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가족 - 가족의 눈으로 본 한국전쟁
권헌익 지음, 정소영 옮김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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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냉전의 종식으로 한국전쟁의 실체를 또다른 시각과 차원에서 바라보는 일이 가능해졌다. 내전이자 국제적 분쟁이라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한국전쟁의 성격 외에 탈식민의 한반도에서 또다른 종류의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의 연구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캐나다 역사학자인 스티븐 리에 따르면 1950년대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은 주요하게는 사회를 상대로 한 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이 '마을의 전쟁'이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시기를 〈난데없이 하늘이 무너져 내렸던 때〉라거나 〈천륜도 인륜도 없었던 때〉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표현은 폭력적 수단을 동원한 배타적 정치주권의 정치, 즉 내전의 성격을 띤 한국전쟁이 야기한 사회적 혼란의 강도와 극단적인 인간조건을 말해준다. 천륜에 대한 언급은 도덕성의 위기를 보여준다. 현대 내전이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근본적 인식을 얼마나 철저히 유린할 수 있는지, 그리고 서로 어울려 사는 일상적 삶의 규범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를 말이다."(18-9)


"헤겔의 체계 안에서는 국가의 도덕적 요구와 가족의 윤리적 요구가 둘 다 배제적이다. 국가는 무가치하거나 신뢰할 수 없는 자를 배제하고, 가족은 자체의 본성에 따라 자신과 관련이 없는 자의 기억에는 무관심하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이 두 유형의 배제 사이에서 포용의 강력한 도덕적 실천이 일어난다. 상호 부정과 조직된 상호 간 폭력이라는 두 갈래 길로 몰아감으로써 포위된 하나의 공동체를 완전히 뒤집어놓는 내전이라는 배경이 주어지면 특히 그렇다. 가족의 애도와 기억 행위는 그 윤리적 지향에 충실하기 위해 친구 대 적이라는 지배적 대립구도를 넘어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가 정치공동체의 외적 존재로 여기는 정체성에도 관심을 돌려야 한다. 가족은 더 넓은 시민사회적 행위로 발전해나가지 않고서는 이런 도덕적 목표를 현실적으로 추구할 수 없고, 이 시민적 행위가 보편화되면 국가의 배제적 정치학이 지닌 기존 척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24-5)


1장 코리아의 학살


"한국전쟁에서는 비인격적 폭력과 사적 폭력이 모두 만연했다. 각 지역의 현실 속에서 두 폭력은 너무나 서로 얽혀 있어서 때로 집단기억 내에서 구분이 안 되기도 한다. 최근에 접할 수 있게 된 많은 증언을 보면 공동체 차원의 사적 폭력과 비인격적 정치폭력을 따로 떼어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사적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여전히 같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 폭력의 세부사항을 알아내기도 힘들다. 그런데 비인격적 폭력과는 좀 다르게 사적 폭력의 세부사항이 공동체에서 특히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환경일수록 한편으로 이웃들과 먹을 것도 나누고 아이들도 함께 보았던 전쟁 이전의 먼 기억과, 다른 한편으로 도움이 절박하게 필요했을 때 이웃들이 등을 돌렸던 아직도 생생한 기억 사이의 급격한 단절 때문에 주민들이 괴로워한다. 그 이웃이 혹 친척이기도 해서 제삿날에 모이거나 하면 그런 배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48)


# 비인격적 폭력 : 국가나 다른 정치조직의 권력이 자행한 폭력 // 사적 폭력 : 지역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난 폭력


"1950년 6월 28일에 공포된 대통령령에 따라 국가안보와 관련된 범죄에는 사법절차가 유예되었다. 긴급명령은 적에게 물질적 원조를 하거나 적의 군대와 적 당국에 정보를 제공하거나 자발적 협력을 하는 행위라고 그 범죄를 특정했다. 그런데 이 대통령령이 의회의 승인을 받아 1950년 7월 8일에 공식적인 계엄령으로 선언되기도 전에 이미 경찰과 헌병은 잠재적 부역자라는 혐의로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하고 합당한 재판절차도 없이 처형했다." "이 불운한 수감자와 소위 사상 전향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전쟁 이전에 남한의 예외상태 정치에서 생존한 사람들이었다." "1950년 6월에 공포된 비상계엄은 형식상으로는 이 계엄령과 예전의 다른 비상조치를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실제 반역행위라기보다는 부역 추정자(〈반역이 의심되는 자〉)를 겨냥함으로써 주로 선제적 폭력을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전쟁 이전의 다른 계엄령과 뚜렷이 구별된다."(51-2)


"한국전쟁 동안 민간인에 대한 테러행위는 가해자가 누구인가라는 점에서 유동적이었고 그 성격도 예방적 폭력과 징벌적 폭력 사이를 계속 왔다갔다 했다. 전선이 한반도 남쪽 끝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북쪽의 북중 국경 근처까지 올라가며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조직된 테러행위가 새로이 민간인을 덮쳤다. 양 진영 모두가 그것을 해방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역공동체의 시각에서 보면 그 해방은 전혀 경사로운 일이 아니었고 오히려 극도로 위태로운 상황을 만들어냈다." "전세가 역전되고 또 역전되면서 양쪽의 폭력적 권력에 노출된 양민들은 이념적으로는 대립되지만 제로섬 논리를 억지로 강제한다는 점에서는 구조적으로 동일한 두 세력 사이에서 생존의 공간을 찾을 수 없는 형편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공간을 찾아야만 했다. 양쪽이 공히 상대편을 불법적 권력이자 '반민족 세력'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그 권력을 받아들이거나 존재를 인정하기만 해도 민족공동체를 배반하는 범법행위가 되었다."(63-4)


2장 불온한 공동체


"한국의 전쟁세대라면 〈빨갱이 집안〉이라는 말이 아주 익숙할 것이다. 집안의 가까운 사람 중에 한때 체제 전복적 공산주의자였거나 공산주의 동조자였던 사람, 북한으로의 망명자가 있는 사람에게 〈빨갱이 집안〉은 즉결처분이나 대량학살의 기억, 남은 가족들에게 들씌워진 사회적 오명과 시민권의 제약 등을 환기시키는 무서운 표현이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비규범적인 지위가 그들에게 강요되는 이유는 그들이 규정된 정치질서와 법질서에 반하는 어떤 일을 해서가 아니라, 주어진 가족관계의 차원에서 어떤 특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친족관계란 단지 도덕적·물질적 차원에서 의지할 수 있는 우호와 상호부조의 영역이 아니다. 그들에게 친족의 영역은 오히려 현대사의 진행과 함께 그 중요성이 더해져서, 바깥세상에 만연한 정치적 적대관계가 미시적 형태로 현실화되는 장이면서 또한 사회적 낙인과 존재적 짐의 근원이 되었다."(95-6)


"개별 가족은 자신들에게 강요된 이러한 위태로운 삶의 조건을 여러 임기응변으로 대처했고, 때로는 혈연과 지연을 동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가족이 가까운 친족집단 내에서도 차별과 고립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해야 했다. 설사 가까운 친척이라도 잠재적으로 위험한 정치적 요소와 연루되는 걸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차별은 때로 친밀한 가족집단 내에서도 존재했고, 한 세대의 곤경이 다음 세대의 삶과 전망에 영향을 미치면서 그들의 비규범적 정치지위는 가계 내의 심각한 문젯거리가 되었다. 따라서 전후 한국의 비국민 가족에게 친족이라는 전통적 세계와 현대 시민적 삶의 세계는 너무 얽혀 있어서 그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분리할 수가 없었다." "이는 전후 한국에서 특히 그러했는데 이런 특정한 조건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정치적 시민사회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공동체 관계로부터 생겨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96-7)


"한 개인이 정치권력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규정된 사람과의 친족관계로 인해 공적 세계에서 정당한 구성원으로 인정되지 못할 때, 그 개인에게 민주적 삶이 가능하려면 그 친족관계의 규범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맥락에서 불온한 공동체라는 개념이 사회에 미치는 장악력이 사라지려면 그 개념이 현대 정치적 삶에 설 자리가 없음을 사회가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정치적 사회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과거에는 모두 정치적으로 혼재된 관계망을 공유했다는 인식에 이르러야 한다. 다시 말해 총체적 내전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는 어떤 공동체도 순수한 정치적·이념적 계보를 주장할 수 없다는 인식 말이다. 극단적인 냉전의 이념에서 벗어나 진정한 민주사회로 나아가려면 공동체마다 근대 개인주의 사회의 이상을 추구하는 식으로 그 편협한 영역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을 넘어서 각자의 역사적 계보를 보다 진실하게 사고하는 일이 긴요하다."(100)


3장 분쟁 중의 평화


"'월북자 가족'이란 전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위험한 낙인이었다. 그 범주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가족 사이에 모종의 연결이 있고, 그것이 친족관계에 본질적으로 내포되어 있다고 가정한다. 친족 간 우호라는 순수한 개념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주 정치적인 개념이고 또한 극도로 정치화된 것이다. 육친애에는 어떤 진정성이 있고 이 진정성은 정치적 현실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가정되지만, 동시에 그 의미가 왜곡되어 이념적으로 순수하고 일률적으로 통제되는 사회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 전유된다. 이런 맥락에서 친족 간 우호는 서로 관련이 있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한편으로는 현대 정치권력이 아무리 집요하더라도 그 지배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 어떤 인간관계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점을 나타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공동체적 영역이 현대 정치에서 상대적 자율성을 누린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정치적 개입과 통제의 중요한 표적이 되는 것이다."(126)


"반공주의 정치 체제의 이상적 시민은 국가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에 물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치적 존재의 우선적인 원칙으로 삼는 개인이다. 이 이상적 개인에게는 정치적 원칙이 친족의 우애보다 중요하고 필요할 때는 그 우애를 버려야 할 수도 있다. 적을 이롭게 할 수도 있는 불온한 육친애는 끊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원칙이 유효성이 있으려면 훈육해야 할 대상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해야 하고, 따라서 이 정치체의 시민이 정치적으로 물든 친족영역과의 유대관계를 완전히 끊어내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한마디로 이 정치체의 이상적 시민은 공동체적 유대에서 자유롭다고 가정되는 근대적인 의미의 개별주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중적 의미의 공동체적 존재로서, 전통적 친족공동체와 국민국가사회라는 근대 공동체 양쪽과 관련되며 전자를 후자의 이미지로 만들고 유지하는 일에 전념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126-7)


4장 연좌제


"연좌제라는 유사법제도에서 특히 놀라운 점은 이 정치관행의 규율권력이 친족조직 자체에 맞서 작동하면서도 그 내부에서 작동할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국가가 사회를 통제하는 데 효과적인 훈육기술인 것이다. 하지만 이 현대 규율기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개채화되고 자율적인 주체보다는 관계적이고 상호구성적인 인격체가 필요조건이 된다. 곧 기존의 사회학과 인류학 문헌에서 일컫는 근대적 개인이라는 철학적 개념과 구별하여, '도덕적 인격'(moral person)으로 일컫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정치제도이자 형벌제도인 연좌제의 저변에 깔린 사고방식은 근대 사회사상의 전통에서 생소하지 않다. 제도가 규율의 대상으로 삼는 존재가 개별화되지 않고, 주변의 친밀한 도덕적 관계망에서 개념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선물 같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를 마주하는 자아는 철학적 의미의 주권적인 단독자가 아니라 사회관계에 근거한 관계적 주체가 된다."(137-8)


"하지만 사회학에서 많이 언급되는 도덕적 인격이라는 개념과 연좌체 체제에 포위된 도덕적 주체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들이 있다. 원래 근대 입헌주의는 집단책임제와 같은 관행을 형법의 영역에서 추방하는 데 그 토대를 두고 있는데, 냉전시대의 한국의 연좌제는 근대 법치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근대법의 환경에서 국가의 권력이 도덕적이고 관계적인 인격을 전용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연좌책임의 정치는 개인의 책임 원칙을 시금석으로 하는 근대법의 환경에서 그것을 무시한 채 만개했다. 국가가 훈육하는 대상이 (형식면에서) 개인이고 (실제로는) 도덕적 인격이라면, 이 질서에 도전하는 행위 역시 정치적 영역이나 인간관계적 영역 중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이중적 성격을 지닐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는 관계적 주체가 그 존재 그대로 자율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투쟁은 그 자체가 개인의 자유와 이에 근거한 법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과 동일한 것일 수 있다."(138-9)


"푸코의 후기 저작에 나오는 다루기 쉬운 개인, 또는 근대 생명정치(biopolitics) 질서 속의 인간존재는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생명을 좌우하는 국가의 생명정치적 권력의 벡터에 무력하게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무지한 한에서만 자신의 자율성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환영적인 자율주체이다. 이 환영적인 인간주체성이 어떤 역사적·사회적 조건에서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었는지가 푸코의 주요 관심사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 서구의 의학과 생명공학을 연구하는 인류학자를 비롯하여 많은 사회과학 연구자들이 근대 생명정치와 근대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의 길잡이로 푸코의 이론을 많이 원용한다. 하지만 푸코가 근대 개인주체는 근대 권력의 기술적 체계가 수월하게 다루는 존재라는 점에서 근대 개인 주체의 신성함을 비판할 때, 그 비판이 전근대와 근대의 규율체계 사이에 결정적인 단절이 있었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158-9)


"푸코의 논지를 따르면 우리는 근대 사회체계 내에서 개인이 되는 법을 배운다고 말할 수 없다. 반대로 근대 규율체계 내에서 의미 있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환영으로든 혹은 실재로든 먼저 개인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존재는 (자유와 자율성 같은 고유하고 양도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고전적인 개인개념과 상당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에게 근대의 형벌과 규율체계는 공동체적 관계망에서 해방된 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아직 관계적 세계 안의 삶을 국가권력의 벡터 공간에 갇힌 삶으로 대체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는 자율적인 인간주체라는 개념을 역사적 구성물이자 사회적 허구로 보고 이런 환영적 개념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탐구하고자 했다." "즉. 푸코의 이론은 근대로의 이행기에 유럽 형벌체계에 급격한 단절─영혼의 통제에서 신체의 통제로, 사람-공동체의 결합에서 개인-국가의 결합으로─이 있었다는 생각에 기초한다."(158-61)


"전후 한국의 반공주의 정치는 전지구적 '격리'의 최전선에 있었고, 역시 사회적·정치적 관계에 대해 전염병식 견해를 전개했다. 이런 식의 정치는 냉전의 은유적 색 구분(빨강과 빨강이 아닌 색)을 말 그대로 실체적 존재로 밀고 나갔다." "이런 환경에서 반공정치는 이념적으로 순수하고 도덕적으로 규율 잡힌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정치적 통일체 내부에서 〈이질적 존재의 위협〉에 대응하려고 했다. 이 정치적 과정에서 내부의 적이면서 이질적 이념의 전염병 보균자에게 부여된 구체적 형태는 개인이 아니었다. 규율과 처벌의 대상은 홀로 존재하는 개인의 몸이 아니라 그 개인을 도덕적 인격으로 만드는 촘촘한 관계망이었다. 처벌이 관계 자체와 관계 속의 몸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애초에 피의자의 몸은 홀로 될 수가 없었다. 따라서 피의자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염된 관계적 몸에서 자신을 떼어내던가, 아니면 관계적 몸 전체를 결백하게 만들어야 했다."(164)


5장 도덕과 이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유럽의 정치적 근대성을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유럽에 의미 있는 유산으로 이해하는) 〈지방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식민주의를 제도적 질서와 문화영역이라는 개념적으로 다른 두 영역으로 분리하고, 제도적 질서로서의 식민주의가 종식된 후에도 문화로서의 식민주의가 지속된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탈식민 문화 개념은 2차대전의 종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적 시기를, 과거 식민지 세계가 1950~60년대에 걸쳐 형식적·제도적 통제에서 벗어난 후 이어서 식민주의의 문화적·정신적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던 연속적인 투쟁으로 그려내는 경향이 있다. 그 시기에 전지구적 권력구도가 식민주의 구조에서 냉전의 구조로 전환되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고, 그 결과 탈식민 세계의 국가건설 과정에 첨예한 문제가 초래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탈식민 과정에서 경험된 극단적인 정치적 양극화와 그로 인해 공동체적 삶이 당면한 위기에 무관심하다."(178-9)


"최근의 근대 민족주의 연구는 근대사회가 장소 기반의 '기계적' 연대에서 관계망 중심이 '유기적인' 연대감으로 일방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근대사에서 이 두 유형의 사회성 중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서로를 강화하며 뒤얽혀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탈식민 냉전기를 내전의 형식으로 경험한 사회에서는 가족과 민족의 상징적 유사성이 긍정적인 융합이라기보다는 분열과 왜곡이라는 부정적 조건으로, 또한 미래에 극복해야 할 조건으로 이해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두드러진다. 이런 맥락에서는 '자연적'(natural) 또는 전정치적(prepolitical) 형제애를 별개의 토착적 단일체로 상상하고 그다음에 서구 정치사상에 나타나는 정치적 우애와 대비시키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정치현실과 떨어져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이상화된 토착적 친족이라는 이미지는 탈식민 내전의 위기 속에서 분투하는 친족의 운명에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176-9)


"냉전기의 광범위한 정치적 문화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이 국제입양의 정치이다. 크리스티나 클라인은 20세기 초국가적 이동의 역사가 냉전의 지정학과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주장하면서 그 관련성이 애초에는 특정한 친족의 관행을 통해 인종적·문화적 차이를 초월하는 형태를 띠었다고 논의한다. 클라인은 20세기 중반의 정책문서와 중산층 대상 대중교육 자료를 중심으로 1950년대에 어려움에 처한 아시아 지역에서 아이를 입양하는 일이 주목할 만한 지정학적 실천이 된 과정을 추적한다. 미국이 전지구적 공산주의 봉쇄정책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내세우는 중에 자유세계 내 미국의 주도권에 실질적으로 긍정적인 특성이 결핍되었다는 우려가 있었다. 반공주의란 기본적으로 반작용이지 그 자체로 진정한 이념은 아니고, 아시아 대중들에게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나 온정주의적 자본주의란 서구 식민지 지배와 결부되어 이해되었으므로 호소력이 없었다."(182)


"그런 연유로 1950년대 주요 교육매체에는 친족의 확장이 아시아의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주요 전략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미국 가정에 콜카타와 뭄바이의 집 없는 아이들, 일본의 버려진 〈지아이(GI) 아기들〉 그리고 한국의 전쟁고아들을 입양하라는 권유가 쏟아졌고 〈우리에게는 세계의 굶주린 아이들이 원자폭탄보다 더 위험하다〉라는 생각을 전파했다. 자애로운 미국이 온정주의로 돌봐주지 않는다면 억압받는 이 아이들이 〈공산주의자의 손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클라인은 위의 변화를 〈냉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명하는데, 이는 미국이 탈식민 세계에서 그들의 〈자애로운 패권〉을 형성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이질적인 문화와 조우하면서 그 이질적 세계가 국제공산주의에 맞선 전지구적 이념투쟁의 전선에 참여하도록 새로운 정치─서구에서 유일하게 인종 평등 사상을 옹호하는 미국이라는─를 발명해내는 일이었다고 본다."(183)


"전후 한국에서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재현은 친족의 우호(amity of kinship)와 정치영역의 적대감 사이의 모순을 핵심 구성요소로 삼았다. 때론 양극화된 바깥세상의 정치현실에 심하게 흔들리기는 해도 친족의 우호가 그것을 견뎌내고 결국 규범적 주체성을 회복하면서 그 자체가 자율적 영역임을 대표했다. 하지만 때론 이 영역이 바로 내전의 포악한 역사가 가장 첨예하게 구현되면서 인간관계의 규범적 구조를 산산조각내는 바로 그 현장으로 제시되었다." "여기서 형제애라는 개념은 서구 철학 전통에서 정의하는 근대 정치적 우애라는 이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동시에 서구의 정치적 우애에 대한 비판으로 제시되는 소위 자연적이고 천부적인 형제애 개념과도 다르다. 극단의 이념을 수반한 총체적 국민동원의 현대 내전의 경험은 가족과 친족의 영역을 완전히 뒤집어엎어서 천부적 형제애 자체를 고통스럽도록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201-2)


"피가 이념보다 진할까? 그에 대한 답은 애초에 혈연의 영역과 이념의 영역을 분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럴 가능성을 상상하려면 혈연의 영역을 따로 떼어낼 수 있어야 하고, 거기에 현대 이념의 힘에서 독립된 그 자체의 고유한 규범적 삶을 부여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서 친족의 영역은 현대 정치의 힘과 따로 떨어질 수 있는 독립체가 아니라 바로 그 힘에 의해 이미 난도질된 세계였다. 한국전쟁 서사에서 나타나는, 원초적이고 전(前)정치적인 가족공동체의 이미지는 압도적인 국가주권의 정치의 세계로부터 얼마간 거리를 둘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공동체와 국가 사이에 놓인 어떤 화해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한국전쟁사의 친족이 긴 냉전시기 내내, 1950년 내전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요동치는 역사의 현장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했던, 깊은 상처를 입은 존재라는 사실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204-5)


6장 소리 없는 혁명


"전후 공동체들이 전쟁이 초래한 위기에 대처하여 실행했던 가족문화로는 미혼으로 사망한 젊은 남녀의 영혼을 맺어주는 사후 혼례식, 신랑의 집안 내에서 입양한 아이가 두 사람의 제사를 주관하는 사후 입양, 시신이 없는 무덤을 조성하고 돌보는 헛묘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대중적인 수단으로는 무엇보다 굿을 들 수 있다. 굿이 가족단위로 이루어질 경우, 망자의 넋두리는 죽음의 순간과 그 끔찍한 상황을 울면서 설명하고 부당한 죽음에 대한 분노를 쏟아낸다. 망자의 혼이 그렇게 탄식하다가 지치기도 하고 조금 진정이 되면 굿판의 주변과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내 속 끓는 이야기 들어주어서 고맙수다〉 인사치레를 하고, 그러면서 건강이나 경제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한다. 망자의 혼이 살아 있는 자들의 일에 관심을 돌리면, 드디어 망자가 자신을 옥죄던 슬픔에서 벗어났다는, 한국에서 자주 쓰는 표현으로는 〈한을 풀었다〉는 표시로 받아들여진다."(223-4)


"하지만 한이란 완전히 풀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다음번에 굿을 할 때도 〈영계울림〉(혼령의 울음)은 반복되는데,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울음의 강도가 조금씩 누그러지기는 한다. 망자가 넋두리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하는 이 굿의 공간도 대개 그것을 주최하는 사람과 친족관계인 망자의 혼을 청배하는 장소라는 점에서 일종의 조상에 대한 제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굿판에 나타나는 조상은 제사에 찾아오는 조상과는 다르다. 그 범위에서 굿의 조상은 제사의 조상보다 광범위하다." "과거에 굿이 (부계의 계보만을 의미 있는 친족질서로 간주하는) 유교적 도덕질서의 지배적인 이념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면, 20세기 후반에도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지배적인 이념인 국가 반공주의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제주 4·3사건의 증언집인) 『이제사 말햄수다』에도 해당되는 것으로, 무속의 독특한 구조적 조건이 여기서 역사 증언의 길닦이 역할을 한다."(224-5)


"제주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회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에게 1990년대 초는 상전벽해의 시기였다. 그 이전에 유족회의 공식명칭은 '제주 4·3사건 민간인 반공희생자 유족회'였고, 무장대에 희생된 공무원이나 민보단원 등의 특정한 범주의 희생자와 관련된 유족이 주로 참여했다. 현재 추정하기로는 이 범주의 희생자는 전체 민간인 희생자의 20퍼센트 정도라고 알려진다. 나머지 대다수는 군과 경찰, 청년단에 의해 희생된 주민들이었다. 1990년대 들어 다수를 이루는 범주의 희생자 유족들이 점점 많이 참여하면서 유족회 내에서 다수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 유족회 활동을 오랫동안 한 어느 분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소리 없는 혁명〉이었고, 유족대표들이 오래도록, 때로는 열띤 토론과 협상을 벌여온 결과였다." "유족회가 모든 차원에서 벌어진 잔학행위의 모든 피해자를 대변한다는 단호한 입장을 견지한 덕에 그러한 갈등으로 인해 조직이 해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228-9)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면서 주민들의 추모행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 변화는 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관찰되었는데, 이 두 영역의 변화가 긴밀히 상호작용하며 변화를 이끌어갔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조상의례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제주의 많은 지역사회에서 예전에 정치적으로 비규범적인 존재였던 조상들이 공동체의 행사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소위 '정상적인' 조상들과 함께 추모의 공간을 공유하게 되었다." "1990년대말 이전에는 우익과 좌익이 자행한 폭력의 희생자를 모두 아우르는 추모행사를 한다는 발상은 대부분 지역에서 생소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 지역 여론은 그런 생각을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발상은 반공의 정치사를 떨쳐버리는 측면뿐만 아니라 주민들 사이에서 지역 공동체의 온전함과 자긍심을 회복하는 데에도 큰 의미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자들의 기억을 함께 불러오는 일은 살아 있는 자들을 화해시키고자 하는 시도였다."(230-3)


결론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는 우애의 개념에 현재 사회과학 학계가 새롭게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급변하는 정치적 우애의 지평이 있다. 서로 아무 관련 없는 개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우애에 기초한 연대와 동지적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다시금 공적 담론과 학계에서 두드러진 주제가 된 것이다. 정치이론에서 우애를 민주주의 정치질서의 핵심적 규범으로 내세우면서 공적인 공공선의 덕목과 호혜의 실천으로 규정되는 우애가 서로를 타인으로 여기는 개개의 시민들을 묶어주는 끈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인간주체가 내재적으로 자기 본위의 이기적인 존재라고 가정하는 공리주의 철학 전통이 옹호하는 사회질서를 비판하기 위해 우애의 이론을 개진하기도 한다. 다른 편에서는 우애라는 개념으로 현대사의 유산, 특히 민족주의 시대의 유산을 재조명하는 데 더 관심을 보인다."(254)


"국제관계 이론에서 우정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것은 홉스 식의 힘겨루기 시각을 벗어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우애의 정치를 둘러싼 이러한 논의는 예전처럼 친구와 적이 확실하지 않은 냉전 이후 세계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다른 중요한 특성도 있지만 냉전은 전지구적으로 친구 대 적의 구도를 지녔다는 점에서, 예를 들면 식민주의 같은 근대사의 다른 주요 정치형태와 구별된다. 전지구적으로 영토에 기초한 정치체와 민족들 사이에 분할된 양편에서 전례 없이 광범위한 초국가적 연대를 장려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편으로는 적개심 정치의 보편화, 다른 한편으로는 우애의 정치의 전지구화로 세계가 양분되었는데, 이런 조건을 두고 코젤렉은, '세계내전'이라고 칭했다. 현재 우애의 정치와 우애의 도덕에 쏟아지는 관심은 탈냉전시대에 이제는 실제의 적이건 상상의 적이건 공동의 적이라는 존재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정치적 우애의 지평을 그려나가야 할 절박한 필요를 반영한다."(255-6)


"친족은 전근대 집단사회의 도덕적·정치적 질서에서 핵심이었는데, 개인의 삶과 대인관계의 중요한 측면을 이루는 우애는 근대 개인사회의 친밀한 인간관계를 표현하는 주요한 요소이다. 곧 전통사회에서 친족이 차지했던 자리에 그 대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전통적 공동체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면서 친족의 타당성도 감소하고, 친족의 기능이 쇠퇴하면서 생겨난 그러한 빈자리를 우애가 메운다는 것이 근대 사회사상사의 지배적인 생각이다. 비록 이러한 지배적 가정이 근대사에서 실제로 친족관계가 이해되고 실행되는 방식과는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족관계의 후퇴는 여전히 근대의 정치, 사회와 관련된 이념의 핵심적 구성요소다. 이렇게 보면 근대정치의 합리성은 단지 우애의 정치가 아니라 친족에 대항한, 친족을 배제하는 정치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애에 대한 비판적 사고는 근대 공적 세계의 구성적 공간에서 추방된 친족에 대해 재고할 것을 필요로 한다."(256-7)


"인간의 친족이라는 환경이 정치적 사회의 공적 구조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자리를 지니지 못하는 사적 영역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근대 정치에서 지속되어 온 신화이다. 이 신화는 심지어 친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가야만 근대사회와 정치의 지평이 드러난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산 자들에게 자유로움은 정치적 두려움 없이 고인을 추모하고 애도할 수 있는 권리의 회복을 의미한다. 죽은 자와 실종된 이에게는 자신이 속해 있다는 이유로 친족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걱정 없이 친족세계에 귀속될 수 있는 권리이다. 코리아에서의 학살 이후 친족의 정치적 삶은 산 자가 죽은 자를 친근한 존재로 기억할 수 있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다시 찾기 위한 길고 지난한 싸움이었다. 뒤르켐이 정의한 '영혼의 권리'란 죽은 이에게는 친족의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권리의 회복이고, 살아 있는 이에게는 정치적 사회 내에 시민권의 회복과 동일한 의미이다. 여기서 친족의 평화는 평화로운 사회의 이상과 동일하다."(2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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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의 유령들 - 2016 경암학술상 인문사회부문 선정도서
권헌익 지음, 홍석준 외 옮김 / 산지니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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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동유럽과 중유럽 지식인들이 개인적 경험을 소설적 서사로 표현하는 데 힘을 실어줌으로써 진리를 주장하는 공식역사에 저항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개인의 기억은 공식역사에 대항하는 투쟁이라는 논쟁적인 진술을 통해 이러한 정향을 구체화했다. 하지만 유령이라는 요소는 익숙한 테마가 아니다. 오늘날 다양한 학자들이 당대의 변화하는 시대정신을 도출하려는 시도에서 과거의 유령에 호소하는 경우가 흔하긴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유령', '마르크스의 유령', '공산주의의 유령', '스탈린의 망령', '냉전의 유령' 등은 주로 역사적인 은유이다." "이들 역사의 유령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전쟁의 유령(ma chien tranh)과 같지 않다. 최근 이스트반 레브는 탈공산주의의 〈선사(先史)〉에 관한 논의에서 유령이라는 관념을 도입한다. 비록 나는 전쟁의 유령을 레브와 유사한 시각에서 역사적 불의의 산 증거로 접근하지만, 이들 유령은 단순한 역사적 관념과는 완전히 다르다."(14-5)


"베트남의 유령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정체성을 가진 실체로서, 비록 과거에 속하지만 비유적인 방식이 아니라 경험적인 방식으로 현재에도 지속된다고 믿어지는 존재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 과정에서 베트남의 유령 이야기는 탈사회주의적 서사와 양극적 질서에 관한 보다 광범위한 역사적 기술에서 독특한 장르의 관념과 가치를 구성한다. 베트남 유령의 생명력은 단순히 문학적인 현상일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장들에서 볼 수 있듯이 절박한 사회적 이슈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 현상은 베트남 사회 전역에 걸쳐 발견되는 유령 관련 이야기의 명백한 대중성과 베트남인들의 일상에서 점증하고 있는 비극적 전몰자에 대한 기억의 의례적 표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유령은 베트남에서 현저하게 대중적인 문화적 형태이자 역사적 성찰과 자기표현을 위한 강력하고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령은 관례적인 사회학의 전통을 초월하는 사회적 연구의 정당한 영역을 구성한다."(16)


"이 책의 과제는 『학살, 그 이후』에서 다룬 친족의 의례적 기억에 관한 연구를 전몰자라는 중요한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대학살로 인해 가족에 기반한 전통적인 기념 관행이 위기에 직면했는데, 부분적으로 이것은 친족적 연고가 없는 시신들이 마구 뒤섞여버렸기 때문이다. 최근의 베트남 전쟁은 전통적인 마을을 뒤엎어 공동체적 삶의 안정적 공간을 흉폭하고 혼란스러운 전장으로 바꾸어놓았다. 하지만 전쟁은 또한 민간인과 군인들이 여러 지역을 가로질러 대규모로 이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일반화된 인간의 이탈(human displacement)이라는 배경하에서, 남부 및 중부 베트남의 공동체들은 수많은 전쟁사망자의 개별 무덤과 마을 주민들의 집단 묘지를 유지해왔을 뿐만 아니라 그만큼이나 많은 수의 무명 외지인(응오아이, ngoai) 유해의 무덤도 지켜왔다. 이탈된 죽음의 이러한 물질적 조건은 베트남인들이 인지하는 비통한 전쟁 유령의 생명력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22)


1 전쟁의 유령


"냉전사에서 베트남 전쟁(1965~1975)이 그 전에 일어난 한국 전쟁(1950~1953)과 비교되는 것과 유사하게, 베트남인들은 베트남과 미국 간의 갈등을 이전의 '프랑스 전쟁'과 구분하기 위해 미국 전쟁(1960~1975)이라 부른다."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 베트남에서 발생한 죽음은 주로 군인의 죽음이다. 이는 이 집단기억의 핵심적인 물질적 상징인 버지니아의 알링턴 베트남전 참전용사 기념관을 통해 입증된다. 베트남의 공식적인 기념방식에 따르면 미국 전쟁에서의 죽음 또한 주로 군인의 죽음이다. 이는 베트남 전역의 여느 농촌 마을이나 읍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수많은 묘지와 기념비를 통해 물질화된다. 하지만 실제로 베트남인들에게 베트남-미국 전쟁에서의 죽음은 남녀노소, 군인, 민간인, 당원, 비당원, 공산주의자 혹은 반공산주의자를 가리지 않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의 죽음이다. 이러한 상황은 전장의 전선이 지독하게 불분명했던 베트남 남부와 중부 지역에서 특히 심했다."(38-41)


"베트남에서 유령의 존재는 문화적인 상징이라기보다 '자연적인' 현상으로 인식된다. 유령은 전형적으로 '길 잃은 영혼' 혹은 '떠도는 영혼'으로 번역되는 다양한 이름(마ma, 혼hon, 혼마hon ma, 봉마bong ma, 린혼linh hon, 오안혼oan hon, 박린bach linh)으로 불리지만, 민간의 의례용어에서는 꼬박(co bac)으로 불린다. 꼬박은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뜻하는 용어인데, 이는 의례적 맥락에서 개별 가정이나 마을 사원 내에서 숭배되는 조상과 신위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옹 바(ong ba,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대조적이다. 이들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죽었지만, 망자의 세계, 즉 엄(am)에 정착한다는 의미에서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살아 있진 않지만 여전히 산 자의 세계를 떠나지 않은 존재이다." "유령은 일종의 존재론적 난민으로서 에르네스트 블로흐가 말하는 다스 운하임리히(das unheimlich), 즉 집으로부터 뿌리 뽑힌 자의 지위에 가까운데, 이들에게 집은 자신의 기억이 머무는 장소일 수 있다."(44-5)


"베트남에서 유령은 아주 공적이기도 하다. 그들과의 사적인 조우 대부분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기념활동으로 발전한다. 유령이 출현한 장소에 막대 모양의 향을 피우는 행위는 즉시 그 장소를 애도의 장으로 변환시키기 때문에 이미 명백히 공적인 행위이다. 유령 출현 이야기와 그 역사적 배경 또한 지역 사회에 신속하게 확산되어 공적인 형태의 지식으로 전환된다. 사전 지식이 없는 외부인이 아니라면 누구도 부주의하게 그 장소를 걸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주민들은 그 장소를 지날 때마다 향과 재를 보고 매번 그 특별한 유령 출현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리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이야기가 잊히고 관련 장소가 평범한 도랑으로 되돌아갈 때까지 몇 개월 혹은 몇 년 동안 지속된다. 이와 같이 유령의 존재를 인정하는 활동은 분향에서 음식과 돈의 봉헌, 혹은 때로 의례전문가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지는 본격적인 진혼 의식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46)


"혼과 유령에 관한 베트남인들의 담론에는 비판적인 역사적 의미가 풍부하게 담겨 있고, 이 담론이 널리 확산되는 이유는 정확히 그것을 통해 당대의 삶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도덕적·정치적 쟁점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쟁유령 현상은 역사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된 인간의 조건을 반영하고, 때로 헤겔의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 즉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정신으로 묘사되는 것과 긴밀한 친화성을 가진다. 가령, (남베트남군 군인으로 작전 중 사망한) 공산당 간부의 형이 유령으로 출현한 것은 친족영역 내에서 그의 기억의 부재에 영향을 미치고, 이는 외세라는 공동의 적에 저항해서 싸운 통일된 '인민의 전쟁'이라는 공식적 패러다임 내에서 은닉되고 설명되지 않는 내전-냉전의 유산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주로 가족의 문제이지만 또한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비무장 민간인의 엄청난 희생과 그들의 기억에 대한 권력구조의 무관심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와도 연결된다."(48-9)


"베트남인들의 개념체계에 따르면, 유령은 망자의 세계에서 이방인 혹은 외부자를 뜻하는 응으어이 응오아이(nguoi ngoai)이다. 그것은 '나쁜 죽음', 즉 베트남인들이 〈객사〉(쩻 드엉, chet duong)라고 부르는 고통스럽고 폭력적인 죽음에서 비롯된다. 이승의 이방인이 정착할 장소를 찾지 못하고 이 마을 저 마을로 옮겨 다니는 것처럼, 유령은 강제된 이동으로 인해 기억을 정박할 장소 없이 이승과 저승의 변두리에서 고통스럽게 떠돌아야만 하는 존재로 상상된다. 이승에서 이방인이 동질적인 배경의 결여라는 특징을 통해 정주민과 구별되는 것처럼, 유령들 또한 다양한 역사적 삶의 배경을 가진 개인들로 이루어진 혼성의 집단을 구성한다. 유령의 삶은 이러한 이동성과 다양성이라는 특질로 인해 조상의 삶과 구별된다. 조상의 '좋은 죽음', 즉 비폭력적이고 의례적으로 승인되는 〈집에서의 죽음〉(쩻 냐, chet nha)에 대한 기억은 계보적·공간적 질서에 따라 사회적 체계에 항구적으로 정착된다."(52-3)


2 대규모 발굴


"베트남에서 1990년대는 모든 면에서 가공할 변화의 시대였다. 외부 세계의 시각에서 볼 때 베트남은 이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연이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가난하고 고립된 나라에서 정치적으로 안정적이고 경제적으로 활력이 넘치는 나라로 변모했다. 베트남은 1980년대에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저생산성이라는 심각한 경제위기에 빠져 있었다. 일부 관찰자들은 그 이유를 여러 요인들 중에서도 특히 관료사회주의의 중앙집중식 계획경제에 대한 인민들의 일상적 저항에서 찾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베트남의 정치지도자들은 1980년대 후반 규제적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전반적인 경제개혁 프로그램(도이 머이, doi moi)을 도입했다. 경제 이데올로기의 변화는 종교적 숭배를 포함하는 다양한 공동체활동과 결사활동에 대한 정치적 관용의 확대를 수반했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 베트남 사회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전국적 차원의 종교와 의례의 부활〉이었다."(72-3)


"마크 브래들리는 베트남 혁명을 냉전기에 완전히 독립적인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탈식민지적 비전의 일반적인 추구로 정의한다. 따라서 최근 베트남의 사회적 전환은, 과거의 역사적 투쟁이 단순히 어떤 특수한 정치경제적 질서의 실현에 관한 것이 아니었듯, 단순히 하나의 경제 형태에서 다른 경제 형태로의 변화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경제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와 관련된 경제적 도덕성에 관한 질문에 초점을 맞추는 최근의 탈사회주의 논쟁은 러시아, 동유럽, 중부유럽의 맥락에서는 의의를 가진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의를 진지한 재고 없이 20세기 후반의 정치사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희생시킨 사회세력의 폭력적인 양극화를 뜻하는, (유럽의 일부를 포함하는)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단순히 확장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이 주장은 정치적 양극성의 파괴적인 측면과 그것이 당대의 삶에 미치는 지속적인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 마찬가지로 유럽중심적인 탈사회주의 정의에도 적용된다."(77-8)


"일군의 학자들은 산 자와 망자 간의 호혜적 관계라는 관념이 베트남의 문화적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 베트남에서 의례활동이 부활하는 현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종교적 부흥을 한편으로 시장에 토대를 둔 경제적 실천의 강화,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민간의 종교활동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완화를 연관시키는 상이한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테일러는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최근의 주술 열기는 고대적인 것의 부활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경제대안의 포기가 수반하는 예측 불가능하고 부정적인 사회관계를 드러내는 탈사회주의적 현재의 징후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방향의 연구는 경제 내에서 상품관계의 부상을 종교에서 주술적 관념의 퇴화와 동일시하는 막스 베버의 관점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주술적 관념을 사회진화의 낮은 단계에 있는 고대적 혹은 전통적 사회형태와 동일시하는 과거의 인류학적 전통에 대한 자기비판이기도 하다."(96)


3 작전 중 실종


"무명용사 무덤은 현대 현대 민족주의 물질문화의 중요한 초점 중 하나이다. 이 무덤은 흔히 아무도 매장되어 있지 않은 빈 무덤인데, 제이 윈터에 따르면 누구의 무덤도 아닌 빈 무덤이 모든 전쟁 사망자들을 위한 무덤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이 그 이면의 사고방식이다." "과거에는 이러한 추상적인 군인의 매장이 전쟁의 종식을 표식하기 위해 이루어졌고, 사람들이 희생의 성스러운 목적을 기억하고 대규모 죽음의 비극적 현실을 망각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그 후에는 무명용사의 순수한 정신을 통해 국가를 축복했다. 냉전시대에는 군사적 갈등의 종식이 정치적 대치의 종식을 의미하지 않았고, 추가적인 지정학적 목적을 위해 죽은 군인들이 동원되었다. 이 새로운 시대에 가치 있는 무명용사는 더 이상 무덤에 묻힌 환유적(換喩的) 신체가 아니라, 본국으로 송환되어 매장되지 않은 수많은 실제적인 신체들이었는데 이 시신들은 연장된 이데올로기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부분적으로 기여했다."(105-7)


"베트남에서도 사망한 영웅의 실종된 신체(nhung nguio mat tich)를 되찾는 일이 1975년 사이공 함락 이후 군 당국과 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전후 베트남의 국가체계는 기념활동의 통제를 크게 강조했고, 미국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의 죽음을 프랑스 전쟁의 영웅들, 그리고 고대적 전승의 전설적 영웅들과 하나로 연결하는 영웅적 저항전쟁의 계보를 선전했다. 베트남의 모든 지방 행정단위에는 공동체의 공적 공간 중앙에 전몰자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고, 이 장소의 중심에 위치한 고딕풍의 기념비에는 〈우리 조상들의 땅이 당신들의 훈공을 기억합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패트리샤 펠리에 따르면, 이러한 국가적 기억의 구성은 기념의 초점을 전통적인 사회단위인 가족과 촌락에서 국가로 바꾸었다." "따라서 전쟁영웅과 혁명지도자에 대한 기억이 가내 공간의 조상위패를 대체하고, 공동체 사원은 해체되어 인민회관에 자리를 내주었다."(110-2)


"〈작전 중 실종자(MIA)〉 탐색활동은 보통 가족들을 현지답사에 참여시켰는데, 그 이유는 실종된 유해가 친족의 시체가 접근하는 데 반응해서 어떤 결정적인 표식이나 신호(저우 히에우, dau hieu)를 보낼 것이라는 추정 때문이다. 찌엔 쌤 마는 MIA 프로그램의 초기 단계에서 다른 대부분의 비공식적 베트남 영매들과 마찬가지로 실종자 가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정서적으로 힘들고 육체적으로 소모도가 높은 탐색과 재매장의 긴 과정을 밟았다." "대부분의 베트남 영매들은 이러한 힘겨운 송환과 재화합의 과정에 활동적으로 참여하고, 그것이 초래하는 긴장과 트라우마를 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이 탐색 후 재매장 작업에서 수행하는 사제 역할은 탐색-발견 활동에 주술적으로 참여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가족들이 울부짖을 때 영매는 개인적인 통한(痛恨) 대신 커뮤니케이션을 장려했다. 요령 있는 영매는 결정적인 상황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웃길 수 있다."(121-2)


"한편 꽝남 성 당국은 관례에서 다소 벗어난 유해탐색 활동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대민관계에서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공식적인 탐색활동을 자신들의 실종된 친지들에게까지 확대해달라는 시민들의 탄원이 빗발쳤다. 대중들의 요구는 강력했고 이는 결국 당국으로 하여금 유해탐색 프로그램을 재고하도록 만들었다. 베트남 국가 관료기구는 합리적 정신과 무신론적 도덕성을 공무원들에게 엄격하게 강조했기 때문에 관료들 사이에서 다소 혼탁한 논쟁이 이어졌다.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이 전쟁 영웅의 유해를 되찾는 영예로운 동기와 부분적으로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만약 공산당 당국이 그 탄원을 무시하면 다소 자기모순적인 상황이 초래될 판국이었다. 결국 땀끼 시 당국은 과감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당국은 시민들이 실종된 친지 문제를 찾기 위해 종교적 영매에게 의뢰할 수 있도록 허용해달라고 정부에 공식적으로 청원할 수 있는 신청서를 발행했다."(125)


"1990년대 베트남과 미국의 화해 과정에서 미 행정부는 부분적으로 이전 적성국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MIA 문제에 가시적인 진척이 있기를 조급하게 기대하고 있었다. 베트남 정부는 정부대로 경제제재를 종식시키는 데 명운을 걸고 있었고, 발견된 미국인 유해의 수가 가시적으로 증가하기를 미국 정부만큼이나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유해탐색의 효율성을 높이는 일은 한편으로 국제관계를 촉진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개혁이 수반하는 불확실성에 직면해서 당의 도덕적 기반을 강화한다는 국내적 목적을 위해 필요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찌엔은 1995년 인도차이나에 파견된 미국 MIA 탐색대와 접촉하게 되었고, 이듬해에는 라오스 국경 지역에서 세 명의 실종 미군 비엣 끽(biet kich), 즉 베트남어로 특수부대 요원을 찾기 위한 탐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찌엔은 베트남-미국 합작 MIA 탐색활동의 성공을 위해 수호신에게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127)


4 유령 다리


"남베트남군과 미군의 통제하에 있던 남부와 중부 베트남의 도시 지역에는 또(to) 혹은 또 바 응으어이(to ba nguoi, 삼인조)라 불렸던 전시 베트콩 혁명소조가 있었다. 이 소조는 전형적으로 혁명과업에 충성하는 비밀 시민활동가를 지칭하는 꺼 소 깍망(co so cach mang), 즉 〈혁명의 토대(infrastructure of revolution)〉 남녀 3~5명으로 조직되었다. 각 소조는 보통 전체 서클의 규모와 범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오늘날의 전문용어로 네트워크의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보다 광범위한 서클에 연결되어 있었다." "간부와 공작원 사이의 관계는 위계적이기도 했고 수평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도덕적으로는 공작원과 상급자 모두 서로를 같은 목적을 공유한 파트너, 즉 동찌(dong chi)라 부르고 또 그렇게 인식하면서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소조 조직은 개별 조직의 실질적인 자율성을 상실하지 않고도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149-50)


"호랑이 사원 공동체는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도시 근교 공동체의 전형이다. 이 지역은 반식민주의 베트민 레지스탕스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대규모 전쟁 묘지로 이어지는 길 끝자락에 은닉해 있는 사원은 서쪽으로 하위 중산층 주택들을 마주하고 있다. 이들 주택은 북쪽으로는 오래된 교도소와, 서쪽으로는 군부대와 맞닿아 있다." "이제 더 이상 죄수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웃들의 구술사에서 여러 번 드러나듯이 일부 주민들은 아직도 사형수들의 유령이 자기 집 뒤뜰이나 부엌으로 기어들어 올까 두려워한다. 그 지역의 토착적 지식체계에 따르면 살아가면서 죄수의 유령과 조우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그 유령은 긴 머리카락에 가슴을 풀어헤치고는 사람들을 유혹해서 죽음으로 이끄는 여자 물귀신으로 악명 높은 마우 마(Mau Ma)처럼 훼손된 몸과 늘어진 혀를 가지고 있다. 이웃의 젊은 여자 세 명이 이 공포스러운 환영을 경험했고, 그들 중 한 명은 끝내 그 충격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153-4)


"이 마을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부역자〉와 〈애국자〉가 뒤섞여 있는 곳이다. 사람들의 회상에 따르면, 이웃이나 친구가 누군가를 배신했다는 소문은 읍내 전체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고, 이는 다시 은밀함과 상호불신을 강화했다. 역설적이게도 전쟁 지도부의 이와 같은 분열 통치전략은 민간인들 사이에 비밀 혁명지원 네트워크가 확장되는 데 기여했다. 민간 활동가들의 정치적·도덕적 동기 이면에는, 전쟁 상황에서 깍 망(cach mang, 혁명적) 네트워크가 유일하게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사회조직이라는 강력한 인식이 존재했다. 물질적·정신적으로 심각하게 고립되어 있었던 수많은 절망적 베트남인들, 특히 여성들은 인간적 연대의식을 회복하려는 혁명조직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꺼 소 활동가였던 한 여성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남편은 없어도 살 수 있었다. 친척이 없어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웃이 없이는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이웃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156)


"호랑이 사원의 존재는 그 공동체의 회복력에 기여했다. 부역자 가족에 속하든 애국자 가족에 속하든, 거의 모든 주민들은 그들이 전쟁 동안 그렇게 했던 것처럼 사원의 유지와 의례일정에 참여했다. 사원의 활동, 특히 매년 음력 1월에 열리는 개원식에 대한 주민들의 공헌은 지연이나 혈연이 거의 없는 사람들을 공동체로 만들어내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사지절단 랍 같은 사람들도 공동체의 결속력에 기여했다. 그는 혁명 네트워크에 속해서 전쟁을 치렀다. 그는 또한 국가의 편에서 그 정반대의 전쟁을 치렀다. 그의 양극화된 정체성은 하나의 상실된 전체로 융합한다. 그는 애국자 가족의 명시적인 자부심에 공감하면서 부역자 가족의 보이지 않는 낙인에 대해서도 배려해준다. 랍과 같은 사람은 흔히 그 자부심이나 낙인 이면에 말해지지 않은 불확실성의 역사가 숨겨져 있고, 전쟁 중 생애사가 매우 분명한 궤적을 그리고 있는 보통 사람은 아주 드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164-5)


"사지가 절단된 자는 두 개의 모순적인 현실, 즉 살아 있는 사지의 역사적 현실과 그 부재의 주어진 현실을 동시에 받아들인다. 이 두 종류의 〈사지〉는 절단된 몸의 생생한 현실 속에서 동일한 시공간을 점유한다. 따라서 부재하는 사지는 과거로 회귀하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의 살아 있는 체화된 기억이 됨으로써 유사현존(quasi-present)한다. 이 인간 신체의 현상학을 확장하면, 사회적 신체의 절단된 부분이 두 개의 모순적인 현실, 즉 살아 있는 전체의 역사적 현실과 상실된 부분의 주어진 현실을 동시에 유지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호랑이 사원 공동체에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고 온전하게 살아남은 가족이 단 하나도 없다." "만약 (다양한 수준의 사지절단 상처를 입은) 가족이라는 관념을 확대 친족 혹은 친구와 이웃을 포함하는 수준으로 확대한다면, 그 상실과 상처는 점점 더 정치적으로 분류하기 어렵게 된다. 정치적 정체성은 그 정체성을 보유한 자의 범위를 어떻게 정하는가에 따라 변화한다."(166-7)


5 객사


"베트남 전쟁은 엄청나게 많은 수의 농촌 인구를 생계의 토대와 도덕적 애착의 장소로부터 이탈시켰다. 미국 전쟁의 기획자들은 농촌 주민들에게 도시 슬럼이나 전략촌으로의 강제이주에 저항하도록 부추겼고, 〈조상들의 땅에서 한 자, 한 치도 떠나지 말라〉고 선전했다. 이러한 전면전의 현실에서 객지에서의 죽음은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에게도 흔하게 발생하는 일이었고, 따라서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수많은 무명 사망자들의 얕은 무덤을 발견하는 것 또한 흔한 일이었다. 이러한 이탈된 사후의 삶이라는 상황, 즉 한 장소에서는 실종되고 다른 장소에서는 신원불명 혹은 무명으로 남아 있는 상태는 베트남인들이 〈객사(chet duong, 길거리에서의 죽음)〉라는 개념으로 지칭하는 상황이다. 이 개념은 〈집에서의 죽음〉 혹은 〈가정에서의 죽음(chet nha)〉이라는 정반대의 개념과 공존하고, 이들 두 개념이 함께 베트남의 가내 기념의례를 통해 표현되는 집 중심적인 도덕적 세계관을 구성하고 있다."(179-80)


"아서 울프가 종교적 믿음에 관해 질문을 했을 때 대만의 한 촌락인들은 조상과 유령을 분명하게 구분했다. 그는 〈(의례적 의무의) 연속체 한쪽 끝에 있는 죽음은 진정한 조상이고, 다른쪽 끝에 있는 죽음의 거의 유령이다〉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울프는 또한 마을 주민들의 일상생활에서 죽음에 관한 이 두 가지 개념적으로 상반되는 범주가 상호변환이 가능한 상태임에 주목했다. 그는 후자의 예로 유령 조우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마을 들판에서 유령을 본 한 남자가 그 유령이 들 건너편 마을에 사는 가족의 한 조상 혼령이라고 믿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유령을 본 다음 날이 이 조상의 기일이었고, 그래서 그 유령은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 사례 및 여타 관련 사건에 근거해서, 울프는 유령의 변화하는 정체성에 관해 〈한 사람의 조상은 다른 사람의 유령이다〉라는 널리 인용되는 주장을 한다. 즉, 망자의 사회적 정체성은 고정되어 있는 상황이 아니라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186)


"울프의 발견을 원용해보면, 유령들은 (의례적으로 조상의 혼령과 통합되어 있는) 사회적 삶의 질서에 대해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추방 상태에 있는 현실적 존재의 거울이 된다. 이탈 상태의 삶은 정주 상태의 삶과 다른 방식으로 유령과 관계 맺고, 유령과 인간 사이의 거리 또한 이탈의 역사가 깊어짐에 따라 좁아질 수 있다. 이러한 논지로부터 최근 베트남에서 관찰되는 유령과의 사회적 친밀성에 고유한 역사적 배경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 도출된다. 베트남인들이 망자의 이탈된 혼령과 맺는 친밀한 관계는 그들이 대규모 이탈의 역사와 맺고 있는 친숙한 관계의 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담론 현상으로서의 유령이 조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인들의 자아정체성을 구성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유령의 생생한 존재가 단지 〈조상들의 사회〉와 상징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사회적 자아의 반정립이라기보다 역사적 자아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면, 그들과의 의례적 상호작용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188)


"베트남의 대중적인 노래와 시는 고향에 대한 사랑을 찬미하고 집을 떠난 삶을 한탄하는 내용으로 넘쳐난다. 이들 노래 중 일부는 향수를 시적으로 표현하는 데 바 매 꾸에(ba me que), 즉 〈고향의 어머니〉를 핵심 상징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대중 동원이 지속되는 장에서, 바 매 꾸에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또 다른 모성이 전쟁의 심리학을 구성했다. 대리모성(surrogate motherhood)은 이 시기 하나의 광범위한 현상이었다. 미국전쟁 당시 하노이의 전쟁계획은 대중적인 지지에 광범위하게 의존했는데, 이는 다시 〈인민의 자식〉 혹은 〈전투원의 어머니〉라는 전략의 성공에 달려 있었다." "군인들이 전투에 나갈 때면 어머니 활동가들은 입양한 자식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했다. 이러한 그들의 기도는 흔히 미국 편인 〈저쪽 편〉에 복무하는 자식들뿐만 아니라 혁명의 편인 〈이쪽 편〉을 위해 싸우는 자식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 어머니들 중에는 싸움의 양측 모두에 친자식이 있는 이들이 많았다."(188-97)


"과거에는 적이었던 이들 사이의 의사친족적 유대는 전쟁 전 기간에 걸쳐 실제 혈연관계만큼이나 강하게 유지되었다. (비밀 혁명 네트워크에서 활동한) 꺼 소 어머니들에게, 젊은 병사들의 성공적인 탈주는 먼 타지에 있는 친자식들이 살아서 고향에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강화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머니 활동가들이 노심초사하며 수행한 여러 정치활동 중에서도 특히 입양과 탈영 조직을 가장 헌신적이고 정성스럽게 운영했던 이유를 이해할 만하다. 이 여성들에게 이러한 활동의 의미는 단지 적의 사기와 도덕성을 약화시키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입양 군인들에 대한 사랑이 미지의 전장에서 싸우는 친자식들이 미지의 어머니들에 의해 어떻게든 사랑받고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믿음도 강화했다. 원격적 호혜행위에 관한 이러한 믿음이 헛된 희망으로 판명되는 경우가 매우 흔했지만, 어떠한 정치적 폭력과 감시도 이러한 희망을 전적으로 파괴시킬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했다."(199)


"유령은 사람들이 친숙하고 이상화된 집을 조상들을 위한 기억의 장소와 동일시할 때는 그에 대해 외부자가 된다. 이 맥락에서 조상들을 위한 기억은 그 장소를 계보적 통일성을 위한 배타적인 집으로 전용한다. 반면 사람들이 거주 장소(dwelling place)의 지평에서 단지 일부에 불과한 '계보적으로 제도화된 집'에서 벗어나 보다 광범위한 지평으로 나아갈 때 유령은 내부자가 된다. 유령은 전자에서는 기이한 것(das unheimlich)를 구성하고, 후자에서는 집(Heim)의 혼령을 구성한다. 돈 람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만약 (양방향의 의례적 실천으로 표현되는) 베트남의 혼령숭배 의례가 하나의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체계를 구성한다면, 나는 한편으로 폐쇄적이고 계보적으로 조성된 토착적 장소와 다른 한편으로 속박되지 않고 근본적으로 비계보적인 대안적 장소 및 보다 광범위하고 생성적인 의미의 고향-장소의 평행적 공존이 이러한 민주적인 종교성의 핵심을 구성한다고 주장하고 싶다."(210)


# 베트남의 혼령숭배 의례 : 가내 영역에서는 친족들이 함께 조상의 제단을 향해 절을 한 후, 개별적으로 외부의 제단으로 걸어나가 유령들을 위해 동일한 행위를 반복한다.


6 유령의 변환


"유령 소금은 베트남인들의 역사적 상상력 속에 이미 구축되어 있는 관념이다. 그들의 가장 오래된 역사적 속담 중 하나가 바로 소금 섭취와 연관되어 있다. 사람들은 하나의 사건을 익숙한 역사적 플롯 속에서 조급하게 설명하려고 할 때, 〈조상이 소금을 너무 많이 먹어서 자손들이 목마르다〉고 말한다. 이 플롯에서 진정한 인간의 욕망은 고립된 개인의 욕망이 아니다. 욕망을 느끼는 것은 개인이지만, 욕망의 근원은 영혼의 유령 소금과 마찬가지로 다른 누군가에게 있을 수 있다. 바로 이 다른 누군가의 존재가 물을 짜게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억하려는 욕망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발생하고, 기억하는 자아와 기억되는 타자 사이에 공유되는 무엇일 수 있다." "자아의 불완전한 자율성과 타자의 불완전한 수동성은 모든 형태의 기념의식과 사회적 교환에 내재할 것이다. 유령 소금의 경험은 기억하기의 간주관적(間主觀的, intersubjective)인 속성을 신체적으로 명확하게 만든다."(218-9)


"베트남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혼(hon)이라는 영적인 영혼과 비어(via)라는 물질적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죽은 자들의 갈증은 물질적 영혼이 느끼는 물질적인 현상이다." "내가 이해한 베트남인들의 대중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사후에 영적인 영혼은 반드시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체성의 특성을 가진다. 마찬가지로 망자의 물질적 영혼은 개별적으로 특수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을 가진다. 따라서 의례기간 동안 생리 중인 여성의 참여로 인해 초래된 불경에 화를 내는 것으로 알려진 껌레의 고래사원 수호정령은 자신의 분노를 불경을 저지른 외부 방문자가 아니라 무고한 어촌 가족을 익사시키는 형태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고래의 영적 영혼은 살아 있는 우리가 물질적 영혼을 통해 느끼듯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공동체적이고 물질적으로 생각한다. 한 어촌 공동체의 고래신위에게 물질적 토대는 바로 그 공동체이다."(219-21)


"〈객사〉라는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은 영혼들을 내세의 감옥에 가두어버리고, 산 자들 측에서 그들의 비참한 존재에 대해 기억하지 않으면 이들 역사의 수감자 측에서는 불만의 강도와 양이 증가한다. 이러한 개념적인 도식에서, 산 자들은 행동하지 않음을 통해 망자들이 불만 증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살아 있는 세대가 비극적 죽음의 발생에 반드시 책임이 없을 수도 있지만(〈우연한 사고〉일 수 있다), 그들이 그 죽음을 점점 더 불만스러운 죽음으로 만들기는 쉽다. 이러한 기억 이론에서 트라우마는 망자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인 상처인 것이다. 산 자들이 타자의 육체적 고통에 대해 이러한 윤리적 책임감을 의식하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실질적인 행동에 착수할 때 불만족이라는 축적의 경제는 기억이라는 분배의 도덕성에 굴복하게 된다. 망자들의 불만스러운 기억은 오직 산 자들에 의해 인정되고 공유될 때에만 그 트라우마적 효과를 상실하게 된다."(261)


"베트남인들은 유령의 변환을 자이 오안(giai oan), 즉 〈불만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이는 〈감옥을 열다〉 혹은 〈감옥을 파괴하다〉라는 뜻의 자이 응욱(giai nguc)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 이 관념은 비극적인 죽음의 역사가 망자의 영혼을 죽음의 치명적 드라마에 옭아매고 그것을 죽은 장소에 가두어서 저승에서의 삶에 부정적인 조건을 생성한다는 것이다. 죽음으로의 비극적 혹은 폭력적 이행은 사후에 감금의 상황으로 변화하며, 그 장소에 더 많은 새로운 운명적 수감자를 초래한다." "따라서 불만스러운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쌍방향의 과정이다. 그것은 감옥 개방을 위한 주문 낭송, 그리고 여타 관련된 의례적 행위같이 공감하는 외부자의 개입을 반드시 수반할 뿐만 아니라, 운명의 수감자 스스로가 해방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 또한 필요로 한다. 유령 출현은 이러한 자유를 향한 의지가 존재함을 증거하고, 통상 이를 토대로 외부자의 의례적 개입이 이루어진다."(260-2)


7 유령을 위한 돈


"죽음과 부는 다른 많은 문화적 전통에서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의 전통에서도 익숙한 조합이다. 베트남 전통 사회에서 부유함을 과시하는 주된 방법 중 하나가 죽음(혹은 결혼)과 관련된 의례를 통해서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죽음과 관련해서 부를 과시하는 수단은 세 가지, 즉 조상 사당, 가족묘지, 장례식이다. 고인을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은 부의 상징만이 아니었다. 고인의 호사스러움은 가족의 부 그 자체이기도 했다. 클리퍼드 기어츠에 따르면, 의례의 화려함은 〈사회질서의 단순한 반영일 뿐만 아니라 전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부유하고 성공했다면 반드시 일반대중이 눈에 그렇게 보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부유함은 대중적으로 인정되는 형태로 과시되어 이웃과 친구들이 그의 부를 보고 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실제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호사스러운 매장의례와 매장시설은 조상을 부유하게 만들고, 이것이 부유한 자의 위신에 중요한 조건으로 간주된다."(277-9)


"호우 칭-랑에 따르면, 호화로운 죽음이라는 개념은 삶을 은행 대출의 한 유형으로 간주하는 고대적인 관념과 연관되어 있다. 오래된 중국의 믿음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출생은 〈저세상의 금고(the Treasury of the Other World)〉 혹은 〈지옥은행(The Bank of Hell)〉의 대출 승인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삶은 은행의 대출기록에 상징적으로 대응해서 전개된다. 이론적으로 한 개인은 삶의 조건이 소박할수록, 그리고 세속적 쾌락에 탐닉하지 않을수록 자신의 대출을 더 오랫동안 누릴 수 있다. 만약 그 사람이 대출금을 다 써버리고 사망하면 반드시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데, 이 부담은 통상 현재 도산 상태인 대출자의 자손에게 돌아간다. 그는 실질적이든 상징적이든 재화의 형태로 바치는 사후의 제물과 망자에게 돈을 바치는 연관된 관습이 고대 중국에서 거의 법적으로 의무적인 채무상환(호우에 따르면 〈사법적인 돈)〉 행위였다는 점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279)


"경제개혁 이후 베트남의 경제학은 대중적인 수준에서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가지 정치경제학의 혼합이다. 축적과 투자의 이론은 산 자의 세계에 적용된다. 절약은 내가 만난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에게 1차적이고 근본적인 삶의 기술이자 국가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요소였고, 베트남의 국가체제 또한 자본의 축적에 몰두했다." "다른 한편, 망자와 관련된 경제적 영역에서는 자제의 미덕을 보기 힘들었다. 큰 돈은 죽음의 순간부터 흘러들어오기 시작한다." "진짜 재화를 망자와 함께 묻는 봉건 왕실의 매장 관습과 달리, 오늘날의 장례 산업은 그것이 재현하는 부의 아주 일부만 지불해도 되는 장례 제물 창고를 운영한다. 이 산업은 옛 공예인 길드의 한 병형으로 시장개혁 이후 번창해왔다. 이러한 망자를 위한 가상 경제에서는 현실 경제에서 어려운 일이지만 가난한 자가 부자 행세를 할 수 있고,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간의 차이도 현실의 삶에서보다 훨씬 덜 분명해진다."(281-2)


"1990년대에는 의례용 달러(베트남 발음으로 〈돌라Do La〉) 지전이 가내생활에서 익숙한 물건으로 자리잡았다. 이 특별한 봉헌 화폐의 기원에 관한 토착적 설명방식은 다양했다. 필자의 정보제공자 중 한 명은 일반적 교환 이론과 흡사한 설명을 제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부유해지면서, 말하자면 덜 가난해지면서, 빈곤과 폭력 외에는 경험해본 적이 없는 망자들과 자신의 부를 나누어 갖기를 소망한다. 미국 돈인가 베트남 돈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망자들이 우리 돈을 받을 수 있든 없든,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 이면에 있는 것, 즉 우리의 동기와 좋은 기분,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전쟁기간 동안 당 간부였던 이 남성에게 돈의 이면에 숨겨진 것은 나눔과 분배의 욕구이다. 혁명의 역사를 이렇게 우아하게 묘사하는 사람에게 이 공유의 욕구는 코코넛 나무가 코코넛을 생산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인간성의 본질이다."(286-7)


"돌라 지전은 1990년대 말까지 베트남인들의 기념의례 경관에서 완전히 익숙한 대상으로 자리매김했다." "돌라 지전의 번성을 신, 조상, 유령이라는 위계적 관념에 불확실성이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의례적 화려함을 (전시에 관한 정치학이 아니라) 전시(展示)의 정치학으로 해석하는 것, 그리고 상징적 권력이라는 연관된 개념을 돌이켜 보도록 하자. 나는 전통적인 질서 내에서 베트남의 의례용 화폐가 옹 바(신과 조상) 대 꼬박(유령)의 도덕적인 상징적 위계를 확정하는 수단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전에는 돈이 위계적이고 동심원적인 질서를 지배했던 것처럼, 이제는 돈이 이 질서를 교란하는 수단으로 보인다. 돌라 의례용 화폐는 위계적으로 제도화된 가치의 영역들을 포괄하고, 이전에는 분리되어 있던 이들 영역을 하나의 단일한 개념적 통일체로 통합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의례용 지전의 달러화가 함축하는 의미 하나가 명백해진다. 즉 달러화는 의례용 지전을 화폐화한다."(304-5)


"전통적인 의례용 화폐의 운동을 한정했던 눈에 띄지 않는 (전환불가능하고 내생적인) 가치의 영역들이 이제는 돌라의 초(超)영역적 순환에 취약한 상태에 처해 있다. 돌라는 내세의 재정경제를 단순화하고 다중심적 체계를 확장된 단일 영역으로 통합시켜왔다. 한편으로 기성의 신, 혹은 계보적으로 연결된 조상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연고 없이 길거리에서 떠도는 주변적인 유령 사이의 차이는 불타는 돌라 화폐의 힘과 인기에 비례해서 점점 더 주변화되어가고 있다. 달러화는 이러한 범주들 사이의 전통적인 위계를 붕괴시키고 엄(am, 저승) 세계 내 그들의 정치적 관계를 민주화하는 데 기여한다. 이 화폐는 주변적인 유령들과 의례조직의 중앙에 위치하는 의례적으로 수용된 조상 및 기성 신위들을 차별하지 않는다. 이들 주변적인 유령은 거리에서 많은 돈을 벌고, 그들이 번 돈은 초자연적인 세계에서 다른 보다 지위가 높은 사회 계급과 권력경쟁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전환 가능한 통화이다."(305-6)


결론


"죽음의 재현에 존재하는 이중의 종교적 상징주의에 관한 고전적인 논문에서, 로버트 허츠는 어떻게 사회가 오른손과 왼손 그리고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같이 명백하게 동일한 상징에 기초해서 개념적인 도덕적 위서체계를 구성하는지를 탐구했다. 그는 왜 유럽의 언어를 위시한 여러 언어들에서 오른편이 힘, 능란함, 신뢰, 법과 순수성─여기에는 허츠가 인용하는 민족지 자료에서 의례적·은유적으로 오른손과 연결되는 〈좋은 죽음〉이 포함된다─등 긍정적인 가치들을 재현하는 반면, 왼쪽은 이에 반대되는 모든 가치와 불길한 의미들─이는 그 〈불안하고 악의적인 영혼〉에 대해 사회가 배제의 태도를 견지한다고 여겨지는 〈나쁜 죽음〉을 포함한다─을 상징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허츠는 왼손과 오른손의 상징적 대조를 생정치적(bio-political) 현상, 즉 사회가 〈도덕적 세계의 가치 대립과 폭력적인 대조〉를 각인하는 인간 신체의 조건으로 개념화하였다."(316-7)


"허츠는 좌와 우의 반정립이 보완적인 양극성임과 동시에 비대칭적인 관계라고 보았는데, 전자는 이중적 인간(homo duplex)의 자연적인 조건이고 후자는 집합적이고 위계적인 규범을 개인의 몸에 부과함으로써 비롯된다. 더욱이 그는 상징적 양극성이 원시 사회 혹은 평등주의 사회에서는 〈역전될 수 있는 이원성〉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이들 사회가 산 자의 삶과 관련해서 고정된 도덕적 위계를 가정하지 않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망자의 삶에 관해서도 그러한 개념이 부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징적 역전성(reversibility)의 이러한 측면은 왜 평등주의 사회에서의 죽음의례(혹은 그것의 부재)가 위계적인 사회의 관찰에 입각해 있는 도덕적 위계와 상징적 정복의 이론에 충격적일 정도로 부합하지 않아 보이는가를 설명한다." "허츠는 사회적 진보에서 양능적 인간 신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양능적 인간 신체는 우파와 좌파라는 도덕적인 상징적 위계로부터 자유로운 민주적인 사회적 신체를 표상한다."(317-8)


"(냉전을 단순한 전쟁 억제가 아니라 폭력적인 이데올로기 대립으로서 경험한) 베트남의 수많은 개인과 가족들은 친족 관계가 있는 전몰자를 기억해야 하는 가족의 의무와 혁명국가에 대항해서 싸웠던 사람들을 기억하지 말아야 하는 정치적 의무 사이에서 고뇌해왔다. 오늘날 이들 가족은 지금까지 〈저편(ben kia, 미국 편)〉으로 오명화된 조상의 기억을 위해 적절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고심하고 있고, 따라서 이 기억을 가족과 공동체의 의례공간 내에 있는 〈이편(bent ta, 혁명의 편)〉의 죽음에 대한 기억과 함께 명시적으로 공존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혁명전쟁의 반대편에서 죽은 형제의 혼령을 가내 의례로 초대하는 행위는 도덕적임과 동시에 정치적인 실천이다. 그것은 그 행위가 국가의 기억의 정치학에 내재하는 죽음의 거대한 도덕적 위계에 반작용하는 한에서, 그리고 아렌트가 〈정치적 고향을 가질 권리〉로 묘사한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이다."(321)


"보다 넓은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대규모 죽음의 역사에 대한 고려 없이 좌우의 역사를 생각할 수 없다. 좌와 우는 민족해방과 민족자결이라는 이상을 향해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양자 모두 반식민적 민족주의의 일부였다. 이어진 양극 시대에 이와 같은 민족주의는 민족적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 상대편을 정치적 통일체로부터 절멸시키는 것을 의미하게 된 내적 분쟁과 전쟁의 이데올로기로 변환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좌와 우의 정치적 역사는 인간적 삶의 역사 및 그것에 의해 분열된 사회제도로부터 분리해서 고려할 수 없으며, 냉전 이후의 〈새로운 친족〉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역사 속에서 사망한 유해의 기억으로부터 분리해서 고려할 수 없다." "1990년대 초 이래 베트남에서 발생한 일들은 이러한 화해의 희망적인 궤적을 따라 이루어졌고, 망자를 기억하고 달랠 수 있는 권리의 강화는 좌우를 초월한 이와 같은 중요한 사회적 진보에 중심적인 요소였다."(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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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로서의 인류학자 - 레비스트로스, 에번스프리처드, 말리노프스키, 베네딕트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7
클리퍼드 기어츠 지음, 김병화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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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곳에 있기: 인류학과 글쓰기의 현장


"서명signature의 물음, 즉 텍스트 내부에서 저자의 존재감을 확립하는 문제는 애초부터 민족지학을 따라다녔다." "저자가 강하게 드러나는 텍스트의 표현 관습과 민족지 기획의 특수한 성질에서 비롯된, 저자가 부재하는 텍스트의 표현 관습 간의 충돌은 사물을 소유하려는 입장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겠다는 입장 간의 충돌로 여겨졌다." "인류학자들은 민족지 서술과 관련된 중요한 방법론적 사안들이 지식 메커니즘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공감', '통찰력' 등이 인지 형태로서 적절한지, 타인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내재주의적 설명이 입증 가능한지, 문화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지 하는 것들이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들은 민족지 서술을 구성하는 데서 겪는 어려움의 원인이 담론의 문제가 아니라 현지조사의 복잡다단한 문제들에 있다고 보았다. 관찰하는 자와 관찰 대상의 관계(친밀한 관계)를 통제할 수 있다면 저자와 텍스트 간의 관계(서명)는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고도 생각했다."(20)


"민족지학자가 그것을 대면하든 아니면 그것이 민족지학자를 대면하든 간에, 서명에 관한 문제는 저자이기를 주장하지 않는 물리학자의 다신주의와 저자라는 의식이 넘치도록 충만한 소설가의 주권 의식을 모두 요구하지만, 실제로는 둘 중 어느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첫번째 태도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루고, 가사는 듣지만 음악은 듣지 못한다며 둔감하다는 취급을 받는다. 물론 민족중심주의라는 비난도받는다. 두번째 태도는 사람을 꼭두각시로 취급하며 실재하지도 않는 음악을 듣는, 인상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듣는다. 이때도 역시 민족중심주의라는 비난을 받는다. 민족지학자 대부분이 자신들의 저서에서 입장을 통일하지 못하거나, 혹은 한 권의 책 속에서도 갈팡질팡하는 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친밀한 관점과 냉정한 평가를 동시에 갖추어야 하는 텍스트에서 연구자가 어디에 서야 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애당초 그런 관점을 취해 평가를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과제인 것이다."(21)


"(저자는 무엇을 저술하는가에 대한, 혹은 내가 담론discourse 문제라 칭했던) 또다른 예비적 질문은 롤랑 바르트의 「저자와 작가」에서 한층 종합적인 형태로 제기된 바 있다. 바르트는 '저자'와 '작가'를 구별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또다른 저서에서는 저자가 만들어내는 '작품work'과 작가가 만들어내는 '텍스트'를 구별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저자는 기능을 수행하고 작가는 활동을 한다. 저자는 사제 역할을 하고(그는 저자를 마르셀 모스가 연구한 주술사에 견준다) 작가는 서기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에게 '글쓰기'는 자동사이다. 〈그는 세계의 '왜'를 '어떻게 쓰는가' 안에 철저히 흡수하는 사람이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타동사이다. 그는 '무엇인가'를 쓴다. 〈그가 어떤 목표를 설정할 때(증거를 제시하고, 설명하고, 전달할 때) 언어는 그 목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에게 언어는 '실천'을 떠받칠 뿐 실천을 하지는 않는다. ······ [그것은] 의사소통 수단의 본질, '사유' 수단의 본질로 복원된다.〉"(29-30)


"이러한 '저자'와 '작가'의 구분, 혹은 담론성의 창시자와 특정 텍스트의 제작자라는 푸코식의 구분이 본질적 가치에 따른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술했던' 전통적인 '글쓰기' 대부분이 그것의 모델을 압도적으로 능가한다." "이 '저자-작가'는 마법 같은 언어적 구조물을 창조하고 싶은 욕구, '언어의 극장'에 입장하고 싶은 욕구, 사실과 이념을 소통하게 하고 정보를 상품화하고 싶은 욕구, 이 욕망 또는 저 욕망에 대한 발작적인 탐닉 사이에 끼여 있는 전문 지식인이다. 실천으로서의 언어나 수단으로서의 언어 중 어느 한쪽을 분명하게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는 철저한 문학이나 과학적 담론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인류학적 담론은 마치 노새처럼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분명하다. 또 서명의 기준에서 볼 때 한 텍스트를 어느 정도까지 어떻게 침범하는가 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그 불확실성은, 담론의 기준에서는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어떻게 창의적으로 구성하는가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31-2)


2 텍스트 속의 세계: 『슬픈 열대』를 읽는 방법


"(믿어지지 않았던 것의 갑작스러운 현전現前과도 같은) 구조주의의 '도래advent'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수사학적 업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수사학적이라는 말을 트집잡을 의도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소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을 (해당 분야의 권위자인 수전 손택이 쓴 호칭에 따르자면) 지적 영웅으로 만든 것은 이상야릇한 사실, 또는 그보다 더 이상한 설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러한 사실을 보여주고 설명틀을 잡기 위해 그가 발명해낸 담론 양식이었다." "인류학에 소소한 관심 정도밖에 없었을 이들을 대상으로 레비스트로스가 진행한 기획의 본질적인 특징은 과학과 예술의 어휘에서 빌려와서 개조한 전문어(기호, 코드, 변형, 대립, 교환, 소통, 은유, 환유, 신화, 구조 등)를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상상의 공간을 정리해준 덕에, 흥밋거리를 찾아헤매던 세대가 그곳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39-40)


"『슬픈 열대』에 대해 제일 먼저 말해야 하는 것, 또 어떤 의미에서는 최종적인 발언일 수도 있는 것은, 그것이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이라는 사실이다. 즉 서로 다른 종류의 텍스트가 하나하나 덧씌워져 무아레(물결무늬) 같은 패턴이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덧씌워진'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우리가 『슬픈 열대』에서 발견하는 것은 위계적으로 배치되어 있거나 표면에서 심층을 향해 배치되어 있는 텍스트가 아니며, 한 층 한 층 벗겨나가면서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텍스트 속에 숨겨진 또다른 텍스트 따위가 아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동시에 발생해서 서로 경쟁하고, 때로는 같은 층위에 존재하면서 상호간섭하는 텍스트이다." "즉 로만 야콥슨이 '유사성의 평면'이라 부른 것을 따라 연속적 요소들이 계열적 체계를 이루며 수직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 요소들이 '근접성의 평면'을 따라 통시적으로 결합되어 수평적으로 펼쳐져 있다."(47-8)


"여행서, 어쩌면 열대지방의 철 지난 관광 안내서, 또하나의 새로운 과학의 기초를 세우는 민족지 보고서, 루소의 복권, 사회계약론과 초조해하지 않는 삶이 지닌 장점의 복권을 꾀하는 철학적 담론, 심미적 근거를 들어 유럽식 팽창주의를 공격하는 개혁주의자의 글. 그리고 문학적 근거를 예시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문학작품······ 이 모든 것이 전시회에 나란히 걸린 그림들처럼 병존하면서, 정밀하게 상호작용하여 무엇을 만들어내는가? 거기서 어떤 무아레가 출현하는가? 전혀 놀랄 일도 아니지만, 거기서 나타나는 것은 신화이다. 텍스트 유형들 간의 모든 통사론적이고 환유적인 밀고 당기기가 만들어내는 이 책을 아우르는 형식은 다름아닌 성배 추적 이야기다." "그곳에는 절정을 이루는 신비인 절대적 타자, 고립되어 있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절대적인 타자가 있다. 그러고는 어느 정도 아쉬워하며 지친 채로 집에 돌아가, 소심하게 뒤로 물러나 있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준다."(60-1)


"물론 추적자로서의 인류학자라는 신화 역시 또하나의 환유적 텍스트로 간주될 수 있다." "즉 그가 의도한 것은 역시 다중적인 텍스트 유형을 그 구조 자체가 주제의 한 가지 사례인 하나의 단일한 구조, 즉 '신화논리학mytho-logic'으로 묶어내는 것으로서,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생활의 기초를 드러내고 더 나아가 이른바 인간 존재의 토대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레비스트로스가 체계적으로 구축한 작업의 요체는 『슬픈 열대』의 텍스트를 저마다 굉장히 다양한 통사론적 관계 속에서 서로서로 연결하고 다시 연결하며 또다시 연결하는 긴 발언으로 보인다. 『슬픈 열대』라 불리는 어떤 집적물에서 어떤 의미에서든 신화-텍스트가 출현하여, 그것으로부터 전개된 전체 작품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요약된 완결판을 넘어 전체를 지배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이것이 레비스트로스가 신화, 음악, 수학이 실재의 가장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그것들을 연구하는 것이 유일한 참된 소명이라고 여긴 이유이다."(61-2)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점은, '미개인들'을 가장 잘 알기 위한 길은 그들의 삶을 공유할 수 있도록 어떻게든 그들과 개인적으로 친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적 표현들을 누비고 꿰매어 관계의 추상적 견본을 만드는 일이라는 확신이, 계시적인 (혹은 반反계시적이라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절정의 경험을 통해 생겨났고 그것이 『슬픈 열대』에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쓸쓸한 일이지만 그의 탐색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외부인의 손이 닿은 적이 없는' 투피카와이브인을 드디어 만났을 때, 그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낯설게 보이는 생활의 기초를 꿰뚫어보는 것,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그곳에 있기'는 그들 속에 개인적으로 투입되는 방식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그것을 달성하려면 오로지 그들의 문화적 생산물, 즉 낯설게 보이는 독특한 삶의 면모를 보편적으로 해석해 직접성을 해체시킴으로써, 그 낯섦을 사라지게 하는 수밖에 없다."(62-4)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레비스트로스의 모든 저작 고유의 특징─추상화된 자기 완결성이라는─을 마침내 충분히 전해준다. '냉담한', '폐쇄적인', '차가운', '진공 상태인', '지적인' 등 문학적 절대주의 주변을 맴도는 온갖 형용사가 작품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의 책은 삶으 그려내는 것도, 삶을 환기하는 것도 아니며, 번역하는 것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삶이 어떤 식으로든 남겨놓은 재료들을 배치하고 재배치하여 그에 상응하는 공식적 체계로 정비한다. 말하자면 그의 책은 재규어, 정액, 썩어가는 고기를 반대, 도치, 동형구조로 변형시키는, 유리로 둘러싸인 자기봉합적 담론인 듯하다. 신화와 기억과 마찬가지로, 세계는 인류학 텍스트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지만 인류학 텍스트는 세계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아니라는 것, 이것이 『슬픈 열대』가 남긴 최후의 메시지이자, 그것이 밝혀낸 그의 전체 작품이 남긴 최후의 메시지이다."(64)


3 슬라이드 쇼: 에번스프리처드의 아프리카 슬라이드


"E-P(에번스프리처드)의 민족지 저술에는 토착민의 방언을 제외하면 외국어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는 매우 폭넓은 교육을 받았음에도 문학적 암시를 거의 구사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표현 영역의 전문가 중 최고의 전문가지만, 인류학 용어나 다른 분야의 전문용어를 좀처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뽐내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빈도수를 막론하고 언어 행위라고는 무난한 평서문밖에 없다. 미심쩍은 의문사, 연계된 조건문, 명상적인 돈호법 같은 것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언어를 놓고 씨름한 표시는 완벽하게 감춰진다. 말하는 것마다 모두 명료하고 자신감 있으며 호들갑 떨지 않는다. 어쨌든 언어적으로는 채워야 할 빈 곳도, 연결해야 할 점도 없다. 보이는 것 그대로 이해하면 되고, 심층적인 독해는 권장되지 않는다." "낯섦도 방해물이나 위협이라기보다는 더 흥미롭고 재미있는 요소로 느껴진다. 그것은 우리의 범주를 굴절시키지만 깨뜨리지는 않는다."(80-2)


"민족지 기록에 대한 이런 태도는 줄줄이 이어지는 깔끔하고 명석한 판단의 연쇄로, 무조건적 발언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무척이나 명료하게 소개되어 있기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선제공격적인 자기주장은 E-P의 저작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베두인족은 확실히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고 신이 자신들에게 안배해둔 운명을 믿는다.〉 (『키레나이카의 사누시 교도』) 〈엄밀한 의미에서 누에르족에게는 법이 없다.〉 (『누에르족』). … 그는 어떻게 작업하는가. E-P가 민족지 기록에 접근하는 그의 뛰어난 면모와 설득력의 주요 연원은 문화현상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상, 인류학적 슬라이드로 구축하는 그의 굉장한 능력에 있다. 그는 무엇을 하는가. 마법의 등잔인 민족지학의 주된 효과, 그 주된 의도는 인류학적 슬라이드가 묘사하는 것이 얼마나 괴상하든 간에, 우리 자신이 본능적으로 의존하는 사회적 지각의 확립된 틀로 그것에 충분히 적응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데 있다."(83-4)


"삽화, 사진, 스케치, 도표, 이런 것들은 E-P의 민족지를 조직하는 힘이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영상화된 관념에 의해 움직이며, 신화(혹은 일기)보다는 풍경화와 비슷한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또 그것은 무엇보다도 수수께끼 같은 일을 명백하게 풀어내는 데 헌신한다. 그의 세계는 정오의 세계로, 햇빛 속에서 형체의 윤곽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형체 대부분은 더없이 고유한 존재이며, 지각 가능한 배경 위에서 묘사 가능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나와는 상당히 다른 입장을 취하는 어떤 책에서 메리 더글러스는 E-P를 〈인류학계의 스탕달〉이라고 주장한다. 〈욕망들 사이의 미묘한 긴장과 균형〉을 다루는 그의 〈예리한〉 감각 때문에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나는 그가 그런 감각을 갖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산세베리나 공작부인과 마찬가지로 그가 연구한 아누아크족, 아잔데족, 누에르족, 딩카족, 실루크족, 베두인족 등이 (텍스트 속에서는 그 자신도) 살아남았기 때문이다."(88)


# 산세베리나 공작부인 : 스탕달의 장편소설 『파르마의 수도원』의 여주인공


"E-P는 준비된 청중 앞에서 '그들은 우리와 똑같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하려는 말은, 그보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가 아무리 극적으로 보일지라도 결국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이시스 강에서든 아코보 강에서든, 남자들과 여자들은 용감하기도 하고 비겁하기도 했고, 친절한가 하면 잔인한 사람도 있었고, 합리적인 사람도 바보 같은 사람도 있었다." "〈영국에서는 가장 하찮은 남자도 남자로서 최고의 삶을 누린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었다.(이제는 여기에 여성도 추가되어야겠지만.) 그런 감정을 영국을 넘어 아프리카에까지, 그보다 더 멀리 (어렵기는 하겠지만 이탈리아까지도) 확대 적용하는 것이 E-P가 슬라이드 쇼를 보여준 목적이었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오만하고 낭만적인 것일 수도 있고, '영국 이데올로기가 다시 등장한다' 따위의 몹시 부적절하기만 한 것일 수도 있지만─그것은 음흉하지도, 인색하지도, 무자비하지도 않다. 또 그 문제에 관한 한, 거짓도 아니다."(91-2)


# 아이시스 강the Isis : 옥스퍼드 부근을 지나는 템즈 강 상류의 별칭


4 목격하는 나: 말리노프스키의 후예들


"정확하든 그렇지 않든, 말리노프스키는 사실에 관한 그 자신의 고집 때문에, 또는 비상한 환기 능력을 갖춘 자신의 작업 덕분에, 그 자신이 사용한 반어법을 가져와서 말해보자면, '야수 만나기join-the-brutes' 민족지라 불릴 만한 것의 수석 사도로서 우리에게 왔다. 그는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의 방법론을 다룬 저 유명한 서문에서 〈민족지학자는 카메라와 공책, 연필을 치워두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직접 가담하는 편이 좋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쉬운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성공의 정도는 저마다 다르더다로 시도 자체는 누구나 해볼 수 있을 터이다〉라고 말했다. 이국적인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한 것처럼 만남의 즉각성에서 물러나 사고의 균형을 찾음으로써, 혹은 E-P가 한 것처럼 그들을 아프리카 항아리에 그려진 형상으로 변형시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런 즉각성 속에서 자신을 잃고, 어쩌면 영혼까지 잃어야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99)


"『엄격한 의미에서의 일기』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문제, 거의 전적으로 몰입하고 있는 문제는, 민족지학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토착생활 외에도 우리가 풍덩 뛰어들어야 할 것이 아주 많다는 사실이다. 풍경, 고립, 그 지역에 사는 유럽인들, 집과 남겨두고 떠나온 것들에 대한 기억, 소명감과 각자의 지향점, 가장 불안한 것, 자기 열정의 변덕스러움, 약한 체질, 정처 없이 떠도는 생각, 말하자면 어두운 자아. 그것은 토착민 방식으로 사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다중적인 삶을 사는, 여러 곳의 바다를 동시에 항해하는 것에 대한 문제다." "핵심은 '그곳'에서 겪은 것을 '이곳'에서 말하는 것으로 옮겨오는 경로의 문제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적인 문제다." "즉 문제는 당신 개인을 믿을 만한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설명에 신뢰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목격하는 나'를 이해하게 하려면, '나'를 먼저 이해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100-1)


"일기를 쓰는 사람─즉 (롤랑 바르트보다 더 광범위하기도 하고 동시에 협소하기도 한) 내 용어인 '목격하는 나' 접근법을 강경한 태도로 취하는 민족지 텍스트 구축자라면 누구든─의 과제는, 리비도적인 그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저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또한 〈작가에서 개인으로 전환시키는 일종의 회전고리를 통해 매혹하고······ '나는 내가 쓰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불필요하고 불확실하고 어딘지 진정성이 떨어지는 느낌이 이러한 종류의 글에, 또 요즘은 이러한 종류의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달라붙어 있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자발적'인 글쓰기 형태를 선택함으로써 나 자신이 삼류 배우 중에서도 제일 어설픈 배우임을 알게 되었으니.〉" "당장 인류학 분야의 글을 살펴보더라도, 일기를 작품으로 만드는 텍스트 구축 양식과 그것을 괴롭히는 문학적 불안의 신호들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일기병'은 이제 고질적인 것이다."(113-4)


5 우리/우리 아닌 자: 베네딕트의 여행


"베네딕트가 주로 의존하는 수사학적 전략은 너무나 익숙한 것과 굉장히 이국적인 것의 자리를 뒤바꾸는 병치 전략이다. 베네딕트의 저작에서 문화적으로 가까운 것은 괴상하고 인위적인 것으로, 문화적으로 거리가 있는 것은 논리적이고 솔직한 것으로 그려진다. 우리 자신의 생활 형태가 낯선 민족의 낯선 습관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실제로 있는 곳이든 상상으로 만들어낸 곳이든 멀리 떨어진 곳의 관습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예측 가능한 행동이 된다. 그곳이 이곳을 혼란스럽게 한다. 우리 아닌 자(또는 미국인이 아닌 자)가 (미국인인) 우리를 긴장하게 한다." "하지만 베네딕트의 저작을 지배하는 어조는 진지하기 짝이 없으며 그 어조에 조롱하는 기색은 전혀 배어 있지 않다. 그의 방식은 인간 권위의 전복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러면서도 그 태도가 세속적이라는 점에서, 그러나 더없이 진지한 방식으로 구축해나간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희극적이다. 베네딕트의 아이러니는 전부 진심 어린 것이다."(134-5)


"신념과 관습들을 숨기는 데 성공한 저작에서 베네딕트는 그 업적을 근간으로 하여 저자-작가로서 '담론성의 창시자'라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베네딕트를 유명하게 만들어 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타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방식으로 일관하는 『국화와 칼』, 『문화의 패턴』이 그 저작들이다. 이러한 종류의 작업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를 고안해본다면 '자기-원주민화self-nativising'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놀라운 업적이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이 현지조사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베네딕트는 현지조사를 거의 하지 않았고, 조사에 흥미를 보이지도 않았으며, 체계적인 이론화 작업을 거치지도 않았고, 그런 이론화 작업에 관심도 거의 없었다. 이것은 거의 전적으로 강력한 해석적 스타일을 간결하고 자신있고 정교하게, 무엇보다도 단호하게 발전시킨 결과다. 즉 명확한 견해를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다."(136-7)


"전문 인류학자로서 베네딕트의 문체는 애초부터 성숙해 있었다. 그것은 초기의 전문화된 연구들에서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했고, 그런 연구를 토대로 그는 입문하자마자 그 분야에서 매우 일찍 인정받았다." "어떤 종류의 글이든 마찬가지다. 운동 법칙처럼 명백한 것으로 보일 때까지, 또는 법률가의 발표문처럼 날조한 것으로 여겨질 때까지, 같은 것이 계속해서 이야기되고 또 이야기된다. 예로 드는 보기만 바뀔 뿐이다. 그의 글에는 스스로 단 하나의 진리를 말하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고자 하는 고슴도치 같은 태도가 배어 있다. 하지만 그 본질적인 진리(대평원의 아메리칸인디언들은 황홀경에 빠지기 일쑤이고 주니족은 지나치게 형식을 중시하며 일본인들은 위계적이라는, 그리고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렇지 않다는 진리) 때문에 베네딕트의 전문 독자들은 그의 글을 권위 있다고 평가하는가 하면 편집증 같다고 보기도 한다. 폭넓은 독자층이 생긴 까닭 또한 여기에 있다."(137-9)


# 고대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가 남긴 시구인 〈여우는 아는 게 많지만, 고슴도치는 딱 한 가지 큰일에만 집중한다〉에서 비롯된 표현


"베네딕트가 쓴 (그가 전쟁 동안 맡았던 정보 업무와 선전 작업에서 시작된) 『국화와 칼』의 탁월한 독창성과 그것이 가진 힘의 토대, 준열한 비판자들조차도 느낀 그 힘의 토대는 그가 일본과 일본인들이라는 수수께끼를 푸는 방법을 괴상하게 무장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괴상하게 생긴 세계라는 느낌을 완화하는 방향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그런 느낌을 오히려 더 강화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와 '상상 속의' 그들을 대비시키는 습관은 이 책에서 절정에 이른다." "『국화와 칼』이 예쁘게 단장된 '피도 눈물도 없는 과학정책'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원래는 의사였다가 다음에는 배 여러 척의 선장이 된 레뮤얼 걸리버가 세계 방방곡곡 오지로 떠난, 4부로 구성된 여행기』가 동화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로는 여행을 거의 하지 않았던 베네딕트는, 자신은 '세계를 바꾸기보다는 성가시게 하려고' 글을 쓴다고 한 스위프트처럼 글을 썼다. 세상이 그 점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꽤 애석할 것이다."(146-59)


6 이곳에 있기: 그것은 도대체 누구의 삶인가?


"거의 모든 민족지학자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대학에 재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지다보니 그렇지 않은 경우를 생각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양분된 존재 양식에 내재되어 있던 균열은 최근 들어 더 첨예하게 감지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두어 해씩 목축민들이나 얌을 재배하는 농부들과 드잡이하다가, 학기가 시작되면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동료들과 논쟁하는 생활방식 사이에 생긴 균열 말이다. 그들이 사는 곳에서 그들의 관심을 끄는 것과 그들이 없는 곳에서 그들을 대변하는 것 사이의, 항상 엄청났지만 잘 인지되지 않았던 간극이 갑자기 극도로 눈에 잘 띄게 된 것이다. 단지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으로만 보였던, '그들이' 삶을 '우리의' 연구로 옮겨오는 일이 이제는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심지어 인식론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되었다. 레비스트로스의 자족성, 에번스프리처드의 자신감, 말리노프스키의 무모함, 베네딕트의 태연함은 이제 무척 먼 일이 되었다."(164-5)


"법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또는 실제로 일어난 변화, 즉 인류학자 대부분이 글로 다루었던 종족들이 식민주의의 대상에서 주권국가의 시민으로 변한 상황은 민족지 연구가 이루어지는 도덕적 맥락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식민지는 아니었더라도 외딴 오지나 '바다 한복판에' 고립된 황제의 영토라는 전형적인 다른 어떤 곳(레비스트로스의 아마존이나 베네딕트의 일본)들은 그 처지가 매우 달라졌다. 팔레스타인 분할, 루뭄바, 수에즈, 베트남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이 세계의 정치 문법을 바꾸어버렸기 때문이다." "인류학적 글쓰기가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의거해온 주된 가정, 대상과 독자는 분리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무관하며, 대상은 서술되기만 할 뿐 발언할 수 없고, 독자는 통지를 받을 뿐 책임은 없다는 가정은 철저히 와해되었다. 여전히 세계는 구역화되어 있지만 그 구역들을 잇는 연결통로가 훨씬 더 많이 생겨났고, 격리되는 정도도 훨씬 더 약해졌다."(166)


"현지조사 보고서나 주제별 조사를 제외하고, 이건 매, 저건 해오라기라는 식으로 식별하는 글쓰기는 실제로는 인류학에서 매우 드물다. 이 분야가 끌었던 일반적인 관심은 앞서 다룬 저자들 같은 인류학자들이 구축한 빛나는 탑 위에 쌓인 것이다. 마치 한쪽에서만 보이는 스크린을 통해 보듯이 세계를 곧바로 바라본다는 미명, 오직 신이 바라볼 때처럼 타자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미명은 정말이지 굉장히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그런 미명 자체가 하나의 수사학적 전략이고 설득의 양식이다. 완전히 내다버리기 힘들어 여전히 읽히기도 하고, 전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지만 여전히 믿어질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실화소설faction이, 즉 실제 장소에 실제 시간대에 살았던 실존 인물들에 대한 어떤 상상적인 글쓰기가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교묘한 조작의 수준을 넘어서게 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인류학이 현대 문화에서 지적인 영향력을 이어가려면 그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175-6)


"인류학적 소명의 중요한 측면이 문학적인 것이라고 보는 관점에는 위험이 따른다. 하지만 그런 위험은 감수해볼 가치가 있다. 그 까닭은, 그러다보면 타인의 생활 형태(의 무엇인가)를 대하는 한 집단의 의식이 열리며 또 그 과정에서 그들 자신의 생활 형태(의 무엇인가)도 개방적으로 보게 되어, 우리의 이해력을 철저히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기껏해야 완전한 실패를 면한 정도 이상으로 해낸 사람이 없었던 과제인) 그것은 현재를 새겨넣는 일, 세계의 젖줄이 흐르는 어느 특정한 장소에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언어로 전달하는 일이다. 파스칼의 유명한 말처럼 '그곳'보다는 '이곳'을, '그때'보다는 '지금'을 말이다. 민족지가 그 외에 달리 무엇이든─말리노프스키식의 경험 추구일 수도 있고 레비스트로스식의 질서를 향한 열광, 베네딕트식의 문화적 아이러니, 에번스프리처드시의 문화적 자신감일 수도 있다─그것은 무엇보다도 실제의 번역이고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된 생명력이다."(1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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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인류학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24
존 모나한.피터 저스트 지음, 유나영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아주 짧은 소개


"인류학은 지리상의 발견과 식민주의, 자연과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했다. 19세기, 다윈 진화론으로 이어지는 철학 사조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인류학자들은 사회·문화적 진화의 단계를 재구성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에드워드 타일러와 루이스 헨리 모건 같은 인물들은 문자 체계부터 결혼 관습까지, 가장 원시적인 기원부터 그것이 현대에 나타난 양상까지 모든 것을 망라한 저작을 발표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인류학자들은 가장 중요하게는 식민 관료, 선교사, 여행가, 기타 비전문가들의 기술에 의존하여 1차 자료를 얻는 데 더이상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민족지학자로서 자신만의 정보를 직접 얻기 위해 '현지(field)'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민족적 선구자들의 시대 이래로 인류학이 상당히 많이 변화하긴 했어도 여전히 민족지는 인류학을 다른 사회과학과 구분 짓는 요소 중 하나이며, 아마 모든 인류학자들이 민족지 기술의 중요성에 동의할 것이다."(9-10)


"20세기 초에 인류학자들은 대체로 단순한 기술을 지닌 소규모 사회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일부분 식민주의가 도래하면서 급속히 바뀌고 있던 생활 방식을 기록하려는 열망의 발로였고(물론 이들 사회가 서구와 접촉하기 이전에 변치 않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착각이지만), 일부는 인간 제도의 '본질적' 혹은 '기본적' 형태에 다가가려는 열망의 발로였다(이들 사회가 더 '초보적'인 법이나 종교 등을 지녔다고 가정하는 것 또한 착각이지만). 20세기 후반의 주류 인류학은 자신을 자연과학 전통에 속하는 학문으로 보는 시각에서 멀어졌고, 보다 해석적이고 인문학적인 접근법을 채택했다. 또한 비서구·소규모 촌락에만 맞추었던 초점을 전환하여, 도시의 산업화된 환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노동조합, 사교 클럽 등 기존 사회학의 범주에 속했던 집단으로까지 대상을 넓혔다. 그럼에도 인류학은 모든 사회를 염두에 두고 그들 모두를 똑같이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그 범위에 있어 대체로 비교 연구의 성격을 띠고 있다."(10)


1 동고에서의 다툼: 현지조사와 민족지


"인류학자가 하는 일은 다른 무엇보다도 민족지(ethnography)다. 문화인류학자나 사회인류학자에게 민족지란 생물학자의 실험실 연구, 역사학자의 문헌조사, 사회학자의 설문조사와도 같다. 흔히─완벽히 정확한 용어는 아니지만─참여관찰(participatory observation)이라고도 불리는 민족지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이해하려면 그들과 장기간에 걸쳐 긴밀히 상호작용하면서 관찰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명백히 단순한 개념에 토대를 두고 있다. 전통적으로 인류학자들이 자기가 연구하는 공동체 안에서 장기간─때로는 한 번에 몇 년씩─거주하며 그 사람들과 최대한 많은 생활을 공유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현지조사에 몰입하는 과정은 사람들을 꾸준히 인류학으로 끌어들이는 독특한 경험이자 도전일 수 있다. 또한 참여관찰은 타인들이 세상을 보고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깊이 이해하며 흔히 우리 자신의 선입견과 믿음에 제동을 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 같다."(26-8)


"민족지적 방법은 뜻밖의 발견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서베이나 통계 조사 같은 고도로 연역적인 사회과학 방법론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힘과 유연성을 지닌다. 실제로 인류학자들이 현장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연구 주제들이 있는 반면에, 현장의 실제 상황과 일상적 사건들이 우리 앞에 우연찮게 떨구어놓는 주제들도 있다. 민족지에서 뜻하지 않은 발견의 임의적 성격은 훌륭한 민족지학자가 현장에서 보내는 시간의 길이를 통해 보완할 수 있다. 그래서 조사가 끝날 무렵에는 이렇게 우연한 방식으로 대부분의 중요한 사회 현상을 접하게 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민족지 현지조사가 제공하는 경험적 맥락이 없이는, 사회적 사건의 외견과 그 '실체' 사이의 불일치를 포착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인류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에서 통찰을 이끌어내기 위해 전통적으로 의존해온 강점 중 하나이자, 전통적인 민족지 현지조사가 장기간의 초기 조사를 중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34-6)


"민족지학자는 사회생활의 어떤 특정한 측면을 연구할 의도를 가지고 현지에 간다. 그 주제는 생태적 적응, 토착 신앙, 성별 관계, 풀뿌리 정치 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민족지학자는 준비 없이 모험에 뛰어들지 않는다. 대부분의 인류학자는 자신이 현지조사를 하려는 지역의 역사와 과거 민족지 문헌을 몇 년씩 공부하면서 준비를 시작한다. 인류학자들은 자신이 연구하는 사람들의 언어로 통역 없이 현지조사를 수행하는 것을 의무로 여겨왔으므로, 민족지학자 또한 몇 개 언어를 최소한 통용 가능한 수준으로 구사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일반적인 준비 외에도, 민족지학자는 자신이 조사하고자 하는 문제와 관련된 보다 전문적인 분야의 훈련을 받곤 한다. 예를 들어 아마존 원주민의 약용 식물을 조사하려는 연구자는 통상적인 식물학도 공부해야 하지만,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식물을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하고 이용하는지도 익혀야 한다. 인류학자는 항상 〈어떤 지역의, 무엇에 대한〉 인류학자다."(38-9)


"참여관찰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민족지학자가 공동체를 일종의 시공간적으로 고립된 모습으로 재현하고픈 유혹에 빠진다는 것이다. 특히 1930~40년대의 '고전적' 기술에서 많은 민족지학자들은 '민족지적 현재'라는 것을 적용하여, 공동체와 이웃한 다른 사회나 그것을 둘러싼 국가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은 채, 공동체가 마치 정지된 시간 속에, 역사적 맥락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처럼 묘사했다." "실제로 자기 모험의 낭만에 휩쓸린 인류학자들이 사회의 '훼손되지 않은' 전통을 그 사회의 성원들보다 오히려 더 높이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민족지적 현재'에 대한 또다른 비판은 민족지학자들이─마치 자신이 제시하는 정보를 이끌어내는 데 자신이 능동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것처럼─전지적 삼인칭 시점으로 글을 쓰는 경향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문제에 접근할 때, 우리는 민족지 기술의 독특함을 상대적인 시공간적 맥락에 놓아줄 문화 상호 간의 비교가 없으면 민족지는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44-6)


2 벌 유충과 양파 스프: 문화


#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정의들

1. 에드워드 타일러(1871) : 광범위한 (비교) 민족지적 의미에서 보았을 때, 문화 혹은 문명이란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 관습, 그밖에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이 획득한 능력과 습관들을 포함하는 복합적 총체이다.

2. 프란츠 보아스(1930) : 문화는 한 공동체의 사회적 관습의 모든 발현, 자신이 속한 집단의 관습에서 영향을 받은 개개인의 반응, 그리고 이러한 관습에 의해 결정된 인간 행동의 산물들을 포괄한다.

3. 브로니스와프 말리노프스키(1944) : 문화는 도구와 소비재로, 다양한 사회 집단의 입헌 헌장으로, 그리고 인간의 사고와 기술, 신앙과 관습으로 이루어진 통합적 총체이다. ······사람은 바로 이것에 의존하여 당면한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에 대처할 수 있다.

4.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83) : 문화는 자연적인 것도 인위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유전자에서 유래한 것도, 합리적 사고에서 유래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대부분 그 기능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따르는 의식적으로 고안되지 않은 행동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5. 레나토 로살도(1989) : 문화는 인간의 경험을 선택하고 조직하여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문화는 일상적인 것과 심오한 것,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 우스운 것과 숭고한 것 모두를 포함한다. 문화 자체는 고급과 저급도 아니며 어디에나 배어들어 있다.

6. 워드 H. 구디너프(1963) : 문화는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기준, 무엇이 될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기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를 결정하는 기준,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할지를 결정하는 기준, 그것을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7. 마거릿 미드(1937) : 보편 문화(Culture)는 인류가 발전시켰고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습득된 전통적 행동들의 총체적 복합체이며, 특수 문화(a culture)는 주어진 사회, 사회 내의 한 집단, 특정 종족, 특정 지역, 특정 시기에 특유하게 나타나는 전통적 행동의 형태를 의미한다.

8. 애덤 쿠퍼(1994) : 문화는······ 학습된, 적응 가능한, 상징적인 행동으로, 완전하게 발달한 언어를 토대로 하며, 기술적 독창성, 즉 기술의 복합과 연관되어 있고, 이러한 기술의 복합은 다시금 공동체 사이의 교환 관계를 조직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20세기 초에 프랑스의 사회이론가 에밀 뒤르켐과 그의 조카 마르셀 모스는 인간의 분류 능력이 우리가 지닌 사회적 본성의 연장이라고 주장했다. 〈사회는 단지 분류적 사고의 준거 모델일 뿐만 아니라, 분류 체계의 틀로서 기능하는 그만의 고유한 틀이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분류는 정말로 보편적이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것은 구별하고자 하는 인간의 성향이 창출해낸 분류가 인간 정신의 이원적 본성에 의해 형성된 보다 근본적인 '심층 구조'의 표면적 재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뒤에 미셸 푸코의 영향을 받은 인류학자들은 문화적으로 부과된 의미 범주들이 불평등과 억압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문화적 분류의 내용을 통제하는 능력을 사회 내 권력의 주된 원천으로 보았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 같은 사회적 분류 범주들과 여기에 결부된 온갖 사회·정치·경제적 의미들의 경합(contestation)은 권위에 저항하는 주된 방식이 된다."(70-2)


"문화가 통합된 총체이자 통합시키는 총체라는 생각은, 외견상 별개의 것처럼 보이는 믿음이나 행동들 하나하나의 기저에 보다 근본적인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는 거대한 모더니즘적 통찰에 일부분 기반하고 있다. 마르크스에게 현실을 결정하는 것은 생산 양식이었다. 뒤르켐에게 그것은 사회였다. 프로이트에게 그것은 무의식이었다. 그리고 보아스의 뒤를 이은 많은 인류학자에게 그것은 문화 자체였다. 그 총체의 본질에 대한 개념을 중심으로 인류학의 서로 다른 학파들이 형성되었다. 보아스의 제자였던 루스 베네딕트는 문화를 '게슈탈트(Gestalt), 즉 하나의 총체적 패턴으로 인식했다." "클리퍼드 기어츠는 마치 소설이나 시를 읽듯이 문화도 텍스트로 읽을 수 있다고 보았다. 기어츠에 따르면 이러한 트릭은 그 사회의 성원들 스스로를 사로잡는 문화적 '텍스트'를 찾아내고, 이를 그들이 보는 방식대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텍스트'의 주제가 사회의 다른 측면을 조명하는 방식까지 들여다보기 위한 것이다."(74-6)


"그 반대편 극단에는 문화가 통합된 것임을 부인하거나, 문화란 '넝마조각 같은 것', 즉 복잡하지만 본질적으로 임의적인 역사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응수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게서 나왔다. 그는 주어진 문화에서 발견되는 요소들의 역사적 기원이 제각각이기는 해도, 이것들은 '브리콜라주(bricolage)'─문화의 잡동사니들이 애초에 의도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근본적 패턴에 들어맞는 용도를 새롭게 부여받은 일종의 콜라주─로서 한데 엮여 있다고 지적했다. 보다 최근 들어서, 근본적 기반이라는 모더니즘적 가정을 부인하는 인류학자들은 이 '브리콜라주' 개념을 이용하여, 문화적 요소를 계속 뜯어고치고 던져버리고 재생시켜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복합체로 만드는 과정이 바로 문화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봄으로써 이들은 문화의 본질화라는─문화를 역사 바깥에 존재하며 인간이 주체성을 발휘할 여지가 없는 대상처럼 취급하는─문제를 피해갈 수 있다."(78-9)


"여러 난점에도 불구하고, 인류학의 문화 개념은 우리 학문 분야가 현대 사상에 한 가장 중요한 기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공동체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기반이 근본적으로 임의적이며 학습된 것임을 밝혀낸 문화 개념은, 인종주의나 민족적 쇼비니즘, 그리고 19세기 인류학의 상당 부분을 특징지었던 '과학적' 인종주의와 대적하는 막강한 무기였다." "당시 미국에는 이주민 중 특정 민족이 유전적으로 '약하고' '열등하다'는 식의 믿음이 팽배해 있었는데, 영원한 경험론자였던 보아스는 어떤 민족이든 일단 미국에 와서 건강 및 영양 상태가 개선되면 급속이 누구 못지않게 강건해진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믿음을 타파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생물학적 유전보다는 환경이 인간의 특성과 행동을 결정하는 주된 요인이라는 보아스의 확신은 그의 일부 제자들에게 계승되어 문화결정론이라는 이론으로 발전했고, 이는 우리가 아직까지도 벌이고 있는 '본성 대 양육' 논쟁에서 정점에 다다랐다."(81-2)


3 어느 짧은 만남: 사회


"우리는 자기 정체성의 많은 측면을 우리가 속한 다양한 집단으로부터 얻는다. 인류학자들은 행동을 문화가 제공한 인지 지도의 결과물로 보았다. 하지만 인간 행동이 '사회적' 종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지닌 본성의 한 측면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두가 알 듯이, 우리는 그 안팎의 관계가 '규칙'의 지배를 받는 집단들로 조직되며,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이러한 기능은 개별 구성원이 죽은 뒤에도 지속된다. 우리는 문화를 '지녔지만' 사회에 '속해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문화에 대한 관심은 사람들이 주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알아내고 그들의 행위를 틀에 끼워맞추고 다른 이들의 행위를 해석하려는 열망에 의해 촉발된다. 사회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지배하는 규칙과 질서,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는 방식, 활동이 조직되는 방식에 대한 이해와 더 관련이 있다. 이 두 접근법은 같은 복잡한 대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것일 뿐, 서로 전혀 배치되지 않는다."(91-2)


"레드클리프브라운을 비롯한 '구조기능주의자' 혹은 '기능주의자'들은 사회구조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개인과 집단 간 관계의 패턴을 기술했고, 이러한 패턴을 그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경향이 있었다. 말리노프스키 같은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기능이 그가 말한 '욕구의 원칙', 즉 식량과 주거 등 사회 개별 성원들이 지닌 기본적 욕구 충족과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또다른 학자들은 이러한 기능이 사회 제도의 작동 및 영속성과 더 큰 관계가 있으며, 사회관계의 유지에 필요한 일종의 경비라고 보았다. 기능주의자들은 사회 제도가 '항상성 평형 상태'에서 스스로 영속하며 사회구조가 행동을 제약한다고 보았으므로, 사회 변화를 설명할 수 없는 사회관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기능주의자들이 기술한 많은 사회가 식민지였고 엄청난 변동과 재편을 겪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이는 특히 중대한 결함이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사회생활의 역동적 특질과 개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더 기울고 있다."(99-10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호혜성, 교환, 동맹을 본질적인 사회관계로 여겨, 사회구조가 집단 간 결혼 파트너의 흐름을 조직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레비스트로스가 볼 때, 친족 집단 간의 다양한 동맹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와 우선혼(preferential marriage, 배우자감으로 더 우선시되는 후보는 있지만 특정 범주의 친척과 결혼해야 한다는 강제 규정은 없는 혼인 방식)을 하는 사회 간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사회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유기체 모델에서 사이버네틱 모델로 바꾸어놓은 이들 중 한 사람이다. 이에 따라 사회의 부분들은 신체 기관과 유사하기보다는 정보 체계 내의 데이터 흐름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좀 더 최근의 인류학자들은 사회구조 자체의 본질에 대한 관심이 줄고, 사회에서 권력 관계가 유지되고 경합하는 방식으로 주의를 돌리는 듯하다. 그들이 볼 때, 사회구조란 순수하게 국지적인 전통의 산물인 마큼이나 글로벌한 정치·경제적 힘의 산물이기도 하다."(101-2)


"막스 베버는 합리화(rationalization) 개념으로 전통 사회와 현대 사회의 제도적 관계의 차이를 설명한다. 제도─상대적으로 독립되고 지속적이고 자율적인 행동과 이데올로기의 패턴─가 그 속의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수행하는 과업을 중심으로 조직된다는 것이다. 베버에 따르면, '전통' 사회의 개인이 속한 집단은 서로 중복되는 다수의 역할을 수행하며, 그의 삶의 모든 측면과 연관된 사회적 자아를 구성한다. 반면에 '현대' 사회가 일반적으로 지닌 '합리적 제도' 내에서는 개인의 특정한 과업 수행 능력이 그의 사회적 자아의 어떤 측면보다도 중시된다." "베버와 그의 많은 추종자들에게 현대적 제도의 정수는 관료제다. 이는 '관료에 의한 지배'로 흔히 전형화되지만, 베버는 관료제를 이해하는 핵심이 개개인을 초월한 목표를 위해 대규모 집단을 조직하고 절차에 대한 명시적 규칙을 통해 구성원들의 행위를 조절함으로써 현대의 행정적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에 있다고 여겼다."(102-6)


"대체로 우리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여길 때는 그것을 높이 평가하게끔 배웠기 때문이지 그것이 본질적으로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좋은 와인이나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취향은 대다수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돈과 공을 들인 교육의 일부로서 습득된다. 우리가 이런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드러낼 때는 그것을 진정으로 음미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내가 감식안이 있고, '삶의 더 좋은 것들'의 진가를 알아볼 능력이 있는 엘리트의 일원이며, 싸구려 포도주와 이발소 그림이 취향의 최대치인 이들보다는 우월하다는 메시지도 드러내고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것을 '문화자본'이라고 불렀다. 부르디외는 마르크스와 베버의 통찰을 결합하여,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사회가 전문화되고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지니며 위계적으로 조직된 무수한 장(field) 또는 제도(예술, 과학, 법률, 경영, 대중 매체 등)들로 분리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지위를 얻기 위해 끊임없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보았다."(112-3)


4 페르난도가 아내를 얻고자 하다: 성과 혈연


"누요와 도우 동고의 사례에서 우리는 결혼이 관련 집단들 사이의 부(wealth)의 이전과 결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부의 이전은 결혼에 합법성을 부여하며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노동력이나 장래의 자녀에 대한) 권리가 이전되었음을 인정하는 역할을 한다. 신부대(brideprice)는 신랑측 집단에서 신부측 집단으로의 부의 이전이다. 신부봉사(brideservice)는 신랑측 집단에서 신부측 집단으로 노동력을 이전하는 것이다. 일부 유럽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지참금(dowry)은 신부측에서 신랑측으로의 부의 이전이라기보다는 신부가 자기 집안에서 상속받은 몫에 해당한다. 신부대는 흔히 현금으로 지불하지만 사치재인 경우도 많다. 결혼하고자 하는 젊은 남성은 신부대 지불에 필요한 사치재의 조달을 흔히 자기 친족 집단의 연장자들에게 의존한다. 집단의 연장자들이 이런 귀중품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은 그가 책임감과 충성심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며, 그가 성인의 문턱을 넘어섰다는 자격증을 수여하는 셈이다."(124-5)


"한 명의 파트너와 평생 유대를 지속하리라는 전제가 통하지 않는 사회들도 많이 있다. 한 남성이 둘 이상의 아내를 가질 수 있는 일부다처제(polygyny)는 흔하다. 반면, 한 여성이 둘 이상의 남편을 가질 수 있는 일처다부제(polyandry)는 그보다 훨씬 드물며, 티베트와 인도 북부 고산 지대의 사례가 잘 알려져 있다. 적어도 티베트의 일처다부제는 일부다처를 거꾸로 뒤집은 것이 아니고, 주로 형제들이 한 여성과 공동 결혼을 한다. 일처다부의 인구학적 결과는 일부다처의 인구학적 결과와 정반대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몇 년에 한 번씩만 출산을 할 수 있고 대개는 한 번에 한 명씩만 낳으므로, 일처다부혼은 인구 증가를 억제하고 토지와 같은 상속 가능한 유산을 보존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일부다처제는 인구 증가를 촉진하며 토지 자원을 자손들에게 빠르게 분산시킨다. 일부일처제,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는 전혀 상호배타적이지 않지만, 주어진 사회의 경제적·생태적 조건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날 수 있다."(129-30)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이상화된 관점에서 볼 때 친족의 최소 단위에는 아내의 남자형제가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아내의 남자형제는 아내를 그 남편에게 '준' 가족을 대표한다. 레비스트로스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결혼은 두 남성이 여자 형제를 교환하고 이 결혼에서 생긴 자손들이 다시 사촌끼리 결혼함으로써 동맹을 갱신하는 형태의 결혼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우리에게는 조금 괴상하거나 심지어는 근친상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사촌 간의 결혼이 허용되거나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의무인 사회들도 많이 있다. 남성들이 외삼촌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몇 세대 계속되면, 그 남성 자손들의 두 가계 사이에 결혼 동맹이 형성된다. 또 남성들이 친삼촌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몇 세대 계속되면(이는 중동에서 훨씬 선호되는 패턴이다) 단일한 부계 혈통이 강하게 유지된다. 만약 이것이 유목 사회라면 그 집단이 소유한 가축 떼를 한데 모아서 유지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134-5)


"전세계적으로, 피(또는 모유, 뼈, 그밖에 생식 행위를 통해 전달된다고 여겨지는 물질)를 나눈 개인들이 강한 유대에 의해 서로 결속된다는 관념은 가내 및 자녀 양육 집단의 토대를 이룬다. 하지만 이는 훨씬 더 큰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실체의 토대를 이루기도 한다. 많은 사회, 특히 아프리카 사회에서 혈통을 공유한다는 이데올로기는 사회가 조직되는 주된 방식이다. 종족(lineage)은 알려진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집단이다. 그리고 씨족(clan)은 그 구성원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인식하는 종족들의 집단이지만 여기서는 그 친족 관계를 정확히 따지기가 불가능할 수도 있으며, 이 조상이 신화적 존재나 특정한 사물이나 동물 토템일 수도 있다." "많은 경우에 결혼이란 우리 사회에서처럼 새롭고 독립된 사회 단위를 이루는, 단지 두 개인의 결합이 아니다. 세계의 아마도 대다수 사회에서 결혼은 두 집단 간의 결연이라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136-7)


5 라 보세가 바카르가 되다: 카스트, 계급, 부족, 민족


"토템 씨족은 전세계에 걸쳐 놀라울 만큼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정체성 구분은, 출생의 우연을 제외하고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 사람들이 '한 동물종이 다른 동물종과 다르듯이 나의 집단은 다른 집단과 다르다'고 선언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이런 식의 차이를 위한 차이 만들기는 현대 세계로도 그대로 옮겨진다. 그래서 크게 놓고 보면 서로 구분이 안 가는 미국의 칼리지와 대학들이, 토템 명명과 거의 같은 식으로 저마다 독특한 엠블럼과 색깔을 달고 모교의 스포츠 팀 이름을 붙이고서 자기들끼리 맹렬한 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해서 얻는 게 무엇일까? 일부분 이는 소속감을 증진시키며, 학생과 동문들이 열광적이고 의례적인 연대감의 표출에 참여할 수 있는 많은 기회─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운동 경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뒤르켐은 이런 종류의 경험을 '집합 흥분(collective effervescence)'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이것을 사회적 연대의 핵심에 놓았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경험의 뿌리로 규정했다."(144-5)


"그런가 하면 서로 다른 무수한 부분들의 복잡한 상호의존에 기반하여 연대가 이루어지는 크고 복잡한 사회들은, 스스로가 동질적 실체라는 환상을 구축하는 데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곤 한다. 이런 과정은 20세기 식민 제국의 해체 이후에 출현한 신생 국가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그들은 국어를 제정하고 학교에서 공통의 역사를 가르치며, 공유된 역사에서 끌어온 애국적 인물과 상징들을 신생 국가의 대표로 내세웠다. 각종 국가 상징물과 국민국가를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 신화를 차용한 정교한 시민 의례가, 공통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수단으로서 만들어지고 시행되었다. 뒤르켐은 이것을 '집합 표상(collective representations)'이라고 일컬으며 사회적 연대의 상징적 속성을 인정했다. 단순하고 동질적인 사회들이 그 미미한 차이를 가지고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데 열중하는 한편, 복잡하고 이질적인 사회들이 그 유기적 다양성으로부터 통일을 이루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아이러니로 느껴진다."(145-7)


"인종과 종족은 어떻게 구분될까? 두 범주 모두 '문화적으로 구성된(culturally constructed)' 범주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생물학적─흔히 그릇된─사실과 조금 관계가 있긴 하지만 주로 사회적인 범주로서 자신과 타자를 흔히 도덕적인 뉘앙스로 규정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종족성은 문화·언어·종교의 요소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말레이인'의 법적 정의에는 그가 무슬림이라는 항목이 포함된다. 한편, 인종은─이것 또한 문화적으로 구성된 범주이지만─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이를테면 피부색 같은) 특성을 강조하며, 모든 인간 유형의 생물학적 기원에 대해 포괄적 설명을 제시하는 민속이론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론들은 예컨대 세계의 '인종들'이 노아의 아들들에서 기원했다는 생각처럼 신화적인 토대에 뿌리박고 있다." "보아스는 인종주의 이론에 맞서는 것이 인류학의 중요한 공적 사명이라고 여겼고, 그의 제자인 루스 베네딕트는 1940년에 집필한 책에서 '인종주의(racism)'라는 용어를 고안했다."(154-6)


"우리가 종족에서 공통의 핏줄에 기반한 정체성을 본다면, 인종에서는 공통의 신체적 특성에 기반한 정체성을, 민족주의에서는 공통의 유산과 경험을 기반으로 삼은 국가를 본다. 거의 모든 현대 국가들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포괄하므로, (정치적 자치를 표방하는) 민족주의는 특정한 종족이나 인종의 정치적 표현일 때가 많다. 민족주의는 현대 세계에 너무나 깊숙이 배어 있어서 우리는 '민족(nation)'과 '국가(state)'를 흔히 혼용해서 쓴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수립된 국가가 없어도(혹은 쿠르드족처럼 몇몇 국가에 분산된 상태로도) 존재할 수 있으며, 국가─중앙집중화되고 관료화되었으며 그 통제권이 주어진 영토 전역에 미치는 정치 단위─또한 민족주의가 아닌 다른 원리를 기반으로 수립될 수 있다. 국민들이 명백히 하나의 언어나 관습이나 유산을 공유하지 않는 많은 현대 국가에서도 그러한 것을 고취하는, 말하자면 공통된 전통을 '발명하는' 프로그램에 엄청난 자원이 투입된다."(156-7)


6 누요에서의 축제: 사람들의 소유물


"호혜적 거래가 언제나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것은 아니며, 언제나 주는 이와 받는 이 사이의 평등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많은 경우에는 주는 쪽이 받는 쪽보다 물질적인 면에서는 아니라도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여겨지며, 준 선물과 동등하거나 (가능하다면) 보다 나은 답례가 올 때까지 그 우월한 위치를 누린다. 받은 선물에 대해 정확히 똑같이 답례하는 것은 적대적인 행위로 비칠 수도 있는데, 이는 교환으로 쌓아올린 관계를 사실상 끝내버리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호혜성의 정치를 보면, 공동의 연대 말고 다른 것도 교환의 동기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미국과 캐나다 북서부 해안의 아메리카 원주민 집단들 사이에서 행해진 경쟁적 교환이 그 적절한 사례다.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집단들은 '포틀래치(potlatch)'라는 행사를 열어서 상대방이 쉽게 답례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선물을 주려고 노력했다. 이는 그들의 우월한 경제적·사회적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176-7)


"이런 식의 비대칭은 물질적 재화로 답례할 능력이 전혀 없는 의존 관계에서도 작동한다. 이런 경우에는 복종이나 경의나 충성으로밖에 보답할 길이 없다. 의존 관계가 사회경제 체제의 일부로 자리잡은 사회에서 그 결과는 '피후견 관계(clientage)', 즉 부유하거나 힘 있는 후견인과 그들에게 물적 자원이나 보호를 의존하는 이들 사이의 관계가 된다. 가장 덜 모멸적인 후견-피후견 관계에서는 후견인 측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의식을, 피후견인측이 진정한 충성심을 유지한다. 좀더 착취적인 상황에서 피후견 관계는 후견인측의 갈취나 다름없어진다." "이렇듯 경제 관계는 정치·사회적 관계 속에 떼어낼 수 없이 묻어들어 있기 때문에, 그 사회의 수많은 다른 측면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로 실물 경제를 이야기하기란 어렵다. 문제는 우리가 자본주의 경제에 너무 깊이 매몰되어 있어서 시장에서 사고파는 행위만이 유일한 '경제' 행위이며 국민국가만이 그러한 활동의 유일한 배경이라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178-9)


"사람들이 무언가를 원할 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경제학자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식량, 주거 등등)를 열거하며 대답하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소비 결정에는 다른 변수들도 개입한다. 심지어 식량 같은 인간의 필수 요소도 문화적 변수에 의해 굴절된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신세계에 처음 도착했을 때, 주변에 옥수수, 사냥감, 과일, 채소가 풍부했는데도─그들이 건강한 식단의 필수 요소라고 믿었던─포도주나 밀이나 올리브유를 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굶주리고 있다고 믿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과시적 소비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 대다수와 다르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특정한 물건을 원한다. 하지만 유능한 광고 회사 경영진이라면 모두 알다시피, 자신이 어느 집단의 일원이고 어느 집단의 일원이 아님을 표시하고픈 소비자의 욕망은 의복에서 자동차에 이르는 광범위한 상품의 매출을 올려주는 일등공신이다. 따라서 소비는 저절로 되는게 아니라 학습해야 하는 것이다."(181-2)


"신디 로퍼가 말했듯이, '돈이 모든 걸 바꾼다'. 단순한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호혜와 교환의 정치에서 거래의 '경제적' 가치는 거래로 맺어지는 사회관계에 종속된다.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각각의 거래는 교환에 참여하는 개개인만큼이나 독특하다. 말리노프스키는 트로브리안드제도 사람들이 다른 멜라네시아 섬사람들과의 복잡한 교환 '고리(ring)'에 참여하는 것을 관찰했다. 이 고리에 참여하는 개인들은 평생토록 맺어진 교역 파트너와 모종의 재화를 교환하기 위해 먼 거리를 여행한다. 이 '쿨라 고리(kula ring)'를 따라 물품들이 순환하면서 그것이 거래되어온 역사와 그 이전 소유자들의 내력도 함께 순환하므로, 각각의 교환과 각각의 물품은 독특한 생애사를 지니게 된다. 현대 경제의 주춧돌인 화폐와 시장 교환은 정확히 그 반대의 효과를 띠며, 이는 매우 의도적인 것이다. 가치를 공통의, 규격화된, 태환 가능한 표준으로 환원하면 교환의 효율이 그 속도와 총량 면에서 현저히 증대하기 때문이다."(183-4)


7 비마에서의 가뭄: 사람들이 믿는 신


"비록 그 연관성이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종교와 사회는 서로를 반영하는 모델인 동시에 서로를 형성하는 모델이다. 우주론적 명제와 사회 구조 사이의 이런 유사성은 종교와 사회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암시해왔다. 종교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종교의 일상적 실천에, 그리고 이것이 다른 사회생활과 연결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뒤르켐은 사회적 범주화의 기본 형태를 종교에서 찾을 수 있으며 사람들은 우주론을 통해 사회를 표상하므로 사회와 종교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종교적 의례가 '사회가 그 자신을 숭배하는' 한 예라는 말은 이 개념을 투박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보다 덜 결정론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여, 종교가 집단과 개인을 동원해 위기와 난관을 헤쳐나가는 방식을 강조한 학자들도 있다 일례로 통과의례(rites of passage)에서, 개인이 한 사회 정체성을 벗고 다른 정체성으로 옮겨가는 위태로운 이행은 흔히 사회의 가장 정교한 의례를 통해 이루어진다."(196)


"유럽의 민속학자인 아르놀드 방주네프는 사람들이 사회를 방이 많이 있는 큰 집으로 상상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각각의 방은 서로 다른 사회적 지위를 상징한다. 통과의례는 사람들을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옮겨놓음으로써 그들이 낡은 지위를 벗고 새 지위를 얻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러한 이행 중에 개개인을 옛 지위로부터 들어내어 새로운 지위의 휘장을 수여하기 위해 고안된 의식이 치러지며, 의식에서 이 과정은 흔히 죽음과 재생의 은유로 묘사된다. '문턱에' 선 개인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특별한 지위를 가지며, 이 지위는 흔히 특별한 의복을 입음으로써, 신체 외관을 변화시킴으로써, 혹은 금욕을 견딤으로써 표시된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세례식처럼 태중에서 유년으로, 유대교의 미츠바처럼 유년에서 성년으로, 결혼식처럼 미혼에서 기혼으로, 장례식처럼 산 상태에서 죽은 상태로 옮겨다주는 종교적 의례에 익숙하다. 졸업식이나 취임식 같은 세속적 통과의례 또한 우리에게 익숙하다."(196-7)


"기존에 확립된 믿음이 삶의 문제에 대해 더는 적합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식민 정부나 신식민 정부에 종속된 사회들은 이런 갑작스럽고 압도적인 변화를 겪는 일이 많은데, 그로 인한 혼란을 전통 종교의 믿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강렬한 종교 운동이 발생할 수 있으며,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설명과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는 어떤 선지자가 이런 운동을 이끌곤 한다. 이를 천년왕국 운동(millenary movement)이라 하는데, 이런 운동을 이끄는 개인들은 성스러운 권위를 가지고 발언하며, 그러한 권위에 힘입어 삶의 온갖 위기에 대한 해결책의 일부로서 광범위한 종교적·세속적 변화를 도입하기도 한다." "세계의 많은 대형 종교들도 시작은 일종의 부흥 운동으로부터, 즉 자신의 문제에 대해 기존의 신앙이 제시하는 것보다 더 포괄적인 해답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상상력에 카리스마적 선지자의 예지가 불을 붙이면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199-203)


8 냐뉴 마리아가 벼락을 맞다: 사람들의 자아


"내가 누구이고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 상식의 기본 토대를 이루는 듯 보이는 개념처럼 우리 삶의 경험의 대단히 본질적인 측면들도 실은 문화들 간의 엄청난 차이에 좌우된다." "서구인들은 인격으로서의 자신을 볼 때, 자신을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 자신─그리고 우리의 자아─에 대한 이런 식의 관념에서 나온 것이 바로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다. 예컨대, 미국의 어린이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누구나 커서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역사적·정치적 현실은 일단 접어두고, 이런 관념은 우리 모두가 똑같이 지닌 역량과 권리에 토대를 둔 인격(personhood)─여기서 우리는 자아에 대한 관념이 더 포괄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를 표명하는 방식을 가리키기 위해 '인격'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의 개념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이 맥락에서의 인격은 우리를 서로 다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같게 만드는 것에 의거하여 정의된다."(212-3)


"그러나 인격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거의 정반대인 듯한 사회들도 있다. 중앙아메리카의 또다른 민족인 마야인의 언어에는 '비니크(vinik)'라는 단어가 있다. 초기의 스페인인 관찰자들은 이 단어를 처음에 '개인(individual)'으로 번역했지만, 좀더 면밀히 들여다보니 이 단어는 보다 미묘한 다른 의미들을 띠고 있었다. 1699년 스페인의 사제이자 언어학자인 프란시스코 바레아 신부는 '비니크'가 〈인격(person)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언어에는 '나의 인격'이라든지 '당신의 인격'이라는 말이 없다······ 그보다 이는 '나의 족속(people of my nation)'이라는 뜻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마야어의 '비니크'는 또 '스물(20)'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이데올로기에 따라 인간에게는 스무 가지의 기본 유형이 존재하며, 이 유형들은 서로를 보완하고 뒷받침한다." "따라서 마야어의 '비니크' 개념은 이른바 '관계적 인격 개념'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여기서 인격이란 인간 개인에게 고착된 지위가 아니라 집단의 속성인 무엇이다."(213-5)


"중앙아메리카 달력은 태양년(360일)을 20일씩 18개월로 나누었는데 한 해의 마지막 닷새는 이름 없는 날 혹은 불길한 날이었다. 이때는 일종의 시간 바깥에 놓인 시간으로 여겨졌고(많은 지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여긴다), 온갖 나쁜 일─특히 세상의 종말─이 일어날 수 있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금기, 단식, 의례를 엄수하면서 근신했다. 이 시기에 태어난 불운한 아이들은 운명을 갖지 못했다─다시 말해서 정체성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이 결여되어 있었다. 일부 민족지 자료와 사료는 이 이름 없는 닷새 동안에 태어난 아이들이 명확한 신체적 형태를 갖추지 못했으며, 아파도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죽도로 방치되었다고까지 기술하고 있다. 그러니까 당시 중앙아메리카에서는 모든 인간이 저절로 인격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집단 내에서 자기 자리를 얻지 못하고 사회 밖으로 완전히 추방된 이 불운한 아이들의 사례는 앞에서 논의한 관계적 인격 개념과 일치한다."(218)


"인격과 자아의 개념은 인류학자들 말마따나 문화적으로 구성된다. 한 문화의 구성원들에게는 너무 당연하고 정상으로 보이는 관념이 실은 특수한 역사적 전통의 산물이며 문화에 따라서 다르다는 말이다." "의료인류학자들은 신체 각부와 그 기능에 대한 관념이 '문화 특이적 증후군'을 초래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이런 관점을 적용해왔다. 사람의 몸은 세상 어디에서나 기본적으로 같기 때문에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아파야 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의 핵심은 자신의 몸과 환경에 대한 지각이 그의 상대적인 건강 상태와 아주 큰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가령, 거식증과 폭식증은 신체적 아름다움에 대한 비현실적 지각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화 특이적 증후군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또한 이런 섭식 장애는 성별, 연령, 계급에 민감하여 특히 젊은 백인 중산층 여성에게서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신체 생리와 사회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또하나의 지표다."(218-20)


후기: 우리가 배운 몇 가지 것들


"'사람 사는 건 어디나 같지만 간혹 다를 때도 있다.'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보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지난 한 세기동안 인류학자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가르침이며, 좀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전혀 사소한 것이 아니다. 우선 이는 인간의 어떤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가르침을 준다. 누가 '그러나 자고로 인간의 본성이란······' 식으로 일장 연설을 시작하면 일단 나가는 문이 어디 있는지부터 찾아라!" "인류학자들이 인간 행동의 보편법칙을 일반화하려 할 때마다 그 법칙들은 경험적으로 틀렸거나 시시하리만치 하찮은 것으로 드러나곤 했다. 이는 인간에게 진정으로 보편적인 것을 알아내려는 시도들을 폄하하거나 우리가 그런 시도 덕분에 많은 걸 배웠음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인간 문화가 낳은 모든 변이를 포괄할 만큼 광범위하면서 그런 변이들을 낳은 특수한 문화적 맥락에 부합하는 패턴을 식별하려는 시도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위험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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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5
데이비드 밀러 지음, 이신철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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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철학은 왜 필요한가


"여기서 내가 언급하는 정부(government)는, 특정한 시점의 사회 속에서 권력을 지니는 사람들의 집단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어떤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국가, 즉 그것에 의해 권력이 행사되는 내각, 의회, 법원, 경찰, 군대 등과 같은 정치 제도보다 더 광범위한 어떤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규칙과 관행 및 제도들 전체다. 누가 무엇을 누구와 함께 행할 수 있는지, 누가 물질적 세계의 어떤 부분을 소유할지 등을 알기 위해 서로 협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아마도 여기서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불가결하다는 것을 아직은 당연시할 수 없다. 정치철학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는 왜 우리에게는 애초에 국가가, 좀더 일반적으로는 정치권력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좋은 정부'가 과연 국가를, 혹은 관습적인 의미에서의 정부를 가질 필요가 있는지 여부는 일단 열린 물음으로 남겨놓고자 한다."(15-7)


"정치철학이라는 주제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은 정치란 권력 행사에 관한 것이며, 권력을 지닌 사람들─특히 정치인들─은 정치철학의 저작들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치철학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영향력을, 때로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홉스의 시대에는 오직 소수의 극단적 급진주의자들만이 민주주의를 정부의 한 형태로서 믿었다는 점을 생각해볼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그 밖의 정부 형태가 어떻게 정당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민주주의를 당연시한다. 이러한 변화에 관한 이야기는 복잡한 것일 수밖에 없지만, 거기에 내포되는 불가결한 요소로서 민주주의에 찬성하며 논의를 펼친 정치철학자들의 역할이 있었고, 나아가 그들의 관념이 받아들여지고 대중화되어 정치의 주류로 편입되어왔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이가 장 자크 루소일 것이다."(23-6)


"오늘날 거의 모든 정치철학자는 좋은 정부란 모종의 민주주의를 의미해야만 한다는 것을 당연시한다. 요컨대, 어떤 방식으로든 인민이 통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전의 여러 세기 동안에는 그와 반대되는 견해가 우세했다. 좋은 정부란 현명한 군주정이나 개명한 귀족정이나 재산가들의 정부, 혹은 이것들의 혼합체를 의미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옳고 우리의 선조들은 단적으로 틀렸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민주주의가 성공적으로 기능하려면 일정한 전제조건들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부유하고 문화적 소양을 갖춘 인구, 사상이나 의견의 자유로운 교류를 위한 대중 매체, 사람들에게 경의를 살 만한 기능적인 법률 체계 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은 최근까지도 쉽사리 획득될 수 없었으며, 또한 하룻밤 사이에 갖춰질 수도 없었다. 민주주의적 관념들의 영향력 있는 원천이었던 루소조차도 민주주의는 인간이 아니라 신들에게만 적합한 것이라고 말했다."(34-5)


2 정치권력


"국가가 정치권력을 행사한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치권력에는 두 측면이 존재한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권위'로서, 바꿔 말하면 사람들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명령할 권리를 가지는 것으로서 인식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법을 지킨다고 할 때 그들이 그렇게 하는 까닭은 대개 법을 제정하는 주체는 법 제정의 권리를 가지며 자신들은 그에 상응하여 법을 준수할 의무를 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법 준수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제재라는 위협에 의해 준수를 강요받게 된다. 법 위반자들은 체포되어 처벌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측면은 상호보완적이다." "그래서 정치권력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권위와 강제되는 준수를 결합한다. 그것은 어떠한 강제도 없이 제자들이 그 가르침에 따르는 현자의 권위와 같은 순수한 권위도 아니고, 당신에게서 지갑을 빼앗는 강도의 폭력과 같은 순수한 힘도 아니며, 그 두 가지가 섞인 것이다."(42-3)


"그러나 우리가 왜 정치권력을 필요로 하는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홉스는 정치적 통치 없는 '인간의 자연 상태'를 삶에 필요한 것들을 둘러싼 잔인한 경쟁의 상태로서 묘사했다." "홉스가 이런 비관주의적 결론에 도달한 것은 사람들이 본성상 이기적이거나 탐욕스러우며, 따라서 정치권력에 의해 제약받지 않으면 자신들을 위해 가능한 한 더 많이 움켜쥐려고 할 것이라는 그의 믿음 때문이라고 자주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홉스의 진정한 논점을 놓치고 있다. 그 논점은 신뢰가 부재할 때는 사람들 사이의 협조가 불가능하며, 그 신뢰는 법을 강제할 수 있는 상위의 힘이 없는 곳에서는 훼손되리라는 것이다. 홉스가 '자연 상태'에 결여되어 있다고 묘사하는 것들은 무엇보다도 우선 많은 사람에게 남들도 스스로의 역할을 다하리라고 기대하면서 함께 일할 것을 요구하는 것들이며, 정치권력이 부재할 때 그러한 기대를 품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43-6)


"홉스를 포함하는 정치철학자들은 종종 정치권력에 대한 엄격한 복종이 없다면 그 권력은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논해왔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국가나 그 밖의 형태의 정치권력은 사람들이 (보편적이라기보다는) 대체로 권력에 복종하고 싶어하는 한에서 존속하고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제한된 형태의 불복종, 특히 시민 불복종─이는 불법적이지만 비폭력적인 형태의 정치적 저항이며, 그 목적은 정부에 대해 정책을 변경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데 있다─이라고 불리는 것에 문을 열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시민 불복종을 옹호하는 논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만약 특정한 법이 매우 불공정하거나 억압적이라면, 또는 국가가 의사결정을 할 때 소수자의 관심사에 귀기울이기를 거부한다면, 법적 수단에 의한 저항이 효과적이지 않을 경우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치적 의무가 모든 경우에 구속력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66-7)


3 민주주의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정치 체제는 실제로는 통치에서 매우 제한된 역할만을 시민들에게 부여한다. 시민들은 주기적인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들은 때때로 헌법상의 중대한 문제를 결정해야 할 때 국민 투표라는 형태로 의견을 표명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과 관련된 쟁점들에 관해 자신들의 대표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단체를 조직하는 것이 허용된다. 하지만 그 정도가 그들이 가진 권력의 한계다. 민주 사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진정한 힘은 극소수 사람들─정부 각료나 관료, 그리고 어느 정도의 범위로 한정된, 의회나 여타 입법 기관의 구성원들─의 수중에 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되어 있는지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이유로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정치적 결정의 배후에 놓인 쟁점들을 이해할 '능력'이 단적으로 없으며, 그래서 이러한 사안을 다루는 데 더 뛰어난 자질을 갖춘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결정을 맡긴다고 하는 널리 퍼져 있는 믿음을 들 수 있다."(73-5)


"우리는 평범한 시민들의 정치적 역할이 주로 선거 때 투표하고 이따금 뭔가 특별한 이해가 걸릴 때 행동하는─예를 들어 그들의 뒷마당으로 도로가 새로 뚫리거나 주택이 들어서기로 한 것에 대응하는─식으로 제한되는 가운데 우리의 민주주의가 불완전한 채로 머문다는 사실에 대해 우려해야 할까? 나는 우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치'를 의미하는 영단어 'idiot'은 그리스어 'idiotes'에서 유래했는데, 그것은 본래 완전히 사적인 존재로 살며 도시국가의 공적 생활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자신의 정치적 지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한, 대개는 천치들인 셈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리는 지방 정치에 대한 참여나, 시민 배심원단과 그 밖의 유사한 기관에 참여할 대중 구성원을 무작위로 선출하는 것과 같은 참여의 형식을 발전시킴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능동적인 시민으로서의 생활 양식(citizenship)의 경험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88-9)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실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다수자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헌법상의 장치는 소수자가 다수자에 의해 고통당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중요한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민을 평등하게 처우할 것을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는 더 멀리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한 체제는 기본권이 문제가 아닌 경우들에서도 다수자가 최종적인 결정에 이르기 전에 소수자의 관심을 적절히 고려할 수 있도록 보장하려고 해야 한다. 이를 위한 열쇠가 공개 토론이다. 거기에서 양측은 서로의 입장에 귀기울이고, 가능한 한 양측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다수자를 형성하는 사람들은 토론을 하기 전 단계부터 자신들이 가장 선호하는 해결책에 찬성 투표만 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대신에 그들은 상대편의 주장을 들어보고 나서 판단을 형성하려고 해야 한다. 때때로 그들은 서로 동의할 만한 일반적 원리를 발견해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95)


4 자유와 정부의 한계


"정부가 더 많은 것을 할수록 민중의 자유는 그만큼 점차 감소한다는 일반적으로 견지되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정부는 종종 자유를 제한하기도 하며, 때로는 정당하게, 때로는 정당하지 않게 그러하다(예를 들어 안전띠와 관련된 법률은 자동차 이용자의 자유를 제한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 법률이 구하는 생명에 의해 그것이 정당화된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활동이 관련 조처가 없었으면 비용 때문에 불가능했을 선택지를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방식으로 자유를 증대시키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다만 정부가 자유의 내적 측면, 즉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열린 선택지 중에서 참다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해서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비교적 적다. 이 자유는 이 자유는 종종 (이사야 벌린이 「자유의 두 개념」이라는 강의에서 명명한 바대로) '적극적 자유'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외적 요인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선택지를 갖는다는 의미의 '소극적 자유'와는 구별되는 것이다."(110-1)


"우리는 (개개인이 모종의 독립성을 바탕으로) 참다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내적 자유를 어떻게 증진할 수 있는가? 한 가지 방법은 사람들에게 폭넓은 선택지를 제시함으로써 그들이 어떤 일련의 믿음이나 하나의 삶의 방식만을 올바른 것이라고 당연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반대로 자기네 구성원들의 선택을 통제하고자 하는 종교 교과나 정치 체제는 자신들이 상찬하는 삶의 방식에서 벗어난 것을 그 구성원들이 보거나 경험하지 못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선택의 자유를 증진하고자 하는 정부는 (사람들을 새로운 삶의 방식이나 새로운 형태의 문화 등을 접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다양성을 키워가면 된다." "그러나 외적 자유와는 달리 내적 자유는 보장될 수 없다. 독립적인 성향을 타고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순종적인 성향을 타고난 사람도 있다. 정치로 가능한 것은 그저 자기 나름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좀더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113)


"존 스튜어트 밀은 어떤 사람의 행위가 본인을 제외하고 누구의 이익도 침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기 관계적'일 때, 그 행위에 결코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밀은 이 원리가 사상 및 표현의 자유와 개인이 스스로 원하는 방식대로 살 자유, 즉 어떻게 입고, 무엇을 먹고 마시며, 어떤 문화적 활동을 추구하고, 어떤 성적 관계를 맺으며, 어떤 종교를 따를 것인지 등등의 자유를 정당화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경계선을 긋는 것은 가능할까?" "표현의 자유는 중요하지만, 모든 표현에 똑같은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예배드리고 정치 토론에 참여하며 예술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일터에 (불쾌한) 포스터를 붙이거나 조야한 인종차별적 구호를 외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즉,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행동이 지니는 가치를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부과할 수 있는 비용과 비교하고, 숙고하여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114-9)


5 정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제시된 아주 오랜 정의에 따르면, 〈정의(正義)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고자 하는 항구적이고 영속적인 의지〉인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그리 유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기는 한다. 첫째, 정의란 개개인이 올바른 방식으로 대해지는 것에 관한 문제임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정의란 사회 전체가 부유한지 가난한지, 문화적으로 풍성한지 불모인지 등과 같은 문제가 아니다." "둘째, 앞에서 제시된 정의의 〈항구적이고 영속적인 의지〉라는 부분은 사람들이 자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대해져야만 한다는 것이 정의의 중심적 측면임을 우리에게 상기키셔준다. 한 사람의 인간을 통시적으로 대하는 데서는 일관성이 있어야만 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역시 일관성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만약 내 친구와 내가 같은 자질을 가지고 있거나 같은 방식으로 행동했다면, 우리는 상황에 따라 같은 혜택이나 같은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135)


"한 가지 지적해둘 것은 정의가 사람들이 받는 처우뿐만 아니라 그러한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따라야 할 절차와도 관련되는 바가 많다는 점이다. 형사상의 정의에 관해 생각해보면 이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문제가 되는 것은 죄를 범한 사람이 그 범죄에 비례하여 처벌되고 무고한 사람은 풀려나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정의로운 결과가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판결에 이르기까지 적절한 절차가 지켜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양측은 각각 자신의 주장을 진술할 수 있어야 하고, 판사는 어느 한쪽을 편들고자 할 만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 이런 절차가 중요한 것은 부분적으로 그것이야말로 올바른 판결에 도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며, 나아가 법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진술할 기회를 얻고자 하고 다른 피고인에게 적용되는 것과 똑같은 규칙이 자신에게 적용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그런 절차에 의해 응당한 존중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140)


"아마도 사회 정의─사회 전체에 걸쳐 편익과 비용의 공정한 분배를 보장해야 한다는 관념─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해석은 존 롤스에 의해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저작인 『정의론』에서 정의로운 사회가 충족시켜야 하는 세 가지 조건을 논하고 있다. 첫째, 정의로운 사회는 개개의 구성원에게 그 밖의 모든 구성원을 위한 똑같은 자유와 양립하는 한, 가장 광범위한 일군의 기본적 자유(투표권과 같은 여러 정치적 자유를 포함)를 부여해야만 한다. 둘째,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회적 지위─예를 들어 고소득 일자리─는 기회의 평등에 기초하여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만 한다. 셋째,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정당화되는 것은 그것들이 사회에서 가장 형편이 나쁜 구성원들의 이익이 되도록 작용하는 것으로 보일 때, 다시 말하면 그것들이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일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더 많은 자원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흘러들 가능성이 있는 경우다."(155-7)


6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


"오늘날 상당한 정치적 관심을 받고 있는 페미니스트와 다문화주의자들은 종종 자신들과 관련되는 쟁점들, 즉 개인의 정체성의 본성,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의 구분이 가능한지 여부, 문화적 차이에 대한 존중 등을 둘러싼 쟁점들이 앞에서 검토한 권력, 민주주의, 자유와 정의에 관한 물음들을 대체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정치 자체의 본성이 변해버렸다." "그들은 사람들이 서로 정치적 관계를 맺고 있는 공적 영역과 그 관계가 비정치적인 사적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문제의 여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정치를 훨씬 더 편재적(遍在的)인 현상, 즉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간섭하는 현상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도전은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구호로 요약된다. 그 경우 정치권력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국가가 그 국민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남성이 여성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162-7)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제부터는 이러한 관계를 정치적인 것으로서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정치는 권력에 관한 것, 즉 누가 권력을 쥐어야 하고, 권력은 어떻게 통제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지만, 모든 권력관계가 정치적 관계인 것은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지적은 본래적으로 정치적인 본성을 둘러싼 것이라기보다는 그 관계를 다루는 데서 보이는 '정치의 태만'을 둘러싼 것이다." "즉, 여성에게 적절한 신체적 안전, 특히 가정 내 폭력으로부터의 보호를 보장하지 못했으며, 여성이 삶의 여러 중요한 영역에서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보장하지 못했고, 여성에게 개인으로서의 자유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다. 바로 이런 정치의 태만에 의해 개인적 삶의 공간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권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며, 그렇게 된 명백한 이유의 하나가 여성이 여러 세기 동안 관습적 의미에서의 정치로부터 거의 전적으로 배제되어왔다고 하는 것이다."(168-71)


"여기서 민주주의의 문제로 옮겨가자. 보통선거제를 시행하는 사회에서 페메니스트와 다문화주의들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는 입법부인 의회 내에서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 및 문화적 소수자들의 대표가 상대적으로 소수라는 것이다." "대표의 수가 인구수와 엄밀하게 비례해야 한다는 것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의미 있는 관점이 입법 기관에서 적절한 방식으로 대표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당사자가 반대편의 주장에 기꺼이 귀기울이고, 공정함이라는 기준에 의해 주장을 평가하며, 그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바꾸는 것도 마다치 않는다는 것이 전제된다. 특히 소수자 집단들의 경우에는 민주주의가 가능한 한 그렇게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단적으로 소수자다. 만약 모두가 오로지 자신의 분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할 뿐이라면, 소수자들은 질 수밖에 없다. 논쟁의 힘은 그들에게 유일한 무기이다."(179-82)


7 국민, 국가, 그리고 전 지구적 정의


"사제인 윌리엄 윙은 일찍이 〈국민이라는 것은 그 선조에 관한 망상과 그 이웃사람에 대한 공통의 증오에 의해 결합된 사회〉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국민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며, 나쁜 목적뿐만 아니라 선한 목적을 위해서도 유용하다. 우리가 국민이라고 부르는 집단들은 대개의 경우 공통의 언어, 오랜 시간에 걸쳐 함께해온 역사, 문학적 형식뿐만 아니라 물리적 환경─마을이나 도시의 건설 방식, 경관의 양식, 기념물, 종교 건축물 등과 같은─을 통해서 표현되는 문화적 특징 등을 공유한다. 이러한 문화적·물리적 환경 속에서 새로운 세대가 자라날 때, 그들은 분명 이런 공통의 유산에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비록 그런 유산의 여러 측면에 반항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말이다." "국민국가는 정치적 단위로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왔다. 즉, 국민국가는 제국의 군대에 압도되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크기를 갖지만, 동시에 저항이 필요할 때 그 구성원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200-3)


"사회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지각된 유사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는 우리와 이런저런 형태로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관련된 설명에 대해 고찰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은 사람들이 확장된 친족 집단 안에서 서로 협력하며 내부자와 외부자를 구별할 줄 알아야 했던 인간 진화의 초기 단계로부터 물려받아온 특성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외모나 발화 면에서 저마다 각양각색인 거대 규모의 사회에서는 신뢰가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의견이 갈리는 상대와 정치적인 불화를 겪을지도 모르며, 심지어 그런 사람들이 치켜세우는 것을 경멸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여전히 제법 많은 것(언어, 역사, 문화적 배경)을 우리와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적어도 민주적 통치의 규칙이나 정신을 존중하기는 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205-6)


"현재 이러한 통치 형태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국민국가에 대한 무수한 추도문들은, 그 대안으로 코즈모폴리터니즘(세계시민주의)을 가리키고 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실현 가능성이 낮고 매력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정치철학자들은 종종 세계 시민의 이념을 다르게, 즉 정부의 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개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제안으로서 해석한다. 그 제안이란 우리가 품고 있는 국민적인 것이나 그 밖의 애착과 같은 좁은 마음을 극복해서 마치 자기 자신이 세계 시민인 듯이, 바꿔 말하면 어디에서든 동료인 인간 존재에 대해 동등한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정치적 권위는 여전히 특정 국민국가에 국한되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전 지구적 정의를 증진하기 위해 사용해야 하며, 자신이 속한 정치 공동체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우선권을 주려고 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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