선에서 악명을 떨친 독가스와 잠수함, 대구경 중포, 전차 같은 최신 무기는 중국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또 다른 이유는 중국이 전통적으로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이면서 지방 권력 또한 강력했기 때문이다. 〈산은 높고 황제는 멀다山高黃帝遠〉는 오랜 격언은 중국의 광대한 영토와 막강한 지방 권력을 상징한다. 향촌 정부들은 명목상 중앙에서 파견되는 수령이 절대 권력자이지만 실권은 지역의 존경받는 엘리트들이 쥐고 있었다. 중앙 정권의 교체는 단지 지배자가 A에서 B로 바뀌는 것에 불과했다. 국가는 일반 민중의 생활 방식에 쓸데없이 관여하거나 자유를 제약하는 일이 없었다."(22)


1부 자금성의 황혼


"20세기 중국사에서 위안스카이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신해혁명 이후 장제스가 통일할 때까지 치열하게 벌어진 군벌 내전은 위안스카이가 남겨놓은 유산이었기 때문이다." "위안스카이가 출세의 기회를 잡은 것은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 덕분이었다. 임오군란은 엄연히 조선 내부의 문제였다. 그런데 양무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종주국이라는 자신감을 어느 정도 회복한 청조는 오랫동안 번국으로 취급했던 조선에서 병란이 일어나자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 땅에 떨어진 위신을 되찾을 기회로 여겼다." "위안스카이는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군인으로서의 역량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총명한 두뇌와 사교적인 성격,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재빨리 진압하고 조선을 청나라에 종속시킨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이었다. 고종과 조선의 대신들은 기민하고 능수능란한 위안스카이 앞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73-4)


"1895년 12월 16일 청나라 최초의 신식 군대인 '신건육군新建陸軍'이 창설되었다. 신건육군 창설에는 위안스카이 말고도 회군 출신 간부들과 1885년 북양대신 리홍장이 설립한 중국 최초의 서구식 군사학교인 톈진의 북양무비학당 교관과 생도들이 대거 참여했기에 '북양신군北洋新軍'이라고도 일컬었다." "신해혁명으로 청이 무너진 뒤 중국의 권력은 이들에게 넘어갔다. 위안스카이를 정점으로 하는 거대한 군벌 집단을 '북양군벌'이라고 한다. 이들은 베이징 정부와 각 성의 독군督軍(군사장관)이 되어 군 통수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위안스카이의 참모장이던 쉬스창과 차오쿤은 각각 2대 대총통과 3대 대총통을 지냈으며, 돤치루이는 국무총리를 네 번, 임시 집정(대총통)을 한 번 역임했다. 1915년 당시 군권을 쥔 22명의 독군 중에서 12명이 위안스카이가 직접 키워낸 북양군벌 출신이었다. 나머지 7명 역시 위안스키아의 옛 부하이거나 그의 추천으로 출세했다. 위안스카이와 상관없는 사람은 겨우 3명에 불과했다."(81-3)


"신해혁명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쪽은 쑨원의 혁명파가 아니라 량치차오의 입헌파였다. 혁명파 세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고, 그나마 대부분은 봉기가 일어나기도 전에 죽거나 도망쳐버렸기 때문이다. 우창봉기에서 우두머리가 없는 혁명군 병사들을 수습하고 리위안훙을 설득하여 혁명군의 수장으로 추대한 것도 입헌파인 탕화룽이었다. 만약 입헌파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다면 우창봉기는 한낱 병변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입헌파도 혁명파가 앞장서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이 먼저 조정을 향해 총을 겨누지는 못했을 것이다. 혁명파와 입헌파 어느 한쪽의 역량만으로 청조를 무너뜨리기는 불가능했다. 쑨원과 량치차오 두 지도자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버리지 못한 채 손잡기를 거부했지만, 청조를 무너뜨리고 공화제를 실현한 것은 혁명파와 입헌파의 연합이었다." "그러나 혁명에 아무런 이해도 없었던 위안스카이가 신해혁명을 기회 삼아 권력을 찬탈했다. 그의 정권은 청조의 연장선에 불과했다."(180-1)


"어째서 쑨원은 (충분한 준비도 없이) 그토록 혁명에 매달렸는가. 임시 대총통 자리를 순순히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했다는 점에서 '제2의 홍슈취안'이 되겠다는 야심이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만약 장제스나 마오쩌둥이라면 남에게 내주느니 마지막까지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이려 했을 것이다. 쑨원은 훨씬 담백했다. 문제는 권력을 향한 욕심이 아니라 만주족을 향한 증오심이었다. 야만스러운 오랑캐의 지배를 받는 한족 백성을 자신이 해방하겠다는 영웅 심리에 가까웠다. 그가 말하는 공화제란 청조를 타도하기 위한 명분이지 목적은 아니었다. 공화제를 제대로 이해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도 없었다. '반만흥한'을 외치던 쑨원은 신해혁명 뒤에는 '오족공화'로 말을 바꾸었다. 그 속내는 청제국 시절의 판도를 유지하고 만주족을 포함한 소수민족들의 분리 독립을 억압하기 위함이었다. 소수민족들의 자결권이나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182)


2부 짧았던 공화정의 꿈


"1912년 12월부터 1913년 2월까지 제헌국회의 수립을 위해 전국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선거이자 의회민주주의의 시작이었다. 쑹자오런은 선거를 앞두고 중국동맹회와 여러 정치 단체를 규합해 국민당을 창설했다. 국민당 외에 리위안훙을 수장으로 하는 공화당, 량치차오를 비롯한 입헌파가 중심이 된 민주당 등 여러 정당이 경쟁을 벌였다. 결과는 국민당의 압승이었다. 중의원 596석 중 269석을, 참의원 274석 중 132석을 국민당이 차지하면서 제1당의 자리에 올랐다." "전국 각지를 돌면서 위안스카이 정권의 독선적인 태도를 비판하던 쑹자오런은 3월 20일 밤 베이징행 열차를 타기 위해 상하이역 플랫폼에서 기다리다가 저격을 받아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을 조사한 장쑤성 정부는 암살의 배후에 위안스카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철도 건설을 위한 차관을 얻으려고 일본을 방문 중이던 쑨원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제야 자신이 위안스카이에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25-7)


# 쑹자오런의 국민당은 위안스카이에게 해산당하고 몇 년 뒤 쑨원이 국민당을 새로 창설했기 때문에, 이름만 같을 뿐 같은 정당은 아니다.


# 쑹자오런의 암살 배후에 위안스카이가 있다는 정황 증거만 있을 뿐, 분명한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쑹자오런 암살로 촉발된) 2차 혁명은 고작 한 달 보름여 만에 참담하게 끝났다. 군사력에서도 열세했지만 신해혁명을 이끌었던 향신 계층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향신 계층은 2차 혁명을 이데올로기나 공화정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권력 다툼으로 여겼다." "신해혁명이 쑨원과 위안스카이가 손잡고 청조를 몰락시킨 사건이라면, 2차 혁명은 두 사람이 신해혁명의 연장선에서 '천하'라는 전리품을 놓고 벌인 투쟁이었다." "일본으로 망명한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혁명의 배신자로 규정하고 흩어진 동지들을 모아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참담한 실패를 경험한 쑨원은 스스로를 반성하고 와신상담하는 대신 한층 독선적으로 변했다. 그는 2차 혁명의 실패가 황싱의 우유부단함과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동지들 탓이라며 책임을 떠넘겼다. 쑨원의 이런 태도는 사람들을 더욱 실망시켰을 뿐 아니라, 오랜 맹우였던 황싱마저 곁을 떠나게 했다."(242-7)


"위안스카이는 대총통이 되자 본색을 드러냈다. 1914년 1월 10일에는 참의원과 중의원을 해산하고, 2월 28일에는 지방의 성 의회마저 해산했다." "5월 1일, 중화민국 신약법新約法이 공포되었다. 절차대로라면 국회에서 쑹자오런이 기초했던 약법을 대신하여 정식으로 헌법을 제정해야 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국회를 해산한 다음 어용 세력을 끌어모아서 약법의 내용을 일부 수정한 뒤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 신약법은 의원내각제를 실시하고 대총통의 권한을 제한했던 구약법과 달리 위안스카이에게 선전포고와 강화조약 체결 등 외교대권과 입법권, 모든 문무 관료와 외교관 임명권, 긴급명령권 등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위안스카이는 중국의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위는 취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방의 군사령관들은 중앙의 혼란을 이용해 명목으로만 중앙에 복종할 뿐이었다. 이들은 자체적인 무력을 배경으로 현지 향신과 상인·지주 계층과 결탁하여 독자 세력을 구축했다."(250-1)


"1913년 9월 27일, 쑨원은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조직했다. 중국동맹회의 뒤를 잇는 새로운 혁명 정당이었다." "그러나 중화혁명당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혁명을 향한 의지가 분명하면서 자기 목숨을 걸 만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대부분은 쑨원 옆에 붙어 있으면 운 좋게 출세 기회를 잡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건달들이었다. 무위도식하고 끼리끼리 모여 온종일 잡담이나 하는 일이 전부였다. 또한 파벌을 만들어 중상모략을 일삼았고, 심지어 쑨원이 무능하다면서 비난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런 한심스러운 행태는 쑨원이 자초한 결과였다. 역량이나 자질, 혁명 의식은 따지지 않은 채 맹목적인 충성심만 요구했기 때문이다. 또한 신해혁명 이전부터 참여한 자와 신해혁명 이후에 참여한 자를 구분하고 신분을 나누듯 차별 대우하여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샀다. 이런 모습은 중화혁명당이 국민당으로 바뀐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으며,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뒤에야 어느 정도 체계를 잡게 된다."(280-6)


"그 위세가 황제와 다르지 않았던 위안스카이가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적인 원인은 황제가 되어 옥좌에 앉으려 했기 때문이다. 차이어가 윈난성에서 거병했을 때 명분은 '호국護國'이었다. '호국'이란 국체, 즉 공화제를 지키겠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의 반란이 중국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자 위안스카이는 민심의 이반을 깨닫고 백기를 들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군주제냐 때문이 아니라 위안스카이 정권이 청조만큼이나 무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재정 위기가 있었다. 위안스카이가 물려받은 중국은 파산 직전의 나라였다." "위안스카이는 피를 흘리지 않고 권력을 넘겨받았지만, 그 대가로 9억 냥이나 되는 청조의 채무까지 고스란히 넘겨받았다." "텅 빈 국고를 물려받은 그는 맨 먼저 재정 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지방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면서 실패로 끝났다. 위안스카이의 힘으로도 태평천국의 난 이래 몇십 년 동안 고착화한 지방의 독립성을 누르기는 어려웠다."(336-7)


"위안스카이는 부도 직전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외국에서 더 많은 차관을 빌리고 국채를 남발했다. 그러나 대부분 청조가 남긴 외채를 상환하는 데 쓰였고, 재정의 건실화나 근대화에 쓸 수 있는 돈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위안스카이는 최선을 다했지만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치부해야 할까. 어떤 이유로건 그는 청조의 행태를 답습하여 자신의 무능함을 증명한 꼴이었다. 청조가 파멸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으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셈이다. 위기를 자력으로 극복할 능력이 없는 그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대신 보수 반동화의 길을 걸었다. 민중의 지지를 얻기보다 권모술수로 쑹자오런을 비롯한 반대파를 암살하거나 탄압했다. 군주제의 부활은 추락하는 자신의 권위를 만회하기 위한 마지막 발버둥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이권을 일본에 넘기고 국고를 흥청망청 낭비한 모습은 정치적 자살행위였다. 위안스카이가 보여주는 말기적인 행텡 민심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338-9)


"위안스카이의 죽음으로 중국에는 잠시나마 평화가 왔다. 윈난성을 비롯해 독립을 선언했던 여러 성이 독립을 취소하고 내전 중지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호국군 또한 군비 부족과 병참난으로 더는 싸울 여력이 없었다. 남북 합의가 성사되면서 부총통 리위안훙이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어 새로운 대총통이 되었다." "('북양 3걸'이라 일컬어지던) 펑궈장은 부총통에, 돤치루이는 국무총리에 올랐다. 왕스전은 육군총장 겸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북양군의 총수가 됐지만 정치적인 야욕이 없기에 권력의 중심과는 멀었다. 이들이 사리사욕을 버리고 리위안훙을 보필하는 데 힘을 모았다면 중국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리라. 그러나 펑궈장과 돤치루이는 운 좋게 벼락출세한 리위안훙을 대총통감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야말로 그 자리에 어울리는 그릇이라고 생각했다. 돤치루이와 펑궈장은 서로 견제하면서 기회를 보아 상대를 제거하고 자신이 대총통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342-7)


3부 군웅, 사슴을 좇다


"자금성 하늘에서 비행기가 푸이의 코앞에 폭탄을 떨어뜨린 다음 날인 1917년 7월 6일, 무력으로 북양군벌을 정벌하기로 결심한 쑨원은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에서 1,900킬로미터나 떨어진 중국 최남단의 광저우로 향했다. 광저우는 쑨원이 태어난 고향이자 혁명의 오랜 근거지이기도 했다." "7월 17일 광저우에 도착한 쑨원 일행은 비상 국회를 소집했다. 100여 명의 국회의원들이 참석했다. 그는 국회를 해산한 베이징 정부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이야말로 중화민국의 정통이라고 선언했다. 9월 10일, 중화민국 호법 정부가 수립되고 쑨원을 대원수로 추대했다." "쑨원의 호소에 남방 5성의 비非북양계 군벌들이 일제히 호응했다. 중국 역사에서는 '호법전쟁護法戰爭' 또는 '호법운동護法運動'이라고 한다. 쑨원에게는 앞으로 10년에 걸쳐 이어질 첫 번째 북벌전쟁이기도 했다." "베이징의 북양군벌과 광저우의 서남군벌이 맞서는 남북 대치가 다시 시작되었다."(372-3)


"전세는 갈수록 북벌군에게 불리해졌다. 게다가 루룽팅의 배신으로 쑨원은 궁지에 몰렸다. 탕지야오도 북벌 중지와 쑨원 하야를 요구하고 나섰다. 몇 달 전만 해도 쑨원을 대원수로 추대했던 이들이 이제는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진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면서 끌어내리려 했다." "루룽팅과 탕지야오는 일부 국회의원들을 매수해 광저우 군정부를 개조하라고 지시했다. 1918년 5월 20일, 비상 국회는 호법전쟁 취소를 결정했다. 충격을 받은 쑨원은 실망감을 드러내면서 대원수 자리를 내던졌다." "쑨원이 쫓겨나자 돤치루이도 남벌을 중지하고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국회를 다시 소집하고 대총통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돤치루이는 펑궈장을 쫓아내고 쉬스창을 그 자리에 앉힐 생각이었다. 두 번째는 1차대전 참전이었다. 유럽 전쟁은 이미 막바지였다. 그러나 돤치루이는 참전을 빌미로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 다른 군벌들을 제압할 생각이었다."(385-9)


"호법 전쟁이 끝나고 남북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우페이푸를 비롯해 후난성으로 출동한 북양군은 계속 현지에 남아 있었다. 돤치루이는 즈리파를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으로 보내 세력을 약화할 속셈이었다. 즈리파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그중에서도 우페이푸는 결단력과 정치적 감각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다른 즈리파 독군들을 규합하여 펑궈장이 죽은 뒤 자신의 상관인 차오쿤을 새로운 우두머리로 추대했다. 우페이푸의 공작은 장쭤린에게도 향했다. 장쭤린은 돤치루이가 자신의 영토인 동북에까지 손을 뻗치자 우페이푸의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1920년 4월 9일, 즈리파와 펑톈파가 비밀리에 손잡고 거대한 반反돤치루이 동맹을 맺었다. 즈리성, 장쑤성, 후베이성, 장시성, 허난성, 펑톈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 이른바 '8성 동맹'이었다. 5월 25일, 우페이푸는 드디어 칼을 뽑아들었다. 그는 불복종을 선언하고 군대를 되돌려 북상에 나섰다. 돤치루이와의 일전을 각오한 것이다."(411-3)


"7월 18일, 대총통 쉬스창에게 정전을 요청한 돤치루이는 다음날 국무총리를 사직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우페이푸는 이번 기회에 안후이파를 철저하게 몰락시킬 생각이었지만 뜻밖에도 장쭤린의 반대에 부딪혔다. 장쭤린은 돤치루이를 끌어내리기 위해 즈리파와 손을 잡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즈리파 편은 아니었다. 즈리파를 견제하려면 안후이파를 살려둘 필요가 있었다." "안즈전쟁은 북양군이 둘로 나뉜 채 10만 명 이상이 투입된 전례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전투는 7월 14일부터 18일까지 나흘 만에 싱겁게 끝났다. 전장은 베이징 주변으로 국한되었다." "10만명 가운데 실제로 전장에 투입된 병력은 일부였고 대부분 대치만 하다가 승패가 결정 나자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충성심이 없는 병사들은 죽기로 싸우는 대신 조금만 불리해도 흩어지거나 투항하기 일쑤였다." "이때만 해도 중국군은 여전히 서툴고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안즈전쟁은 앞으로 시작될 진짜 싸움의 서곡일 뿐이었다."(430-1)


"안후이 정권이 무너지고 즈리와 펑톈의 연합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돤치루이를 타도하기 위한 잠깐의 합종연횡일 뿐, 목적을 달성한 이상 오래갈 리 없었다. 중국의 판도가 바뀌면서 요직을 놓고 두 세력은 서로 자파 사람을 심으려고 으르렁거렸다." "장쭤린은 즈리파 와해를 위한 포석을 하나씩 마련해나갔다. 첫 번째는 안후이파와의 동맹이었다. 장쭤린은 돤치루이에게 은밀히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했다. 돤치루이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반反즈리 비밀 동맹을 맺었다." "두 번째 포석은 광저우 군정부의 대원수 쑨원과의 동맹이었다." "북양군벌이 공화정을 파괴했다 하여 광정우에서 혁명정부를 세우고 호법전쟁을 일으켰던 쑨원이 이제 와서 북양군벌과 손을 잡는 것은 엄연한 모순이었다. 그러나 삼각동맹은 완성되었다." "수없이 실패를 반복하고도 새로운 방법을 찾는 대신 구태의연하게 군벌들과의 야합에 매달리는 것이 쑨원의 한계였다."(435-40)


"안즈전쟁이 끝난 지 2년 만에 즈리파와 펑톈파의 연합은 끝장났다. 병력과 무기에서는 일본의 후원을 받는 펑톈군이 훨씬 우세했다. 그러나 제27사단을 비롯해 대부분 마적을 개편한 부대였다. 규율이 형편없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다. 장쭤샹, 장징후이 등 주요 지휘관들도 하나같이 장쭤린이 마적 시절부터 호형호제하던 자들로 매우 무능한 자들이었다." "즈리군은 수적으로 약간 열세하고 장비도 매우 열악했지만 규율과 실전 경험에서는 펑톈군을 압도했다. 안즈전쟁에서 안후이군을 격파하고 승리햇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우페이푸가 보기에 장징후이의 서로군이 펑톈군의 주력부대였다. 장징후이만 격파한다면 나머지 펑톈군은 스스로 무너질 것이었다." "5월 3일 벌어진 격전에서 서로군이 붕괴했다. 장쭤샹의 동로군도 즈리군의 총공격으로 무너졌다. 장쭤린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 4일, 그는 전군에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개전 9일 만이었다."(497-503)


"20세기 초반 제정러시아는 러일전쟁의 전비와 국내 근대화를 명목으로 해외에서 막대한 빚을 끌어다 썼다." "채무액은 1차대전을 거치면서 눈덩이처럼 불었다. 1914년부터 1917년까지 4년 동안의 채무는 33억 8,500만 파운드에 달하여 이자만도 연간 세입을 넘어설 정도였다. 천문학적인 빚이 결국 차르 정권을 붕괴시킨 셈이지만, 제정러시아를 무너뜨린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는 한 푼도 갚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제정러시아의 채무는 대부분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일본에서 빌렸다. 이들이 당장 간섭전쟁에 나선 것도 당연했다. 남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기 권리만 찾겠다는 것이 소련식 논리였다. 소련은 열강의 보복에 대항할 무력이 있지만 중국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련이 떠드는 '민족자결의 원칙'이란 볼셰비키 혁명을 다른 나라에 전파하여 전 세계를 공산화하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 또한 전형적인 제국주의 열강이었으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짓밟기 일쑤였다."(529)


"1920년 5월, 시베리아 구위원회 산하 코민테른 극동국 서기였던 보이틴스키 부부가 베이징으로 왔다. 그의 임무는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중국공산당을 창설하는 일이었다. 보이틴스키는 리다자오·천두슈와 만나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중국 최초의 공산당 소조직을 설립했다. 천두슈가 중국 최초의 공산당 서기가 되었다." "1년 뒤인 1921년 7월 23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망지로 106호에서 전국 6개 도시의 대표 12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참석한 사람들이 앞으로 중국공산당을 이끌고 나갈 지도자들이었다. 첫 모임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자신들의 앞날이 얼마나 파란만장할지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4명이 처형당했고, 7명이 국민당이나 친일 매국노로 전향했다. 바오후이썽까지 포함해 13명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훗날 개국공신이 되고 승리의 열매를 맛본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다. 한 사람이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을 지낸 둥비우, 또 한 사람은 마오쩌둥이었다."(530-1)


"1923년 1월 26일, 상하이에서 '쑨원-요페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소련 특사) 요페는 결단코 중국에서 공산주의혁명을 하지 않을 것이며 쑨원의 삼민주의에 복종하여 중국 혁명을 후원할 것을 약속했다. 소련은 순수하게 쑨원의 혁명전쟁을 도울 뿐, 어떤 내정간섭도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또한 제정러시아 시절 중국에서 강탈한 모든 이권의 포기를 약속했다. 요페가 요구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자 쑨원은 '연소용공聯蘇容共', 소련과 손잡고 중국공산당을 포용하여 중국 혁명을 완수한다는 데 합의했다." "스탈린은 대중 노선을 놓고 국공합작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 반면, 트로츠키는 국민당은 유산계급의 정당이므로 공산당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서 합작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코민테른이 손을 들어준 쪽은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중국의 적화를 자신의 정치적 업적으로 삼아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할 속셈으로 쑨원을 아낌없이 후원했다."(537-9)


"1924년 6월 16일, 국민당 육군군관학교(황푸군관학교)가 문을 열었다.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를 수립하면서 소련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받아들여 소련군의 제도와 교리를 그대로 수용했다. 최고 사령부와 각 군 사령부에는 국민당 대표를 임명하고 사단 단위로 정치부를 두었다. 또한 연대부터 대대에 이르기까지 정치공작지도원을 배치했다. 정치장교들은 지휘권을 견제하고 삼민주의 사상 교육을 맡았다. 원칙적으로 지휘관이 내리는 모든 명령은 정치장교의 서명이 없을 경우 효력이 없었다. 또한 많은 장교들이 국민당에 자발적으로 입당하고 충성과 복종을 맹세했다. 정치장교 제도는 국민당 정권이 군벌 연합군을 혁명군을 개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북벌군은 군벌 군대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며 혁명군이라는 이름은 허울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 점이 쑨원의 호법전쟁 때와 달리 장제스가 북양군벌들을 격파하고 북벌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552)


"제2차 펑즈전쟁(1924년 9월 15일~11월 8일)에서 즈리군과 펑톈군은 산하이관을 무대로 악전고투를 벌였으나, 사전에 모의한 펑위샹의 베이징정변이 성공하면서 승부의 추는 급속히 펑톈군 쪽으로 기울었다. 안즈전쟁 이후 4년 3개월 만에 장쭤린의 대군은 베이징을 향해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우페이푸의 몰락은 위안스키이가 남겨놓은 북양군벌이 시대가 종지부를 찍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장쭤린과 펑위샹은 명목상 북양파로 간주되었지만 엄밀히 말해서 위안스카이가 직접 키워낸 직계는 아니었다. 북양무비학당 출신도 아니었다. 이들은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자기 힘으로 일어선 자들이었다." "펑위샹의 다음 칼끝이 향한 곳은 자금성이었다. 자금성에는 청나라 12대 황제인 선통제 푸이와 만주족 귀족들이 살고 있었다." "펑위샹은 공화제를 실시한 지 10년도 더 지났는데 구시대의 유물인 푸이가 아직도 자금성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엄포를 놓았다." "푸이는 분개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614-6)


"1925년 11월 22일, 펑톈군 제일의 명장이자 최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즈리평원에 주둔한 궈쑹링이 장쭤린 타도의 기치를 올렸다. '반펑톈전쟁反奉戰爭'이었다. 11월 24일부터 12월 24일까지 한 달 동안 중국 대륙을 뒤흔든 궈쑹링의 '반펑전쟁'은 허무하게 끝났다. 비록 패배로 끝났지만 한때 장쭤린의 심장부인 펑톈을 눈앞에 두었을 만큼 궈쑹링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우페이푸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펑톈군은 연전연패하여 달아났으며, 펑톈 서쪽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장쭤린조차 당황하여 다롄으로 달아나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려 했을 정도였다. 관동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동북의 주인이 장쭤린에서 궈쑹린으로 바뀌고, 그 뒤의 중국 역사 또한 전혀 다른 모습으로 흘러갔을지 모른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뒤 중공 정권은 궈쑹링에게 민족주의 이미지를 덧씌워 〈장쭤린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패한 것〉이라면서 성대한 추모식을 치러주고 그의 묘를 펑톈 교외에 안장했다."(664-5)


"궈쑹링의 반란이 난세에 흔히 반복되던 하극상과 다르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이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첫째,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중국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그동안 일본은 21개조 조약이라든가 니시하라 차관, 산둥 출병 등 막후에서 조종했을 뿐 무력으로 개입한 적은 없었다. 열강의 간섭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펑전쟁에서 관동군의 개입은 나쁜 선례를 남겼다. 또한 그전까지 장쭤린 정권은 일본의 간섭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아도 일본과 비교적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발등의 불을 끄는 데 급급한 나머지 장쭤린은 일본의 강압적인 요구를 받아들였고, '일본-펑톈 밀약'을 맺으면서 예속적인 위치로 전락했다. 이런 배경은 그 뒤 황구툰사건과 만주사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장쭤린이 일본과 결탁했기 때문에 궈쑹링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의 반란이 장쭤린을 궁지로 내몰아 일본과의 밀착을 초래하여 결과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가속화한 셈이다."(666)


"둘째, 장제스의 북벌전쟁을 촉발한 계기가 되었다. 장쭤린과 궈쑹링 두 사람의 싸움은 펑위샹과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나중에 옌시산·우페이푸까지 개입하면서 북방 전체로 확산되었다. 장제스는 자신의 일기에 〈북방의 대소 군벌들이 스스로 무너지고 있다. 구시대 붕괴의 조짐이 점점 확실해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북방 군벌들의 분열상을 보면서 북벌 성공에 확신을 품었다. 또한 관동군의 개입은 중국 민중의 격렬한 반감을 샀고, 장쭤린을 '일본의 주구'로 여기게 했다. 이때부터 중국 내전은 더 이상 위안스카이의 유산인 북양군벌들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혁명'과 '반혁명'의 전쟁이 되었다." "중원에서 장제스와 다른 군벌들이 전쟁을 벌이자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아버지의 꿈을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산하이관을 넘었다. 한때 황허 이북의 광대한 지역을 차지했지만 곧 다른 군벌들의 반격을 받으면서 연전연패했다. 그 와중에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하루아침에 모든 기반을 잃고 몰락했다."(666-7)


4부 북벌전쟁


"한편 쑨원이 죽은 뒤 국민정부는 크게 세 개의 파벌, 즉 처음부터 국공합작을 반대한 후한민을 중심으로 하는 반공 우파, 국공합작에 찬성한 랴오중카이의 용공 좌파 그리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회색분자 왕징웨이파로 나뉘었다. 그러나 국공합작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각자의 복잡한 이해관계에 따라 첨예한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보로딘은 왕징웨이를 좌우하면서 눈에 거슬리는 우파 간부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이들의 빈자리는 공산당원들이 차지했다. 1923년 1월 23일, '쑨원-요페 선언'에 따라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뒤 겨우 1년 반, 쑨원이 죽은 지 7개월 만에 국민정부의 중추는 사실상 소련 손으로 넘어갔다. 국공합작은 양당이 대등한 지위에서 합당한 것이 아니라 국민당이 공산당을 하부 조직으로 포용한 것이었다. 따라서 공산당원들은 마땅히 국민당의 강령에 절대 복종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형국이 되면서 오히려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잡아먹힐 판이었다."(707-9)


"과연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인가. 열쇠를 쥔 사람은 장제스였다. 소련과 공산당은 마음만 먹으면 장제스를 끌어내릴 수 있었다. 과격한 혁명가 트로츠키는 장제스를 쫓아내거나 아예 국공합작을 끝장내고 공산당을 지원해 광저우를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반대했다. 국공합작의 총괄을 맡은 스탈린은 그동안 많은 자금과 물자를 쏟아부었는데 이렇다 할 성과 없이 합작이 깨진다면 자기 체면이 깎이는 것은 물론 실패의 책임을 추궁받을 수 있었다. 그는 반드시 국공합작을 유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다소 양보할 필요도 있다고 강조했다. 당내의 주도권은 이미 스탈린에게 넘어갔고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트로츠키는 권력투쟁에서 거의 밀려나 있었다. 지도부는 실세인 스탈린의 손을 들어주었다.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에게 국민당에 잔류하되 우파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일단 국민당 지도부에서 물러나 후일을 기약하라고 지시했다. 공산당은 내심 불만을 품었지만 거역할 수 없었다."(720)


"1926년 7월 9일,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추대받아 북벌군의 지휘봉을 들었다. 프랑스로 달아난 왕징웨이를 대신하여 여러 원로에 의한 집단지도체제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실세는 군권을 장악한 장제스였다. 장제스는 쑨원의 후계자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 공산당 세력은 크게 약해졌고 국민당에 절대 복종하기로 맹세했다. 벼랑 끝에 몰렸던 장제스에게는 실로 회심의 역전이었다." "장제스가 공산당과 정면 승부를 벌이지 않은 이유는 아직은 그만한 힘이 없는 데다, 그럴 경우 소련의 원조 또한 그날로 끝나기 때문이었다. 만약 천중밍처럼 광저우를 자기 지반으로 삼아서 당장의 호의호식을 누리는 데 만족하려 했다면 소련과 손을 끊는 데 아무런 미련이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북벌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중국을 통일해서 군벌 할거를 끝내고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 혁명을 완성하는 일은 쑨원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한 원대한 꿈이었다."(722)


"북방에서 3개월의 혈전 끝에 국민군을 격파한 우페이푸는 승리에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비로소 북벌군이 만만치 않으며,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페이푸는 주력부대를 이끌고 우한으로 향했다." "그러나 〈패배를 모른다〉던 상승장군 우페이푸의 명성도 북벌군의 기세 앞에서 무색해졌다. 10월 10일, 북벌군은 우한 3진의 점령과 함께 후베이성 서부 지역 공격에도 나서 샤시·이창·징저우 등을 점령했다. 우페이푸의 주력부대는 거의 소멸했다." "한편, 9월 17일 소련에서 돌아온 펑위샹은 국민혁명군의 가입과 혁명전쟁을 선언했다. 〈우리는 쑨원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국민혁명과 삼민주의를 실천한다.〉 〈간쑤성을 지키고 샨시성을 원조하며 허난성을 도모한다.〉 이것이 '우위안 선언'이다. 광저우와 함께 우위안에도 혁명의 상징인 청천백일의 깃발이 올랐다. 국민군은 '국민혁명군 연군(국민연군國民聯軍)'이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며, 펑위샹이 총사령관으로 취임했다."(746-56)


"북벌전쟁은 단순한 통일전쟁이 아니라 혁명전쟁이었다. 민중의 지지를 얻고 민중과 손잡는 일은 북벌전쟁에 이데올로기적인 정당성을 부여했다." "농민운동은 국공합작의 최대 성과였다. 공산당이 농민들을 조직하고 이들의 협조를 끌어내지 못했다면 북벌군은 소련이 제공하는 약간의 원조에만 의존하여 10만 명이 채 안되는 병력으로 훨씬 어려운 싸움을 벌여야 했을 것이다. 쑨원을 비롯하여 봉건적인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있던 국민당의 엘리트 간부들은 여전히 민중의 역량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공산당 지도부 중에서도 농민의 잠재성에 주목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그중 한 사람이 마오쩌둥이었다. 국공합작이 깨진 뒤 지하로 숨어든 다른 간부들은 예전에 혁명파가 그러했던 것처럼 무장 반란과 비밀 활동에 하릴없이 매달려 큰 희생만 치렀다. 반면 마오쩌둥은 농촌을 근거지로 농민혁명에 본격적으로 나섰으며, 토벌군을 몇 번이나 격파함으로써 그의 신화를 시작했다."(804-8)


"그러나 중국의 지주계층은 유럽의 귀족 같은 특권계층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국 농촌의 진짜 문제는 토지 집중이 아니라 인구는 넘쳐나는 데 비해 잉여 토지가 거의 없고 생산성이 너무 낮다는 데 있었다. 경작지 대비 인구 밀집도는 유럽의 3~4배나 되었다. 얼마 안되는 대지주한테서 땅을 빼앗아 많은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준다 한들 고양이 이마만 한 땅이 조금 더 늘어나는 정도였다. 게다가 중국에는 땅이 전혀 없는 농민과 실업자, 다른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유랑민들이 넘쳐났다. 토지를 재분배한다면 이들에게도 똑같이 토지를 나눠주어야 하는가. 그럴 경우 농촌 개혁은커녕 전통적인 농촌공동체를 무너뜨릴 뿐 아니라, 전체 농민들의 삶이 하향 평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 간부들은 농촌의 현실을 정확하게 알고 다양한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자신들의 편향된 선입관과 의욕만 앞세워 〈계급투쟁으로 농촌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달려들었다. 그 방법은 설득과 타협이 아닌 강압과 폭력이었다."(810-3)


"프랑스군의 대게릴라전 전문가이자 1차 인도차이나전쟁과 알제리전쟁에 참전했던 다비드 갈륄라 중령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주민들의 지지를 얻을 때는 조용하고 수동적인 다수의 어정쩡한 지지보다 오히려 수는 적어도 가장 적극적이면서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소수의 강력한 지지가 낫다〉고 주장했다. 그것을 실제로 증명해 보인 사람이 마오쩌둥이었다. 공산당은 농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소 지주와 자영농이 아니라 전체의 10퍼센트에 불과한 고농(당시 약 3,000만 명)을 지지 세력으로 삼았다. 내전에 승리한 뒤 이들을 무장 전위대로 앞세워 중국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토지개혁을 강행했다. 그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처형당했다. 현장 간부들은 자신의 실적을 높이는 데 급급하여 경쟁적으로 토지몰수에 나섰다. 중농과 빈농까지 지주라고 몰아붙여서 재산을 함부로 빼앗는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토지개혁은 중국 전체를 전례 없는 대혼란과 보복의 소용돌이에 빠뜨렸다."(817-8)


# 고농雇農 : 자기 땅이 전혀 없어서 지주나 부농에게 고용살이하는 농민


"북벌군이 예상 밖의 선전을 펼치면서 상하이와 난징으로 육박하자 공산당 지도자 천두슈는 급히 상하이봉기를 지시했다. 상하이가 장제스의 수중에 넘어간다면 가뜩이나 국민정부가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의) 우한과 (장제스의) 난창으로 양분된 상황에서 그의 위세가 한층 높아지고 우한 측이 불리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3월 21일 새벽, 드디어 행동에 나섰다. 자베이와 훙커우, 푸둥 등 상하이 주요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일제히 봉기했다. 봉기에 참여한 노동자 수는 30만 명에 달했다. 노동자들은 시가지의 주요 거점을 신속히 장악했다. 다음날 상하이 소비에트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난징에서도 북벌군이 세 방향으로 포위해오자, 이제는 잔여 병력을 최대한 창장 이북으로 철수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창장을 천연의 방어선으로 삼아 북벌군의 북상을 저지할 생각이었다. 언젠가 난징을 되찾을 기회가 오리라. 쑨촨팡은 후일을 기약하며 난징을 떠났다. 3월 23일, 난징은 함락되었다."(840-1)


"북벌군이 난징과 상하이로 육박하고 있던 3월 10일부터 17일까지 우한에서 국민당 제2차 3중 전국대회가 개최되었다. 일주일에 걸친 회의는 장제스에 대한 성토장이었다." "(공산당은) 군을 당에 복속시켜 장제스의 지위와 권한을 낮추고 당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기를 요구했다. 한마디로 장제스에게 백기를 들거나 아니면 군권을 내놓고 물러나라는 소리였다." "4월 1일, 우한 정부는 장제스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서 해임한다고 기습적으로 발표했다." "벼랑 끝에 몰린 장제스는 무력으로 공산당을 끝장내기로 결심했다. 4월 9일, 상하이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는 이미 총사령관에서 파면되어 아무 직위도 없었기에 함부로 병력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엄연한 반란이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느 한쪽이 굴복하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앞으로 20년에 걸쳐 이어질, 국공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서막이었다."(844-51)


"상하이정변이 알려지자 우한 정부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우한 정부의 새로운 수장이 된 왕징웨이는 닷새나 지난 4월 17일에야 장제스를 국민당에서 영구 제명할 것을 선언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나 때늦은 엄포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장제스는 코웃음 치면서 상하이의 우파와 협의하여 우한에 대항하는 신정부 수립에 착수했다. 새로운 수도는 신해혁명 당시 한때 혁명의 수도였던 난징이었다. 많은 국민당 간부들이 장제스에 호응하여 난징으로 모여들었다. 4월 18일 오전, 난징의 옛 장쑤성 의사당에서 국민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어 군무를 총괄했다. 난징 정부는 '전 장병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면서 쑨원의 유지를 받들어 북벌을 재개할 것과 그 역할을 장제스에게 맡긴다고 선언했다. 또한 우한 정부를 〈공산당에 장악당한 가짜 정부〉로 규정하고 타도를 선언했다. 국민정부는 우한과 난징으로 갈라졌다. 이른바 '영한 분열寧漢分裂'이다."(857-8)


"내분 때문에 두 쪽으로 갈라졌어도 북벌군의 힘은 여전히 강력했다. 북방 최강의 실력자 장쭤린조차 북벌군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대로라면 천하의 주인이 바뀌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동안 장쭤린 정권의 후원자로 막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일본은 묵과할 수 없었다. 일본은 장쭤린을 자신들의 주구로 삼아 중국 대륙을 야금야금 먹어나갈 속셈이었다. 그가 몰락한다면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셈이었다." "일본에서는 1927년 4월 17일 중국에 대한 불간섭주의를 고수한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이 무너지고 강경파인 다나카 기이치가 정권을 잡았다. 그는 제일 먼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육군대신에 기용했다. 그는 전 관동군 사령관으로, 2년 전 동북에서 궈쑹링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장쭤린을 도와서 관동군을 출동시켰던 인물이다. 또한 나중에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상하이를 침공하여 제1차 상하이사변을 일으키는 등 중국 침략을 주도했다."(867-8)


"온갖 감언이설과 파격적인 조건으로 펑위샹을 한편으로 끌어들인 장제스는 산시성의 실력자 옌시산까지 회유했다." "그는 북벌군과 장쭤린 사이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 어느 편에 서야 살아남을지 신중하게 관망했다. 장제스는 북벌군 총참의 허청쥔을 타이위안으로 보냈다. 그리고 현재의 영토를 보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즈리성까지 얹어주기로 약속했다.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한 옌시산은 북벌군에 가담하기로 결심했다. 장제스·펑위샹·옌시산의 3자 동맹이 체결되었다. 국민혁명군 제3집단군 총사령관이 된 옌시산은 장쭤린과 손을 끊고 출전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산시의 병력을 세 갈래로 출동시켰다. 산시군은 징쑤이철도와 정타이철도를 따라 즈리성을 침공했으며, 6월 15일 스좌장을 점령하여 펑톈군의 측면을 위협했다. 하지만 장제스가 옌시산에게 즈리성을 약속한 것은 훗날 펑위샹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전리품을 놓고 벌어진 갈등은 북벌전쟁이 끝나자마자 중원대전으로 치닫게 만들었다."(877-8)


5부 천하통일


"공산당 지도부는 군벌들이 싸우는 틈을 이용해 꾸준히 봉기와 소요를 일으키다보면 러시아 10월혁명처럼 언젠가 중국 전역의 노동자·농민들이 소비에트 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뒤엎으리라 믿었다. 난창봉기를 시작으로 1928년 여름까지 1년 동안 각지에서 무장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충분한 준비와 동조 세력 없이 일부 군인들을 선동하여 산발적인 반란을 일으키는 방식으로는 간단하게 진압당하기 일쑤였다. 많은 공산당원들이 무익하게 희생당했다. 쑨원의 혁명당도 이런 방식을 고수하다가 쓴맛을 보았음에도 공산당이 새삼스레 재현하는 꼴이었다." "그 와중에 장시성 일대의 농촌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아 투쟁의 횃불을 드는 데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 마오쩌둥이었다. 그는 흩어진 패잔병들을 모으고 주변 농민들을 규합해 유격전을 벌이고 토벌군을 격파했다." "또한 그의 곁에는 주더·펑더화이·린뱌오·허룽·뤄룽환 등 훗날 중국 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쟁쟁한 장군들이 있었다. '마오쩌둥 신화'의 시작이었다."(957-8)


"1928년 1월 4일,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다시) 취임했다. 하야를 선언한 지 넉 달 반 만이었다." "장제스는 보기 드문 카리스마와 결단력·정치 감각을 두루 갖추었지만 단점도 분명했다. 반대 세력을 쫓아내거나 합종연횡을 할 수는 있어도 링컨처럼 포용해서 자기편으로 만들 만큼 관대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마오쩌둥이나 스탈린처럼 아예 싹을 뿌리째 뽑아버릴 만큼 철두철미하거나 악독하지도 않았다. 충동적이면서 참을성이 부족한 그는 사소한 일에 쉽게 욱해서 주변 사람들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한 입으로 두말하는 반역자나 쓸모없는 부하들을 적당히 눈감아주어 자신의 권위를 실추했다. 참아야 할 때 참지 못하고 무자비해야 할 때 무자비하지 못했다. 장제스의 정적들은 겉으로는 두려운 척하면서도 뒤에서는 그의 이런 성격을 약점으로 여겼다." "그런 어중간함이 그가 천하를 완성하지 못한 채 몇 배 더 냉혹하고 무자비한 마오쩌둥에게 패배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958-60)


"북벌전쟁 재개가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다나카 내각은 제2함대를 산둥성으로 출동시켰다. 일본 함대는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인 4월 1일 칭다오항에 입항했다. 장쭝창·쑨촨팡의 군대가 북벌군에게 패주하여 흩어지던 4월 16일, 칭다오 총영사 후지타 에이스케가 본국에 급전을 보내 육군의 출동을 요구했다. 즉시 각료회의가 소집되어 출병을 결의했다." "일본군의 출동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사전 각본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나카 내각은 한 해 전인 1927년 12월 20일에 열린 각료회의에서 북벌군이 산둥성에 진입할 경우 재차 출병하기로 결정한 바 있었다. 명목은 현지의 일본인 보호와 치안유지였지만, 그 속내는 중국의 통일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북벌군이 제 발로 물러나지 않으면 무력도 불사할 참이었다." "일본군이 출동했다는 소식은 장제스에게도 전해졌다. 장제스가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북벌의 향방은 물론이고 중국의 명운이 걸려 있었다."(985-7)


"장제스는 한편으로는 일본과 교섭을 시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을 우회해서 최대한 신속하게 황허를 건너라고 지시했다. 북벌군이 황허를 건넌다면 일본군은 닭 쫓던 개가 되는 셈이었다. 5일 밤부터 6일 새벽까지 북벌군의 주력은 별다른 방해 없이 황허를 무사히 건너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장제스를 놓친 분풀이 삼아) 지난성을 손에 넣었지만 본래 목적이었던 북벌 저지에는 실패했다. 오히려 중국 전역에서 반일 감정이 들끓게 만들었다." "1929년 3월 28일 양국 정부는 '중일제안협정中日濟案協定'을 체결했다. 그에 따라 일본군은 4월 말까지 산둥성에서 완전히 철수하기로 했고, 쌍방이 주장하는 피해에 대해서는 공동 조사를 거친 후 보상하기로 했다. 1929년 6월에는 일본이 국민정부를 중국의 정통 정부로 정식 승인했으며, 중국의 국명 또한 일본이 임의로 만든 '지나'가 아니라 '중화민국'으로 부르기로 했다. 다나카의 야심찬 출병은 성과는 없고 잃은 것만 있었다."(991-5)


"대세는 결정났다. 지난에서 북벌군과 일본군이 충돌한 1928년 5월 9일, 장쭤린은 전군에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6월 2일 오후 7시, 순승왕부를 나선 장쭤린은 심복들과 함께 전용열차에 올랐다." "(펑톈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역인) 황구툰역에서 펑톈 쪽으로 몇백 미터 가다보면 산둥차오라는 육교가 있었다. 징펑철도와 남만주철도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1905년 12월 22일 만주선후조약滿州善後條約이 체결된 이래 관동군이 관할하는 지역이었다. 장쭤린의 열차가 도착하기 몇 시간 전,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땀을 흘리며 부지런이 뭔가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펑톈 독립수비대 제4중대와 조선주차군 소속 가메야먀 공병대의 공병들이었다. 병사들은 기리하라 사다토시 중위의 지휘 아래 철로에 폭탄을 설치했다." "6월 4일 새벽 5시, 폭탄은 장쭤린이 탄 차량과 식당 차량 중간에서 터졌다. 난세에 태어나 천하를 호령하던 풍운아의 마지막이었다."(995-1000)


"편제상 일개 변방군에 불과했던 관동군의 임무가 적과의 전투보다는 철도 경비라는 지엽적인 임무였다면, 조선군이야말로 유사시 대륙으로 즉시 출동하기 위한 실전 부대이자 신속 대응군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힘은 조선군보다 관동군이 더 컸다. 관동군은 군부 핵심층에서 거대한 파벌을 형성하여 발언권이 막강했다. 관동군 뒤에는 남만주의 철도사업을 담당하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이른바 만철滿鐵이 있었다. 만철은 단순한 철도회사가 아니라 대륙 침략을 위한 첨병이자 식민지 정부로 일본판 '동인도회사'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경영권은 본국 정부가 아니라 관동군이 쥐고 있었다. 만철 운영은 거대한 이권을 좌우했기 때문에 관동군 장교들은 본연의 업무보다 만철과 결탁해서 이런저런 이권에 끼어들어 한몫 잡는 데 혈안이 되었다. 만철에서 나오는 막대한 자금은 일본 정계와 군부로 흘러들어갔다. 만주는 관동군의 '왕국'이었다. 일본군 중에서 관동군이 유독 타락하는 모습을 보인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1004)


"장제스는 동북으로 중앙군을 보낼 수 없었고, 행정권을 행사하거나 세금을 징수할 수도 없었다. 국민당의 활동 또한 금지되었다. 동북은 여전히 장쉐량의 독립 왕국이었다. 장제스는 체면을 지켰고 장쉐량은 실리를 얻었다." "그러나 중국에는 또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북벌군의 4대 수장들이 승리 후의 논공행상으로 으르렁대기 시작한 것이다. 난징의 장제스, 우한의 리쭝런, 타이위안의 옌시산, 시안의 펑위샹. 여기에 동북의 장쉐량까지. 누구에게도 고개 숙일 생각이 없었던 이들은 천하의 주인 자리를 놓고 한판 겨룰 수밖에 없었다. 1929년 2월, 제4집단군의 총수 리쭝런이 제일 먼저 반장제스의 기치를 올렸다. 뒤이어 펑위샹과 장파쿠이가 차례로 반란을 일으켰다. 장제스에게 패하여 일본으로 달아났던 탕성즈도 돌아와서 반란에 가세했다. 광시성에서 시작된 반란의 불길은 마른 장작 타오르듯 순식간에 중원 전체로 퍼져나갔다. 2년에 걸쳐 진행되는 군벌 내전 최대최후의 절정인 '신군벌 내전'이 시작되었다."(1047-8)


"편견이란 '엮고編 내보낸다遣'는 뜻으로 비대한 군대를 줄이고 정예부대 중심으로 재편성하는 것이었다." "북벌 과정에서 비대해진 군대를 크게 줄여서 재정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어렵사리 이룩한 통일정부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또한 군벌들에게서 병권을 회수하지 못한다면 소란이 거듭될 것이 뻔했다." "장제스는 북벌 중에도 전쟁이 끝난 뒤를 대비하여 군대 축소를 꾸준히 제안했다. '재병화공裁兵化工', 즉 병사를 노동자로 전환하자는 얘기였다. 이를 위해 장쑤성에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군축 작업이 결코 순탄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국가를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고 대승적인 결단을 내린 일본의 유신 지도자들과 달리 중국의 군벌들과 정치 지도자들은 말로만 외세의 침략에 분개하고 중국의 허약한 운명을 한탄했다. 국난에 대한 위기의식이나 뭘 어떻게 하겠다는 국가 대계는 없었다. 사고방식이 중국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1120-2)


"펑위샹의 하야, 리쭝런과 바이충시·황사오훙 등 광시파의 도주로 약 반년에 걸친 군벌들의 반란은 일단락되었다. 장제스는 반란에 가담한 지휘관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대신 사면해주었다. 그는 군벌들이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히틀러였다면 패배자들에게 최대한의 굴욕을 준 뒤 가장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했을 것이다. 장제스가 그러지 않은 까닭은 내우외환에 직면한 중국의 현실에서 내전이 끝없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승자는 과거의 일을 잊고 패배자에게 너그러이 관용을 베푸는 것이 중국 사회의 오랜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협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장제스는 이들의 기반과 병권을 빼앗는 대신 중앙의 요직을 나눠주어 국민정부에 참여하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왕국을 계속 통치하기를 원했던 군벌들은 병권의 반환이 곧 장제스의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결국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힘으로 굴복시키는 수밖에 없었다."(1144)


"한때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던 반장연합군 세력은 장제스의 발빠른 대응과 회유 공작으로 차츰 꺼져갔다. 군벌들은 서로 보조가 제대로 맞지 않아 차례로 각개격파당하거나 장제스의 회유에 넘어갔다." "중립을 지키던 옌시산도 장제스가 장제스가 사실상 승리를 굳히자 그제야 난징으로 전보를 보내 자신도 반란군 진압에 가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때 사면초가에 몰렸던 장제스는 무엇보다도 뇌물 공세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는 우세한 자금력을 앞세워 막대한 돈을 사방에 뿌려대며 군벌들을 회유했다. 군벌들이 하나같이 군비 부족에 허덕인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장제스는 이들을 매수하기 위해 거액의 공채를 발행하고 자기 재산까지 털었다. 덕분에 병사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형세를 뒤엎을 수는 있었지만 군벌들의 진정한 충섬심을 살 수는 없었다. 오히려 군벌들이 돈맛에 익숙해지면서 중국의 오랜 병폐인 도덕적 타락을 부추겼고, 이는 국민정부의 부패와 무능함으로 이어졌다."(1155-6)


"한동안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혼란스러운 상황은 8월 말이 되자 승패가 장제스 쪽으로 기울면서 가닥을 잡았다. 산둥성에서 산시군은 괴멸하여 투항하거나 퇴각했다." "장제스가 강력한 반격을 시작한 가운데, 동북군의 출병은 펑위샹·옌시산에게는 허를 찔린 것이자 대세에 쐐기를 박는 결정타였다. 그들은 장쉐량이 기회주의적이기는 하지만 장제스와 손잡는 일은 없으리라 마음을 놓고 있었다. 따라서 모든 전력을 장제스와의 전투에 투입하고 장쉐량에 대해서는 아무 대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북군이 진격해오자) 옌시산과 왕징웨이 등 베이징 정부 수장들은 남쪽의 스좌장으로 피신하고 정부기관은 타이위안으로 이전했지만 이미 붕괴된 것과 다름없었다." "장제스는 시안은 물론이고 간쑤성과 칭하이성까지 진격하여 이번 기회에 서북군을 완전히 결딴내겠다고 별렀지만, 장쉐량이 중재하자 정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11월 4일, 옌시산과 펑위샹은 하야를 선언했다. 이로써 중원대전은 막을 내렸다."(1184-8)


"(중원대전 이후) 동북군 내부의 파벌 싸움이 격화되자 관동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장쉐량과 반목하던 동북의 원로들은 친일파로 전향하여 관동군의 동북 지배에 협조했다. 장쉐량은 군대를 돌려 반격하는 대신 관동군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부저항 정책'을 지시하여 부하들로 하여금 무기를 내려놓게 하고 일본과의 협상에 나섰다. 중국인들의 오랜 관념마냥 장제스가 장쉐량을 파멸시킬 요량으로 압박해서가 아니라 장쉐량 스스로 관동군의 야심을 오판했고, 동북군 내부가 분열했으며, 어렵사리 확보한 영토를 포기할 수 없다는 장쉐량의 개인적인 아집 때문이었다." "이듬해 1월에는 일본군이 러허사변을 일으켜 만리장성으로 밀고 내려왔다. 동북군은 싸우지도 않고 무너져버렸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머나먼 샨시성으로 쫓아버렸다. 장쉐량은 공산군 토벌 작전에 투입됐지만 여기서도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궁지에 몰린 그는 1936년 12월 12일 시안사건을 일으켰다."(1189-90)


"장제스는 중원대전의 승리로 명실상부한 중국의 주인이 되었다. 펑위샹과 탕성즈는 몰락했고 옌시산은 겁에 질렸다. 리쭝런은 여전히 광시성을 지배했지만 큰 타격을 입었다. 북벌전쟁에서 장제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군벌들은 더 이상 천하 패권을 놓고 다툴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렇지만 장제스의 패업은 절반만 완성됐을 뿐이었다. 펑위샹·옌시산의 하야에도 불구하고 산시파와 서북파는 아직 건재하여 무시 못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장쉐량은 새로운 화북의 지배자가 되어 중국의 반쪽을 장악했다. 천지탕을 비롯한 광둥 군벌들 또한 장제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쓰촨성과 윈난성 등 광대한 서부 지방은 반半독립적인 군벌들이 차지한 채 할거하고 있었다. 이들은 장제스의 대등한 동맹자이지 주종 관계가 아니었다. 싸움의 단초가 된 편견(군축) 문제도 흐지부지되었다." "중원대전이 끝난 지 1년 뒤인 1931년 9월 18일에는 만주사변이 일어나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했다."(1194-5)


"중원을 평정한 장제스의 눈은 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마오쩌둥-주더가 지휘하는 홍군이 있었다. 한동안 실패를 거듭하던 중국공산당은 농촌을 새로운 투쟁 근거지로 삼아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건의를 받아들여 후베이성과 후난성·장시성 변경의 농촌 지역을 빠르게 잠식해나갔다. 중원대전이 한창이던 1930년 여름에는 장제스의 눈의 중원에 쏠린 것을 이용해 홍군 부대가 난창과 장사, 우한을 공격했다. 홍군의 성급한 공격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만, 세를 불려가는 속도와 조직력은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었다. 장제스는 이번 기회에 이 오합지졸 농민 군대를 토벌하고 쓰촨성·구이저우성·윈난성 등 아직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 서부 변경의 군벌들까지 한꺼번에 손보기로 결심했다. 1930년 12월 19일, 장시성 주석 겸 제9로군 사령관 루디핑의 지휘 아래 5개 사단 4만 4,000명이 홍군 토벌 작전을 시작했다. 중국 대륙의 패권을 놓고 앞으로 20년 동안 이어질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첫 번째 싸움이었다."(1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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