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예와 병사 만들기
안연선 지음 / 삼인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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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위신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군 당국은 1938년 두 가지 지시를 내렸다. 첫째, 위안부의 모집은 군당국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어야 하고 모집 담당자는 군에서 신중하게 선정해야 한다. 둘째, 위안부 모집 과정은 조선에서와 같이 관련 지역 경찰과 긴밀히 협력해서 진행되어야 한다." "군 교통 수단이나 군 숙소 등을 제공해서 군이 모집해 온 소녀들을 호송했다는 증언이 많이 있었다. 이들 여성들은 종군 간호부처럼 일본군 조직 내에서 공식성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수송시에도 군수품 수송을 위한 장소, 즉 기차의 맨끝 연결 차량이나 배의 밑바닥에 실려갔다. 위안부 모집자들을 태평양 섬 지역으로 운송하는 동안 "배 안에서 사용 중지"라는 경고문이 선내에 붙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이들 모집자들을 각 부대로 할당할 때는 '군수 물자 배급'이라는 명목에 위안부들의 이름을 적었다고 한다."(86)


"위안부들은 가난에 시달리는 경제적 약자일 뿐만 아니라, 외부모 가족(특히 '편모 가정') 출신이나 고아와 같은 당시 사회적인 배경에서 약자들인 경우가 많았다." "옛 위안부들의 가족 배경에서 발견한 또 하나 눈여겨볼 사실은 장녀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맏딸로서 가족 부양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위안부 모집 대상의 또 다른 그룹은 기생 학교의 소녀들이었다." "위안부들 중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모집 대상자가 된 경우도 있었다. 정서운·윤순만 할머니처럼 당시 조선 독립 운동과 연루되어 있던 가족의 딸들 역시 위안부로 차출된 경우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위안부는 사회적으로 취약한 그룹을 주요 대상으로 모집하였는데, 그 이유는 모집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사회적인 불안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는 위안부 문제에 사회적 계급이라는 변수가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준다."(87-9)


"위안부들을 통제하기 위해 서로 분열시켜 통제한다는 분리 지배의 원리가 사용되었다. 배족간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위안부들도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위안소에 있었던 기한에 따라 계급이 매겨지기도 했고, 상급자 위안부는 하급자를 처벌할 수도 있었다." "위안부들 사이의 위계 구조를 형성하는 기반이 된 것은 그들이 '상대하는' 군인들의 계급이었다. 군인들 사이의 위계 구조는 위안부들 사이에서도 재생산되었다. 각 위안부가 '받는' 군인이나 장교의 계급에 따른 특권과 위계 구조가 바로 이들의 지위를 결정했다. 군 위계 구조 내 고위직 장교를 '상대한다'는 사실은 이들의 일상 생활에 차이를 가져왔다. 위계 질서 구조에서 위안부가 지니는 위치에 따라 그들이 하루에 몇 명을 받아야 하는가가 결정되었다. 주로 장교들을 '상대하는' 일본 위안부들은 다른 위안부들처럼 많은 군인들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차별은 이들 여성들을 서로 분열시키는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96-7)


"위안부들이 더 이상 군인을 '상대할' 수 없을 때는 사용 가치가 없는 것이므로, 그야말로 사용후 버려지는 소모품과 같은 존재였다. 예를 들어 병이 심해지거나 몸이 너무 약해서 더 이상 성행위를 할 수 없게 되면, 위안부로서의 사용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들의 몸은 성행위를 위해서만 유용했을 뿐, 그 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부여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성병이나 다른 질병에 걸리지 않은 상대적으로 건강한 위안부만이 그 '유용성'을 인정받았다." "위안부들에게는 성노예에서부터 심지어 전쟁 말기에는 군사적인 업무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일이 부과되었다. 예를 들면 군부대 병영의 청소, 군복 세탁, 창 찌르기 등의 군사 훈련, 탄약 상자와 폭탄 나르기, 부상병 간호, 전투에 나가거나 돌아오는 군인들의 환송과 환영, 춤과 노래로 군인들에게 오락 제공, 재사용을 위해 사용한 콘돔 세척하기, 부상병을 위한 헌혈, 심지어는 스파이 활동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했다."(103-4)


"위안부들은 매일매일 계속되는 장기적인 성폭행에 대처해 나갈 생존 전략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위안소 체제는 위안부들의 저항을 약화시켰지만, 그러함에도 몇몇 위안부들은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방식으로 저항했다. 저항의 방식은 다양했다. 위안소 탈출을 시도하기, 군인 요구에 저항하기, 되받아치거나 싸우기, 군인 살해, 자살 시도, 실성함(미침), 힘든 현실을 탈피하기 위해 술이나 마약 복용하기, 장교와의 친근감을 형성하기 등 여러 가지 생존 전략과 저항의 방식이 존재했다. 그 가운데 가장 대담한 저항 방식 가운데 하나는 바로 위안소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안부들은 늘 감시당하고 있었으므로 탈출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위안소를 벗어나기 어려웠던 또 다른 이유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있던 대부분의 위안소들이 최전방 근처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위안부들이 위안소를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바깥은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111-2)


"전후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위안부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수치와 비난과 오명뿐이었다. 자신과 가족과 한국 사회는 이들을 '더럽혀진 몸'으로 여겼다. 김학순 할머니는 자신이 더 이상 '정상적인' 다른 여자들과 같을 수 없음에 대한 쓰라린 심정을 토로했다. 위안부들이 자신의 과거를 주위에 밝히자 가족과 친척들은 심지어 이를 '가문의 수치'로 여겼다. 이러한 가족들의 반응은 이들을 다시 가족 밖으로 내몰았다.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사회 운동화되기 시작한 1990년대 들어, 옛 위안부들이 자신의 과거를 신고하거나 공개적으로 밝히고자 할 때, 이들은 또다시 가족과 마찰을 빚었다. 이제는 위안부 자신만이 아니라 그녀의 가족 모두가 '더럽혀진 몸'에 대한 수치와 맞부딪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옛 위안부들에게는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것을 운동단체나 정부에 신고차는 것 자체가 '가족의 수치'를 사방에 알리는 것으로 해석되었다."(119-20)


"옛 일본 군인들 가운데는 위안부와 나눈 연애 관계 때문에 전쟁터에서 상실된 자아를 회복할 수 있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일본인 작가 니시노 루미코가 만난 한 군인은 위안부와의 만남이 "진정한 인간적 만남"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는 위안부와 군인의 경험 사이에 커다란 차이점을 보이는 것 중에 하나이다. 위안부들의 구술과는 많이 다른데, 옛 일본 군인들은 위안부 여성들이 자신들의 동반자였고, 연인이었고,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옛 일본군인들은 그들이 그리던 어머니, 아내, 연인상을 투영시킨 이상적인 여성상의 대용품으로 이들 위안부들을 대상화했던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인간적인 연애 관계에 대한 감정이 위안부를 경멸하는 감정과 함께 공존했다는 것이다. 옛 일본 군인들은 위안부들은 성적 쾌락을 얻기 위한 대상이라든가, '더러운 여자'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131-2)


"위안부뿐만 아니라, 일본 군인도 엄격한 규제와 통제를 받았다. 그들은 일본제국 군대의 군인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증명해야 했다." "일반병들은 고참들의 가혹한 대우와 혹독한 군사 훈련을 견뎌야 했다. 특히 막 입대해 들어온 신참들은 '지옥 훈련'이라는 것을 거쳐야 했다. 이때 신참들은 매일 맞았다. 군복에 조금이라도 흙이 묻었다거나, 군화가 제대로 광이 나지 않는다거나, 대답이나 태도가 고참의 맘에 들지 않을 때는 신참들은 고참들에게 가차없이 구타를 당했다. 그러나 군인들을 통제된 군생활과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길들이기 위해서는 당근과 채찍이 필요했다. 혹독한 군생활을 보상하기 위한 일종의 위로·오락으로서(그러니까 당근으로서) 제공된 것은 바로 '성'이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처벌과 보상 체계가 공존했던 것이다. 옛 일본군 장교 요시오카 다다오 역시 일본 군당국이 군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위안부 제도에 의존했음을 시인했다."(142-3)


"옛 위안부와 전쟁 포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옷을 갈기갈기 찢고 발가벗기기, 채찍질하기, 가슴 도려내기, 담배불로 지지기, 자궁에 총을 겨누어 발사하기, 복부 가르기 같은 상상하기도 힘든 행위들을 일본 군인들이 했음이 보고된 바 있다." "폭력은 마치 화폐처럼 군인들이 위안부들한테 원하는 '서비스'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폭력은 위안부들뿐만 아니라 부하 군인들, 그리고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널리 사용되었다. '불굴의 전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전투를 위한 사기를 고조시키기 위해서 군대 내 폭력은 국가 권력에 의해 허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도화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군인들은 일상에서 계속되는 구타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갔다. 말하자면 위안부를 구타하는 것을 포함해 군대 내에서 구타는 하루 일과 가운데 하나로 일상화되었고, 가차없이 냉혹해져 갔다."(148-9)


# 위안소 설치를 합리화하는 주장들

1. 위안소 제도는 기존의 매춘 제도와 다를 바 없다.

2. 전시戰時라는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3. 남성은 통제할 수 없는 생물학적 성욕이 있다.

4. 주둔/작전 지역의 여성들에 대한 강간을 방지한다.

5. 주둔 지역의 치안 유지에 이바지하여 반일감정을 억제한다.

6. 위안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군당국이 개입했다.


"(가혹한 폭력과 더불어) 남성성을 부추기기 위한 또 다른 실천 가운데 하나는 여러 명이 함께 위안소에 가서 성관계를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마치 하나의 '의식'(ritual)과 같다. 이때는 대개 장교나 고참이 부하들을 이끌고 갔다. 옛 위안부 하군자 할머니는 군가를 부르며 그녀의 방 안으로 행진해 들어오는 군인들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성행위는 그룹의 구성원 모두가 참여해야만 하는 하나의 통과 의례와도 같다." "군인들이 성적인 필요를 느끼는지, 또는 상대 여성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와는 상관없이 위안부와 성관계를 하는 것은 이들 군인들에게 주어진 권리였을 뿐 아니라 성을 통해 남성성을 증명해야 하는 하나의 과제였다. 성행위를 통해서 남성다운 행동의 기준에 들었음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그러므로 성은 군대 내에서 일상 생활을 통해 남성성을 강화시키고 재확인하기 위한 주요 실천 관행 가운데 하나였다."(176-7)


"한마디로 말해 위안부 제도는 남성적 정체성(용맹스럽고 공격적이고 성적화된 전사로서의 정체성)을 재확립할 수 있는 환경을 군인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일본 군대의 위계 구조에서 일반 사병이나 갓 입대한 신병들이 가장 낮은 층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군대 내 위계 구조, 특히 체벌의 위계 구조에서 위안부들은 일반 사병들보다 더 낮은, 유일한 '부하'들이었다. 군인으로서의 남성적인 지배와 군사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구성된 '위안'을 위한 공간에 위안부들이 제공되었던 것이다. 전쟁터에서 남성은 전투를 위한 하나의 군수품이나 '총알받이'로 전락했다. 그러나 위안소에서는 위안부에 대한 지배와 통제를 통해 전사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들의 주체성을 재확립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통해서 남성적인 주체성을 회복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성행위는 남성성의 정수로 여겨진다."(185-6)


"조선의 여성성 모델은 일본 천황의 군대를 '위안'하기 위한 성적인 대상('창녀')으로 규정되는 반면, 모범적인 일본 여성의 역할은 재생산자로서 미래 천황의 군인을 생산하기 위한 모성으로 규정되었다." "조선 여성과 일본 여성 사이의 이분화된 이미지, 즉 성적인 도구와 '국가의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는 가부장적 국가 권력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여성에 대한 이분법적인 분류는 서로에 상반되어 개념화되기 때문에, 위안부들을 '더러운 창녀'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일본의 후방에 있는 일본 여성들에게 '정숙한' 부인·어머니·딸의 자리를 비축해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분화는 이들 둘 사이의 민족적인 위계 질서의 골을 깊게 하는 데 한몫 했다. 조선과 일본에 걸쳐 통용되었던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에 기반한 이러한 위계 질서는, 전쟁을 통한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에서 식민주의 지배를 당연시하기 위한 또 다른 정치적 함의를 지닌다."(211-2)


# 여성의 몸에 대한 이미지가 '조국(homeland)'으로 상징화


"여성의 몸을 민족의 고결함으로 상징하는 담론은 여성에게는 위험한 것이다. 사실 상당수의 위안부들이 전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또한 귀향을 한 경우도 자신들이 위안부였음을 공개하지 않았다. 또다시 수치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며, 그들이 속한 공동체, 즉 '민족의 명예'를 훼손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한국도 일본도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 듣기를 원하지 않았다. 여성성에 대한 한국 민족주의와 유교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이의 실천은 이러한 집단적인 '기억상실증'을 초래했다. '정숙한' 여성의 성과 '정조'는 민족의 순수성과 연관지어 개념화되므로 위안부들의 침묵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민족적 자부심' 그리고 대부분의 위안부들에게 부과된 수치감들은 이들을 침묵하게 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위안부 문제를 부인해 온 일본의 이해 관계에 공모해 온 셈이다."(223-4)


"위안부들에게 강요된 '난잡함' 또는 '더러운' 여성 정체성은 군인들 내에 여성을 혐오하도록 하는 남성 정체성을 강화시켰고, 순종적인 여성성은 우월한 남성성을 형성했다. 결과적으로 위안부들을 노예화된 위치에 놓음으로써 일본 군인의 '주인됨'이 형성되고 강화되었다. 즉 조선인 위안부들의 몸은 일본 군인의 민족적 우월성과 남성성을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위안부들의 '오염된' 여성성은 군인들의 남성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위안부 제도를 통해 구성된 여성성에는 모순이 드러난다. 노예화되고 성애화된 위안부의 여성성과의 관계에서 군인들의 남성성은 강화되는 한편, '더러운' 위안부의 몸과 접촉함으로써 군인들 자신도 '오염되고', 성병에 걸려 남성성이 훼손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는 위안부를 '필요악'의 위치에 자리매김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225-6)


"일본 군인의 민족 정체성은 '광적인' 애국주의, 천황에 대한 충성, 외국인 혐오주의, 집단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들의 민족 정체성은 또한 성별화되어 있었다. 특히 천황제는 일본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의 정체성은 천황제와 민족주의의 결합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대부분의 조선인 위안부들의 민족 정체성은 반식민주의적이었으나 일본 남성들의 민족 정체성은 식민주의적이었다." "일본에 의한 조선인의 민족 정체성 형성은 일본인의 우월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한국 위안부를 '미문명화되고' 성애화되고 '음란하고' 열등한 인종으로 규정하는 것은, 반대로 일본 군인의 문명화되고 우월하고 애국적이고 남성적인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가부장적인 민족주의와 '광적'인 애국주의는 조선인 위안부의 멸시와 고통에 의해 마련된 토양 위에서 번성했다."(2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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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 그 알려지지 않은 역사 - 일본 전범기업과 강제동원의 현장을 찾아서
김호경.권기석.우성규 지음 / 돌베개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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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과 한국의 연구 성과들을 종합해 정리하면 1939년부터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6년여 동안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연인원 600~700만 명에 달한다. 당시 조선 인구가 2,000여만 명임을 감안하면 말 그대로 ‘전 민족적’ 수난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군 병력으로 징발된 조선인이 40여만 명이니 숫자상으로 강제동원 피해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게 노무징용자들이다. 이 중 일본 본토를 비롯해 사할린, 남양군도, 만주, 시베리아 등 국외로 동원된 노무인력이 150만 명 안팎일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450만 명 안팎은 각종 보국대, 봉사대, 근로단 등의 이름으로 한반도 내 작업장에 끌려간 국내동원 피해자다. 국내동원의 경우 1인당 두 세 차례씩 여러 번 차출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연인원이 아닌 실인원수는 200만 명 정도일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국내외 강제동원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적게는 10~20만 명, 많게는 50여만 명까지 추산된다. pp.28-29


 1938년 4월 일본 정부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해 ‘전반적 노동 의무제’의 강행실시에 돌입했다.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일본 정부는 의회의 비준 없이 칙령 하나만으로도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고 통제할 권한을 손에 넣었다. 일제는 이어 9월에 노무동원계획을 수립해 1939년의 수요 노동력을 110만 명으로 결정했으며 그 공급원 다섯가지 중 하나로 조선인 노무자를 지목함으로써 중요 산업에 연행할 것을 결정했다. 특별히 노동력 부족을 호소해 온 탄광, 광산 및 토건업에 집단연행을 허락해줬다.

 노무동원은 일본 정부와 기업의 합작품이다. 당국이 법령과 제도로서 동원의 근거를 마련하고 송출을 해주면 기업은 조선인들을 군수물자 생산, 토목공사 등의 각종 작업장으로 끌고 갔다. 기업에는 정부 정책과는 별도로 과도한 이익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기업 간에 이를 위한 격렬한 경쟁이 있었다. pp.34-36


 1990년대 일본 재판부는 강제징용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청구권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두 가지 논리로 강제징용자의 소를 기각했다. 하나는 시효 만료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 무책임의 법리'다. 국가 무책임의 법리란, '패전 전 일본에서는 국가의 권력적 작용에 의해 개인에게 손해가 발생해도 민법의 불법행위책임에 관한 규정이 적용되지 않았고, 현재의 국가배상법과 같은 일반적으로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법률도 없었기 때문에 그 손해에 대해 국가의 배상책임을 추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김순길 씨가 1심에서 진 근거가 바로 국가 무책임의 법리였다. 

 일본 재판부는 그런데 2000년 이후 다른 판결문을 쓴다. 2001년 3월 오사카 지방재판소는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낸 여운택, 신천수 씨에게 '한일조약에 따라 청구권을 상실했다'며 기각 판결을 내렸다. 그 뒤 한동안 일본에서 한국인 강제 징용자들이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은 대부분 '청구권 소멸' 논리로 기각됐다. 한일협정이 수많은 강제 징용 피해자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일본 정부는 청구권 협정에 관한 해석을 전과 다르게 했다. 2000년대 이전에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라고 주장하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 국민에게는 애당초 이러한 클레임을 제기할 수 있는 지위는 없기 때문에, 한국 국민이 이것을 청구해도 우리나라는 이것을 인정할 법적 의무는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논리를 일본 재판부가 받아들였다. 그 뒤 일본에서 한국인 강제징용자 소송과 관련해서는 화해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pp.458-460


 개인 청구권에 관한 2000년대 이후 일본 정부의 입장은 '소멸'에 가깝고 '인정하지 않겠다'라는 것이지만 명확한 '소멸'은 아니다. 일본 정부는 왜 개인 청구권에 관해 딱 부러지게 '소멸'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일까. 이 배경에는 1956년 일본과 옛 소련이 맺은 공동선언이 있다. 공동선언에서 양국은 "국가, 단체,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서로 포기한다"라고 밝혔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옛 소련에 재산을 두고 온 일본 국민들에게서 소송을 당했다. '소련에 있는 내 재산권을 정부가 소멸시켰으니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각 개인의 청구권까지 포기한 게 아니다"라고 대응한다.

 즉 일본 정부는 소련 정부에 대해 비록 공동선언에 의해 외교보호권은 포기했지만 개인 청구권은 남아 있으니 각 개인이 알아서 청구권을 행사해서 재산을 찾으라는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하면 스스로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대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나타나고 있을까. 근원적 이유는 1965년 한일협정이 엉터리로 맺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양국 정부는 무엇보다 청구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해두지 않았다. 김창록 교수는 "협정 및 그 부속문서의 어디에도 '청구권'에 관한 정의 규정이 없다. 그 결과 '청구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협정 및 그 부속문서의 조문만으로는 우리의 문제, 즉 '한국의 외교적 보호권만 소멸된 것인가 아니면 한국인 개인의 재산, 권리 미치 이익과 청구권까지 소멸된 것인가'에 관한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다른 한편 양국 정부는 한일협정 뒤 후속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협정에 적힌 것처럼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면 양국은 국내에서 관련법을 제정하고 후속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국민의 청구권을 소멸시키는 법을 만들고 동시에 일제 피해에 관한 보상법을 만들었어야 했다. 일본 정부도 자국민의 권리를 없애는 법을 만들고 한반도에 두고 온 재산을 보상해줬어야 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엉뚱하게도 한국인의 재산에 관한 권리를 소멸하는 국내법(이른바 144호)을 만들었다. 자국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일에 대해 당시 한국 정부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pp.464~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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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청년이여 황국 신민이 되어라 - 식민지 조선, 강제 동원의 역사
정혜경 지음 / 서해문집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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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말 국민징용령이 개정되면서 1944년 2월부터 많은 조선인이 국민 징용에 해당되었다. 국민 징용이란 일본 정부가 이미 등록한 대상자 중에 선정해서 징용 영장을 발령하여 동원하는 형태다. 미리 등록이 되어 있었으므로 뽑아서 보내는 것이 쉬웠다. 그리고 '응징사應徵士'라 해서 노동자를 군인과 동일한 의무를 지닌 것으로 규정했다. 동원에 응하지 않으면 국민징용령 위반으로 검거하여 감옥살이를 시키거나 형무소가 지정하는 작업장에 가서 일해야 했다. 의무로 하는 것이니 임금이나 노동자의 권리 같은 것은 적용되지 않았다. 노동자에 대한 고용 계약도 정부와 노동자가 했다." "동원 체제가 강화되면서 송출되는 인원수도 늘었다. 중간에 탈출하거나 거부하는 것 자체가 어려우니 송출되는 수도 늘어났다. 일본으로 간 인원수만 보면, 1943년에 13만 명 정도였으나 1944년에는 29만 명으로 두 배가 넘었다. 같은 시기, 한반도 내에서 동원되어 노역을 한 수는 세 배가 넘었다."(65-6)


"할당받은 인원수를 채우는 방법은 선전과 속임수였다." "일본 당국도 헌병과 경찰의 힘만으로는 통제를 할 수 없으니 '황국의 신민'이 해야 하는 의무라거나 전쟁에서 이기면 풍요로운 부가 뒤따를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하는 일이 강제 노동인지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 이를 위해 국가가 직접 동원하는 강제 동원이지만 명칭을 '지원'이니 '모집'이니 하고 붙인 것이다. '볼런티어volunteer'가 공식 명칭이다. 독일에서도 '의용'이나 '지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것이 바로 총동원 체제를 유지했던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운영했던 고도의 동원 전략이다." "그런데 1944년 말부터는 가장 수준 낮은 인간 사냥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더 이상 민중은 '모집'이니 '지원'이니 하는 말에 속지 않고 징용을 회피하는데, 작업장에서는 인력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을 치니 할 수 없이 집집마다 뒤져서 장정들을 끌고 간 것이다."(77-8)


"일본 당국은 남양군도에 동원된 조선인 작업자들의 노동 생산성을 높이고 당국의 통제에 순응하게 하는 데 가장 큰 목적을 두었다. 특히 노동을 시키기 위해 일본어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업무 지시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였다. 훈련 결과에 대해 당국은 매우 만족해했다. 일본 측 자료에서도 '조선인들의 능력이 일본인을 능가한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훈련 과정을 거친 조선인들은 한 달에 25일 동안 일했고, 평균 출근율이 98퍼센트에 이를 정도였다. 남녀를 막론하고 어린이를 양육하는 여성까지 모두 열 시간 동안 일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균 기온 섭씨 4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 열 시간 노동은 살인적이다." "장시간 노동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배고픔도 적잖은 고통이었다. 당시 남양군도는 외부에서 식량을 제공받지 못하고 현지 조달에 의존했다. 일본 본토도 물론 식량난으로 어려웠지만, 전쟁이 깊어지면서 해상이 봉쇄되어 보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05-6)


"당시 말레이시아에서 맨손으로 태면철도를 건설하는 무리한 공사에 동원된 포로와 노동자가 4만 3000명이었다. 이 과정에서 포로 2만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진다. 하루에 평균 100여 명이 사망했고, 심지어 300명이 사망한 날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태면철도를 '죽음의 철도'라 불렀다. 또한 부족한 식량과 영양실조, 과도한 노동은 사망자를 양산했다. 재판 기록을 보면 포로들에게 비타민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점도 전쟁 범죄의 하나였다. 포로감시원들이 포로들에게 일을 시키는 과정에서 공정을 맞추기 위한 가혹 행위도 일어났다. 물론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포로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킨 것이다. 그러나 포로들이 얼굴을 맞댄 사람들은 일본군이 아니라 조선인이었으므로 포로들은 조선인 포로감시원이 자신들을 학대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전후 포로 학대의 책임은 일본군의 지시를 받아 포로들에게 직접 일을 시킨 조선인 포로감시원에게 돌아갔다."(129-30)


"조선인이 군인으로 동원된 경우는 지원병과 징병이 있다. 총 동원자는 23만 명인데, 반수가 '조선군'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에 배치되고, 그다음이 일본, 세 번째가 중국 전선이다. 동남아시아에 배치된 인원은 소수였다." "조선인 군인들이 후방인 일본에 많이 배치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본은 조선인을 군인으로 동원하긴 했지만 전쟁터에서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보다는 다른 역할을 맡겼다. 조선인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인 군인이 맡은 역할은 전투가 아니었다. 전쟁을 보조하는 일과 위급한 때 총알받이 역할이다." "일본군과 동등한 무기를 지급해서 전선에 투입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시기적으로도 당시 연합군의 해상 봉쇄로 군대가 조선에서 동남아시아로 가기는 어려웠다." "1944년 말부터 징병이 시작되지만, 그때는 이미 동남아시아 전선이 무너진 후였다. 동남아시아로는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가 없었다."(142-3)


"화태(남사할린) 탄전은 규모에서는 일본 훗카이도 탄전에 미치지 못하지만, 질에서는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였다. 역청탄이라고 해서 제철소에서 철을 생산할 때 쓰이는 철광석이 대부분이고, 무연탄도 윤이 반질반질 나고 화력이 매우 좋았다. 더구나 화태 전체의 20퍼센트가 탄전일 정도로 탄광 비율이 높았으니 탄광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또한 화태는 목재업과 제지업으로 유명해서 일본과 한반도에서 사용하는 종이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생산된다고 할 정도였다. 일본 최대의 제지 회사인 오지 제지(미쓰이 계열)가 남사할린 전체에서 아홉 개의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산에서 나무를 구해 종이를 만들려면 여간 노동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나무도 베어야 하지만 이것을 제지 공장으로 운반하고, 석탄을 집어넣고 불을 때서 종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력을 담당한 것이 바로 조선인이다."(158)


"일본 규슈 지방의 후쿠오카 현과 나가사키 현, 혼슈 지방의 이바라키 현과 후쿠시마 현에 위치한 탄광은 모두 작업 환경이 열악했다. 막장 높이가 매우 낮거나 바닷속에 있어서 습하기도 했다. 특히 나가사키 현에 있는 하시마 탄광은 지옥섬으로 유명했다. 노동 조건이 너무 나빠서 일본인들이 지옥섬이라 불렀다. 물론 초기에는 죄수들이 끌려와 일하던 곳이었다. 자연섬 주변을 시멘트로 둘러쌓아 군함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군함섬이라 불리기도 한다. 최근 일본은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하시마에 세계 최초로 아파트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란다." "이곳 탄광은 막장 높이도 낮아서 광부들은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탄을 캤다. 이런 형태의 탄광을 사갱斜坑이라고 한다. 물이 흥건한 막장에서 몸을 눕다시피 기울여서 탄을 캐야 했으니 그 참상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165-7)


"훗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에 지시마가 있다. 일본이 러시아에게서 빼앗은 섬으로 러시아어로는 쿠릴 열도라도 한다." "1855년 러일화친조약을 맺으면서 에토로후 섬 이남을 일본령으로 확정하는 데 합의하고, 1875년에 가라후토-지시마 교환조약으로 쿠릴 열도는 일본의 지시마가 되었다." "(비행장이 많았던) 지시마는 통제된 지역이라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섬에 들어간 조선인들은 어려움이 더 많았다. 더구나 인근 해역으로 연합군이 자주 함대를 이동했기 때문에 공격을 많이 받기도 했다. 지시마는 미국과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 본토와 훗카이도를 지키는 외곽 지대로서 역할을 강요받았다. 그래서 희생자도 많았고 가혹 행위도 심했다." "일부기는 하지만 고래잡이로 지시마에서 조업을 하던 조선인들은 전쟁이 끝나고 사할린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원래 고래는 잡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일본은 전쟁에서 기름을 사용하기 위해 매우 적극적으로 포경을 했다."(250-2)


"훗카이도를 건너면 아오모리 현에 닿는다. 아오모리에서도 철도와 도로, 항만 공사장, 군수공장에서 조선인들이 가혹한 노동을 했다. 아오모리 부근은 아키타 현인데, 금광이 많은 지역이다. 그 조금 아래에 이와테 현이 있다. 이곳도 금광과 군수공장이 많은 곳이다. 이들 현들을 포함해서 도호쿠 지방이라고 한다. 도호쿠 지방은 토질이 척박하고 농산물도 적게 소출되는 곳이어서 이전부터 일본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이곳은 또한 농경근무대라 해서 농사짓는 조선인 군인들이 근무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훗카이도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 대단히 춥고 눈이 많은 지역이어서 주로 한반도 남부에 살던 조선인들이 견디기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특히 아키타 현은 조선인들이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 고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인 1만 3535명이 동원되었다고 추정된다. 안전장치를 전혀 갖추지 않았으므로 낙반 사고를 비롯한 작업장 사고가 빈번하여 사망자가 많았다."(253-4)


"아오모리 현 아래쪽에 이와테 현이 있다. 철광산이 많아서 철광석을 가공하는 공장이 있었던 곳이다. 광산이 13개소나 있고, 철광석을 제련하는 제철소와 제련소가 세 군데 있었다. 그 밖에 조선인들은 철도 공사장이나 댐 공사장에서도 일했다. 이들 작업장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일본제철주식회사 가마이시 제철소다. 일본제철은 1880년에 이와테 현 가마이시 시市에 제철소를 만들었다. 당시에는 관영이었는데, 1887년에 운영권이 민간에 이양되었다." "이와테 현 아래쪽에는 야마가타와 니가타, 미야자키라는 3개의 현이 있다. 야마가타는 이와테 현과 마찬가지로 광산이 많다. 열 두 곳의 광산과 발전소, 철도 공사장, 비행장 건설 공사장에 조선인이 동원되었다." "미야자키는 관광지로 알려졌지만, 야마가타의 맞은편에 있는 지역으로 야마가타보다 훨씬 많은 작업장에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다." "니가타는 북한으로 떠나는 '만경봉호'가 출발했던 항구로 유명하다."(262-5)


"간토 지방은 일본 수도인 도쿄와 수도권인 지바, 가나가와, 수도권에서 조금 확대해 야마나시, 도치기, 군마, 사이타마가 포함된다. 도쿄는 일본의 수도라 조선인들이 동원된 작업장이 없을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군수공장과 해운 항만 시설, 비행장 건설과 지하 시설물 건설 공사장에서 일했던 조선인들이 매우 많았다." "군수공장 가운데에는 히타치 제작소 같은 기계 제작 공장도 있지만, 철강업이나 조선소, 제철소, 가스공장 등 규모가 큰 공장이 대부분이다. 총알이나 폭탄 등 무기를 만드는 공장도 있었고, 군인들이 신는 구두나 의복을 만드는 공장도 있었다." "서른 군데나 되는 운수 항만 작업장은 바로 군수공장과 직결된다. 군수공장에서 만든 물품을 전국 각지와 일본이 전쟁을 치르던 지역으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쿄는 바로 항구가 연결되니 군수물자를 보내는 출발 지역으로 적당했다. 도쿄에 군수물자를 만드는 공장이 많다 보니 연합군의 폭격을 많이 받기도 했다."(274-5)


"지바는 간토 대지진으로 유명한 지역이자 조선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학살의 중심지다." "지바 부근 가나가와는 유행가로 잘 알려진 요코하마 항구가 있는 곳이다. 바다가 있어서 그런지 항만 운수 관련 작업장이 많이 있었으나 가장 많은 작업장은 역시 군 공사장이나 군수공장 등이었다." "가나가와 현의 대표적인 작업장은 일본강관주식회사다. 이 회사는 가나가와 현에만 무려 작업장 일곱 곳을 운영하며, 8000명에 가까운 조선 청년들을 노동자로 끌고 갔다." "히타치나 나카지마 등 굴지의 일본 기업들이 당시 사이타마에서 비행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사이타마에는 육군항공사관학교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생산한 비행기를 훈련할 조종사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또 다른 간토 지역인 군마 현에 있는 동원 작업장의 특징은 농경근무대라고 해서 전투가 아니라 농사를 짓는 업무를 담당한 부대가 배치된 지역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280-4)


"교토와 나라는 이전에 일본 수도였기 때문에 궁성과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한편으로 전쟁과 관련한 조선소와 군수공장, 지하공장이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유적지에 군수공장과 지하공장이라고 하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 지역에 군수공장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유적지라면 보호해야 하니 공습을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서 일본은 유적지에 집중적으로 지하 시설을 만들고 군수공장을 가동했던 듯하다. 이런 일본 당국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나고야나 오사카 등 간사이 지역에도 공습이 있었지만, 나라나 교토는 공습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301) "미에 현은 구리 광산으로 유명한 곳으로 이시하라 산업 본사가 있다. 중국 하이난 섬에서 조선 수형자들을 동원해 1000명에 가까운 동포들의 목숨을 앗아간 기업의 하나가 이시하라 산업이다. 미에 현에서 이시하라 산업은 1936년경부터 기슈 광산이라는 구리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다."(304-5)


규슈 지역에는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한 것"이라는 망언으로 유명한 전 일본 수상 아소 다로의 집안이 경영했던 탄광이 있다. "아소 상점은 1910년대부터 조선인을 광부로 채용하기 시작했는데, 1932년에 아소 탄광에서 일하던 조선인들이 일으킨 파업이 일본 노동 운동사에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1932년이면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데, 임금 차별과 계속되는 사고 등 노동 조건이 열악했기 때문에 파업이 일어났다. 당시 자료를 보면, 아소 탄광에서 조선인의 생활에 대해 '착취 지옥'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정도로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조선인들에게는 열악한 작업장이었다 아소 광업은 전쟁 기간 동안 사세를 더욱 확장해서 이후에는 지역 경제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큰 기업이 되었다. 경영자가 정계로도 진출했고, 탄광업이 사양 산업이 된 이후에는 시멘트 산업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지금도 후쿠오카 중심지인 이즈카 시에서는 '아소 타운'이라 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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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혁명의 기록 - 동학농민전쟁 120년, 녹두꽃 피다
이이화 지음 / 생각정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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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이 행동으로 나선 기록은 1892년 11월 동학교도들이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며 일어난 삼례 집회 때부터 나타난다. 교도들의 탄압을 중지하라는 소장을 낼 때 이를 들고 갈 사람이 없었다. 목숨을 담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험한 일이었다. 이때 전봉준이 선뜻 나선 것이다. 그는 전라감사에게 항의의 글을 내기도 하고 창의문倡義文(봉기할 것을 호소하는 글)을 직접 써서 돌리기도 했다. 또 동학교단에서 최시형의 허락을 받아 광화문 복합상소伏閤上疏(대궐 앞에 엎드려 소문을 올리는 절차)를 올릴 직전에 다시 삼례에서 집회를 열고 전라감사에게 글을 보냈다. 이때도 전봉준이 활동을 전개했다." "여기서는 교조 신원만이 아니라 일본과 서양 세력을 배척한다는 의지도 분명하게 드러냈다." "전봉준은 이 무렵부터 척양척왜를 분명하게 표방했다. 이는 흥선대원군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인지 전봉준과 흥선대원군이 동지적 관계를 맺었다는 설도 널리 퍼져 있다."(49-50)


전봉군의 주도로 농민군이 거세게 일어나자 "1894년 2월 말경 신임 군수 박원명이 고부로 들어왔다. 박원명은 농민군 지도자들을 불러모아놓고 위로하면서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약속하고 소를 잡고 술을 빚어 잔치를 풍성하게 벌였다. 농민군들은 현저히 동요하는 빛을 보이며 해산을 서둘렀다." "해산의 원인은 첫째, 마을 단위의 집강으로 표현되는 토호와 부자들이 지도부에 끼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여러모로 수탈을 당한 분풀이로 민요를 일으켰으나 지경 바깥으로 진출해 역적의 누명을 쓰는 것을 꺼려 적당하게 타협하려 들었다. 전봉준을 잡아 보내려 한 일부 무리도 이들 부류였을 것이다. 둘째, 하부 구조는 영세농과 머슴들이었고 무뢰배와 발피들이었다. 이들을 두고 전봉준은 공초에서 "동학의 무리는 적고 원민怨民(원한을 가진 백성)이 많았다"고 했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분을 풀고 곡식을 나누어 받는 것 따위 재미를 보다가 토호와 부자들이 해산하려 하자 덩달아 흩어졌던 것이다."(83-4)


"전봉준은 일찍이 그의 부하들에게 "나는 신령스런 부적이 있어 몸을 보호해준다. 비록 대포 연기가 자욱한 속이나 총알이 비가 오듯 하는 속에서도 다치지 않는다. 너희들 보아라"라고 말하고는 몰래 탄환 수십 개를 소매 속에 넣어두고 친하고 믿을 만한 사람 십여 명에게 비밀히 알려준 뒤 그들로 하여금 에워싸고 총을 쏘게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포였다." "땅에 떨어진 탄환을 본 무리들은 "장군은 신령스런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런 모습을 본 부하들은 그 부적을 다투어 붙이고 총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다. 또 전봉준은 어느 때 밤을 이용해 총잡이와 짜고 미리 손아귀에 총탄을 숨겼다가 총수가 헛방을 놓으면 전봉준이 총알을 재빨리 잡는 시늉을 하고 나서 손을 펴 총알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어둠 속에서 이를 바라보던 농민군들은 "우리 대장만 따라다니면 어떤 양총을 맞아도 죽지 않아"라고 떠들었다. 농민군들은 대장의 신통력을 믿어 더욱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113-4)


박원명의 후임으로 온 이용태는 포악한 인물로, 민요 두목들을 붙잡는다는 핑계로 각종 행악을 부렸다. 이를 참지 못하고 재봉기한 전봉준의 농민군은 고부 관아를 점령한 후 세력을 늘려나갔다. 농민군은 황토재에서 승리한 뒤 정읍을 거쳐 고창·무장·영광으로 진출한 후, 마침내 전주성마저 함락했다. 그러나 전주성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전주성으로 장위영군을 이끌고 와 대포를 쏘며 포위망을 조여오던 홍계훈은 "항복 권고를 연달아 성안으로 날려보냈고 농민군은 승전의 빌미를 찾을 수 없었다. 더욱이 전봉준은 몇 차례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머리와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5월 7일, (농민군의 시정사항을 조정에 건의하기로 하면서) 화해 약속은 성립되었다. 이는 휴전의 의미와는 다르다. 전봉준과 홍계훈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화약을 성립한 것이 아니다.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조건을 제시하다가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판결선언서〉대로 화약이 아니라 합의라고 하는 것이 맞다."(121-2)


"농민군은 왜 '귀화'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화해 약속을 맺었을가? 첫째, (동학) 북접의 호응이 없었던 것이요 둘째, 외국 군대의 개입이 두려웠으며 셋째, 농민군의 내부 동요가 있었고 넷째, 양곡과 생필품의 결핍이 있었던 탓이다. 실제로 북접은 남접의 행동이 과격하다고 비난했으며 북접의 지시를 받는 호남의 동학 세력은 자기들의 고장에서 귀추를 엿보고 있었다. 게다가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원세개가 보낸 청군은 전주에 와서 농민군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들은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한편 농민군은 농군이어서 농사철을 맞아 들떠 있었다. 논에 물을 대야 하는데, 볍씨를 뿌려야 하는데, 모내기 날이 다가오는데 따위를 생각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농심農心이 일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전주성이 완전히 포위되어 시장도 열리지 않고 물품의 조달이 단절되어 당장 밥을 굶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124-5)


"그러면 관군 측은 왜 화전 약속을 급하게 맺으려 했던가? 첫째, 조정에서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자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구실로 서울로 들어왔으며 둘째, 일본군이 횡행하는 서울과 인천에는 수비병이 거의 없어 수도 방위가 위태했고 셋째, 홍계훈이 지휘하는 관군의 사기가 거의 땅에 떨어진 상태였으며 넷째, 농민군의 지원군이 언제 배후를 공격해올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홍계훈 개인의 공명심이 작용한 것으로도 보인다. 홍계훈은 적당하게 화전을 맺어 농민군에 전주성을 내준 책임에서 벗어나 자신이 승리의 장수임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홍계훈은 농민군이 전주에서 썰물 빠지듯 물러나자 엉뚱하게도 "비적을 소탕한다"고 외치면서 호기를 부렸다." "(곧이어 홍계훈도 서울로 상경하고) 농민군 지도자들은 각기 지방에 흩어져 집강소 조직을 정비했다. 이제 새 국면은 서울과 인천 그리고 전주를 중심으로 새롭게 전개되고 있었다."(125-6)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전봉준은 재봉기를 준비하는 장소를 삼례로 삼고 9월부터 직속부대를 이끌고 양반다리 언저리에 머물렀다. 그는 집강소 활동 기간에 양곡과 무기를 확보하고 말과 나귀를 모으며 군수전을 마련하는 등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재봉기를 서두르면서 여러 장령들에게 협조를 구하기도 하고 설득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군수전·군수미를 확보하기 위해 부호들에게 일종의 어음이라 할 표지標紙(액수를 쓴 종이)를 돌렸으며 집강소 활동 기간에 농민군에게서 거둔 무기를 삼례로 돌리게 했다. 또 유별나게 호남의 북접 교도들에게는 군량미와 말 먹일 꼴을 버겁게 배당해 노골적으로 압력을 넣었다. 북접을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북접과 남접의 갈등이 깊어지자 최시형은) 교단의 지도자들을 불러 상의한 끝에 대세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정부에서는 남·북접의 교도들을 가리지 않고 한 통속으로 보아 탄압을 가했고 교단의 지도자들을 체포하려 포교들을 풀어놓은 처지였다."(157-9)


# 최시형의 '대동원령'에 따라 북접 지도자들은 벌남기伐南旗(남접을 징벌하라는 기)를 찢어 버리고 연합전선을 구축


"10월 25일 벌어진 능치 전투에서는 일본군이 왼쪽에서 진격해왔고 관군이 반대편에서 협공을 했다. 농민군은 중간에서 좌우를 향해 맞받아 대응했다. 전투는 한낮까지 계속되었다. 농민군은 협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구덩이 속에서 인해전술로 적을 공략하려 했다. 잎이 떨어진 나목을 차폐물로 의지해 몸을 숨기기가 마땅치 않았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효포의 들판에서 진용과 장비를 수습하고 있을 때 관군이 다시 공격해왔다. 농민군은 경천점으로 후퇴했으나 관군이 다시 추격해와서 농민군들은 논산으로 물러났다. 능치의 골짜기와 효포의 길바닥과 하고개의 언덕이 시체로 쌓이고 피로 물들었다." "세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농민군은 너무나 큰 피해를 입었다. 농민군은 전투에 지치고 추위를 견디다 못해 연달아 달아났다. 특히 전투 경험이 적은 북접 농민군은 몇 차례 전투를 치르고 난 뒤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1차 공주 공방전의 대체적인 상황이다."(182-3)


"11월 9일 정오가 되기 직전, 모리오 대위는 기다리던 작전 개시의 시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일본군은 봉우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대포를 연달아 쏘아댔다. 농민군도 대응해 본격적으로 전투를 개시했다. 한꺼번에 밀려 올라가다가 대포를 쏘면 물러나고 잠시 대포 쏘기를 멈추면 밀려왔다. 제1대가 무너지면 제2대, 제3대가 꼬리를 이었다. 이날 오후까지 전진과 후퇴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농민군의 시체가 언덕과 고개 언저리에 쌓였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눈을 흥건하게 적셨다." "두 차례 전투를 벌이고 나서 점검해보니 1만여 명이던 군사가 3천여 명만 남았고 다시 두 차례 접전을 한 뒤 점검해보니 500여 명만이 남았다." "이런 형편에 놓여 있었으니 전봉준도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우금재의 마지막 보루를 버리고 남은 농민군을 이끌고 달아났다." "이제 공주를 포위했던 농민군은 사라졌다. 내리 4일 동안 전개된 이 전투를 2차 공주 전투라 한다."(188-9)


"전봉준이 지휘하는 주력 농민군은 원평과 태인 전투를 끝으로 완전히 해산했다. 전봉준은 자신이 어릴 때 자라고 돌아다닌 원평과 태안을 최후의 격전지로 삼았다. 그런 연고로 하여 수백 명 정도 남은 농민군을 다시 수천 명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농민군으로는 한풀 꺾인 사기를 올릴 수 없었으며 일본군의 성능 좋은 신무기를 극복할 수도 없었다. 전봉준은 공초供招(죄인 심문 기록)에서 이때의 정황에 대해 솔직하게 대답했다. 전봉준은 금구 등지에서 다시 군사를 모았는데 그 수효는 많았으나 기율이 없어서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아주 어렵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일본군이 계속 추격해와서 그들이 맞서 싸울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어서 두 곳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것이다. 그는 태인 전투를 치른 뒤 대장으로서 정식으로 농민군의 해산을 침통한 심정으로 명령했다."(204)


"전봉준의 죄목은 《대전회통大典會通》에 규정된 '군복기마작변관문자부대시참'이었다. 꽤나 긴 죄명이었다. 이를 풀이해보면, 군복 차림을 하고 말을 타고서 관아에 대항해 변란을 만든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형하는 죄다. 그리하여 전봉준과 같은 사형언도를 받은 손화중·김덕명·최경선·성두한 등 네 명은 판결이 난 날 곧바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들이 교수형에 처해진 것은 갑오개혁 때 개정된 법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종전에는 역적죄에 해당하는 사형수들은 모조리 참형을 가해 목을 잘라 관아의 문 앞에 걸어두거나 여러 사람들이 보도록 조리를 돌렸다." "개화정부는 형법을 개정해 "모든 재판과 소송은 2심으로 한다"는 조항을 두고 4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공포했다. 이들 다섯 명에게는 그 시행을 불과 2일 앞두고 사형을 집행했다. 그러니까 사형 선고와 사형 집행을 전격적으로 단행해 2심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속전속결로 들뜬 민심을 가라앉히려 했던 것이다."(235-6)


"전봉준이 역적으로 처형을 당하고 난 뒤 고창의 당촌을 비롯해 주변의 전씨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관군들은 전씨 마을을 덮쳐 재산을 약탈하거나 불태웠고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전씨 집성촌을 폐허가 되었으며 전씨들을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실의 언덕배기에 '녹두장군'의 묘소라 전해지는 초라한 무덤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가끔 제물을 차려놓고 녹두장군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렸다. 1990년대에 일 벌이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이 무덤을 발굴해보니 유물이 한 점도 나오지 않았다. 가묘假墓(빈 무덤)를 조성할 때는 고인의 머리카락이나 쓰던 물건 따위 유물을 껴묻는 경우가 있으나 전봉준의 가묘에는 껴묻은 물건조차 나오지 않았다. 전봉준의 묘소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가묘를 만들어서 추모제를 지냈던 것이다. 「파랑새」를 목 놓아 부르던 민중이 전봉준이 살던 마을의 언덕에 가묘를 조성해 모셨으니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하겠다."(2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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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 인간 이봉창 이야기
배경식 지음 / 너머북스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3·1운동 당시 이봉창은 무라타 약국의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봉창이 3·1운동에 관해서 언급한 것은 1932년 9월 16일에 있은 첫 공판 때뿐이다. 일본인 관선변호사가 "그것을 듣고 어떤 소감을 가졌는가"라고 묻자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이처럼 이봉창은 3·1운동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무엇 때문에 그러한 운동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으며, 직접 참여하지 않고 방관자로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다면 왜 이봉창은 3·1운동이나 민족운동과 아무런 상관없이 성장했을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식민의 아픔을 느낄 수 없었던 가정환경이다." 이봉창의 아버지 이진구는 식민지배와 약탈에 필요한 건축 수요 및 이주 일본인들을 위한 주택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한일합방 이전 시기부터 건축청부업과 우차운반업을 영위하면서 큰 재산을 모았다. "이봉창이 민족운동과 무관하게 자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용산의 지역적 특징을 들 수 있다."(35) 


"이봉창이 어린 시절을 보낸 용산 일대는 '조선 내 일본'으로 불릴 정도로 일본의 각종 군사시설과 운수, 통신 기관이 밀집된 식민통치의 심장부였다. 용산은 경성 시가지의 외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1900년에 전차 노선이 들어오고, 상수도도 제일 먼저 설치되는 등 도시개발 과정에서 막대한 특혜를 누렸다." "이러한 주변 환경은 이봉창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봉창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을 접하면서 다른 조선인보다 빨리 일본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조선인의 일본어 해독능력은 1913년에 0.61%였던 것이 10년이 지난 1923년에도 1.81%에 불과했을 정도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조선인이 드물었다." "이봉창은 일본인 상점에 취직하여 일본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면서 일본어에 더 능숙하게 되었고, 그것은 또한 그가 나중에 일본행을 결심할 수 있었던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36-7)


일본으로 가기 전의 이봉창의 행적 가운데 또 하나 주목되는 일은 1925년 10월에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최초의 근대적인 인구센서스인 간이국세조사의 조사위원으로 활동한 것이다. "간이국세조사위원이 '명예직'이었다는 것은 총독부의 정책에 협력하고 있던 조선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뒤에 유명한 친일파가 된 이들의 상당수가 관직 경력에 '국세조사위원' 항목을 자랑스럽게 적어넣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시 국세조사위원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적어도 일정한 사회적 지위와 총독부의 식민정책에 대한 동의 등이 인정되어야만 선발되었던 것이다." "이봉창이 국세조사위원으로 활동하여 총독으로부터 상금과 함께 나무잔까지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조선인에 대한 민족차별에 불만을 품고 용산역 근무를 그만두기는 했지만, 여전히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본의 식민정책에 협조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65-7)


일본에서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취업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자 "이봉창은 조선인으로 태어난 자신의 처지를 자책했다. '내가 조선인이기 때문에 그쪽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결코 그쪽이 나쁜 것이 아니라 부탁하는 내가 나쁜 것이다. 유치한 것이다. 내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보통사람처럼 얼굴을 내민 것이 잘못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이봉창은 자신이 비참해졌다. 그러면서도 이런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인간인데도 똑같이 대접해 주지 않는다. 나도 일본인임에 틀림없다. 신일본인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이봉창이 조선인이기 때문에 거절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조선인이 아니라 '신일본인'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조선인으로서 차별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극복할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안정된 직장을 구해 평범한 인간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80-1)


"1926년 12월 25일, 몸이 약해 병으로 고생하던 다이쇼(大正) 천황이 사망하자 오랫동안 섭정을 해오던 히로히토가 도쿄 궁성에서 조견례를 갖고 천황에 즉위했다. 그러나 즉위대례, 곧 공식적으로 천황에 즉위하는 행사는 다이쇼의 복상이 끝나는 1928년 11월 10일에 교토 고쇼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이봉창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도 모르고 왕의 얼굴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란 것을 처음 깨달았다." 아마가자키 출장소 공작계의 상용인부로 일을 나가는 동안 능숙한 일본어 실력과 성실한 작업 태도를 인정받아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생활이 안정되자 이봉창은 천황의 얼굴을 봐야만 제대로 된 진짜 일본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자신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노동자이지만 돈을 빌려서라도 반드시 천황의 얼굴을 보겠다고 다짐했다."(93-4)


그러나 정작 즉위식날 검문에서 소지하고 있던 한글 편지 때문에 유치장에 갇힌 신세가 되자 "이봉창은 자신을 '불행한 인간'이라고 체념하면서,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을 유치장에 집어넣는 '얄궂은 세상'을 원망했다. 그럴수록 일본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조선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런 압박과 차별을 받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이봉창이 당시 느꼈던 분노와 절망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조선인으로 태어난 것을 자책할수록 더 깊은 절망에 빠질 뿐이었다. 결국 이봉창은 자신이 조선인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98) "유치장에 갇혀 있는 동안 이봉창은 취조를 받거나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이봉창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봉창은 유치장에 갇혀 있으면서 처음으로 조국의 독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막연한 생각에 불과했다."(100-1)


"이봉창은 오사카에서 조선인이 제일 많이 모여 사는 쓰루하시에서 생활하면서도 (정신적 안식처가 되어주는) 모든 것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는 진짜 일본인처럼 행동한다면 일본인들에게 차별대우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인과의 교제를 완전히 끊었다. 쓰루하시를 비롯하여 오사카에는 친구들도 많이 살고 있었지만 이봉창은 그들을 만나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봉창은 오사카에 살고 있는 사랑하는 조카딸 은임과의 연락도 끊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정책은 결코 이봉창의 그러한 '소박한 열망'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105-7) "결국 이봉창은 불경기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민하던 상황에서 상해에 가면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그곳에서는 조선인이라는 차별대우를 받지 않고 떳떳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두 가지 생각을 품고 상해행을 결심했다. 이봉창이 상해 임시정부에 대해서 들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119)


1931년 1월 초순 임시정부 사무실을 방문한 이봉창을 눈여겨본 김구는 며칠 뒤 "이봉창이 묵고 있는 여관을 찾아가서 속마음을 털어놓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자신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제 나이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하여도 과거 반생 동안 방랑생활에서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봉창의 이 말에 김구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때서야 김구는 이봉창이 의기남아로서 살신성인할 큰 뜻을 품고 상해로 건너와서 임시정부를 찾아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김구는 이봉창의 위대한 인생관을 듣고 감동의 눈물이 벅차오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봉창은 겸손한 마음으로 나라 일에 몸바칠 수 있도록 지도해 달라고 김구에게 청했다. 김구는 쾌히 승낙했다."(129)


"이봉창이 도쿄로 떠난 1931년은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절망적인 '암흑의 시기'였다. 3·1운동 직후의 혁명적인 열기와 독립의 희망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22~23년을 넘어서면서 국제정세가 점차 안정되고 일본이 승승장구하면서 기대와 달리 독립의 희망은 점점 멀어졌다. 그럴수록 독립운동가들의 이탈은 늘어났다. 그리하여 192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부여잡고 견뎌야만 하는 긴긴 절망의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특히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직전인 1929년과 1930년 무렵은 뚜렷한 독립운동의 성과가 없었던 가장 힘든 시기였다." "특히 1931년에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이 그 여세를 몰아 만주 전체를 장악하고 일본의 괴뢰정권 만주국이 건설되면서 독립운동 최대의 근거지였던 만주에서의 무장투쟁도 어렵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 최고조에 이르렀던 국내의 대중투쟁도 현격히 줄어들었다."(185-6)


"(천황 폭살을 시도한) 이봉창은 결정적인 실수 두 가지를 범했다. 우선 천황의 행차코스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은 거사 당일 천황의 이동코스를 제대로 알지 못해 시간을 놓치고 당황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실수는 천황에 대한 정보를 전혀 입수하지 않은 것이다. 천황의 사진은 물론이요 천황이 야외행차를 할 때에 행렬의 어디쯤에서 움직이는지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지 않았다." "천황 폭살이라는 엄청난 거사를 오로지 이봉창에게만 일임한 김구의 잘못도 있었다. 김구 자신이 일본 사정에 어두웠고, 이봉창을 도와줄 동지 한 명 없이 혼자 파견했다. 물론 당시의 임시정부 형편으로 이봉창을 도와줄 인물을 함께 일본에 파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봉창 한 명을 도쿄로 보내는 여비를 마련하는 데도 반 년 이상이 걸렸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김구는 도쿄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는 이봉창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김구의 결정적인 실수였다."(211)


# 1932년 1월 8일 거사 실행 그리고 실패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일본의 천황을 죽이려고 시도한 적은 딱 두 번뿐이었다. 첫번째는 이봉창 이전에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가 계획단계에서 발각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무정부주의자 박열의 경우이고, 두번째가 이봉창의 경우이다. 물론 1924년 1월에 의열단원 김지섭이 천황이 사는 고쿄의 궁성으로 들어가는 다리인 니주바시에 폭탄을 투척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천황의 폭살을 직접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239) "김구가 테러리즘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와서 만주사변으로 일본이 승승장구하면서 독립운동의 불씨가 사그라들어 싸울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도 갖추지 못했을 때였다. 그때 김구는 실력양성이나 무장투쟁을 할 수 있는 조직이나 자금도 부족한 상황에서 최소한의 노력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일대 타격을 가해 꺼져가는 독립운동의 불씨를 다시 살릴 방법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테러리즘이었다."(243)


"비록 이봉창 의거는 실패했지만 동경의거를 통해 김구와 임시정부는 재기에 성공했다. 한동안 임시정부에 냉담했던 미주 동포들이 다시 뜨거운 성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동경사건을 보고) 찾아온 청년들에게 김구는 제2, 제3의 동경의거의 임무를 주어 적지로 침투시켰다. 유진식과 이덕주에게는 조선총독 암살을, 최흥식·유상근·이성원·이성발 등 4명에게는 관동군사령관, 관동청장관, 남만철도 총재 등 만주침략의 원흉을 폭살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각각 국내와 만주로 파견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두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홍구공원 야채시장에서 채소장수를 하던 또 한 청년이 김구를 찾아왔다." "그가 바로 "장부가 한번 집을 나가면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고향을 떠나 상해에 와 있던 윤봉길이었다." "이봉창의 희생으로 인해 꺼져가던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다시 불길을 당긴 것은 매우 중요한 공적이라 할 수 있다."(2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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