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량(上樑)은 집 지을 때 마룻대를 올려놓는 일. 집의 뼈대를 세우고 마감공사를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요즘 건축물은 콘크리트 구조가 많아 가장 높은 층의 슬래브를 칠 때 상량식을 치른다. 형식이 바뀌면서도 질기게 살아 있다.

    상량식은 미신처럼 보이지만 지혜로운 잔치다. 힘들여 일한 인부들의 수고에 감사하며 남은 일도 잘 부탁한다고 대접하는 것이다. 이웃 주민들에게는 공사하느라 끼친 소란을 참아줘 고맙다고 인사한다. 무엇보다 착공에서 완공에 이르는 계획을 중간 점검하는 의미가 크다. 공정을 확인하며 고칠 것이 없는지 반성하고 다짐하는 날이다. 현대식 네트워크 공정 관리방식으로 보면 피드백을 겸한다.

    상량식은 소통을 위한 대화의 잔치이다. 건축주는 시공자의 의견을 듣고, 시공자는 건축주의 의견을 듣는다. 새로 서는 집이 옆집 말을 듣는다. 소통이 필요한 관계끼리 자기 말을 하기 전에, 남의 말을 듣는 날이다. 제사나 고사의 의미는 소망을 빌기 전에 땅과 하늘의 말을 먼저 듣고자 함이다. 공사현장에 남아 있는 미덕에서 소통의 방식을 좀 배우자.  (P.113 )

 

 

    욕심 없는 바람자루

 

 

 

    들뜬 마음의 비유도, 남의 얼을 빼는 것도, 작은 일을 크게 부풀려 말함도 바람이다. 사회적 경향이나 일시적인 유행은 바람이 분다고 한다. 원치 않는 풍병이나 헛걸음은 바람맞았다고 한다.

몹시 빠른 것도 바람이요, 풍습이나 분위기도 바람이다. 더불어 일어나는 기세도 바람이요, 일의 까닭도 바람이다.

   세상바람은 결이 잘고 자연 바람은 말이 곱다. 갈바람. 높새바람. 덴바람. 마파람. 높하늬바람 등은 방향 따라 부는 바람이고, 건들바람. 꽃샘바람. 봄바람. 색바람. 손돌바람. 찬바람 등은 계절 따라 오는 바람이다. 살바람. 황소바람은 좁은 틈으로 들어오는 찬 기운을 일컫고, 실바람. 선들바람. 모진바람. 명지바람. 매운바람은 공기 흐름의 상태를 말한다.

   구식처럼 보이는 바람자루는 디지털시대에도 여전히 쓰인다. 방향없이 이리저리 막 부는 왜바람이 바람자루를 아무리 흔들어도 바람자루는 자리를 지킨다. 바람을 가두지 않고 흘려보내니 어떤 바람에도 찢기지 않는다. 바람자루가 방향을 정확히 알리는 것은 흘러간 자연 바람 덕이다. 세상을 흔드는 정치. 사회적 바람도 바람자루는 어쩌지 못한다.  (P.75 )

 

 

     오리발 아닌 닭발

 

 

   구멍가게 간판부터 정치까지 광고 행위의 본질은 꼬드김이다. 꼬드긴다는 말은 연날리기에서 쓰는 말로, 연이 높이 올라가도록 연줄을 잡아 젖히는 것을 말한다. 연줄을 무조건 당기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흐름과 세기를 잘 살펴 젖히는 요령이 필요하다. 꼬드김만 계속 한다고 연이 잘 날지는 않는다. 머릿살과 허릿살의 균형이 맞게 마름질 잘 된 연을 꼬드기면 높이 날지만 성글게 만든 연은 꼬드길수록 허공에서 찢어지고 곤두박질치기 일쑤다. 꼬드김은 사탕발림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꼬드기지 못하는 광고는 죽은 광고다. 광고 전문가들은 사탕발림의 흑심을 점잖게 광고의 호소력이라고 말한다.

   뜨내기가 들끓는 유원지의 간판이야말로 호소력이 생명이다. 헌 합판에 페인트 붓으로 빨갛게 있는 힘을 다해 쓴 '닭발'글자가 힘차다. 빨간 고추장 양념 바르고 연탄불에 구워 판다는 사실이 명쾌하다. 허술한 간판이지만 호소력이 넘친다. 뇌물. 투기. 청탁 등 모든 의혹에 시치미 떼고 오리발 내미는 세상에 솔직한 그 간판 반갑다. 그 닭발에 소주 한 잔 하고 싶다. (P.149 )

 

 

 

    좁을 수록 넓게 쓰이는 골목

 

 

 

   막다른 골목, 양팔을 벌리면 닿는다. 그 좁은 폭도 양쪽집에서 나누어 쓴다. 좁은 길을 넓게 쓰는 해묵은 비법은 서로 비비며 같이 쓰는 것. 수다를 떨면 사랑방, 아이들이 뒹굴면 놀이터, 푸성귀를 다듬을 땐 안뒤꼍이 되는 골목은 변신의 공간. 집 밖이지만 때론 안으로 이어져 아무렇지 않게 마루나 마당처럼, 좁지만 넓게 쓰인다. 비좁은 골목은 어울려 쓸수록 살아나고 혼자 쓰려면 좁아진다. 누군가 걸채이지 않는 지점에 화분을 놓았다. 필시 값싼 화초를 기르다 말랐거나 얼었거나 둘 중 하나. 버린 화분을 살리려 뭔가를 심었다. 자란 잎을 보니 밑둥이 실할 게다. 텃밭이 된 골목은 어떤 봄밭보다 넓고 따뜻하다. 화분이 깊으면 얼마나 깊을까만 골목이 다 들어선 화분 안에 사람이 살고 있다.  (P.239 )

 

 

    먼지 묻지 않는 새로움

 

 

   모든 새 책의 운명은 헌책이 된다는 것. 그들이 모여 있는 헌책방은 철 지난 베스트셀러와 교과서, 빛바랜 단행본, 고물상을 거쳐 온 것, 도서관에서 잠자다 쫓겨난 것, 대륙과 바다를 건너온 외서, 주인은 저승으로 가고 혼자 남은 장서도 있는 과거의 집이다. 새 책방은 시속의 반응과 욕망에 민감하지만 헌책방은 초연하며 운영 방식도 다르다. 새 책방은 팔리지 않는 책을 출판사로 반품(반품 비용은 출판사가 부담)하여 재고부담 없이 판매수수료를 남기는 위탁유통업이지만 헌책방은 반품할 곳 없이 재고 부담을 떠안는 보관판매업이다. 구입. 분류. 진열방식도 후지지만 절판되거나 잊히고 묻힌 책들의 사바세계다.

   세상의 시스템. 디자인. 슬로건은 새 책방을 흉내 내지만 내세우는 말과 달리 새로움이 없고, 대수롭지 않은 것을 별난 포장하니 오히려 퀴퀴한 문내가 난다. 새것이 앞이면 헌것은 뒤고, 새것이 위라면 헌것은 밑일 터이다. 새것보다 더 많은 헌것이 채우는 세상. 필요한 개념과 방안도 필시 그 밑바닥에 있을 것이다. 바닥에 닿지 않는 뿌리를 흔들며 허구의 말들이 허공에 넘친다. 가을이 왔다. 먼지 묻은 어제의 새책이나 읽어야겠다. 새것의 단서는 헌것에 있을지니.  (P.271 )

 

 

 

    베짱이의 겨울

 

 

   부산역 광장을 지나다 초겨울 빗속에 마무리 중인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았다. 알록달록 전등 달고 꼭대기엔 별이 빛난다. 성탄의 깊은 의미를 새기자는 뜻일 게다. 철재로 만들어진 거대한 불빛나무 형태가 보릿대로 만들던 여치집을 닮았다. 쌕쌔기. 철써기 매부리와 함께 여치과에서 베짱이를 뺄 수 없다. 우화 '개미와 베짱이'가 떠오른다. 베짱이가 겨울에 개미를 찾아간다. 개미는 춥고 배고픈 베짱이를 박대하고 돕지 않는다. 개미는 근면과 성실, 베짱이는 나태와 태만의 상징으로 그려져 개미는 착하고 베짱이는 나쁘다고 말한다. 다르게 보기도 한다. 개미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즐거운 노래가 일조했으니 베짱이도 열심히 일한 것이라는 시각이다. 또 베짱이가 개미를 찾아가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어 살펴보니 개미마을은 여름철의 지나친 중노동으로 모두 과로사했더라는 우스개도 있다.

   우화는 현실을 풍자하며 왜곡한다. 개미와 베짱이. 생리 다른 둘의 습성은 비교될 수 없다. 둘 다 존귀하고 소중하다. 여름은 지난하고 겨울은 살벌하긴 둘 다 마찬가지다. 서로 부족한 것 채워주고 위로하고 나누며 따뜻한 봄날까지 같이 살았다고 고쳤으면 좋겠다. 상생의 실천이 성탄절 하루뿐이라면 예수님 우실 게다. (P.277 )

 

 

 

 

                      - 건축가 이일훈, 카메라로 세상을 읽다 <사물과 사람 사이>-에서

 

 

 

 

 

 

 

 

 

      <뒷산이 하하하>와 <제가 살고 싶은 집은>의 건축가 이일훈 선생의 <사물과 사람 사이>를

     읽었다. 틈나는 대로, 보이는 대로, 글감의 주제를 미리 정하여 찍고 적은 글이 아니라

     차를 타고 가다가도, 여행길에도, 출장길에도, 회의중에도...순간적으로 찍은 장면과 함께

     흔들리는 생각을 적은 책이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누구는 사진이 아쉽다 하고 어떤 이는

     다시 찍으라 했다지만, 근사하게 보여주려 다시 찍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한다. 오히려 찍는

     (보는) 그 순간의 느낌을 좇으려 했다 한다.

     그래서인지, 사진들이 멋부리지 않고 소박하지만, 그 순간의 느낌을 짧지만 깊은 단상의 글로

     읽는 내내.. 공감과 생각과 성찰을 깃들이는 즐거움을, 시원하고 명쾌하게 주었던 책이다.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이란, 결국은 사람과 자연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과 예의와 공존

     을 애써 외면하고 회피하고 억압하는 그 모든 '부자연스러움'에서 생겨난 또 하나의 보기 싫은

    '동영상'이 아닐까.

    '뒷산이 하하하'뿐만 아니라, '모두가 하하하'인 그런 세상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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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29 14:34   좋아요 0 | URL
굳이 사진은 안 찍어도 되기에
이야기를 알차게 담으면
그 이야기만으로도
그림을 환하게 마음속으로 그려
사진보다 더 또렷한 사진을 얻으리라 느껴요.

appletreeje 2013-12-30 12:02   좋아요 0 | URL
예~정말 그런 듯 싶어요~
굳이, '카메라로 세상을 읽다'라는 부제가 안 붙었어도
충분히 이야기만으로도 또렷한 그림이 그려졌으니까요..^^
그런데 옆에 있는 사진과 함께 읽으니, 더욱 신선함과 공감으로
즐거웠어요~ㅎㅎ

2013-12-29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30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13-12-30 13:31   좋아요 0 | URL
<오리발 아닌 닭발> 이 글이 참 좋습니다.^^
닭발은 원래 못 먹었는데 선배언니 때문에 먹게 되었네요.ㅎㅎ


appletreeje 2013-12-30 14:12   좋아요 0 | URL
아..이 <오리발 아닌 닭발>,은 정말이지..사진도 꼭 함께
올리고 싶었습니다~ 어찌나 공감이 되던 사진이던지요~ㅎㅎ
저도 예전엔 왠지 모양이 좀 그래서인지 못 먹었는데 어느날
한 번 먹고부터는, 이젠 잘 먹습니당~것도, 아주 매운닭발 좋아합니다~
아 왠지..오늘 저녁엔 매운닭발에 소주 한 잔 하고 싶네요..ㅎㅎ

2013-12-30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31 0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3-12-30 22:53   좋아요 0 | URL
이 분 처음 글을 읽었는데,
글이 참으로 좋네요, 부드럽고 관조적이면서도 삶의 통찰이 느껴지네요.
아마도 사진도 참으로 좋겠지요.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어제의 새 책.... 우리는 너무 빨리 달려가서, 소중함이 무엇인지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appletreeje 2013-12-31 05:56   좋아요 0 | URL
책이 아주 군더더기 없이,
글도 사진도 다 깔끔하니 빼어난 글쟁이답게
정말 관조와 통찰과 부드러움이 잘 조화된 책인 듯 했어요~
판형도 작고 가벼워서, 가지고 다니며 마음이 어수선할 때마다
차갑고 깨끗한 고드름을 한 입, 베어 먹는 듯 한 그런 책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