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 사람들 - 왜 돌봄은 계속 실패하는가, 2021년‘올해의 인권책’선정
정택진 지음 / 빨간소금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들어가며


"서울시 용산구의 일명 '동자동 쪽방촌'은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빈민 밀집 거주 지역이다." "그동안 쪽방촌 주민을 돕기 위한 기초생활보장제도와 무연고 공영 장례가 제도화되었고 서울시는 저렴쪽방 사업을 시작했다. 수많은 단체가 각종 생필품을 제공하고, 소매를 걷어붙인 자원봉사자들이 매년 동자동 쪽방촌을 찾는다. 그러나 주민들은 여전히 '사회적 버려짐'을 경험한다. 범죄와 질병으로 일상이 파괴되며, 도움의 손길에도 인격과 자존감 박탈을 경험한다. 사람으로서의 필요와 욕망, 세계 안에서의 위치와 존재 방식은 부정 당한다.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시도는 경제적 측면을 넘어 주민들의 사회적 삶에 대한 개입이기도 하다. 개입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 '우리'에 대한 감각, 정치적 연대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의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킨다. 이 책은 쪽방촌을 위한 여러 개입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겪는 가난과 고통의 풍경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려내고자 하는 시도다."(6-8)


1 쪽방촌의 어제와 오늘


"서울역 11번 출구로 나와 벽산빌딩(현 게이트웨이타워)을 지나면 일명 '동자동 쪽방촌'의 초입이 등장한다. 우뚝 치솟은 빌딩들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 데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 1층에는 온갖 음식점이 있어서, 1,000개가 넘는 쪽방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조차 쉽지 않다. 쪽방촌 앞을 지나가는 시민들은 빌딩 숲 한가운데에 이렇게 허름한 건물들이 있다는 사실에 잠시 의문을 품을 뿐이다. 저녁이면 술에 취한 회사원들이 넥타이를 풀어헤친 채 내뱉은 고함소리와 바로 옆 새꿈어린이공원에서 술판을 벌이는 쪽방 주민들의 목소리가 섞여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자동 지역사에서 서울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동자동과 서울역이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울 뿐 아니라, 빈민 밀집 거주 지역이라는 동자동의 역사적 정체성이 서울역 때문에 만들어졌다. 내가 서울역을 통해 다시 동자동을 찾아왔듯, 서울역은 동자동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징검다리이자 동자동의 역사를 설명하는 주요 표지다."(17-8)


"광무 4년인 1900년 서울역(당시 남대문역)이 최초로 개통된 뒤 주택가와 상가가 밀집한 이 지역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극심한 전재(戰災)를 겪었다. 서울역은 인적·물적 자원 수송의 핵심지이자 서울로 진입하는 철도 교통의 관문이었다. 따라서 미군의 폭격이 서울역을 비롯해 철도, 도로, 교량이 밀집한 용산구에 집중되었다. 궁궐이 밀집한 종로구나, 주거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동대문구와 성북구에 비해 피해 역시 심각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폐허가 된 동자동 지역에 피난민과 빈민이 몰려들어 판잣집을 짓기 시작했다. 일부 건물은 서울역의 유동 인구를 상대로 숙박업을 벌였다. 남대문 상권 안에 위치한 데다가 서울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유동 인구가 많았다. 도동(현재 동자동 및 후암동)과 양동(현재 남대문로5가)에는 판자촌과 함께 대규모 윤락 시설도 들어섰다. 동자동의 지리적 위치와 서울역의 존재가 빈민 밀집 거주지역이라는 정체성의 출발이었다."(22)


"1970년대 말부터 40여 년간 이 지역에 살아온 주민 노정수(57세)의 기억에 따르면 서울역 근처에 인력사무소가 몰려 있어서 일거리를 구하기 쉬웠다. 새벽이면 인력을 구하는 차량이 사람을 실어 갔다. 그래서 서울역과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것이 생계유지에 유리했다. 월세도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쌌다. 동자동은 〈몸 파는 사람〉, 〈노가다 다니는 사람〉, 〈이삿짐 나르는 사람〉, 〈신문 파는 사람〉, 〈구두 닦는 사람〉 등 도시의 다양한 하층 노동자가 몰려드는 곳이었다. 형태는 다양하지만, 1970~1980년대의 동자동은 노동하는 사람의 공간이었다. 비록 안정적인 임금노동 시장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파생된 도시 하층 노동 혹은 비공식(informal)·저임금 노동시장에 종사했다. … 이러한 도시 하층 노동은 때때로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범죄의 온상〉, 〈서울에서 손꼽히는 윤락가〉, 〈악의 소굴〉 등 동자동에 덧씌워진 윤리적 낙인은 이러한 노동 특성에서 비롯되었다."(24-5)


"칼 마르크스가 말한 〈잉여인구(surplus population)〉는 노동시장 바깥에 존재하지만 산업예비군으로서 도시의 생산 체계 안에 잠재적으로 흡수될 수 있는 이들이다. 반면 후기자본주의에 등장하는 잉여인구는 말 그대로 더 이상 노동시장이 필요로 하지 않는 '잉여'다." "외환위기로부터 약 2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버려짐의 공간'에 놓인 이들은 평균 12.8년이라는 거주 기간과 〈건강〉의 문제를 거치면서 더 이상 주변부 노동시장으로 흡수될 수도, 노동시장 바깥에서 도시 하층 노동을 담당할 수도 없는 인구가 되었다." "과거 동자동은 가난했지만 그나마 일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동자동은 일할 수 없는 인구 집단의 공간이자 임금노동시장 바깥에서 〈생존주의적 임기응변(survivalist improvisation)〉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공간이다. 이제 노동하지 못하는 인구가 된 쪽방촌 주민들은 각자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쪽방촌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형태의 개입들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33-4)


2 돌봄의 역설


"현행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1조는 제도의 궁극적 목적을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필요한 급여를 실시하여 이들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자활을 돕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상정하는 〈최저생활〉 혹은 사람다운 삶은 일상적 돌봄을 포함하지 않은 경제적 차원에서의 삶이다. 일반수급자라는 정영희의 신분은, 그녀가 지적장애라는 개인적 특성 때문에 청소, 빨래, 요리 등 삶을 가꾸고 유지하기 위한 노동을 반드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물론 정영희의 지적장애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자 선정의 핵심 요소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적장애는 그녀에게 경제적 지원 이외에 또다른 일상적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근로 능력이 없기에 임금노동으로 자활할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지적장애는 노동 불가능성을 가리키는 의료적 지표로 일반화되며, 그녀가 수급 대상자로 선정된 후에는 '52만원의 생계급여'나 '23만원의 주거급여'라는 경제적 급부로 환원된다."(64-5)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제정과 시행에서 지속적인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까닭 역시 이와 연관된다. 생계급여와 중위소득 기준 등 급여 수준 향상을 요구하는 빈민 운동계의 목소리는,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전제하는 삶의 형식이 과연 온전한 삶의 충분조건인가에 관해 문제를 제기한다. 급여 수준이 최소한의 경제적·물질적 생존만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낮기 때문에, 수급 대상자는 지출을 줄이기 위해 〈사회적 관계〉를 포함해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활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온전한 삶을 위해서는 물질적·경제적 필요가 먼저 충족되어야 하지만 경제적 삶이 곧 온전한 삶은 아니다. 그럼에도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전제하는 삶의 형식은 온전한 삶, 혹은 좋은 삶을 경제적 차원의 삶으로 축소한다. 이때 경제적 차원의 삶을 넘어서는 사회적 관계와 상호 의존, 일상적 돌봄은 실질적으로 기초생활보장제도가 개입하지도 않고 개입할 수도 없는 필연적 공백으로 남는다."(66)


"한국에서 가족은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가장 근본 단위로서 〈부양과 보호, 교육, 주택, 금융, 고용, 심지어 생산과 경영 활동〉 등 경제 생산과 사회 재생산에 이르는 전반적 영역에서 중심 역할을 차지한다. 이는 일본, 대만, 싱가포르, 필리핀 등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비슷하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하지만 정책이 의도하지 않는데도 실제 운용이 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한국의 복지 체제는 더욱 특징적이다. 가족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은 공공 부조인 기초생활보장제도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일차적인 복지의 주체를 가족으로 설정하고, 가족으로부터 돌봄과 복지를 제공받지 못하는 대상에 한해서만 수급권을 부여하는 잔여전(residual) 형태로 구성된다. 수급 신청자가 소득 및 자산 기준을 통과하더라도, 법적 부양 의무자인 '1촌 직계 혈족(부모, 자녀) 및 그 배우자(며느리, 사위 등)'에게 부양 능력이 없거나 미약하다고 판단될 때에만 수급권이 보장된다."(73-4)


"한편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지위가 말해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8조의 2 제1항 및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 제5조의6 제1항은 부양 의무자가 수급권자인 경우 부양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즉 기초생활보장법상 누군가 수급권자라는 사실은 그/그녀에게 다른 사람을 돌보고 부양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수급권자인 정영희는 아들의 법적 부양 의무자이지만, 아들을 부양할 능력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수급자라는 지위는 기초생활수급법상 그/그녀가 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의미인 동시에, 그로 인해 공적 돌봄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양육권과 연관되었을 때 이러한 지위는 돌봄을 제공할 수 있는가를 판별하는 문제로 나타났다." "결국 아들의 양육권은 전남편에게 넘어갔다. 일반수급자라는 지위는 이미 누구도 부양하거나 돌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내재하므로, 아이를 누가 돌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76-7)


3 죽은 자를 기억하는 법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죽은 자에 대한 의례의 주체는 반드시 혈연가족이어야 하며, 장례를 치러줄 다른 사회적 관계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혈연가족이 아닌 이상 모두 무연고 사망자로서 비정상적 죽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안제동과 그다지 친분이 없던 마을 주민들이 장례에 참여하고자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연고 사망자로 규정된 안제동의 죽음은 행정 절차에 따라 처리되어야 할 비정상적 죽음이자 나쁜 죽음이다. 그러나 동료 주민들이 장례에 참석해 망자와의 연고를 드러낼 때 제도가 내포한 정상적 죽음의 기준은 위태로워진다. 동료 주민이라는 사회적 관계는 분명 혈연가족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료 주민들과 안제동의 관계는 그가 무연고 사망자가 아닌 '연고 있는' 사망자라는 점을 보여준다. 주민들은 장례에 참석함으로써 산 자와 망자 사이의 연결을 드러낸다. 양자의 연결은 무연고 사망자로 규정된 안제동에게 '연고 있는 무연고자'라는 역설적 위상을 부여한다."(122-3)


"쪽방촌 주민들 사이의 관계는 서로의 과거를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는, 서로의 〈각자 사정〉을 묻지 않는 암묵적 윤리를 기반에 두고 있다. 누군가를 온전히 알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망각함으로써 주민들 사이의 연결은 가능하다. 주민들이 보여주는 연결은 완전한 연결이나 가까워짐의 형태가 아닌 부분적 거리 두기와 단절을 포함하는 망각의 관계에 가깝다. 망각의 규범은 산 자와의 관계뿐 아니라 망자와의 연결을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주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유가족이 내뱉는 모진 말과 안제동의 과거가 모두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추모와 애도받을 자격이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주민들은 유가족의 비난을 〈그렇다 하더라도(그래도)〉나 〈마지막인데〉라는 말로 전유함으로써 안제동의 과거를 망각해야 할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의도적으로 망각하지 않은 채 망자의 과거를 모두 기억할 때 그를 추모하고 애도하기 위한 연결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125-6)


"최경철과 강영섭은 모두 기초생활수급자였다. 그런데도 강영섭은 200여만 원의 장례비를 더 지불하며 최경철의 장례를 일반 장례로 치렀다. 어째서 굳이 일반 장례를 치렀느냐는 물음에 강영섭이 대답했다. 〈일반 장례식은 사흘, 나흘 만에 나갈 수가 있잖아요. 근데 무연고로 하면은 차디찬 데서, 영안실에서 짧게는 한두 달, 길면 3개월에서 6개월까지도 가요. 연고자 찾는 것도 있고 수사도 해야 하니까.〉" "무연고 장례와 일반 장례의 전반적인 절차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더라도, 비용만 지불하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반 장례에 비해 무연고 장례는 통과의례의 시작과 진행이 게속해서 지연될 수밖에 없다. 통과의례가 지연될수록 망자에 대한 추모와 애도의 시간 역시 지연되고, 그동안 망자의 몸은 얼어붙은 채 〈그 차디찬 데〉를 떠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강영섭은 실질적인 절차가 크게 다르지 않고 더 많은 비용이 드는데도 〈굳이〉 무연고 장례가 아닌 일반 장례를 치르고자 했다."(140-3)


"강영섭은 (안제동의 장례에서 주민들이 보여준 바 있는) 제도적 기준에 상징적 균열을 내는 것을 넘어 제도적 틀 자체를 우회했다. 그는 의료 기록을 통해 최경철에게 연고자가 있음을 제도적으로 증명했다. 장례에 드는 추가 비용을 감당하고 일반 장례도 치렀다. 최경철에게 부여된 무연고자의 위상을 기각하고, 그가 연고자로서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강영섭은 이에 따르는 부담과 책임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강영섭의 경제적 상황과 건강은 점차 나빠졌다. 강영섭의 쪽방을 방문했을 때, 그는 내게 수십 개의 처방전과 냉장고 전체를 가득 채운 각종 약을 보여주었다. 그가 제공한 돌봄이 스스로의 소모와 파괴를 대가로 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최경철과 강영섭은 의료 체계 안에서 형성된 연결을 통해 무연고 장례라는 제도적 틀을 우회하고 죽음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강영섭은 경제적·육체적·정신적으로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145-6)


4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


"주민협동회의 김동석 활동가가 언급한 〈길들여짐〉은 동자동 쪽방촌과 주민들을 설명하는 가장 전형적인 서사다. 〈여기는 나눠주는 게 정말 많잖아요. 이게 주민들을 마비시켜요. 이제 고마움도 못 느끼는 거죠. 나눠주면 좋아하긴 하는데 막상 물어보면 누가 준 건지도 몰라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내가 만난 모든 단체의 활동가와 관계자는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물품 지원이) 도움이 되죠. 근데 주민들이 일을 안 하려고 하고, '당연히 사회복지사 네가 나를 위해서 살려야 되는 거야' 이렇게 되요. 얼마 전에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너 뭐 하는데? 나 먹이고 살리고 입히고, 의식주 다 해결해줘야 되는 거 아니야? 국가가 너희한테 그렇게 시킨 거 아니야? 근데 왜 넌 왜 안 해?〉 자신이 사회복지사인데도 서울역 쪽방상담소관계자 황민욱은 〈너희가 먹이고 살려야 된다〉라는 말을 듣고 난 뒤 복지의 역할에 대해 일말의 회의를 품었다."(158-9)


"황민욱은 주민들이 〈실업급여〉, 〈수급〉, 〈기초연금〉, 〈근로장려금〉 같은 복지 정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을 우려한다. 물론 자활사업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장기간의 노숙이나 알코올중독, 정신질환 등으로 자활이 불가능한 예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는 주민이 아닌 한 자활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조건적인 복지와 지원 활동이다. 자활하려는 의지나 실천 없이도 생계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이 지급되기 때문에 의존적 태도로부터 벗어나기 힘들다." "따라서 의존에는 부정적인 윤리적 평가가 덧씌워진다. 의존은 윤리적 〈악〉이자 빈곤의 문화다. 또한 쪽방촌 주민들이 보편적으로 보여주는 특성인 동시에 이들을 빈곤과 쪽방촌이라는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누군가 복지 제도나 단체의 활동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은 그에게 자활의 의지와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의존은 쪽방촌의 주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낙인으로 나타난다."(164-6)


"이와 달리 김동석은 〈뭐 주는 거 없냐〉라는 마비와 길들여짐의 모습과 자신을 돌본 동료 주민을 위해 흔쾌히 〈3만 원〉을 내는 모습을 대비시킨다." "그가 바라보는 주민은 누구나 두 모습을 모두 갖고 있다. 그중 후자가 주민의 〈본모습〉에 더 가깝다. 그러나 평소에는 전자에 가려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가려져 있는 주민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드러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주민자조조직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주민자조조직이 목적으로 삼는 변화란 의존에서 독립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의존에서 또 다른 형태의 의존으로의 변화다. 김동석은 각종 물품 지원에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주민이 결국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을 지양해야 하는 까닭은 이러한 의존이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물품 지원에 대한 일방적 의존이 주민 간의 연대와 상호 돌봄, 즉 긍정적 상호 의존으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167-9)


"길게 늘어선 줄과 단체의 활동을 함께 사진으로 남기는 일은 물품 지원 사업의 필수 절차 중 하나다." "서울역과 같은 공공 공간에서의 줄서기는 보여지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실외에서 실내로 이동해야 할 불편한 대상이다. 반면 동자동 쪽방촌에서 줄서기는 〈그림〉과 〈작품〉을 연출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전시되어야 하는 광경이다. 공공 공간이 아닌 쪽방촌에서 주민들의 줄서기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물건을 나누어주는 이와 물건을 받기 위해 줄을 늘어선 주민들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동자동에서는 그것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불편함뿐 아니라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당사자가 느끼는 인격 손상과 자존감 박탈의 문제 역시 크게 고려되지 않는다. 주민들은 필요에 따라 줄을 서 물건을 받는다. 단체들은 물건을 나누어주며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다. 줄 세우기가 불러일으키는 전시 문제는 사라지고,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모두가 만족하는 〈그림〉과 〈작품〉만 남는다."(184-5)


"동자동사랑방의 사업들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사랑방 식도락은 동자동 11-22번지의 공간을 임대해 주민에게 식사를 제공한다." "식도락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공짜가 아니다. 식도락에서는 식사하는 모든 이들에게 1인당 천 원의 밥값을 받는다." "천 원의 밥값은 식사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자 자신이 받은 것을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되돌려주는 행위다." "공짜 식사는 주민들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돌려줄 수도 없다. 그래서 주민들은 마치 자신이 〈거지〉가 된 것과 같은 모욕감을 느낀다. 그러나 천 원은 비록 쪽방촌 주민들이 극심한 경제적 궁핍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큰 부담 없이 낼 수 있는 금액이다. 받은 것을 천 원의 형태로 되돌려줄 수 있는 식도락에서 이들은 〈거지〉가 아니다. 천 원을 지불함으로써 주고받음의 과정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상대방의 행위에 응답한다. 이 과정에서 주민은 식사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과 공동의 사회를 구성하고 동등한 구성원으로서의 위상을 부여받는다."(189-91)


"또 다른 호혜적 실천도 있다. 다름 아닌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다. 주민협동회의 주된 사업은 조합원들의 출자로 모인 공동 기금을 다른 조합원에게 소액으로 대출하는 것이다. 조합원이라면 누구나 10개월 분할 상환을 조건으로 최대 50만 원, 3개월 분할 상환을 조건으로 최대 10만 원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2020년 1월을 기준으로 대출 상환율은 88.5%에 이른다. 주민협동회는 난협과 마찬가지로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 사업도 시행한다. 조합원은 1만 2,000원을 내면 1년간 의료비 실비 보상을 받을 수 있고, 의료비가 10만 원 이상 발생하면 의료비 지원 신청 및 심사를 통해 최대 30만 원의 의료비를 보상받을 수 있다. 이처럼 주민들은 출자와 대출을 주고받음으로써 서로의 인격과 자존감을 보존하면서도 공적 사회보장의 빈자리를 채운다." "주민들은 일상적·조직적인 차원에서 상호 의존과 연대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서로의 인격과 자존감을 유지하고 마비와 길들여짐의 낙인을 거부한다."(192-3)


"인격 손상과 자존감 박탈을 거부하고자 하는 주민들의 또 다른 실천이 있다. 공짜 식사와 물품 지원에 따르는 비난과 헐뜯기다. 대부분의 주민은 각종 지원 물품의 필요성과 쓸모를 인정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물품을 제공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지원 물품과 단체를 비난하고 헐뜯는다."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쿵 부시맨에게는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을 모욕하고 비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만약 사냥꾼이 너무 많은 짐승을 잡으면 마치 자기가 추장이나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된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결국 자만심 때문에 언젠가는 부족의 누군가가 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시맨은 사냥꾼의 능력을 의례적으로 모욕하고 비난함으로써 교만해지지 않도록 억제한다." "주민들이 보여주는 비난과 헐뜯기는 부시맨의 〈모욕해야 할 의무〉와 비슷하다. 물건을 나누어주는 이들이 자신의 능력과 호의를 드러냄으로써 쪽방촌 주민들을 타자화하고 단순한 수혜자의 위치로 전락시키는 것을 막는 방식이다."(193-7)


"한편 천 원의 밥값을 통해 만들어지는 연대는 역설적으로 잠재적인 배제와 축출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대상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에는 필연적으로 누가 우리의 자격을 갖고 있는가에 관한 물음이 따른다." "장경진이 볼 때 서울역의 노숙인은 〈공짜〉를 기대한다. 여기서 노숙인의 인격과 자존감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애초부터 상호 인정 과정에 참여하거나 자신이 제공하는 줌에 응답할 의사가 없다. 그러므로 서울역의 노숙인은 식도락과 천 원의 밥값을 통해 상호 의존 관계를 형성한 쪽방촌 주민들과 달리 인정받아야 할 인격과 체면을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다." "천 원의 밥값은 분명 주민들이 서로의 인격과 자존감을 지키고 상호 의존의 연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 매개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천 원의 밥값을 통해 만들어진 상호 인정과 연대의 뒤편에는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고, '우리'가 아니라고 판명된 대상을 바깥으로 축출하는 구분짓기와 배제의 과정이 자리 잡고 있다."(198-203)


5 방치된 시간의 무게


"공동의 작업장과 노동 경험을 공유하는 노동계급은 노동조합 등 공동 경험에 기반한 조직화와 제도화를 통해 자본의 힘에 대항한다. 그러나 쪽방촌 주민들은 생애 전반에 걸친 매우 다양한 요인들로 빈곤을 경험하고 쪽방촌에 정착한다. 따라서 공동의 경험에서 비롯된 동질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힘들며, 노동계급에 비해 정치적 주체화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2015년 건물주의 퇴거 요구로 삶의 공간이 위협받자 주민들은 쪽방 세입자 모임을 결성하고 강제 퇴거에 공동으로 저항해 9-20을 지켜냈다. 삶의 환경에 대한 위협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위협 때문에 그동안 불가능해 보였던 주민들의 정치적 연대가 일시적으로나마 가능했다." "마침내 주민들이 낸 공사중지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지고, 서울시가 9-20 건물을 임대해 '서울시 저렴쪽방'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2015년 당시 집합행동을 통한 주민들의 〈유대〉와 〈활기〉는 9-20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을 성공으로 결정했다."(214-5)


"그러나 9-20은 5년이 지난 2020년 현재 또다시 비슷한 문제에 맞닥뜨렸다. 문제는 9-20번지의 해뜨는집이 아닌 동자동 35-145번지의 '시계토끼집'에서 불거졌다." "저렴쪽방 사업은 서울시가 민간 소유의 건물을 일정 기간 임차해 주민에게 임대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약 5년의 계약 기간 동안 서울시가 건물의 임대와 관리 및 보수에 관한 권한을 갖지만, 건물의 소유권은 건물주에게 있다. 즉 저렴쪽방은 공공재가 아닌 사유재다. 소유 주체인 건물주의 의사에 반해 더 저렴한 월세를 제공하거나, 노후한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장기간 저렴쪽방으로 임대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이러한 문제는 서울시와 건물주 간의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시계토끼집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건물주가 재계약을 거부하거나 건물의 용도 변경을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저렴쪽방의 지속가능서은 불투명해진다. 해당 건물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제대로 된 대비없이 당장 방을 비워야 한다."(216-9)


"9-20을 둘러싼 서울시와 건물주 간의 설전은 인프라의 '노후함과 황폐함'의 문제로 수렴된다. 쪽방촌의 노후함은 서울시에는 건물의 상태가 사업 기준에 미달한다는 행정적 판단으로, 건물주에게는 수리비가 쪽방 운용 수익을 초과한다는 경제적 판단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쪽방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재계약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했다. 쪽방촌의 노후한 건물이 안전규제의 대상으로 혹은 수익 창출의 수단으로 이야기되는 한 지속적인 거주를 요구하는 주민들의 목소리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9-20이 마주한 문제가 건물주의 경제적 판단이나 서울시의 무관심이 아닌 노후함 자체의 문제로 이야기되자, 주민들의 적대가 향한 과녁은 희미해지고 주거권이라는 저항의 언어 역시 힘을 잃는다." "계약 만료를 앞두고 당장 6개월 뒤면 거리로 내몰릴 위기 앞에서 더 나은 환경을 위해 장기적 저항을 기획하는 것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퇴거 위기를 막는 일이 중요했다."(229-33)


"잠재적 재개발 구역으로 존재해온 3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주민들에게는 재개발과 강제 퇴거에 관한 소문도 〈말 뿐이다〉, 〈재개발될 리가 없다〉, 〈이번에도 그냥 지나갈 것이다〉라며 별일 아닌 듯 넘어가는 것이 자연스런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건물주들의 사정은 다르다. 9-20의 건물주가 쪽방 운영을 통해 경제적 수익을 얻고 있음에도 대대적인 수리를 꺼린 이유는 동자동이 언제 개발될지 모르는 잠재적 재개발 구역이기 때문이다. 건물주는 재개발이 시작되면 당장 건물을 허물기만 해도 엄청난 재개발 이익을 올릴 수 있다. 건물에 굳이 큰 수리비를 쓰거나 환경 개선을 위해 추가 비용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유전처럼 재개발과 함께 엄청난 경제저거 이익을 가져다줄 동자동은 쉽게 손댈 수도,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는 곳이다. 결국 건물주가 최대한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은 빈곤 비즈니스, 즉 건물을 쪽방으로 운영하는 것이다."(237-8)


"그러나 동자동 쪽방촌을 낡고 마모된 건축물의 문제만으로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동자동 쪽방촌은 노후함과 열악함을 견뎌내며 이 지역을 삶의 공간으로 만들어내고자 한 주민들의 역사이자 성취이기도 하다." "주민들은 상호 의존의 연대를 통해 쪽방촌의 열악함을 견뎌내고 살아냄으로써, 그리고 점유와 참여를 통해 공간을 재구성해냄으로써 동자동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왔다. 9-20 건물에 대형 현수막을 늘어뜨리고 제대로 된 주거 정책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일 때, 새꿈어린이공원에서 재개발과 퇴거에 관한 공적 대안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 때, 공원의 한구석에 동료 주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공동 분향소를 차리고 돗자리에 둘러앉아 명절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을 때 쪽방촌은 정치적 공간으로, 추모의 공간으로, 상호 돌봄과 교류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주민들에게 동자동 쪽방촌은 노후하고 열악한 인프라를 넘어 다양한 의미와 사용가치를 제공하는 삶의 공간이다."(241-2)


"주거/퇴거 문제에서 동자동 쪽방촌이 돌봄과 사회적 관계, 공간의 의미와 가치를 포함하는 삶의 공간이라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았다. 서울시가 말하는 9-20은 건축물로서의 의미이다. 서울시가 제기한 안전의 문제는 건물의 상태가 사업 진행을 위한 행정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뜻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저렴쪽방의 연장을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한편 건물주가 이야기하는 9-20은 부동산으로서 자신이 사용하고 처분할 수 있는 사유재산이었다." "동자동 쪽방촌이 살만한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주민들이 이 공간을 상호 돌봄과 사회적 관계로 채워왔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을 견뎌내며 이 공간에 살아온 주민들의 역사는 동자동 쪽방촌이 이미 공동의 것으로서 주민들의 몫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쪽방촌의 노후함은 건축물이나 부동산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공간에 대한 위협이다. 그리고 동자동 쪽방촌에 포함된 모든 사회적 삶과 의미, 사용가치를 포괄하는 공동의 것의 위기이다."(249-50)


나가며


"이 책을 통해 벽장 안을 들여다본 독자와 쪽방촌 주민들 사이에도 부분적인 연결이 생겨났다. 이 연결이 지속될 수 있을지, 지속된다면 언제까지 가능할지, 또 어떠한 형태로 지속될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벽장과 그 바깥의 부분적인 연결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물음과 계속해서 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그 방식은 같지 않을지라도, 각자 벽장 안의 고통에 윤리적으로 응답하는 일 또한 이러한 물음을 놓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타자의 삶을 모른다. 쪽방촌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에도 결국 주민들이 사회적 버려짐을 경험하는 까닭은, 이러한 시도가 전미래 시점에 서서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구원적 미래를 너무나 섣불리 제시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여기의 모습'을 그려내는 작업은 중요하다. 공통의 구조 위에서 벽장 안팎의 부분적 연결은 드러난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윤리적 응답은 이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262-3)


# 전미래 시제(前未來 時制, the future anterior) : 일종의 구원적 미래(redemptive future)를 상상하고 그것을 목표로 삼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이때 현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일부이자 현재에 도래한 미래와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