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현대사 5 - 개발주의 시대로 1972-2014 중국근현대사 5
다카하라 아키오.마에다 히로코 지음, 오무송 옮김 / 삼천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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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혁명에서 발전으로, 1972~1982


"마오쩌둥 사상에는 개발주의적인 사고와 급진주의적인 사고가 병존했다. 마오쩌둥은 만년인 1974년 연말부터 1975년에 걸쳐 서로 대립되는 듯한 세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부르주아의 여러 권리를 제한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노동에 따른 분배라는 사회주의 분배 원칙을 부정하고, 화폐 교환이나 상품마저도 비판하는 상당히 급진적인 지시였다. 이 지시는 '4인방'에 이용당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을 학습하는 운동을 추진하는 근거가 되었다. 두 번째는 안정과 단결에 관한 지시였는데, 이는 주로 '4인방'을 대상으로 한 비판이었다. 파벌적인 권력투쟁에 대한 충고이자 지도부는 단결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세 번째는 경제를 담당하는 부총리 리셴넨에게 내린 국민경제 수준을 끌어올리라는 지시였다 이 지시에 따라 덩샤오핑을 요직인 당 부주석, 제1부총리, 총참모장에 앉히고, 병석에 있는 저우언라이를 대신하여 당 중앙의 일상 활동을 책임지는 자리에 서게 했다."(33-4)


"1976년 2월, 총리대행으로 지명되었고, 그 해 10월 6일에는 주도적으로 '4인방'을 체포한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결정과 지시를 견지하는 이른바 '두 가지 범시론'이라는 방침을 표방해 왔다. 여기에 화궈펑은 〈마오 주석의 이미지를 손상하는 모든 언동을 제지해야 한다〉며 또 하나의 '범시'를 추가로 제기했다. 화궈펑이 보기에, 마오쩌둥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중국공산당 및 그 지배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1977년 1월 저우언라이 서거 1주기 무렵, 베이징을 비롯한 몇몇 크고 작은 도시에서 사람들의 자발적인 추도 움직임이 나타났다." "화궈펑 등은 이 때 '두 가지 범시론'을 제창했다고 알려졌다. 즉 '4인방' 잔당과의 투쟁이 계속되는 와중에서 마오쩌둥의 유훈에 따르고, 만사를 〈과거의 방침에 따라야〉한다고 명확히 함으로써 권력 이행기에 대국의 안정을 확보하는 동시에, 그 시점에서 천안문 사건의 명예회복과 덩샤오핑의 부활을 좀 더 직접적으로 저지하려고 생각했을 것이다."(42)


"그러나 화궈펑과의 사상 노선 투쟁에서 승리한 덩샤오핑이 도입한 개혁 정책은 무엇보다 분권화였다.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 지방이나 기업에 예전보다 큰 경제상의 권한을 주었고, 노동에 따른 분배 원칙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보너스 제도나 작업량에 따른 임금지불 제도를 부활시켰다. 둘째로, 부분적인 시장 도입, 곧 생산과 유통에 관한 규제를 완화하고 가격 자유화를 실시했다. 세 번째로, '개체호'(個體戶)라고 일컫는 자영업을 허용함에 따라 고용이 창출되었다. 규모가 큰 개체호가 나타나면 최종적으로 민간 기업으로 인정을 받았다. 농촌에서는 대약진 때에 만들어진 농촌 공업의 기초 위에 마을 운영이나 개인 경영 등을 통한 '향진(鄕鎭) 기업'이 발전했다. 이러한 새로운 경제 주체는 계획 대상에 들지 않았고 시장에서 스스로 살아남아야만 했다. 즉 인구 압력에 따라 계획경제의 틀에서 빠져나온 경제 주체가 늘어나 시장경제가 자연스럽게 확대되는 메커니즘이 생긴 것이다."(53)


2장 개혁개방을 둘러싼 공방, 1982~1992


"1980년대 초반, 중국은 소련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으며, 소련에 대한 전략적 관점에서 대일 관계를 고려하는 경향이 여전히 강했다." "하지만 1982년 9월 제12회 당대회의 정치보고에서, 후야오방 총서기는 '독립자주 외교'로 전환한다고 밝히고 '전방위 외교'를 제창하며 소련과 관계 개선을 모색하게 된다. 독립자주 외교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미국과 거리를 조정하는 데 있었다. 당시 중국으로서는 대미 관계에서 최대 현안 문제가 미국의 타이완에 대한 무기 수출이었다. 1981년에 등장한 레이건 대통령은 친타이완파로 알려졌고, 그해 말에 전투기 부품과 공군 서비스를 타이완에 수출한다고 결정함으로써 중국 측의 맹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82년 8월 미중공동코뮤니케가 발표되어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제12회 당대회 정치보고는 초강대국의 패권주의를 통렬히 비판했고, 중국은 〈그 어떤 강대국 또는 국가 블록에도 의존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68)


"중국은 초강대국(미국과 소련)의 패권주의에 대해 비판했지만 종래의 '반패권 통일전선' 노선은 드러내지 않았다. 국방 건설보다는 경제 건설을 우선하는 덩샤오핑에게는 소련과의 관계 개선과 국경 지역의 긴장 완화가 더 중요한 과제였다." "그 배경에는 소련에게 강경한 자세를 보이는 레이건 정권의 등장으로 말미암은 미소 관계의 악화가 있었다." "1985년에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하고,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재검토하면서 중소 관계는 호전된다. 미중·중소 관계가 개선되면서, 1988년 덩샤오핑은 〈국제정치 분야는 대결에서 대화로, 긴장에서 완화로 전환되고 ······ 현재는 국제정치의 새 질서를 수립해야 할 시기〉라고 발언했다 .1989년 5월, 중·소 두 나라는 평화 5원칙을 담은 '베이징코뮤니케'를 발표한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를 추진하던 고르바초프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공산당 지도부, 특히 좌파들한테는 경계의 대상이었다."(69-72)


"천안문 사건 후 덩샤오핑도 더는 당정 분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해체됐던 정부 기관의 당조가 부활하고 노동조합 등 조직들의 당으로부터 자립이 부정되었다. 1990년대에 실시된 공무원 제도는 1987년의 구상 단계에서 목표로 했던 정치적 중립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정치개혁은 거의 정지 상태에 빠졌다." "특히 1991년 8월 소련에서 발생한 보수파의 쿠데타가 실패한 뒤로 좌파의 위기감과 공세는 강해졌다. 덩리췬은 사회주의 사회의 계급투쟁을 소유제와 결부시켜 공유제와 외자, 개인 경영 등 사유제 사이에는 모순과 투쟁이 존재한다고 역설했다. 나아가 문혁기와 같은 어조로, 이런 모순은 사회주의의 길과 자본주의의 길 사이 모순이며 이런 현상이 당내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2월에 열린 전국 조직부장 회의에서 다음해 당대회의 인사 정책이 검토되었지만, 회의에서 결정된 간부 선정의 첫 번째 기준이 된 것은 사회주의와 당의 영도에 대한 충성 그리고 천안문 사건 때의 언동이었다."(91-5)


3장 사회주의의 중국적 변화, 1992~2002


"1992년 초, 덩샤오핑은 상하이에서 우한을 경유해 광둥 성의 경제특구를 시찰한다(제2차 남방시찰). 그는 지방 간부들한테 대담하게 개혁과 개방을 가속화하도록 강하게 호소했다. 일부러 광둥 성까지 발길을 넓힌 이유는, 그 전해에 상하이에서 발신한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중앙 선전 부문 등의 저항 때문에 선전 효과가 적었던 데 있었다. 이번 걸음은 홍콩의 미디어를 활용하여 반격의 봉화를 올린 것이다. 남방시찰을 통해 지방의 불만을 규합하여 중앙의 정국을 움직이려는 방법은, 대약진이나 문화대혁명을 발동할 때 마오쩌둥의 방식과 같았다. 덩샤오핑으로서는 이 발걸음이 중대한 국면이었고 말 그대로 건곤일척의 행동이었다. 생산력과 국력, 생활수준의 향상에 유리한 제도나 정책이라면 그것은 사회주의다라는 '세 가지 유리론' 등을 내용으로 한 덩샤오핑의 남방담화는, 먼저 홍콩의 미디어를 통해서 전 세계로 전해졌고, 다시 중국에 역수입되어 경기 침체에 고민하고 있던 지방 간부들의 강한 지지를 얻었다."(99)


"제2차 천안문 사건(1989) 직후에 덩샤오핑은 기존 교육의 실패, 특히 일반 인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상정치 교육의 실패가 사건을 일으킨 큰 원인이 되었다는 인식을 표명했다. 또 장쩌민도 민주화 운동을 매국주의라고 단정하고 전국 학교에 애국주의 교육 강화를 지시했다. 자국의 문화나 국제적 지위, 국력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려는 내셔널리즘은, 근대 이후의 중국 지도자들이 본질적인 동기로 되어 왔다. 그리고 1990년대 중엽 덩샤오핑에서 제3세대 지도자로 권한 위양이 완료되면서, 내셔널리즘을 국민 통합에 이용하려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1994년 8월에 발표된 〈애국주의 교육 실시 강요〉는 애국주의를 전 사회가 학습해야 할 과제로 규정하였다." "그전까지의 애국주의 교육이 마오쩌둥이나 공산당 영웅들의 정신이나 무용(武勇)을 강조하는 면이 강했던 데에 비해,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애국주의 교육은 열강으로부터 받은 침략이나 굴욕을 강조하는 피해자의식을 심어주는 특징이 있었다."(113-4)


"2001년 7월 1일 중국공상당 창립 80주년 기념강의에서 장쩌민은 사영 기업주,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을 실질적으로 용인하였다. 본디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전위이며 자본가는 계급의 적이나 다름없었다. 자본가를 입당시킨다는 대담한 결정에는 당 내부의 저항도 컸다. 그러나 반대의 목소리는 억제되어 2002년의 제16회 당대회에서 당 규약이 개정되고, 중국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전위임과 동시에 중국 인민과 중화민족의 전위라고 규정되었다. 그 이론적 근거가 된 것은 2000년 2월에 장쩌민이 자신의 '중요 사상'으로 제시한 '세 가지 대표론'이었다. 공산당이 '선진적 생산력의 발전, 선진적 문화의 전진, 가장 광범위한 인민 대중의 근본적 이익' 세 가지를 대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공유제의 포기와 실질적인 사유화가 진척된 결과, 필연적으로 신흥 사회 세력으로 대두하는 사영 기업주를 '광범위한 인민'에 포함시킨 데 있었다. 이렇게 해서 공산당은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전환한다."(135)


4장 두 개의 중앙 지도부, 2002~2012


"후진타오·원자바오 정권은 실로 미묘한 당내의 세력균형을 기초로 성립한 정권이었다. 오랫동안 중앙 지도부에 있었던 리펑이나 리루이환, 주룽지까지 은퇴했지만, 장쩌민의 영향력은 짙게 남았다. 돌이켜 보면 덩샤오핑은 제2차 천안문 사건 이후 장쩌민을 '제3세대 영도 집단의 중핵'이라고 부르고, 다른 지도자에게 장쩌민의 권위를 존중하도록 시달하면서 〈어떤 영도 집단에도 반드시 중핵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덩샤오핑의 이 생각은 총서기 자오쯔양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자신의 대립이 당시의 위기를 불러온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반성에서 나왔다고 추측된다." "그런데 이른바 그 은혜를 받은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유훈을 돌아보지 않았다. 후진타오 정권은 '후진타오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이 아니고, '후진타오 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 중앙'이라는 미묘한 호칭밖에 얻지 못했다. 이렇게 장쩌민과 후진타오를 각각 중심으로 하는 '두 개의 중앙'이 존재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142)


"2003년 이후부터 활발해지던 홍콩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 당초 후진타오 정권은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몇 년 후 홍콩에서 2007년의 행정장관 직접선거나 2008년의 입법회 전면 직접선거에 대한 요구가 나오자, 2004년 초 장쩌민은 선전에서 '홍콩 지도층의 주체는 애국 인사로 구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덩샤오핑의 경고를 되풀이했다." "타이완을 향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표명한 장쩌민은 1998년에 통일의 시간표가 필요하다고 발언하면서, 타이완 당국이 교섭을 무기한 연기할 경우 무력행사도 배제하지 않는 정책을 취했다. 반면 후진타오는 2005년 4월에 롄잔 국민당 주석을 대륙으로 초청하여 국공 양당의 역사적인 화해를 연출하였다. 그리고 9월의 항일전쟁·반파시즘전쟁 승리 60주년 기념대회에서 후진타오는, 국민당이 항일전쟁의 '정면'에서 주체로 싸우고 공산당은 '적의 후방 전장'을 지도하는 국공 양당의 분업이 이루어졌다고 발언하며 국민당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152-3)


"공산당에게 큰 과제로 떠오른 것은 후진타오 정권기에 폭발적으로 발달 보급된 인터넷에 대한 관리였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정보 발신 능력을 갖춘 일반 국민들이 당간부의 독직 부패나 권력 남용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동하는 사회를 안정시키는 방법에 대해 당내의 의견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다. 후진타오에 따르면, 여러 이익 충돌이 발생하고 있기에 사람들의 불만과 요구 표출이나 모순의 조정과 권익 보장 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메커니즘을 한층 더 정비해야 했다. 여기에는 이른바 시민사회, 즉 시민이나 농민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조직되는 사회 조직을 활용하려는 사고방식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저우번순 중앙정법위원회 비서장은 《구시》(求是)에 논문을 발표하여 〈'공민사회'(civil society, 시민사회)는 서방이 중국을 목표로 설계한 올가미이다〉라고 단정했다. 중앙정법위원회란 경찰이나 사법 등 치안을 담당하는 부문의 총괄 부서인 강력한 당 기관이다."(173)


5장 초강대국 후보의 자신감과 불안, 2012~2014


"2012년 11월 15일에 열린 제18기1중전회에서 시진핑 총서기가 선출되었다. 그로부터 2주 후, 시진핑은 새로운 상무위원들을 인솔하여 국가박물관을 방문해 '부흥의 길'이라는 전시를 참관했다. 근대 이래 중국이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공산당의 영도 아래 당당한 나라가 되었음을 보여 주는 전시회에서 시진핑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이 중국의 꿈(中國夢)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사회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인맥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고, 좋은 회사에도 들어갈 수 없는 연고주의의 만연이었다. 가령 회사에 들어가도 출세할 수 없다는 개인으로서의 차이니즈드림이 시들어 버린 것이었다. 거기에서 차이니즈드림(중국인의 꿈)을 대신하여 국가 차원의 차이나드림(중국의 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어넣었다. 이는 곧 국가가 세계 챔피언이 됨으로써 개인의 꿈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는 내셔널리즘의 스토리였다."(190-2)


"시진핑의 말투나 행동에서 마오쩌둥을 방불케 했다. 예를 들면, 2013년 1월에 시진핑은 새 중앙위원회 위원들한테 한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훈계 발언을 했다. 〈개혁개방의 전후 시대를 대립적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즉 개혁개방 후의 역사를 이용하여 개혁개방 전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도, 개혁개방 전의 역사를 이용해서 개혁개방 후의 역사를 부정해도 안 된다.〉 이는 문화대혁명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개혁개방에 착수했던 덩샤오핑과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이다. 덩샤오핑은 좌파도 우파도 사회주의를 멸망시킬 수 있다며, 중국은 우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좌를 방지하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한다고 남방담화에서 밝혔다. 이에 대하여 시진핑은 문혁을 되돌아보며 〈7년 동안의 상산하향(上山下鄕)의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대중과 비교적 깊은 정을 맺게 하고, 성장과 진보를 위하여 비교적 좋은 기초를 쌓았다〉고 회고했다. 시진핑은 문혁을 고난을 극복한 성공 체험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194-5)


"'붉은 2대'(紅二代)라고 불리는 태자당은 일반적으로 혁명의 이념을 중시하면서도 개발주의에 편승하여 경제를 활성화시키지 않으면 지배의 정통성을 잃는다는 점도 알고 있다. 보시라이가 충칭에서 실천한 바와 같이 경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면서, 혁명 정신을 환기하여 사람들의 정서를 하나로 모으는 것은 많은 태자당들의 이상이었을 것이다. 독점 권력 아래에서 시장화를 진행한 결과, 사회 모순이 커졌고 개발주의만으로는 인심을 모을 수 없었기에, '붉은 2대'는 혁명 회귀나 내셔널리즘을 국민 통합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30여 년의 개발주의 정책을 통해 사회는 크게 변했다. 중국의 발전과 글로벌화는 상호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경제성장 속도가 계속 느려지면, 언젠가 보수·국수주의와 개혁·국제주의의 줄다리기가 치열해질 것이다.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는 시진핑은 현재 전자를 후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붉은 3대'는 아직 없고 표변하는 군자가 나타나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201)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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