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결 오시듯
바다 저쪽 아득한 곳에 어머니가 계셔서
자꾸 이불 호청을 펼치시는 것이다
삼동에 식구들 덮을 이불 꿰매려고
여동생들을 불러 모으고 그래도 손이 모자라던 때의 저
녁 바람이
내쪽으로 밀려나오며 선득선득 발목에 닿는 것이다
물결 잔잔해지기를 기다려
바다는 저쪽 어귀부터 차근차근 제 몸을 꿰매기 시작하
는데
바느질에 갇힌 어머니 한숨이 솜이불에 남아서
겨우내 우리 몸은 포근하였던 것
그 많은 날들을 잠들 수 있었던 것
숭어 몇 마리 뒤척이는 밤 개펄을 깔고 밀물결 덮고 (P.11 )
김 씨네 집안 한 볼때기 사건
설 전날, 사 대가 함께 모여 사는 김 씨네 집에서는 음
식 장만하느라 하루해가 푸짐하다. 칠십 다 된 맏며느리
는 전을 지지고, 손주며느리는 마당 한켠 절구통에서 사
내와 떡을 친다. 사내가 철부덕, 하고 메질을 하면 손주며
느리는 손에 찬물을 훌 적시고는 그 뜨건 떡살을 뽀그작,
주물러 뒤집는다.
김 씨네 집안 망백의 할아버지가 뒷짐 지고 이 흐믓한
광경을 돌아보신다. 철부덕 뽀그작, 철부덕 뽀그작, 그 소
리 듣기 좋아 한참 절구통을 들여다보신다. 저런, 할아버
지가 떡살이 자시고 싶다고 짐작한 손주며느리는 주무르
던 떡살을 한 줌 가득 떼어 주먹과 함께 불쑥 내민다.
"엣씨요, 할아부지 한 볼때기 하실라요?"
"아니다. 한 볼때기씩은 니들이나 해라잉."
때마침 서녘 하늘엔 노루 꼬리만 한 겨울 해가 뽈그름
히 젖는다. (P.30 )
조경남이들
선생님, 우리 집 복실이가 개한테 물려서 병원에 가야
해요. 토요일 2교시가 끝나자 한 아이가 시무룩 교무실로
찾아왔다. 많이 물렸어요, 빨리 가야 해요. 개한테 물렸
어? 엄마가 가시면 안 되냐? 아니요, 복실이는 저랑 가야
해요, 저랑 오래 살아서요. 그 애의 표정이 서글펐다. 순
간, 개한테 물려 피를 흘리며 가련하게 떨고 있는 복실이
가 떠올랐다. 그래, 얼른 가봐라. 우리 반 조경남이를 '질
병 조퇴'시키면서, 생전 알지도 못한 어떤 복실이를 떠올
린 것처럼 우리 진실로 가져본 적 드문, 조경남이들의 가
슴에나 있을 그 무언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어떤 뭉클함으로 엄습해 옴을 어찌할 수가 없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복실이는, 새끼 낳은 옆집 말라뮤트를
잘못 건들었다가 사정없이 물어뜯긴 저희 집 똥개라는
것이었다. (P.55 )
은닉
언젠가 박진화의 돈을 훔친 사람으로 주연이를 의심한
적이 있는데 진화가 그날 메일을 보냈다.
"선생님도 어렸을 때 뭐 훔쳐봤다고 하셨잖아요. 그때
친한 친구의 지갑을 뒤지시진 않으셨죠? 주연이랑 저랑
많이 친하거든요. 주연이가 범인이라는 거, 우리 반 애들
아무도 안 믿어요. 그리고 그 범인이 밝혀지면 선생님이
쉬쉬하신다고 해도 저희는 누군지 다 알게 되겠죠. 저희
뿐만 아니라 다른 반 애들도 금방 알게 되겠죠. 그 한 번
의 실수가 알려지면 그 애가 너무 불쌍해질 것 같아서요.
이번 일은 그냥 저희끼리 해결하고 싶어요."
그 후 박진화의 돈을 훔친 범인을 우리는 영영 잊어버
렸다. (P.60 )
왕따
좀 어눌한 지선이가 반 아이들한테 왕따 당하는 줄 알
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덩치만 컸지 뭐, 하고는 지선이를
잘 못 건든 애들이 우르르 몰려와 저희 살려달라고 오히
려 숨 넘어갑니다. 요즘 지선이는 저 놀리는 애들을 사정
없이 밀어버리는 모양인데 힘이 워낙 세서 꼼짝 못하고
훌러덩 나가떨어져 버린답니다. 드디어 폭발한 지선이의
비밀 병기에 애들은 몹시 당황해 일대 혼란이 일어난 겁
니다.
한번은 휴대폰 안 낸 애들이 너무 많아 담임이 종례 시
간에 검사를 하였답니다. 그러자 유화가 그걸 급히 사물
함에 숨겼는데 지선이 눈에 딱 걸린 겁니다. 학생이 그러
면 안된다는 지선이의 눈빛 간절한데, 다른 애들은 한 패
가 되어 쉬쉬 유화를 감싸느라 애쓰는 순간입니다. 지선
이는 유화가 휴대폰 안 내고 숨겼다는 말을 하려다가 얼
른 안 나오니까 얼굴만 벌게서 저, 저, 하고 있고, 아이들
은 그런 지선이가 이상하다고, 마귀할멈 닮은 빨간 저 얼
굴 좀 보라고 야단입니다. 순간 벌떡 일어난 지선이가
"야, 너, 휴대포 간쳤자나" 하고는 유화를 확 밀쳐버립니
다. 유화는 의자와 함께 교실 바닥에 나가떨어져 엉엉, 울
고불고 난리 났습니다. 이웃 반 쌍둥이 자매 지은이가 언
제 왔는지 뒷문으로 그걸 들여다봅니다. 아이들은 움찔합
니다. 지은이는 힘이 더 셉니다. 유화는 울음을 뚝 그칩니
다. 지선이와 지은이가 한 패가 되니 다른 아이들은 이제
꼼짝 못합니다. 지선이와 지은이는 복도를 지나 당당하게
집으로 갑니다. 맨날 거짓말하고 바른 행동 안 하는 쟤네
들과는 앞으로 같이 놀아주지도 않을 작정입니다. (P.70 )
-이봉환 詩集, <밀물결 오시듯>-에서
시인 소개 : 이봉환
1961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1988년 <녹두꽃>에
[해창만 물바다]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조선의 아이들은 푸르다>, <해창만 물바다>,
<내 안에 쓰러진 억새꽃 하나>가 있다.
지금은 서남해의 바닷가 학교에서 씩씩한 학생들과 함께
희로애락 하고 있다.
시인의 말
그대를 얻었으므로
시는 버리리라, 했는데
꾸물거리며 돋아난 것들이 있어
20여 년만에 시의 집을 다시 짓는다.
그대 덕분이다. 사랑한다.
2013년 12월
노월촌에서 이봉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