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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노예와 병사 만들기
안연선 지음 / 삼인 / 2003년 8월
평점 :
"일본군의 위신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군 당국은 1938년 두 가지 지시를 내렸다. 첫째, 위안부의 모집은 군당국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어야 하고 모집 담당자는 군에서 신중하게 선정해야 한다. 둘째, 위안부 모집 과정은 조선에서와 같이 관련 지역 경찰과 긴밀히 협력해서 진행되어야 한다." "군 교통 수단이나 군 숙소 등을 제공해서 군이 모집해 온 소녀들을 호송했다는 증언이 많이 있었다. 이들 여성들은 종군 간호부처럼 일본군 조직 내에서 공식성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수송시에도 군수품 수송을 위한 장소, 즉 기차의 맨끝 연결 차량이나 배의 밑바닥에 실려갔다. 위안부 모집자들을 태평양 섬 지역으로 운송하는 동안 "배 안에서 사용 중지"라는 경고문이 선내에 붙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이들 모집자들을 각 부대로 할당할 때는 '군수 물자 배급'이라는 명목에 위안부들의 이름을 적었다고 한다."(86)
"위안부들은 가난에 시달리는 경제적 약자일 뿐만 아니라, 외부모 가족(특히 '편모 가정') 출신이나 고아와 같은 당시 사회적인 배경에서 약자들인 경우가 많았다." "옛 위안부들의 가족 배경에서 발견한 또 하나 눈여겨볼 사실은 장녀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맏딸로서 가족 부양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위안부 모집 대상의 또 다른 그룹은 기생 학교의 소녀들이었다." "위안부들 중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모집 대상자가 된 경우도 있었다. 정서운·윤순만 할머니처럼 당시 조선 독립 운동과 연루되어 있던 가족의 딸들 역시 위안부로 차출된 경우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위안부는 사회적으로 취약한 그룹을 주요 대상으로 모집하였는데, 그 이유는 모집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사회적인 불안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는 위안부 문제에 사회적 계급이라는 변수가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준다."(87-9)
"위안부들을 통제하기 위해 서로 분열시켜 통제한다는 분리 지배의 원리가 사용되었다. 배족간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위안부들도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위안소에 있었던 기한에 따라 계급이 매겨지기도 했고, 상급자 위안부는 하급자를 처벌할 수도 있었다." "위안부들 사이의 위계 구조를 형성하는 기반이 된 것은 그들이 '상대하는' 군인들의 계급이었다. 군인들 사이의 위계 구조는 위안부들 사이에서도 재생산되었다. 각 위안부가 '받는' 군인이나 장교의 계급에 따른 특권과 위계 구조가 바로 이들의 지위를 결정했다. 군 위계 구조 내 고위직 장교를 '상대한다'는 사실은 이들의 일상 생활에 차이를 가져왔다. 위계 질서 구조에서 위안부가 지니는 위치에 따라 그들이 하루에 몇 명을 받아야 하는가가 결정되었다. 주로 장교들을 '상대하는' 일본 위안부들은 다른 위안부들처럼 많은 군인들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차별은 이들 여성들을 서로 분열시키는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96-7)
"위안부들이 더 이상 군인을 '상대할' 수 없을 때는 사용 가치가 없는 것이므로, 그야말로 사용후 버려지는 소모품과 같은 존재였다. 예를 들어 병이 심해지거나 몸이 너무 약해서 더 이상 성행위를 할 수 없게 되면, 위안부로서의 사용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들의 몸은 성행위를 위해서만 유용했을 뿐, 그 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부여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성병이나 다른 질병에 걸리지 않은 상대적으로 건강한 위안부만이 그 '유용성'을 인정받았다." "위안부들에게는 성노예에서부터 심지어 전쟁 말기에는 군사적인 업무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일이 부과되었다. 예를 들면 군부대 병영의 청소, 군복 세탁, 창 찌르기 등의 군사 훈련, 탄약 상자와 폭탄 나르기, 부상병 간호, 전투에 나가거나 돌아오는 군인들의 환송과 환영, 춤과 노래로 군인들에게 오락 제공, 재사용을 위해 사용한 콘돔 세척하기, 부상병을 위한 헌혈, 심지어는 스파이 활동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했다."(103-4)
"위안부들은 매일매일 계속되는 장기적인 성폭행에 대처해 나갈 생존 전략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위안소 체제는 위안부들의 저항을 약화시켰지만, 그러함에도 몇몇 위안부들은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방식으로 저항했다. 저항의 방식은 다양했다. 위안소 탈출을 시도하기, 군인 요구에 저항하기, 되받아치거나 싸우기, 군인 살해, 자살 시도, 실성함(미침), 힘든 현실을 탈피하기 위해 술이나 마약 복용하기, 장교와의 친근감을 형성하기 등 여러 가지 생존 전략과 저항의 방식이 존재했다. 그 가운데 가장 대담한 저항 방식 가운데 하나는 바로 위안소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안부들은 늘 감시당하고 있었으므로 탈출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위안소를 벗어나기 어려웠던 또 다른 이유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있던 대부분의 위안소들이 최전방 근처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위안부들이 위안소를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바깥은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111-2)
"전후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위안부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수치와 비난과 오명뿐이었다. 자신과 가족과 한국 사회는 이들을 '더럽혀진 몸'으로 여겼다. 김학순 할머니는 자신이 더 이상 '정상적인' 다른 여자들과 같을 수 없음에 대한 쓰라린 심정을 토로했다. 위안부들이 자신의 과거를 주위에 밝히자 가족과 친척들은 심지어 이를 '가문의 수치'로 여겼다. 이러한 가족들의 반응은 이들을 다시 가족 밖으로 내몰았다.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사회 운동화되기 시작한 1990년대 들어, 옛 위안부들이 자신의 과거를 신고하거나 공개적으로 밝히고자 할 때, 이들은 또다시 가족과 마찰을 빚었다. 이제는 위안부 자신만이 아니라 그녀의 가족 모두가 '더럽혀진 몸'에 대한 수치와 맞부딪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옛 위안부들에게는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것을 운동단체나 정부에 신고차는 것 자체가 '가족의 수치'를 사방에 알리는 것으로 해석되었다."(119-20)
"옛 일본 군인들 가운데는 위안부와 나눈 연애 관계 때문에 전쟁터에서 상실된 자아를 회복할 수 있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일본인 작가 니시노 루미코가 만난 한 군인은 위안부와의 만남이 "진정한 인간적 만남"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는 위안부와 군인의 경험 사이에 커다란 차이점을 보이는 것 중에 하나이다. 위안부들의 구술과는 많이 다른데, 옛 일본 군인들은 위안부 여성들이 자신들의 동반자였고, 연인이었고,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옛 일본군인들은 그들이 그리던 어머니, 아내, 연인상을 투영시킨 이상적인 여성상의 대용품으로 이들 위안부들을 대상화했던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인간적인 연애 관계에 대한 감정이 위안부를 경멸하는 감정과 함께 공존했다는 것이다. 옛 일본 군인들은 위안부들은 성적 쾌락을 얻기 위한 대상이라든가, '더러운 여자'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131-2)
"위안부뿐만 아니라, 일본 군인도 엄격한 규제와 통제를 받았다. 그들은 일본제국 군대의 군인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증명해야 했다." "일반병들은 고참들의 가혹한 대우와 혹독한 군사 훈련을 견뎌야 했다. 특히 막 입대해 들어온 신참들은 '지옥 훈련'이라는 것을 거쳐야 했다. 이때 신참들은 매일 맞았다. 군복에 조금이라도 흙이 묻었다거나, 군화가 제대로 광이 나지 않는다거나, 대답이나 태도가 고참의 맘에 들지 않을 때는 신참들은 고참들에게 가차없이 구타를 당했다. 그러나 군인들을 통제된 군생활과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길들이기 위해서는 당근과 채찍이 필요했다. 혹독한 군생활을 보상하기 위한 일종의 위로·오락으로서(그러니까 당근으로서) 제공된 것은 바로 '성'이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처벌과 보상 체계가 공존했던 것이다. 옛 일본군 장교 요시오카 다다오 역시 일본 군당국이 군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위안부 제도에 의존했음을 시인했다."(142-3)
"옛 위안부와 전쟁 포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옷을 갈기갈기 찢고 발가벗기기, 채찍질하기, 가슴 도려내기, 담배불로 지지기, 자궁에 총을 겨누어 발사하기, 복부 가르기 같은 상상하기도 힘든 행위들을 일본 군인들이 했음이 보고된 바 있다." "폭력은 마치 화폐처럼 군인들이 위안부들한테 원하는 '서비스'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폭력은 위안부들뿐만 아니라 부하 군인들, 그리고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널리 사용되었다. '불굴의 전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전투를 위한 사기를 고조시키기 위해서 군대 내 폭력은 국가 권력에 의해 허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도화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군인들은 일상에서 계속되는 구타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갔다. 말하자면 위안부를 구타하는 것을 포함해 군대 내에서 구타는 하루 일과 가운데 하나로 일상화되었고, 가차없이 냉혹해져 갔다."(148-9)
# 위안소 설치를 합리화하는 주장들
1. 위안소 제도는 기존의 매춘 제도와 다를 바 없다.
2. 전시戰時라는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3. 남성은 통제할 수 없는 생물학적 성욕이 있다.
4. 주둔/작전 지역의 여성들에 대한 강간을 방지한다.
5. 주둔 지역의 치안 유지에 이바지하여 반일감정을 억제한다.
6. 위안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군당국이 개입했다.
"(가혹한 폭력과 더불어) 남성성을 부추기기 위한 또 다른 실천 가운데 하나는 여러 명이 함께 위안소에 가서 성관계를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마치 하나의 '의식'(ritual)과 같다. 이때는 대개 장교나 고참이 부하들을 이끌고 갔다. 옛 위안부 하군자 할머니는 군가를 부르며 그녀의 방 안으로 행진해 들어오는 군인들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성행위는 그룹의 구성원 모두가 참여해야만 하는 하나의 통과 의례와도 같다." "군인들이 성적인 필요를 느끼는지, 또는 상대 여성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와는 상관없이 위안부와 성관계를 하는 것은 이들 군인들에게 주어진 권리였을 뿐 아니라 성을 통해 남성성을 증명해야 하는 하나의 과제였다. 성행위를 통해서 남성다운 행동의 기준에 들었음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그러므로 성은 군대 내에서 일상 생활을 통해 남성성을 강화시키고 재확인하기 위한 주요 실천 관행 가운데 하나였다."(176-7)
"한마디로 말해 위안부 제도는 남성적 정체성(용맹스럽고 공격적이고 성적화된 전사로서의 정체성)을 재확립할 수 있는 환경을 군인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일본 군대의 위계 구조에서 일반 사병이나 갓 입대한 신병들이 가장 낮은 층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군대 내 위계 구조, 특히 체벌의 위계 구조에서 위안부들은 일반 사병들보다 더 낮은, 유일한 '부하'들이었다. 군인으로서의 남성적인 지배와 군사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구성된 '위안'을 위한 공간에 위안부들이 제공되었던 것이다. 전쟁터에서 남성은 전투를 위한 하나의 군수품이나 '총알받이'로 전락했다. 그러나 위안소에서는 위안부에 대한 지배와 통제를 통해 전사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들의 주체성을 재확립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통해서 남성적인 주체성을 회복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성행위는 남성성의 정수로 여겨진다."(185-6)
"조선의 여성성 모델은 일본 천황의 군대를 '위안'하기 위한 성적인 대상('창녀')으로 규정되는 반면, 모범적인 일본 여성의 역할은 재생산자로서 미래 천황의 군인을 생산하기 위한 모성으로 규정되었다." "조선 여성과 일본 여성 사이의 이분화된 이미지, 즉 성적인 도구와 '국가의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는 가부장적 국가 권력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여성에 대한 이분법적인 분류는 서로에 상반되어 개념화되기 때문에, 위안부들을 '더러운 창녀'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일본의 후방에 있는 일본 여성들에게 '정숙한' 부인·어머니·딸의 자리를 비축해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분화는 이들 둘 사이의 민족적인 위계 질서의 골을 깊게 하는 데 한몫 했다. 조선과 일본에 걸쳐 통용되었던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에 기반한 이러한 위계 질서는, 전쟁을 통한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에서 식민주의 지배를 당연시하기 위한 또 다른 정치적 함의를 지닌다."(211-2)
# 여성의 몸에 대한 이미지가 '조국(homeland)'으로 상징화
"여성의 몸을 민족의 고결함으로 상징하는 담론은 여성에게는 위험한 것이다. 사실 상당수의 위안부들이 전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또한 귀향을 한 경우도 자신들이 위안부였음을 공개하지 않았다. 또다시 수치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며, 그들이 속한 공동체, 즉 '민족의 명예'를 훼손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한국도 일본도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 듣기를 원하지 않았다. 여성성에 대한 한국 민족주의와 유교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이의 실천은 이러한 집단적인 '기억상실증'을 초래했다. '정숙한' 여성의 성과 '정조'는 민족의 순수성과 연관지어 개념화되므로 위안부들의 침묵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민족적 자부심' 그리고 대부분의 위안부들에게 부과된 수치감들은 이들을 침묵하게 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위안부 문제를 부인해 온 일본의 이해 관계에 공모해 온 셈이다."(223-4)
"위안부들에게 강요된 '난잡함' 또는 '더러운' 여성 정체성은 군인들 내에 여성을 혐오하도록 하는 남성 정체성을 강화시켰고, 순종적인 여성성은 우월한 남성성을 형성했다. 결과적으로 위안부들을 노예화된 위치에 놓음으로써 일본 군인의 '주인됨'이 형성되고 강화되었다. 즉 조선인 위안부들의 몸은 일본 군인의 민족적 우월성과 남성성을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위안부들의 '오염된' 여성성은 군인들의 남성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위안부 제도를 통해 구성된 여성성에는 모순이 드러난다. 노예화되고 성애화된 위안부의 여성성과의 관계에서 군인들의 남성성은 강화되는 한편, '더러운' 위안부의 몸과 접촉함으로써 군인들 자신도 '오염되고', 성병에 걸려 남성성이 훼손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는 위안부를 '필요악'의 위치에 자리매김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225-6)
"일본 군인의 민족 정체성은 '광적인' 애국주의, 천황에 대한 충성, 외국인 혐오주의, 집단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들의 민족 정체성은 또한 성별화되어 있었다. 특히 천황제는 일본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의 정체성은 천황제와 민족주의의 결합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대부분의 조선인 위안부들의 민족 정체성은 반식민주의적이었으나 일본 남성들의 민족 정체성은 식민주의적이었다." "일본에 의한 조선인의 민족 정체성 형성은 일본인의 우월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한국 위안부를 '미문명화되고' 성애화되고 '음란하고' 열등한 인종으로 규정하는 것은, 반대로 일본 군인의 문명화되고 우월하고 애국적이고 남성적인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가부장적인 민족주의와 '광적'인 애국주의는 조선인 위안부의 멸시와 고통에 의해 마련된 토양 위에서 번성했다."(2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