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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혁명의 기록 - 동학농민전쟁 120년, 녹두꽃 피다
이이화 지음 / 생각정원 / 2014년 10월
평점 :
"전봉준이 행동으로 나선 기록은 1892년 11월 동학교도들이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며 일어난 삼례 집회 때부터 나타난다. 교도들의 탄압을 중지하라는 소장을 낼 때 이를 들고 갈 사람이 없었다. 목숨을 담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험한 일이었다. 이때 전봉준이 선뜻 나선 것이다. 그는 전라감사에게 항의의 글을 내기도 하고 창의문倡義文(봉기할 것을 호소하는 글)을 직접 써서 돌리기도 했다. 또 동학교단에서 최시형의 허락을 받아 광화문 복합상소伏閤上疏(대궐 앞에 엎드려 소문을 올리는 절차)를 올릴 직전에 다시 삼례에서 집회를 열고 전라감사에게 글을 보냈다. 이때도 전봉준이 활동을 전개했다." "여기서는 교조 신원만이 아니라 일본과 서양 세력을 배척한다는 의지도 분명하게 드러냈다." "전봉준은 이 무렵부터 척양척왜를 분명하게 표방했다. 이는 흥선대원군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인지 전봉준과 흥선대원군이 동지적 관계를 맺었다는 설도 널리 퍼져 있다."(49-50)
전봉군의 주도로 농민군이 거세게 일어나자 "1894년 2월 말경 신임 군수 박원명이 고부로 들어왔다. 박원명은 농민군 지도자들을 불러모아놓고 위로하면서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약속하고 소를 잡고 술을 빚어 잔치를 풍성하게 벌였다. 농민군들은 현저히 동요하는 빛을 보이며 해산을 서둘렀다." "해산의 원인은 첫째, 마을 단위의 집강으로 표현되는 토호와 부자들이 지도부에 끼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여러모로 수탈을 당한 분풀이로 민요를 일으켰으나 지경 바깥으로 진출해 역적의 누명을 쓰는 것을 꺼려 적당하게 타협하려 들었다. 전봉준을 잡아 보내려 한 일부 무리도 이들 부류였을 것이다. 둘째, 하부 구조는 영세농과 머슴들이었고 무뢰배와 발피들이었다. 이들을 두고 전봉준은 공초에서 "동학의 무리는 적고 원민怨民(원한을 가진 백성)이 많았다"고 했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분을 풀고 곡식을 나누어 받는 것 따위 재미를 보다가 토호와 부자들이 해산하려 하자 덩달아 흩어졌던 것이다."(83-4)
"전봉준은 일찍이 그의 부하들에게 "나는 신령스런 부적이 있어 몸을 보호해준다. 비록 대포 연기가 자욱한 속이나 총알이 비가 오듯 하는 속에서도 다치지 않는다. 너희들 보아라"라고 말하고는 몰래 탄환 수십 개를 소매 속에 넣어두고 친하고 믿을 만한 사람 십여 명에게 비밀히 알려준 뒤 그들로 하여금 에워싸고 총을 쏘게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포였다." "땅에 떨어진 탄환을 본 무리들은 "장군은 신령스런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런 모습을 본 부하들은 그 부적을 다투어 붙이고 총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다. 또 전봉준은 어느 때 밤을 이용해 총잡이와 짜고 미리 손아귀에 총탄을 숨겼다가 총수가 헛방을 놓으면 전봉준이 총알을 재빨리 잡는 시늉을 하고 나서 손을 펴 총알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어둠 속에서 이를 바라보던 농민군들은 "우리 대장만 따라다니면 어떤 양총을 맞아도 죽지 않아"라고 떠들었다. 농민군들은 대장의 신통력을 믿어 더욱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113-4)
박원명의 후임으로 온 이용태는 포악한 인물로, 민요 두목들을 붙잡는다는 핑계로 각종 행악을 부렸다. 이를 참지 못하고 재봉기한 전봉준의 농민군은 고부 관아를 점령한 후 세력을 늘려나갔다. 농민군은 황토재에서 승리한 뒤 정읍을 거쳐 고창·무장·영광으로 진출한 후, 마침내 전주성마저 함락했다. 그러나 전주성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전주성으로 장위영군을 이끌고 와 대포를 쏘며 포위망을 조여오던 홍계훈은 "항복 권고를 연달아 성안으로 날려보냈고 농민군은 승전의 빌미를 찾을 수 없었다. 더욱이 전봉준은 몇 차례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머리와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5월 7일, (농민군의 시정사항을 조정에 건의하기로 하면서) 화해 약속은 성립되었다. 이는 휴전의 의미와는 다르다. 전봉준과 홍계훈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화약을 성립한 것이 아니다.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조건을 제시하다가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판결선언서〉대로 화약이 아니라 합의라고 하는 것이 맞다."(121-2)
"농민군은 왜 '귀화'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화해 약속을 맺었을가? 첫째, (동학) 북접의 호응이 없었던 것이요 둘째, 외국 군대의 개입이 두려웠으며 셋째, 농민군의 내부 동요가 있었고 넷째, 양곡과 생필품의 결핍이 있었던 탓이다. 실제로 북접은 남접의 행동이 과격하다고 비난했으며 북접의 지시를 받는 호남의 동학 세력은 자기들의 고장에서 귀추를 엿보고 있었다. 게다가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원세개가 보낸 청군은 전주에 와서 농민군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들은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한편 농민군은 농군이어서 농사철을 맞아 들떠 있었다. 논에 물을 대야 하는데, 볍씨를 뿌려야 하는데, 모내기 날이 다가오는데 따위를 생각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농심農心이 일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전주성이 완전히 포위되어 시장도 열리지 않고 물품의 조달이 단절되어 당장 밥을 굶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124-5)
"그러면 관군 측은 왜 화전 약속을 급하게 맺으려 했던가? 첫째, 조정에서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자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구실로 서울로 들어왔으며 둘째, 일본군이 횡행하는 서울과 인천에는 수비병이 거의 없어 수도 방위가 위태했고 셋째, 홍계훈이 지휘하는 관군의 사기가 거의 땅에 떨어진 상태였으며 넷째, 농민군의 지원군이 언제 배후를 공격해올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홍계훈 개인의 공명심이 작용한 것으로도 보인다. 홍계훈은 적당하게 화전을 맺어 농민군에 전주성을 내준 책임에서 벗어나 자신이 승리의 장수임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홍계훈은 농민군이 전주에서 썰물 빠지듯 물러나자 엉뚱하게도 "비적을 소탕한다"고 외치면서 호기를 부렸다." "(곧이어 홍계훈도 서울로 상경하고) 농민군 지도자들은 각기 지방에 흩어져 집강소 조직을 정비했다. 이제 새 국면은 서울과 인천 그리고 전주를 중심으로 새롭게 전개되고 있었다."(125-6)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전봉준은 재봉기를 준비하는 장소를 삼례로 삼고 9월부터 직속부대를 이끌고 양반다리 언저리에 머물렀다. 그는 집강소 활동 기간에 양곡과 무기를 확보하고 말과 나귀를 모으며 군수전을 마련하는 등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재봉기를 서두르면서 여러 장령들에게 협조를 구하기도 하고 설득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군수전·군수미를 확보하기 위해 부호들에게 일종의 어음이라 할 표지標紙(액수를 쓴 종이)를 돌렸으며 집강소 활동 기간에 농민군에게서 거둔 무기를 삼례로 돌리게 했다. 또 유별나게 호남의 북접 교도들에게는 군량미와 말 먹일 꼴을 버겁게 배당해 노골적으로 압력을 넣었다. 북접을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북접과 남접의 갈등이 깊어지자 최시형은) 교단의 지도자들을 불러 상의한 끝에 대세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정부에서는 남·북접의 교도들을 가리지 않고 한 통속으로 보아 탄압을 가했고 교단의 지도자들을 체포하려 포교들을 풀어놓은 처지였다."(157-9)
# 최시형의 '대동원령'에 따라 북접 지도자들은 벌남기伐南旗(남접을 징벌하라는 기)를 찢어 버리고 연합전선을 구축
"10월 25일 벌어진 능치 전투에서는 일본군이 왼쪽에서 진격해왔고 관군이 반대편에서 협공을 했다. 농민군은 중간에서 좌우를 향해 맞받아 대응했다. 전투는 한낮까지 계속되었다. 농민군은 협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구덩이 속에서 인해전술로 적을 공략하려 했다. 잎이 떨어진 나목을 차폐물로 의지해 몸을 숨기기가 마땅치 않았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효포의 들판에서 진용과 장비를 수습하고 있을 때 관군이 다시 공격해왔다. 농민군은 경천점으로 후퇴했으나 관군이 다시 추격해와서 농민군들은 논산으로 물러났다. 능치의 골짜기와 효포의 길바닥과 하고개의 언덕이 시체로 쌓이고 피로 물들었다." "세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농민군은 너무나 큰 피해를 입었다. 농민군은 전투에 지치고 추위를 견디다 못해 연달아 달아났다. 특히 전투 경험이 적은 북접 농민군은 몇 차례 전투를 치르고 난 뒤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1차 공주 공방전의 대체적인 상황이다."(182-3)
"11월 9일 정오가 되기 직전, 모리오 대위는 기다리던 작전 개시의 시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일본군은 봉우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대포를 연달아 쏘아댔다. 농민군도 대응해 본격적으로 전투를 개시했다. 한꺼번에 밀려 올라가다가 대포를 쏘면 물러나고 잠시 대포 쏘기를 멈추면 밀려왔다. 제1대가 무너지면 제2대, 제3대가 꼬리를 이었다. 이날 오후까지 전진과 후퇴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농민군의 시체가 언덕과 고개 언저리에 쌓였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눈을 흥건하게 적셨다." "두 차례 전투를 벌이고 나서 점검해보니 1만여 명이던 군사가 3천여 명만 남았고 다시 두 차례 접전을 한 뒤 점검해보니 500여 명만이 남았다." "이런 형편에 놓여 있었으니 전봉준도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우금재의 마지막 보루를 버리고 남은 농민군을 이끌고 달아났다." "이제 공주를 포위했던 농민군은 사라졌다. 내리 4일 동안 전개된 이 전투를 2차 공주 전투라 한다."(188-9)
"전봉준이 지휘하는 주력 농민군은 원평과 태인 전투를 끝으로 완전히 해산했다. 전봉준은 자신이 어릴 때 자라고 돌아다닌 원평과 태안을 최후의 격전지로 삼았다. 그런 연고로 하여 수백 명 정도 남은 농민군을 다시 수천 명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농민군으로는 한풀 꺾인 사기를 올릴 수 없었으며 일본군의 성능 좋은 신무기를 극복할 수도 없었다. 전봉준은 공초供招(죄인 심문 기록)에서 이때의 정황에 대해 솔직하게 대답했다. 전봉준은 금구 등지에서 다시 군사를 모았는데 그 수효는 많았으나 기율이 없어서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아주 어렵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일본군이 계속 추격해와서 그들이 맞서 싸울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어서 두 곳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것이다. 그는 태인 전투를 치른 뒤 대장으로서 정식으로 농민군의 해산을 침통한 심정으로 명령했다."(204)
"전봉준의 죄목은 《대전회통大典會通》에 규정된 '군복기마작변관문자부대시참'이었다. 꽤나 긴 죄명이었다. 이를 풀이해보면, 군복 차림을 하고 말을 타고서 관아에 대항해 변란을 만든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형하는 죄다. 그리하여 전봉준과 같은 사형언도를 받은 손화중·김덕명·최경선·성두한 등 네 명은 판결이 난 날 곧바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들이 교수형에 처해진 것은 갑오개혁 때 개정된 법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종전에는 역적죄에 해당하는 사형수들은 모조리 참형을 가해 목을 잘라 관아의 문 앞에 걸어두거나 여러 사람들이 보도록 조리를 돌렸다." "개화정부는 형법을 개정해 "모든 재판과 소송은 2심으로 한다"는 조항을 두고 4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공포했다. 이들 다섯 명에게는 그 시행을 불과 2일 앞두고 사형을 집행했다. 그러니까 사형 선고와 사형 집행을 전격적으로 단행해 2심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속전속결로 들뜬 민심을 가라앉히려 했던 것이다."(235-6)
"전봉준이 역적으로 처형을 당하고 난 뒤 고창의 당촌을 비롯해 주변의 전씨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관군들은 전씨 마을을 덮쳐 재산을 약탈하거나 불태웠고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전씨 집성촌을 폐허가 되었으며 전씨들을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실의 언덕배기에 '녹두장군'의 묘소라 전해지는 초라한 무덤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가끔 제물을 차려놓고 녹두장군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렸다. 1990년대에 일 벌이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이 무덤을 발굴해보니 유물이 한 점도 나오지 않았다. 가묘假墓(빈 무덤)를 조성할 때는 고인의 머리카락이나 쓰던 물건 따위 유물을 껴묻는 경우가 있으나 전봉준의 가묘에는 껴묻은 물건조차 나오지 않았다. 전봉준의 묘소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가묘를 만들어서 추모제를 지냈던 것이다. 「파랑새」를 목 놓아 부르던 민중이 전봉준이 살던 마을의 언덕에 가묘를 조성해 모셨으니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하겠다."(2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