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사회적 초상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음악의 글 6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 포노(PHONO)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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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모차르트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는 1791년 35세의 나이로 죽었고 12월 6일 빈민 묘에 매장되었다. 이 요절을 불러온 급성질환이 무엇이었든 모차르트는 죽기 전 얼마 동안 종종 절망적 상태에 빠져 있었다. 삶의 실패자라는 느낌이 서서히 엄습해왔다. 빚이 쌓여가고 가족은 수시로 거처를 옮겨 다녔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에게 소중했던 빈에서의 성공은 불발에 그쳤다. 빈 상류 사회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의 급격한 진행은 아마 삶이 그에게 살 만한 가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분명 자신의 사회적 실존이 좌절되었다는 느낌 속에서, 수사학적으로 말하자면 삶의 의미가 공동화空洞化되었다는 느낌 속에서, 마음속 깊이 간절히 바랐던 소망의 성취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처절한 상실감 속에서 죽어갔을 것이다." "청중의 호응 상실과 아내의 애정 약화는 그가 마지막 몇 년 동안 체험했던 의미 상실로서 상호의존적인 두 층을 이룬다."(9-12)


"다른 한편 모차르트는 육체적이나 정서적 관계에 있어서 사랑을 향한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지닌 사람이었다. 모차르트가 어릴 적부터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느낌으로 고통받았다는 것은 그의 삶의 비밀스러운 부분에 속한다. 그의 음악은 많은 부분 호감을 얻으려는 부단한 노력 그 자체였다. 즉 그의 음악은 어린 시절부터 소중한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자신에게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던 사람, 아마 여러 면에서 자기 자신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의 구애求愛였던 것이다. '비극'이란 단어는 피상적이고 너무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것에 대하여, 즉 그토록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얻으려고 애썼던 그가 아직 젊은 나이인 생애의 마지막 무렵 어느 누구로부터도,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다는 것에 대하여 모차르트 일생의 비극적 측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12-3)


"사람들은 위대한 업적으로 유명해진 이들을 이런저런 시대의 정점으로 서술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위대한 업적은 이런 정태적 시대 개념을 사용할 경우 기껏해야 과도기로 이름 붙일 수 있는 시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즉, 그것들은 항상 몰락하는 구 계급의 규범과 부상하는 신흥 계급의 규범 사이에 전개되는 역동적인 갈등으로부터 자라나는 것이다." "궁정 지도층의 기득권이 여전히 대단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정치적으로 덜 위험한 문화 영역에서 표출되는 저항을 원천봉쇄할 수 있을 만큼 크지는 않았던 시대에, 모차르트의 생애는 궁정 귀족이 지배하는 경제에 종속된 국외자로 속해 있었던 시민 집단의 상황을 매우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모차르트는 시민 계급 출신 국외자로서 궁정에 근무하면서 놀랄 만한 용기로 자신의 귀족 고용주와 위임자를 상대로 저항 운동을 벌였다 그는 개인적 품위와 음악 활동을 위해 혼자만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싸움에서 패배하였다."(20-1)


"음악 분야에서 모차르트 세대에 이르기까지 음악가가 사회적으로 비중 있는 예술가로 인정받고 동시에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처지에 있으려면 궁정 귀족적 제도와 그 산하 기관의 관계망 안에 특정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오로지 궁정, 특히 화려하고 부유한 궁정에서 상근직을 얻어야만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때 우리가 말하는 제후들의 궁정이란 원래 제후의 가정을 의미했다. 음악가들은 그런 큰 집안에서 과자 제조공이나 요리사 또는 시종들처럼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고 궁정의 위상 서열에서 보통 이들과 같은 위치를 차지했다. 조금 비하해서 표현하자면, 그들은 '궁정 아첨꾼들'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음악 천재가 자신들의 재능을 펼쳐야 하는 고정된 사회적 구조이자 틀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조건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시대 음악의 종류, 소위 '양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24-5)


"시민 계급 출신으로 궁정에서 성공한 대예술가의 특징은 그가 어떤 의미에서는 두 개의 사회적 세계 속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일생과 작품 창작은 이러한 이중적 모순의 특징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궁정-귀족 집단에서 활동하면서 그들의 취미 전통을 수용했고 또 반대로 그 집단 역시 그에게서 궁정의 표준에 일치하는 행동을 기대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우리가 좀 조야한 범주로 그 시대의 '소시민'이라 일컫는 특수한 유형을 대표하고 있는데 바로 그 자신이 중간급의 궁정 고용인층에 속했던 것이다." "그 자신이 소궁정의 변두리에서 자라났고 훗날 이 궁정에서 저 궁정으로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특별한 궁정적 세련미를 몸에 익힌 적이 없었다. 모차르트는 사교인(homme du monde), 즉 18세기의 의미에서 신사(gentleman)가 결코 되지 못했다. 아버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생 동안 골수 시민의 면모를 지녔다."(30-2)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국가의 중앙집중화로 인해 음악가를 필요로 하는 중요한 자리는 거의 모두 수도 파리나 런던에 몰려 있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높은 직위의 음악가가 고용주인 제후들과 불화에 빠질 경우 도피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권력과 부, 명성에서 왕의 궁정에 비견되는, 그래서 왕의 노여움을 산 프랑스 음악가를 환대하며 망명처를 제공할 수 있는 경쟁 상대의 궁정들이 없었다. 이와 달리 독일과 이탈리아에는 위상과 음악가들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이는 무수한 궁정과 도시들이 있었다. 구독일 제국의 승계 지역에서 궁정 음악의 뛰어난 생산성을 이 결합태─많은 궁정과 그에 따른 무수한 일자리─와 연관 짓는다 해도 지나친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런 결합태는 당시 이탈리아와 독일에 비교적 많은 수의 직업 음악가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전제조건이었으며, 동시에 음악가라는 지위와 그들이 고용주에 대해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강화하는 요소였다."(43-4)


"물론 모차르트가 아무리 무모하다 할 만큼 대담했다 하더라도 그 역시 미래에 대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그의 희망은 우리가 빈 상류 사회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곳을 향해 있었다. 그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집단 역시 궁정 귀족 가문들이었고, 모차르트는 그들 중 몇 명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우선 그는 음악 수업을 통해, 그리고 귀부인과 신사들이 그를 가정으로 초대하거나 그를 위해 주선해주는 연주회를 통해 생활해나갈 작정이었다." "모차르트가 독자적 길을 선택했을 때 잘츠부르크 궁정의 한 동료는 거의 예언자적 형안으로 빈 궁정 사회의 호의란 믿을만한 게 못된다고 우려를 표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한 사람의 명성이 오래가지 않아. 몇 달만 지나면 빈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찾지.〉 그러나 모차르트는 이미 온 희망을 빈 청중의 호응에, 수도 상류 사회의 여론적 성공에 걸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생애 최고의 염원이었고 동시에 그의 비극의 결정적 원인 가운데 하나였음은 분명하다."(49-53)


"모차르트의 개인적 모반은 언뜻 보기에 당시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제국 내에서 '교양'이나 '문화' 개념들을 지향하는 인본주의 저서들 속에 반영되었던 반향과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경우 자신이 한낱 아랫사람이며 기껏해야 고급 연예인 부류에 속할 뿐이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은 적이 없게 해준 귀족들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보편적 원리들을 통해 정당화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는 이런 악감정들을 근거 짓기 위해 보편적인 인류 이데올로기를 끌어대지 않는다. 모차르트가 베토벤과 다른 점은 바로 이런 이념에 대한 무관심인데 그 차이는 개인적 차이일 뿐 아니라 세대 차이라 할 수 있다. 자신도 귀족보다 못하지 않다는 느낌, 동급으로 대우해달라는 그의 요구는 주로 그의 음악, 즉 그의 작품과 업적에 근거를 둔다." "궁정 사회에 대한 모차르트의 관계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이중적이었는지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한 이해는 요원해진다."(54-5)


"우리는 '천재적 재능'의 성숙이 그 개인의 인간적 운명과는 별개로 완성되는 자동적이고 '내면적인' 과정이라는 생각과 드물지 않게 마주친다." "그러나 그런 미화─예술가 모차르트와 인간 모차르트를 분리하는 식의─는 '위대한' 인물들을 신격화하는 형태들 중 하나로서, 그 이면에는 평범한 사람들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한쪽을 인간 수준 이상으로 높임으로써 다른 쪽을 낮추는 것이다. 한 예술가의 업적에 대한 이해와 그의 작품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인간 사회 속에서의 그의 운명과 그 작품의 연관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약화되기보다는 오히려 깊어지고 강화될 수가 있다. 특출한 재능, 또는 모차르트 시대의 용어로 말한다면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특성을 뜻하는 '천재'는 그의 사회적 운명을 결정하는 요소들 중의 하나이며, 이런 점에서 천재가 아닌 범인凡人들의 범상한 재능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회적 사실이다."(78-80)


"음악가였던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아이에게 아마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쳤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아무리 애써도 자력으로는 만족스럽게 되지 않는, 자기 기대에도 못 미치는 정도로밖에 이룰 수 없었던 사회적 상승을 아들을 통해 성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희망을 일찍이 가슴에 품었던 것 같다. 그는 어린 아들에게 전심전력을 기울였고 그의 이런 헌신은 보통 수준을 넘어서서 과하다 할 정도였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아들을 소유물로 점유하고 신동의 아버지로서 그때까지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삶을 살아간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그때까지 찾지 못했던 자기 삶의 의미를 아들을 통해 구하려 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정당했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자기 존재의 의미 실현이 문제될 때 인간은 무자비하고 가혹해질 수 있다. 20년 동안 아버지는 마치 조각가가 작품을 빚듯이 아들에게 공을 들이고 작업한다."(107-8)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아버지의 욕구는 아들이 어린 동안에는 아들의 욕와 특정한 방식으로 일치했다. 아들을 통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성취하겠다는 아버지의 희망은 그의 음악적 자극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던 아이의 강한 애정 욕구 속에서 반향을 얻는다." "모차르트가 스물두 살 되던 1778년, 그는 너무 성급하게 17세의 소녀, 훗날 자신의 처형이 되는 소녀와 사랑에 빠지고 애인을 열심히 교육시켜 이탈리아 공연에서 가수로 출세시키겠다고 하면서 아버지가 계획한 파리 여행을 포기하려 했다.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터무니없는 계획이었고 프랑스의 수도에서 아들이 성공을 거두리라 기대했던 아버지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 결정이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말도 안 되는 무모한 아들의 구상에 솟구쳐 오르는 분노와 절망을 억제하고 가능한 한 설득하여 아들의 반항을 제어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편지로 서서히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하는 아들에게 포기를 종용하는 것이었다."(113-6)


제2부 모차르트의 반란: 잘츠부르크에서 빈으로


"1781년 5월 기분이 상해 있던 젊은 음악가 모차르트와 그 못지않게 화가 나 있던 고용주이자 공국의 지배자인 잘츠부르크 대주교 콜로레도 백작 사이의 긴장관계는 노골적인 갈등으로 증폭된다. 그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원만치 못했고 따라서 갈등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결별의 순간에는 모차르트 자신도 안정된 직장 없이 빈에서 살아갈 삶이 가져다줄 고난을 어느 정도 예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언젠가는 황제가(또는 그와 비슷한 서열의 왕이) 정식 일자리로 자신과 같은 재능을 알아줄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포기한 적이 없었고 그동안에는 어떻게든 연명할 수 있는 길을 찾을 거라는, 자신을 믿는 사람 특유의 막연한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25세의 나이로 그는 자신의 욕구와 재능에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길을 택할 수 있는 능력을 분명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온 세상의 반대에도, 심지어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결정을 밀고 나갈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171, 186)


"모차르트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사소하고 세부적인 사항까지도─예리하게 관찰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현실 감각은 제한되어 있었고 소망과 환상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고 있었다. 그가 여행하면서 새 궁정에 도착했을 때 제후가 친절한 말을 건네거나 그의 작품들 중 하나에 박수갈채를 보내면, 안정되고 명예로운 일자리에 대한 자신의 꿈이 이제 곧 이루어지리라는 절대적 확신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어린아이' 같은 성격을 말하다 보면 우리는 다른 측면에서 그가 얼마나 어른스러웠는지 쉽게 잊어버린다. 그 증거는 한 나라의 군주인 자신의 고용주에 대한 개인적 반란을 실행하면서 그가 보였던 단호함이며, 그 못지않게 중요한 증거는 훨씬 더 어려웠을 아버지에 대한 반란이다." "아버지와의 분리 자체는 그 선행 단계인 결합의 강도와 기간을 생각할 때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그의 교육에 비추어볼 때 우리를 놀라게 하는 그의 강한 성격을 증명해준다."(189-91)


"모차르트가 내린 결단은, 그 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그 정도의 위상을 가진 음악가로서는 극히 평범하지 않은 결정이다. 그보다 한 세대 전만 해도 궁정 음악가가 다른 일자리 없이 현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당시 이 사회에서는 다른 대안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차르트는 빈을 방문하면서 평소 알고 지냈던 궁정 귀족들의 도움으로 밥벌이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찾아보았다. 이들이 일깨워주었던 희망이 잘츠부르크의 자리를 버리겠다는 결정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자신의 음악적 환상을 마음껏 펼치고 싶어했던 모차르트는 '자유 예술가'와 여러 면에서 닮았다. 그러나 사회의 지도자층이 예술이나 의복, 가구가 건축물에 관한 섬세한 미적 감각을 자기네 사회 집단의 자명한 특권으로 간주할 경우 사태는 전혀 달라진다. 이런 사회에서 기존의 규범을 넘어서서 혁신을 지향하는 '자유 예술가'의 성행은 그에게 극도의 위험을 가져다줄 수 있다."(196-200)


"독일 징슈필의 전형인 모차르트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유괴〉의 기획에 참여했던 황제 요제프 2세는 완성된 작품이 전적으로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빈 초연 후 작곡가에게 〈친애하는 모차르트, 음이 너무 많은 것 같소〉라고 말했다." "옛 양식의 궁정 오페라에서는 성악가들이 지배자였다. 기악 음악은 그 밑에 종속되어 있는 처지였다. 기악곡은 성악가들의 반주를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후궁으로부터의 유괴〉에서 이를 변화시켰다. 인간의 음성과 악기의 음을 일종의 대화 속에 엮어놓으면서 그는 기쁨을 느꼈다. 이로써 모차르트는 특권을 누리던 성악가들의 지위를 추락시켰다. 동시에 그는 인간의 음성만을 듣고 공감하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관현악의 반주에는 낯설어하던 궁정 사회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모차르트는 오케스트라에도 무언가 말할 것을 부여했지만 청중은 그것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단지 '너무 많은 음'을 들었을 뿐이다."(200-1)


제3부 계획: 표제어로 본 모차르트의 삶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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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 듣는 사람을 위한 가이드
최은규 지음 / 마티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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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장 교향곡의 탄생


"이탈리아어로 신포니아(sinfonia)라고 불리는 교향곡은 본래 매우 짧고 간단한 음악이었다. 게다가 정식으로 무대 위에서 연주되지도 않았다. 교향곡은 '오케스트라 피트'라 불리던 무대 앞쪽에 파인 작은 구덩이에서 오페라 공연의 막이 오르기 직전에 연주되곤 했다." "오페라의 서곡처럼 연주됐던 18세기의 교향곡은 일종의 기능음악이었다. 지금처럼 객석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악장이 조율을 지시하고 지휘자가 입장해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일으켜 세우는 드라마틱한 의식이 없었던 그 당시,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짧지만 재미있고 강렬한 서곡을 연주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초기 교향곡들은 '크고 웅장한 도입'과 '흥미로운 진행'을 갖추어야 했다. 오페라 공연이 시작되기 전 '소음 제거'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던 음악이니 만큼 기선을 제압할 만한 큰 소리로 시작했고, 언제나 청중의 귀를 사로잡을 만한 흥미로운 선율을 들려주었다. 그 점이 교향곡의 발전을 유도했으리라."(19-20)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마리아 바르바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1714~88)는 함부르크 시절 모두 열 곡의 교향곡을 남겼다." "음악학자들은 바흐가 구사했던 독특한 교향곡 양식을 '감정 양식'(Empfindsamer Stil)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음악이라는 뜻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음악적 단편들이 빠르게 변화하는 바흐의 교향곡을 듣고 있노라면 감정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마저 든다." "봉건제도의 잔재가 남아 있던 18세기에 가장 보수적이었던 베를린 궁정에서 음악가로 일했던 바흐가 음악이 일종의 '감정 언어'라는 19세기의 미학을 체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그는 가사 없는 기악곡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음악으로 증명했다. 교향곡의 역사 속에서 기악의 위력을 선포하며 이후 다가올 위대한 교향곡의 시대를 예견한 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교향곡 양식을 계승한 작곡가는 아무도 없었다."(27-33)


2장 교향곡 실험: 하이든


"에스테르하지 궁정 시절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이 이끌었던 오케스트라의 일반적인 연주 인원은 열세 명에서 열여섯 명에 불과했다. 바이올린 각 세 명씩에 비올라와 첼로, 더블베이스는 각 한 명씩이고 여기에 목관악기 몇 대가 추가되는 정도였다." "하지만 1792년에 런던에서 잘로몬이 주최한 음악회에서 하이든의 교향곡을 처음 소개할 때 오케스트라 연주 인원은 40명이었고 1795년에는 오늘날 오케스트라 규모와 비슷하게 거의 60명에 육박했다. 작은 살롱에서 연주되는 소규모 실내악의 작은 소리에 익숙했던 당시 청중들이 60여 명의 음악가가 만들어내는 웅장한 교향곡을 듣고 얼마나 열광했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하이든은 대(大)편성 오케스트라로 크고 웅장한 사운드를 만들어 대중을 위한 교향곡의 화려한 효과를 추구하는 한편, 베토벤의 중기 교향곡을 연상시키는 동기발전수법과 소나타 형식의 변증법을 다루는 노련한 솜씨를 발휘하여 18세기 '교향곡의 절대군주'로 등극했다."(46-7)


3장 자유음악가: 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91) 당대의 교향곡은 점차 그 자체로 위대한 '예술 음악'으로 변모해갔으며 콘서트의 중심이 되는 음악으로 떠올랐다. 이는 18세기 후반의 음악가들이 직면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계몽주의가 득세하고 시민계급이 부상하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공공연주회가 생겨나고 출판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는 오랜 세월 궁정악사로서 하인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오던 음악가들이 귀족의 취향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만의 음악'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살았던 시대는 다소 애매했다. 모차르트의 선배 하이든은 생애의 대부분을 봉건적 하인으로 살았고 19세기의 베토벤은 독립 음악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면, 모차르트는 그 두 세계의 중간에 서 있었다. 모차르트 시대에는 음악가가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만큼 음악 시장이 넓지 않았기에 모차르트는 봉건질서에서 완전히 해방되지도, 그렇다고 자유음악가로 온전히 독립하지도 못했다."(98)


"모차르트가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 시점을 전후로 모차르트의 교향곡 형식에는 몇 가지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다." "모차르트가 1781년에 쓴 편지를 보면, 빈의 교향곡 연주회에 바이올린 주자만 40명에 비올라 주자 열 명, 첼로 여덟 명, 더블베이스 열 명을 포함해 총 80명의 연주자가 참여했다. 오늘날 교향악 연주회 규모에 결코 뒤지지 않은 대편성이다. 늘어난 현악기의 수에 맞추어 관악기도 점차 추가되었다. 오보에와 바순이 음향의 균형을 위해 더블 편성되기도 했다." "변화는 단지 편성뿐만이 아니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로부터 탈출을 시도하기 시작한 1770년대 말과 1780년대 초에 작곡된 교향곡 악보에는 몇 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발견된다. 결정적인 변화는 교향곡의 저음부를 맡은 더블베이스와 바순, 첼로 파트가 각기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베이스 라인을 맡은 저음 악기가 모두 같은 선율을 연주하는 관행을 깨고 각 악기의 선율을 분리하면서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는 전보다 더 풍부해졌다."(108)


4장 불멸의 아홉: 베토벤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 그는 모차르트가 헛되이 추구했던 자유 음악가의 길을 완전하게 성취해냈다. 출판업자들은 그의 작품을 얻기 위해 달려들었고 귀족 후원자들은 그를 천재 음악가로 숭배했다. 베토벤은 더 이상 의뢰인의 취향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음악으로 자신의 취향을 청중에게 강요할 수 있었다. 그는 귀족들과 한 테이블에서 접시를 받았고, 〈귀족은 많지만 베토벤은 하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당당한 자유음악가였다. 재봉사나 재단사 같은 기술자나 다를 바 없었던 예술가는 베토벤 시대에 이르러서야 초월적인 상상력과 지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승격되고 존중되었다. 이는 '수공업 예술'에 불과했던 음악이 '예술가의 예술'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술가가 진정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대가 왔음을 뜻했다. 즉, 예술가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람들로서 신성한 진리를 드러내는 존재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131-2)


"말을 못 한다는 것이 큰 약점이었던 기악음악과 교향곡은 베토벤이 활동했던 19세기 초에 비로소 최고의 예술 형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당대의 낭만주의 문필가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성악 우대, 기악 천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서양 음악사의 대세가 기울기 시작한 18세기 말, 시인이자 소설가인 티크는 이렇게 말했다. 〈교향곡들은 수수께끼 같은 언어로 수수께끼 같은 것을 보여주며, 현실의 법칙에 의존하는 바가 전혀 없고, 이야기나 성격과 관련지을 필요가 없으며, 순수하게 시적 세계에 남아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호프만은 '순수' 기악음악이 '낭만적'이며 이러한 낭만성이 듣는 이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을 체험하게 하므로 음악에서 '표현'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티크 역시 음악에서 묘사적인 요소를 제거해 음악을 형이상학적 위치에 올리려 했다. 하지만 정작 베토벤은 소나타와 교향곡을 '표현적인 예술'로 인식하고 소리로서 그 성격을 드러내고자 했다."(144-5)


5장 거인의 그림자: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베를리오즈


"19세기 음악가들의 시름은 날로 깊어만 갔다. 어떤 교향곡을 내놓든 그것은 필연적으로 베토벤 교향곡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는 몇 차례 교향곡 작곡을 시도했으나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1818년 5월에 슈베르트는 교향곡 D장조의 피아노 스케치를 25쪽가량 쓰다가 포기해버렸고, 1821년 8월부터 쓰기 시작한 e단조의 교향곡 작곡도 중도에 그만두었다. 이 교향곡의 아다지오 도입부는 인상적이지만 슈베르트는 그에 어울리는 악상을 전개시킬 수 없었다. 그러다가 1822년 가을에 b단조로 된 위대한 교향곡을 썼으나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슈베르트 교향곡 중 가장 유명한 〈미완성〉이다." "슈베르트는 생애 말년에 '그레이트'라는 부제가 붙은 C장조 교향곡으로 마침내 교향곡 분야에 위대한 걸작을 남기는 데 성공했지만, 안타깝게도 생전에 이 교향곡이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지 못한 채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았다."(193-6)


"슈베르트의 관현악이 계속되는 연주 거부와 초연 연기로 수난을 겪는 동안, 빈 청중은 오로지 하이든과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의 교향곡만을 고집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간혹 음악회에 작품을 올린 동시대 작곡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1809~47)다. 멘델스존은 당시 빈 음악계를 주름잡던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과 함께 관현악 콘서트 프로그램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몇 안 되는 작곡가 중 하나였다." "오케스트라 악기들의 개성과 그 조합이 만들어내는 음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던 멘델스존은 15세부터 본격적으로 작곡하기 시작한 다섯 곡의 교향곡에서 특유의 가볍고 청명한 관현악의 울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당대 모든 교향곡 작곡가가 그러했듯, 멘델스존 역시 교향곡의 거장 베토벤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의 찬란한 풍광을 담은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은 베토벤이 남긴 불멸의 아홉 곡 가운데 7번의 계보를 이었다고 평가된다."(209-13)


"1841년은 로베르트 슈만(1810~56)에게 가히 '교향곡의 해'라 할 만하다." "슈만은 1841년 1월 23일부터 26일까지 단 나흘 만에 교향곡 1번의 스케치를 마쳤고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안 되는 2월 20일에 세부 오케스트레이션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업을 완료했다. 그리고 1841년 3월 31일, 교항곡 1번 〈봄〉은 멘델스존이 지휘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었다. 이로써 슈만은 명실공히 베토벤 이후의 주요 교향곡 작곡가로서 자신을 당당히 증명해 보였다." "슈만의 '봄의 교향곡'은 '교향곡의 봄'을 불러왔다. 슈만은 1841년 '교향곡의 해' 이후 10여 년에 걸쳐 교향곡 2번과 괴테 『파우스트』의 장면음악, 네 대의 호른을 위한 연주회용 소품, 〈만프레드〉 서곡 등의 관현악 작품들을 꾸준히 내놓으며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1851년까지 슈만이 완성하고 개정한 교향곡은 모두 네 편으로, 이는 그로부터 2년 후에 그를 찾아온 젊은 브람스가 작곡하게 될 교향곡의 수와 똑같다."(224-7)


"베를리오즈의 관현악이 내뿜는 독특한 음향은 평범한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다. 베를리오즈는 상상 속에나 가능할 법한 음향의 판타지를 실제 오케스트라 소리로 옮기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했다. 물론 오케스트라의 전통적인 체계까지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그에게 전통이란 기본 뼈대일 뿐이었다." "베를리오즈 이전의 오케스트레이션은 주로 고전적 양식에 따랐다. 즉, 주선율은 대개 현악 파트에 주고 관악기는 주선율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고 가끔 독주를 했다. 그러나 베를리오즈는 전통적인 악기론과 관현악법의 모든 규칙과 관습을 무시하고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악기를 마음대로 주물렀다. 그는 하나의 선율을 조각내서 여러 파트에 분산시켜 입체적인 음향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같은 선율을 연주하고 있는 현과 관 파트의 리듬을 달리해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베를리오즈에게 화성을 채우는 일이나 주선율을 두드러지게 하는 일 따위는 부차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236-47)


6장 누가 베토벤의 후계자인가: 리스트, 브람스


"베토벤의 후계자를 자처한 프란츠 리스트(1811~86)는 베토벤의 음악 사상이 〈첫째, 전통과 형식을 통해, 둘째, 그 사상 자체의 필요와 영감에 의해 형식과 양식을 확장하고 파괴하며 재창조하고 구축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했으며, 그가 택한 길은 후자였다. 그리고 '교향시'(symphonic poem)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교향곡'과 '시'가 결합된 이 변종 관현악 장르는 '시적인 교향곡',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시', '시적인 기악곡' 등으로 풀이될 수 있다. 굳이 '시'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그가 이 새로운 장르에 문학과 미술 등의 자매예술을 끌어들여 새로운 사상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표제음악'(program music)이다. 베토벤이 교향곡 6번 〈전원〉에서 시도했던 표제음악의 아이디어는 리스트에 이르러 형식의 틀마저 파괴하는 극단적 형태로 변형되기에 이른다. 리스트는 교향곡과 같이 여러 악장으로 구성된 형식보다 단악장 형식이 표제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251-2)


"하지만 실상 리스트의 음악을 자세히 보면 그가 고전적 형식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음악을 혼란에 빠뜨린 것은 아니다. 단지 4악장 구조의 정형화된 틀을 버렸을 뿐, 단악장으로 된 그의 교향시 〈전주곡〉을 유심히 살펴보면 소나타 형식을 근거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제1주제군은 C장조, 노래하는 제2주제는 E장조로 되어 있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발트슈타인〉의 조성 구조를 그대로 빼닮았다. 주제 변형 방법 역시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환희의 송가'의 주제 변형 방식과 대단히 유사하다. 비록 겉보기에 그가 베토벤 교향곡의 4악장 구조를 따르지 않았다 해도 그가 주장하는 '미래의 음악'은 '과거의 음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리스트가 청년 시절부터 베토벤 교향곡과 서곡들을 피아노로 편곡하며 베토벤 음악을 향한 열정을 보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다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베토벤을 숭배했고, 나름의 방식대로 베토벤 음악을 계승했을 뿐이다."(255)


"요하네스 브람스(1833~97)가 빈에서 활동하던 당시에는 베토벤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음악가들이 출몰했는데 그중에서도 리스트를 중심으로 한 신독일악파는 전통적인 형식의 교향곡은 끝났다고 주장했고, 각종 표제를 끌어들여 형식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관현악곡들을 내놓으며 음악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일찍이 슈만으로부터 독일 음악계를 구원할 메시아로 지목된 브람스의 눈에는 베토벤이 이룩한 견고한 음악 전통을 흔들어놓는 신독일악파의 시도가 무척이나 위험하고 불경한 것으로 비쳐졌다. 더구나 그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감각적 음향과 신파조의 선율로 가득한 리스트의 교향시에 역겨움을 느끼고 있었다. 신독일악파의 활동이 전통적인 음악을 죽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당시 빈의 음악평론을 주도하고 있던 한슬리크 역시 전통적인 형식을 존중하고 어떠한 표제도 없이 음악 속에서만 의미를 추구하는 브람스의 음악을 이상적인 음악예술이라고 보았다."(275-80)


"이런 혼란 속에서 브람스가 택하고자 한 것은 '절대음악'의 길이었다. 즉, 어떤 표제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음을 재료로 하는 견고한 형식과 고전적 균형미를 갖춘 순수 기악곡으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정치적 격변(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성립)을 겪고 주가가 폭락(1873년 경제 위기)하는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 빈 사람들이 음악에 열광했던 것은 어쩌면 오스트리아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하나의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구질서가 재편되고 이민자가 늘어나는 데 위기를 느낀 빈 토박이들은 메테르니히 재상이 집권했던 옛 시절의 안락했던 생활을 그리워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저항과 보수주의가 설득력을 얻고 1848년 이전의 비더마이어 시대를 향한 향수가 일었다. 정치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럴수록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빈 고전주의 음악을 숭배하고 음악회 문화를 활성화해 정치적으로 무력해지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281-4)


7장 기념비적인 교향곡: 브루크너


"안톤 브루크너(1824-96)의 교향곡은 대단히 신비로우며 규모가 장대할 뿐 아니라 때로는 그 음악적인 표현이 애매모호하고 비논리적인 것 같기도 하다. 브람스가 베토벤 교향곡 5번의 논리성을 모범으로 몰락해가는 교향곡 형식을 구원했다면, 브루크너는 베토벤의 9번을 모델로 교향곡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태초에 우주가 생성되듯 서서히 상승해가는 베토벤 9번 1악장 도입부의 신비로움은 브루크너의 거의 모든 교향곡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브루크너 교향곡 특유의 우주적인 소리는 듣는 이를 종교적 신비와 신을 향한 경외감으로 인도한다."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전무후무한 장엄한 사운드를 만들어냈지만 안타깝게도 발표될 때마다 비평가들의 호된 비판을 받는 수모를 겪었으며, 오늘날에도 베토벤과 브람스의 교향곡에 비해서는 인기가 없는 편이다. 그러나 당대에 인정받지 못했던 것은 작품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음악 정치'에 너무나 무지했기 때문이다."(311-2)


"브루크너는 위대한 작곡가로서는 지나칠 정도로 겸손했다. 브루크너의 주요 작품들은 모두 40대 이후에 작곡되었는데, 이는 그가 본격적으로 작곡에 임하기 전까지 작곡을 자제하고 작곡법을 갈고닦는 데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오토 키츨러와 수업하며 베를리오즈와 리스트 등 당대의 혁신적인 작곡가들의 작품을 공부하고 새로운 음악세계에 눈뜬 브루크너는 같은 시기에 바그너의 음악을 처음 접하고 감전된 듯 바그너에게 빠져들었다." "브람스를 지지하는 음악평론가 한슬리크와 추종자들은 〈브람스의 음악이 동시대의 이상을 반영한다면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역겨운 바그너의 미학에 기대고 있다〉고 평가하며 브루크너를 가리켜 〈그로테스크하고, 엉성하고, 지나치게 야심이 많고, 음악적인 논리성이 결여되었고, 표현이 부자연스럽고, 노예처럼 바그너를 숭배한다〉고 비난했다." "이런 상황에서 브루크너가 어떠한 외적 보상도 없이 대작 교향곡들을 꾸준히 작곡했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이다."(313-5)


8장 러시아와 동유럽의 교향곡: 러시아 5인조, 차이콥스키, 드보르자크, 시벨리우스, 닐센


"동방 교회의 비잔틴 성가와 러시아의 민속 선율이 섞인 즈나메니(Znameny)는 러시아 고유의 단성음악으로 발전했다. 서구의 음악이 단성음악에서 다성음악으로 발전해갔던 것과 달리 즈나메니는 별다른 변화 없이 17세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18세기 초에 이르러 러시아는 급격히 서구 문물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서구 문물의 수입을 계기로 러시아 궁정에 소개된 이탈리아 오페라는 이때부터 200년 가까이 러시아 음악을 지배했고, 오페라를 좋아했던 안나, 엘리자베스, 예카테리나 여제 시대를 거치면서 이탈리아 오페라는 전성기를 맞았다." "러시아 사람들은 외국 문물에 대한 충격과 동경을 느끼며 빠른 속도로 서양 문화에 흡수되어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갑작스러운 서구화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러시아의 음악가들 역시 갈등과 혼란에 휩싸였다. 그들은 서양의 세련된 음악에 충격을 받고 그것을 모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 고유의 음악을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360-1)


"러시아 음악의 선구자는 1836년에 첫 번째 민족주의 오페라인 《황제를 위한 삶》을 작곡하여 명성을 얻은 미하일 글린카였다. 그는 러시아 민속음악의 선율과 리듬을 사용한 오페라를 작곡하여 러시아 음악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오늘날 글린카의 이름은 오페라 《로슬란과 류드밀라》의 서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인기가 워낙 높았던 터라 글린카의 오페라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이후 글린카의 민족주의 음악정신은 '러시아 5인조'라 불리는 다섯 작곡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러시아 5인조' 작곡가는 밀라 발라키레프, 체자르 큐이, 알렉산드르 보로딘,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를 가리킨다. 이들은 서구의 음악에서 독립한 러시아 고유의 음악을 작곡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당시 러시아의 음악평론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로부터 '강력한 소수파'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만큼 이들의 음악은 가장 러시아다운 음악으로 여겨졌다."(361-2)


"일리치 차이콥스키(1840~93)는 서유럽의 음악이론에 통달한 서구적인 작곡가로 평가받지만, '러시아 5인조'와 마찬가지로 일생을 러시아 고유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데 바친 인물이다. 1868년에 러시아 민요 모음집을 출판하고, 러시아의 문학과 역사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차이콥스키가 서구적인 음악가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의 음악가로서의 행보에서 찾을 수 있다. '러시아 5인조'의 음악이 유행할 당시에 그들의 반대파가 세운 음악원에서 공부한 후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다는 점이나 잦은 여행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쌓은 점 등이 그를 서구적인 작곡가로 평가 받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차이콥스키의 음악이 표현하는 러시아 민족주의는 러시아 5인조의 토속적이고 사실적인 민족주의와는 다르다. 차이콥스키는 서양식 훈련을 통해 학습한 낭만적이고 세련된 기법과 러시아의 민속적 요소를 결합하여 국제적이면서도 민족적인 음악을 작곡했던 음악가이다."(370)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와 안토닌 드보르자크(1841~1904)를 배출한 나라 체코는 음악의 역사가 깊다. 1627년에 합스부르크 가에 의해 합병되기 전까지 독립된 국가였던 체코는 14세기에 프랑스 작곡가 기욤 드 마쇼의 음악을 받아들여 일찌감치 '아르스 노바'라 불리는 당대의 최신 음악을 즐길 정도로 앞서나갔다. 합스부르크 가와 합병한 후 체코 음악은 한동안 독일의 지방음악쯤으로 인식되었으나, 1803년에 보헤미아 음악가 그룹인 '소시에테'가 결성되고 1811년에 음악원이 설립되면서 체코의 민족음악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체코의 민족음악과 유럽의 음악어법을 결합시킨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낸 음악가가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이다. 스메타나가 주로 오페라와 교향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반면, 드보르자크는 오페라뿐만 아니라 교향곡과 실내악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그가 남긴 아홉 곡의 교향곡은 19세기 민족주의 교향곡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인정받고 있다."(399-400)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기는 관현악의 전성시대였다. 독일어권에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화려한 교향시와 구스타프 말러의 대규모 교향곡이 탄생했고, 프랑스에선 클로드 드뷔시와 모리스 라벨의 색채적인 관현악이 발표됐으며, 이탈리아에선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기가 옛 로마의 영광을 현란한 음향으로 재현한 로마 3부작을 내놓았다. 이 시기 핀란드의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1865~1957)는 시대의 주류와는 상관없는 독자적인 관현악곡을 내놓아 주목받았다." "교향곡을 〈모티브들 간의 내적 연관성을 창조해내는 심오한 논리〉라 생각했던 시벨리우스는 명 프로듀서 월터 레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나의 교향곡은 음악적 관점에서 인식되고 작곡된 음악입니다. 그것은 문학에 바탕을 두지 않았습니다. 나는 문학적인 음악가가 아닙니다. 내게 음악은 말이 멈춘 곳에서 시작하지요. 풍경은 그림으로 표현되고 드라마는 단어로 표현됩니다. 교향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이어야 합니다.〉"(413-5)


"시벨리우스와 더불어 북유럽을 대표하는 교향곡 작곡가 카를 닐센(1865~1931)은 국내에는 비교적 덜 알려진 듯하다. 그러나 그가 작곡한 여섯 곡의 교향곡은 교향곡의 역사에 있어 매우 비중 있는 작품들로, 오케스트라의 다채로운 색채감과 활력 넘치는 리듬이 매력이다." "그가 23세에 작곡한 현악 5중주 곡은 1888년 4월 28일 초연 당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 음악회를 계기로 젊은 음악가 닐센의 명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닐센이 독일을 중심으로 한 후기 낭만주의 음악을 수용하지 않으면서도 독자적이고 훌륭한 작품을 작곡해 북유럽 음악 특유의 개성을 지켰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당시 덴마크 음악계는 보수적인 성향의 작곡가 닐스 가데의 영향으로 매우 답답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한 닐센은 처음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으나, 전위음악의 물결이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429-30)


9장 세기 전환기의 교향곡: 말러


"구스타프 말러(1860~1911)는 뛰어난 재능으로 당대 청중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지휘자로서의 능력은 경이로웠다." "그러나 이 젊고 활동적인 음악가가 빈 오페라극장 및 필하모닉과 계약을 맺자 빈 음악계는 일대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말러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가 유대인이란 사실이 암암리에 논란을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말러가 빈 오페라극장과 계약할 당시 반(反)유대주의의 선봉이던 카를 뤼거가 빈의 시장이 되면서 말러의 빈 음악계 입성은 정치적 문제로 비화했다." "하지만 말러 시대의 빈 오페라극장에서 이루어진 공연은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리히터가 지휘할 당시 바그너 오페라 공연에서 생략되곤 했던 부분이 말러에 의해 모두 복원되었고, 바그너의 음악극은 음악과 드라마가 한데 어우러진 정교한 대작으로 거듭났다. 현대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오페라 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수와 오케스트라의 호흡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439-40)


"말러는 평생에 걸쳐 여러 가지 음악 양식을 실험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다. 쉬지 않고 변화를 추구한 말러의 음악은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던 세기말 빈 사회를 비추는 듯하다. 당시 빈의 구질서와 새 질서의 충돌을 목도한 말러는 음악을 통해 이를 풍자했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향한 경탄과 구시대에 대한 향수를 냉소했다." "이 시절 '왈츠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만큼 빈 사람들의 욕구를 잘 충족시켜준 음악가도 드물다." "말러는 슈트라우스풍의 왈츠가 당대 사회에 나타난 아이러니를 표현하기에 매우 적합한 재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음악 속에서 왈츠는 비틀어지고 왜곡되며 빈의 거리와 시골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뒤섞인다. 어디선가 군악대의 나팔소리도 들려온다. 독일의 전통과 슬라브적인 요소, 빈의 개성을 지닌 음악 재료들이 말러의 작품 속에서 절묘하게 혼합된다. 그 음악은 마치 지나간 시대를 그리워하며 왈츠와 향락을 탐닉하는 빈 사람들을 조소하는 듯하다."(442-3)


"교향곡인지 가곡인지 모를 '변종' 형식의 작품들을 말러 자신은 '교향곡'이라고 불렀지만, 과연 그가 주장하듯 〈대지의 노래〉나 8번 〈천인 교향곡〉을 '교향곡'이라 할 수 있을까?" "문제의 발단은 말러가 선배 작곡가들의 교향곡을 하나의 대우주 속에 편입시킨 데 있을 것이다. 베토벤의 역동적인 동기발전수법과 〈합창〉에 나타난 '성악 교향곡' 양식, 슈베르트풍의 노래하는 선율, 슈만풍의 낭만적 열정, 베를리오즈 교향곡의 표제적 묘사, 브루크너 교향곡을 방불케 하는 우주적 음향, 차이콥스키 〈비창〉의 쓸쓸한 결말은 말러의 교향곡 속에 모두 하나로 녹아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왈츠와 푸가, 나팔 소리와 민요, 성악과 기악, 나무망치와 소 방울 소리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와 악기로 마치 우주의 음향과도 같은 다채로운 세계를 펼쳐 보인다. 어쩌면 말러의 교향곡은 '함께 울린다'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는 '교향곡'(symphony)이라는 말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지 모른다."(444-5)


10장 20세기 교향곡: 쇼스타코비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75)의 주요 스승으로 꼽히는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는 러시아 고유의 음악어법과 서유럽풍의 음악을 절묘하게 결합해내 많은 이를 사로잡았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장이 된 후 음악원 학생이었던 쇼스타코비치를 지도했고,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격려에 힘입어 15세가 되던 1921년에 〈관현악을 위한 주제와 변주곡〉 Op.3을 완성해 숙련된 작곡기법을 보여주며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후 1923년에는 피아노과를, 1925년에는 작곡과를 졸업했다. 졸업 작품으로 제출한 교향곡 1번은 1926년에 초연되어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쇼스타코비치는 전 생애에 걸쳐 교향곡 작곡에 힘을 쏟아, 무려 열다섯 곡의 교향곡을 남겼다.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이 교향곡 9번의 벽을 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교향곡 열다섯 곡은 대단한 숫자였다. 이 작품들을 통해 쇼스타코비치는 20세기 교향곡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520)


"천재 음악가 쇼스타코비치의 고뇌는 그가 남긴 열다섯 곡의 교향곡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역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넘긴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은 교향곡 1번을 19세에 완성하며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후 소련의 권력자들이 문화·예술 활동을 강력하게 통제하면서 예술가들에게 사회주의 이념에 맞는 예술 작품만을 생산할 것을 요구했고, 쇼스타코비치도 이러한 검열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다. 쇼스타코비치는 평생 당의 방침에 굴복하며 자신의 의지를 꺾어야 했고, 표면적으로는 당의 요구를 수용한 작품을 쓰는 듯 가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잘 들어보면 그 속에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견뎌낸 한 예술가의 진실한 고백과 전쟁으로 먼저 떠나간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깊은 슬픔을 발견하게 된다.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교향곡 대부분이 '묘비'라 말한 것은 그 때문이리라."(5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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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동 사람들 - 왜 돌봄은 계속 실패하는가, 2021년‘올해의 인권책’선정
정택진 지음 / 빨간소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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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서울시 용산구의 일명 '동자동 쪽방촌'은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빈민 밀집 거주 지역이다." "그동안 쪽방촌 주민을 돕기 위한 기초생활보장제도와 무연고 공영 장례가 제도화되었고 서울시는 저렴쪽방 사업을 시작했다. 수많은 단체가 각종 생필품을 제공하고, 소매를 걷어붙인 자원봉사자들이 매년 동자동 쪽방촌을 찾는다. 그러나 주민들은 여전히 '사회적 버려짐'을 경험한다. 범죄와 질병으로 일상이 파괴되며, 도움의 손길에도 인격과 자존감 박탈을 경험한다. 사람으로서의 필요와 욕망, 세계 안에서의 위치와 존재 방식은 부정 당한다.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시도는 경제적 측면을 넘어 주민들의 사회적 삶에 대한 개입이기도 하다. 개입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 '우리'에 대한 감각, 정치적 연대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의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킨다. 이 책은 쪽방촌을 위한 여러 개입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겪는 가난과 고통의 풍경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려내고자 하는 시도다."(6-8)


1 쪽방촌의 어제와 오늘


"서울역 11번 출구로 나와 벽산빌딩(현 게이트웨이타워)을 지나면 일명 '동자동 쪽방촌'의 초입이 등장한다. 우뚝 치솟은 빌딩들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 데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 1층에는 온갖 음식점이 있어서, 1,000개가 넘는 쪽방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조차 쉽지 않다. 쪽방촌 앞을 지나가는 시민들은 빌딩 숲 한가운데에 이렇게 허름한 건물들이 있다는 사실에 잠시 의문을 품을 뿐이다. 저녁이면 술에 취한 회사원들이 넥타이를 풀어헤친 채 내뱉은 고함소리와 바로 옆 새꿈어린이공원에서 술판을 벌이는 쪽방 주민들의 목소리가 섞여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자동 지역사에서 서울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동자동과 서울역이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울 뿐 아니라, 빈민 밀집 거주 지역이라는 동자동의 역사적 정체성이 서울역 때문에 만들어졌다. 내가 서울역을 통해 다시 동자동을 찾아왔듯, 서울역은 동자동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징검다리이자 동자동의 역사를 설명하는 주요 표지다."(17-8)


"광무 4년인 1900년 서울역(당시 남대문역)이 최초로 개통된 뒤 주택가와 상가가 밀집한 이 지역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극심한 전재(戰災)를 겪었다. 서울역은 인적·물적 자원 수송의 핵심지이자 서울로 진입하는 철도 교통의 관문이었다. 따라서 미군의 폭격이 서울역을 비롯해 철도, 도로, 교량이 밀집한 용산구에 집중되었다. 궁궐이 밀집한 종로구나, 주거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동대문구와 성북구에 비해 피해 역시 심각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폐허가 된 동자동 지역에 피난민과 빈민이 몰려들어 판잣집을 짓기 시작했다. 일부 건물은 서울역의 유동 인구를 상대로 숙박업을 벌였다. 남대문 상권 안에 위치한 데다가 서울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유동 인구가 많았다. 도동(현재 동자동 및 후암동)과 양동(현재 남대문로5가)에는 판자촌과 함께 대규모 윤락 시설도 들어섰다. 동자동의 지리적 위치와 서울역의 존재가 빈민 밀집 거주지역이라는 정체성의 출발이었다."(22)


"1970년대 말부터 40여 년간 이 지역에 살아온 주민 노정수(57세)의 기억에 따르면 서울역 근처에 인력사무소가 몰려 있어서 일거리를 구하기 쉬웠다. 새벽이면 인력을 구하는 차량이 사람을 실어 갔다. 그래서 서울역과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것이 생계유지에 유리했다. 월세도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쌌다. 동자동은 〈몸 파는 사람〉, 〈노가다 다니는 사람〉, 〈이삿짐 나르는 사람〉, 〈신문 파는 사람〉, 〈구두 닦는 사람〉 등 도시의 다양한 하층 노동자가 몰려드는 곳이었다. 형태는 다양하지만, 1970~1980년대의 동자동은 노동하는 사람의 공간이었다. 비록 안정적인 임금노동 시장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파생된 도시 하층 노동 혹은 비공식(informal)·저임금 노동시장에 종사했다. … 이러한 도시 하층 노동은 때때로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범죄의 온상〉, 〈서울에서 손꼽히는 윤락가〉, 〈악의 소굴〉 등 동자동에 덧씌워진 윤리적 낙인은 이러한 노동 특성에서 비롯되었다."(24-5)


"칼 마르크스가 말한 〈잉여인구(surplus population)〉는 노동시장 바깥에 존재하지만 산업예비군으로서 도시의 생산 체계 안에 잠재적으로 흡수될 수 있는 이들이다. 반면 후기자본주의에 등장하는 잉여인구는 말 그대로 더 이상 노동시장이 필요로 하지 않는 '잉여'다." "외환위기로부터 약 2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버려짐의 공간'에 놓인 이들은 평균 12.8년이라는 거주 기간과 〈건강〉의 문제를 거치면서 더 이상 주변부 노동시장으로 흡수될 수도, 노동시장 바깥에서 도시 하층 노동을 담당할 수도 없는 인구가 되었다." "과거 동자동은 가난했지만 그나마 일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동자동은 일할 수 없는 인구 집단의 공간이자 임금노동시장 바깥에서 〈생존주의적 임기응변(survivalist improvisation)〉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공간이다. 이제 노동하지 못하는 인구가 된 쪽방촌 주민들은 각자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쪽방촌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형태의 개입들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33-4)


2 돌봄의 역설


"현행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1조는 제도의 궁극적 목적을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필요한 급여를 실시하여 이들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자활을 돕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상정하는 〈최저생활〉 혹은 사람다운 삶은 일상적 돌봄을 포함하지 않은 경제적 차원에서의 삶이다. 일반수급자라는 정영희의 신분은, 그녀가 지적장애라는 개인적 특성 때문에 청소, 빨래, 요리 등 삶을 가꾸고 유지하기 위한 노동을 반드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물론 정영희의 지적장애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자 선정의 핵심 요소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적장애는 그녀에게 경제적 지원 이외에 또다른 일상적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근로 능력이 없기에 임금노동으로 자활할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지적장애는 노동 불가능성을 가리키는 의료적 지표로 일반화되며, 그녀가 수급 대상자로 선정된 후에는 '52만원의 생계급여'나 '23만원의 주거급여'라는 경제적 급부로 환원된다."(64-5)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제정과 시행에서 지속적인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까닭 역시 이와 연관된다. 생계급여와 중위소득 기준 등 급여 수준 향상을 요구하는 빈민 운동계의 목소리는,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전제하는 삶의 형식이 과연 온전한 삶의 충분조건인가에 관해 문제를 제기한다. 급여 수준이 최소한의 경제적·물질적 생존만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낮기 때문에, 수급 대상자는 지출을 줄이기 위해 〈사회적 관계〉를 포함해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활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온전한 삶을 위해서는 물질적·경제적 필요가 먼저 충족되어야 하지만 경제적 삶이 곧 온전한 삶은 아니다. 그럼에도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전제하는 삶의 형식은 온전한 삶, 혹은 좋은 삶을 경제적 차원의 삶으로 축소한다. 이때 경제적 차원의 삶을 넘어서는 사회적 관계와 상호 의존, 일상적 돌봄은 실질적으로 기초생활보장제도가 개입하지도 않고 개입할 수도 없는 필연적 공백으로 남는다."(66)


"한국에서 가족은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가장 근본 단위로서 〈부양과 보호, 교육, 주택, 금융, 고용, 심지어 생산과 경영 활동〉 등 경제 생산과 사회 재생산에 이르는 전반적 영역에서 중심 역할을 차지한다. 이는 일본, 대만, 싱가포르, 필리핀 등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비슷하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하지만 정책이 의도하지 않는데도 실제 운용이 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한국의 복지 체제는 더욱 특징적이다. 가족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은 공공 부조인 기초생활보장제도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일차적인 복지의 주체를 가족으로 설정하고, 가족으로부터 돌봄과 복지를 제공받지 못하는 대상에 한해서만 수급권을 부여하는 잔여전(residual) 형태로 구성된다. 수급 신청자가 소득 및 자산 기준을 통과하더라도, 법적 부양 의무자인 '1촌 직계 혈족(부모, 자녀) 및 그 배우자(며느리, 사위 등)'에게 부양 능력이 없거나 미약하다고 판단될 때에만 수급권이 보장된다."(73-4)


"한편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지위가 말해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8조의 2 제1항 및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 제5조의6 제1항은 부양 의무자가 수급권자인 경우 부양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즉 기초생활보장법상 누군가 수급권자라는 사실은 그/그녀에게 다른 사람을 돌보고 부양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수급권자인 정영희는 아들의 법적 부양 의무자이지만, 아들을 부양할 능력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수급자라는 지위는 기초생활수급법상 그/그녀가 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의미인 동시에, 그로 인해 공적 돌봄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양육권과 연관되었을 때 이러한 지위는 돌봄을 제공할 수 있는가를 판별하는 문제로 나타났다." "결국 아들의 양육권은 전남편에게 넘어갔다. 일반수급자라는 지위는 이미 누구도 부양하거나 돌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내재하므로, 아이를 누가 돌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76-7)


3 죽은 자를 기억하는 법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죽은 자에 대한 의례의 주체는 반드시 혈연가족이어야 하며, 장례를 치러줄 다른 사회적 관계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혈연가족이 아닌 이상 모두 무연고 사망자로서 비정상적 죽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안제동과 그다지 친분이 없던 마을 주민들이 장례에 참여하고자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연고 사망자로 규정된 안제동의 죽음은 행정 절차에 따라 처리되어야 할 비정상적 죽음이자 나쁜 죽음이다. 그러나 동료 주민들이 장례에 참석해 망자와의 연고를 드러낼 때 제도가 내포한 정상적 죽음의 기준은 위태로워진다. 동료 주민이라는 사회적 관계는 분명 혈연가족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료 주민들과 안제동의 관계는 그가 무연고 사망자가 아닌 '연고 있는' 사망자라는 점을 보여준다. 주민들은 장례에 참석함으로써 산 자와 망자 사이의 연결을 드러낸다. 양자의 연결은 무연고 사망자로 규정된 안제동에게 '연고 있는 무연고자'라는 역설적 위상을 부여한다."(122-3)


"쪽방촌 주민들 사이의 관계는 서로의 과거를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는, 서로의 〈각자 사정〉을 묻지 않는 암묵적 윤리를 기반에 두고 있다. 누군가를 온전히 알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망각함으로써 주민들 사이의 연결은 가능하다. 주민들이 보여주는 연결은 완전한 연결이나 가까워짐의 형태가 아닌 부분적 거리 두기와 단절을 포함하는 망각의 관계에 가깝다. 망각의 규범은 산 자와의 관계뿐 아니라 망자와의 연결을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주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유가족이 내뱉는 모진 말과 안제동의 과거가 모두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추모와 애도받을 자격이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주민들은 유가족의 비난을 〈그렇다 하더라도(그래도)〉나 〈마지막인데〉라는 말로 전유함으로써 안제동의 과거를 망각해야 할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의도적으로 망각하지 않은 채 망자의 과거를 모두 기억할 때 그를 추모하고 애도하기 위한 연결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125-6)


"최경철과 강영섭은 모두 기초생활수급자였다. 그런데도 강영섭은 200여만 원의 장례비를 더 지불하며 최경철의 장례를 일반 장례로 치렀다. 어째서 굳이 일반 장례를 치렀느냐는 물음에 강영섭이 대답했다. 〈일반 장례식은 사흘, 나흘 만에 나갈 수가 있잖아요. 근데 무연고로 하면은 차디찬 데서, 영안실에서 짧게는 한두 달, 길면 3개월에서 6개월까지도 가요. 연고자 찾는 것도 있고 수사도 해야 하니까.〉" "무연고 장례와 일반 장례의 전반적인 절차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더라도, 비용만 지불하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반 장례에 비해 무연고 장례는 통과의례의 시작과 진행이 게속해서 지연될 수밖에 없다. 통과의례가 지연될수록 망자에 대한 추모와 애도의 시간 역시 지연되고, 그동안 망자의 몸은 얼어붙은 채 〈그 차디찬 데〉를 떠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강영섭은 실질적인 절차가 크게 다르지 않고 더 많은 비용이 드는데도 〈굳이〉 무연고 장례가 아닌 일반 장례를 치르고자 했다."(140-3)


"강영섭은 (안제동의 장례에서 주민들이 보여준 바 있는) 제도적 기준에 상징적 균열을 내는 것을 넘어 제도적 틀 자체를 우회했다. 그는 의료 기록을 통해 최경철에게 연고자가 있음을 제도적으로 증명했다. 장례에 드는 추가 비용을 감당하고 일반 장례도 치렀다. 최경철에게 부여된 무연고자의 위상을 기각하고, 그가 연고자로서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강영섭은 이에 따르는 부담과 책임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강영섭의 경제적 상황과 건강은 점차 나빠졌다. 강영섭의 쪽방을 방문했을 때, 그는 내게 수십 개의 처방전과 냉장고 전체를 가득 채운 각종 약을 보여주었다. 그가 제공한 돌봄이 스스로의 소모와 파괴를 대가로 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최경철과 강영섭은 의료 체계 안에서 형성된 연결을 통해 무연고 장례라는 제도적 틀을 우회하고 죽음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강영섭은 경제적·육체적·정신적으로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145-6)


4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


"주민협동회의 김동석 활동가가 언급한 〈길들여짐〉은 동자동 쪽방촌과 주민들을 설명하는 가장 전형적인 서사다. 〈여기는 나눠주는 게 정말 많잖아요. 이게 주민들을 마비시켜요. 이제 고마움도 못 느끼는 거죠. 나눠주면 좋아하긴 하는데 막상 물어보면 누가 준 건지도 몰라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내가 만난 모든 단체의 활동가와 관계자는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물품 지원이) 도움이 되죠. 근데 주민들이 일을 안 하려고 하고, '당연히 사회복지사 네가 나를 위해서 살려야 되는 거야' 이렇게 되요. 얼마 전에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너 뭐 하는데? 나 먹이고 살리고 입히고, 의식주 다 해결해줘야 되는 거 아니야? 국가가 너희한테 그렇게 시킨 거 아니야? 근데 왜 넌 왜 안 해?〉 자신이 사회복지사인데도 서울역 쪽방상담소관계자 황민욱은 〈너희가 먹이고 살려야 된다〉라는 말을 듣고 난 뒤 복지의 역할에 대해 일말의 회의를 품었다."(158-9)


"황민욱은 주민들이 〈실업급여〉, 〈수급〉, 〈기초연금〉, 〈근로장려금〉 같은 복지 정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을 우려한다. 물론 자활사업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장기간의 노숙이나 알코올중독, 정신질환 등으로 자활이 불가능한 예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는 주민이 아닌 한 자활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조건적인 복지와 지원 활동이다. 자활하려는 의지나 실천 없이도 생계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이 지급되기 때문에 의존적 태도로부터 벗어나기 힘들다." "따라서 의존에는 부정적인 윤리적 평가가 덧씌워진다. 의존은 윤리적 〈악〉이자 빈곤의 문화다. 또한 쪽방촌 주민들이 보편적으로 보여주는 특성인 동시에 이들을 빈곤과 쪽방촌이라는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누군가 복지 제도나 단체의 활동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은 그에게 자활의 의지와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의존은 쪽방촌의 주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낙인으로 나타난다."(164-6)


"이와 달리 김동석은 〈뭐 주는 거 없냐〉라는 마비와 길들여짐의 모습과 자신을 돌본 동료 주민을 위해 흔쾌히 〈3만 원〉을 내는 모습을 대비시킨다." "그가 바라보는 주민은 누구나 두 모습을 모두 갖고 있다. 그중 후자가 주민의 〈본모습〉에 더 가깝다. 그러나 평소에는 전자에 가려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가려져 있는 주민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드러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주민자조조직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주민자조조직이 목적으로 삼는 변화란 의존에서 독립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의존에서 또 다른 형태의 의존으로의 변화다. 김동석은 각종 물품 지원에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주민이 결국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을 지양해야 하는 까닭은 이러한 의존이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물품 지원에 대한 일방적 의존이 주민 간의 연대와 상호 돌봄, 즉 긍정적 상호 의존으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167-9)


"길게 늘어선 줄과 단체의 활동을 함께 사진으로 남기는 일은 물품 지원 사업의 필수 절차 중 하나다." "서울역과 같은 공공 공간에서의 줄서기는 보여지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실외에서 실내로 이동해야 할 불편한 대상이다. 반면 동자동 쪽방촌에서 줄서기는 〈그림〉과 〈작품〉을 연출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전시되어야 하는 광경이다. 공공 공간이 아닌 쪽방촌에서 주민들의 줄서기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물건을 나누어주는 이와 물건을 받기 위해 줄을 늘어선 주민들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동자동에서는 그것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불편함뿐 아니라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당사자가 느끼는 인격 손상과 자존감 박탈의 문제 역시 크게 고려되지 않는다. 주민들은 필요에 따라 줄을 서 물건을 받는다. 단체들은 물건을 나누어주며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다. 줄 세우기가 불러일으키는 전시 문제는 사라지고,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모두가 만족하는 〈그림〉과 〈작품〉만 남는다."(184-5)


"동자동사랑방의 사업들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사랑방 식도락은 동자동 11-22번지의 공간을 임대해 주민에게 식사를 제공한다." "식도락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공짜가 아니다. 식도락에서는 식사하는 모든 이들에게 1인당 천 원의 밥값을 받는다." "천 원의 밥값은 식사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자 자신이 받은 것을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되돌려주는 행위다." "공짜 식사는 주민들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돌려줄 수도 없다. 그래서 주민들은 마치 자신이 〈거지〉가 된 것과 같은 모욕감을 느낀다. 그러나 천 원은 비록 쪽방촌 주민들이 극심한 경제적 궁핍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큰 부담 없이 낼 수 있는 금액이다. 받은 것을 천 원의 형태로 되돌려줄 수 있는 식도락에서 이들은 〈거지〉가 아니다. 천 원을 지불함으로써 주고받음의 과정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상대방의 행위에 응답한다. 이 과정에서 주민은 식사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과 공동의 사회를 구성하고 동등한 구성원으로서의 위상을 부여받는다."(189-91)


"또 다른 호혜적 실천도 있다. 다름 아닌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다. 주민협동회의 주된 사업은 조합원들의 출자로 모인 공동 기금을 다른 조합원에게 소액으로 대출하는 것이다. 조합원이라면 누구나 10개월 분할 상환을 조건으로 최대 50만 원, 3개월 분할 상환을 조건으로 최대 10만 원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2020년 1월을 기준으로 대출 상환율은 88.5%에 이른다. 주민협동회는 난협과 마찬가지로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 사업도 시행한다. 조합원은 1만 2,000원을 내면 1년간 의료비 실비 보상을 받을 수 있고, 의료비가 10만 원 이상 발생하면 의료비 지원 신청 및 심사를 통해 최대 30만 원의 의료비를 보상받을 수 있다. 이처럼 주민들은 출자와 대출을 주고받음으로써 서로의 인격과 자존감을 보존하면서도 공적 사회보장의 빈자리를 채운다." "주민들은 일상적·조직적인 차원에서 상호 의존과 연대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서로의 인격과 자존감을 유지하고 마비와 길들여짐의 낙인을 거부한다."(192-3)


"인격 손상과 자존감 박탈을 거부하고자 하는 주민들의 또 다른 실천이 있다. 공짜 식사와 물품 지원에 따르는 비난과 헐뜯기다. 대부분의 주민은 각종 지원 물품의 필요성과 쓸모를 인정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물품을 제공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지원 물품과 단체를 비난하고 헐뜯는다."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쿵 부시맨에게는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을 모욕하고 비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만약 사냥꾼이 너무 많은 짐승을 잡으면 마치 자기가 추장이나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된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결국 자만심 때문에 언젠가는 부족의 누군가가 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시맨은 사냥꾼의 능력을 의례적으로 모욕하고 비난함으로써 교만해지지 않도록 억제한다." "주민들이 보여주는 비난과 헐뜯기는 부시맨의 〈모욕해야 할 의무〉와 비슷하다. 물건을 나누어주는 이들이 자신의 능력과 호의를 드러냄으로써 쪽방촌 주민들을 타자화하고 단순한 수혜자의 위치로 전락시키는 것을 막는 방식이다."(193-7)


"한편 천 원의 밥값을 통해 만들어지는 연대는 역설적으로 잠재적인 배제와 축출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대상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에는 필연적으로 누가 우리의 자격을 갖고 있는가에 관한 물음이 따른다." "장경진이 볼 때 서울역의 노숙인은 〈공짜〉를 기대한다. 여기서 노숙인의 인격과 자존감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애초부터 상호 인정 과정에 참여하거나 자신이 제공하는 줌에 응답할 의사가 없다. 그러므로 서울역의 노숙인은 식도락과 천 원의 밥값을 통해 상호 의존 관계를 형성한 쪽방촌 주민들과 달리 인정받아야 할 인격과 체면을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다." "천 원의 밥값은 분명 주민들이 서로의 인격과 자존감을 지키고 상호 의존의 연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 매개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천 원의 밥값을 통해 만들어진 상호 인정과 연대의 뒤편에는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고, '우리'가 아니라고 판명된 대상을 바깥으로 축출하는 구분짓기와 배제의 과정이 자리 잡고 있다."(198-203)


5 방치된 시간의 무게


"공동의 작업장과 노동 경험을 공유하는 노동계급은 노동조합 등 공동 경험에 기반한 조직화와 제도화를 통해 자본의 힘에 대항한다. 그러나 쪽방촌 주민들은 생애 전반에 걸친 매우 다양한 요인들로 빈곤을 경험하고 쪽방촌에 정착한다. 따라서 공동의 경험에서 비롯된 동질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힘들며, 노동계급에 비해 정치적 주체화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2015년 건물주의 퇴거 요구로 삶의 공간이 위협받자 주민들은 쪽방 세입자 모임을 결성하고 강제 퇴거에 공동으로 저항해 9-20을 지켜냈다. 삶의 환경에 대한 위협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위협 때문에 그동안 불가능해 보였던 주민들의 정치적 연대가 일시적으로나마 가능했다." "마침내 주민들이 낸 공사중지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지고, 서울시가 9-20 건물을 임대해 '서울시 저렴쪽방'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2015년 당시 집합행동을 통한 주민들의 〈유대〉와 〈활기〉는 9-20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을 성공으로 결정했다."(214-5)


"그러나 9-20은 5년이 지난 2020년 현재 또다시 비슷한 문제에 맞닥뜨렸다. 문제는 9-20번지의 해뜨는집이 아닌 동자동 35-145번지의 '시계토끼집'에서 불거졌다." "저렴쪽방 사업은 서울시가 민간 소유의 건물을 일정 기간 임차해 주민에게 임대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약 5년의 계약 기간 동안 서울시가 건물의 임대와 관리 및 보수에 관한 권한을 갖지만, 건물의 소유권은 건물주에게 있다. 즉 저렴쪽방은 공공재가 아닌 사유재다. 소유 주체인 건물주의 의사에 반해 더 저렴한 월세를 제공하거나, 노후한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장기간 저렴쪽방으로 임대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이러한 문제는 서울시와 건물주 간의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시계토끼집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건물주가 재계약을 거부하거나 건물의 용도 변경을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저렴쪽방의 지속가능서은 불투명해진다. 해당 건물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제대로 된 대비없이 당장 방을 비워야 한다."(216-9)


"9-20을 둘러싼 서울시와 건물주 간의 설전은 인프라의 '노후함과 황폐함'의 문제로 수렴된다. 쪽방촌의 노후함은 서울시에는 건물의 상태가 사업 기준에 미달한다는 행정적 판단으로, 건물주에게는 수리비가 쪽방 운용 수익을 초과한다는 경제적 판단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쪽방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재계약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했다. 쪽방촌의 노후한 건물이 안전규제의 대상으로 혹은 수익 창출의 수단으로 이야기되는 한 지속적인 거주를 요구하는 주민들의 목소리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9-20이 마주한 문제가 건물주의 경제적 판단이나 서울시의 무관심이 아닌 노후함 자체의 문제로 이야기되자, 주민들의 적대가 향한 과녁은 희미해지고 주거권이라는 저항의 언어 역시 힘을 잃는다." "계약 만료를 앞두고 당장 6개월 뒤면 거리로 내몰릴 위기 앞에서 더 나은 환경을 위해 장기적 저항을 기획하는 것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퇴거 위기를 막는 일이 중요했다."(229-33)


"잠재적 재개발 구역으로 존재해온 3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주민들에게는 재개발과 강제 퇴거에 관한 소문도 〈말 뿐이다〉, 〈재개발될 리가 없다〉, 〈이번에도 그냥 지나갈 것이다〉라며 별일 아닌 듯 넘어가는 것이 자연스런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건물주들의 사정은 다르다. 9-20의 건물주가 쪽방 운영을 통해 경제적 수익을 얻고 있음에도 대대적인 수리를 꺼린 이유는 동자동이 언제 개발될지 모르는 잠재적 재개발 구역이기 때문이다. 건물주는 재개발이 시작되면 당장 건물을 허물기만 해도 엄청난 재개발 이익을 올릴 수 있다. 건물에 굳이 큰 수리비를 쓰거나 환경 개선을 위해 추가 비용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유전처럼 재개발과 함께 엄청난 경제저거 이익을 가져다줄 동자동은 쉽게 손댈 수도,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는 곳이다. 결국 건물주가 최대한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은 빈곤 비즈니스, 즉 건물을 쪽방으로 운영하는 것이다."(237-8)


"그러나 동자동 쪽방촌을 낡고 마모된 건축물의 문제만으로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동자동 쪽방촌은 노후함과 열악함을 견뎌내며 이 지역을 삶의 공간으로 만들어내고자 한 주민들의 역사이자 성취이기도 하다." "주민들은 상호 의존의 연대를 통해 쪽방촌의 열악함을 견뎌내고 살아냄으로써, 그리고 점유와 참여를 통해 공간을 재구성해냄으로써 동자동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왔다. 9-20 건물에 대형 현수막을 늘어뜨리고 제대로 된 주거 정책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일 때, 새꿈어린이공원에서 재개발과 퇴거에 관한 공적 대안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 때, 공원의 한구석에 동료 주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공동 분향소를 차리고 돗자리에 둘러앉아 명절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을 때 쪽방촌은 정치적 공간으로, 추모의 공간으로, 상호 돌봄과 교류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주민들에게 동자동 쪽방촌은 노후하고 열악한 인프라를 넘어 다양한 의미와 사용가치를 제공하는 삶의 공간이다."(241-2)


"주거/퇴거 문제에서 동자동 쪽방촌이 돌봄과 사회적 관계, 공간의 의미와 가치를 포함하는 삶의 공간이라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았다. 서울시가 말하는 9-20은 건축물로서의 의미이다. 서울시가 제기한 안전의 문제는 건물의 상태가 사업 진행을 위한 행정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뜻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저렴쪽방의 연장을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한편 건물주가 이야기하는 9-20은 부동산으로서 자신이 사용하고 처분할 수 있는 사유재산이었다." "동자동 쪽방촌이 살만한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주민들이 이 공간을 상호 돌봄과 사회적 관계로 채워왔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을 견뎌내며 이 공간에 살아온 주민들의 역사는 동자동 쪽방촌이 이미 공동의 것으로서 주민들의 몫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쪽방촌의 노후함은 건축물이나 부동산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공간에 대한 위협이다. 그리고 동자동 쪽방촌에 포함된 모든 사회적 삶과 의미, 사용가치를 포괄하는 공동의 것의 위기이다."(249-50)


나가며


"이 책을 통해 벽장 안을 들여다본 독자와 쪽방촌 주민들 사이에도 부분적인 연결이 생겨났다. 이 연결이 지속될 수 있을지, 지속된다면 언제까지 가능할지, 또 어떠한 형태로 지속될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벽장과 그 바깥의 부분적인 연결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물음과 계속해서 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그 방식은 같지 않을지라도, 각자 벽장 안의 고통에 윤리적으로 응답하는 일 또한 이러한 물음을 놓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타자의 삶을 모른다. 쪽방촌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에도 결국 주민들이 사회적 버려짐을 경험하는 까닭은, 이러한 시도가 전미래 시점에 서서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구원적 미래를 너무나 섣불리 제시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여기의 모습'을 그려내는 작업은 중요하다. 공통의 구조 위에서 벽장 안팎의 부분적 연결은 드러난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윤리적 응답은 이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262-3)


# 전미래 시제(前未來 時制, the future anterior) : 일종의 구원적 미래(redemptive future)를 상상하고 그것을 목표로 삼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이때 현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일부이자 현재에 도래한 미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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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현대사 5 - 개발주의 시대로 1972-2014 중국근현대사 5
다카하라 아키오.마에다 히로코 지음, 오무송 옮김 / 삼천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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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혁명에서 발전으로, 1972~1982


"마오쩌둥 사상에는 개발주의적인 사고와 급진주의적인 사고가 병존했다. 마오쩌둥은 만년인 1974년 연말부터 1975년에 걸쳐 서로 대립되는 듯한 세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부르주아의 여러 권리를 제한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노동에 따른 분배라는 사회주의 분배 원칙을 부정하고, 화폐 교환이나 상품마저도 비판하는 상당히 급진적인 지시였다. 이 지시는 '4인방'에 이용당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을 학습하는 운동을 추진하는 근거가 되었다. 두 번째는 안정과 단결에 관한 지시였는데, 이는 주로 '4인방'을 대상으로 한 비판이었다. 파벌적인 권력투쟁에 대한 충고이자 지도부는 단결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세 번째는 경제를 담당하는 부총리 리셴넨에게 내린 국민경제 수준을 끌어올리라는 지시였다 이 지시에 따라 덩샤오핑을 요직인 당 부주석, 제1부총리, 총참모장에 앉히고, 병석에 있는 저우언라이를 대신하여 당 중앙의 일상 활동을 책임지는 자리에 서게 했다."(33-4)


"1976년 2월, 총리대행으로 지명되었고, 그 해 10월 6일에는 주도적으로 '4인방'을 체포한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결정과 지시를 견지하는 이른바 '두 가지 범시론'이라는 방침을 표방해 왔다. 여기에 화궈펑은 〈마오 주석의 이미지를 손상하는 모든 언동을 제지해야 한다〉며 또 하나의 '범시'를 추가로 제기했다. 화궈펑이 보기에, 마오쩌둥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중국공산당 및 그 지배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1977년 1월 저우언라이 서거 1주기 무렵, 베이징을 비롯한 몇몇 크고 작은 도시에서 사람들의 자발적인 추도 움직임이 나타났다." "화궈펑 등은 이 때 '두 가지 범시론'을 제창했다고 알려졌다. 즉 '4인방' 잔당과의 투쟁이 계속되는 와중에서 마오쩌둥의 유훈에 따르고, 만사를 〈과거의 방침에 따라야〉한다고 명확히 함으로써 권력 이행기에 대국의 안정을 확보하는 동시에, 그 시점에서 천안문 사건의 명예회복과 덩샤오핑의 부활을 좀 더 직접적으로 저지하려고 생각했을 것이다."(42)


"그러나 화궈펑과의 사상 노선 투쟁에서 승리한 덩샤오핑이 도입한 개혁 정책은 무엇보다 분권화였다.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 지방이나 기업에 예전보다 큰 경제상의 권한을 주었고, 노동에 따른 분배 원칙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보너스 제도나 작업량에 따른 임금지불 제도를 부활시켰다. 둘째로, 부분적인 시장 도입, 곧 생산과 유통에 관한 규제를 완화하고 가격 자유화를 실시했다. 세 번째로, '개체호'(個體戶)라고 일컫는 자영업을 허용함에 따라 고용이 창출되었다. 규모가 큰 개체호가 나타나면 최종적으로 민간 기업으로 인정을 받았다. 농촌에서는 대약진 때에 만들어진 농촌 공업의 기초 위에 마을 운영이나 개인 경영 등을 통한 '향진(鄕鎭) 기업'이 발전했다. 이러한 새로운 경제 주체는 계획 대상에 들지 않았고 시장에서 스스로 살아남아야만 했다. 즉 인구 압력에 따라 계획경제의 틀에서 빠져나온 경제 주체가 늘어나 시장경제가 자연스럽게 확대되는 메커니즘이 생긴 것이다."(53)


2장 개혁개방을 둘러싼 공방, 1982~1992


"1980년대 초반, 중국은 소련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으며, 소련에 대한 전략적 관점에서 대일 관계를 고려하는 경향이 여전히 강했다." "하지만 1982년 9월 제12회 당대회의 정치보고에서, 후야오방 총서기는 '독립자주 외교'로 전환한다고 밝히고 '전방위 외교'를 제창하며 소련과 관계 개선을 모색하게 된다. 독립자주 외교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미국과 거리를 조정하는 데 있었다. 당시 중국으로서는 대미 관계에서 최대 현안 문제가 미국의 타이완에 대한 무기 수출이었다. 1981년에 등장한 레이건 대통령은 친타이완파로 알려졌고, 그해 말에 전투기 부품과 공군 서비스를 타이완에 수출한다고 결정함으로써 중국 측의 맹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82년 8월 미중공동코뮤니케가 발표되어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제12회 당대회 정치보고는 초강대국의 패권주의를 통렬히 비판했고, 중국은 〈그 어떤 강대국 또는 국가 블록에도 의존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68)


"중국은 초강대국(미국과 소련)의 패권주의에 대해 비판했지만 종래의 '반패권 통일전선' 노선은 드러내지 않았다. 국방 건설보다는 경제 건설을 우선하는 덩샤오핑에게는 소련과의 관계 개선과 국경 지역의 긴장 완화가 더 중요한 과제였다." "그 배경에는 소련에게 강경한 자세를 보이는 레이건 정권의 등장으로 말미암은 미소 관계의 악화가 있었다." "1985년에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하고,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재검토하면서 중소 관계는 호전된다. 미중·중소 관계가 개선되면서, 1988년 덩샤오핑은 〈국제정치 분야는 대결에서 대화로, 긴장에서 완화로 전환되고 ······ 현재는 국제정치의 새 질서를 수립해야 할 시기〉라고 발언했다 .1989년 5월, 중·소 두 나라는 평화 5원칙을 담은 '베이징코뮤니케'를 발표한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를 추진하던 고르바초프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공산당 지도부, 특히 좌파들한테는 경계의 대상이었다."(69-72)


"천안문 사건 후 덩샤오핑도 더는 당정 분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해체됐던 정부 기관의 당조가 부활하고 노동조합 등 조직들의 당으로부터 자립이 부정되었다. 1990년대에 실시된 공무원 제도는 1987년의 구상 단계에서 목표로 했던 정치적 중립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정치개혁은 거의 정지 상태에 빠졌다." "특히 1991년 8월 소련에서 발생한 보수파의 쿠데타가 실패한 뒤로 좌파의 위기감과 공세는 강해졌다. 덩리췬은 사회주의 사회의 계급투쟁을 소유제와 결부시켜 공유제와 외자, 개인 경영 등 사유제 사이에는 모순과 투쟁이 존재한다고 역설했다. 나아가 문혁기와 같은 어조로, 이런 모순은 사회주의의 길과 자본주의의 길 사이 모순이며 이런 현상이 당내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2월에 열린 전국 조직부장 회의에서 다음해 당대회의 인사 정책이 검토되었지만, 회의에서 결정된 간부 선정의 첫 번째 기준이 된 것은 사회주의와 당의 영도에 대한 충성 그리고 천안문 사건 때의 언동이었다."(91-5)


3장 사회주의의 중국적 변화, 1992~2002


"1992년 초, 덩샤오핑은 상하이에서 우한을 경유해 광둥 성의 경제특구를 시찰한다(제2차 남방시찰). 그는 지방 간부들한테 대담하게 개혁과 개방을 가속화하도록 강하게 호소했다. 일부러 광둥 성까지 발길을 넓힌 이유는, 그 전해에 상하이에서 발신한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중앙 선전 부문 등의 저항 때문에 선전 효과가 적었던 데 있었다. 이번 걸음은 홍콩의 미디어를 활용하여 반격의 봉화를 올린 것이다. 남방시찰을 통해 지방의 불만을 규합하여 중앙의 정국을 움직이려는 방법은, 대약진이나 문화대혁명을 발동할 때 마오쩌둥의 방식과 같았다. 덩샤오핑으로서는 이 발걸음이 중대한 국면이었고 말 그대로 건곤일척의 행동이었다. 생산력과 국력, 생활수준의 향상에 유리한 제도나 정책이라면 그것은 사회주의다라는 '세 가지 유리론' 등을 내용으로 한 덩샤오핑의 남방담화는, 먼저 홍콩의 미디어를 통해서 전 세계로 전해졌고, 다시 중국에 역수입되어 경기 침체에 고민하고 있던 지방 간부들의 강한 지지를 얻었다."(99)


"제2차 천안문 사건(1989) 직후에 덩샤오핑은 기존 교육의 실패, 특히 일반 인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상정치 교육의 실패가 사건을 일으킨 큰 원인이 되었다는 인식을 표명했다. 또 장쩌민도 민주화 운동을 매국주의라고 단정하고 전국 학교에 애국주의 교육 강화를 지시했다. 자국의 문화나 국제적 지위, 국력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려는 내셔널리즘은, 근대 이후의 중국 지도자들이 본질적인 동기로 되어 왔다. 그리고 1990년대 중엽 덩샤오핑에서 제3세대 지도자로 권한 위양이 완료되면서, 내셔널리즘을 국민 통합에 이용하려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1994년 8월에 발표된 〈애국주의 교육 실시 강요〉는 애국주의를 전 사회가 학습해야 할 과제로 규정하였다." "그전까지의 애국주의 교육이 마오쩌둥이나 공산당 영웅들의 정신이나 무용(武勇)을 강조하는 면이 강했던 데에 비해,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애국주의 교육은 열강으로부터 받은 침략이나 굴욕을 강조하는 피해자의식을 심어주는 특징이 있었다."(113-4)


"2001년 7월 1일 중국공상당 창립 80주년 기념강의에서 장쩌민은 사영 기업주,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을 실질적으로 용인하였다. 본디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전위이며 자본가는 계급의 적이나 다름없었다. 자본가를 입당시킨다는 대담한 결정에는 당 내부의 저항도 컸다. 그러나 반대의 목소리는 억제되어 2002년의 제16회 당대회에서 당 규약이 개정되고, 중국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전위임과 동시에 중국 인민과 중화민족의 전위라고 규정되었다. 그 이론적 근거가 된 것은 2000년 2월에 장쩌민이 자신의 '중요 사상'으로 제시한 '세 가지 대표론'이었다. 공산당이 '선진적 생산력의 발전, 선진적 문화의 전진, 가장 광범위한 인민 대중의 근본적 이익' 세 가지를 대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공유제의 포기와 실질적인 사유화가 진척된 결과, 필연적으로 신흥 사회 세력으로 대두하는 사영 기업주를 '광범위한 인민'에 포함시킨 데 있었다. 이렇게 해서 공산당은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전환한다."(135)


4장 두 개의 중앙 지도부, 2002~2012


"후진타오·원자바오 정권은 실로 미묘한 당내의 세력균형을 기초로 성립한 정권이었다. 오랫동안 중앙 지도부에 있었던 리펑이나 리루이환, 주룽지까지 은퇴했지만, 장쩌민의 영향력은 짙게 남았다. 돌이켜 보면 덩샤오핑은 제2차 천안문 사건 이후 장쩌민을 '제3세대 영도 집단의 중핵'이라고 부르고, 다른 지도자에게 장쩌민의 권위를 존중하도록 시달하면서 〈어떤 영도 집단에도 반드시 중핵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덩샤오핑의 이 생각은 총서기 자오쯔양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자신의 대립이 당시의 위기를 불러온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반성에서 나왔다고 추측된다." "그런데 이른바 그 은혜를 받은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유훈을 돌아보지 않았다. 후진타오 정권은 '후진타오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이 아니고, '후진타오 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 중앙'이라는 미묘한 호칭밖에 얻지 못했다. 이렇게 장쩌민과 후진타오를 각각 중심으로 하는 '두 개의 중앙'이 존재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142)


"2003년 이후부터 활발해지던 홍콩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 당초 후진타오 정권은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몇 년 후 홍콩에서 2007년의 행정장관 직접선거나 2008년의 입법회 전면 직접선거에 대한 요구가 나오자, 2004년 초 장쩌민은 선전에서 '홍콩 지도층의 주체는 애국 인사로 구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덩샤오핑의 경고를 되풀이했다." "타이완을 향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표명한 장쩌민은 1998년에 통일의 시간표가 필요하다고 발언하면서, 타이완 당국이 교섭을 무기한 연기할 경우 무력행사도 배제하지 않는 정책을 취했다. 반면 후진타오는 2005년 4월에 롄잔 국민당 주석을 대륙으로 초청하여 국공 양당의 역사적인 화해를 연출하였다. 그리고 9월의 항일전쟁·반파시즘전쟁 승리 60주년 기념대회에서 후진타오는, 국민당이 항일전쟁의 '정면'에서 주체로 싸우고 공산당은 '적의 후방 전장'을 지도하는 국공 양당의 분업이 이루어졌다고 발언하며 국민당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152-3)


"공산당에게 큰 과제로 떠오른 것은 후진타오 정권기에 폭발적으로 발달 보급된 인터넷에 대한 관리였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정보 발신 능력을 갖춘 일반 국민들이 당간부의 독직 부패나 권력 남용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동하는 사회를 안정시키는 방법에 대해 당내의 의견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다. 후진타오에 따르면, 여러 이익 충돌이 발생하고 있기에 사람들의 불만과 요구 표출이나 모순의 조정과 권익 보장 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메커니즘을 한층 더 정비해야 했다. 여기에는 이른바 시민사회, 즉 시민이나 농민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조직되는 사회 조직을 활용하려는 사고방식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저우번순 중앙정법위원회 비서장은 《구시》(求是)에 논문을 발표하여 〈'공민사회'(civil society, 시민사회)는 서방이 중국을 목표로 설계한 올가미이다〉라고 단정했다. 중앙정법위원회란 경찰이나 사법 등 치안을 담당하는 부문의 총괄 부서인 강력한 당 기관이다."(173)


5장 초강대국 후보의 자신감과 불안, 2012~2014


"2012년 11월 15일에 열린 제18기1중전회에서 시진핑 총서기가 선출되었다. 그로부터 2주 후, 시진핑은 새로운 상무위원들을 인솔하여 국가박물관을 방문해 '부흥의 길'이라는 전시를 참관했다. 근대 이래 중국이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공산당의 영도 아래 당당한 나라가 되었음을 보여 주는 전시회에서 시진핑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이 중국의 꿈(中國夢)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사회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인맥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고, 좋은 회사에도 들어갈 수 없는 연고주의의 만연이었다. 가령 회사에 들어가도 출세할 수 없다는 개인으로서의 차이니즈드림이 시들어 버린 것이었다. 거기에서 차이니즈드림(중국인의 꿈)을 대신하여 국가 차원의 차이나드림(중국의 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어넣었다. 이는 곧 국가가 세계 챔피언이 됨으로써 개인의 꿈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는 내셔널리즘의 스토리였다."(190-2)


"시진핑의 말투나 행동에서 마오쩌둥을 방불케 했다. 예를 들면, 2013년 1월에 시진핑은 새 중앙위원회 위원들한테 한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훈계 발언을 했다. 〈개혁개방의 전후 시대를 대립적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즉 개혁개방 후의 역사를 이용하여 개혁개방 전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도, 개혁개방 전의 역사를 이용해서 개혁개방 후의 역사를 부정해도 안 된다.〉 이는 문화대혁명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개혁개방에 착수했던 덩샤오핑과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이다. 덩샤오핑은 좌파도 우파도 사회주의를 멸망시킬 수 있다며, 중국은 우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좌를 방지하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한다고 남방담화에서 밝혔다. 이에 대하여 시진핑은 문혁을 되돌아보며 〈7년 동안의 상산하향(上山下鄕)의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대중과 비교적 깊은 정을 맺게 하고, 성장과 진보를 위하여 비교적 좋은 기초를 쌓았다〉고 회고했다. 시진핑은 문혁을 고난을 극복한 성공 체험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194-5)


"'붉은 2대'(紅二代)라고 불리는 태자당은 일반적으로 혁명의 이념을 중시하면서도 개발주의에 편승하여 경제를 활성화시키지 않으면 지배의 정통성을 잃는다는 점도 알고 있다. 보시라이가 충칭에서 실천한 바와 같이 경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면서, 혁명 정신을 환기하여 사람들의 정서를 하나로 모으는 것은 많은 태자당들의 이상이었을 것이다. 독점 권력 아래에서 시장화를 진행한 결과, 사회 모순이 커졌고 개발주의만으로는 인심을 모을 수 없었기에, '붉은 2대'는 혁명 회귀나 내셔널리즘을 국민 통합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30여 년의 개발주의 정책을 통해 사회는 크게 변했다. 중국의 발전과 글로벌화는 상호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경제성장 속도가 계속 느려지면, 언젠가 보수·국수주의와 개혁·국제주의의 줄다리기가 치열해질 것이다.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는 시진핑은 현재 전자를 후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붉은 3대'는 아직 없고 표변하는 군자가 나타나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201)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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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현대사 4 - 사회주의를 향한 도전 1945-1971 중국근현대사 4
구보 도루 지음, 강진아 옮김 / 삼천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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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전후의 희망과 혼돈


"전쟁이 끝났다는 것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일치단결한다는 대의명분이 사라졌음을 의미했고, 국내의 다양한 정치 세력 간에 격렬한 항쟁이 펼쳐지게 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 민중들 사이에는 부흥을 바라며 〈더 이상 전쟁은 사양한다〉는 내전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저우언라이는 공산당 대표로 충칭에 머무르면서 이러한 여론 동향을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내전에 반대하고 평화를 주장하는 것이 지금 가장 인심을 얻을 수 있는 슬로건이다〉라고 거듭 옌안의 당 중앙에 보고하여 주의를 환기시켰다." "국제적으로는 국민정부 아래에서 안정된 통일 중국 재건을 기대하는 미국 정부가 필사적으로 국공 양당 사이를 조정하였고, 소련도 중국에서 내전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국민당 역시 전후 헌정을 실시하겠다는 구상을 제시하고, 전쟁이 끝나면 국민당 일당독재 체제인 '훈정'을 끝내고 민주적 헌정을 실시하겠다고 공약했다."(18-20)


"경제개방 정책의 파탄과 구일본군 점령지 경제 접수 작업의 혼란은 전후 국민정부의 재정경제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생산과 유통의 재건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시장에 공급되는 물자가 부족해지고 물가가 상승했다. 게다가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는데도, 국민정부는 국공내전을 준비할 전비(戰費)를 확보하려고 방대한 적자예산을 편성하고 통화를 남발하여 인플레이션을 가속화했다. 당연히 물가는 폭등했다." "국민정부가 내놓은 인플레이션 대책은 통화를 새롭게 바꿈으로써 물가를 억제한다는 방안이었다. 1948년 8월에 금원권(金圓券)이라는 새로운 통화가 발행되었다. 정부는 종래의 법폐 300만 위안을 금원권 1위안으로 강제로 교환하도록 하여, 물가와 임금 동향을 진정시키려 했다. 금원권이란 신화폐를 유통시켜 표시 가격을 인하하면서 물가와 임금을 동결한 과격한 해법이었다. 그러나 규제를 싫어하는 시장에서 상품이 모습을 감추고, 물물교환이 확대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이 개혁은 실패했다."(31-3)


"1946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헌법제정국민대회가 열렸다. 정당 중에 국민당, 청년당, 민주사회당이 출석했을 뿐이었다. 공산당과 민주동맹은 국민당이 정치협상회의의 결의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고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하려고 한다며 항의의 표시로 대회 출석을 보이콧했다. 국민당의 강경책은 일시적으로는 국민정부의 통치를 강고한 것처럼 보이게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국민당의 지지 기반을 좁히고 약화시켰다. 헌법 시행(1947년 12월)에 따른 입법 활동을 위해 1948년 3월에 열린 국민대회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한층 두드러졌다. 대회 대표를 뽑는 선거에서 수도 난징에서조차 유권자 147만 명 가운데 80퍼센트가 기권할 정도였다. 여기저기서 선거를 둘러싼 매수 사건과 폭력 사태, 대리투표가 끊이지 않아 국민들에게 환멸을 주었다." "대조적으로 공산당은 생계보장과 내전 반대,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운동에 연대하는 자세를 취했다. 국민정부의 정치적 고립은 심화되었다."(37-40)


2장 냉전 속의 국가 건설


"1949년 10월, 인민공화국 건국 당시의 국가기구를 보면 각 성청(省廳)의 장관에는 민주당파가, 부책임자에는 공산당원이 취임하는 패턴이 많았다. 지방정부 조직에서도 마찬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얼핏 보면 청조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수립한 1911년 신해혁명 때, 성청 장관에는 청의 개혁파 세력이던 입헌파가 취임하고 부책임자로 혁명파가 취임했던 상황과 비슷하다. 신해혁명 당시 상황은 현실 정치의 힘 관계가 반영된 결과였다. 하지만 1949년 혁명의 경우 실권은 대부분 공산당이 장악했으면서도 정권 밖의 일반 사회에 대해서 당외(黨外) 세력이 존중받고 있음을 과시하고, 당외 세력들한테서 새 정권이 신뢰와 협력을 얻어 내기 위한 방책으로서 이런 체제가 채용된 면이 강하다. 실제로 그 후 공산당이 사회주의로 조기 이행에 착수하고, 특히 1957년에 잠재적인 정권 비판자를 적발하는 '반우파' 투쟁을 전개하면서 당외 세력 대부분은 정권 밖으로 배제되었다."(63)


"한국전쟁에 따른 재정적·경제적 부담에 대처하고 국민경제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증산과 절약을 호소했다. 그 일환으로 1951년 12월에 3반운동(三反運動)이 시작되었다. 원래 이 운동은 전시경제 체제 아래에서 생겨난 오직(汚職), 낭비, 관료주의 세 가지 부정적 현상을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이 적발하고, 세 가지에 반대하여 증산과 절약을 달성하자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3반운동을 거치면서 국민정부 시대부터 계속 일해 온 전문가나 경제 재정 관료에 대한 공산당 정권의 통제와 감시가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 민간 기업에 대한 비판도 확대되었다. 1952년 1월 말부터 시작되어 6월에 일단락되기까지 5반운동(五反運動)이 전개되었다. 5반이란 뇌물 공여, 탈세, 정보 누설, 부실공사, 공공재 절도 등 증산과 절약을 방해하는 민간 기업의 다섯 가지 행위에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5반운동으로 개별 민간 기업 경영자에 대한 공산당 정권의 통제와 감시도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83-5)


"신민주주의를 내걸고 출발한 공산당 정권은 1952년 후반부터 이듬해 전반까지 사회주의화 강행으로 크게 방향을 선회했다. 왜 공산당 정권은 사회주의화를 서두른 것일까." "무엇보다 공산당 지도부는 현대적 장비를 갖춘 미군과 대결한 한국전쟁에서 자국의 빈약한 장비에 위기감을 통절히 느꼈다. 그래서 소련이 선전하는 군수공업을 축으로 한 급속한 공업화를 본보기로 삼으려고 했다." "두 번째로 3반운동과 5반운동이 전시체제하의 증산과 절약을 목표로 전개된 결과, 민간 기업에 대한 통제가 이미 눈에 띄게 엄격해졌다는 점이다. 큰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상공업의 전반적인 집단화와 국영화를 실시하는 데 수월한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세 번째로 농촌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주도한 토지개혁으로 지나치게 영세한 경영이 이뤄지면서 농업 생산이 저조해진 바람에,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도 (집단화를 추진한) 1930년대 소련이 모델이 되었다."(86-7)


3장 '대약진운동'의 좌절


"중국이 소련형 사회주의의 길을 선택한 직후인 1956년, 이러한 사회주의의 장래에 대한 신뢰를 뒤흔든 큰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소련에서는 중국이 모델로 삼으려 한 스탈린 시대의 실태가 폭로되면서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이어서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에서는 사회주의화 강행에 항의하는 대규모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더해 중국 내에서도 식량과 일용품을 공급하는 농업과 경공업 생산이 저조했기 때문에, 민중들 사이에 사회주의에 대한 불만이 분출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심각한 위기감을 안고 대응책을 모색했다." "표면적으로 중국은 소련에 동조하여 동유럽 국가들의 민중운동 탄압을 지지하는 태도를 분명히 했지만, 실제로는 사태를 무척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소련이 동유럽에 개입하는 근거로 삼은 '제한주권론' 주장, 즉 사회주의국가들 사이에는 사회주의를 방위하기 위해 각국의 국가주권이 제한될 수도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강한 불신감이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101-4)


"그렇지만 1950년대 중국은 뭐니 뭐니 해도 소련형 사회주의를 모델로 삼고 있었고, 소련의 기술과 경제, 군사원조에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은 1957년 10월 소련과 '국방 신기술에 관한 협정'을 맺고, 소련이 원자폭탄의 견본과 원폭 생산의 기술 자료를 제공하기를 학수고대했던 것이다." "사실 중소 국방신기술협정이 체결에서 파탄에 이르는 중간에, 중국군은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6일에 걸쳐 포탄 44만 발을 샤먼 앞바다의 진먼 섬에 퍼부었고, 섬을 수비하는 타이완 정부군을 공격했다. 이때 미군은 타이완에 군수물자를 지원했을 뿐,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한편 중국군도 진먼 섬으로 상륙하는 작전은 강행하지 않은 채, 40일 동안 봉쇄와 포격으로 일관했다. 중국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타이완 해방'을 위해서는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소련에 통고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의사를 전달받은 소련의 회답은 국방신기술협정의 파기였다."(111-2)


"공산당 정권의 정치적·경제적 난항을 급진적 사회주의화 정책으로 타개하고자 하는 마오쩌둥 일파가 점차 소련과 대립을 심화시켜 나가면서 종래의 소련 모델과는 다른 사회주의를 모색하여 밀어붙인 것이 대약진운동이었다." "소규모 간이 용광로(土法高爐)를 이용한 제철이나 댐 건설에 수많은 민중이 동원되었다. 동시에 땅을 깊게 갈고 작물을 촘촘히 심어 증산을 꾀하는 농사법(深耕密植)이 장려되었으며, '인민공사'(人民公社)라고 불리는 대규모 집단농장화가 추진되었다." "하지만 토법고로, 심경밀식, 인민공사는 어느 하나도 뜻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끝나 버렸다. 아니, 오히려 참화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연이은 대흉작 속에 중국 경제는 전면적인 붕괴 위기 직전까지 내몰렸다." "차후에 공표된 인구통계에 기초하여 추계해 보면, 식량도 물자도 부족한 이 시기에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적어도 2천만 명 이상이 기아나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그야말로 참상이었다."(123-35)


4장 시행착오를 겪는 사회주의


"(지도부가) 대약진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실패의 주된 원인은 자연재해였다고 규정함으로써, 대중 동원에 기댄 고도경제성장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제기되지 않았다. 국가주석에서 물러난 마오쩌둥도 공산당 내에서 당 주석으로 수장의 지위를 계속 지켰다. 1960년 경제계획은 〈세계 과학기술의 정상에 도달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그해부터 막대한 자금과 에너지가 들어가는 핵무기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 개발계획은 조정 정책 아래에서도 계속되었다. 화근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한편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호소하는 등 다시 급진적 사회주의화 정책에 도전할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원래 농업과 경공업 진흥을 중시하는 조정기의 방침 자체가 중화학공업화 노선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1964년부터 추진된 제3차 5개년계획(1966~1970) 책정 작업에서 특히 중시된 것은 내륙지역에 군수공업 기지를 건설하는 '3선정책'(三線政策)이었다."(144-6)


"조정기의 동향은 단순히 경제정책의 수정에 그치지 않고, 공산당의 통치 방식 그 자체까지 수정할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농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표된 1961년 6월 15일의 지시에는 〈농촌 생활에 관여하는 간부나 일반 민중에 대해 우경화니 '좌경화'니 하며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는 것은 앞으로 금지한다. 그들에 대해 정치적 딱지를 붙이는 것을 금지한다〉고 명기하였다. 7월 19일의 지시는 더욱 명확하게 〈'반우파' 투쟁 이후, 각 대학이나 기업에서 일부 지식인들에게 가한 비판은 재검토해야 한다. ······ 만약 잘못된 비판이 가해졌다면, 시시비비를 바로잡고 잘못을 고쳐야만 한다〉고 하여, 급진적 사회주의의 주도 아래 수많은 당원이나 전문가에 대해 과도한 정치적 비판이 거듭된 1957년 '반우파' 투쟁 이래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따라서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이 조정기 정책에 불만을 품고 저항하는 자세를 강화해 가는 것은 피하기 어려웠다."(159)


"그 무렵 안후이 성과 광시 성에서는 농민이 촌(村)에서 농지를 빌려 경작하고 수확한 농작물 일부로 촌에 차지료(借地料)를 지불하는 도급 경작이 확산되고 있었다. 차지료를 지불하고 남은 농작물이 전부 농민의 수입이 되었기 대문에 농민의 경작 의욕을 자극하여 전체 농촌 생산도 증가했다. 그러한 움직임에 기초하여 농촌 증산을 꾀하기 위해 개별 농가의 도급 경작도 인정해야 한다는 방침을 공산당 중앙의 농촌사업부장 덩쯔후이가 제기하자, 이를 받아 덩샤오핑도 〈안후이 성 동지들은 '검은 고양이든 얼룩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게 좋은 고양이다'라고 말한다. 그 말은 일리가 있다〉라며 도급 경작을 지지하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 직후 1962년 7월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위원회에서 덩샤오핑이 한 발언이 뒷날 유명해진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게 좋은 고양이다〉라는 어구이다. 이러한 동향에 대해 마오쩌둥은 도급 경작은 집단농업의 해체로 이어지는 조치라면서 강하게 반대했다."(160-1)


5장 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의 배후에는 경제조정 정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공산당 지도부 내부의 다툼이 있었다. 마오쩌둥이 지향하는 급진적 사회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세력은 적었고, 당내 다수파는 경제조정 정책의 방향성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오쩌둥이 영향력을 직접 행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역 가운데 하나가 부인 장칭이 인맥을 가진 당의 문화선전 부문이었다. 이리하여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부의 항쟁이 '문화혁명'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전개되었다. 또한 국제 환경 아래, 한쪽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면서 미국과의 대립이 격화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회주의 건설 노선의 차이와 국경선 획정을 둘러싼 분쟁으로 야기된) 소련과의 대립 역시 심화되면서, 중국 지도부가 한층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던 점도 주의해야 한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지도력을 확립해야 한다는 절박한 생각은 가혹하고 치열한 정치투쟁이 나오게 된 배경이 되었다."(177-8)


"각지에서 혼란이 일어난 배경에는 문혁으로 기존의 사회질서가 파괴된 가운데 그때까지 억압당해 온 여러 사회계층의 불만이 분출한 측면이 있다. 미국의 베이비 붐 세대, 일본의 단카이 세대(團塊世代)에 해당하는 중국의 홍위병 세대는, 중국 경제가 계속해서 침체된 가운데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쉽사리 정규직을 찾지 못하고 우울감에 휩싸여 있었다. 늘어만 가던 전후 출생 젊은 실업자 내지 반실업자들이야말로 홍위병을 자칭한 학생이나 문혁파 노동자들의 주된 공급원이었다." "한편 어느 정도 안정된 직장을 가진 대다수의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은 이미 대약진 정책의 파탄에 실망하여 환멸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문혁파가 내건 급진적 사회주의화 정책은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그나마 노동자의 생활을 개선하고 농촌 경제를 활성화시킨 경제조정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을 뿐, 급진적인 사회주의화 정책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183)


"홍위병은 원래 계통적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발족 당시인 1966년 8월 무렵부터 여러 가지 의견 차이로 분열과 다툼이 거듭되었다." "아무리 문혁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공산당 지도부라 해도 이런 사태에는 당혹감을 느껴 충돌을 억제하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우한의 7·20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1967년 7월 20일 항쟁 조정에 나선 공산당 중앙의 문혁파 간부 왕리와 셰푸즈가 문혁에 비판적인 '백만웅사'(百萬雄師)라는 현지 민중 단체에게 억류되어, 문혁파 계열 조직을 옹호하는 방침을 철회하도록 압박당한 사건이다. 이 행동에 참가한 2천 명의 주력은 공사용 헬멧을 쓰고 트럭 27대와 소방차 8대에 나눠 탄 채 밀고 들어온 노동자들로, 이들을 지지하는 시위대에는 1천 명 가까운 군인들까지 가세했다. 이러한 조직적 행동은 당 조직과 군의 지지 없이는 일어나기 어려웠다. 문혁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가 민중들뿐 아니라 기존의 당 조직과 행정 간부, 군부 사이에도 퍼져 나갔음을 알 수 있다."(189-91)


6장 문혁 노선의 불가피한 전환


"1966년에 문혁의 영향으로 대학교 입학생 모집 업무가 정지된 뒤로 1968년까지 3년 동안 1천만 명이 넘는 고등학교 졸업생이 진로를 정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런 불안정한 상태의 젊은이들이 홍위병 운동의 주된 인력 공급원이기도 했다. 따라서 홍위병 활동을 완전히 봉쇄하려면 그들이 나아갈 길을 정해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문혁의 혼란으로 생산력은 떨어지고 도시 상공업의 일자리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제기된 것이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이었다. 도시 지역에서 학교를 졸업한 뒤 농촌이나 오지의 공장에 가서 일하는 것을 '하방'(下放)'이라고 불렀다. 1968년 11월 15일 당·정부·군은 연명으로, 문혁 시기에 공부할 시간도 없이 졸업반이 되어 버린 학생들이나 진로를 정하지 못한 졸업생들에게 모두 직장을 정해 주겠다는 방침을 알렸다." "하지만 생산 현장에서 농민과 노동자한테 배우자는 말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 허울뿐인 성가신 존재를 쫓아 버린 것이었다."(204)


"문혁이 시작되던 시기의 중국은 미국과 소련 두 나라와 군사 충돌을 대비하면서, 동시에 '인도 반동파'와도 '일본 군국주의'와도 대결한다는, 이른바 사면초가에 가까운 고립감을 느끼며 세계와 접촉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 운동을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무력으로 개입하여 저지하고, 1969년에 중국과 소련의 국경분쟁이 일어난 뒤에는 긴 국경을 접하고 있는 소련의 위협이 가장 절박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지하 방공호를 건설하는 것을 비롯하여 1969년 가을부터 1970년에 걸쳐 전시체제를 강화한 것도 특히 소련의 공격을 의식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미국과 소련의 움직임을 검토하고 국제 전략을 논의하면서 얻은 결론은, 미국과 소련 간의 모순을 이용하여 우선은 미국과 관계 개선을 꾀하고 소련의 공격을 견제하자는 것이었다. 베트남전쟁의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던 미국도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서 이익을 찾아내고 있었다."(219-20)


# 1971년 7월, 베이징에서 키신저 국무장관-저우언라이 총리 회담 성사


"1971년 9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된 린뱌오가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한 뒤, 국외로 도피하려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1971년 10월 유엔총회는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유일한 합법적 대표권을 인정하고, 중국을 다섯 상임이사국 가운데 하나로 맞아들이는 동시에, 타이완을 유엔과 그 관련 기관들에서 배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린뱌오 사건이 일어난 지 겨우 한 달 뒤의 일이었다. 중국 국내의 권력투쟁이 어두운 심연을 슬쩍 드러낸 직후에, 나라 바깥에서 화창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 셈이다. 물론 이 유엔총회의 결의는 타이완 외교에서는 고난의 길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문혁 시기에 실각한 덩샤오핑이 복귀하여 중국 정부의 부총리로 유엔총회에 참여한 것은 1974년 4월의 일이었다. 이제 개혁개방 정책으로 전환하는 일은 임박해 있었다. 문혁의 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미 역사의 수레바퀴는 문혁 이후를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226-7)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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