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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 그 알려지지 않은 역사 - 일본 전범기업과 강제동원의 현장을 찾아서
김호경.권기석.우성규 지음 / 돌베개 / 2010년 11월
평점 :
일본과 한국의 연구 성과들을 종합해 정리하면 1939년부터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6년여 동안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연인원 600~700만 명에 달한다. 당시 조선 인구가 2,000여만 명임을 감안하면 말 그대로 ‘전 민족적’ 수난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군 병력으로 징발된 조선인이 40여만 명이니 숫자상으로 강제동원 피해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게 노무징용자들이다. 이 중 일본 본토를 비롯해 사할린, 남양군도, 만주, 시베리아 등 국외로 동원된 노무인력이 150만 명 안팎일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450만 명 안팎은 각종 보국대, 봉사대, 근로단 등의 이름으로 한반도 내 작업장에 끌려간 국내동원 피해자다. 국내동원의 경우 1인당 두 세 차례씩 여러 번 차출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연인원이 아닌 실인원수는 200만 명 정도일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국내외 강제동원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적게는 10~20만 명, 많게는 50여만 명까지 추산된다. pp.28-29
1938년 4월 일본 정부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해 ‘전반적 노동 의무제’의 강행실시에 돌입했다.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일본 정부는 의회의 비준 없이 칙령 하나만으로도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고 통제할 권한을 손에 넣었다. 일제는 이어 9월에 노무동원계획을 수립해 1939년의 수요 노동력을 110만 명으로 결정했으며 그 공급원 다섯가지 중 하나로 조선인 노무자를 지목함으로써 중요 산업에 연행할 것을 결정했다. 특별히 노동력 부족을 호소해 온 탄광, 광산 및 토건업에 집단연행을 허락해줬다.
노무동원은 일본 정부와 기업의 합작품이다. 당국이 법령과 제도로서 동원의 근거를 마련하고 송출을 해주면 기업은 조선인들을 군수물자 생산, 토목공사 등의 각종 작업장으로 끌고 갔다. 기업에는 정부 정책과는 별도로 과도한 이익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기업 간에 이를 위한 격렬한 경쟁이 있었다. pp.34-36
1990년대 일본 재판부는 강제징용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청구권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두 가지 논리로 강제징용자의 소를 기각했다. 하나는 시효 만료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 무책임의 법리'다. 국가 무책임의 법리란, '패전 전 일본에서는 국가의 권력적 작용에 의해 개인에게 손해가 발생해도 민법의 불법행위책임에 관한 규정이 적용되지 않았고, 현재의 국가배상법과 같은 일반적으로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법률도 없었기 때문에 그 손해에 대해 국가의 배상책임을 추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김순길 씨가 1심에서 진 근거가 바로 국가 무책임의 법리였다.
일본 재판부는 그런데 2000년 이후 다른 판결문을 쓴다. 2001년 3월 오사카 지방재판소는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낸 여운택, 신천수 씨에게 '한일조약에 따라 청구권을 상실했다'며 기각 판결을 내렸다. 그 뒤 한동안 일본에서 한국인 강제 징용자들이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은 대부분 '청구권 소멸' 논리로 기각됐다. 한일협정이 수많은 강제 징용 피해자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일본 정부는 청구권 협정에 관한 해석을 전과 다르게 했다. 2000년대 이전에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라고 주장하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 국민에게는 애당초 이러한 클레임을 제기할 수 있는 지위는 없기 때문에, 한국 국민이 이것을 청구해도 우리나라는 이것을 인정할 법적 의무는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논리를 일본 재판부가 받아들였다. 그 뒤 일본에서 한국인 강제징용자 소송과 관련해서는 화해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pp.458-460
개인 청구권에 관한 2000년대 이후 일본 정부의 입장은 '소멸'에 가깝고 '인정하지 않겠다'라는 것이지만 명확한 '소멸'은 아니다. 일본 정부는 왜 개인 청구권에 관해 딱 부러지게 '소멸'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일까. 이 배경에는 1956년 일본과 옛 소련이 맺은 공동선언이 있다. 공동선언에서 양국은 "국가, 단체,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서로 포기한다"라고 밝혔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옛 소련에 재산을 두고 온 일본 국민들에게서 소송을 당했다. '소련에 있는 내 재산권을 정부가 소멸시켰으니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각 개인의 청구권까지 포기한 게 아니다"라고 대응한다.
즉 일본 정부는 소련 정부에 대해 비록 공동선언에 의해 외교보호권은 포기했지만 개인 청구권은 남아 있으니 각 개인이 알아서 청구권을 행사해서 재산을 찾으라는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하면 스스로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대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나타나고 있을까. 근원적 이유는 1965년 한일협정이 엉터리로 맺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양국 정부는 무엇보다 청구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해두지 않았다. 김창록 교수는 "협정 및 그 부속문서의 어디에도 '청구권'에 관한 정의 규정이 없다. 그 결과 '청구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협정 및 그 부속문서의 조문만으로는 우리의 문제, 즉 '한국의 외교적 보호권만 소멸된 것인가 아니면 한국인 개인의 재산, 권리 미치 이익과 청구권까지 소멸된 것인가'에 관한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다른 한편 양국 정부는 한일협정 뒤 후속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협정에 적힌 것처럼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면 양국은 국내에서 관련법을 제정하고 후속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국민의 청구권을 소멸시키는 법을 만들고 동시에 일제 피해에 관한 보상법을 만들었어야 했다. 일본 정부도 자국민의 권리를 없애는 법을 만들고 한반도에 두고 온 재산을 보상해줬어야 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엉뚱하게도 한국인의 재산에 관한 권리를 소멸하는 국내법(이른바 144호)을 만들었다. 자국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일에 대해 당시 한국 정부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pp.464~4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