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 - 듣는 사람을 위한 가이드
최은규 지음 / 마티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서문


1장 교향곡의 탄생


"이탈리아어로 신포니아(sinfonia)라고 불리는 교향곡은 본래 매우 짧고 간단한 음악이었다. 게다가 정식으로 무대 위에서 연주되지도 않았다. 교향곡은 '오케스트라 피트'라 불리던 무대 앞쪽에 파인 작은 구덩이에서 오페라 공연의 막이 오르기 직전에 연주되곤 했다." "오페라의 서곡처럼 연주됐던 18세기의 교향곡은 일종의 기능음악이었다. 지금처럼 객석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악장이 조율을 지시하고 지휘자가 입장해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일으켜 세우는 드라마틱한 의식이 없었던 그 당시,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짧지만 재미있고 강렬한 서곡을 연주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초기 교향곡들은 '크고 웅장한 도입'과 '흥미로운 진행'을 갖추어야 했다. 오페라 공연이 시작되기 전 '소음 제거'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던 음악이니 만큼 기선을 제압할 만한 큰 소리로 시작했고, 언제나 청중의 귀를 사로잡을 만한 흥미로운 선율을 들려주었다. 그 점이 교향곡의 발전을 유도했으리라."(19-20)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마리아 바르바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1714~88)는 함부르크 시절 모두 열 곡의 교향곡을 남겼다." "음악학자들은 바흐가 구사했던 독특한 교향곡 양식을 '감정 양식'(Empfindsamer Stil)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음악이라는 뜻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음악적 단편들이 빠르게 변화하는 바흐의 교향곡을 듣고 있노라면 감정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마저 든다." "봉건제도의 잔재가 남아 있던 18세기에 가장 보수적이었던 베를린 궁정에서 음악가로 일했던 바흐가 음악이 일종의 '감정 언어'라는 19세기의 미학을 체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그는 가사 없는 기악곡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음악으로 증명했다. 교향곡의 역사 속에서 기악의 위력을 선포하며 이후 다가올 위대한 교향곡의 시대를 예견한 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교향곡 양식을 계승한 작곡가는 아무도 없었다."(27-33)


2장 교향곡 실험: 하이든


"에스테르하지 궁정 시절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이 이끌었던 오케스트라의 일반적인 연주 인원은 열세 명에서 열여섯 명에 불과했다. 바이올린 각 세 명씩에 비올라와 첼로, 더블베이스는 각 한 명씩이고 여기에 목관악기 몇 대가 추가되는 정도였다." "하지만 1792년에 런던에서 잘로몬이 주최한 음악회에서 하이든의 교향곡을 처음 소개할 때 오케스트라 연주 인원은 40명이었고 1795년에는 오늘날 오케스트라 규모와 비슷하게 거의 60명에 육박했다. 작은 살롱에서 연주되는 소규모 실내악의 작은 소리에 익숙했던 당시 청중들이 60여 명의 음악가가 만들어내는 웅장한 교향곡을 듣고 얼마나 열광했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하이든은 대(大)편성 오케스트라로 크고 웅장한 사운드를 만들어 대중을 위한 교향곡의 화려한 효과를 추구하는 한편, 베토벤의 중기 교향곡을 연상시키는 동기발전수법과 소나타 형식의 변증법을 다루는 노련한 솜씨를 발휘하여 18세기 '교향곡의 절대군주'로 등극했다."(46-7)


3장 자유음악가: 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91) 당대의 교향곡은 점차 그 자체로 위대한 '예술 음악'으로 변모해갔으며 콘서트의 중심이 되는 음악으로 떠올랐다. 이는 18세기 후반의 음악가들이 직면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계몽주의가 득세하고 시민계급이 부상하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공공연주회가 생겨나고 출판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는 오랜 세월 궁정악사로서 하인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오던 음악가들이 귀족의 취향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만의 음악'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살았던 시대는 다소 애매했다. 모차르트의 선배 하이든은 생애의 대부분을 봉건적 하인으로 살았고 19세기의 베토벤은 독립 음악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면, 모차르트는 그 두 세계의 중간에 서 있었다. 모차르트 시대에는 음악가가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만큼 음악 시장이 넓지 않았기에 모차르트는 봉건질서에서 완전히 해방되지도, 그렇다고 자유음악가로 온전히 독립하지도 못했다."(98)


"모차르트가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 시점을 전후로 모차르트의 교향곡 형식에는 몇 가지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다." "모차르트가 1781년에 쓴 편지를 보면, 빈의 교향곡 연주회에 바이올린 주자만 40명에 비올라 주자 열 명, 첼로 여덟 명, 더블베이스 열 명을 포함해 총 80명의 연주자가 참여했다. 오늘날 교향악 연주회 규모에 결코 뒤지지 않은 대편성이다. 늘어난 현악기의 수에 맞추어 관악기도 점차 추가되었다. 오보에와 바순이 음향의 균형을 위해 더블 편성되기도 했다." "변화는 단지 편성뿐만이 아니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로부터 탈출을 시도하기 시작한 1770년대 말과 1780년대 초에 작곡된 교향곡 악보에는 몇 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발견된다. 결정적인 변화는 교향곡의 저음부를 맡은 더블베이스와 바순, 첼로 파트가 각기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베이스 라인을 맡은 저음 악기가 모두 같은 선율을 연주하는 관행을 깨고 각 악기의 선율을 분리하면서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는 전보다 더 풍부해졌다."(108)


4장 불멸의 아홉: 베토벤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 그는 모차르트가 헛되이 추구했던 자유 음악가의 길을 완전하게 성취해냈다. 출판업자들은 그의 작품을 얻기 위해 달려들었고 귀족 후원자들은 그를 천재 음악가로 숭배했다. 베토벤은 더 이상 의뢰인의 취향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음악으로 자신의 취향을 청중에게 강요할 수 있었다. 그는 귀족들과 한 테이블에서 접시를 받았고, 〈귀족은 많지만 베토벤은 하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당당한 자유음악가였다. 재봉사나 재단사 같은 기술자나 다를 바 없었던 예술가는 베토벤 시대에 이르러서야 초월적인 상상력과 지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승격되고 존중되었다. 이는 '수공업 예술'에 불과했던 음악이 '예술가의 예술'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술가가 진정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대가 왔음을 뜻했다. 즉, 예술가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람들로서 신성한 진리를 드러내는 존재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131-2)


"말을 못 한다는 것이 큰 약점이었던 기악음악과 교향곡은 베토벤이 활동했던 19세기 초에 비로소 최고의 예술 형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당대의 낭만주의 문필가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성악 우대, 기악 천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서양 음악사의 대세가 기울기 시작한 18세기 말, 시인이자 소설가인 티크는 이렇게 말했다. 〈교향곡들은 수수께끼 같은 언어로 수수께끼 같은 것을 보여주며, 현실의 법칙에 의존하는 바가 전혀 없고, 이야기나 성격과 관련지을 필요가 없으며, 순수하게 시적 세계에 남아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호프만은 '순수' 기악음악이 '낭만적'이며 이러한 낭만성이 듣는 이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을 체험하게 하므로 음악에서 '표현'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티크 역시 음악에서 묘사적인 요소를 제거해 음악을 형이상학적 위치에 올리려 했다. 하지만 정작 베토벤은 소나타와 교향곡을 '표현적인 예술'로 인식하고 소리로서 그 성격을 드러내고자 했다."(144-5)


5장 거인의 그림자: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베를리오즈


"19세기 음악가들의 시름은 날로 깊어만 갔다. 어떤 교향곡을 내놓든 그것은 필연적으로 베토벤 교향곡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는 몇 차례 교향곡 작곡을 시도했으나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1818년 5월에 슈베르트는 교향곡 D장조의 피아노 스케치를 25쪽가량 쓰다가 포기해버렸고, 1821년 8월부터 쓰기 시작한 e단조의 교향곡 작곡도 중도에 그만두었다. 이 교향곡의 아다지오 도입부는 인상적이지만 슈베르트는 그에 어울리는 악상을 전개시킬 수 없었다. 그러다가 1822년 가을에 b단조로 된 위대한 교향곡을 썼으나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슈베르트 교향곡 중 가장 유명한 〈미완성〉이다." "슈베르트는 생애 말년에 '그레이트'라는 부제가 붙은 C장조 교향곡으로 마침내 교향곡 분야에 위대한 걸작을 남기는 데 성공했지만, 안타깝게도 생전에 이 교향곡이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지 못한 채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았다."(193-6)


"슈베르트의 관현악이 계속되는 연주 거부와 초연 연기로 수난을 겪는 동안, 빈 청중은 오로지 하이든과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의 교향곡만을 고집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간혹 음악회에 작품을 올린 동시대 작곡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1809~47)다. 멘델스존은 당시 빈 음악계를 주름잡던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과 함께 관현악 콘서트 프로그램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몇 안 되는 작곡가 중 하나였다." "오케스트라 악기들의 개성과 그 조합이 만들어내는 음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던 멘델스존은 15세부터 본격적으로 작곡하기 시작한 다섯 곡의 교향곡에서 특유의 가볍고 청명한 관현악의 울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당대 모든 교향곡 작곡가가 그러했듯, 멘델스존 역시 교향곡의 거장 베토벤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의 찬란한 풍광을 담은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은 베토벤이 남긴 불멸의 아홉 곡 가운데 7번의 계보를 이었다고 평가된다."(209-13)


"1841년은 로베르트 슈만(1810~56)에게 가히 '교향곡의 해'라 할 만하다." "슈만은 1841년 1월 23일부터 26일까지 단 나흘 만에 교향곡 1번의 스케치를 마쳤고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안 되는 2월 20일에 세부 오케스트레이션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업을 완료했다. 그리고 1841년 3월 31일, 교항곡 1번 〈봄〉은 멘델스존이 지휘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었다. 이로써 슈만은 명실공히 베토벤 이후의 주요 교향곡 작곡가로서 자신을 당당히 증명해 보였다." "슈만의 '봄의 교향곡'은 '교향곡의 봄'을 불러왔다. 슈만은 1841년 '교향곡의 해' 이후 10여 년에 걸쳐 교향곡 2번과 괴테 『파우스트』의 장면음악, 네 대의 호른을 위한 연주회용 소품, 〈만프레드〉 서곡 등의 관현악 작품들을 꾸준히 내놓으며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1851년까지 슈만이 완성하고 개정한 교향곡은 모두 네 편으로, 이는 그로부터 2년 후에 그를 찾아온 젊은 브람스가 작곡하게 될 교향곡의 수와 똑같다."(224-7)


"베를리오즈의 관현악이 내뿜는 독특한 음향은 평범한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다. 베를리오즈는 상상 속에나 가능할 법한 음향의 판타지를 실제 오케스트라 소리로 옮기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했다. 물론 오케스트라의 전통적인 체계까지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그에게 전통이란 기본 뼈대일 뿐이었다." "베를리오즈 이전의 오케스트레이션은 주로 고전적 양식에 따랐다. 즉, 주선율은 대개 현악 파트에 주고 관악기는 주선율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고 가끔 독주를 했다. 그러나 베를리오즈는 전통적인 악기론과 관현악법의 모든 규칙과 관습을 무시하고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악기를 마음대로 주물렀다. 그는 하나의 선율을 조각내서 여러 파트에 분산시켜 입체적인 음향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같은 선율을 연주하고 있는 현과 관 파트의 리듬을 달리해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베를리오즈에게 화성을 채우는 일이나 주선율을 두드러지게 하는 일 따위는 부차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236-47)


6장 누가 베토벤의 후계자인가: 리스트, 브람스


"베토벤의 후계자를 자처한 프란츠 리스트(1811~86)는 베토벤의 음악 사상이 〈첫째, 전통과 형식을 통해, 둘째, 그 사상 자체의 필요와 영감에 의해 형식과 양식을 확장하고 파괴하며 재창조하고 구축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했으며, 그가 택한 길은 후자였다. 그리고 '교향시'(symphonic poem)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교향곡'과 '시'가 결합된 이 변종 관현악 장르는 '시적인 교향곡',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시', '시적인 기악곡' 등으로 풀이될 수 있다. 굳이 '시'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그가 이 새로운 장르에 문학과 미술 등의 자매예술을 끌어들여 새로운 사상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표제음악'(program music)이다. 베토벤이 교향곡 6번 〈전원〉에서 시도했던 표제음악의 아이디어는 리스트에 이르러 형식의 틀마저 파괴하는 극단적 형태로 변형되기에 이른다. 리스트는 교향곡과 같이 여러 악장으로 구성된 형식보다 단악장 형식이 표제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251-2)


"하지만 실상 리스트의 음악을 자세히 보면 그가 고전적 형식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음악을 혼란에 빠뜨린 것은 아니다. 단지 4악장 구조의 정형화된 틀을 버렸을 뿐, 단악장으로 된 그의 교향시 〈전주곡〉을 유심히 살펴보면 소나타 형식을 근거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제1주제군은 C장조, 노래하는 제2주제는 E장조로 되어 있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발트슈타인〉의 조성 구조를 그대로 빼닮았다. 주제 변형 방법 역시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환희의 송가'의 주제 변형 방식과 대단히 유사하다. 비록 겉보기에 그가 베토벤 교향곡의 4악장 구조를 따르지 않았다 해도 그가 주장하는 '미래의 음악'은 '과거의 음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리스트가 청년 시절부터 베토벤 교향곡과 서곡들을 피아노로 편곡하며 베토벤 음악을 향한 열정을 보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다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베토벤을 숭배했고, 나름의 방식대로 베토벤 음악을 계승했을 뿐이다."(255)


"요하네스 브람스(1833~97)가 빈에서 활동하던 당시에는 베토벤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음악가들이 출몰했는데 그중에서도 리스트를 중심으로 한 신독일악파는 전통적인 형식의 교향곡은 끝났다고 주장했고, 각종 표제를 끌어들여 형식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관현악곡들을 내놓으며 음악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일찍이 슈만으로부터 독일 음악계를 구원할 메시아로 지목된 브람스의 눈에는 베토벤이 이룩한 견고한 음악 전통을 흔들어놓는 신독일악파의 시도가 무척이나 위험하고 불경한 것으로 비쳐졌다. 더구나 그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감각적 음향과 신파조의 선율로 가득한 리스트의 교향시에 역겨움을 느끼고 있었다. 신독일악파의 활동이 전통적인 음악을 죽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당시 빈의 음악평론을 주도하고 있던 한슬리크 역시 전통적인 형식을 존중하고 어떠한 표제도 없이 음악 속에서만 의미를 추구하는 브람스의 음악을 이상적인 음악예술이라고 보았다."(275-80)


"이런 혼란 속에서 브람스가 택하고자 한 것은 '절대음악'의 길이었다. 즉, 어떤 표제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음을 재료로 하는 견고한 형식과 고전적 균형미를 갖춘 순수 기악곡으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정치적 격변(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성립)을 겪고 주가가 폭락(1873년 경제 위기)하는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 빈 사람들이 음악에 열광했던 것은 어쩌면 오스트리아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하나의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구질서가 재편되고 이민자가 늘어나는 데 위기를 느낀 빈 토박이들은 메테르니히 재상이 집권했던 옛 시절의 안락했던 생활을 그리워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저항과 보수주의가 설득력을 얻고 1848년 이전의 비더마이어 시대를 향한 향수가 일었다. 정치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럴수록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빈 고전주의 음악을 숭배하고 음악회 문화를 활성화해 정치적으로 무력해지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281-4)


7장 기념비적인 교향곡: 브루크너


"안톤 브루크너(1824-96)의 교향곡은 대단히 신비로우며 규모가 장대할 뿐 아니라 때로는 그 음악적인 표현이 애매모호하고 비논리적인 것 같기도 하다. 브람스가 베토벤 교향곡 5번의 논리성을 모범으로 몰락해가는 교향곡 형식을 구원했다면, 브루크너는 베토벤의 9번을 모델로 교향곡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태초에 우주가 생성되듯 서서히 상승해가는 베토벤 9번 1악장 도입부의 신비로움은 브루크너의 거의 모든 교향곡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브루크너 교향곡 특유의 우주적인 소리는 듣는 이를 종교적 신비와 신을 향한 경외감으로 인도한다."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전무후무한 장엄한 사운드를 만들어냈지만 안타깝게도 발표될 때마다 비평가들의 호된 비판을 받는 수모를 겪었으며, 오늘날에도 베토벤과 브람스의 교향곡에 비해서는 인기가 없는 편이다. 그러나 당대에 인정받지 못했던 것은 작품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음악 정치'에 너무나 무지했기 때문이다."(311-2)


"브루크너는 위대한 작곡가로서는 지나칠 정도로 겸손했다. 브루크너의 주요 작품들은 모두 40대 이후에 작곡되었는데, 이는 그가 본격적으로 작곡에 임하기 전까지 작곡을 자제하고 작곡법을 갈고닦는 데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오토 키츨러와 수업하며 베를리오즈와 리스트 등 당대의 혁신적인 작곡가들의 작품을 공부하고 새로운 음악세계에 눈뜬 브루크너는 같은 시기에 바그너의 음악을 처음 접하고 감전된 듯 바그너에게 빠져들었다." "브람스를 지지하는 음악평론가 한슬리크와 추종자들은 〈브람스의 음악이 동시대의 이상을 반영한다면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역겨운 바그너의 미학에 기대고 있다〉고 평가하며 브루크너를 가리켜 〈그로테스크하고, 엉성하고, 지나치게 야심이 많고, 음악적인 논리성이 결여되었고, 표현이 부자연스럽고, 노예처럼 바그너를 숭배한다〉고 비난했다." "이런 상황에서 브루크너가 어떠한 외적 보상도 없이 대작 교향곡들을 꾸준히 작곡했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이다."(313-5)


8장 러시아와 동유럽의 교향곡: 러시아 5인조, 차이콥스키, 드보르자크, 시벨리우스, 닐센


"동방 교회의 비잔틴 성가와 러시아의 민속 선율이 섞인 즈나메니(Znameny)는 러시아 고유의 단성음악으로 발전했다. 서구의 음악이 단성음악에서 다성음악으로 발전해갔던 것과 달리 즈나메니는 별다른 변화 없이 17세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18세기 초에 이르러 러시아는 급격히 서구 문물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서구 문물의 수입을 계기로 러시아 궁정에 소개된 이탈리아 오페라는 이때부터 200년 가까이 러시아 음악을 지배했고, 오페라를 좋아했던 안나, 엘리자베스, 예카테리나 여제 시대를 거치면서 이탈리아 오페라는 전성기를 맞았다." "러시아 사람들은 외국 문물에 대한 충격과 동경을 느끼며 빠른 속도로 서양 문화에 흡수되어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갑작스러운 서구화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러시아의 음악가들 역시 갈등과 혼란에 휩싸였다. 그들은 서양의 세련된 음악에 충격을 받고 그것을 모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 고유의 음악을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360-1)


"러시아 음악의 선구자는 1836년에 첫 번째 민족주의 오페라인 《황제를 위한 삶》을 작곡하여 명성을 얻은 미하일 글린카였다. 그는 러시아 민속음악의 선율과 리듬을 사용한 오페라를 작곡하여 러시아 음악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오늘날 글린카의 이름은 오페라 《로슬란과 류드밀라》의 서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인기가 워낙 높았던 터라 글린카의 오페라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이후 글린카의 민족주의 음악정신은 '러시아 5인조'라 불리는 다섯 작곡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러시아 5인조' 작곡가는 밀라 발라키레프, 체자르 큐이, 알렉산드르 보로딘,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를 가리킨다. 이들은 서구의 음악에서 독립한 러시아 고유의 음악을 작곡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당시 러시아의 음악평론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로부터 '강력한 소수파'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만큼 이들의 음악은 가장 러시아다운 음악으로 여겨졌다."(361-2)


"일리치 차이콥스키(1840~93)는 서유럽의 음악이론에 통달한 서구적인 작곡가로 평가받지만, '러시아 5인조'와 마찬가지로 일생을 러시아 고유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데 바친 인물이다. 1868년에 러시아 민요 모음집을 출판하고, 러시아의 문학과 역사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차이콥스키가 서구적인 음악가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의 음악가로서의 행보에서 찾을 수 있다. '러시아 5인조'의 음악이 유행할 당시에 그들의 반대파가 세운 음악원에서 공부한 후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다는 점이나 잦은 여행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쌓은 점 등이 그를 서구적인 작곡가로 평가 받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차이콥스키의 음악이 표현하는 러시아 민족주의는 러시아 5인조의 토속적이고 사실적인 민족주의와는 다르다. 차이콥스키는 서양식 훈련을 통해 학습한 낭만적이고 세련된 기법과 러시아의 민속적 요소를 결합하여 국제적이면서도 민족적인 음악을 작곡했던 음악가이다."(370)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와 안토닌 드보르자크(1841~1904)를 배출한 나라 체코는 음악의 역사가 깊다. 1627년에 합스부르크 가에 의해 합병되기 전까지 독립된 국가였던 체코는 14세기에 프랑스 작곡가 기욤 드 마쇼의 음악을 받아들여 일찌감치 '아르스 노바'라 불리는 당대의 최신 음악을 즐길 정도로 앞서나갔다. 합스부르크 가와 합병한 후 체코 음악은 한동안 독일의 지방음악쯤으로 인식되었으나, 1803년에 보헤미아 음악가 그룹인 '소시에테'가 결성되고 1811년에 음악원이 설립되면서 체코의 민족음악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체코의 민족음악과 유럽의 음악어법을 결합시킨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낸 음악가가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이다. 스메타나가 주로 오페라와 교향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반면, 드보르자크는 오페라뿐만 아니라 교향곡과 실내악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그가 남긴 아홉 곡의 교향곡은 19세기 민족주의 교향곡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인정받고 있다."(399-400)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기는 관현악의 전성시대였다. 독일어권에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화려한 교향시와 구스타프 말러의 대규모 교향곡이 탄생했고, 프랑스에선 클로드 드뷔시와 모리스 라벨의 색채적인 관현악이 발표됐으며, 이탈리아에선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기가 옛 로마의 영광을 현란한 음향으로 재현한 로마 3부작을 내놓았다. 이 시기 핀란드의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1865~1957)는 시대의 주류와는 상관없는 독자적인 관현악곡을 내놓아 주목받았다." "교향곡을 〈모티브들 간의 내적 연관성을 창조해내는 심오한 논리〉라 생각했던 시벨리우스는 명 프로듀서 월터 레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나의 교향곡은 음악적 관점에서 인식되고 작곡된 음악입니다. 그것은 문학에 바탕을 두지 않았습니다. 나는 문학적인 음악가가 아닙니다. 내게 음악은 말이 멈춘 곳에서 시작하지요. 풍경은 그림으로 표현되고 드라마는 단어로 표현됩니다. 교향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이어야 합니다.〉"(413-5)


"시벨리우스와 더불어 북유럽을 대표하는 교향곡 작곡가 카를 닐센(1865~1931)은 국내에는 비교적 덜 알려진 듯하다. 그러나 그가 작곡한 여섯 곡의 교향곡은 교향곡의 역사에 있어 매우 비중 있는 작품들로, 오케스트라의 다채로운 색채감과 활력 넘치는 리듬이 매력이다." "그가 23세에 작곡한 현악 5중주 곡은 1888년 4월 28일 초연 당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 음악회를 계기로 젊은 음악가 닐센의 명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닐센이 독일을 중심으로 한 후기 낭만주의 음악을 수용하지 않으면서도 독자적이고 훌륭한 작품을 작곡해 북유럽 음악 특유의 개성을 지켰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당시 덴마크 음악계는 보수적인 성향의 작곡가 닐스 가데의 영향으로 매우 답답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한 닐센은 처음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으나, 전위음악의 물결이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429-30)


9장 세기 전환기의 교향곡: 말러


"구스타프 말러(1860~1911)는 뛰어난 재능으로 당대 청중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지휘자로서의 능력은 경이로웠다." "그러나 이 젊고 활동적인 음악가가 빈 오페라극장 및 필하모닉과 계약을 맺자 빈 음악계는 일대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말러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가 유대인이란 사실이 암암리에 논란을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말러가 빈 오페라극장과 계약할 당시 반(反)유대주의의 선봉이던 카를 뤼거가 빈의 시장이 되면서 말러의 빈 음악계 입성은 정치적 문제로 비화했다." "하지만 말러 시대의 빈 오페라극장에서 이루어진 공연은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리히터가 지휘할 당시 바그너 오페라 공연에서 생략되곤 했던 부분이 말러에 의해 모두 복원되었고, 바그너의 음악극은 음악과 드라마가 한데 어우러진 정교한 대작으로 거듭났다. 현대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오페라 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수와 오케스트라의 호흡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439-40)


"말러는 평생에 걸쳐 여러 가지 음악 양식을 실험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다. 쉬지 않고 변화를 추구한 말러의 음악은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던 세기말 빈 사회를 비추는 듯하다. 당시 빈의 구질서와 새 질서의 충돌을 목도한 말러는 음악을 통해 이를 풍자했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향한 경탄과 구시대에 대한 향수를 냉소했다." "이 시절 '왈츠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만큼 빈 사람들의 욕구를 잘 충족시켜준 음악가도 드물다." "말러는 슈트라우스풍의 왈츠가 당대 사회에 나타난 아이러니를 표현하기에 매우 적합한 재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음악 속에서 왈츠는 비틀어지고 왜곡되며 빈의 거리와 시골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뒤섞인다. 어디선가 군악대의 나팔소리도 들려온다. 독일의 전통과 슬라브적인 요소, 빈의 개성을 지닌 음악 재료들이 말러의 작품 속에서 절묘하게 혼합된다. 그 음악은 마치 지나간 시대를 그리워하며 왈츠와 향락을 탐닉하는 빈 사람들을 조소하는 듯하다."(442-3)


"교향곡인지 가곡인지 모를 '변종' 형식의 작품들을 말러 자신은 '교향곡'이라고 불렀지만, 과연 그가 주장하듯 〈대지의 노래〉나 8번 〈천인 교향곡〉을 '교향곡'이라 할 수 있을까?" "문제의 발단은 말러가 선배 작곡가들의 교향곡을 하나의 대우주 속에 편입시킨 데 있을 것이다. 베토벤의 역동적인 동기발전수법과 〈합창〉에 나타난 '성악 교향곡' 양식, 슈베르트풍의 노래하는 선율, 슈만풍의 낭만적 열정, 베를리오즈 교향곡의 표제적 묘사, 브루크너 교향곡을 방불케 하는 우주적 음향, 차이콥스키 〈비창〉의 쓸쓸한 결말은 말러의 교향곡 속에 모두 하나로 녹아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왈츠와 푸가, 나팔 소리와 민요, 성악과 기악, 나무망치와 소 방울 소리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와 악기로 마치 우주의 음향과도 같은 다채로운 세계를 펼쳐 보인다. 어쩌면 말러의 교향곡은 '함께 울린다'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는 '교향곡'(symphony)이라는 말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지 모른다."(444-5)


10장 20세기 교향곡: 쇼스타코비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75)의 주요 스승으로 꼽히는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는 러시아 고유의 음악어법과 서유럽풍의 음악을 절묘하게 결합해내 많은 이를 사로잡았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장이 된 후 음악원 학생이었던 쇼스타코비치를 지도했고,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격려에 힘입어 15세가 되던 1921년에 〈관현악을 위한 주제와 변주곡〉 Op.3을 완성해 숙련된 작곡기법을 보여주며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후 1923년에는 피아노과를, 1925년에는 작곡과를 졸업했다. 졸업 작품으로 제출한 교향곡 1번은 1926년에 초연되어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쇼스타코비치는 전 생애에 걸쳐 교향곡 작곡에 힘을 쏟아, 무려 열다섯 곡의 교향곡을 남겼다.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이 교향곡 9번의 벽을 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교향곡 열다섯 곡은 대단한 숫자였다. 이 작품들을 통해 쇼스타코비치는 20세기 교향곡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520)


"천재 음악가 쇼스타코비치의 고뇌는 그가 남긴 열다섯 곡의 교향곡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역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넘긴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은 교향곡 1번을 19세에 완성하며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후 소련의 권력자들이 문화·예술 활동을 강력하게 통제하면서 예술가들에게 사회주의 이념에 맞는 예술 작품만을 생산할 것을 요구했고, 쇼스타코비치도 이러한 검열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다. 쇼스타코비치는 평생 당의 방침에 굴복하며 자신의 의지를 꺾어야 했고, 표면적으로는 당의 요구를 수용한 작품을 쓰는 듯 가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잘 들어보면 그 속에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견뎌낸 한 예술가의 진실한 고백과 전쟁으로 먼저 떠나간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깊은 슬픔을 발견하게 된다.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교향곡 대부분이 '묘비'라 말한 것은 그 때문이리라."(5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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