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니비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4
박문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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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인간 사회 그 던적스러움에 대해서

 


사람들은 끔찍하다가도 애틋했고, 애틋하다가도 끔찍했다.

누추한 동시에 아름다웠고 아름다운 동시에 누추했다.” -37

 

 

우리네가 살고 있는 인간 세계의 곤혹스러움, 이것의 정체를 묻는 것은 터무니없이 멍청하고 기만적인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간단히 모든 어려움은 인간들이 앎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라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얼 모르고 있다는 것인가? 라 다시 묻는다면 자신들이 발 딛고 선 곳을 뜯어내고야 마는 몽매성, 변치 않는 태생적 불완전성이라 말하는 것으로 족할까? 어쩌면 이 소설은 이 답변의 한 양태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초제와 수은 그리고 방사능에 절여진 땅’, 자신들이 망가뜨린 세계에 더 이상 희망 없음을 예견한 인간 무리가 마지막 우주선 아듀호를 타고 떠나버리고, 이의 탑승에서 배제된 인간들만이 남은 지구가 배경이다. 소설은 2199년 바로 이러한 마지막 이주가 진행되던 날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200년이 흐른 2399년의 남겨진 인간들의 세계를 들려준다. 그러니까 200년 전에 진행되었던 탑승 자격과 기준도, 이의 결정권자자들도 알려지지 않은 채 비밀리에 진행된 도피성 이주, 한 무리의 인간들이 나머지 인간들에게 행한 이 얄팍한 사기극이 남은 인간들의 역사에 인류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기억되는 세계이다.

 

즉 버려진 인간들의 역사이다. 아니, 사실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난 영악한 무리들, 그 쓰레기들이 버려진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사건의 현상이 그렇다는 말이다. 2399년의 세계는 대다수 인간이 자연임신 능력을 회복하지 못한 세상이고, 부족한 인간을 대신해 복제 인간 클론이 함께하는 세계이다. 원본과 사본의 문제는 실재와 관련하여 인류 역사의 오래된 논의거리다. 여기에도 이 글의 冒頭에서 기술한 앎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으며, 그 답은 어쩌면 자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구별 짓기의 원형적 뿌리에 대한 앎의 한계, 나와 너는 다르다. 다른 존재이니 언제든 배제시킬 수 있다는 폭력성이 은폐된 명칭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은 클론인 레아가 읽는 아듀호 사건 이후의 역사를 기록한 사진으로 살펴보는 21세기부터 24세기라는 책을 통해 2399년의 현재를 설명한다. 아듀 사태 직후의 지옥같은 인간 세상의 양상부터 무력해진 인간들의 생존책, 그리고 거주지구의 계층적 분할, ‘테트라로 불리는 여가형 전자기기와 일종의 편의 인간인 반려기계 휴루의 대중화 등 점진적 복구와 복귀 의 역사가 흐른다. 200년의 시대별 역사는 상징적 제목 하에 기술되고 있는데, ‘카오스 이후’, ‘서행, 슬로우 스텝 무브먼트(SSM)', '인간과 동해하기 시작한 클론’, ‘함께 계속 가야 할 길처럼 역사 시간의 진전에 따른 인간 세계의 변화를 그려내고 있다. 결국 소설의 세계인 2399년 현재는 클론과 인간이 함께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으레 그렇듯 클론에 대한 구별 의식은 점잖은 휴머니즘의 윤리에 의해 폄훼되고 멸시된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유구하고 강력한 가치라는 인간적이라고 하는 윤리의식이다. 즉 클론을 차별하기 위한 이 거창한 위선의 논리가 윤리의 모습을 할 때, 클론은 상처를 입는다. 여기에는 역설적 모순이 내재하는데, 목적과 효용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이기심이 클론의 존재를 환영한다는 것이다. 사실 윤리의식이란 존재치도 않는 이러한 탐욕스러움이 오히려 차별을 지우는 것은 그 본색이야 어떻든 표면적 평등을 실현한다. 역시 인간 앎의 한계는 여기까지인가 보다.

 

긴 암흑기를 견뎌낸 인류는 병든 지구와 함께 늙어가며 몸을 천천히 회복해 나가고, 그 엄청난 분쟁과 소란의 역사를 겪은 이후 평화로운 세상으로 접어든다. 이 평화란 인간의 끔찍함과 누추함이 다시금 발현되는 비옥한 토양이 되는 것이 인간 사회 속성인가보다. 아마 인간과 인간세계란 항시 자신이 저지른 거짓과 기만에 대해 합리적 변명거리를 찾아내는 부도덕하고 몽매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거주지는 도시와 빈민가, 재건지구로 삼분되어 각기 메트로, 게토, 리부트로 불리며, 살아가는 방식, 즉 지구 환경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계층화된 거주 구역을 이룬다.

 


소설의 상당한 서사는 이 구역 중 제로라는 구역의 게토에 거주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들은 버리지 말자, 사지 말자, 만들지 말자라는 ()행동 수칙을 엄중히 유지해나가는 공동체다. 이 게토의 수장은 라는 이름을 한 여인이다. (O)'조화, 조율' 쌍둥이 자매와 '마모루'라는 남자 아이와 함께 동굴에 거주하며, 그들 공동체의 수칙대로 살아간다. 가파른 산등성이 안쪽에 자리잡은 오래전 천주교 성지였던 곳으로 게토의 여타 지역 중 가장 폐쇄적인 곳으로 인식되는 곳이다. 수렵과 채취, 그리고 나눔과 돌봄이 자유로운 연대 속에서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사랑의 모양은 이성애 하나가 아닙니다. 인류가 혈연과 친족 관계에 매달리다

망친 걸 좀 들여다봐요. 어떻게 과거에서 배운 게 없어요?” - 73

 

만들지 말자라는 수칙은 이들 게토에서 어떤 새로운 생명체도 새로이 탄생하지 말아야 되며, 따라서 임신한 산부는 머물 수 없는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처절한 회의와 통렬한 자성(自省)을 읽을 수 있다. 소설은 아듀 사태 이후 24세기까지 이어진 생존방식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200년의 역사시대는 폭주에서 순응으로, 그리고 성찰의 시대에 이르렀다고. 따라서 나는 이 소설을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성찰의 기록으로 읽게 된다. 그런데 돌연한 자전거 사고로 다리를 손상당한 쌍둥이 언니 조화의 임신으로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한다.(조화와 조율은 가임여성임이 소설 초반의 장면에 등장한다.)

 

임신한 여인으로서 조화는 공동체인 제로 게토에 머물 수 없으며, 더구나 아이의 출산은 그네들의 비행동 수칙이 용납하지 못하는 사태이다. 방법은 인간 구애 본능을 동력으로 작동하는 저열한 관찰예능서바이벌 프로그램인 <허니비>에 동생 조율과 마모루를 출연시켜 두 사람이 짝이 되어 조화의 아이를 자신들의 아이인 것처럼 위장하여 기르는 것이다. 수장인 오의 비난과 퇴출을 예상하지만 오히려 그녀는 조화의 요청을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을 종용한다. 이 모순된 행위의 이유를 발설하는 것은 죄악이 되리라.

 

이 자연 임신과 출산 가능한 인간만이 출연 가능한 번식 쇼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양분되는데, 버려진 땅에서 아기를 잉태해 기르는 일이야말로 가장 헌신적인 형태의 인류애라며, 새 세대에 대한 기대와 열망으로 환호하는 부류와 바로 이 환상과 오해의 주입을 통한 인간과 클론을 구별짓는 저열한 기만극이라는 비난이 대립한다. 이 비속한 구애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에 대한 평가는 작금 한국 사회에 만연한 유사 프로그램을 상기하면 그 천박성을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허니비 (Honey Bee)>라는 상징적 프로그램명은 다분히 자연 생식의 기만성을 떠올리게 한다. 어쨌든 자연 임신과 출산이 희귀해진 세계의 대중이 환상을 먹고 살든 대리 만족을 하든 이러한 욕망을 자양분 삼아 웃자라기마련이다. 이제 조율과 마모루는 조화가 출산할 아이를 위하여 출연하여 타 출연자들과 함께 열연한다. 여기에 클론인 레아가 해킹을 통해 신분을 속이고 출연자에 합류한다. 자신은 사본 같은 게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해서.”

 

프로그램 <허니비>를 통해 소설은 예전 기수의 출연자가 겪는 프로그램의 후유증들 - 프로그램 후원자들의 지원과 압력과 함께 따라오는 육아에 대한 간섭, 부부가 된 이후의 관계 파탄, 모성애라는 근거없는 이해의 강요, 보여줌으로써 획득되는 재화에 내재된 무수한 갈등과 위선들 등등 - 이 신랄한 비평적 사유들과 함께 조율과 마모루, 레아 세 사람의 미묘한 구애 전선과 더불어 서사적 재미의 균형을 맞추며 진행된다.

 

희생과 양보라는 숭고한 가치와 한 주체의 피로라는 해로움이 대립되는 모성애 논의, 인간과 클론의 구별과 같이 존재를 타자화(他者化)하며 배제하는 불의한 영악함과 같이 소설은 실종되거나 매몰된 이 사회의 위선과 기만, 탐욕 등 자신들의 토대를 무너뜨리곤 책임을 외면하는 아듀호의 비열한 인간들, 그리고 마주하는 세계의 모든 어려움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무심하고 몽매한 인간 군상들을 이야기 한다.

 

아마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조율과 조화 자매의 이름이 절로 떠오를 만큼 인간 세계에 대한 강력한 지향점을 가리키는 것만 같다. 강을 가로지르는 직선은 흐트러짐 없이 또렷했다. 레아와 마모루는 물에 도착한 조율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구별이 해제(解除)되고 비행동수칙, 즉 슬로우 스텝의 삶을 향해가는 굳은 신념의 인간을 나 또한 바라보면서 이 이상적 세상의 도래를 꿈꾸어 본다. 아니 어쩌면 무너져 내리는 인류 공동의 소중한 가치에 대한 감각 자체를 일깨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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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6-01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어 보입니다.

필리아 2023-06-01 10:53   좋아요 0 | URL
이야기의 재미에 더해 인간 성찰이라는 테마가 녹아 흐르고 있어요. 작가의 필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호시우행님~
 


아래 글은 책 사랑의 완성에 대한 두 번째 감상으로 무질의 생전의 유고(Nachlass zu Lebzeiten)에 대한 것이다. 번역본은 북인더갭 출간 본으로 이 중 단편소설 지빠귀 (Die Amsel)를 별개로 첫 번째 수록하고, 나머지 산문 중 15편을 생전의 유고로 분류하고 있다. 사랑의 완성세 여인에 대한 감상은 앞서 남겼다.

 

 

문학은 삶의 개념을 파악하고자하는 학문과 달리 삶을 무한한 미지의

 현상 자체로서 이해하고 경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 로베르트 무질

 

 

1. 생전의 유고(Nachlass zu Lebzeiten)에 대해서

 


유고는 작가의 사후에 미()출간된 글들에 대해 붙이는 개념어다. 그런데 작가 생존에 유고(遺稿)’는 모순된 사용이라 할 수 있다. 무질은 이런 까닭으로 변명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인지 사후 유고의 출판을 못하게 하기 위해 결심했으며, 이를 지키는 방법은 스스로 생전에 출판하는 것이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사실 기반의 증언은 특성 없는 남자2권의 집필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음으로써, 예견되는 출판의 공백을 메우기위한 방책이었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 같다. 무질은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스위스로 도피하여 생활고를 겪으며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냈다. 미국에 도피 중이었던 토마스 만에게 후원금 5달러 지급 연장을 부탁하는 가슴 아픈 편지가 전해져 온다.

 

생전의 유고1934년에 출판한 무질 생전의 마지막 작품집이다. 30편의 짧은 산문을 수록하고 있는데, 대부분 아주 짧은 5쪽 미만의 글들이고, 단 하나 지빠귀만이 15쪽 분량의 단편 소설이다. 무질은 이 작품들을 네 개의 성격으로 분류하여 각기 (), Bilder14, 불친절한 관찰들(Unfreundliche Betrachtungen)11,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들4, 마지막으로 지빠귀로 배치하고 있다. 국역본 사랑의 완성은 이들 중 지빠귀를 별도로 구분하였으며, 나머지 29편 중 15편이 생전의 유고라는 항목에 편집되어 있다. 수록작 중에서 불친절한 관찰들(Unfreundliche Betrachtungen)11편 모두가 빠져 있으며, 각 분류 항목에서 1,2편씩이 추가로 빠져있다.

 

2. 지빠귀 (Die Amsel)에 대해서

 


단편 지빠귀는 무질의 작품에 있어 매우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생전에 쓴 마지막 단편소설이라는 의미보다도 이야기와 이야기의 의미에 대한 작가의 소설론(小說論)적 성찰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액자() 소설의 형식을 지니고 3인칭 화자가 시작하여 1인칭 인물에게 이야기의 주도권을 건네지만 다시 3인칭 화자로 복귀하지 않는, 즉 틀이 닫히지 않고 열린 상태로 끝을 맺는다. 형식이 마무리 되지 않음으로써 소설의 종료는 독자의 창의적 해석으로 넘겨진다. 소위 무질 문학의 전형적 특성이다. 이를 평론가들은 표현과 침묵 사이의 허공을 부유하며 확정과 완결을 거부하는 문체라며, 바로 이 무한히 열린 가능성이 곧 무질의 문학 의도라 말하고 있다.

 

소설은 딱히 줄거리랄 것이 없지만 아츠바이(Azwei)라는 인물이 친구 아아인스(Aeins)에게 들려주는 어떤 연관성이나 인과성도 없어 보이는 세 이야기가 전부다. 잠들지 못하던 어느 날 창밖의 지빠뀌 노래 소리로 인해 순간 일상적 세계를 벗어나 아주 다른 감각의 세계로 옮겨간 것 같은 느낌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하게 되었던 이야기가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전쟁 참전 중 적의 헬기로부터 화살이 날아와 생사의 갈래에 섰을 때의 신비로운 체험담이다, 마지막은 사업 실패로 어려움 겪던 중 어머니와 아버지의 잇단 죽음과 고향 집에서 자신의 옛 시절, 자신이 가장 선하고 좋았던 시절에 대한 회상 이야기다.

 

각 에피소드마다 독자 나름의 공감이나 이해가 있을 수 있으나 사실 뚜렷하게 해석할 테마를 읽어내기가 어렵다. 첫 일화에서는  수직의 공간 체험을 충분히 이용해 동일성의 공간을 탈출해보겠다는 생각에서였어.” 라는 문장처럼 현실로부터 벗어나 새로움을 추구하는 동기를 읽을 수 있으며, 다음 일화에서는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거야.”와 같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느껴지는 미의 감각을 상상하게 하고. 마지막에서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지닌 고정된 상()의 현실과의 불일치, 즉 살아있는 존재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기증명의 변()이 들려오기도 한다.

 

이야기의 말미에 아아인스는 묻는다. 이 세 이야기에는 모든 것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통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것 아니었어?”라고. 그러나 아츠바이는 부인하면서 만약 내가 그 의미를 알았다면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해줄 필요도 없었을 거야.”라며 소설은 종료된다. 세계의 모든 질서는 확고한 것보다 확고하지 않은 것 속에 보다 많은 미래가 있다는 무질의 주장처럼 이 소설은 무한한 가능성만을 남겨두고 독자에게 그 해석의 권리를 넘긴다. 인과법칙도 논리적 연관성도 벗어난 이 소설은 이렇게 읽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해석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생성되는지는 독자 개별의 몫이 될 터이다.

 

3. 생전의 유고15편의 산문에 대해서

 

수록된 15편의 작품 중 대부분이 무질이 (), Bilder이라고 분류한 항목에 속한 작품들이고, 성격 없는 사람이란 제목 한 편만이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들에 속한 작품이다. 무질은 ()’ 정확한 관찰과 기다림 속에서 어느 순간 무심코 표현되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 말에는 다분히 문학의 근본으로서 역사 구조에 대한 정밀한 관찰의 신념을 읽을 수 있으며, 사실 수록된 산문들도 이러한 설명에 일치한다.

 

파리잡이 끈끈이는 문자 그대로 한 여름철 동네 뒷길에 있는 허름한 식당의 천장에서 바닥으로 내리달려 있는 파리 잡는 끈끈이 그것이다. 세밀한 관찰기라 할 수 있다. 자연과학도로서의 무질의 시선이 느껴진다. 벗어나려 발버둥치다 이내 포기하고 죽어가는 파리들을 묘사하는데, 20세기 초 독일 사회 인민들의 양상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듯 하기도 하다. 극도로 애쓰는 이들의 표정에는 라오콘 보다 더한 절절함이 배어있다.” 라든가, 기이한 순간이 찾아오는데, 현재의 순간적 욕망이 계속 살고 싶다는 강력한 감정을 모두 누르는, 비장한 무의식의 순간에 대한 관찰은 실로 만만치 않은 생각의 타래를 풀게 한다.

 

원숭이 섬은 다소 신랄하고 비판적인, 무질의 문학에서 예외적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단지 묘사되는 대상이 원숭이일 뿐이지, 인간으로 대체해도 하나도 벗어나지 않는 은유라 할 수 있다. 나무와 대지를 지배하는 계급, 그리고 여기에 오를 수 없어 대지 아래 도랑에 머무는 원숭이들의 배치나 이들 지배 원숭이들, 박해자가 난간을 따라 걸어가자 경악의 파도도 그를 따라 멈춘다.”, 권력 계급이 보이는 폭력성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비굴함과 거들먹거리며 으스대는 박해자 원숭이의 걸음걸이는 그야말로 천박한 오늘의 권력을 떠오르게 한다. ()도 웃을 수 있을까?, 재단사의 동화등 몇 몇 작품들이 비교적 시선을 끌지만 단연 특이성 없는 남자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성격 없는 사람은 무질을 읽는 독자라면 한 번은 읽어 볼 이유가 있는 작품일 것 같다.

 

이 녀석아 넌 쓸 만한 성격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니?“ 어린 시절 성격이란 이 인용 문장처럼 그것이 없다는 이유로 매를 맞는 구실이 되곤 했다. 그렇다면 이 성격에는 분명 올바르지 않는 것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린이에게는 당연한 발상일 것이다. 부모들에게 이 성격이 무어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한다. 성격이란 형편없는 성적, 장난치거나 주의력이 산만한 것, 야비한 행위...등과 개념상 정 반대 되는 것이라고.

 

따라서 이 모든 것의 반대, 즉 쓸 만한 성격은 처벌의 두려움, 들 킬 것에 대한 두려움, 나쁜 짓에 대한 후회, 양심의 가책이 되고만다. 사실 이 추론은 아이들에게 비굴함과 복종, 노예근성을 요구하는 것이니 아이들에게 완전히 불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이가 성격 없는 사람을 추구하는 이유이다. 이 작품은 성격 없음과 관련하여 비교적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특성 없는 남자읽기에 제법 도움을 주는 선행 독서가 되어 줄 것 같다.

 

무질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모든 사물과 현상을 완성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모든 질서는 나타나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확고하지 않다. 따라서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야기 되어진 것, 현상된 것에 대한 유보를 통해 부단한 서술과 서술의 해체를 거듭하며 가능성을 타진할 것, 그렇게 함으로써 불완전성의 틈을 미흡하지만 메울 수 있으리라는 것, 그것은 이성과 비이성의 결합이며. 현실과 비현실의 통합을 시도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 일 것이다. 매혹된 차에 무질의 작품 세계를 당분간 지속하여 거닐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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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5-3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들 담아둡니다~~^^
무질의 <특성없는남자>를 사놨거든요 ^^

필리아 2024-02-08 14:57   좋아요 1 | URL
국내 출간된 <특성 없는 남자>번역판본 중, 원작 1권의 충실한 완역본은 문학동네와 나남출판 두 종류가 있는 것 같구요, 북인더갭의 미완으로 머물렀던 통합본의 나머지 부분이 2권으로 드디어 출간, 완간되었네요.(2014.2.8 댓글 수정)
 
사랑의 완성
로베르트 무질 지음, 최성욱 옮김 / 북인더갭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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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집에 대한 리뷰는 두 차례에 나눠 기술하기로 했다. 그 까닭은 무질이 생전 의도하여 출간했던 의지에 따름이기도 하고, 감상자 역량의 한계이기도 하다. 우선 사랑의 완성세 여인에 대한 감상을, 그리고 두 번째에 생전의 유고에 실렸던 지빠귀를 비롯한 15편의 단편들에 대한 리뷰로 분할하여 남긴다.

 


사랑의 완성』 ❶ 사랑의 완성과 세 여인에 대해


 Robert Musil (Klagenfurt, 1880 - Ginebra, 1942)


무질의 작품을 읽기에 앞서 전통적 형식과 내용을 벗어나 이야기 될 수 없는 것의 이야기, 즉 사실주의적 이야기로는 삶의 심연에 이를 수 없다는 그의 문학관에 대한 이해의 선()지식이 요구되는 것 같다. 무질에게 문학은 경험적 현실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인지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현실의 포착 노력이며, 개념을 벗어난 사고의 표현을 시도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독자들이 무질의 작품을 회피하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특히 인간 이성이라는 합리적 논리에 길들여진 오늘의 사람들에게 인과적 논리에 대한 혐오나 비논리적 감성, 비현실성, 불가능의 경계를 향해 돌진하는 무질의 문학은 이성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작품으로 쓸 필요는 없다.”는 그의 선언처럼 어떤 확정적 의미를 찾을 수 없게 한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아무것도 확정된 것을 말하지 않으며 단지 시도된 표현들의 여정에서 생성되는 것이기에 독자 각자의 발견에서 비롯되는 것이 된다. 참으로 어려운 말이기도 한데, 이야기 아닌 이야기 그 자체를 통해 스스로 만들어지는 어떤 확실성을 발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이 책의 표제를 사랑의 완성으로 한 것은 무질을 대표하는 문학론적 의미를 따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질은 학문적 개념체계, 즉 이성의 논리 강요를 폭력으로 비유하며, 문학의 논리를 사랑에 비유하듯, 그의 소설들은 다분히 비논리적 감성, 어떤 비의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을 표방하는 학문의 현학적 정확성은 오히려 객관성이라는 환상에 의존하고 있으며, 오히려 환상적 정확성을 표방하는 문학이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그의 생각처럼 문학이야말로 작가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완전한 모습임에 공감할 수 있다.

 

1. 사랑의 완성


 


무질의 작품 선집인 이 책은 그가 당초 발표했던 작품집의 의도가 드러나지 않는다. 단편 지빠귀가 생뚱맞게 별개로 제일 앞에 수록되어 있고, 각기 별도로 발표되었다가 후일 세 여인이라는 단편집에 묶여 출간된 작품이 두 번째이고, 사랑의 완성합일이라는 단편집을 위해 무질이 의도하여 개작하고 집필한 조용한 베로니카의 유혹과 함께 구성된 작품으로 독립하여 세 번째에 수록되어 있으며, 끝으로 생전의 유고는 무질이 분류하여 수록한 30편의 작품 중 그 절반만이 무질서하게 구성되어 있다.

 

출판사 혹은 번역자의 의도는 사건이나 행위 대신 회상과 상상에 의해 진행되는 조용한 베로니카의 유혹의 선형적 시간 순서를 파괴하는 전개가 독자에게 이해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배제한 듯하다. 또한 생전의 유고중 부분만을 선택한 까닭도 이러한 연유로 이해되지만, 이러한 편집은 어떤 의미에서 오만함이고 부주의함으로 읽힐 수 있다.

 

어쨌든 무질의 작품에 대한 출판시장의 척박함은 사실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미완성 장편 특이성 없는 남자를 제외한 그의 작품집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출판독서시장의 현실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수록 순서를 바꿔 표제작인 사랑의 완성에 대한 감상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이 작품은 출판사의 청탁에 의해 2년에 걸쳐 집필된 두 편의 단편으로 출간된 모음집 합일(Vereinigungen)중 한 편이다.

 

이 소설은 이야기에 대한 혐오에서 썼다.”고 할 만큼 실험적 시도가 지나치게 압도한 나머지 소설적 긴장이 결여되어있음을 작가도 고백할 만큼 독자의 이해를 불가능하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당대의 문제일 뿐이지, 무수한 실험적 시도의 작품에 익숙해진 오늘의 독자에겐 그리 낯선 것도 아니며, 독해 불능에 빠질만큼 어떤 난해성을 지닌 작품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사설은 이쯤에서 멈추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소설은 몇 안 되는 대화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사실 소설의 대부분이 기억의 회상과 몽상, 독백으로 이루어진 것에 비해 극히 예외적 장면이다. 정말 함께 갈 수 없어요?”, “안되겠소, 당신도 알다시피 급히 끝내야 할 일이 있소.” 딸 아이 릴리의 기숙학교 방문의 동행에 대한 남편과 주인공 클라우디네의 지극히 평범한 대화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부부의 어떤 균열을 읽는다면 지나치게 과도한 해석이 될까? 딸 리아는 지금 남편의 소생이 아닌 결혼 전 치통으로 찾아간 미국인 치과의사의 자식이다. 여자는 홀로 기차 여행을 떠난다. 이 기억은 당시 열정과 과격하게 사로잡혀 저지른 평범한 충동일 뿐으로서, 본질상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흐르는 시냇물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사실 여자의 회상과 몽상과 독백은 하나의 원 주위를 뱅뱅 돌 듯 은밀하게 숨겨둔 욕망, 과거의 문란했던 충동적 해방의 시절에 대한 강렬한 희구와 남편과 이룬 안정되었지만 억제된 삶으로부터의 도주라는 경계를 선회한다. 그런데 이 순환 반복되는 상념이 가져오는 낯설고 이질적 세계, 다름의 상태를 드러내려는 것이 아마 작가의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이성과 비이성이 반복되는 오고 감의 반복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조화? 혹은 통일?, 이 점진적이며 눈에 뛰지 않을만큼 미세하게 이동하는 진행에서 클라우디네는 어떤 합일(合一)의 체험에 이른다. 소설의 모티프라야 정말 보잘 것 없다. 흔해빠진 유부녀의 관능적 욕망과 간통이라는 진부한 통속적 내용이지만, 이 소설은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모티프는 하나의 소설적 구실에 불과한 듯 여겨진다. 즉 성적 부정(不貞)에 대한 윤리적 탐구가 아니란 점이다.

 

무질의 작품들 전반에 자리잡은 독특성인데 주인공을 현실로부터 격리하여 고립시키는 것이다. 클라우디네는 폭설로 인해 소도시에 한동안 고립되는데, 이를 통해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는 온갖 제약, 그 제한성을 이탈함으로써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감정의 세계라는 다른 세계에 진입하게 되는 것 같다. 소설은 이러한 다름의 세계에 대한 느낌이 도처에서 표현되고 있다. 길을 떠난 사람만이 느끼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낯섦의 행복, 자욱한 안개 속을 달리다보면 모든 것이 실제보다 크고 어렴풋한 제 2의 윤곽을 띠는 것처럼...등등 인습적 틀의 사고를 벗어나 진실의 또 다른 면을 직시하게 하려는 장치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작품은 무질 자신이 지향하는 문학을 말하려는 것이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때문에 사랑의 완성이란, 이성과 비이성(감성 등)의 합일을 추구하는 주인공을 통해 문학의 완전성을 말 하려한 것이 아닐까?

 

2. 세 여인


 

사실 연작처럼 묶여있지만 세 연인을 구성하는 세 편의 소설은 각기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작품들을 1924년에 단편집으로 엮어 출간한 것이다. 따라서 3부작으로 계획 집필된 작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록된 세 작품에는 분명 여인들이 등장하지만 여자들은 실제 거의 말하는 인물들이 아니며, 남자의 상대역으로만 존재를 알릴뿐이다. 그런데 세 여인이라 제목을 붙였을까? 무질은 자신이 추구하는 비현실성과 비이성의 진실을 말하는 자기문학의 지향점으로서 여자를 설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능동적 이야기의 주체가 아닌 침묵의 존재로 보이지만 실제는 바로 그 여자들이 소설이 말하고자하는 말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2-1. 그리지아(Grigia)

 

이 소설은 무질의 문학 정신을 대표하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살다보면 계속 이렇게 살 것이냐 아니면 방향을 틀 것이냐를 망설일 때처럼 인생이 눈에 띄게 느리게 흘러 갈 때가 있다.(40)” 소설은 이 시작 문장을 구체화한 기록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작품도 예외없이 주인공인 호모는 오래된 금광 개발에 초빙되어 가족을 떠난다. 다시 말해 일상적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이동하며, 그곳은 곧 외적 환경으로부터의 고립을 뜻하고, 이로서 낯선 경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이 낯섦의 공간은 소설 초입부에서 해당 지역에 있었던 일화로 설명되고 있는데, 미국에 돈 벌러 갔다 돌아 온 남편과의 동침을 했던 농부 아내의 기억에 관한 것인데, 남자는 남편을 흉내 낸 사기꾼이었다는 것이다. 여자는 자기 기억과 남자의 말을 비교해 보곤 듣자마자 자신의 기억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챘음에도 어느 누구도 자기의 기억에 확신을 가질 수 없어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48~49)”는 것이다. 이성과 논리에 대한 전복이다. 갑자기 세상사의 모든 것이 불안에 빠진 듯한 이런 상황이 지배하는 곳, 왠지 꽤 오래 현실 세계와 격리된 공간을 연상시킨다.

 

이곳에서 호모는 그리지아라는 여인과 함께 살게 되는데, 그것은 동화같은 숲이 있으며, 자기 몸을 생전 처음 만져보는 것 같은”, “자기 삶의 생명력을 다 소진해버린 것 같은 그래서 그의 마음은 거지처럼 가난해짐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여기에 반전이 있는 것 같다. 이성으로 무장된 엔지니어인 호모가 마주한 여인과 장소가 허공에 떠있는 유희처럼 느끼게 하는 순수 자연의 세계, 문명이 스며들지 않은 비이성의 인간 세계라는 점이다.

 

일상적 현실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진입한 호모는 어느 날 버려진 갱에서 그리지아와 함께 쾌락을 나눈 후 잠시의 몽상 후에 여인은 없고, 갱 출구는 한 줄기 빛이 비치지만 큰 바위로 막혀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황당한 밑도 끝도 없어 보이는 이 동화같은 소설은 독자에게 잔뜩 수수께끼를 남기고 종료된 것이다. 호모는 탈출을 포기하고 죽음을 맞이하는데, 탈출의 가능성이 부재한다고 단언 할 수 없음에도 벗어나려는 시도를 중지한 그의 행동에 대한 해석이 남겨진 것이다.

 

평론가들은 이를 20세기 초 유럽이 처한 출구 부재의 상황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일상적 삶으로의 복귀를 거부한 것으로, 이성이라는 현학적 환상에 대한 혐오, 즉 신비와 비이성적 각성의 세계인 이 다른 공간에 머무는 것이 오히려 정직한 삶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어진다. 물론 호모의 내적 동기를 알 수는 없지만. 따라서 호모의 죽음 수용은 삶의 의지의 포기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삶의 열정적 추구처럼 보인다.

 

2-2. 포르투갈 여인(Die Portugiesin)

 


이 소설의 배경은 중세의 외딴 수직 암벽 위의 성이다. 자 또 고립이다. 오백 걸음 밑에는 작지만 물살이 센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물소리가 워낙 거세 ...교회 종소리가 울려도 듣지 못할 정도(77)”의 공간이다. 이 고립이 의미하는 바는 일상적 현실과 무관하다는 것이 아니다. 무질은 단지 외적 현실의 영향을 배제한 표본적 공간으로서, 일종의 실험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 박사 출신의 무질은 외적 영향 요인을 배제한 상태에서 순수 공간에서 인간들의 행동과 정신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케텐의 영주 또는 케텐이라 불린다. 외부에서 결혼 할 여자를 취해야 하고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트리엔트 주교와의 싸움을 수행하여 승리하는 것을 소명으로 하는 존재다. 케텐은 주도면밀하고 냉철한 사람이며, 그의 아내 포르투갈 여인은 마법과 같은 행위를 보이는 사람이다. 이성과 비이성을 상징하는 존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몽환적 이야기는 주교와 마침내 종전에 합의함으로써 추구할 과제를 상실한 케텐의 상황으로 나아간다. 주인공 케텐은 케텐종족의 삶의 목표와 자아를 동일시한 인물이기에 종전의 결과는 자아 상실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마치 이를 증명하듯 케텐은 병들어 수척한 환자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런데 이 변화를 가속화하는 존재가 출현한다. 언젠가부터 성에 와 있는 이방인 청년이다. 아내의 곁을 맴도는 인간에 대한 질투와 병마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케텐은 사경을 벗어나지만 점차 기력이 쇠잔해 간다. 소설에는 모호한 상징으로 늑대와 고양이가 등장하는데, 일종의 암시로 작동하는 것 같다. 자아의 상실로 쇠잔해가는 케텐은 무언가 행해야만 살아 있는 존재다.

 

케텐 사람들이 고양이를 죽이는 사건은 이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암시로 받아들이고, 이방인 청년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마치 행동의 실천, 의지만이 삶을 구원할 수 있다는 듯, 다 죽어가던 케텐은 오르기 힘든 성벽을 기적처럼 올라간다. 청년의 방에 도착했지만 이미 그는 떠나고 없다. 아내도 떠났으리라 생각하고 아내의 침실로 가 확인하지만 아내는 잠에 빠져 부드럽게 숨 쉬고 있을 뿐이다. 케텐은 불안감을 떨쳐버린 기쁨에 거의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기분에 빠진다. 그리곤   아무것도 증명된 것이 없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묻지 않았다, 정말 모호한 문장으로 소설은 끝난다. 대체 무얼 읽어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해석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한 작품이다. 아마 도전을 요구하는 이 활짝 열린 이야기를 어찌 해석해야 하는 지는 두고두고 음미해보아야 할 숙제이다.

 

2-3. 통카 (Tonka)

 

이 소설의 테마는 정말 얄궂은 데가 있다. 지극히 자명한 사실이 불분명한 지대를 거닐게 만든다. 남자 주인공은 이름 없이 다만 인 화학을 전공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다. 그는 빈민 출신의 통카를 대도시로 데려와 동거한다. 어느 날 이들의 평범한 일상에 균열이 생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의사진찰 결과 통카의 임신과 성병이 발견된 것인데, 과거를 거슬러 잉태의 시점을 재구성하였을 때 그는 오랜 출장 중이었다. 결국 통카의 임신과 성병은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 편의 작품 중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랄 수 있다. 그는 통카에게 진실을 말해 줄 것을 지속하여 요구하지만 통카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과학도인 그에게 이 침묵은 의학의 진실을 부정할 가능성을 인정하기 어렵게 한다. 통카의 특징으로 별로 말하지 않는 소녀라는 말 할 수 없음이 곧 통카의 결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무질의 유머를 발견하는 것은 의외의 즐거움이다. 그는 한 여름에 내리는 눈송이’, ‘마리아의 잉태만큼이나 존재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침묵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기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만든다.

 

그는 확률과 기적’, 이성과 비이성의 갈등에 빠져 허우적대고, 믿고자 하는 소망은 의학의 높은 확률의 가능성에 휘청댈 뿐이다. 여기 다시 역사적 진술에 관한 무질의 멋진 신념이 드러난다. 잉태의 시점, 즉 역사의 재구성이란 사건 현장의 확인성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실증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의 현실이 사고 속에서의 현실보다 적어도 100년은 뒤져있다는 무질의 주장이 의미하는 바와 같다. 역사란 창안되는 것이지 수집된 자료들을 꿰맞추어 객관성이라 주장하는 것은 허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역사란 인간 삶의 해석을 과제로 하는 학문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맥락을 같이한다. 작가에 의해 자유로이 창작되는 세계야말로 완전한 세계라는 역사의식이 지닌 통념을 전도시키는 이 믿음의 수행이 무질의 문학이라는 것을 아마 가장 생생하게 실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일 것이다. 통카의 침묵은 단지 해석의 대상이 될 뿐이다. 주인공 화학도는 이성의 확실성에 집착하지 않고 통카의 침묵을 이해하려 한다.

 

무질은 이를 통해 그의 문학 논리인 사랑의 차원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그는 통카가 죽을 때까지 난 당신을 믿어요.”라는 말을 전하지 못한다. 평론가들은 통카의 침묵을 부정한 사실에 대한 시인이나 은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에 동의한다. 침묵은 침묵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무질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래야 무질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무질의 냉철한 이성과 비논리적 대담성의 통합, 즉 이성과 비이성의 합일 추구는 그의 소설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문학의 환상적 정확성에 대한 독특함일 것이다. 아마 그의 대표작인 특성없는 남자에서 울리히의 목소리를 빌어 주장하는 그 어떤 사물도, 그 어떤 자아도, 그 어떤 형식도, 그 어떤 원칙도 확고한 것은 없다.”며 무한한 가능성의 감각을 열어놓으려는 의도의 실천을 체험하는 사뭇 새롭고 흥미진진한 문학이라 하겠다.



*두 번째 리뷰 참조- <지빠귀> 및 <생전 유고>

  https://blog.aladin.co.kr/729034103/14620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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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6
문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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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번에 일어나는 구원은 신의 일이겠지만, 인간들은 서로를 시도 때도 없이,

볼품없이 구해줄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 <작가의 말> 에서


 


성급한 더위가 여름을 재촉하는 조금은 못된 계절이다. 폭설 내리는 겨울의 시간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이 이러한 성급함과 못됨을 중화시켜주고, 아니 이 기운을 지그시 눌러주는 듯하다. 열이 잔뜩 오른 화를 다스리는데   창밖의 풍성하게 흩날리는 눈발은 아마 마음 평정에 제격일 듯싶다. 이 작품은 평온함, 따뜻해짐, 누군가와 같이함의 유대와 위로를 느끼게 해준다. 위에 인용한 작가의 말은 이러한 느낌, 아니 믿음의 반영일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란 무수한 갈등과 충돌을 헤치며 입은 상처를 어떻게든 봉합하고 다스리는 일이기도 하다. 소설은 죽음과 삶, 떠남과 떠나지 못함의 이 대조적 현상을 아주 소소한 마음들이 연결되어, 추운데도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며, 거짓말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체험토록 이끄는 듯하다.

 

소설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수평선도 지평선도 점차 희미해지다 결국에 사라지듯그렇게 영혼의 상처들이 지극히 일상적인 사소함의 나눔에 섞여 희미해지고 어느 샌가 평온함이 마음에 스며드는 그런 이야기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해변 전체가 마치 거대한 고물상처럼 퇴락한 바닷가 동네다. 이 공간을 중심으로 다섯 서사가 서로 물려들고 그 경계가 희미해지며 결코 뒤섞일 듯하지 않은 세상 모든 인간들의 고독과 상처가 바로 그 볼품없는 인간들에 의해 위로받고 평온을 되찾으며 삶을 지속할 동력임을 하나의 풍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서핑을 하면 (Ding)’나는 건 당연한 거니까. .....

그건...내가 오늘도 파도에 뛰어들었다는 증거니까.” -85

 

산다는 것은 세상에 뛰어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상처를 입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살아있음, 무언가f를 하고 있음으로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손상은 부정(否定)이 아니라 생()에 대한 긍정의 표시일 것이다. 떠남도, 떠나지 못해 떠남을 상상하는 것도. 소설은 이렇듯   퍽 다정한 침묵”,  “배고프지 않음”,  “폭설을 견딜 힘의 정체를 통해 위로와 평온을 선사하지만. 한편으로 세상의 남루함, 타인의 죽음을 일종의 가십거리로 삼는 기만과 위선의 천박함을 통해 이 사회의 몰지각과 부도덕성의 일상성을 넌지시 풀어 놓기도 한다. 사람이 죽었는데 벌금 몇 백 만원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컨테이너 숙소 때문이 아니라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마음 한구석이 불에 덴 것처럼 쓰라림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네 일회성 연민은 사실 세상의 불의에 대해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귤 한 알의 건넴, 따뜻한 한 그릇 홍합 국물, 단지 함께 해 줄 수 있음으로 위태롭게 흔들리는 이 생에서 아주 잠시라도 닻을 내린 기분, 믿음의 안식이 된다. 이 소설의 따뜻함을 상징적으로 순환하는 귤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다시금 또 다른 사람으로 이어지며 세상의 온기를 퍼뜨린다. 타인을 이해해보려 애쓰는 인간들이 있는 세계, 누군가 내민 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의 평온함이 전편을 나지막하게 흐르며 순백의 눈송이가 되어 찬란하게 흩날리는 존재됨을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나라면 이 소설의 제목을 상황적 표현인 딩 보다는 고유한 결정체인 '눈송이들'로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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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월의 책은 그저 우연의 연속적 선택으로 이루어졌다. 아마 진실을 왜곡하는 인간들에 대한 울화 때문이었던 싶다. 이러한 심상이 만연한 진화이론의 남용에 의한 편협과 왜곡, 의도적인 선전물들의 난무를 분별하는 책을 찾게 했던 모양이다. 다윈으로부터 시작된 진화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센스 앤 넌센스를 읽게 되었다. 그러다 신간 안내 도서에서 와일드 후드라는 세상의 모든 생물체의 청년기와 인간의 행동,심리를 비교하여 성장기의 지난한 진화론적 역사 이야기를 재빨리 구매했다"직관을 거스르고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며 세상의 경험으로 진입하는 성장기의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기도 했다. 두 책은 전혀 계획된 독서의 목록이 아니었음에도 삶에 끼어들었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 1권의 영역본 Capital은 순전히 대조 읽기와 참조용으로 구입했다. 의미가 모호할 때 이 영역본은 유용하게 활용될 터이다. ‘파울 첼란의 시집은 조르조 아감벤 불과 글에 영향을 받은 읽기이다. 독일어를 말하며 성장했지만 독일인들로부터 배제된 유대인의 그 철저한 소외와 넘어설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벽의 부당함을 일생 고뇌했던 시인의 글쓰기인 신비에 대한 매혹 때문이었다. 아마 이와 유사한 맥락이 나를 끌어당겼던 것 같은데, ‘로베르트 무질 사랑의 역사에 수록된 생전의 유고를 구성하는 작품들 때문이다. 이 세계의 구조를 파악하는 독자적 논리인 비이성적 영역과 비논리적 대담성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작품에 대한 호감으로 인한 것이었다. 지금 그의 작품들을 읽으며 나는 공명하려 애쓰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출생하고 1차 대전 독일군 장교로 참전했음에도 나치에 의해 금서작가로 몰리고 스위스에 도피하여 곤궁한 삶을 살다간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 들끓는다.

 

한국 문학들은 사실 완전한 임의적 선택이랄 수 있다. 요즘 국내 문학의 획일화된 분위기에서 조금은 멀어지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다만 외면 할 수 없는 몇몇 작품들에 독자의 작은 성원을 보내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전혜진 작가의 바늘 끝에 사람이는 주류 사회가 은폐하거나 외면한 한국사회의 불편한 진실들이 빼곡한 소설집이다. 이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다시 자성하는 읽기가 될 것 같다. 박문영 작가의 허니비는 버려진 지구에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인 미래 사회를 축으로 인간에 대해 생각게 하는 작품일 것 같다. 내 의지가 가닿기를 기다리고 있는 소설이다. 여행자, 빛과 영원의 시계방은 유행과 광고의 현혹으로 내 수중에 들어 온 책들이다. 아마 무더위가 찾아오면 읽게 될 줄 모르겠다.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은 내게 어떤 의도를 남겼는데, 놀이를 사회학으로 연결 짓는 이 위대한 저작은 놀이와 정치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연구 가능성을 던져주었다. 사회와 문화 비판의 중요한 논거로서 높은 가치가 느껴진다. 요한 하우징거의 호모 루덴스를 완결 짓는 역사적 걸작일 것이다. 이 두 저술 이후에 이렇다 할 후속 연구가 이어지지 않은 까닭은 지식 엘리트라 자처하는 이들이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하게까지 한다.

 

기득권의 그 집요한 보전 욕구가 학문에는 순수성이란 애초 없음을 확신케 한다. 무질이 학문을 경멸하고 문학에 천착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사를 구입하게 된 동기는 막연하게 18~19세기의 프랑스 혁명 전후의 그네들 인식을 조망하기 위한 대강의 또 다른 판본에 대한 기대였다. 사실 이러한 의도는 충족되지 못했다. 책의 선택이 매번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실패로 인해 읽게 될 일 없는 책들을 읽게 된다. 우연, 즉 인간이 논리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인 우연에 휘둘리는 것이 인간사인 모양이다. 이제 6월의 도서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시간, 계절이 쏜살같이 지나가버리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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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3-05-24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국문학을 자꾸 외면하게 됩니다.
파울 첼란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늘 감탄하며 리뷰 읽고 있습니다. 유월의 우연도 기대할게요.

필리아 2023-05-24 10:30   좋아요 1 | URL
네, 저는 요즘 파울첼란,카프카,무질에 꽂혀있어요. 이들의 열린결말, 비의적 글쓰기에 매료되어 있어요. 댓글 감사드립니다, 초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