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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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문학과 철학 혹은 예술의 혼융이 빚어내는 이 풍부하고 거대한 사유체계는, 그러나 대기 중을 떠돌며 무작위적으로 대면하는 습기를 머금기에 어느 한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계속 확장되어 간다는 점에서 고독하다.

이 확장은 내밀한 내부로의 해부와 광대한 외부로의 질주를 동시에 포함하는데, 다만 그 진행 과정에 질서란 없기에 꽤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특정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자가분열한다.

누구나 시인이 되기는 쉽고, 누구나 자신의 뇌리에서 폭발하는 관념을 추상화하기는 쉽지만, 타자의 입술을 빌려 무정형으로 침입하는 깨달음은 대부분 허공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해체의 여정에서 수시로 출몰하는 낭떠러지는 눈을 감으면 신기루이지만, 눈을 뜬 순간 존재를 압도하는 벽으로 다가온다. 되돌아가 더욱 가열차게 교배하고 창궐하라는 명령의 벽.

근대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목적지이기에 이들은 post-modernity 하기보다는 pre-modernity하다. 여기, 이제 막 개인이 탄생하고 있지 않은가.

아포리즘이 지나온, 지나가는, 지나갈 역사를 관통할 때에야 비로소 굳건한 대지가 열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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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철학 2013-03-0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투잡 ㅋㅋ 나도 오투잡하는데
 
눈의 탄생 - 캄브리아기 폭발의 수수께끼를 풀다 오파비니아 2
앤드루 파커 지음, 오숙은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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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의 진화를 촉진하는 환경압력 중에 으뜸은 무엇일까?

짝짓기고 하고 종의 계승도 신경써야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신의 생명이다.

박테리아를 넘어 단백질로 구성된 동물문의 증가는 곧 먹느냐, 먹히느냐의 사활을 건 생존경쟁을 불러왔고 서로의 공격무기(강인한 턱이나 먹이를 낚아챌 수 있는 튼튼한 다리)와 방어체계(단단한 외골격과 가시)의 개량을 가속화시켰다.

저자는 이 포식자와 먹이간의 물고물리는 싸움의 시작엔 바로 '눈의 폭발'이 자리한다고 강조한다.

5억 4천만 년 전, 캄브리아기에 접어들면서 눈을 뜨게 된 최초의 포식자는 후각, 촉각, 청각을 활용한 회피전략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기관을 장착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눈의 탄생은 단순히 빛을 받아 상을 구성하는 감광세포의 진화뿐만 아니라 그 정보를 해독하고 배열하여 눈으로 다시 내려보내는 두뇌기관의 발달을 전제하고 있으니,

흡족히 먹으려면 또렷히 봐야 하고 또렷히 보려면 제대로 머리를 굴릴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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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어두운 저편 창비시선 308
남진우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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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땅바닥으로 추락한 새
삭아서 앙상한 뼈와 깃털 몇개로 남았다
사람들이 무심코 밟고 지나가다
침을 뱉는다
담배꽁초를 던진다
보도블록 틈새
흐린 얼룩으로 들러붙어 있는 새 한 마리
그래도 바람이 불면
땅바닥을 벗어나 솟구쳐오르겠다고
먼 하늘 향해
하나 남은 가느다란
깃털을 흔든다
------------------------
모퉁이를 돈

누군가는,
얼굴을 보이지 않고,
저벅이는 발자국으로 지나간다

가만히 숨죽이고 담장에 귀대어보는 나

그건,
어쩌면,
인간의 몸을 한 사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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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토마스 프랭크 지음, 김병순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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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이 재생산되는 사회적 체계를 점검해 볼 시간도, 여력도 없다. 대신에 가난이 개인의 능력이라는 공정한(!) 기준에 따른다는 주장을 내면화한다. 그들은 삶을 보상받을 다른 가치를 원한다.

1. 경제, 다가설 수 없는 연인
경제는 심장박동처럼 멈출 수 없는 삶의 문제이지만 반복된 일상이기에 그 작동방식에 둔감해지기도 한다.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개인의 차원에서 장바구니 물가만 유독 오르는 이유를 해명하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 된다. 그러므로 그 지난한 과정을 두고 탐정놀이를 하기보다는 백마를 타고 오는 선지자처럼 단칼에 이 고난의 사슬을 끊어낼 영웅을 고대하게 된다.

2. 문화가 바로서야 나라가 산다.
모든게 엉망이 된 가장 큰 이유는 개혁한답시고 커피를 홀짝이며 대도시의 멋들어진 사무실에 앉아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는 저 잘난 '자유주의자'들 탓이다. 그들은 유대인이나 프리메이슨처럼 암울한 현실을 조장하는 장막뒤의 검은 손이다. 그들이 자생하는 이 타락한 문화를 먼저 구원해야만 바른 질서가 가능하다. 향락과 육욕의 화신이자 상징인 클린턴을 보라.

3. 이상향으로서의 과거 회귀
그렇게 8년을 선거로 응징했다. 대통령도, 의회도, 사회 각 부문의 소소한 자리들도 싸워서 쟁취했다. 그러나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우리의 성전이 승리의 순간에도 무력한 것은 우리가 외면하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저 망할 놈의 자유주의자들이 심어놓은 해악이 그만큼 뿌리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멋진 이상향을 되찾기 위한 싸움은 멈출 수 없다.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가 아니라 "문제는 문화야, 이 위선자야"
이렇게 오늘도 가난한 사람들은 계급을 배반하는 숭고한 사명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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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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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건한' 종교의 가르침은 비록 그 자체로는 극단적이지 않아도 극단주의로 이어지는 공개 초청장이 된다. - 본문 중에서

도킨스는 불가지론자이거나 종교와 과학의 화해를 말하는 중용론자가 아니다. 그는 강력한 '무신론자'로서 종교 자체의 소거를 주장한다. 풍부한 논증으로 근본주의 탈레반과 맞서는 저자의 견결한 태도는 매우 합리적이며 공공선에 부합하는 듯 보인다.

이런 전투자세는 각종 신도 모자라 조상복마저 비는 우리에게는 낯설어 보이지만 절대자의 위엄 앞에 짓눌려온 서양의 개인들이 르네상스와 근대의 존재론적 회의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교의 폐해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저자의 자리가 소수자(혹은 소수권력)의 옆이라는 점이 곧 논증의 정합성을 보장해주지는 않는 바, 논점으로 삼을 수 있는 많은 재료들 중에 2가지만 중점적으로 고찰해보면,

1. 부시와 빈 라덴(그리고 그들의 무수한 선배들)으로 대표되는 근본주의 탈레반들이 오로지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위해서 이 모든 비극을 연주한다는 가정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설사 그들이 완전한 종교적 열정에 휩싸여 서로를 향한 파괴 행위를 기도하더라도 그 실행을 뒷받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속적 권력과 이익 추구 집단이다.

그들 전체가 유신론에 휩싸인 광신도 집단이라고 가정하는 건 프리메이슨의 세계 정복 야욕이 현실적 위협이라는 것과 별다를 바 없는 주장이다. 그들 대부분은 'Money' God을 섬기는 유물론자들로서 종교는 그들이 대중을 미혹할 때 주입하는 유용하고도 강력한 수단 중의 하나일 것이다. 현대에는 신의 자리에 올라선 향락, 욕망, 자본, 이데올로기가 차고 넘친다.

2. 도킨스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바탕으로 조직된 사회의 건강성을 매우 긍정하지만, 그것은 종교라는 비합리성에 바탕을 둔 상대가 반대편에서 강력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대는 바가 크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비롯한 밈 이론을 사회 영역까지 확장함으로써 윌슨과 더불어 사회생물학의 강력한 지원군 역할을 하고 있다. 사회생물학은 (사회적) 불평등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불가피하고 변화불가능한 조건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인간의 '모든' 측면이 유전자 안에 부호화되어 있고 자연선택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도킨스 자신은 그런 극단적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할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회생물학은 (사회)권력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으며, 그 양상은 과거의 종교가 누린 명성과 닮아있다. 이것은 마치 예수 운동이 가졌던 혁명적 사회평등 사상이 전부 거세되고 세속화된 교회들만 건재한 현실과 유사하다.

즉, 도킨스의 선의와 상관없이 사회적 밈의 영역안에서 그의 명확한 논리를 신봉하는 집단은 자신의 세력이 확고해질수록 상대방에 대한 일상적인 모욕과 배타적인 태도를 내면화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의 과학적 신념은 때론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비유하자면, 종교는 기부를 말하고 과학은 복지를 말한다. 나는 자발적 기부가 활발한 사회보다 보편적인 복지가 널리 깔려있는 사회가 훨씬 건강하다고 생각하지만 둘 중에 하나만 있는 세상은 꽤나 삭막하리라 생각한다.

아마 그 행위 안에 '사랑'은 거의 담겨져 있지 않을테고 세상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설명할 수 없는 섭리들로 채워져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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