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은 9월 11일.
9.11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에서 2001년 9월 11일에 항공기에 의한 동시 다발 테러가 일어난 날로 기억하시는 분이 많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여서 당시 받은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설마 세계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 본토에서 그런 테러 사건이 있을줄이야 상상도 못했고, 세계 무역 선테 빌딩이 무너져가는 장면은 그것이 현실이라고 인식하기에 오래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9.11라고 할 때 나는 또 다른 하나의 사건을 떠올린다.
1. 나에 있어서의 또 하나의 9.11
2000년 9월 11일.
미국의 테러 사건 1년전.
아들 명섭이가 태어나서 한달이 지난 그 날.
내가 사는 일본 아이치현과 그 주변에 100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큰 비가 내렸다.
거의 비가 아니라 하늘에서 폭포수가 내렸다고 해야겠다.
저녁 빠른 시간에 퇴근 지시가 내렸지만 이미 전철을 비롯한 교통 기관은 완전히 마비상태였다.
집근처에 가는 사람 자동차에 동승하여 간신히 돌아 올 수는 있었지만, 걱정이 된 건 아버지,어머니가 계시는 친가였다.
돌아 오는 자동차안에서 그 쪽 지방이 비가 더 심하다는 보도를 들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해보니,
" 비는 많이 내리지만 별 일 없소. "
라고 하셨고 당시 총각이었던 막내도 곁에 있는 것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구나 해서 안심하였다.
아버지는,
" 내일 추석 제사 모시는데 좀 일찍 와야 된다. "
라고 하실 뿐이었다.
2. 피난
이튿날 아침.
비는 완전히 멎었다.
날씨는 거의 개였다.
그러나 TV보도에서 친가가 있는 지방 근처의 강 제방이 무너져 그 지방 전체가 물에 잠긴 상태라고 하였다.
친가에 전화를 하니 아무도 안나온다.
막내 휴대폰에 전화를 했다.
" 밤 2시에 피난 권고가 내렸어요. 그래서 아버지,어머니를 모시고 근처 중학교에 피난하였던데 그 30분 후에 제방이 무너졌어요. 지금 밖을 보니 거의 어른 키 만큼 물에 잠겼어요. "
우선 걱정된 것은 아버지의 몸 상태였다.
아버지는 당시 심장병을 앓고 계셨다.
불편한 피난 생활에서 긴장감 때문에 병이 악화될 우려가 있었다.
더구나 집을 나올 때 심장병 약을 챙기지 못했다고 하셨다.
몇시간 피난하면 돌아 올것이라고 예상하셨던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 여기 오면 안된다. 물이 아직 빠지지 않았다. 거의 바다야. 여기까지 헤엄치고 올거냐? 위험하니까 절대 오면 안된다. 내 몸은 괜찮다. 걱정 말거라. "
라고 하셨다.
3. 과장이 아닌 "바다"
또 이튿날.
아직 물은 빠지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는 계속 피난소에 계신다.
친가 근처의 상황은 잘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이상 참아내지도 못하였다.
어쨌든 가 보기로 결심하였다.
장화와 물,그리고 약간의 음식을 챙겨 집을 나섰다.
친가 근처로 내려가는 제방(무너지지 않았던 쪽)에서 동네를 바라보고 경악하였다.
거의 바다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은 과장이 아니었다.
아직도 어른 가슴까지 물에 잠긴 상태였다.
헤엄치지 않으면 피난소에는 가지 못할 것이다.
장화는 무용지물이었다.
군데군데 큰물때문에 통행금지된 길을 우회하여 피난소 근처의 다른 제방까지 갔다.
4. 자위대 병사
멀리 떨어진 곳에 자동차를 세웠다.
걸어서 피난소에 통하는 길까지 갔다.
거기에 자위대 병사들이 있었다.
비상사태라서 아이치현이 자위대 출동을 요청한 것이었다.
아이치현의 여러곳에 총 10000명의 자위대 병사들이 동원되었다고 했다.
무슨 작업을 한 후인지 몇명 대원들이 온통 물에 적신 군복을 입은 채 휴식을 하고 있었다.
완전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자위대 병사를 본 건 그것이 처음이었다.
일본에선 군(자위대) 근무는 국민의 의무가 아니어서 일반인이 자위대 병사를 볼 기회는 거의 없다.
평상시 보지 못하는 병사들이 두려웠다.
그래도 쭈뼛쭈뼛 한 병사에게 다가 가서 말해 봤다.
" 저기요. 그 피난소에 심장병을 앓은 사람이 있는데요. 좀 빠져 나올 수 있도록 하고 싶은데... "
그러자 그 병사, 나를 노려 보는가 싶었던데 벌떡 일어 서서 자렷 자세로,
" 넷! 알았습니닷! 저 보트에 다십시옷! "
하였다.
그 순간 다른 모든 병사들도 벌떡 일어서서 아무 말 없이 열심히 보트 준비를 시작하였다.
나 외에 같은 목적으로 또 2명 민간인이 보트에 탔다.
보트는 제법 커서 더 서너명은 탈 수 있는 크기였다.
자위대 병사가 함께 타서 보트를 젓는가 싶었던데 아니었다.
보트에 탄 건 3명뿐이고 병사들 4명은 가슴까지 물속에 들어가 보트를 끌고 간 것이다.
" 오물이 심해서 많은 사람이 타고 혹시 뒤집히면 위험하십니닷!! "
자위대 병사들이 보트를 끌고 간다.
오물 투성이가 된 그 물속을.
고양이 주검까지 뜬 그 물속을.
" 괜찮아요? "
내 말에,
" 넷! 괜찮습니닷! "
라고 병사가 대답하였다.
일본 국내에서도 자위대는, 군을 가지지 않는다고 정한 헌법에 위반하지 않았느냐는 논의는 많다.
자위대는 분명 군이다.
엄청난 병력과 현대적인 무력을 가진 집단이 군이 아닐 리는 없다.
이름만 "대"라고 해 놓으면 "군"이 아니다는 논리는, 매우 일본다운, "다테마에(겉모습)"만을 내세운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헌법 위반인 가능성은 있다.
나도 그 때까지만 하여도 분명 헌법 위반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때만은,그 상황에서는 그들 병사들의 존재가 몹시 고마웠다.
아버지,어머니는 무사하셨다.
아버지 심장병 증상도 문제 없어서 다행이었다.
피난소에서 빠져 나올 때도 그걸 기다리던 자위대 병사들이 보트를 끌어 주었다.
5. 오물에 잠긴 소중한 추억들
그 날 저녁.
갑자기 물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물이 무릎까지 빠진 후 막내와 친가에 가 보았다.
상상은 했지만, 집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일층은 어른 가슴까지 물에 잠겼고 모든 가구, 전기 제품이 무너지고 오물 투성이었고 흙벽이 거의 허물어진 상태였다.
결혼하였을 때 친가에 두고 간 학생시기 사진들이 다 오물에 잠겼다.
후일 많은 볼런티어 사람들이 찾아와 집 청소를 도와 주었던데 그들에게 오물에 잠긴 사진을 하나하나 골라 내라는 말은 못하였다.
그래서 눈물을 참고 그 사진을 오물들과 함께 모두 버렸다.
10년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품인 1920년대 장롱도 다 오물속에 무너져 깨지고 있었다.
고모님이 시집가실 때 할머니 쓰시라고 두고 간 멋진 고급 경대도 깨졌다.
아버지,어머니가 결혼 당시부터 40년 사용하신 그릇장도 깨졌다.
큰물은 나와 나의 가족들의 소중한 추억마저 앗아 갔다.
그 날 아버지, 어머니를 막내가 작은아버지네 집에 모시도록 하였다.
친가는 위생적으로 문제가 있어 당분간 불편하시지만 할 수 없었다.
막내에는, 아버지 병 상태가 걱정되니 며칠간 일을 쉬고 아버지,어머니를 잘 모시고 집 뒤처리도 부탁을 하였다.
그날 밤 막내가 좋아하는 최고급 돈카쯔를 먹여 주었다.
6. 전화위복
집 일층은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에 물론 수리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많은 다타미, 가구, 전기 제품도 새로 사야 한다.
적어도 300만엔 이상 걸릴 것이 예상되었다.
몇해전에 정년 퇴직을 하신 아버지에게 그 액수는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었다.
사치는 바라지 않아도 평온하게 살고 싶어하시던 아버지,어머니에겐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정신적으로 크게 기운을 잃지 않으셨던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며칠 후,
" 큰 문제는 없을 거야. "
라고 하신다.
왜요?
재해보험에 가입하고 계셨다.
게다가 그 재해보험사 사장은 아버지의 친구분이셨다.
보험사 직원이 파괴된 집을 확인하여 내린 보험금은, 수리비, 가구, 모든 전기제품 구입비용을 다 합한 값의 약 3배이상(!!)이 나왔다.
모든 걸 이전보다 더 좋은 걸로 새롭게 해 놓고도 큰 재산을 남기신 것이다.
아무리 사장이 친구분이라고 해도 설마 그럴 수가 있을까.
아버지는,
" 친구를 소중히 여겨야 된다. "
라고 웃으실 뿐이었다.
몇년 후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나라에 5박6일 여행을 하셨고 해마다 일본 방방곡곡 여행을 즐기신다.
올해 봄은 혹카이도(北海道)를 가셨고 가을에 또 규슈(九州) 온천지를 갈 계획을 세우고 계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