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라시드 할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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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팔레스타인 토착 사회의 해체는 새로 만들어진 영국 위임통치 당국(유대인 정착민들의 자치 구조 구성을 도운)이 지지하는 가운데 대규모로 유입된 유럽계 유대인 정착민들에 의해 촉발되었다." "영국의 지배에 맞선 1936~1939년 아랍 대반란이 철저히 탄압을 받으면서 원주민 인구는 한층 더 감소했다. 영국이 10만 명 규모의 병력과 공군을 동원해서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진압하는 가운데 당시 성인 남성 인구의 10퍼센트가 살해되거나 부상당하거나 투옥되거나 추방당했다. 한편 독일 나치 정권의 박해에 따라 유대인 이민자가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가 1932년 총 18퍼센트에서 1939년 31퍼센트 이상으로 증가했다. 그리하여 1948년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에 필요한 인구학적 임계점과 군 병력이 마련되었다. 이후 시온주의 민병대에 이어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아랍 인구의 절반 이상을 쫓아냄으로써 시온주의의 군사적·정치적 승리가 완성되었다."(24-5)


"남북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아시아, 오스트랄라시아 (또는 아일랜드) 등 어디서든 원주민을 몰아내거나 지배하려 한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은 특유의 언어로 언제나 원주민을 경멸적으로 묘사했다. 또한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 통치한 결과로 토착민들이 더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식민주의의 이론적 근거와 나란히, 유럽의 시온주의 식민화가 도래하기 전에 팔레스타인은 황량하고 아무도 살지 않으며 후진적인 땅이었음을 입증하는 데 골몰하는 수많은 문헌이 존재한다."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오직 새로운 유대인 이민자들이 앞장서서 땀 흘려 일한 덕분에 이 나라가 오늘날과 같은 꽃피는 정원으로 바뀌었고, 오로지 그들만이 이 땅에 일체감과 사랑을 느끼고 (하느님이 주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이즈라엘 쟁윌 같은 초기 시온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을 지지한 기독교인들까지 소리 모아 외친 구호로 요약된다. 「사람 없는 땅을 땅 없는 사람들에게 주자.」"(26-8)


1 첫 번째 선전포고, 1917~1939


"20세기의 첫 번째 10년간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의 대다수는 여전히 문화적으로 도시에 거주하는 무슬림이나 기독교인과 무척 비슷했고 서로 꽤 편안하게 공존했다. 유대인은 대부분 초정통파이자 비시온주의자였고, 미즈라히(동방 출신 유대인)나 세파르디(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의 후예)였으며, 중동이나 지중해 출신의 도시인으로 대게 제2언어나 제3언어라 할지라도 아랍어와 터키어를 구사했다. 유대인과 이웃들은 종교로 뚜렷이 구분되었지만, 그들은 외국인이 아니었고 유럽인이나 외부에서 온 정착민도 아니었다. 그들은 무슬림이 다수인 원주민 사회의 일부를 이루는 유대인이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으며, 남들도 그렇게 보았다. 게다가 다비드 벤구리온이나 이츠하크 벤츠비(훗날에 각각 이스라엘 총리와 대통령이 된다) 같은 열렬한 시온주의자를 포함해서 당시에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일부 젊은 유럽계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처음에 현지 사회에 어느 정도 통합되려고 했다."(40)


"벨푸어 선언은 부드럽고 기만적인 외교의 언어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본거지를 수립하는〉 데 찬성한다는 모호한 구절을 담았다. 이 선언으로 영국은 사실상 팔레스타인 전체에 유대 국가를 세워 주권을 확보하고 이민을 통제한다는 테오도어 헤르츨의 목표를 지지한다고 약속한 것이었다. 의미심장하게도 벨푸어는 압도적 다수의 아랍 주민들(당시 약 94퍼센트)에 대해서는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라고 애매한 방식으로 언급하고 지나갔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무관한〉 존재로 서술되었고, 확실히 한 민족이나 집단으로 거론되지 않았다. 67개 단어로 이루어진 선언문에는 〈팔레스타인인〉이나 〈아랍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압도적 다수의 주민들은 정치적·민족적 권리가 아니라 〈시민적·종교적 권리〉만을 약속받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벨푸어는 당시 이 땅에 거주하는 주민의 6퍼센트에 불과했던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칭하면서 민족적 권리를 부여했다."(46-7)


# 벨푸어 선언(1917. 11. 2) : 폐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본거지를 수립하는 것을 찬성하고, 이러한 목적을 신속하게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으며, 그로 인해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나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이 누리는 권리나 정치적 지위가 침해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다.


"대중적 신화는 팔레스타인인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집단적 의식이 부재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 정체성과 민족주의는 유대인의 민족 자결에 대한 터무니없는 반대로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이 팽배해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정체성은 시온주의와 마찬가지로 여러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등장했으며, 근대의 정치적 시온주의와 거의 정확히 동시에 나타났다. 반유대주의가 시온주의에 기름을 부은 여러 요인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처럼, 시온주의의 위협 역시 이런 자극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의 여러 민족 정체성은 근대적이고 우연한 현상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의 상황에서 생겨난 소산이다.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시온주의가 원주민에게 이득을 준다는 헤르츨의 식민주의적 견해와 일맥상통하며, 벨푸어 선언과 그 후속 조치들로 그들의 민족적 권리와 민족의식을 삭제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55-6)


"1922년, 새롭게 구성된 국제연맹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발포하여 영국의 통치를 공식화했다. 위임통치령은 밸푸어 선언을 원문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선언의 약속을 크게 확대했다. 위임통치령 문서는 〈일부 공동체〉에 대해서는 〈독립국가로서의 존재를 임시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국제연맹 규약 22조를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계속해서 문서에는 벨푸어 선언의 조항들을 지지한다는 국제적 약속이 제시되어 있다. 이 후속 문구에 분명하게 담긴 함의는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 민족 한 집단에게만 민족적 권리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중동의 다른 모든 위임통치령에서는 규약 22조가 전체 인구에 적용되어 결국 이 나라들에 일정한 형태의 독립이 허용된 것과 대비를 이룬다." "한 민족의 땅에 대한 권리를 뿌리째 뽑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땅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위임통치령 세 번째 문단에는, 오직 유대인만이 팔레스타인과 역사적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60)


"1937년 7월, 필 경의 지휘 아래 팔레스타인 소요 사태─1936년에 6개월간 진행된 총파업─를 조사하는 책임을 맡은 왕립위원회가 나라를 분리해서 영토의 약 17퍼센트에 작은 유대 국가를 형성하고 이 지역에서 200만이 넘는 아랍인을 추방할 것(추방expulsion 대신에 〈이동transfer〉이라는 완곡한 단어가 사용되었다)을 제안하자, 이런 개입의 실망스러운 결과가 드러났다. 이 계획에 따르면, 나라의 나머지는 계속 영국이 통치하거나 영국에 예속된 트랜스요르단의 아미르 압둘라에게 양도할 예정이었다. 팔레스타인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상 아무 변화도 없는 셈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팔레스타인인들은 민족적 실체나 집단적 권리가 전혀 없는 것처럼 대우를 받았다. 비록 팔레스타인 전체는 아니더라도, 팔레스타인인을 제거한다는 시온주의의 기본 목표가 충족되고, 팔레스타인 쪽이 열렬하게 바라는 자결권이라는 목표가 부정되자, 팔레스타인인들은 봉기를 한층 더 전투적인 단계로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73)


"숱한 희생이 벌어지고 반란이 잠깐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만 남았다. 영국의 야만적인 탄압과 수많은 지도자의 죽음과 유형, 내부에서 벌어진 갈등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은 방향을 잃고 분열되었고, 1939년 여름에 반란이 진압될 무렵에는 경제도 허약해졌다." "하지만 1939년 유럽에서 전운이 확대되는 가운데 영제국에 새롭게 제기된 중대한 전 지구적 도전이 아랍의 반란과 결합되어 런던 당국의 정책에 대대적인 변화가 생겼다. 앞서 시온주의를 전면적으로 지지하던 입장이 바뀐 것이다." "제국의 핵심적인 전략적 이해의 측면에서 보자면, 영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한편 대반란Great Revolt을 강제로 진압하는 것에 대한 아랍 각국과 이슬람 세계의 분노를 다독이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특히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이는 잔학 행위에 대해 추축국이 중동 지역에 선전 공세를 퍼붓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78-9)


"1939년 봄, 네빌 체임벌린 정부는 팔레스타인과 아랍, 인도 무슬림의 분노한 여론을 달래려는 시도로 백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는 시온주의 운동에 대한 영국의 전폭적 지지를 대폭 삭감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유대인 이민 유입과 토지 판매를 엄격하게 제한할 것(아랍의 주요한 두 가지 요구였다)을 제안하였고, 5년 안에 대의 기관을 마련하고 10년 안에 자결권을 주겠다(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구였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백서를 발표했을 당시 체임벌린 정부는 임기가 몇 달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고, 체임벌린 후임으로 총리가 된 윈스턴 처칠은 영국 정게에서 아마 가장 열렬한 시온주의자였을 것이다. 더욱 중요하게도, 나치가 소련을 침공하고 일본의 진주만 습격 이후 미국이 참전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진정한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는 가운데 바야흐로 새로운 세계가 탄생할 참이었다. 이제 이 세계에서 영국은 기껏해야 이류 강대국일 뿐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이제 영국의 수중을 벗어날 터였다."(79-81)


2 두 번째 선전포고, 1947~1948


"전쟁 이후 연달아 일어난 두 가지 결정적인 사건은 팔레스타인인들 앞에 어떤 장애물이 놓여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여러 아랍 정권들과의 관계는 이미 불안했다." "영국의 후원으로 아랍 6개국이 아랍연맹을 결성한 1945년 3월에는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회원국들이 아랍연맹의 창립 성명에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언급을 삭제하고 팔레스타인 대표자에 대한 선택권을 계속 자신들이 갖기로 결정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은 쓰라린 실망감을 느꼈다." "더욱 원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1946년 구성된 영국-미국 조사위원회였다. 영국과 미국 정부가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긴급하고 절박한 상황을 검토하기 위해 세운 기구였다. 수십만 명의 유대인이 유럽의 난민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미국과 시온주의가 선호하는 방안은 이 불운한 사람들이 곧바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도록 허용하는 것이었는데(미국이나 영국이나 그들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사실상 1939년 백서의 취지를 부정하는 방안이었다."(96-7)


"주로 이라크의 누리 알사이드와 영국의 지원을 받는 그의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아랍청은 결국 다른 아랍 국가들을 소외시켰다. 특히 범아랍권의 지도부를 자처하는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소외시켰다. 양국 지도자, 그리고 시리아와 레바논의 지도자는 아랍청 창설이 이라크가 지역 차원에서 야심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아마도 정확하게─의심했다." "한편 트랜스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은 최대한 넓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품은 채 이 나라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놓고 시온주의자들 및 영국의 지지자들과 타협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유엔이 팔레스타인을 분할하는 쪽으로 옮겨 가자 국왕은 협정 체결에 대한 기대를 품고 비밀리에 유대인기구 지도자들과 거듭 회동했다." "따라서 이라크의 누리와 달리, 압둘라로서는 어떤 형태로든 팔레스타인의 독립 지도부가 필요 없었고, 팔레스타인의 외교 부서 역할을 할 아랍청 같은 기구도 아무 쓸모가 없었다."(106-7)


"1947년 애틀리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새로 만들어진 유엔에 맡겼고, 유엔은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한 권고안을 마련하기 위해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UNSCOP를 만들었다. 시온주의 운동은 유엔을 지배하는 미국과 소련을 향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반면,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전후 국제적 힘의 재조정은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의 활동과, 소수의 유대인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팔레스타인의 분할을 제안한 다수 의견 보고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보고서의 제안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의 56퍼센트가 유대인의 몫이었는데, 1937년 필위원회 분할안에서 제안한 유대 국가의 규모가 훨씬 작은 17퍼센트였던 것과 대비되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안 제181호가 통과된 것은 새로운 국제적 세력 균형이 반영된 결과였다. 결의안은 팔레스타인을 넓은 유대 국가와 좁은 아랍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국제적인 분할체를 만들 것을 요구했다."(111)


"나크바─1947년 말부터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인을 강제 이주, 추방하고 심지어 말살하려는 목적에서 행한 집단 학살 행위를 가리킨다─는 마치 열차 사고가 천천히, 그러나 끝없이 계속되는 것처럼, 몇 달에 걸쳐서 펼쳐졌다. 1947년 11월 30일부터 영국군이 최종적으로 철수하고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수립될 때까지의 첫 번째 단계에서 하가나Haganah와 이르군Irgun을 비롯한 시온주의 준군사 집단은 무장과 조직력이 형편없는 팔레스타인인들과 그들을 도우러 온 아랍 지원병들을 잇따라 물리쳤다. 이 첫 단계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전투는 1948년 봄 플랜 달렛Plan Dalet이라고 명명된 전국 차원의 시온주의의 공세에서 정점에 달했다. 플랜 달렛은 4월과 5월 전반에 아랍의 양대 도시인 야파와 하이파, 그리고 서예루살렘의 아랍인 구역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랍 도시와 소읍, 마을을 정복하고 주민들을 쫓아내는 결과를 낳았다."(112-3)


"추방을 피해 이스라엘로 바뀐 팔레스타인 지역에 남을 수 있었던 16만 명 정도의 소수 팔레스타인인은 이제 그 국가의 국민이었다. 무엇보다도 새롭게 다수가 된 유대인을 위해 전력을 다한 이스라엘 정부는 이 남아 있는 팔레스타인인을 의심이 가득한 눈길로 잠재적 제5열로 바라보았다. 1966년까지 대다수 팔레스타인인은 엄격한 계엄령 아래서 살았고, 가진 땅을 대부분 빼앗겼다. 이스라엘 국가가 합법으로 간주한 수용을 거쳐 가로챈 이 땅은 경작 가능 지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는데, 유대인 정착촌이나 이스라엘토지공사에 양도되거나 유대민족기금에 통제권이 넘어갔다. 유대민족기금의 차별적 헌장에 따르면, 이런 토지는 유대인을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자기 나라와 종교에서 상당한 다수의 지위에 익숙해져 있던 그들은 갑자기 적대적 환경에서 멸시받는 소수로 생활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스스로를 절대 전체 국민의 국가로 정의하지 않은 유대 정치체의 피지배자가 되어야 했다."(126-7)


"아랍 국가들과 국제사회가 1948년의 재앙적 결과를 뒤집으려는 의지나 능력을 보이지 않자, 나크바 이후의 황량한 상황 속에서 팔레스타인의 행동주의가 여러 형태로 되살아났다. 소규모 집단들이 이스라엘에 맞서 무기를 집어들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현재 상태를 바로잡으려는 팔레스타인의 모든 시도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대에 대처하는 것 외에도 아랍의 난민 수용 국가, 특히 요르단, 레바논, 이집트 등의 정부와 대결해야 했다. 유대 국가에 비해 군사력이 크게 뒤지는 상황에서 이 나라들은 이웃에 대한 공격을 묵인하기를 대단히 꺼렸다. 팔레스타인의 여러 운동이 새롭게 만들어질 때에도 그들은 일부 아랍 국가가 이런 운동을 자기들이 추구하는 목적에 맞게 활용하려는 시도를 물리쳐야 했다. 1964년 이집트의 요청에 따라 아랍연맹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창설한 것은 이처럼 새롭게 등장하는 독립적 팔레스타인 행동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아랍 국가들이 이 운동을 통제하려는 가장 중요한 시도였다."(136-7)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 때문에 종종 이스라엘이 가자를 어떻게 표적으로 삼았는지가 가려졌다. 강대국이 직접 참여하는 국가 간 충돌이 더 많은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가자 지구는 1948년 이후 자기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인들이 벌이는 저항의 용광로였다. 파타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창립한 지도자 대부분이 이 기다란 해안 지대의 비좁은 동네에서 등장했다. 또한 전투적인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은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을 그곳에서 끌어모았고, 나중에 가자 지구는 이스라엘에 맞서 가장 끈질기게 무장투쟁을 주창한 이슬람지하드와 하마스의 탄생지이자 요새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나크바로 겪은 충격과 굴욕에도 불구하고, 자기 땅을 빼앗긴 것을 묵인하지 않고 저항하자, 자국 문제에 정신이 팔린 채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의지나 각오가 전혀 없었던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의 대결로 이끌려 들어갔고, 이 대결은 걷잡을 수 없이 고조되었다."(143-4)


3 세 번째 선전포고, 1967


"벨푸어 선언과 위임통치가 한 강대국에 의해 팔레스타인인을 상대로 발표한 첫 번째 선전포고였고, 1947년 팔레스타인 분할에 관한 유엔 결의안이 두 번째 선전포고였다면, 1967년 전쟁의 결과는 세 번째 선전포고─안보리 결의안 SC 242의 형태로─를 낳았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 제242조는 이스라엘의 영토 획득을 용인하고 있다. 결의안 문안은 대부분 영국 상임 대표 캐러돈 경이 작성했지만, 사실상 미국과 이스라엘의 견해를 압축한 내용으로 6월의 압도적인 패배 이후 아랍 각국과 그들의 후견인인 소련의 입지가 약화된 사정이 반영되었다. 결의안 제242호에는 〈전쟁을 통한 영토 획득을 용인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도 이스라엘이 철수하기만 하면 아랍 국가들과 강화 조약을 맺고 안전한 국경을 확립할 수 있음이 언급되어 있었다.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직접 교섭하는 것을 꺼리는 상황에서 사실상 이 말은 이스라엘의 철군은 어떤 것이든 조건이 붙고 지연될 것임을 의미했다."(152, 156-7)


"게다가 결의안 제242호에는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를 공인된 안전한 국경의 창설과 연계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정하는 대로 안보 기준 충족을 위해 국경을 확장할 가능성을 허용한다는 조항이 실렸다. 핵무장을 갖춘 이 지역 강대국은 그 후 이 조항을 이례적으로 폭넓고 유연하게 해석해 왔다. 마지막으로, 결의안 제242호의 모호한 언어는 이스라엘이 방금 전에 점령한 영토를 계속 보유할 수 있는 또 다른 허점을 열어 주었다. 결의안의 영어 원문은 1967년 전쟁에서 〈점령한 그 영토from 'the' territories occupied〉가 아니라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해야 한다withdrawal from territories occupied〉고 규정한다." "그 후 반세기 동안 미국이 지원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점령지를 식민화할 수 있게 만든 이런 언어상의 허점을 한껏 활용했다. 실제로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 골란고원의 경우에 수십 년간 간헐적으로 직간접적 교섭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전면 철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157)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결의안 제242호가 사실상 1949년의 휴전선(그 후 1967년 국경이나 그린라인이라고 불렸다)을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국경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로써 1948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대부분 지역을 정복한 것을 간접적으로 승인한 셈이다. 194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핵심적 쟁점들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보상을 받을 권리가 무시되는 결과로 이어져 그들의 열망은 다시 타격을 받았다." "결의안 제242호는 이런 탁월한 날조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점령당하고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강력한 일격을 날렸다. 2년이 지난 1969년에야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는 〈팔레스타인인 같은 건 없었고,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전에도 존재한 적이 없다고 유명한 선언을 했다. 그리하여 총리는 정착민-식민주의 기획에 특징적인 존재 부정을 최고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원주민이라는 건 허구일 뿐이라는 것이었다."(159)


"1950년대에 실지회복주의를 주창하며 생겨난 소규모 전투적 집단들을 창설한 것은 중간계급과 하층 중간계급의 젊은 급진주의자들로서 대부분은 셰이크 이즈 알딘 알카삼의 후예를 자처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사망해 1936년 반란을 촉발함으로써 여전히 영웅적인 무장투쟁의 상징으로 기려지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1956년 이후에도 팔레스타인의 권리와 이해를 대변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이런 시도는 두 가지 주요한 추세 속에서 정점에 다다랐다. 하나는 주로 팔레스타인인들이 창설한 범아랍 조직으로 1967년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을 창설한 아랍민족주의자운동이 이끌었다. 나머지 하나는 1959년 쿠웨이트에서 공식 설립되어 1965년에 공개적으로 파타Fatah라는 이름을 밝힌 집단이 주도했다. 두 집단은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갔는데, 당시 최초의 지도자들은 대학생이나 최근에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었다."(166-7)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가까워서 학생과 식자층, 중간계급, 특히 좌파 정치에 이끌리는 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또한 난민촌에서 헌신적인 추종자들이 있었다. 인민전선의 급진적 메시지가 가장 고통을 받는 팔레스타인인들과 강하게 공명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파타는 공공연하게 팔레스타인 좌파를 표방하는 그룹과 비교할 때 정치적 입장에서 확실히 이데올로기와 무관했다. 창립 당시 파타는 아랍민족주의자운동이나 바트당 같은 아랍 민족주의 성향의 단체들과, 공산주의, 좌파, 팔레스타인 같은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앞서 우선 사회 변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슬림형제단 같은 이슬람주의 단체 양쪽 모두에 대한 반발을 상징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직접,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파타의 호소,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폭넓은 입장이야말로 파타가 순식간에 최대의 정치 집단으로 부상할 수 있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170)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1967년 이후 외교와 선전에서 (제한적이나마) 잇따라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런 성공이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매번 여러 적수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70년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이 여러 차례 항공기를 납치하고 요르단에서 팔레스타인 세력이 폭력 사태를 일으키자, 하심 가문 정권과 파국적인 대결이 벌어졌다. 저항 운동 쪽에 승산이 없는 대결이었다. 압도적인 무력에 직면하고 대중적 공감도 일부 상실한 저항 운동은 그해에 검은구월단 사건 속에서 암만에서 밀려났고, 1971년 봄에 요르단에서 완전히 추방되었다. 요르단 와해 사태를 거치면서 저항 운동의 일부 요소들, 특히 팔레스타해방인민전선이 그 시점까지 유지하던 성공적인 역동성의 아우라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무모하게 적들을 도발하고, 의지처가 되는 나라들을 소외시키며, 결국 쫓겨나게 되는 저항 운동의 이런 양상은 11년 뒤 베이루트에서 고스란히 되풀이되었다."(180-1)


"1970년대 초를 시작으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성원들은 이런 압력─아랍 국가들이 점차 이스라엘과의 분쟁을 존재론적 차원이 아니라 국경을 놓고 국가들끼리 벌이는 대결이라고 받아들이게 된 제한적 관점─에, 특히 소련의 촉구에 부응하여 이스라엘과 나란히 팔레스타인 국가를 만든다는 구상, 사실상 두 국가 해법을 내놓았다. 이 방식은 특히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1969년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에서 떨어져 나온 조직이다)이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단체들과 함께 주창한 것으로, 파타 지도부도 조심스럽게 권장했다.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과 파타의 일부 간부들은 일찍부터 두 국가 해법에 저항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아라파트를 필두로 한 지도자들이 이 방안을 지지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민주국가라는 최대주의적 목표와 여기에 담긴 혁명적 함의에서 벗어나 이스라엘과 나란히 존재하는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좀 더 실용적인 목표로 나아가는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 과정의 시작이었다."(187)


"카터 시절 미국은 팔레스타인의 민족적 권리와 교섭 참여를 거의 지지했지만, 양쪽 사이의 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욱 멀어졌다. 캠프 데이비드와 이스라엘-이집트 평화 조약은 미국이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부정하는 가장 극단적인 세력과 손을 잡는다는 신호였고, 이 제휴는 레이건 행정부에서 더욱 공고해졌다. 베긴과 리쿠드당의 후임자들인 이츠하크 샤미르, 아리엘 샤론, 베냐민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이나 주권 확보, 점령지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의 지배권 회복에 철저히 반대했다. 제에브 자보틴스키의 이데올로기적 상속자인 그들은 팔레스타인 전체가 오직 유대인의 땅이라고 믿었다. 〈현지 아랍인들〉에게 주어진 자치권은 땅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을 뿐이다." "향후 이뤄지는 교섭은 무한히 연장할 수 있는 과도기를 위한 자치 조건에 제한되었고, 주권, 국가 수립, 예루살렘, 난민의 운명, 팔레스타인의 토지와 물과 대기에 대한 관할권 등에 관한 논의는 죄다 배제되었다."(202-3)


4 네 번째 선전포고, 1982


"1982년 레바논 침공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에서 분수령이 되었다. 1948년 5월 15일 이래 아랍 각국 군대가 아니라 주로 팔레스타인인이 관여해서 최초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팔레스타인 페다인은 1960년대 중반부터 줄곧 요르단의 카라메에서,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레바논 남부, 특히 1978년 리타니 작전에서, 그리고 1981년 여름 레바논-이스라엘 국경을 가로지르는 격렬한 포격전 등에서 이스라엘 군대와 대결했다. 하지만 존재 자체를 없애려는 거듭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정치적·군사적으로 레바논에서 굳건한 입지를 구축해 놓은 까닭에 비교적 제한된 성격의 군사 작전으로는 최소한의 영향만 미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대레바논 침공을 이끈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시리아 무장 세력을 레바논에서 축출하고 베이루트에 말 잘 듣는 동맹 정부를 만들어 그 나라의 상황을 바꾸기를 원했지만, 주요한 목표는 팔레스타인 자체였다."(209)


"원래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벌이는 활동은 공식적인 틀─1969년 채택된 카이로 협정─안에 제한되어 있었다. 이 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레바논 남부의 많은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통제하고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중무장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레바논의 여러 지역에서 점차 지배권을 쥐고 권력을 휘두르는 세력이 되었다. 레바논의 보통 사람들은 내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이렇게 억압적인 팔레스타인 세력이 더욱 강화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레바논에 세운 일종의 미니 국가는 궁극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의 군사 행동에 자극받은 이스라엘이 레바논 민간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분노가 들끓었다. 이스라엘을 겨냥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공격은 종종 민간 목표물을 대상으로 삼았고, 팔레스타인의 민족적 대의에 해를 끼치지는 않을지라도 진척시키는 데 가시적으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222)


"1982년 전쟁이 낳은 가장 중요한 지속적인 결과는 레바논에서 헤즈볼라가 부상한 것과 레바논 내전이 격화되고 장기화된 것이었다. 이 내전은 훨씬 더 복잡한 지역적 분쟁으로 비화했다. 1982년 침공은 여러 가지로 최초의 사건이었다. 1958년 미군이 잠깐 레바논에 파병된 이래 미국이 최초로 중동에 군사 개입한 사례였고, 이스라엘이 아랍 세계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강제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사례였다. 이 사건들 때문에 많은 레바논인과 팔레스타인인, 아랍인 사이에서 다시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해 훨씬 격렬한 반감이 생겨나면서 아랍-이스라엘 분쟁이 한층 악화되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정책 결정권자들이 1982년 전쟁을 개시하면서 내린 선택에서 직접적으로 나온 결과였다." "또한 이스라엘과 그 지지자들의 정교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베이루트에서 고통에 시달리는 민간인들의 끔찍한 이미지가 널리 퍼져 나갔고, 그 결과 세계 속에서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지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238-9)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베이루트에서 철수하자 팔레스타인의 대의는 심각하게 약해진 듯 보였고, 샤론은 핵심 목표─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축출하는─를 전부 달성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사태가 낳은 역설적인 결과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다시 시작된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의 무게중심이 이웃 아랍 나라들로부터 점차 팔레스타인 내부로 옮겨 갔다는 것이다. 5년 뒤인 1987년 12월, 1차 인티파다가 발발한 곳도 팔레스타인으로, 이스라엘과 세계의 여론을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수십 년 전에 나크바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뼈아픈 패배를 계기로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을 겨냥한 다면적인 전쟁에 맞서 새로운 형태의 저항을 일으켰다. 샤론과 베긴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물리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사기를 꺾음으로써 이스라엘이 자유롭게 점령지를 흡수하기 위해 침공에 착수했지만, 오히려 팔레스타인인들이 저항을 자극하고 팔레스타인 내부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40)


"미국 입장에서 보면, 중동 외교를 독점하려 하고 이스라엘의 야심을 부추긴 것은 자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후 벌어진 상황을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레바논의 혼란 상태에서 자라난 헤즈볼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치명적인 적이 되었다. 헤즈볼라의 부상을 검토하면서, 이 운동을 창설하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표적을 겨냥해 치명적인 공격을 가한 많은 젊은이들이 1982년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나란히 싸운 이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젊은이들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 투사들이 떠난 뒤에 남아서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인들과 나란히 자신들과 같은 시아파 수백 명이 학살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국 대사관 폭발 사건에서 죽은 사람들, 병영에서 목숨을 잃은 해병대원들, 그리고 베이루트에 납치되거나 암살당한 많은 미국인들은 대개 나중에 헤즈볼라가 된 그룹들의 공격에 희생되었는데, 미국과 이스라엘 점령자들이 공모한 대가를 그들이 치른 셈이다."(241-2)


5 다섯 번째 선전포고, 1987~1995


"이른바 1차 인티파다는 점령지 전역에서 자생적으로 폭발했다. 이스라엘 군용 차량이 가자 지구의 자발랴 난민촌에서 트럭과 충돌해서 팔레스타인인 4명이 사망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봉기는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가자 지구가 용광로였고 이후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통제하는 데 가장 애를 먹은 지역으로 남았다. 인티파다를 거치면서 마을과 소읍, 도시와 난민촌에서 광범위한 지역 조직이 생겨났고, 비공개 조직인 통일민족지도부가 이끌게 되었다. 인티파다 시기에 결성된 유연하고 비밀스러운 풀뿌리 네트워크들은 군사 점령 당국이 진압을 하기가 불가능했다." "인티파다 시기 내내 팔레스타인의 젊은 시위대가 병력 수송 장갑차와 탱크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 군대를 상대로 시가전을 벌이는 광경이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장면에 주목했다. 영원한 피해자라는 이스라엘의 이미지는 팔레스타인의 다윗과 싸우는 골리앗으로 바뀌었다."(246-7)


"인티파다는 누적된 좌절감을 바탕으로 아래에서부터 자생적으로 생겨난 저항 운동이었고, 처음에는 팔레스타인의 공식적 정치 지도부와 아무런 연계가 없었다. 1936~1939년 반란과 마찬가지로, 인티파다가 장기간 광범위하게 지속된 것은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누렸다는 증거다. 봉기는 또한 유연하고 혁신적이었다. 활동가들도 남성과 여성, 엘리트 전문직과 사업가, 농민, 마을 사람, 도시 빈민, 학생, 자영업자 등 사회의 거의 모든 집단을 아울렀다." "1936~1939년 반란과 달리, 인티파다는 폭넓은 전략적 전망과 통일된 지도부에 따라 진행되었고, 팔레스타인 내부의 분열을 악화시키지 않았다. 인티파다가─1960년대와 1970년대의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과 대조적으로─팔레스타인을 단합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고 대체로 총기와 폭발물을 사용하지 않은 덕분에 국제사회에서도 많은 이들이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서 결국 이스라엘과 세계 여론에 심대하고 오래가는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252-3)


"1982년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패배한 뒤, 이 조직은 튀니스를 비롯한 아랍 각국 수도에서 별 성과 없는 망명 활동에 갇혀 힘을 잃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풀뿌리가 주도하는 봉기가 발발하자 깜짝 놀라면서 곧바로 이 봉기를 조직으로 흡수하고 이익을 챙기려고 했다." "문제는 튀니스에 있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지도자들이 근시안적 시각과 제한된 전략적 전망에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지도자들 대다수는 이스라엘의 지배가 20년이 흐른 뒤 점령 체제의 본성이나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처한 복잡한 사회적·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점차 인티파다를 튀니스에서 원격 통제 방식으로 관리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침을 발표하고 상황을 관리하면서 애초에 봉기를 시작해서 성공적으로 이끈 이들의 견해와 우선순위를 종종 무시했다."(254-5)


"아라파트는 하페즈 알아사드의 고압적인 시리아 정권에 오래전부터 격한 반감을 품고 있었고, 반사적으로 균형추를 모색했다. 이집트가 한때 아사드 정권이 행사하는 압력에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했지만, 사다트가 독자적으로 이스라엘과 평화를 이룬 뒤에는 이제 그런 역할이 가능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가능한 다른 균형추는 필연적으로 시리아의 경쟁자인 이라크였다." "이렇게 의존하게 되자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이라크의 정책에 순응하라는 강한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라크 정권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다잡아 두기 위해 걸핏하면 응징했다." "무지몽매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서 정보부장 아부 이야드만이 예외였다. 그는 걸프전을 앞두고 이라크를 지지한다는 아라파트의 결정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아부 이야드가 내다본 대로 상황이 펼쳐졌지만, 그는 미국이 주도하는 공세가 시작되기 3일 전인 1991년 1월 14일 튀니스에서 암살당했다."(265-8)


"아라파트가 신중하지 못한 결정을 내린 결과가 나오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쿠웨이트가 해방된 뒤 팔레스타인인 수십만 명이 쫓겨나는 비극이 시발점이었다. 페르시아만 국가들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대한 모든 재정 지원을 중단했고, 1982년 베이루트에서 철수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지도부를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던 나라들까지 일부 포함해서 많은 아랍 나라가 이 기구를 추방했다. 그리하여 1990~1991년 걸프전 이후,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아라파트와 그의 동지들이 올라탄 빙산은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었고, 그들은 단단한 땅에 뛰어내리고자 필사적으로 애썼다. 공교롭게도 이런 위기 상황과 동시에 미국은 이라크에서 승리를 거두고 소련이 종언을 고하면서 의기양양한 순간을 누리고 있었다." "1991년 10월 마드리드에서 출발한 평화회담이 차질을 빚은 것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애초에 쿠웨이트에 대해 심각하게 오산을 한 탓이 컸다."(268-9)


"샤미르 정부 대신 노동당이 주도하는 연정이 들어선 뒤, 총리가 된 라빈은 시리아 경로와 팔레스타인 경로 가운데 무엇을 우선시할지 망설였다. 언제나 전략가였던 그는 시리아와 먼저 협상을 타결하면 팔레스타인인들의 입지를 약화시켜서 그들과의 교섭이 용이해지는 이점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양쪽은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갈릴리호 동쪽 연안에 있는 몇 평방마일의 전략적 땅의 처분을 둘러싸고 불거진 견해차가 주된 요인이었다. 골란고원에서 조금이라도 철수를 하는 것에 대해 이스라엘의 몇몇 집단(과 미국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스라엘에서 정권이 교체되어도 실질적인 입장 변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팔레스타인 대표단 내부와 튀니스에서는 실망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1995년 10월, 크네셋에서 라빈은 팔레스타인에서 어떤 〈조직체〉가 만들어지더라도 〈국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 달이 되지 않아 그는 암살당했다."(279-81)


"1993년 6월, 오슬로에서 양측이 서명한 내용은 점령지의 한쪽 땅에서 아주 제한된 형태로 자치를 하고 땅과 물, 경계선, 그 밖에도 많은 부분에 대해 통제권이 없는 것이었다. 이 협정과 이후 여기에 근거해서 이루어진 협정들은 오늘날까지 약간의 수정을 거친 채 시행되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온갖 특권을 유지하면서 사실상 땅과 사람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셈이다. 주권의 속성들도 대부분 이스라엘 손에 있다." "모든 사실을 고려할 때, 아예 합의를 이루지 못하더라고 강경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오슬로 합의보다는 더 나았을 것이다. 어쨌든 점령은 계속되었을 테지만, 팔레스타인의 자치라는 포장이 없고 이스라엘이 수백만 명을 통치하고 관리하는 재정적 부담을 더는 일이 없으며, 이스라엘 식민 정착민들이 점점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군사 정권 아래 사는 불만에 찬 팔레스타인인들을 단속하는 데 팔레스타인 자치당국PA이 이스라엘을 돕는 〈안보 협력〉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289-90)


"1995년 양쪽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관한 잠정 협정, 일명 오슬로 협정Ⅱ에 합의하면서 오슬로 협정Ⅰ의 파괴적인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이 협정으로 두 곳이 악명 높은 누더기 지역들(A, B, C)로 쪼개졌고, 전체의 60퍼센트가 넘는 C지역이 완전하고 직접적이고 제한받지 않는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다.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은 18퍼센트에 해당하는 A지역의 행정·치안권, 22퍼센트인 B지역의 행정권을 부여받은 한편, B지역의 치안권은 여전히 이스라엘 손에 있었다. A지역과 B지역을 합치면 면적으로는 40퍼센트였지만 팔레스타인 인구로 따지면 87퍼센트 정도였다. C지역은 한 곳을 제외하면 모두 유대인 정착촌이었다. 이스라엘은 또한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의 진입과 출입에 대해 계속 전면적인 권한을 가졌고 인구 등록의 배타적인 권리도 갖고 있었다." "마침내 요르단강 서안은 수십 곳의 군사 검문소와 수백 마일에 해당하는 장벽과 전기 울타리 때문에 점점이 박힌 섬들처럼 고립되었다."(292-3)


"오슬로 협정 이후 사반세기 동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상황은 흔히 거의 동등한 세력, 즉 이스라엘 국가와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이라는 준국가의 충돌이라고 그릇되게 묘사되어 왔다. 이런 묘사는 변함없이 불평등한 식민지적 현실을 가린다." "오슬로 협정Ⅰ은 또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점령의 하청업자로 끌어들이는 결정을 수반했다. 라빈이 아라파트와 끌어낸 안보 합의의 실제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고, 1993년 6월 나와 동료들은 미국 외교관들에게 이 합의에 관해 발표했다. 핵심은 언제나 이스라엘, 즉 점령과 정착민을 위한 안보였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복종시키는 비용과 책임은 팔레스타인 쪽에 떠넘겨졌다." "오슬로 협정은 사실 100년 묵은 시온주의 운동의 기획을 진척시키기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국제적 승인 아래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발표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47년이나 1967년과 달리, 이번에는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적들과 공모하는 쪽을 선택했다."(295-7)


6 여섯 번째 선전포고, 2000~2014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새롭게 위협하는 강력한 경쟁자인 하마스 입장에서 보면, 오슬로가 팔레스타인 쪽 지지자들이 기대한 바에 미치지 못한다는 증거는 오히려 이익이 되었다. 1987년 12월 1차 인티파다 초기에 창설된 하마스는 무슬림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가 발전한 조직이었다. 점령 당국 입장에서는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을 분열시키는 데 유용했기 때문에, 하마스를 너그럽게 방치했고 이들은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렸다. 인티파다 시기에 하마스는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할 것을 고집하면서 통합민족사령부에 합류하지 않았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보다 전투적인 이슬람주의 대안 세력으로 자신을 홍보하면서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가 1988년 독립 선언에서 무장투쟁을 포기하고 외교로 전환한 것을 비난했다. 그리고 무력 사용을 통해서만 팔레스타인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체에 대한 권리를 다시 주장했다."(302-3)


"오슬로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의 상황이 악화되고, 국가 수립의 가능성이 점점 멀어지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하마스의 경쟁이 격화되어 가다가 결국 2000년 9월 2차 인티파다로 분출했다. 인티파다가 불붙는 데는 성냥불 하나면 충분했다. 아리엘 샤론이 보안 요원 수백 명에 둘러싸여 하람알샤리프를 도발적으로 방문한 것이 성냥불 역할을 했다. 하람─유대인들이 성전산Temple Mount 이라고 부르는 곳─은 최소한 1929년의 유혈 사태 이래로 양쪽 모두에 민족주의적·종교적 열정이 집중되는 장소였다. 당시 수정주의적 시온주의 극단론자들이 이웃한 서쪽 벽Western Wall에서 깃발을 흔들며 떠들썩한 시위를 벌이자 팔레스타인 각지에서 폭력 사태가 일어나 양쪽에서 수백 명씩 사상자가 발생했다." "2차 인티파다 시기에 사망한 이스라엘인의 대다수는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 내에서 벌인 자살 폭탄 공격의 민간인 피해자였으며, 전체 사망자의 3분의 1에 약간 못 미치는 332명은 이스라엘 군경이었다."(306-8)


"2차 인티파다의 끔찍한 폭력 때문에 1982년 이래 팔레스타인인들이 1차 인티파다와 평화교섭을 통해 쌓아 온 긍정적인 이미지가 지워졌다. 연이어 벌어지는 자살 폭탄 공격의 소름끼치는 광경이 세계 각지로 전송되자 (그리고 이런 보도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해지는 훨씬 더 거대한 폭력이 가려지자), 이스라엘은 이제 압제자로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으로 괴롭히는 세력의 희생자라는 익숙한 역할로 돌아갔다." "민간인을 겨냥한 이런 공격이 치명타가 되어 이스라엘 사회를 와해시킬 수 있다는 사고도 우스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 이론은 이스라엘이 뿌리부터 분열되어 있는 〈인위적인〉 정치 체제라는, 널리 퍼져 있지만 치명적 결함이 있는 분석을 바탕으로 한다. 이 분석은 한 세기가 넘도록 명명백백한 성공을 거둔 시온주의의 민족국가 건설 노력뿐만 아니라 많은 내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회가 가진 응집력을 무시한 것이다."(310-2)


"하마스와 파타의 분열은 팔레스타인의 대의에 잠재적인 재앙이었고, 이런 우려의 정서는 여론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2006년 5월에 파타, 하마스,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 이슬람지하드 등 이스라엘 교도소에 갇혀 있는 주요 조직의 지도자 다섯 명이 〈수감자 문서〉를 발표했다. 두 국가 해법을 토대로 삼은 새로운 강령에 기반해서 정파 분열을 끝내자고 호소하는 문서였다." "연립정부를 구성하려는 이런 노력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두 나라는 하마스가 자치당국 정부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서구와 아랍의 재정 지원자들이 파타에게 하마스를 멀리하라고 가한 압력은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에 속한 파타의 베테랑들에게 톡톡히 효과를 발휘했다. 애당초 그들은 라말라의 금박 거품 속에서 누리는 물질적 혜택이나 권력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훨씬 강력한 적에 맞서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위험에 내맡기기보다는 팔레스타인 정치 체제가 분열로 무너지는 쪽을 선호했다."(316-8)


"하마스가 가자 지구를 장악하자 이스라엘은 전면적인 포위에 나섰다. 가자 지구에 들어오는 물자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었고, 정기적인 수출은 완전히 중단되었으며, 연료 공급이 차단되었고, 가자 출입은 극히 드물게 허용되었다. 가자는 사실상 지붕 뚫린 감옥이 되었다. 2018년에 이르면 200만 팔레스타인인 가운데 최소한 53퍼센트가 빈곤 상태에서 살았고, 실업률은 무려 52퍼센트로, 청년과 여성은 훨씬 높은 수치였다. 국제사회가 하마스의 선거 승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 시작된 사태는 팔레스타인의 파국적인 분열과 가자 봉쇄로 이어졌다. 이런 사태의 연속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새로운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앞으로 벌어질 공공연한 전쟁을 국제적으로 은폐하는 가림막을 제공했다." "세 차례의 대규모 공격(2008, 2012, 2014년)에서 나타난 43:1이라는 일방적인 사상자 비율과, 이스라엘 사망자의 대부분이 군인인 반면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대다수가 민간인이라는 사실 역시 의미심장하다."(319)


"팔레스타인 문제,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스라엘이 양보할 수밖에 없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화해에 관한 한, 미국의 주요한 전략적·경제적 이해가 전혀 없어 보이고, 또한 이스라엘과 그 지지자들의 지속적인 반대를 상쇄할 아무런 수단이 없는 듯하다. 트루먼부터 도널드 트럼프까지 역대 미국 대통령은 이런 반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기를 원치 않았고, 따라서 대체로 이스라엘이 진행 속도를 정하고 심지어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인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미국의 입장까지 결정하도록 놔두었다." "게다가 중동은 오랫동안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많이 집중된 독재 정권의 통치를 받아 왔다. 이런 비민주적 정권들은 역사적으로 방위, 항공, 석유, 금융, 부동산 산업을 지원하는 미국을 비롯한 소중한 후원자들에게 영합했다. 그들은 대체로 자국의 친팔레스타인 여론을 무시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식민화를 지원하는 미국이 어떤 역풍도 맞지 않도록 도와주었다."(332)


결론


"수십 년간 시온주의자들은 종종 국가의 독립 선언을 언급해 가며 이스라엘은 〈유대 국가이면서 민주국가〉일 수 있고 실제로 그렇다고 주장했다. 이 정식화에 내재한 모순들이 한층 더 분명해지자 이스라엘의 일부 지도자들은 만약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유대 국가가 우선이라고 인정했다(실제로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2018년 7월, 크네셋은 헌법에 그런 선택을 명문화하면서 〈유대 민족국가에 관한 기본법〉을 채택했다. 오로지 유대인에게만 민족 자결권을 부여하고 아랍어의 지위를 격하하며, 유대인 정착촌을 다른 요구보다 우선시하는 〈민족적 가치〉로 선언함으로써 이스라엘 시민들 사이에 법적 불평등을 제도화한 법이다. 유대인의 우월성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면서 이 법의 발의한 전 법무장과 아옐레트 샤케드는 법안이 표결에 부쳐지기 몇 달 전에 솔직하게 이런 주장을 펼쳤다. 「유대 국가라는 이스라엘 국가의 성격을 확고히 유지해야 하는 장소들이 있는데, 때로는 이를 위해 평등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350)


"상황이나 시대가 달랐다면, 18세기나 19세기라면, 원주민을 몰아내는 게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이 땅을 빼앗기고 쫓겨난 데 대해 오랫동안 저항한 사실을 보면,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말처럼 시온주의 운동은 〈너무 늦게 도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 특유의 분리주의 기획을 이미 앞서 나가고 있는 세계에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세워지면서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력한 민족운동과 번성하는 새로운 민족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땅에 사는 원주민을 완전히 밀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시온주의는 최종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정착민-식민주의와 원주민의 대결은 세 가지 결과 가운데 하나로 끝났을 뿐이다. 북아메리카에서처럼 토착민이 제거되거나 완전히 정복되는 경우, 극히 드물지만 알제리에서처럼 식민주의가 패배하고 쫓겨나는 경우, 남아프리카, 짐바브웨, 아일랜드에서처럼 타협과 화해의 맥락에서 식민주의의 패권을 포기하는 경우가 그것이다."(343-4)


"이스라엘이 자신의 기획을 지속하면서 누려 온 이점은 대다수 미국인과 많은 유럽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대결이 기본적으로 식민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그들 눈에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과 똑같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민족국가로 보인다. 비타협적이고 종종 반유대적인 무슬림들(많은 이들은 기독교인이 있든 말든 팔레스타인인을 무슬림으로 뭉뚱그린다)의 비이성적인 적대에 직면해 있을 뿐이다. 이런 이미지가 확산된 것이야말로 시온주의가 거둔 위대한 업적이며 시온주의가 살아남은 비결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것처럼, 시온주의가 성공을 거둔 한 가지 이유는 〈관념과 재현, 언어와 이미지가 문제가 되는 국제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탈식민적 미래는 이런 잘못된 생각을 무너뜨리고 분쟁의 진정한 성격을 분명히 드러낼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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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세계대전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23
게르하르트 L. 와인버그 지음, 박수민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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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


"종종 승전국은 패전국에 보상금(indemnity)을 부과했다. 가까운 사례로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뒤 신생국가인 독일이 프랑스에 보상금을 부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1차대전 당시 대부분의 전투와 그에 따른 파괴는 독일 바깥에서 벌어졌다. 따라서 1919년 파리 강화회의의 강화조약 작성자들은 배상금(repar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뒤이은 협상과 논의에서 패배에 따른 벌금을 내는 대신에 독일은 자국이 입힌 피해에 대한 복구비를 지불하게 되었다." "독일 정부는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기 위해 1923년 고의적으로 인플레이션을 통해 화폐 가치를 훼손했고, 1931~32년에는 급격한 디플레이션에 의지했다. 그에 따라 독일은 극히 적은 배상금을 지불했다. 승전국은 복구비를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했고, 국력을 더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독일 내부에서는 정부에 대한 엄청난 불만과 국가사회주의자가 지지하는 다른 형태의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22)


"1차대전에서 패배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다수 군인과 일부 정치 지도자들은 독일이 전선에서 진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유대인을 비롯한 이른바 체제전복 세력들에 의해 등뒤에서 칼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이 초래한 패배의 수혜자였던 이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새로운 시스템에는 다수 정당으로 인한 국론 분열도 설 땅이 없다.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서는 유일 정당의 단일한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가 승리를 보장할 것이다. 이런 메시지로 차츰 지지를 받은 정당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국가사회주의당이었다." "히틀러는 독일이 미래로 가는 길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잃은 자투리땅을 되찾는 것, 자신이 '그렌츠폴리티커(Grenzpolitiker)' 즉 '국경정치인'이라고 부른 이들이 옹호하는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라움폴리티커(Rarumpolitiker)' 즉 '공간정치인'이 요구한 것처럼 거대한 '레벤스라움(Lebensraum)' 즉 '생활공간'을 확보하는 전쟁에 달렸다고 주장했다."23-4)


2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되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여러 측면에서 주목해야 한다. 독일 공군의 지원을 받는 대규모 기갑부대가 동원된 작전은 적진을 신속하게 돌파해 진격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폴란드 특유의 지형과 열악한 도로 및 비행장 탓에 군용 장비의 피해도 상당했는데, 이것은 독일군 수뇌부가 폴란드 침공을 준비할 때 고려하지 못한 점이었다. 독일군은 야포 운반을 비롯해 부상자 운송까지 각종 수송을 말에 크게 의존했지만, 현실과 크게 동떨어진 독일 육군의 기계화를 강조하는 선전 영화 때문에 이런 상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공격 전 독일군에는 폴란드의 성직자와 권력 집단 대부분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최종적으로는 전체 폴란드 인구를 독일인 이주자로 대체할 예정이어서, 저항 세력을 조직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가능하면 빨리 제거해야 했다. 독일군이 대량 학살로 이어지는 일제 검거 작전을 시작하면서 어마어마한 수의 폴란드 국민과 상당수 유대인이 살해당했다."(39-41)


"독일군의 해상 작전을 지원한 스탈린은, 독일이 우선은 유럽 대륙 북부, 다음에는 서부, 뒤이어 남부에서 연합군을 몰아내는 것을 지원하는 활동이 결국 동부에서 소련이 홀로 독일을 상대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소련의 지원으로 침몰한 연합국 선박을 소련이 독일군의 공격을 받은 뒤 바다에서 들어올려 보급품 수송에 이용할 수 없을 것임을 알지 못했다. 결국 스탈린은 독일로부터 일부 해군 장비와 건조가 완료되지 않은 순양함을 얻는 대신에 독일 해군이 무르만스크항을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었다. 또한 무르만스크 서쪽 북극해에 해군 기지 하나를 제공했으며, 독일군 보조순양함이 태평양에 진입해서 연합국 선박을 격침시키도록 시베리아 북쪽 항로로 이동할 수 있게 했다. 독일군의 전쟁 활동에서 더 중요한 것은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철도 운행이 중단될 때까지 석유와 비철금속, 고무를 비롯한 중요 물자를 동아시아에서 철도를 이용해 공급하는 일이었다."(45)


3 서부 전선: 1940년


"프랑스 정부는 1차대전 때처럼 남서부 항구 도시인 보르도로 소재지를 옮겼다. 필리프 페탱 원수와 피에르 라발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프랑스 해군을 동원해 식민지 제국을 기반으로 싸움을 계속하기보다는 전쟁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스페인을 통해 독일에 휴전 제안을 했다." "히틀러는 프랑스에 관한 무솔리니의 요구를 거부하고 프랑스의 모든 해협과 대서양 연안을 포함한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일부 지역만 임시로 페탱의 통솔 아래 무방비 상태로 남겨두었다. 페탱은 독일이 장악한 유럽에서 프랑스가 독일과 같은 권위주의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독일은 새 프랑스 정권과 협조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페탱은 그런 사실에 개의치 않았다." "1940년 6월 24일 밤 독일-프랑스 및 이탈리아-프랑스 휴전 협정이 발효되었다. 100만 명이 넘는 프랑스 병력이 독일에 포로로 잡혔다. 소수의 프랑스인이 당시 갓 진급한 샤를 드골 장군의 '자유프랑스운동' 활동에 합류했다."(66-7)


"독일의 영국 본토 항공전 패배가 히틀러로 하여금 1941년 영국 침공을 미루게 했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1940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미루게 했을 것이다. 대규모 독일군 병력이 서부에서 독일 동부와 이미 점령된 폴란드 지역으로 이동해야 했다. 장비는 수리하고 추가로 확보해야 했다. 서부 유럽 전역에서 발생한 사상자를 조치하고 항공기, 전차를 비롯한 무기도 교체하거나 수리해야 했다. 대규모 병력이 주둔하고 동쪽으로 진격할 군대에 물자를 공급해야 할 동부 지역에서는 운송 및 저장 시설도 꼭 개선해야 했다." "1940년 8월 독일의 이같은 준비에 따른 외교적 입장도 국제 정세에 영향을 끼쳤다. 독일은 핀란드에 대한 정책을 수정했다. 이제는 핀란드를 흡수하는 대신에 소련 공격 때의 지원을 기대했다. 독일은 헝가리와 루마니아 사이의 영토 분쟁도 해결했다. 그 결과 루마니아의 영토를 보장하고 독일군을 파병했으며, 대신에 루마니아가 소련 침공에 참여할 것을 기대했다."(73-4)


"한편, 롬멜은 3월 말에 리비아를 공격해서 서둘러 영국군을 이집트로 후퇴시켰다. 4월에 이라크에서 일어난 친추축국 반란은 주로 인도에 주둔하는 영국군에 의해 5월에 진압되었다." "독일이 이라크의 반란 세력에 제공할 수 있는 작은 지원은 비시 정부가 독일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프랑스 위임통치령인 시리아를 통해 제공되었다. 이 일 때문에 영국군은 6월 8일 시리아를 침공했다." "작전상 곧이어 진행할 소련 침공에 집중하던 독일군은 제대로 된 지원을 할 수 없었다. 독일군의 계획상 중동 지역 장악은 소련을 침공한 뒤에 진행할 예정이었다. 영국은 이 지역에 대한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가 임박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시리아를 드골에게 넘겼다.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영국군의 승리가 가져온 중요한 효과는 소련으로 가는 남부 보급로가 된 지역이 연합국의 손에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남쪽에서 캅카스를 위협하는 추축국의 기지가 되었을 터였다."(82-3)


4 바르바로사 작전: 독일의 소련 침공


"독일이 소련 침공 계획을 수립하던 1940년 여름과 가을, 그리고 1941년 초에 독일군 수뇌부의 전쟁 계획은 여러 가지 가정을 기반으로 했는데 그 대부분이 오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1939년에서 1940년 사이의 겨울에 핀란드군을 상대로 보여준 소련군의 실망스러운 전투력은, 소련군의 대규모 병력이 악조건 속에서 싸움을 지속했을 뿐 아니라 독일과 그 동맹이 상대할, 이전에는 과소평가된 소련군 전력이 이제는 한층 강력해진 사실을 가렸다." "독일군은 많지도 않고 대체로 상태가 좋지 않은,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작전에 필요할지도 모르는 온갖 종류의 기갑차량이나 트럭을 위한 예비 부품과 수리 장비 같은 보급 문제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소련을 조기에 제압한 뒤 중동으로 진출할 생각이어서 보충용 전차는 소련군을 물리친 뒤에야 동부에 있는 부대에 보낼 예정이었고, 따라서 이런 전차는 사막용 위장 칠이 되어 있었다."(86-7)


"독일군이 진격하고 점령하던 처음 몇 개월간 독일이 취한 정책의 주요 특징은 해당 지역 소련 주민들에게 아주 명확하고 중요해졌다. 그런 사실은 소문으로 돌거나 여러 수단을 통해 전달되어 다른 지역의 소련 국민들에게도 똑같이 분명해졌다. 독일군은 소련 국민을 대량으로 살육했다. 전쟁 포로를 조직적으로 굶겨 죽였고, 병원과 정신 진료 기관에서도 학살이 이루어졌다. 포로에게 음식과 물을 주는 주민도 총살했다. 소련 국민들은 살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는 점을 즉각 상기했다." "주민들이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 학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든지 상관없이 대개는 자신이 다음 차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942년 봄 개전 첫 7개월 동안 200만 명이 넘는 소련군 전쟁포로가 살해되거나 독일측에 수감된 채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은 것으로 파악되었는데, 그것은 하루 평균 1만 명에 달하는 수치였다." "독일은 스탈린을 혐오스럽고 두려운 독재자에서 인자한 보호자이자 소련인들의 구원자로 바꿔놓았다."(96-8)


5 일본, 중국과의 전쟁을 확대하다


"1941년 7월 일본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남부를 점령했다. 이것은 남태평양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있는 네덜란드·영국·미국 영토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위한 조치로, (역설적으로) 중국과의 전쟁에 집중하는 것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 일본 정부 내부에서는 토론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말레이반도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필리핀을 비롯한 태평양 내 미국령 섬을 공격할 세부적인 준비도 진행되었다. 도쿄의 일본 지휘부는 동남아시아에서 빼앗은 유전이나 광산, 고무 농장에서 나온 자원을 일본 본토로 옮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땅을 차지하는 것일 뿐, 물자는 타국에서 빌린 배의 도움 없이 일본 선박으로만 본토로 옮겨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일본이 싸움을 시작할 시점에 매우 중요한 점은 자국의 제한된 선박 운송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거나 잠수함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진지한 준비가 없었다는 사실이다."(111)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중단시켰고, 8월의 과달카날에서는 미군이 반격할 길을 열었다." "다만 전반적인 전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실은 일본군의 진격은 비록 중단되었지만 미국이 '유럽 우선' 전략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는 대신에 작전 가능한 전력 다수를 새로 동원해 1942년 내내 그리고 1943년 초반 몇 개월까지 태평양 전역에 투입시킨 점이다. 이 때문에 지중해와 유럽 전역에서 미군의 작전이 지연되었다. 하지만 추축군은 작전 조율에 실패함으로써 미군의 이런 상황을 활용할 수 없었다. 일본이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전투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패한 사실을 일본인들이 미완성 상태의 독일 항공모함 그라프체펠린을 구입해 태평양에 투입하기를 바랐을 때에야 독일이 비로소 알아차린 점은 양국 간 조율의 실패를 함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와 관련된 통신 활동을 감청한 미국은 독일이 일본의 요청을 거부한 사실에 실망했을 것이다."(125)


6 전세 역전: 1942년 가을~1944년 봄


"1943년 7월 5일 독일은 쿠르스크 돌출부에서 소련군을 괴멸시키고 동부 전선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치타델 작전을 개시했다. 독일군은 며칠간 전선 양 부분에서 격전을 벌인 뒤 앞으로 치고나가 소련군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지만 여전히 돌파하지는 못했다. 사상자 수에서 독일군은 비록 소련군에 비해 적었지만 손실된 전력을 감당할 수 없었고, 의미 있는 돌파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작전상 큰 실패를 뜻했다. 독일군이 쿠르스크 돌출부를 공격한 뒤 실행된 소련군의 오룔 지역 공세뿐 아니라 서방 연합군의 시칠리아섬 상륙 소식 때문에 독일군의 공세 종료 시점은 앞당겨졌다. 이때부터 소련군이 주도권을 쥐었고, 소련 공군은 독일 공군이 독일 본토와 지중해에 분산되어 전력이 약해진 전장에서 제공권을 장악하며 유리한 상황을 활용했다. 소련군의 일련의 대규모 공세로 중부 전선의 독일군은 후퇴해 우크라이나까지 밀려났다. 그해 말에는 레닌그라드 포위도 뚫렸다."(135-7)


"1942~43년에 영미 양국은 독일과 독일이 장악한 유럽에 대한 공습을 대폭 늘렸다." "독일이 대공 방어를 위해 자원을 전용한 사실은 1943년 가을 서방 연합군을 상대로 한 공중전에서 전세를 역전시킬지도 몰랐다. 대공포와 더불어 독일군의 전투기 다수는 공격해 오는 폭격기에 점점 더 큰 손실을 입혔다. 손실률이 높은 수준에 이르자 연합군은 작전을 바꿔야 했다. 서유럽에서 완벽한 제공권 장악은 독일의 영국 침공만큼이나 중요한 연합국의 서유럽 공략의 필요조건이었기 때문이다. 폭격기가 목표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전투기가 호위할 필요성이 F-51 머스탱 전투기의 성공적인 역할과 1944년 2~3월 대규모 공중전까지 이어진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후 유럽의 전황은 두 가지 사실에 큰 영향을 받았다. 우선은 독일이 1943년 6월 바다에서 패배를 뒤엎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연합국 공군이 그해 가을 직면했었던 문제를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142-3)


"모든 전역에서 연합국이 전세를 뒤집은 확실한 표식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전쟁 초기에 장악했다가 그때껏 유지하던 지역에서 저항 운동을 촉발하는 역할을 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뿐 아니라 서유럽과 동남부 유럽이 그런 지역이었다." "전세의 확실한 전환은 그때까지 중립을 유지하던 일부 국가의 행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터키는 독일로의 크롬 반출을 줄이고 1945년 2월에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포르투갈은 대서양 전투에서 연합국이 아조레스제도를 이용하는 상황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전세 변화에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연합국이 적어도 각국의 활동을 조정하려는 의지였다. 회담에서, 그리고 외교적이고 군사적 임무에서 각국은 잦은 논쟁과 이견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행했다." "반면에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전력을 조율하거나 동맹국과 정보를 공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연합국은 때때로 비밀 정보까지 공유했지만, 추축국은 그러지 않았다."(151-2)


7 각국의 국내 상황과 기술·의료 분야의 발달


"폴란드는 전쟁으로 인해 가장 극적으로 변화한 나라였다. 독일은 세계 곳곳에 있는 유대인을 모조리 죽이기로 결정했는데, 그에 따라 300만 명이 넘는 폴란드 유대인이 살해당했고, 결국 숨거나 추방당한 극소수만 살아남았다. 소련은 많은 유대인을 그냥 추방했고 그 과정에서 다수가 죽었다. 하지만 생존자들은 중앙아시아로 쫓겨났기 때문에 독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었다. 독일은 폴란드에서 그리스도교인을 완전히 제거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독일군이 쫓겨나기 전, 폴란드 그리스도교인 약 300만 명이 이런 정책의 희생양이 되었다. 결국 이 지역에는 독일계 이주민만 거주하게 되었다. 반면에 소련은 그리스도교든 유대교든 상관없이 모든 폴란드인을 충실한 스탈린 공산주의자로 바꾸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수십만 명이 죽거나 추방되는 것에는 개의치 않았다. 이런 조치를 1939~41년에 시작했고, 1044~45년 독일군을 내쫓은 뒤 재개했다."(156-7)


"소련도 전쟁으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소련인 2500만 명이 살해되거나 질병과 기아로 사망했다. 국내 소수민족 수백만 명이 침략자에게 부역했거나 부역했을 것이라는 의혹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소련 정권이 국민 단합을 위해 전쟁 기간에 허용한 일시적인 통제 완화는 확대되기보다는 철회될 터였지만, 국제 관계에서 소련이 얻은 새로운 위상에 의해 국민 다수에게는 전반적으로 상쇄되었다. 소련인들에게는 엄청난 경제적 희생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극심한 고난을 겪은 고국의 역할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정부 기관에서 일하던 이들은 이전 전쟁에서 러시아가 처했던 운명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온 데서 어떤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영토를 잃기는커녕 얻었고, 유럽의 이웃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지 않고 동유럽과 남동 유럽을 장악했다. 게다가 1905년 일본에 빼앗긴 동아시아의 일부 영토도 되찾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거나 신경쓴 사람은 거의 없었다."(165-6)


8 연합국의 승리: 1944~45년


"1944년 12월 중순에 마지막 예비전력을 동원해 아르덴에서 미군을 공격했다. 벨기에 북부 앤트워프(안트베르펜)의 주요 항구를 탈환하는 가운데 미국 측이 대규모 패배의 충격으로 국내 전선이 무너지면서 유럽 전쟁에서 발을 빼길 기대한 작전이었다. 또한 독일은 영국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나고 그에 따라 동부 전선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할 수 있기를 바랐다. 벌지 전투로 알려진 독일군의 공세는 기습적으로 이루어졌고 일시적으로 미군을 후퇴시켰다. 하지만 미군은 버텼고, 독일군이 병력과 장비를 크게 잃으면서 전세는 대패로 뒤바뀌었다. 1945년 2월 서방 연합군은 대공세를 재개했는데, 독일군이 라인강 서안에 집중하면서 병력 다수를 잃자 연합군은 곧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장애물을 넘어 독일로 향했다."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하자 권력을 넘겨받은 되니츠 제독은 5월 8일 무조건 항복을 명령했다. 사소한 예외도 있었지만 독일의 모든 육해공군 부대는 항복 명령에 따랐다."(182-3)


"일본 수뇌부는 미군의 대규모 공습에도 꿈쩍하지 않았지만, 두 번의 핵공격이 벌어지자 어전회의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내부 동요의 가능성과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 가능성을 우려하는 조언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히로히토 일왕은 직접 항복 지시를 내렸다." "연합국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기가 더 수월하도록 해주었다. 비록 연합국의 통제를 받을 테지만 일본이 원한다면 천황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하겠다고 천명했고, 영국의 제안으로 일왕 대신에 지정된 관료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것을 허용했다. 대신에 히로히토는 왕족을 포함한 특사를 보내 야전의 일본군 지휘관들이 항복하는 것을 돕도록 했다. 일본에서는 도쿄가 구역으로 나뉘는 점령지 분리도 없었다. 미군과 영연방군이 일본을 점령했지만 정부와 행정은 일본인의 손에 남았고, 연합국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감독을 받으며 개혁을 했다. 극소수의 일본군이 1970년대까지 저항했지만 대체로 일왕의 항복 명령은 이행되었다."(190-1)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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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 원서 전면개정판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4
스티브 브루스 지음, 강동혁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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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학의 위상


"좋은 과학 이론은 내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이를 통해 일상적 추론과 과학적 이론이 즉시 구분된다." "좋은 과학 이론은 증거와 합치해야 한다. 뻔한 소리인 것 같지만, 이런 면에서 과학자들이 마땅히 요구하는 기준은 일반인들이 습관적으로 수용하는 수준에 비해 훨씬 더 엄격하다." "과학적 발견이 절대적·영구적으로 참인 경우는 결코 없다. 과학적 발견은 언제나 잠정적이며 늘 개선의 여지가 있다." "좋은 과학은 주제와 관련된 '광범위한' 자료의 수집을 어떤 설명을 다른 설명으로 대체할 때의 핵심 요건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런 구분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엽기적인 생각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믿어야 할 이유는 쉽게 찾을 수 있다. 훨씬 더 강력한 검증 방법은 믿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다. 좋은 과학에서 가장 설득력 있다고 여기는 개념들은 곧 틀렸음을 입증하려는 반복적인 시도에도 살아남는 개념들이다."(13-5)


"사회과학은 선택에 따라 행위하는, 지각 있는 존재들을 연구한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자유로운지에 대한 익숙한 논쟁에 발목 잡힐 필요가 없다. 인간 행위의 획일성이 어디에서 기인하든 그 근원들이 전면적인 구속력을 지니는 건 아니라는 점만 인정하면 된다. 아주 억압적인 체제는 우리가 가진 선택지를 순응 아니면 죽음 두 가지로 축소시킬 수 있겠지만 우리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이처럼 자연과학의 대상과 인간은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물은 가열되더라도 증발성을 높이지 않겠다고 거부할 수 없다. 압력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한, 물은 나흘 동안은 섭씨 100도에서 끓다가 닷새째에는 그러기를 거부할 수 없다. 인간은 그럴 수 있다. … 화학자는 실험을 통해 반복되는 패턴을 찾아내면 탐색을 끝낼 수 있다. 그러나 사회과학자에게 그건 시작일 뿐이다. 특정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이 항상 특정한 뭔가를 한다는 걸 알아내더라도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할 것이다."(26-7)


"신념이나 가치관, 동기, 의도에 대한 사회학자의 관심에는 자연과학 분야에는 없는 우려가 딸려온다. 바로 인간을 이해하려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관한 그들 자신의 시각이나 진술을 어떤 식으로든 얻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러한 주장은 한 단계 전에도 적용된다. 다시 말해, 사회학자는 어떤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해할 만한 사회적 행위를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동기에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액체가 기체로 변하는 순간을 규명하기 위해 액체의 정신 상태를 참고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행위는 관찰만으로는 알 수 없다. 즉, 물리적 활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자신과 같은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보이는 단순한 행동들에 대해서는 종종 그 의미를 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행동의 의미를 단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떤 방법을 쓰든 간에) 그 사람에게 〈뭐하고 계십니까?〉라고 묻는 것뿐이다. 행위를 알아보는 데만도 의도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것이다."(28-9)


"하지만 질문을 던지고 받는 행위는 그 자체로 사회적 상호작용의 일부다. 사람들이 내놓는 진술은 고의적 허위일 수 있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다." "물론 사회학에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불순물에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정보를 걸러내는 간단한 마법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법원은 이따금씩 진실에 도달하고, 유능한 심문자들은 모호한 변론에서 구멍을 찾아내며, 연인들은 기만행위를 알아차리고, 여론조사원들은 소위 '순응효과'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낸다. 예컨대 〈다음 중 지난 주말에 한 행동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스포츠, 쇼핑, 친지 방문, 영화 관람 등이 들어간 긴 목록 안에 종교 활동이라는 항목을 끼워넣으면 〈지난 주말에 종교 활동에 참여하셨습니까?〉라고 직접 물을 때마다 종교 활동을 했다는 응답이 적어진다. 사람들의 말에서 진실을 추출하는 단 하나의 확실한 기술이 없다고 해서 예상되는 문제들을 피할 창의적인 방법들을 고안하지 못한 채 늘 실패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29, 34-5)


2 사회적 구성


# 사회학의 기본 전제 : 현실이란 어디까지나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우리의 행동에는 숨겨진 사회적 원인이 있고, 사회적 삶의 많은 부분은 본래 모순적이다.


"(인간의 행동을 설명할 때) 생물학에서 출발하는 게 유용하다면, 그건 동물은 삶의 대부분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데 비해 인간은 그렇지 '않은' 정도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물학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래서 개인 차원에서는 자기관리의 문제가, 집단 차원에서는 협동의 문제가 생긴다." "아르놀트 겔렌의 말마따나 인간은 '본능의 결핍' 때문에 생긴 틈을 메우기 위해 사회적 틀을 만들어낸다. 그런 틀 중 일부는 형식법으로 정해질 수 있지만 많은 부분은 관습으로 남는다. 그 어떤 법률도 관리직에 종사하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짙은 색 정장을 입어야 한다고 규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위직 임원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옷 입는 방법을 알고 있다. 가장 효과적인 경우, 구속복은 외부의 신체만이 아니라 내면의 정신에까지 입혀진다. 우리는 문화 속에서 사회화되고, 이에 따라 문화의 중요한 요소들이 우리의 성격에 새겨진다."(42-6)


"세상을 실제적인 부분과 상상된 부분으로, 객관적인 외부의 현실과 주관적인 내면의 풍경으로 나누는 건 매력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영역들은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이다. 상상에 참여하는 사람이 충분히 많다면 그 상상은 객관적 세계와 구분되지 않는 지속적이고 억압적이기까지 한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윌리엄 토머스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현실이라고 정의하면 그 결과는 현실이 된다고 했다. 집에 불이 났다고 믿는 사람은 집에서 도망칠 것이다. 집이 불타 무너지지 않으면 그가 틀렸다는 사실이 입증되겠지만, 그의 행위를 이해할 때 중요한 건 그의 생각이지 진실이 아니다." "단,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점은 공유되는 한에서만 사회적 구성도 효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지어낸 것이든 아니든 모두가 그것을 믿는다면 그건 더이상 신념이 아니다. '세상의 이치'다. 소수만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그런 견고함을 획득하지 못하고 믿음으로만 남아 있다."(53-5)


"인간은 자신이 속한 문화의 외적 윤곽을 자신의 정신과 성격 속에 복제할 때에 비로소 사회적 존재가 된다." "안정적인 사회에서는 배우들이 자기 배역을 그냥 대본대로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배우들은 실제로 그 배역에 몰입해 살아가는 '메소드 연기자'다. 대본과 무대 지시, 대사 일러주기 등 외부의 도움은 더이상 필수적이지 않다. 배우들은 등장인물 자체가 된다. 사회학은 이런 일이 일어나는 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상당 부분 관련되어 있다. 사회학의 핵심 원칙 중 하나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는 방식은 타인이 그를 보는 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나는 사회를 서로 맞물린 역할들의 체계라고 설명하면서, 먼저 이 현상을 거시적으로 살펴보았다. 아버지가 되려면 아들이나 딸이 필요하다. 교사가 되려면 학생이나 제자가 필요하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면 자녀들이 그를 좋은 아버지라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배우자, 자녀의 조부모, 친구, 이웃들)이 그런 관점을 공유해야 한다."(75-6)


"사회적 상호작용이 정체성 형성에 끼치는 중요한 영향 중 한 가지는 누군가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시도가 '자기충족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소녀가 방 정리, 약속시간 지키기, 과제 준비물 챙기기 등에 자주 실패하면 그때마다 아버지가 그녀를 '바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이름표 붙이기가 일상적으로 반복되면, 소녀는 자신에 대한 그런 이미지를 내재화할 수 있다. 소녀는 자신을 무능하다고 여기고 그 배역을 점점 더 충실히 연기한다." "그렇지만 이름표가 붙게 되는 사람도 그저 수동적으로 반응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체성은 '협상'된다. 소녀는 아버지의 뇌리에 박힌 자신의 상을 그냥 받아들이고 거기에 함축된 예상에 부응하는 것 외에도 달리 반응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더구나 소녀와 상호작용하는 모든 사람이 그녀에게 동등한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다. 아이에게는 부모(혹은 부모의 대리인)가 가장 중요한 타자가 되겠지만, 연상의 친구들이나 다른 친척들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77-8)


3 원인과 결과


"사회학이 상식과 다른 한 가지 측면은 우리가 하는 생각과 행위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만족스러운 자아상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행동을 설명하려면 그가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도 규칙적 패턴이 있어야 하고, 그 패턴은─최소한 부분적으로─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난, 그가 인식하지 못하는 외부의 힘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어야 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유와 제약 사이에서 빚어지는 이런 역설을 〈우리는 운명을 만들어나가지만, 우리가 선택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나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깔끔하게 표현했다. 예컨대 나는 일요일 오후에 어디로 차를 타고 갈지 정할 수 있지만, 내가 운전하는 방식은 교통법규나 다른 운전자들의 행동에 따라 결정된다." "여기에 더해 우리의 정체성이나 행위의 상당 부분에는 우리가 모르는 사회적 원인이 있다. 사회학자는 규칙적 패턴을 탐색하고 여러 세계를 체계적으로 비교하여 그러한 원인을 조명할 수 있다."(86-7)


"현대인들에게는 부와 교육, 직업을 근거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행위가 진정한 감정에 대한 배신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배우자의 여러 특성을 분석해보면, 사랑과 애정에 근거해 내렸다는 결정들이 정작 선명한 '선택 결혼'의 패턴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의식하거나 인정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종교, 인종, 계급, 교육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결혼한다. 부분적으로는 기회의 차이에서 생기는 결과다. 우리는 우리와 유사한 사람들을 만날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미묘한 세뇌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속한 사회집단은 우리를 사회화하여 특정한 옷차림과 헤어스타일, 태도, 말투, 억양, 어휘 등을 다른 것에 비해 더 매력적이라고 느끼게 한다. 선택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지(혹은 어떤 사람을 멀리할지)를 결정하는 요소들은 성실한 중매인이 짝을 맺어줄 때 고려할 법한 요소들과 거의 같다."(88-9)


"사회학적 관점에서 중요한 또 한 가지 요소는 비의도적 결과다. 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즈가 간결하게 표현했듯, 〈쥐들과 인간들이 최선을 다해 세운 계획은 자주 잘못된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겠다고 작정하지만, 작동 중인 힘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늘 예상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결국 아주 다른 무언가를 달성하게 된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독일에서 좌파 정치운동을 활발히 펼쳤던 로베르트 미헬스는 좌파 노동조합과 정당들이 진화할 때 나타나는 공통적 패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런 조직들은 모두 세상을 재구성하겠다는 급진적 시도로서 시작되지만 점차 보수화되어 현실과 화해했다." "겉보기에는 다른 영역이지만, H. 리서츠 니버가 보수주의 개신교 분파들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패턴을 발견했다. 18세기 후반의 감리교 운동은 급진적이었다. 초기에 이들은 세상의 재건을 설교했지만 점차 사회적으로 보수화됐다."(93-4)


"이런 사례들은 인간의 성찰적 사고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곤 한다는 사실을 깔끔하게 설명한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싶을 때, 혹은 변화가 불가능하거나 변화하고 싶지 않을 때 자신을 위로할 목적으로 사회학적 설명을 동원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실수나, 자신의 행위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을 통해서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 미헬스의 결론은 흔히 과두제의 철칙이라 불리고 니버의 주장은 사회 진화의 기본 법칙을 미헬스와 비슷하게 발견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이것들은 자연과학적 법칙이 아니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무정부주의자들은 타협과 사회적 존중을 향한 인력(引力)을 회피할 수 있다. 급진적 정치운동은, 결과적으로 그 운동의 파멸을 초래한다 하더라도 최초의 에토스에 계속 충실을 기할 수 있다. 분파들은 종파로서의 체면을 향한 인력에 저항할 수 있다." "브롬화물은 항상 부롬화물이 작용하는 방식대로 작용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엇을 할지 생각할 수 있다."(98-100)


4 현대


"사회학은 관찰 대상이 되는 세계와 거리를 둔 객관적 학문인 동시에, 자신이 설명하는 대상의 징후이기도 하다. 과학에 청교도들이 끼친 영향을 연구한 로버트 머튼은 처음에는 유대교가, 다음에는 기독교가 합리화를 이끈 힘이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는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게 행동할 때가 많은) 여러 신들 대신에 단 하나의 신만 상정하되 그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결국 종말로 이끌기는 하지만 그 사이에는 별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제한을 둠으로써, 세상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고 가정하고 물질세계에 대한 과학적 태도를 허용했다. 더욱이 체계적인 연구를 저해하는 방식으로 물질세계 자체를 신성시하지도 않았다. 종교개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 권위가 거부된 이후, 과학자들은 종교적 의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학문을 추구할 수 있었다. 머튼에 따르면, 현대 과학이 가능해진 것은 기계사용에서의 기술적 진보보다(이 역시 중요하긴 하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덕분이었다."(102-3)


"사회학이 하필 이 시기에 등장한 이유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을 할 수 있다. 14세기 아랍 철학자 이븐 할둔과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 및 역사 관련 저술을 하면서 사회학적 관찰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을 통해 현대 사회학자들이 승인할 수 있는 학문적 업적이 확인된 것은 18세기 말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 애덤 퍼거슨에 이르러서야 일어난 일이다." "일관적·총괄적인 문화, 소수이지만 강력한 사회 제도, 그 제도들을 신의 권위로 떠받치는 종교가 있는 전통 사회에서는 세상을 사회적 구성물로 보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삶의 방식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사람, 문화가 아주 다른 외국으로 여행을 간 사람들도 일부 있었지만, 이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사회적 세계가 너무 견고해서 상대주의적 사고는 억제되었다. 전통의 약화, 종교적으로 정당화되는 사회 질서의 쇠퇴, 사회적 다양성의 증대는 모두 사회학의 필수적 전제조건이었다."(103-4)


"로버트 머튼에 따르면, 사회에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두 영역, 즉 문화와 사회 구조가 있다. 문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지시한다. 구조는 권력, 부, 지위를 배분한다. 전통 사회는 구조가 위계적이었다.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쪽은 소수였고 대부분은 무력하고 가난했으며, 문화는 그런 격차를 정당화했다. 서로 다른 계급의 사람들은 삶에서 아주 다른 것들을 기대하고 각자의 분수에 맞는 방식으로 행동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얻는 것은 균형을 이루었다." "현대 사회 체제의 핵심에 갈등이 뿌리내리게 되는 건 문화와 사회 구조가 더이상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화는 민주적이다. 물질적 성공이라는 목표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지만 열망의 평등은 기회의 평등과 어우러지지 않는다. 실력주의라는 수사는 모두에게 같은 것을 원하도록 장려하지만, 계급 구조의 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적법하게 목표를 이를 수 없음을 의미한다."(127-8)


"안정적인 사회들은 대부분의 일이 '마땅히 되어야' 하는 방식대로 돌아간다는 합의를 깔고 있다. 사회적 절차를 하나하나 세세하게 정당화하는 단일한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보편적이고 열정적으로 수용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응분의 보상을 정당하게 받는다는 전반적인 느낌은 어느 정도 공유될 수 있어야 한다." "현대 세계의 중심적 특징인 평등주의적 충동은 눈에 띄는 삶의 불평등에 문제를 제기한다. 실력주의가 현실이라기보다 소망으로만 남아 있는 한, 어떤 해우이에 동참하라고 독려받았으되 받아야 할 몫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응당 자기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취하게 된다." "인간 욕망의 무한성을 감안하면, 모든 것을 가진 사람도 여전히 좀더 많은 것을 원할 수 있다. 세속적인 성공을 강조하는 동시에 개인의 권리를 공동체의 이득보다 우선시하는 문화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객관적 지위와는 별개로 박탈감을 느끼게 만든다."(132-3)


"포스트모더니티는 새로운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발전상을 가정한다. 즉, 경제적 이해관계의 중요성 하락과 개인적 선호 및 정체성의 중요성 증가다." "일부 사람들에게 개인적 선호는 객관적이고 상호주관적인 현실을 능가하는 카드로 여겨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민족국가가 무력해졌다고도 가정한다. 무역과 금융이 세계화되면서, 경제를 통제하는 국가의 능력은 감소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상에서는 고착되고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다. 중요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설명은 심각하게 과장되었다." "위성과 인터넷 덕분에 새로운 방식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보는 드라마는 디킨스의 소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사실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이 우리 시대의 디지털 콘텐츠를 상당 부분 제공한다." "민족국가는 여전히 건재하다. 국가가 무너지는 건 대체로 국가적 정체성이 약회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종교-민족적 소수자들이 그들만의 국가를 원하기 때문이다."(136-9)


5 사회학이 아닌 것


"사회학이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다(혹은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사회학을 비판하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으며, 사회학 분야에 속한 사람들도 이를 모르지는 않는다. 이해할 만하지만 그래도 잘못된 생각이다. 이해할 만한다고 말한 것은 사회학의 발전에 기여한 초기 학자들 중 다수가 사회적 세계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마음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들은 사회학에 필수적인 가치(정직성, 명확성, 성실성 등)와 제쳐두어야 하는 학문 외적 관심사를 구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에만 생산적인 대화를 제대로 할 수 있다. 사회학 강의를 하다보면 학생들이 사회적 문제와 사회학적 문제를 구별하기 어려워하는 모습이 흔히 보인다. 연구 프로젝트의 주제를 선택하라고 하면, 학생들은 거의 틀림없이 세계의 어떤 나쁜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노숙자나 알코올 중독이나 가정폭력에 대해 '뭔가 하고' 싶어한다. '한다'는 탄력 없는 동사야말로 설명과 개선을 혼동하는 뚜렷한 증상이다."(148-51)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는 원칙을 벗어나면 특히 쉽게 무너진다. 핵심적 원칙을 오해하면 틀림없이 당파성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현실이 인간의 산물, 즉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점을 인정하면 인지와 객관적 현실 사이의 확고한 연결이 약화되고 우리 자신이 하는 진술과 설명에 대해 취하는 입장도 의문시하게 된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이 사태를 보는 방식도 그들의 공통적인 이해관계에 엄청나게 좌우된다는 점을 지적하게 된다. 이는 (밀접하게 연관될 수는 있겠지만) 정직성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거짓말보다 미묘한 뭔가에 관한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그 신봉자들이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점에서 시치미떼기와 구별된다. 청소년 임신율이 높아진 건 무신론자들이 공립학교에서의 기도를 금지한 결과라고 주장하는(일단 이런 주장이 오해라고 해보자) 미국의 보수주의 기독교도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들끼리 공유하는 신념에서 영향을 받아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게 된 것이다."(157-8)


"자신의 시각을 정확한 것으로, 타인의 시각을 이데올로기로 여기고 싶은 충동이 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사회학은 이데올로기가 갈수록 많은 사회집단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밝혀냄으로써 그런 충동을 방해한다. 1960년대에는 의사나 변호사 등이 장기간의 훈련을 통해 전문성을 획득하고 외부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우며(동료가 임무를 태만히 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의사뿐이다) 직업상의 신규 진입을 통제할 수 있고 높은 수준의 보상을 누린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전문직을 여타 직업과 구별하기 일쑤였다. 전문직과, 마찬가지로 접근을 제한하여 보상을 높이려는 다른 형태의 (기계공업 같은) 숙련노동 사이에는 명확한 선이 그어졌다. 전문직 종사자들은 어떤 높은 차원의 사회적 선(예컨대 보건이나 정의)에 봉사한다는 이유로 그런 행위를 해도 정당화되었다. 엔지니어들이 그런 행위를 하면 직업에 대한 부당한 제약으로 여겨졌고, 많은 국가에서는 그런 행위를 불법화했다."(158-9)


"당파주의자들을 변호하는 또 한 가지 방식은 민족 연구와 여성학 분야에서 인기를 얻었다. 이 분야에서 주장하는 것은 객관성의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설령 그 일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 객관성이 사회학적 기획을 방해한다는 얘기다. 그들은 설명하려면 일단 이해해야 하고 이해하려면 일단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흑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오직 흑인만이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고, 오직 여성만이 다른 여성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의심하게 되는 타당한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주장이 공평하게 제기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회학자들은 오직 귀족만이 귀족정을 유용하게 연구할 수 있다거나 파시스트만이 파시즘을 연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식의 특별한 주장은 연구자 자신에 의해서거나 연구자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대신해서만 제기된다. 많은 경우 이는 그저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방법일 뿐이다. 미덕을 과시하는 일이다."(161-2)


"이데올로기적 오염의 문제에 대한 한 가지 응답이 노골적인 당파성이라면 또다른 응답은 상대주의이다." "문화연구에서 상대주의가 인기를 얻은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작가나 화가로서의 전문적 기술을 비교평가할 수는 있겠지만 제인 오스틴이 애거서 크리스티보다 좋은 작가이고 존 컨스터블이 잭 비트리아노보다 나은 화가인지는 대체로 취향에 달린 문제다.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사회적 위계가 취향의 위계를 만들어낸다. 특정 계급이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을 결정한다. 1950년대 영국에서는 〈예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안다〉는 표현이 교육 수준이 낮은 전형적인 하위 계급 사람들을 모욕하는 일종의 농담이었다. 1990년대에는 이것이 숭고한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표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적 사고와 사회과학의 가능성을 믿는다면, 모든 이에게 믿고 싶은 것을 믿을 권리를 부여하는 동시에 어떤 믿음은 틀렸다고 주장할 권리도 주어야 한다."(168-70)


"상대주의에 대한 종합적 반박은 창조와 발견을 구별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다. 설명과 이론이 사회적 구성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설명이나 이론이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사실은 창조해낸 것들이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뉴턴은 '중력'을 발견했지만, 그의 지적 활동 전에도 사람들은 지표면에 발을 붙이고 사는 데에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중력을 발견한 것이다. 또다른 반격은 사회적 설명들이 한낱 내러티브일 뿐이라는(또한 모든 내러티브는 동등하다는) 상대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사회학자들은 증거에 대해 합의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합의 자체가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자들이 뭔가에 합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저 바깥에 진짜 세계가 우리의 믿음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아무리 못해도 개인적 선호를 표현하는 것 이상의 방식으로 그 세계를 탐사하고 싶은 열망을 품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171)


"문화적·사회적 경계를 넘어서는 이해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중요하다. 그러나 상대주의에 대한 이런 반응이 어려운 것은 교전수칙 자체를 거부하는 상대주의자들이 이런 응답에도 별다른 감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전면적 거부를 넘어 합의에 이르는 최선의 응답은, 상대주의자들에게 그들 자신은 한결같이 그들이 공언한 철학적 입장에 걸맞게 행동하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분명 그들은 그렇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책을 쓰고 강연을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주장을 전하려고 애쓴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그들 스스로 처방한 약을 약효가 발휘될 만큼 충분히 복용했다면, 그들은 장사를 집어치워야 한다. 어떤 책도 다른 책보다 낫지 않다면, 왜 그런 주장을 펴겠다고(그것도 누차) 나무를 베는가? 오류로부터 진실을 구별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그들의 시각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는가?"(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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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왜 복지국가 만들기에 실패했나
몰리 미셸모어 지음, 강병익 옮김 / 페이퍼로드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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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세금은 왜 중요한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90% 이상의 미국인이 많든 적든 정부가 제공하는 사회보장 및 경제적 안정을 공공자금에 의존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연방부조 수급자의 대부분은 대중들이 상상하는 '복지여왕들'이 아니라, 중산층 자택 소유자, 유급 전문직 종사자, 그리고 퇴직자들이다. 인정은 고사하고 거의 인식조차 되지 않았지만, 미국 중산층은 사실상 1세기 동안 표적화된 사회·경제 정책의 산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자신을 경제적 안정과 중산층이 다수가 되도록 계층 상승을 도왔던 정부 정책의 수혜자보다는 조세법의 과중한 희생자로 간주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현대 미국 정치의 기본적인 역설이다. 미국인들은 정부를 싫어하지만, 정부가 제공하는 특례, 사회보장, 계층 이동성을 하나의 권리 문제로 요구하고, 기대한다. 이 책의 목적은 1930년대 뉴딜로부터 1980년대 레이건 혁명을 거쳐 지금까지 조세와 지출 정책의 전개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이러한 명백한 모순을 해명하는 데 있다."(8-10)


제1장 복지국가와 조세국가 지키기_뉴딜과 전후 복지국가 논쟁


"1930년대와 1940년대 초 대부분의 자유주의 사회 프로그램이 종전 직후 짧았던 보수주의의 부활에도 살아남았다. 대중들의 지지에 힘입어 입법권자들은 퇴역 군인과 그의 가족들을 위해 교육 수당을 늘리고, 심지어는 주택 구매도 더욱 손쉽게 할 수 있도록 새롭고 이전보다 훨씬 관대한 수당제도를 쏟아냈다. 사회보장 역시 확대되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 프로그램을 미국적이지 않은, 〈노동자와 사업주의 급여를 통해 지급되는 주정부의 자선 형식〉이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1950년대 초에 이르자 오하이오주의 공화당 상원 의원 로버트 태프트와 같은 투철한 보수주의자와 전국상공회의소마저도 이 프로그램을 받아들였다. 상하 양원 모두에서 양당 간 협력을 통해 다수로 통과된 1950년의 사회보장법 수정안은 이 프로그램이 장기간 확장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미국 복지국가의 핵심에 이 프로그램을 정착시킬 수 있게 했으며, 이전의 취약했던 프로그램을 '불문율third rail'로 전환시키도록 도왔다."(39-40)


"자유주의자들 역시 그들의 시각을 수정했다. 본래 조세국가와 복지국가는 전시에 사라졌던 심각한 국가적 위기 상황을 배경으로 만들어지고 승인받았다. 그러나 조세국가와 복지국가, 양자에 대한 도전은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전후 자유주의 국가를 봉쇄하고 저지하려는 노력은 보수주의 정책 엘리트들이 세금을 삭감하고, 뉴딜 사회 정책 프로그램의 폐지와, 국가의 성장을 억제하는 데 전력함으로써 배가되었다." "결국 자유주의 세력은 자유주의 정치 기획을 통째로 저당잡힘으로써 그럭저럭 조세국가와 복지국가의 기본 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세저항 심리가 기존의 경제 및 사회 정책 프로그램─초기 냉전 시기의 국가주의 정책에 대한 반감과 전후 자유주의 정책 결정에 대한 케인스주의 경제 성장의 중요 논리가 조화된─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자유주의 세력의 공포는 입법자들이 핵심적인 경제 및 사회 정책 프로그램에 대한 재정 지원을 훨씬 복잡하고 모호하게 만들도록 했다."(42-3)


"공공복지 프로그램에 대한 널리 퍼진 대중들의 적대감은 뉴딜로부터 계승된 복지국가의 한계와 종전 직후의 불안정한 정치적·경제적 특성을 모두 말해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대공황과 전시 이후 평화와 번영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고대했지만, 그러한 미래가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도 품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련과의 관계 악화와 냉전의 출현은 또 다른, 그리고 아마도 (핵전쟁으로 귀결될 것이 분명한) 최후의 전 지구적 갈등이라는 불안감을 드높였다." "전후경제 성장도 그 자체로 문제를 야기했다. 〈사치와 결핍〉이 뒤섞여 경기 호황 자체가 혼란스러웠는데, 〈결핍의 목록〉은 〈끝이 없었고 ··· 수요는 ··· 엄청났으며 ··· 돈 없는 사람이 없고 ··· 돈 때문에 곤란을 겪는 사람은 없어 보이지〉만, 미래는 불안정해 보였다. 많은 이들이 10년 이내에 또 다른 심각한 경기 불황이 올 것이라고 걱정하면서 이러한 번영이 지속될 것인지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47-8)


"납세자들의 눈먼 돈을 훔치는 '구호민 사기꾼들'이라고 비난한 신경질적인 머리기사들에도 불구하고 공공부조는 결코 세금 상승의 원인도, 공공 지출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1960년까지 중위 소득 이상의 미국인들이 연방정부로부터 직접 지급되는 이전급여의 51%를 가져갔다. 중간계급 납세자들은 특히 퇴역 군인과 농민 수당의 지원을 받았고, 심지어 대부분의 빈곤층에게 지급되는 프로그램들조차도 중산층과 상위 계층의 소득자들에게 일부 지원금을 제공했다. 1960년에는 사회보험 지급액의 30% 이상이 중위 소득 이상의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연방정부는 연방 재정 정책을 설명하는 전문용어를 활용하여 중간계급의 구성원들─풍요로운 미래의 꿈을 향유하는─에게 그들의 새로운 금전적 이익과 경제적 안정, 그리고 직접적인 정부 지출과 간접적인 정부 지출 간 연결고리를 무시하게 함으로써 이 막대한 대부분의 국내 지출을 지속적으로 위장하거나 숨기기까지 했다."(50-1)


"정책 선택이 이러한 수사법을 통한 분리를 강화했다. 사회보장 전문가들과 주창자들은 노령자유족보험OASI과 같은 기존 제도를 보호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배가함으로써 공공 지출과 세금 인상에 대한 의회와 대중의 적대감에 대응했다. OASI로 통칭되는 사회보장제도가 세금에 대한 미사여구와 반국가적 수사법을 동원한 부양아동보조ADC와 일반부조 반대운동에 희생될 것을 우려한 사회보장청의 전문가들은 이 프로그램을 실패한 복지정책과 거리를 두게 하고, 연간 예산 절차가 미치지 않는 범위에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에 착수했다. 사회보장제도 주창자들은 OASI가 〈모든 미국인 가정이 직면한 사회적 위험을 대상〉으로 하도록 고안된 〈일종의 정부 보험회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들은 이 〈쳬게적이고 현명한 절약〉 프로그램에 호감을 갖게 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납세자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지워 건전하지 못한 국가 의존성을 당연시하며 조장하는 다른 프로그램들과 대비시켰다."(52)


"공화당은 감세의 정치적 호소력을 알고 있었다. 1947년 공화당 열성분자들이 주장했던 감세는 '미국의 복지'뿐만 아니라 '1948년 공화당의 성공'을 넘어 그 이상의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평균적인 시민들에게 부과된 조세 부담은 전시와 전후 모두 눈에 띄게 증가했다." "생계비 상승과 연동된 세 부담의 상승은 풀뿌리 수준에서 유권자의 불만을 고조시켰는데, 이는 민주당 표밭에서 유권자들이 이탈하도록 공화당에 절호의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보였다. 국민 경제의 변화는 세금을 정치 쟁점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인플레이션으로 서민들이 점점 더 세금을 의식하게 되자 감세는 더 매력적인 정치 의제가 되었다. 더욱이 감세는 공화당이 핵심 원칙을 위반하거나 기업집단에 대한 지지 기반을 잠식하지 않고 선거에서 호소력을 키울 수 있게 했다." "전시의 대규모 소득세 창출은 공화당이 납세자인 대다수 유권자들에게 호소할 기회와, 공화당에 〈이상주의적 의식과 좋은 삶에 헌신〉할 기회를 제공했다."(58-60)


"1951년 7월, 갤럽 여론조사에서 대상자의 68%가 연방세 최고 한도를 25%로 하는 제안에 찬성했는데, 찬성 의사는 고르게 나타났다. 기업인과 전문 직종에서 64%의 지지 의사가 표출되었고, 육체노동자와 농민층은 68%, 화이트칼라 노동자는 69%가 찬성했다. 이들 납세자 중 이와 같은 감세안으로 혜택을 받은 이들은 거의 없었다. 이 조치의 반대자들은 감세안이 과세 부담을 기업과 부자들로부터 중간 및 하위 소득 납세자에게 전가하는 방식임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사실 개인 납세자의 약 1%만이 과세제한으로부터 직접적인 혜택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 운 좋은 소수를 위해, 감세 혜택의 규모는 직접적으로 그들의 소득 규모와 연동하여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연간 2만 5천 달러로 살아가는 4인 가족은 약 750달러의 세금 감면을 기대할 수 있었고, 연간소득이 100만 달러인 유사한 가족 구성원을 가진 부부는 62만 달러 이상의 횡재에 가까운 감세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거대 기업에게는 훨씬 유리했다."(64-5)


"1954년 재정법은 전후 8년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조세법이었다." "양당 합의를 반영한 재정법은 미국 정책 결정자들이 안정적 경제 성장을 위해 지출보다는 과세에 의존하는 일종의 미국화된 케인스주의를 통해 경제 성장에 주력할 것을 천명했다. 누진적 소득세를 보호하는 데 성공한 자유주의 세력은 뉴딜 복지국가의 유지와 확장을 명백히 하는 데 성공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대가를 치렀다.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지지한 누진적 소득세는 좋은 조세 정책의 중심에 '지불 능력' 기준을 구체화함으로써 복지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국가의 '비용'을 가시화하여 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대중들의 거부감을 촉발했다. 몇몇 공화당 인사들은 종전 이전에 이미 자유주의 국가에 대한 잠재적 견제 심리를 인식하고 있었다." "1944년 공화당이 예측했듯이, 〈임금소득자 다수에 대한 직접세〉는 〈정부 활동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다수의 시민〉을 형성함으로써 국민국가의 성장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게 될 것이었다."(69-70)


제2장 시장의 실패_케네디-존슨 정부 시기 감세와 복지 축소의 정치


"1961년, 뉴버그시의 행정 담당자인 조셉 미첼은 〈복지 사기꾼, 게으름뱅이, 사회 기생충〉을 도시에서 몰아내자는 잘 짜인 홍보를 시행했다." "미첼은 〈평가 가치의 손실 ··· 그리고 전체 업무 지구의 파산〉부터 폭력을 발생시키는 〈공중위생의 위험〉과 혼외 자녀 출산율의 급상승까지 복지에 관한 모든 것을 비난하면서, 복지 수급자들이 〈주 혹은 연방의 명령에 의해 빈둥거릴 수 있고, 일하지 않고, 버릇없는 아이들처럼 계속 구제를 받을 권리〉를 가졌다며 공격했다." "이른바 '뉴버그 전투'는 1960년대 초 자유주의 정책 결정자들이 직면했던 난관을 잘 드러냈다. 뉴버그시의 위기는 1960년대 남부 백인, 흑인, 백인 도시 노동자, 그리고 정치적 진보주의자들의 취약한 뉴딜 연합에 균열을 일으킬 인종 갈등 정치의 윤곽을 미리 보여주었다. 미첼은 그의 복지 규제의 핵심에 인종주의 정치가 있음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시의 경제와 사회 문제의 원인이 '남부 이주민들'에게 있다고 거듭해서 비난했다."(87-8)


"뉴버그시의 위기는 종전 직후 자유주의 국가 건설자들이 주도했던 타협에서 벗어난 것으로, 점점 더 협소하게 규정되어 가는 복지에 관한 정의를 평범한 미국인들의 증대하는 조세 부담 문제에 연계한 정치 담론과 정책기구의 직접적 결과였다. 미첼의 전쟁을 활성화한 과세와 지출의 정치는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린든 존슨 대통령의 핵심적인 국내 정책 계획에 영향을 주었다. 점점 취약해지는 민주당 선거 연합 재정비에 대한 열망과 세금 신설이나 더 높은 세율에 대한 대중과 의회의 적대감을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케네디와 존슨 모두 그들의 국내 및 국제 정책 공약을 뒷받침할 경제 성장의 성과에 의존했고, 낮은 세금, 사회보장, 그리고 전후 사회 협약이었던 계층 상승 공약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케네디-존슨 감세로 잘 알려진 1964년 재정법은 전면적으로 세금을 큰 폭으로 줄이고 〈절세를 민간 경제에 이전〉함으로써 납세자와 미납세자를 막론하고 모든 미국인들에게 혜택을 줄 것을 약속했다."(89-90)


"아이러니하게도 백인 중간계급 다수를 노동자에서 주택 소유주와 납세자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자유주의 국가에 의해 이러한 원대한 의제를 실현하기 위한 잠재력이 약화되었다." "1960년대 말에 이르자 미국의 자유주의는 거의 스스로 자초한 위기에 직면했다. 모든 시민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시키는 동시에 모든 납세 시민들이 '당연하게 받게 되는' 낮은 세율을 수호하고 자유기업 경제의 성장을 보장하기로 약속하면서, 1964년 재정법과 빈곤과의 전쟁은 모두 전후 자유주의의 모순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감세는 암묵적으로 국가 경제의 성장과 개인 경제의 보호 모두에 대해 연방정부의 책임성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빈곤과의 전쟁은 모든 시민에게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겠다는 자유주의 국가 건설자들의 약속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빈곤하지 않은 다수에게 이러한 권리를 제공하는 자유주의 국가의 역할은 연방의 법인세법과 개별세법에 깊숙이 사장되거나 시야에서 사라졌다."(92-3)


"감세는 경제 성장을 이루거나, 케네디가 선거운동을 통해 〈약에 취한 선잠의 시기〉로 간주했던 아이젠하워 시대에서 벗어나 국가를 부흥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다. 경제 성장은 새로운 지출이나 확대 지출을 통해 이룰 수도 있었다. 실제로 케네디 행정부는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음에는 물리적·인적 자원에 대한 공공투자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새로운 직접지출은 채택하기 힘든 것이었다. 대통령의 제안이 상대적으로 온건하긴 했지만, 의회는 국내 프로그램의 지출을 늘리는 데 거의 공감하지 않았다. 남부 민주당 의원, 대부분의 공화당 의원, 그리고 양당의 재정 적자에 강경한 매파deficit hawks들을 포함한 의회의 보수주의자들은 케네디의 1961년 경기 부양 법안들에 제동을 걸었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이었던 제임스 토빈과 그의 동료들은 〈모든 이들이 '더 많은, 더 많은, 또 더 많은 지출'〉에 의존하는 경제 회복 계획은 현재의 정치 환경에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95-6)


"케네디-존슨 행정부가 추진한 시장 중심의 복지정책 접근 방식에 대한 도전은 대체로 흑인자유운동에서 나왔는데, 이 운동의 지도자들 역시 공공 정책과 인종 및 계급 불평등 간 관계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공민권 활동가들은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흑인투표법에 의해 보장된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가 흑인의 경제 안정을 보장하는 적극적인 정책 없이는 거의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1945년의 제대군인원호법(퇴역 미군의 권리보장법)에 비견할 만한 연방 차원의 투자만이 모든 이들에게 적절한 소득 수준을 제공함으로써 '흑인 게토의 벽'을 허물 수 있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민권법이 흑인을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참여자가 되는 ··· 문턱〉에 이르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공동체가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날〉 때까지는 〈완전히 해방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걷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에게 신발을 주는 것〉은 〈잔인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상기시켰다."(117)


"민권운동 지도자들과 복지권 운동가들은 정치적 권한 부여와 경제적 보장 모두를 요구하면서, 납세자와 세금 소비자 간 잘못된 이분법에 대한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도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전략은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백인 중간계급 중심의 연방 보조금은 쉽게 부정되고 대체로 무시되었다. 연방정부에 비판적이지만 보이지 않는 조력자인 다수의 미국인들이 스스로 어느 정도의 경제적 보장과 이동성을 확보하자 빈곤층과 흑인에 대한 동일한 권리의 확장을 지지하는 광범위한 동맹에 대한 전망은 상당히 어두워졌다. 계급과세에서 대중과세로의 연방소득세 개혁은 다수를 위한 정치, 납세자의 권리와 빈곤층의 욕구가 서로 적대시되는 계급정치의 견고한 제도적 요소들을 동시에 만들어냈다. 전체적인 경제 성장으로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연방소득세제로 편입됨에 따라 조세국가의 정책은 가난한 소수 인종 정책과 분명하고 즉각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었다."(123-4)


제3장 정치적 합의의 붕괴_뉴딜 체제의 와해와 위대한 사회의 분열


"1967년 초, 여론조사 전문가인 벤 와텐버그가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한 짤막한 경고가 화제가 되었다. 빈곤과의 전쟁과 베트남전에 집중하고 있는 행정부가 민주당이 '미국 중간계급 노동자들'의 관심과 득표를 얻는 데 위협이 된다는 것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노동조합원들은 오늘날 빈곤층이 원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연방 정부에 요구〉했지만, 중간계급 및 노동계급의 지형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전엔 빈민촌에 거주했던 미국 노동자들이 이제는 교외 지역에서 쉽게 눈에 띄었다. 빈곤 프로그램이나 심지어 최저임금에 거의 관심이 없던 노동조합 소속 노동자들이 아버지가 없는 가난한 아이들에 대해 더 많은 지원을 하도록 설계된 복지 프로그램보다 ··· 〈그들의 자녀를 대학에 보내는 데 매우 적극적이고, 자연스럽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와텐버그의 결론은 노동자들과 노조원들이 연방정부가 〈근래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너무도 흔한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129)


"여기에는 존슨 행정부가 직면한 딜레마가 요약되어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 중간계급의 다수는 국가로부터 소외된 소수자들─선동적인 흑인 투사와 복지 수혜를 받는 어머니들, 쾌락주의적인 히피족과 대학생 혁명주의 세력─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정책 결정자들로 인한 좌절, 분노, 환멸이 커졌다. 사실 많은 미국인들, 특히 닉슨이 〈침묵하는 다수〉라고 불렀던 백인 중간계급과 노동계급 유권자들은 정부로부터 소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빈곤과의 전쟁과 민권혁명에 희생되었다고 느꼈다. 1967년 한 백인 자택 소유자 단체는 〈법을 준수하는 사회인 미국의 대다수를 대신해서 의회가 어떤 행동을 취할 때가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들은 민권법과 빈곤 프로그램을 겨냥해 〈이런 빌어먹을 게으름뱅이들과 폭도들에게 지속적인 무상복지를 제공〉하는 데 대해 분노를 표시했고, 그들의 선출직 관료들에게 〈이 나라가 지탱되도록 대부분의 세금을 내는 평균적인 미국인들을 돕는 무언가를 하라〉고 요구했다."(130)


"1966년 말 존슨 대통령이 역사적인 민권법안을 보장하고, 국가 최초로 전국 의료보험 체계를 제정하고, 연방정부의 교육 공약과 교육 투자를 늘리고, 위대한 사회를 위해 빈곤과의 전쟁을 추진하도록 한 정치적 합의는 모두 깨지고 말았다." "경제는 행정부가 빈곤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속적이고 유례가 없는 경제 성장과 예산은 부족했어도 목적이 분명했던 빈곤해소 법안으로도 빈곤은 사라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플레이션은 최근에야 중간계급에 편입한 많은 미국인의 생활비 인상에 위협 요인이 되었다. 당내에서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 불만을 품은 좌파-평화 활동가들과 시민권과 평등권을 위한 투쟁이 더디게 진행되는 데 실망한 민권운동 지도자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민주당의 보수파 역시 행정부에 환멸을 느꼈고, 의회 공화당과 협력해서 대통령의 입법 우선 사안 중 많은 부분, 특히 시민권 영역과 빈곤해소 정책을 막는 데 충분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132-3)


"복지 문제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진단은 복지 프로그램의 자유주의 옹호자들이 1950년대와 1960년대 초 내린 결론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밀스와 그의 동료 의원들은 대부분의 복지 전문가들과 전문 사회 사업가들이 인정한 재활적 접근을 거부했다. 무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입위원회는 AFDC 수급자들의 복지급여에 약간의 소득을 부가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규칙을 포함해, 강제적 노동 요구 체계를 통한 노동 유인책을 추가했다. 밀스는 복지가 '삶의 방식'이 된다면 공적 이익을 꾀할 수 없다는 점을 동료 의원들에게 상기시키고, AFDC 수급자들이 〈공공기금을 받으려면 ··· 그들의 직업 습득 능력을 검증하는 데 ··· 순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원회는 〈눈에 보이는 모든 실업 상태의 아버지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어머니들〉도 〈취업을 위해 훈련받고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재정위원회는 근로유인 혹은 근로장려 프로그램을 신설하면서 훨씬 무거운 근로 요구를 강조했다."(140-1)


"1960년대 말에 이르자 여성 노동력 참여 증대와 여성주의 운동의 출현으로 가족임금 체제─아이들은 국가가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생산물〉이며, 어머니에게는 농부와 마찬가지로〈훌륭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재정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에 기반한─자체가 크게 약화되었다. 모성주의에 냉담한 정책 결정자들은 표면적으로는 성 중립적 납세자 권리의 방어로 대응했다. 한 예로, 롱 위원장은 1967년 법안에 의해 신설된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들의 강제 근로 연계 프로그램 참여 의무를 지지하면서, 일하는 어머니들에게 〈공공부조 비용을 위해 지불되는 ··· 세금을 납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하는 미국의 1천만 명의 어머니들이 지불한 세금을 일하기를 거부하는 소수의 어머니를 지원하는 데 사용할 이유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러한 주장은 특히 불안정한 미국 경제의 구조 변동으로 어려움에 처한 노동계급과 저소득 남성 및 여성 중간계급에 호소력이 있었다."(147-8)


"1960년대 말이 되면 국내 복지 프로그램을 만들고 확대하기 위해 오랫동안 의지했던 재원으로는 더 이상 연방정부 사업과 그 대가를 치를 의지가 없는 미국인들의 요구를 동시에 충족할 수 없었다." "모순적이게도 백인 중산층을 형성하는 데 성공한 뉴딜과 전후 사회정책이 1944년 경제적 권리장전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약속한 '권리혁명'의 완수 가능성에 제약을 가했다. 전후 자유주의 국가의 팽창을 가능하게 했던 동일한 특징들, 즉 국가의 경제 성장에 대한 의존성, 열정적으로 추진한 법인세율과 개인세율 인하, 목적세인 급여세, 혹은 개인 복지와 기업 복지를 통해 특정한 사회적 권리와 그 비용을 제공하는 데 의존한 것은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다루기 힘든 문제를 해결할 자유주의자들의 능력을 제한했다. 점증하는 다수 비빈곤층의 정부 보호 요구와 새로운 조세 부담에 대한 그들의 저항 사이의 모순은 뉴딜 질서를 깨뜨리고, 그것을 대체하고자 했던 보수적인 대안을 굳건하게 형성시켰다."(164-5)


제4장 세금 논쟁_닉슨 행정부 시기 복지 개혁과 조세저항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걸쳐 공화당과 민주당은 백인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여러 방식을 시도했다." "다수의 민주당 지도부는 백인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을 배제해왔던 민주당의 '오만한 태도'를 일소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민주당의 정치적 미래를 위협하는 문화적·인종적 균열을 초월할 수 있는 경제적 포퓰리즘으로 당의 지향을 재설정하고자 했다. 많은 민주당원들은 중산층 백인 유권자를 달래면서도 인종적·경제적 평등에 관한 정당의 공약은 유지하는 정책 의제를 고수하면서, 〈불법적인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계급, 기관들〉에 대한 민중적 저항을 유도함으로써 흑인과 백인 노동계급 및 중산층의 '기본적인 경제적 이익'이 융합되기를 희망했다." "진보 단체들은 대중에게 확고히 자리 잡은 복지에 대한 적대감이 가난한 여성과 그 자녀들로부터 〈진정한 복지 수급자, 곧 연방 재무부에서 수십억 달러를 빼내 간 부자와 연줄 많은 기업〉을 향하게 하고자 했다."(172-3)


"공화당과 보수주의 동맹 세력은 침묵하는 다수를 포함한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하나의 권리 문제로 기대했던 연방정부의 보조금을 받는 특권과 특혜 보호를 주력하는 데 그쳤다." "FAP의 목표 역시 빈곤 타파가 아니라 백인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유권자들의 표심을 공고히 하고, 이들 유권자들에게 가시적인 복지국가의 혜택을 확대함으로써 '새로운 미국의 다수'를 만드는 것이었다." "닉슨은 복지국가의 축소가 아닌 재설정과 확대를 목표로 삼았다. 1969년에서 1971년 사이, 닉슨의 백악관은 존슨의 위대한 사회에서 소외되었다고 인식된 백인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유권자들에게 연방 보조금 확대를 약속하는 인상적인 일련의 복지정책들을 제안했다. 행정부는 이러한 국내정책 우선순위에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새로운 재원으로 부가가치세까지 고려했다. 북부와 남부의 백인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수당의 대부분을 제공했던 FAP는 이 초기 확대 단계의 핵심 요소로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175-6)


"하지만 만사가 계획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초기 여론은 FAP에 대중적인 지지를 나타냈지만, 1970년 중간선거에서의 공화당의 패배는 중하층 및 노동계급 유권자들을 정치 동맹으로 이끌기 위해 새로운 지출 프로그램을 활용하려는 닉슨의 기획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렸다." "1971년 4월, 닉슨은 참모들에게 이 제안의 가장 급진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부모가 모두 있는 가정에 대한 지원을 폐기하라고 지시했는데, 대중들은 〈일하는 가정에 대한 지원 제공〉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봄이 지날 무렵, 닉슨은 이 계획이 〈일하기 싫어서 꾀병을 부리는 사람들을 복지명부에 추가〉하는 〈정치적 실패작〉임을 인정하고, FAP를 완전히 포기했다. 특히 기업집단을 위시한, 이 프로그램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들이 대중의 양면성과 로널드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같은 반복지 보수주의자들의 점증하는 압력과 결탁한 것은 닉슨이 그의 행정부의 가장 중요한 국내 개혁을 최종적으로 철회한 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180)


"FAP가 실패한 이후, 우파와 좌파 모두 잊힌 미국 중산층에게 호소하기 위해 지출 정책보다는 조세정치로 돌아섰다. 닉슨의 복지 제안에 대한 논쟁이 장기화되면서 진보적인 빈곤해소 단체 내에서 균열이 나타났고, 복지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심화되었다. 좌파는 경제 정의 문제를 중심으로 새로운 다수를 재건하기 위해 광범위한 정치적 호소가 담길 쟁점을 찾아 나섰다. 조세 개혁은 이러한 새로운 다수 전략에 기반해서 중하위 소득 노동자들에 대한 감세와 연계한 기업의 조세 포탈을 겨냥했다. 이에 대응하여 닉슨 행정부는 1968~1972년 추진한 재정 확대 정책을 포기하고, 대신 사회지출─특히 도시 지역의 소수 빈곤층과 관련된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의 대폭적인 삭감과 침묵하는 다수를 위한 감세 약속을 연계하는 국내 의제로 전환했다. 1972년 이후 풀뿌리 수준에서 조직된 지역 조세 개혁 연합체의 납세자들과 점점 세를 불려 나간 활동가들은 조세 정책을 핵심 국정 의제로 계속 이어 나가는 데 기여했다."(186-7)


"처음엔 자유주의자들이 초기 중간계급의 조세저항을 포착하고 이를 이념적으로는 일관되고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다수 연합으로 전환하는 데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한 듯 보였다." "불공정한 과세, 즉 소수의 부자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반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세금을 점점 더 걷어가는 조세제도에 분노한 납세자들은 의회의 조세 관련 의원들과 함께 전국적인 정치 의제로 조세 개혁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조세 개혁만으로는 진보적인 조세 개혁가들이 약속했던 대규모의 사회 프로그램 재원을 충당할 수 없었다." "경제학자 스탠리 서리는 〈조세 개혁을 통해 복지 개혁의 진전과 복지 개혁의 비용을 동시에 해결하려는〉 노력은 결코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세 개혁으로 복지 개혁에 비용을 부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리처드 머스그레이브 또한 조세 개혁이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경제적 이익을 빈곤층의 이익과 결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188-9, 201-2)


"자유주의 조세 개혁 담론과 정책들은 인플레이션과 높은 세금으로 〈쥐어짜인〉 중위 소득의 노동계급 주택 소유자들과 납세자들에게 거의 도움을 주지 못했다." "진보주의자들이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 가운데, 보수 세력은 강력한 납세자 저항을 혁명적인 정치 세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공화당 전략가들은 1972년 민주당 예비선거 기간에 조세정치의 재도입에 대응하여 높아가는 조세 부담의 원인이 대부분 '무책임'하고 '소모적인' 민주당 정책에 있다고 비난하는 강력한 정치적 수사를 발전시켰다.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을 향한 적대감은 FAP 논쟁의 장기화로 불붙은 복지에 대한 적대감 재발과 결합하여 이들 주장을 응집력 있게 만들고 주목받게 했다. 1972년 선거에서 보수주의자들은 복지가 '가족 해체와 불안정'을 이끌 것이라는 빈곤 전사들의 주장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조작된' 조세법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공격을 활용하여 그들을 연방 지출 일반에 반대하도록 돌려세웠다."(203-5)


제5장 게임 오버_레이건 혁명과 조세 논쟁의 결말


"1980년 초여름, '인종차별주의 신념'을 가진 로버트 존슨과 론 프람스퍼라는 야심만만한 두 메릴랜드 기업인은 '백인 저소득 중간계급'의 분노를 보드게임화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들의 발명품─공공부조: 이 위대한 복지 게임을 할 수 있는데 먹고살려고 일할 이유가 있나요?─은 그해 말 연말 쇼핑 시즌에 맞춰 출시되었다." "이 게임에서 '노동자의 평범한 길' 위의 인생은 돈이 많이 들고 위험했다. 거의 예외 없이 '노동자의 평범한 길'에 놓인 운 나쁜 참가자들은 〈가혹한 세금 부담, 질식할 것 같은 정부 규제, 그리고 역차별에 희생당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반면 '신체 건강한 복지 수급자의 산책길' 위에 있는 참가자들은 〈약탈, 도박, 음주, 혼외 자녀 출산, 그리고 정부 혜택 수령의 유쾌한 원정〉으로 묘사한 것을 경험했다." "이 게임은 신체 건강한 복지 수급자와 그들을 돕는 연방정부 모두의 행위에 그 원인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215-7)


"우파의 조세 및 지출 의제는 정부가 백인 중간계급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동시에 복지─이른바 소모적이고 잔여적 프로그램이라고 언급되는─를 정부의 공적 역할로 인정하는 데 명확한 구분을 하지 않았던 자유주의 조세복지국가의 노선 덕에 성공을 거두었다." "1970년대가 끝날 무렵, 공화당 우파는 조세와 위법적이고 심지어 유해하기까지 한 복지지출이라는 쌍둥이 이슈에 집중했던 전후 자유주의에 대한 응집력 있고 정치적으로 가능한 대안을 성공적으로 가시화했다. 복지 의제는 공화당에 자유주의 국가를 공격하는 공론정치의 선명성을 부여했다. 공화당은 개인의 권리와 경제력 향상에 대한 자유주의의 전통적인 옹호 논리를 차용하면서 단지 〈예산과 국가에 커다란 부담〉을 부과하고 〈국민들을 정부에 종속〉시키는 데만 성공한 공공 프로그램을 구축함으로써 국민의 소망을 무시하는 결정을 했던 자유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보루로서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했다."(218-9)


"1970년대 중반까지 경제 위기는 케인스주의 경제학이 스태그플레이션 문제를 실용적인 방식으로 처리하기는커녕 이를 설명할 수도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경제학 분야에서 일종의 지적 위기를 낳았다. 이러한 케인스주의 경제학의 실패는 전체 경제 전문가들 내에서 케인스주의 합의의 약화와 결합하여 새로운 경제학 이론과 정책의 형성 및 확산을 위한 정치적 공간을 넓혀 놓았다. 이러한 관념들─(정치화된 공공 정책과 선동적인 저널리즘 속에서 형성된) 공급경제학─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도드라진 부분은 공급 문제에 대한 관심을 다시 활성화하기 위해 소비자 수요 촉진을 강조하는 케인스주의를 거부한다는 데 있었다. 공급경제학자들은 19세기의 프랑스 경제학자 장 바티스트 세의 연구로 돌아가, 케인스주의자들이 노동과 투자에 대한 인간의 동기를 무시했다고 비난하면서 정부 정책들이 대규모의 노동과 자본을 시장에서 철수하게 함으로써 어떻게 '절름발이 경제'를 만들었는지로 관심을 돌렸다."(227)


"1981년 8월, 레이건 대통령은 국내 정치에서 레이건 혁명의 시작이자 끝을 나타내는 두 가지 상징적인 법안에 서명했다. 첫 번째는 총괄예산조정법OBRA으로, 3년 동안 연방 예산 지출을 1,300억 달러 삭감함으로써 '정부 규모와 비용'을 억제하겠다고 약속했다. 두 번째는 경제회복조세법ERTA으로, 개인한계소득세율을 전면적으로 3년마다 25% 삭감하는 것이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소득세 구간을 물가 상승에 따라 매년 조정하거나 연동시키도록 했다는 것이다." "새 대통령이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적 혼란〉이라고 묘사한 현재의 경제적 진통이 〈경제에 기초가 되는 인적 자원, 기술 자원, 천연자원의 고갈〉을 가리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진통은 이전 수십 년간 견제받지 않은 정부 정책과 국가 성장의 불행한 결과였다. 백악관은 시장을 불필요한 조세와 규제 형태의 제약에서 풀어주고, 정부의 불필요한 지출 프로그램을 폐지함으로써 다시 한 번 국가의 번영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239, 244)


"레이건의 백악관은 1981년 초 내내 위법적인 복지 수급자의 권리 주장에 맞서 납세자들의 권리와 특권을 옹호함으로써 조세와 지출 삭감에 대한 정당성을 밝혔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레이건은 결국 그의 행정부가 실질적으로 국가의 규모를 줄이고 진정으로 혁신적 대통령직을 수행할 여지를 줄였다. 실제로 레이건은 그의 반국가주의를 복지─전체 연방 지출의 맥락에서 매우 제한적인 액수를 대상으로 하는─와의 '전쟁'으로 규정함으로써, 〈욕조에 빠뜨려 익사시킬 수 있는〉 정도로 국가를 축소하는 더 큰 보수주의 기획을 약화했다." "공급 주창자들이 약속한 경제 성장 창출에 실패했던 감세 효과와 방위비 지출 가속화, 그리고 중간계급의 복지국가를 위한 복지지출의 자연적 증가에 의해 레이건 집권 기간 중 연방 적자는 급증했다." "결국, ETRA 법안에 서명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레이건은 조용히 상당한 증세에 해당하는 액수를 제안하면서 〈세법상 특정한 세금 남용을 막고 세수를 늘리는〉 개정안을 요구했다."(254-6)


"하지만 레이건 혁명은 미국의 재정 정책과 정치의 성격을 영구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변화는 국가의 정치적 의제를 '문제 해결에서 예산 삭감'으로 이동시키고, 시민권의 혜택을 시민권에 대한 비용으로 대체함으로써 정치 논쟁의 일반적 의미와 내용을 확대했다." "동시에 납세자 보호를 아주 협소한 불법적인 복지지출 부분에 대한 제한된 싸움에 속박함으로써 우파는 공화당의 선거 승리를 가져온 이념적 재편의 범위를 제약했다. 비용이 들지 않는 적극적 국가의 확장을 약속했던 자유주의 합의와 비용이 들지 않는 적극적 국가의 축소를 공언했던 보수주의 반혁명의 결과는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교착 상태를 가져왔는데, 이러한 조건은 납세자에 대한 비용의 강조와 '정부 간섭'에 대한 공포 때문에 새로운 자유주의 정책의 가능성을 배제했지만, 동시에 자유주의 국가의 가장 크고 비용이 많이 드는 정책들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반국가 전략에 기반한 진정한 보수주의 혁명을 방해했다."(256-8)


에필로그 교착 상태의 미국 복지국가


"전후 시기에 자유주의자들은 경제 및 사회보장의 약속과 개별 시민에게 상대적으로 낮은 조세 부담만을 부과한다는 약속에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했다. 이 연구는 조세정치와 뉴딜,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전후 자유주의적 사회 협약의 결정적 요소로서 낮은 과세(율)에 대한 이해에 주목함으로써 '자유주의 황금기'에 대한 좌·우파의 비전과 그 비전을 계승한 보수주의적 복지 축소 모두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의 수사로만 국가를 향한 정치적 태도 변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 또한 우경화와 연속적인 자유주의 사회 정책의 축소가 민권운동과 위대한 사회의 자유주의에 대항한 인종주의적 반동에 의한 것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오히려, 현대 미국 정치의 역설─시민들이 최소한의 사회적·경제적 안정을 향유할 수 있도록 점점 더 많은 자원을 제공해온 국가에 대한 미국인들의 고조되는 환멸─을 이해하려면 전후 자유주의 국가의 제도와 사회 협약의 이념적 측면에 대한 재분석이 요구된다."(260-2)


"미국 복지체계의 가장 관대하고 효과적이며 인기 있는 부분들은 상당수 미국인들에게 경제적 안정은 물론 경제적 기회도 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급여 형태는 사적 매개자들을 통해 제공되거나, 사적 노동시장 참여를 조건으로 했기 때문에 현재의 사회적·경제적─인종적이고 젠더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위계화에 도전하기보다는 이를 재생산했다. 경제적 안정을 노동력 참여에 직간접적으로 구속시킴으로써 미국의 복지국가는 '자격 있는' 빈자와 '자격 없는' 빈자의 구별 짓기를 장기간 강화했다. 사회보장제도와 메디케어는 은퇴 이후 적절한 소득급여로 유지될 수 있었다. 즉 조세지출은 무시되거나, 아니면 더욱 빈번히, 어쨌든 정당하게 납세자들에게 돌아가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하지만 빈곤층에 대한 직접적인 현금 부조 제공은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들에게 주는 부당한 경품으로, 그리고 납세자로부터 세금 먹는 하마들에게 부당하게 이전되는 것으로 쉽게 공격받을 수 있었다."(265)


"전후 미국 경제의 성장 속도가 느려지고 결국 인플레이션과 스태그네이션이 발생했기 때문에 우파는 우파는 적극적 국가의 혜택보다는 비용에 초점을 맞춘 감세 의제를 지지했다. 복지 및 조세 국가의 구조는 국내외 정치경제의 변화에 대응하는 민주당의 능력을 제한하기도 했고, 공화당─보수파가 점진적으로 장악해갔던─이 납세자들의 이익에 대한 대중적 대변자로서 스스로를 혁신하도록 해주기도 했다. 자유주의 복지국가의 상당 부분이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체감되지 않았기 때문에, 민주당의 자유주의 세력은 벤 와텐버그가 '노동자, 노조원'을 대신해서 1967년 린든 존슨에게 제기한 골치 아픈 질문─〈최근에 나를 위해 당신은 무엇을 했죠?〉─에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없었다." "1970년대 진보적 조세정치의 실패와 '감세 정당'으로서의 공화당의 등장은 결국 중요한 것은 사회급여 체계의 구조─즉 수당이 어떻게 전달되고, 그 비용은 어떻게 감당하고 배분하는지─임을 상기시켰다."(268-9)


"미국인들은 기본적인 시민권으로서 연방정부에게 더 많은 서비스를 요구하지만, 이를 위한 징세는 원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세력은 이러한 이중적 요구를 낮은 조세율과, 새로운 경제 안정과 기회 체계에 대한 접근을 포함하는 사회 협약을 도입함으로써 조정했다." "이들 자유주의 국가 건설자들처럼, 보수주의 세력은 그들의 사회 정책 의제를 발전시키는 데 복지가 유용한 도구임을 발견했다. 자유주의 세력이 사회 정책에 대한 새로운 투자와 새로운 복지국가 제도의 창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복지 실패를 활용했다면, 보수주의 세력은 복지국가 자체를 공격하기 위해 복지의 '실패'를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화당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의제가 현대 미국 정치의 근본적인 딜레마에 빠졌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과거의 자유주의 세력과 마찬가지로, 보수주의 세력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보호와 낮은 개별 세금 부담을 모두 약속한 전후 사회 협약에 의해 그들 스스로도 제약받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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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화 2024-02-15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지는 국가기능의 순기능으로 소외층을 표면위로 올리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복지지향세력이 발생되는 것은 순방향이 아니다. 모두가 표면밑으로 가라앉으면 복지가 종결된다. 이는 복지를 이용하는 세력의 어리석음 때문이라 우려된다. 사회는 복지대상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럼 소외계층은 왜 발생하는가 ? 접근에 뭔가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몰리 는 접근에 다양함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사고를 보여주었다
 
우연을 길들이다 - 통계는 어떻게 우연을 과학으로 만들었는가?
이언 해킹 지음, 정혜경 옮김 / 바다출판사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옮긴이 서문


"우연이라는 것은 본디 인간에게 미지의 존재로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인류가 그러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여정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한편에는 인간 역시 자연과 마찬가지로 뉴턴주의적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인간이 지닌 존엄성이 침해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전자의 믿음은 합리적 사고와 물리과학의 발달을 통해 얻은 성과가 가져다준 자신감의 발로라면, 후자의 우려는 엄격한 인과적 법칙이 인간이 누려야 할 의지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의 소산이었다." "통계적 규칙성을 규명하려는 일련의 과정에서,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과 인간의 존엄함에 관한 위기감 중 어느 것도, 우연이 길들여지는 과정에서 홀로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감이 아니었다면 인간의 행동으로부터 통계적 법칙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없었을 것이고, 위기감이 아니었더라면 통계적 법칙과 결정론의 연결 고리를 파악하기 위한 시도 역시 약화되었을 것이다."(16)


1 우연을 길들인다는 것


"이성의 시대 내내, 우연은 우매한 자들의 미신으로 불렸다. 우연·미신·우매함·비이성 모두 매한가지였다. 소위 합리적 인간은 이런 것들을 외면함으로써 불변의 법칙을 도구 삼아 혼란을 가릴 수 있었다." "당시는 결정론에 대한 의구심을 지닌 이들이 많은 시기였다. 의지의 자유freedom of will가 끼어들 여지를 갈구하거나, 유기체나 생명의 작용에 있어 개별적 특징을 주장하는 이들이 바로 그런 예이다." "마침내 1900년 경에 이르러서는 우연의 법칙의 득세가 진정한 가능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궁극적인 비결정론indeterminism의 무대가 조성된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모순적이지만, 비결정론적인 여지가 커지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도 커진다. 물리과학에서는 이 점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양자물리학은 자연이 근본적으로 환원 불가능하게 확률적이라는 점을 당연하게 여긴다. 엄밀히 말해 이러한 발견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궤도에 개입하고 수정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을 무한하게 신장시켰다."(22-3)


"필자가 기술하고자 하는 면모들은 대단히 포괄적인 하나의 사건과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활자화된 숫자들의 쇄도avalanche of printed number이다. 국민국가들은 국민을 새롭게 분류하고, 집계하고, 표로 작성하였다." "숫자의 활자화는 표면적인 효과일 뿐이었다. 그 이면에는 새로운 분류 및 계량화 기술, 그리고 그러한 기술을 전개할 수 있는 권위와 연속성을 지닌 새로운 관료제의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관료제는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사실들을 새로이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을 집계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알맞게 분류할 수 있는 범주가 만들어져야 했다. 사람들에 대한 데이터의 체계적인 수집은 우리가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방식은 물론 가까운 이웃을 설명하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러한 체계적인 수집은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선택하고, 무엇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심도 깊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24-5)


"확률은 4중의 성공, 즉, 형이상학적·인식론적·논리학적·윤리학적인 측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형이상학은 우주의 궁극적 상태에 관한 과학이다. 형이상학에서, 양자역할의 확률은 보편적인 데카르트의 인과율을 대체해 버렸다. 인식론은 지식과 신념에 대한 이론이다. 오늘날 우리가 증거를 활용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며, 실험을 설계하고, 신뢰성을 평가하는 일은 확률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논리학은 추론과 논증의 이론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순수 수학이 제시하는 공리에 대해서는 연역적 해법 또는 종종 반복적인 해법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매우 실용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통계적 추론의 논리를 때로는 엄밀하게, 때로는 약식으로 활용한다. 윤리학은 부분적으로는,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이다. 확률은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는 없지만, 관료들이 내리는 모든 합리적인 선택의 근거에는 확률이 자리하고 있다. 견해에 객관성을 덧칠함으로써, 의사결정은 계산으로 대체된다."(27-8)


2 숙명론의 시대


"《도덕형이상학의 기초》에서 임마누엘 칸트는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예외 없이 자연 법칙에 의해 결정되어야 함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당연시했다. 자연의 필연성과 인간의 책임감의 충돌로 인해 자유의지는 절박한 문제가 되어 갔다. 한 가지 해결책은 데카르트의 사상을 광범위하게 추종하는 것이었는데, 데카르트의 주장은 마음과 육체, 다른 말로 하면 사고의 실체와 공간에 실재하는 실체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공간적 실체에 벌어지는 모든 것은 어김없이 법칙을 따른다. 따라서 모든 공간적-시간적 현상은 필연적으로 결정론적이다. 이는 정신적인 측면에 관해서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여지를 남겨 놓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칸트의 서술은 이러한 생각을 정교화시킨 것이었다. 공간적, 그리고 정신적이라는 두 가지 실체는 인지가능knowable 영역과 불가지unknowable 영역이라는 두 가지 세계로 대체되었다. 자유로운 자아는 실체의 불가지 영역에 존재한다."(42)


"흄이 우연이라는 개념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인과론과 필연성에 대한 유명한 회의론자였던 그는 숙명론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현상계의 물체들의 움직임들은 필연적이며, 이들 물체들의 움직임 간의 상호 교류 ··· 그리고 물체 간의 끌어당김과 상호 결합들을 보면, 이들 물체들 사이에 상호 무관성 내지는 자유로움이 존재한다고 볼 만한 최소한의 근거조차 없음은 널리 인정된다. 모든 물체는 어느 정도는 절대적인 숙명과 그 운동 방향에 의해 결정된다. ··· 따라서 물질의 움직임은 필연적 움직임에 대한 실증적 예로 간주해야 한다.〉" "계속해서 흄은, 뉴턴이 공허한 추정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주장했다. 즉, '뉴턴은 자연이 지닌 미스터리를 둘러싼 베일을 일부 걷어낸 것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기계적 철학의 단점 역시 명백히 했으며, 따라서 그는 자연이 지닌 비밀들을 그전에도 언제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남아 있을 불분명의 영역으로 복구시켰다'는 것이다."(45-6)


3 공적인 아마추어, 비밀스런 관료


"17세기 확률의 등장에 대한 증인으로서 라이프니츠는 프로이센 공공 통계의 철학적 대부였다. 그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는 다음과 같았다. 프로이센 국가의 성립이라는 과제가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에서, 국가의 힘에 대한 정확한 측정치는 바로 그 인구이기에, 새로 세워질 프로이센 국가는 자신의 힘을 파악하기 위하여 중앙정부에 통계 부서를 보유해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프로이센 국가의 건국은 통계국의 설립과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종류의 통계 문제에 왕성한 관심을 가졌으며 질병·사망·인구의 문제에 활발히 매진했다. 그는 56가지 부문에서 국가를 평가하는 방법을 제안했는데, 이 평가법의 항목에는 성별 및 사회적 신분에 따른 인구,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 남자의 수, 결혼적령기 여성의 수, 인구 밀도와 연령 분포, 유아 사망률, 기대 여명, 질병의 분포와 사망의 원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집계표 작성은 오늘날에는 일상화된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미래적인 것이었다."(55-6)


4 통계 전담 기관의 등장


"프로이센은 훗날 대세로 자리잡게 될, 그러나 당시에는 예외적이었던 존재를 출범시켰다. 통계국은 정부 내 여타 모든 부서에서 필요로 하는 숫자의 제공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804년에, 도나는 1809년에, 범용적인 통계국은 새로운 유형의 방향을 제시하는 새로운 종류의 일꾼으로 구성된 새로운 유형의 조직체라는 생각을 희미하게나마 가지고 있었다. 전통적이고 현실적인 장관들이었던 슈타인과 알텐슈타인이 선호했던 것은 엣 질서를 간결하게 가다듬은 버전이었다. 그들은 통계국은 재정부를 돕기 위한 기관이라고 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정부의 조직 체계는 유지되어야만 했으며, 모든 기관들을 위해 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부서란 적합하지 못한 것이었다. 국왕과 도나가 이겼다. 프로이센은 기초부터 다시 세워지고 있었고, 새로운 유형의 기관이 존재할 여지가 생겼다." "(점차 각국에 설립된) 통계국들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 즉 무수한 숫자를 통해 실체가 표현되는 유형의 인간을 탄생시켰다."(75, 82, 86)


5 이성의 감미로운 지배


"도덕과학science morale은 우리가 윤리학이라 부르는 고상한 그 무엇이 아니다. 도덕과학은 풍속moeurs·관습·사회에 대한 과학으로 이해하는 편이 맞다." "뉴턴은 천체역학과 유리역학rational mechanics을 제안했다. 프랑스인은 뉴턴의 주장들 중 일신론一神論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받아들였다. 로크의 사상 이론은 인간의 마음과 이성의 능력에 대해 연구했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수많은 주요 철학자들은 '관념론자'라는 표식, 즉 특정 이데올로기의 이론가나 지지자가 아니라 사상 그 자체에 대한 옹호자, 즉 로크주의자Locke-ites라는 딱지를 열렬히 환영했다. 도덕과학의 개념이 발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토대에서였으며, 태동 당시의 도덕과학은 개인과 사회에 대한 합리적 이론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콩도르세가 그려낸 도덕과학은 훗날 두 가지 다른 영역으로 발전한다. 하나는 역사로서의 도덕과학이며 다른 하나는 확률, 통계학, 결정이론, 비용편익분석, 합리적 선택이론, 응용경제학 등으로서의 도덕과학이다."(93-5)


"1776년에 튀르고는 젊은 뒤빌라르 같은 이들을 종합감사관실에 임명했다. 튀르고가 물러나자 뒤빌라르는 재정부로 자리를 옮겼다. 뒤빌라르는 혁명 8주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아남았다. 후에 그는 원로원으로 옮겼으며 1805년에는 내무부의 통계청으로 갔다. 1812년에 그는 다시 승진하여 종합편성국의 수장이 되었다." "콩도르세는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에서 살아남지 못했지만, 뒤빌라르는 살아남았다. 내무부에 몸담고 있는 동안, 뒤빌라르는 제너의 천연두 백신이라는 희대의 발견이 보험에 미칠 영향에 대해 최초로 심도 깊은 분석을 실시했다." "인구에 대한 뒤빌라르의 수학적 통계 논문은 사망률 법칙에 관해 체계적 분석을 수행하는 데 있어 단순한 연령뿐 아니라 성, 혼인 상태, 그리고 주소 및 직업과 같은 가변적 요인을 프랑스 최초로 활용한 시도였다. 그와 같은 질문은 조만간 숫자들의 쇄도를 불러일으킬 서기·통계가·계산가·출판인과 같은 새로운 계층을 탄생시켰다."(106-7)


6 질병의 양을 재다


"질병의 법칙에 대한 가장 저명한 저자는 잉글랜드-웨일즈 호적본서의 창립자였던 윌리엄 파William Farr였다." "파는 질병에 대한 그의 연구를 토대로 이 분야에 대한 권위를 확립하여, 1830년대의 공제조합들에 대한 논쟁에 기여하였다. 파는 질병통계에 대한 개별 분석을 수행했을 뿐 아니라, 1837년경에는 자신이 편집했던 잡지 중 하나에서, 질병의 빈도와 더불어 '질병의 상대적인 기간과 위험을 측정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는 방법론을 다룬 소논문을 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파는 병원 기록의 시대를 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질병분류학nosology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질병분류학에 따른 집계법이다. 파는 자신이 수행한 활동에 어울리는 새로운 단어를 고안해 내었으니, 바로 질병측정학nosometry이었다. 이는 질병분류학을 활용하여 '측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단어는 우리에게 새로운 분류와 새로운 집계법은 서로 불가분임을 상기시켜 준다."(121-2)


7 과학의 곡창


"필자는 기본 상수들constants은 자연의 기본 법칙에서 고정된 값을 가지는 인수 역할을 지닌다는 관점에서 기술했다. 이는 배비지보다 최근의 개념이다. 배비지의 상수들은 수많은 '법칙들'을 서술하는 데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만약 투표자의 소득이 비슷한 법칙을 따른다면···'이라고 그가 쓴 데서 보듯, 배비지는 법칙이라는 단어를 단지 규칙·규칙성·획일성을 의미하는 데 사용했다. 법칙에 대한 배비지의 관념에서 우리는 그를 베이컨주의자, 실증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영역,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통계적 법칙에 대한 초기 개념의 모든 영역에서 법칙화를 수행했던 것은 바로 베이컨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수리적 데이터를 수집하면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본연의(그리고 미묘한) 주장에 대한 해석들 중 가장 단순화되고 가장 베이컨의 품격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작업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데이터가 많아질수록, 귀납적 결론을 더 많이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135-7)


8 자살은 일종의 정신이상이다


"에스퀴롤이 살았던 시기(19세기 초)는 그의 직업(의사)이 거침없이 부상하던 시기였다. 그는 자살을 감시·치료·통제·판단할 권리가 의사에게 있다는 의견을 비쳤다. 자살은 더 이상 아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같은 도덕주의자와 성직자들의 수중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에스퀴롤은 자살이 '임상의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는 매우 맹렬한 권리 주장이다. 에스퀴롤은 암묵적인 삼단논법을 펼치고 있었다. (1) 정신이상은 의사의 영역이다. (2) 자살은 일종의 정신이상이다. 그러므로 (3) 자살은 의사의 영역이다. 에스퀴롤에게 전제 (1)은 탄탄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자살이 일종의 정신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자살을 의학의 영역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이론은 여타의 정신이상이 대부분 그러하듯 자살자들은 '편집광들'이었다는 것이다. 에스퀴롤의 이론과 자살의 집계는 서로 협력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141-2)


9 입법철학의 경험적 근거


"1829년에 게리는 교육과 범죄에 대한 '비교 통계학'을 공동 연구로 수행한 바 있었는데, 그 결과에 대한 확장이 바로 그의 첫 주요 연구인 1832년의 도덕 통계 연구였다. 일반적으로 교육은 범죄를 예방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자연히, 노동계급의 퇴화와 무지가 바로 통계학자들이 범죄의 성향penchant au crime으로 부르던 것의 원천이라는 추정이 제기되었다. 게리는 이러한 가설을 반박하기 위해 오늘날 순위순서 통계량rank-order statistics이라 불리는 것을 내놓았다." "그 결과, 교육수준이 높은 지역일수록 범죄율도 높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러한 결론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는 오래된 용어인 '도덕과학'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수행했던 것은 도덕분석moral analysis이었다. 이는 사실과 가치를 구별하는 실증과학이었다. '사회에 관계된 계량화된 사실만을 진술함으로써 도덕분석은 입법철학과 경험적 근거를 형성한다.' 콩도르세가 꾸었던 사회수학의 꿈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164-6)


10 확실함도, 상세함도, 통제도, 가치도 없는 사실들


"당시에 통계치는 널려 있었지만 결정적인 통계적 추론은 거의 없었다. 통계는 과학이 아니라 수사학의 도구였다. 숫자에 대한 모든 열망에 대하여, 통계는 기대만큼 즉각적인 효과를 보여 주지는 못했다." "1828년 초, 시비알레는 결석 수술법에 대한 비교연구를 몽티용 상 측에 제출했다. 마치 배심원단 같았던 수학자들(심사위원들)은 거만하게도, 그와 같은 연구들이 '확실함이 없고, 상세한 설명도 없으며, 통제되지 않았으며, 가치가 없는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통계는 '무한의 다수'로 간주할 수 있는 부류의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으나 '의학의 경우는 이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실용의학에서 확률을 계산하기에는 사실이 너무 빈약한 것은, 보다 많은 데이터를 얻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이한 개인에 대해 많은 데이터를 얻어 보았자 다루고자 하는 환자의 특정 사례와는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학자들은 이러한 조심스런 관찰에 대해 오만할 정도로 무관심했다."(177-9)


11 어느 다수결 규칙을 따를 것인가?


"사회적 불안정과 개혁의 나온 것이 1808년의 법전이었다. 이 법전 자체는 영속성 있게 지속되었지만, 배심원제는 프랑스 법제에서 가장 불안정한 요소 중 하나였다. 1808년 당시 유죄 선고는 단순 다수결에 의해 이루어졌고, 정치적 소용돌이가 있을 때마다 배심원제는 영향을 받았다." "라플라스는 1808년의 배심원제에는 결함이 있다고 주장했다. 배심원단이 7:5로 단순 다수결에 의해 유죄 선고를 내리는 경우에 오심의 가능성은 거의 3분의 1이라는 '놀라운' 수치이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증언이 옳을 확률이란 증인의 성향이라 할 수 있다. 증언이 옳을 확률은 증언된 사실의 본질과 무관하다." "따라서 라플라스는 단순 다수결을 통한 유죄 선고에 반대했다. 배심원 12명 만장일치에 의한 평결은 안전하나, 아마도 지나치게 안전한 듯하다. 라플라스는 1000분의 1 정도의 오심 확률을 목표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따라서 배심원 9명의 만장일치제가 적절하다고 제안했다."(188-91)


"푸아송이 배심원제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한 것은 1830년 혁명 이후였다." "라플라스에겐 사법 통계자료가 없었던 반면 푸아송에게는 있었다. 푸아송은 오심의 확률이 라플라스가 추정한 것만큼 크지는 않다고 추론했다. 7:5 다수결 평결의 오심 확률은 실증적으로는 라플라스가 8:4 다수결 평결의 오심 확률로 계산한 값과 거의 유사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만약 라플라스의 계산에 근거하여 8:4 다수결 평결에 만족한다면 7:5 다수결 평결에도 만족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국회가 1835년 8월 19일 배심원제를 단순 다수결제로 되돌린 것은 현명한 결정이었다는 증명을 그 해 말에 완료하였다. 1837년에 간행된 배심원제에 대한 그의 저작은 보수적 견해를 수학적으로 옹호한 것이었다. 푸아송의 수학이 지니는 과학적 엄밀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저작은 정보와 통제의 구현 수단으로 의도된 것이었다. 그것은 수학적 연구인 동시에 정치적인 연구이기도 했다."(196)


12 대수의 법칙the law of large numbers


"프랑스에서는 '대수의 법칙'이라는 용어가 굳건히 정착하였으며, 세계에 대한 심오한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회의론자들의 조언과는 반대로, 통계적 법칙은 권위를 인정받았다. 충분히 많은 수의 사건의 경우에서는 규칙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제 이 법칙은 경험에 비추어 점검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사물이 따르도록 되어 있는 방식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대수의 법칙에 대한 수학적 논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대수의 법칙은 형이상학적인 진실이 되었다. 푸아송의 수학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어려웠지만, 그리고 실제 현상에서는 발견되는 불규칙성은 흔히 주장되던 것보다는 훨씬 컸지만, 대수의 법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맹신, 태만, 모호함, 숫자에 대한 혼미, 사회적 통제에 대한 환상, 공리주의자들이 선전 등의 요인에 힘입어, 대수의 법칙(푸아송의 정리 그 자체가 아니라 대량 현상의 안정성에 대한 명제)은 이후 한두 세대 동안은 선험적 진실로 가공되었다."(216)


13 표준적인 가슴둘레


"1830년대 초 일련의 저술에서 케틀레는 '평균인'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평균인'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한결 같은 목소리가 있다. 실제로 평균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균인의 존재에 대한 상식적인 반응은 이렇다." "'평균인'이란 편의상 사용되는 약칭일 뿐이다. 그러나 케틀레에게 이 표본적인 인간은 약칭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첫째, 이 개념은 한편으로는 우생학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 인종의 평균적인 특질을 보존하거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정책을 도입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둘째, (보다 학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평균 키를 추상적 개념, 즉 산술적 결과로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느 집단에 관해 '실재하는' 특징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일본인의 수명은 매년 증가해 1988년에 일본은 지구상의 최장수 국가에 해당할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일본인의 수명을 두고 일본인이 삶과 문화에 실재하는 특징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221-3)


"1844년, 케틀레는 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 단계로 나아갔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물리적 양을 일정한 확률오차를 수반하면서 측정하는 법에 대한 이론을, 집단이 지닌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특질의 측정에 대한 이론으로 변모시켰다. 집단의 특질들 역시 물리적 양과 형식적으로 동일한 기법에 의해 계산될 수 있었기에, 집단의 특질들은 이제 실재적인 양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우연을 길들이는 데서 중대한 단계이다. 이전에는 거대한 규모의 질서에 대해서만 묘사하던 통계적 법칙은 자연과 사회의 기저에 내재된 진실과 원인을 다루는 법칙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즉, 집단의 신장 등의 분포가 한 개인이 지닌 값이 오차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추정되었을 때 나타나는 분포와 같다면, 우리는 집단의 평균이 해당 집단의 특징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만약 집단에 관해서 만족스러운 정규분포 곡선이 나온다면 한 개인이 아니라 전체의 특징에 관한 하나의 진정한 값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223-5)


14 사회가 범죄를 예비하다


"1836년 경, 케틀레는 '도덕적 질서는 통계학의 영역에 들어오게 된다. ··· 이는 인간 본성의 완벽성을 믿는 이들에게는 낙담할 만한 사실일 것이다. 자유의지란 오로지 이론 속에서만 존재할 것처럼 보인다'고 적었다." "그러나 1926년에 시작된 양자역학의 두 번째 흐름은 미시세계의 근원적 법칙이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을 정도로 확률적임을 입증했다." "양자물리학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숙명론적이고 순수하게 결정론적인 법칙이 아니다." "1830년대와 1930년대의 감수성이 보여 주는 대조는 역설적이다. 1930년대에는, 자연 법칙이 확률적이라는 확신은 세상이 자유의 안전지대라는 점을 보여 주는 것으로 간주됐다. 동일한 확신이 1830년대에는 위와는 정반대로 해석되었다. 즉 만약 범죄와 자살을 관장하는 통계적 법칙이 존재한다면, 범죄인들의 범죄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1930년대에는 확률이 자유의지의 존재 여지를 제공해 주었지만, 1830년대에 확률은 자유의지를 완전하게 배제해버렸다."(237-8)


"케틀러와 파는 모두 19세기 통계학이 지닌 박애주의적·공리주의적 측면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통계학의 중요한 측면이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운명을 향상시키려 했으며, 새로운 통제를 행사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범죄·질병·악덕·불안정을 다스리는 통계적 법칙을 발견하라. 그리고 그러한 법칙들이 적용되는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라. 반면에 게리는 실증주의자였다. 도덕 분석은 분명 입법가들의 결정에 활용될 수 있는 데이터를 얻어내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입법가에게 어떠한 제안을 제시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사실과 가치 사이의 구별은 불가침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케틀레는 최소한 그의 젊은 시절에는 개혁주의자였다. 연간 범죄율은 사회 질서의 '필연적 결과'이기에 입법가들은 이를 개선시키기 위해 변화를 도입해야 한다고 보았다. 파는 자신이 통계 사실을 총합하고 결합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권고를 내릴 의무 역시 지녔다고 생각했다."(243)


"아무리 박애주의적 열정으로 은폐되었다고 해도, 개혁의 진정한 기능은 확립된 질서를 보전하는 것이었다(라고 누군가는 주장할 것이다)." "부유층 역시 체제의 적용을 받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계적 법칙은 계층에 관한 것이다. 통계적 법칙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측정되고, 분석되고, 통치의 논거로 활용되어야 하는 피지배계층인 '그들'이었다. 여기서 계층이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실체이다. 필연적으로, 자신들을 위해서 변화를 필요로 하는 이들은 노동자 혹은 범죄자 또는 식민지 계층이다." "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계층 외에도 우리가 인종이라고 부르는 보다 큰 단위의 계층이 있다. 오늘날 인종이 내포하고 있는 제1의 함의는 피부색이다. 파가 연설에서 언급한 인종이란 전통으로 연결되어 있거나 관습의 공통성이 있는 국민, 종족, 심지어 가족 그룹을 의미했다. '인간은 자신의 인종을 변화시킬 힘을 가진다'고 그는 썼다. 이렇게 우생학이 시작되었다."(245-7)


15 사회에 대한 천문학적 시각


"독일 사상가들은 '규칙성'은 '법칙'이 아니며, 심지어 '규칙'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물론 통계적 규칙성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통계적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자연법칙은 실재하는 원인들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러한 원인들은 개별 사건들에 작용하며 필연적으로 효과를 생성해 내는 것들이다. 라플라스와 케틀레 같은 프랑스인들이 주장한 수많은 미미한 원인들은 통계적 분포를 이루기는 하지만 그러한 분포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분포를 일컬어 법칙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법칙뿐이었다. 따라서 칸트의 후계자들은 케틀레에 맞섰다. 서유럽에서는, 실증주의의 정신은 모든 법칙이 단순히 규칙성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규칙성을 뛰어넘는 원인에 대한 믿음은 형이상학의 시대가 낳은 부조리한 잔재였다. 따라서 통계적 법칙은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반면 동유럽에서는 통계에 대한 '공산사회주의적' 접근과 부합하는 철학을 제공하였다."(257-8)


"엥겔은 '특정 집단에서 매년 거의 동일한 수의 사람들이 자살한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썼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원인이 정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위 사실은 단순한 습관적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법칙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사실이 자연이나 사회의 법칙이 아니라면, 의지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이것이 엥겔의 해답이었다. 원인에 대한 규명 없이 우리는 무언가를 법칙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따라서 자살의 법칙을 이야기할 수 없는 일이다." "(교수이자 사회주의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강단사회주의자들은 개인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방식을 서로 협력하여 선택함으로써 국가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국가가 우선한다는 것이다. 국가 없이 개인이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개인들이 자신을 훌륭한 국민으로 도야할 수 있도록 국가 자체와 제도를 다듬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다. 엥겔이 지휘하던 프로이센의 통계국은 이러한 전일주의적 정치 철학으로 무장한 대변자가 되었다."(260-2)


16 사회에 대한 광물학적 시각


"발자크의 《인간희극》이 그러했듯이, 르 플레의 비전은 인간을 먼저 혼인 상태와 가족 관계에 따라, 그리고는 주거지, 무엇보다도 가계 생활비 규모에 따라 다양한 유형으로 분류하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르 플레의 저작은 프랑스의 부유계층이 아니라 유럽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했다. 또한 그 저작은 중편소설의 형태가 아니라 개별 가족의 지출 규모에 대한 계량적 연구의 형태로 추진되었다. 그것은 케틀레가 사용했던 것처럼 평균치에 대해 파고든 것이 아니라, 박물학자들이 암석 혹은 식물 견본을 패러다임으로 활용하듯이 대표적인 개인을 이용하여 인간 유형의 주요 특징을 보여 주었다. 르 플레는 우랄 산맥의 유목민과 셰필드의 칼장수, 스웨덴의 대장장이와 카스티야의 소작농들을, 그리고 모로코의 목수들과 (오늘날의) 시리아의 마을 거주민들을 묘사하였다." "사회를 이해하려면 단순한 현실의 구성원으로서의 평균인이 아니라 대표성을 띠는 개인에게 시선을 돌리라는 것이 르 플레의 주장이었다."(271-4)


17 우연, 가장 유서 깊은 고귀함


"18세기 잉글랜드의 뉴턴주의자들은 통계적 안정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계몽주의적 신을 언급한 바 있었으나, 그러나 이보다 오래되고 더 변덕스러운 신들, 즉 계몽주의자 흄이 아무 의미가 없는 단어라고 폄하했던 우연을 즐기는 신들이라는 희미한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러한 불씨는 낭만주의에 의해 다시 점화되었으며, 니체에 의해 더욱 거세졌다."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하늘은 '신성한 우연을 위한 무도장', '신성한 주사위와 도박자를 위한 신의 탁자'에 비견된다. 그렇다면 합리성은 어떻게 이 세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예상하듯이, 비이성적인 방식과 우연적인 사건에 의해서였다.' 19세기 말의 철학자였던 니체와 퍼스의 우연·창조·필연성에 대한 관념은 흥미로울 정도로 유사했다. 이 둘은 다른 이들이 질서정연하다고 여기는 이 세계가 우연의 산물이라고 믿었다. 둘 중 누구도 법칙의 존재가 우주의 우연적 특성을 조금이나마 약화시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292-3)


"니체의 사상들 중 하나에 대해 질 들뢰즈가 쓴 간결한 요약이 있다. '한 번 던져진 창조의 주사위는 '우연'의 긍정이고, 그것들이 떨어지면서 형성하는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다. ··· 따라서 니체가 필연(운명)이라 부르는 것은 우연의 소멸이라기보다는 우연 자체의 조합이다.' 여기에는 모든 종류의 주사위 게임이 등장한다. 니체는 목적이라는 개념이 있을 때 비로소 우연이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목적과 이유에 대한 개념을 부분적으로는, 질서정연해 보이는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얻을 수 있다. 우주가 전적으로 우연의 문제임을 알고 있는 이는 목적이라는 허상에 구애받지 않는다." "니체는 우리가 우연에 관해 지금까지 접해 온 것들 중 가장 난해한 철학적 지혜를 터득하였다. 필연성과 우연은 서로 쌍둥이와 같아서, 어느 한쪽도 나머지 한쪽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동전의 앞면이 뒷면을 설명하는 이상으로는 필연성과 우연 어느 한쪽도 나머지 한쪽을 설명해 주지는 못 한다."(294)


18 카시러의 명제


"동적인 결정론, 즉 숙명론이 1872년에서야 진정으로 보편적인 명제가 되었다는 카시러의 말은 옳은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니다." "그렇다면 카시러 테제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첫째, '결정론'이라는 단어는 1850년대 말에서 1870년대 초의 시기에 인과적 필연성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결정론이 이러한 의미를 지칭하게 된 것은 특수한 관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프랑스의 베르나르와 독일의 뒤부아-레이몽은 생리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생기론을 거부했으며 모든 생명 과정은 화학반응과 전기(등등)의 작동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독자는 라플라스가 필연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외연의, 공간상의, 물질의 실체라는 범위에 한정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라메트리는 라플라스와는 달리 정신의 영역까지 이야기하였다!)." "새로운 스타일의 결정론은 라플라프보다도 교만했다. 이 새로운 결정론은 정신 활동이 일어나는 장소인 뇌를 지배하려는 의도를 지녔다."(306-8)


"1874년 에밀 부트루는 자연 법칙이 지니는 우연성에 대해, (즉, 결정론의 퇴색과 관련된) 주목할 만한 논문을 출간했다. 이 논문의 바탕을 이루는 교의는 창발주의emergentism와 계층적 구조a hierarchy of structures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층들을 보면, 가장 아래층은 원소의 원자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다음 층에는 분자의 구조가 있겠지만 부트루는 원자들에 적용되는 법칙들이 화합물에 적용되는 법칙들을 결정짓지는 않을 수 있다고 추측하였다. 이러한 화합물들이 따르는 법칙들은, 심지어 유기 화합물들을 지배하는 법칙들이라 하더라도 동식물 생명체의 법칙들을 결정짓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생명체의 법칙들이 이성적인 존재를 지배하는 심리적 법칙들을 결정하지는 않을 수 있다. 생명체의 법칙들과 심리적 법칙들은 사회의 법칙들을 결정하지는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을 이루는 계층의 각 단계에는 우연성이 존재하며, 하위에 위치한 간단한 구조가 보다 상위의 새로운 법칙을 결정하지는 않는다."(312-3)


# 창발주의 : 하위 계층의 요소에는 없는 특성이나 행동이, 이들이 합쳐진 상위 계층에서 창조적으로 돌연히 발현된다는 주장


"부트루의 가장 유명한 학생은 뒤르켐이었다. 뒤르켐의 《자살론》은 전체로서의 사회가 단순한 개인의 총합이 아니라고 역설하였다. 전체는 부분들보다 크다. '이러한 공리는 전체는 그것을 이루는 부분의 총합이 아니라는 르누비에의 주장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사회의 법칙은 우주의 힘 또는 전기의 힘과 유사한 면이 있으며, 개인의 심리 상태가 지니는 특징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원리들이 아니라 그보다 거대한 원리들로부터 나온다. 창발주의는 순수한 물리적 세계의 결정론적 토대와 사회 법칙들 사이에 충돌을 야기하지 않으면서 통계적 법칙을 흡수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젊은 시절(1885년)의 뒤르켐은 이미, 사회학은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과학이다. 자연에는 세 가지 세계가 있다. 물리적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 위에 사회학적 현상이 존재한다'는 부트루의 가르침에 찬동했다. 1897년에는, 자살의 안정성을 야기하는 집단적 힘을 일컬을 때도 '독자적'이라는 어구가 사용되었다."(315-6)


19 '정상 상태'의 탄생


"'병리성'은 질병이라는 개념만큼이나 오래된 듯하지만 1800년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질병은 신체 전체가 아닌 개별 기관의 속성이 되었고, 병리학은 병자가 아니라 건강하지 않은 기관을 연구하는 학문이 되었다." "병리학자들에게 정상이란 이러한 개념의 역으로부터 나왔다. 병적인 기관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 경우, 이를 정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는 병리성의 개념이 우선이고 정상은 병리성의 반대 개념으로서 부차적으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콩트가 브루새의 위대한' 원리'라고 칭했던 것이 이러한 관계를 뒤집어 놓았다. 병리성은 정상으로부터의 이탈로 정의된 것이다. 모든 변이는 정상 상태로부터의 변이라는 관점에서 특징지어졌다." "기준과 표준에 대한 아이디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지만, '정상적'이라는 단어가 현대와 같은 용도로 사용된 것은 의학적 맥락을 통해서였다. 중요한 것은 표준은 충족되거나 충족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는 점이었다."(328-30)


"콩트가 정상성의 개념을 (사회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영역에 도입하였을 때, 그는 또 다른 변형을 초래했다. 정상은 더 이상 일상적인 건강 상태를 의미하지 않았다. 정상이란 것은 우리가 노력하여 달성하고 에너지를 바쳐야 할 정화된 상태를 의미하게 되었다. 요컨대 진보와 정상 상태는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진보란 다름 아니라 질서의 발굴이다. 즉, 진보는 정상 상태에 대한 분석이다'라는 것이다." "'실증주의 학파는 지난 3세기에 걸친 혁명적 투쟁 기간 동안, 지식과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계층과 구성원들의 진정한 정상 상태를 가능한 한 최대로 달성하기 위해 준비를 다져 왔다'고 콩트는 말했다. 따라서 콩트는 정상이라는 아이디어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대치 상황을 표현했던 인물,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러한 대치 상황을 이끌어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현존하는 평균으로서의 정상과 우리가 진보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완벽함의 표상으로서의 정상 사이의 대치 상황 말이다."(335-6)


20 우주의 힘만큼이나 실재하는


"골턴과 뒤르켐은 각자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졌으며 정상과 비정상을 새로운 법칙의 실재와 긴밀하게 결부시켜 생각했다. 물론 뒤르켐의 창발주의 철학은 골턴에게는 이질적이었으며, 정상과 관련하여 각자가 핵심으로 생각하고 집착했던 관점은 결코 서로 동일하지 않았다. 실재적이고 완전한 법칙으로 골턴이 취급했던, 집단에 관한 정규분포는 뒤르켐이 집단에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우주의' 힘을 다스리는 법칙과는 다른 종류의 법칙이다." "정상의 반대는 무엇인가? 당연히, 비정상성이다. 그러나 골턴에게 정상의 특징은 정규곡선을 통해 묘사된다. 비정상은 평균으로부터 강하게 벗어난 것이다. 뒤르켐에게는, 비정상은 병적인 것으로 불렸다. 결국 비정상은 병든 것이다." "매우 간략화시켜 말하자면, 뒤르켐은 도덕적인 것과 정상적인 것을 동일시하였다. 골턴에게는 정상은 좋은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이었다. 어떤 극단적 존재들은 병적인 것이 아니라 우수한 것이었다."(354-5)


21 통계적 법칙의 자율성


"케틀레로부터 골턴은 오차곡선을 이용해 평균에서 편차를 생각하는 방식을 배웠다. 케틀레가 중심 집중 경향, 평균에 대해 생각하던 대목에서 골턴은 항상 예외에 몰두했으며 분포의 꼬리와 분산을 생각했던 것이다." "골턴은 평범함으로의 복귀는 정규곡선이 가져오는 수학적 귀결이라고 보았다. 즉, 어떤 집단이 정규분포를 따르고 있다면 다음 세대 역시 이전과 대체로 동일한 평균과 분산을 지닌 정규분포를 따를 것이되, 다만 나중 세대에서 비범한 형질에 해당하는 멤버들은 대체로 이전 세대에서 비범한 형질에 해당했던 멤버들의 후손은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다." "골턴은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골턴은 (1) 현상을 설명하는 동시에, (2) '독립적인 사소한 원인들'을 배제시키는 일석이조를 거두었다. 그는 수많은 형질들이 보여 주는 정규분포를 자율성을 지닌 통계적 법칙으로 간주했다. 통계적 법칙은 이제 성숙한 세계로 접어들었다. 골턴은 우연이 길들여졌다고 보았다."(364-8)


"《과학 문법》을 저술한 피어슨은 골턴 이전의 모든 이들이 상관관계의 분석을 빠트렸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마음 속에 자리한 두 가지 다른 문제를 숙고하던 골턴은 상관관계의 개념에 도달했다. A는 B를 일으키는 유일한 원인이 아니지만, B를 낳는 데 기여한다. 그 수가 많건 적건 간에 B에 작용하는 다른 원인들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일부에 대해서는 우리가 모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모를 수도 있다. ··· 부분상관관계에 대한 이러한 측정은,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한 오래된 인과관계를 대체할 뿐 아니라 우주에 대한 우리의 시야에도 깊은 영향을 미칠 상관관계라는 광대한 부류를 낳은 기원이었다. 자연과학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인과관계의 개념은 산산조각으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 그 이후로 우주에 대한 철학적 관점은, 우주는 서로 완벽한 상관관계, 즉 절대적인 인과성에는 도달할 수 없는 변량들이 서로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는 시스템이라는 견해를 지니게 되었다.〉"(372-3)


22 프로이센 통계학의 한 장면


"1851년 노이만은 피르호의 의학지에 〈1846년 통계국 보고서로 본 프로이센 국가의 의학 통계〉라는 연구 한 편을 출간했다. 서두는 놀라운 명제로 시작했다. 굵은 활자체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공중보건의 관리는 국가의 의무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지니고 인간이라는 종의 일원으로서 동등한 자격을 지닌다는 정신에 입각하고 있다. 국가의 유일한 목적은 그 구성원들의 복지인데, 왜냐하면 국가는 동등한 자격을 지닌 인간들로 구성된 유기적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정치과학의 진정한 취지와 목적은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본성의 법칙에 의거하여 인간의 정상적인 발전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대중의 번영을 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새로운 윤리적 세계관'을 낳는다. 노이만은 계속해서, 훌륭한 보건은 개개인의 완전한 발전에 필수적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전제로부터, 국가는 시민을 위한 의료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의학은 사회과학이다.'"(378)


"노이만의 《유대인의 대량 입국이라는 신화》는 1880년에 제2판이 나왔다." "당시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은 독일 동쪽으로부터 엄청난 수의 유대인들이 입국하고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한층 증폭되었다. 선동적인 소책자들은 갈리시아와 같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북부지역과 러시아에서 유대인들이 엄청나게 입국하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그들은 슐레지엔, 포젠, 그리고 동프로이센 등의 동부 지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입국이 독일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독일인의 특징은 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소책자들은 악의적인 익명의 저자가 쓴 것이었지만, 이들 중 어느 한 시리즈는 베를린 최고의 역사가이자 신랄한 학자 겸 정치가인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가 쓴 것이었다. 노이만은 이러한 (반유대주의에 기초한) 아우성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최소한의 '사실', 즉 독일로의 유대인 대량 입국에 대한 '통계적 공리'를 검증하는 데 전념하였다."(382-3)


"뵈크의 베를린 통계국이 반유대주의의 유행에 대해 보인 반응은 엥겔의 프로이센 통계국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뵈크의 1880년 연감에는 유대인의 입국에 관해 신문이 늘어놓는 무지한 불평불만을 조롱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이 연감은 '통계에 대한 부적절하고 부도덕한 악용이 반유대주의 동요를 관통하고 있다'고 썼다. 노이만은 그의 책 제3판에서 뵈크의 '양식 있음'에 대한 감사를 표시했다. 엥겔은 《프로이센 왕립 통계국지》에 무기명으로 발표한 비평에서 뵈크의 베를린 통계국이 발행한 연감과 새로 설립된 제국 통계국에서 발행한 연감을 논했다. 이 비평은 제국 연감의 객관성이 모두에게 모범적인 사례라고 평가하였다. 뵈크의 연감은 일간지의 보도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저널리스트들은 현재의 사건을 다루지만, 통계국은 후대뿐 아니라 행정가, 입법가, 상인들을 위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장차 통계학자들은 정치와는 무관하게 활동하도록 하자는 것이 위 비평의 주장이었다."(390)


23 우연이 지배하는 우주


"퍼스는 결정론을 부인했고, 세상이 결정론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에 의혹을 품었다. 그는 배비지의 자연 상수가 지닌 진정한 값을 확증하려고 애쓰는 집단에서 일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상수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상수라는 것들이 지닌 숫자는 우리가 점차적인 과정을 통해 정착시켜 가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귀납적 학습과 추론을 단순히 통계적 안정성의 관점에서 설명하였다. 기술적으로는 그는 실험 설계에서 임의화randominzation의 방법을 의식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즉, 그는 보다 예리한 질문을 제기하고 보다 유용한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생성된 우연이 지니는, 법칙과도 같은 특징을 활용하였다." "그는 확률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빈도주의적frequentist인 접근법을 가지고 있었으나, 또한 증거가 지닌 주관적 중요성(log odds)의 측정법을 개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환원 불가능하게 확률적인 우주를 상상했다."(395)


"주목할 만한 것은 확률에 대한 퍼스의 개념이 아니라, 그가 그것을 논증의 건실함과 연계했던 방식이었다. 그 아이디어는 1866년 10월 31일 보스턴 강연에서 이미 선을 보였다. '증거로부터 가능성이 나오는 것은 언제나, 거짓보다는 진리를 더 자주 낳는 과정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거짓보다는 진리를 더 자주 낳는 것으로 알려진 모든 과정은 가능성을 낳는다.' '거짓보다는 진리를 자주 가져옴'. 이것이 바로 귀납 및 연역 논리에 대한 퍼스의 이해를 구성하는 핵심이다. '논리는 논증을 검증하는 데 필요한 과학이다.' 이는 개개의 논증을 검증하기보다는 논증의 속genus을 숙고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논증의 전제가 사실이면 그 결론은 언제나 참이 되는 속의 경우, 그 논증은 '논증적'demonstrative이다. 논증의 전제가 사실이며 그 결론은 대체로 참이 되는 속의 경우, 그 논증은 단지 '개연적'probable일 뿐이다. 양자의 경우 모두, 타당한 논증은 '진리 생성적 성격the truth-producing virtue'을 지닌다."(412-3)


# 논증의 속genus : 비슷한 논증의 집합


# 3가지 종류의 추론

1. 연역법 : 전제가 참이면 결론은 반드시 참이다.

2. 귀납법 : 사실 A가 무수히 반복적으로 관찰될 경우 가설 B가 사실로 도출된다.

3. 상정논법(abduction, 가설) : 전제가 참이라도 결론이 반드시 참이라고 할 수 없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사실을 명료하게 인식하게 해주는 패턴이다.

※ 최선의 설명에로의 추론

 1-1. 특이한 사실 A가 관찰되었다.

 2-1. 만약 가설 B가 참일 경우, 사실 A는 이상하지 않다.

 3-1. 따라서 B가 참이라고 '상정'할 만한 이유가 있다.


"퍼스는 사람들이 어떠한 견해에 대해 합의에 이르게 된다면 그 견해가 바로 진리라고 가르쳤다. 일찍이 유명론적인 관점에서 그는 진리란 우리가 믿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썼다. 나중에는, '만약 진리가 만족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현재의' 어떠한 만족에도 진리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근원적이며 회피할 수 없는 쟁점에 대한 검증을 거친 이후에도 최종적으로 '발견될' 만족에만 진리가 있다고 할 것이다'라고 썼다. 이는 유명론에서 실재론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통상적인 모습이며, 확률은 일련의 사건에서 해당 사건의 상대빈도라는 관점으로부터 확률은 '지향성'이라는 관점으로 전환이 이루어진 것과 상응한다." "〈공동체가 어떠한 질문에 대한 불변의 결론을 합의로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을 확신할 수는 없다. (···) 기껏해야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특정한 문제에 심혈을 기울인다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결론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 정도이다.〉"(419-20)


"우연이 길들여졌다고 하면, 이성에게 위안이 되는 것인가? 형이상학적 우연은 더 이상 비밀스런 환희를 위협하거나 제공하지는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통계적 법칙, 즉 물질의 가장 미세한 입자 위에 자그맣게 새겨진 평균의 법칙에 의해 안전해진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퍼스는 첫째, 둘째, 그리고 셋째라는 식의 서술을 즐겼다. '첫째는 우연이고, 그다음은 법칙이며, 어떤 기질을 가질 경향은 셋째이다.' 이것은 우연이 통계적 법칙에 의해 소멸된다거나, 연속적인 주사위 던지기를 통해서 우리가 흄이 주장한 습관이라는 저 마음 편한 개념을 다시 상정해 볼 수 있는 세계가 만들어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첫째였던 것은 시간이 지나도 첫째이다. 우리가 우주의 별자리를 보는 경우처럼 무한의 상황에서 주사위가 던져지는 상황이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경우처럼 전적으로 개별적인 특수성의 환경에서 주사위가 던져지는 상황이든, 우연은 감각의 모든 경로에 쏟아져 내린다."(426-7)


# 흄의 습관 : 흄이 귀납법과 인과관계의 필연성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음을 주장하면서 인간이 인과관계를 확립하는 메커니즘으로 제시한 것이다. 즉, 흄은 '원인'으로부터 '결과'에의 '이행'移行이 일어나는 것은 '습관'에 의해서 확립되는 것으로, 여기에 객관적 필연성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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