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베시 헤드 지음, 이석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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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합리주의의 폭격을 받은 문명은 한결같이 의식의 오만한 권위에 올라타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리고 정서나 감성은 이성에 의해 취약하고 불안한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매사를 이익인가 손실인가를 가늠하기 위해 계산대에 들이민다. 그래서 무엇이든 구분하고, 범주화하여 구별짓기를 하고, 분리한다. 분리된 것들은 의미화되어 차별되거나 배제된다. 인종(人種)이란 것 역시 이러한 차별을 위한 구별짓기이다. 백인은 유색인종을, 황인은 흑인을, 흑인은 또다시 자신들을 범주화하여 생김새와 흑색의 밝고 어두운 정도에 따라 차별을 한다. 여기엔 눈에 보이는 감각의 세계, 오직 의식이라는 것만 존재한다. 합리주의 이성의 세례는 이처럼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의식의 세계만 떠오르고 정서와 감성, 내면의 깊은 목소리인 무의식, 즉 인간의 몸에 태곳적부터 새겨진 지혜와 소통의 고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완전히 소통의 고리를 상실하지 않은 인류가 있다는 것을, 여전히 토템이 살아있고, 인류 의식의 원형인 미신과 신화가 숨 쉬고 있는 아프리카(africa)는 축복의 땅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물질문명의 교만한 시각에서 아프리카는 누추(陋醜)와 비루함이겠지만 손상되지 않은 정신의 세계, 의식과 무의식의 교통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의 풍요로운 영혼에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 생각은 땅 속 깊은 어딘가에 줄을 대고 있다가 하나의 해답을 얻어 다시 그의 심장으로 돌아왔다.” 이 같은 소설의 제목인 족장 ‘마루’의 생각은 바로 이것의 존재함을 보여준다. 온전한 전체의 사고를 할 수 있는 자, 그를 족장이요, 왕이며, 신이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두가 자신들의 원형을 잃어버렸을 때 그 대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니 어찌 신비롭고 경이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설은 바로 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감각과 감성의 분리지대를 흐른다. ‘마사르와’라 불리는 부시먼에 씌운 주류 흑인들의 편견과 차별의 인종분리 언어, 자신들과 다르게 생긴 또 다른 흑인종에게 부여한 노예, 일종의 불가촉천민이란 굴레의 언어이다. 주류 인종인 보츠와나족들에게 마사르와 여인의 주검은 자신들 가축의 죽음보다 못하다. 방치된 사체와 그 옆에 꼬물거리는 어린 여아는 백인 목사의 부인에 의해 거두어진다. ‘마거릿 캐드모어’, 이 여인은 환경결정론, 인간은 본디 빈 서판(blank slate)으로 태어나 주변 환경(교육 등)의 여하에 따라 다양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신념을 어미를 잃은 어린 마사르와 소녀에게 투사한다. 오만한 이성의 논리로.

 

소녀는 자신을 양육한 마거릿 캐드모어란 이름을 물려받고, 학업에서 뛰어난 성취를 거두어 한 지방의 교사로 부임한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마사르와란 천민, 보츠와나인의 가축과 같은 노예가 선생이란 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세계이다. 편협과 이기심으로 무장한 교장, 장학사 등은 그녀를 조롱하고 멸시하며 쫓아낼 궁리를 하지만 마을의 족장 후계자이자 토템 가문의 여식인 동료 교사 ‘디켈레디’의 호의 속에 자리를 지탱한다. 영국 유학까지 하고 온 재원인 여성, 디켈레디와 마르사와인 마거릿은 이렇게 교우(交友)한다. 귀족과 노예의 우의, 하늘과 대지의 만남, 둘은 서로를 닮아간다. 균형, 그 소통의 연결로 복원으로.

 

그러나 두 여인이 사랑하는 이는 마을의 난봉꾼 ‘몰레카’이다. 디켈레디는 몰레카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지만, 마사르와인 마거릿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있는 인종차별의 지대에서 마음속 연인으로 담고 있을 뿐이다. 한편 마거릿을 대면한 몰레카는 어떤 여인으로부터도 느낄 수 없었던 지고한 여성성에 매료되어 그녀의 정복을 호시탐탐 노리고, 디켈레디의 오빠인 마을의 지도자인 ‘마루’ 역시 그녀를 영혼의 동반자, 시대착오적인 인종차별의 편견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갈 반려자로 삼기위한 내밀한 작업에 들어간다.

 

마루와 몰레카, 오랜 친교를 쌓아온 친구지만 한 여인을 두고 갈등은 증폭된다. 마사르와라는 편협한 차별의식에 고착된 사람들의 세계를 진정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편견과 맞서 고통스러운 투쟁을 지속시킬 수 있는 용기 있는 자, 저 어두운 심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과 소통의 결과를 의식의 세계에서 실현 할 수 있는 온전한 정신의 세계를 지닌 자가 마거릿의 진정한 연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거릿의 꿈과 상상이 펼쳐진 그림들, 끊임없이 마음의 음성을 주의 기울여 듣고, 마음이 대지와 지상을 부양하는 형상 등 무의식의 세계와 소통하는 문장들은 이제 이것에 다가가는 방법조차 알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그 잃어버린 지대의 복원이 지니는 의미에 다가가게 한다. 정서와 감성이 이성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세계, 타자가 배제된 세계가 아니라 나와 네가 공존하는 세계, 의식이 무의식과 교호하는 세계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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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송이 백합과 13일간의 살인 율리아 뒤랑 시리즈
안드레아스 프란츠 지음, 서지희 옮김 / 예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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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영웅의 현란한 액션과 천재성에 의존한 과장된 허구의 영미식 추리문학과 다르며, 굳이 트릭이나 함정을 동원한 지적 게임류의 단순한 유흥도 아니다. 실화라는 사회적 실제로서의 추리소설로서 리얼리티가 부각되어 있는 메시지 중심의 작품이라 정의하고 싶다. 서스펜스, 액션, 트릭을 걷어내고 하나의 완벽한 추리문학으로서 읽는 즐거움을 잃지 않으며, 도덕적 감수성을 집요하게 자극하는 문제적 주제를 지니고 있다.

 

한 송이 백합과 이해할 수 없는 성경의 구절이 적힌 편지와 함께 문화계의 거물이 거세된 나신(裸身)의 피살체로 발견된다. 수사 경찰은 살인자의 살해 동기나 피살자의 어떠한 일탈행위도 발견하지 못하지만, 독자는 왜 살인이 시작되었는지 그 동기를 알고 있다. 살인자에 대한 연민을 지니고 있기에 그가 진행하는 처단이 완성되기를 바라게 되면서, 어느덧 수사의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기대하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게 된다.

 

어쨌든 살인자의 처단행위는 동일한 양태로 지속되지만, 범인이 보내오는 살인예고 편지와 사건현장 피살자들의 시신 옆에 남겨진 쪽지이외에 어떠한 단서도 없어 경찰은 속수무책의 상태에서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잇단 피살자들이 사회 각 분야를 대표하는 거물들이고, 이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미지의 권력조직을 형성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추정하기에 이른다. 이 추정은 점차 사실로 드러나고 담당 수사관 ‘율리아 뒤랑’은 살인자의 행위에 암묵적인 동조를 보이기까지 한다.

 

이것은 문화, 산업, 종교, 정치 등 사회 각 분야의 거물이라는 피살자들의 신분을 통해 권력의 자기 억제력의 실제를 확인케 하는데, 그 부패성과 남용성이라는, 곧 자기 쾌락과 이익에의 복무라는 권력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소설은 권력이라는 속물적 지위, 성공과 명성이라는 허망한 덕목이 결코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도덕성과는 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권력과 도덕성의 역비례라는 메시지와 더불어 피살자들의 극한 이기주의의 야만성이 드러나는데, 이들이 축적한 지위와 부가 아이들과 성적 약자들을 자신들의 일회용 쾌락 도구로 삼는, 즉 인간성 부재의 편협한 자기애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 대한 성찰이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라는 자본주의의 토대는 이처럼 권력의 확장과 유지에 있으며, 이것은 다름 아닌 타자의 무한 지배를 통한 자기애의 완결적 충족이상이 아닐 뿐이라는 의미에 닿는다.

 

이에 더해 피살자 모두가 한결같이 자신들의 실명을 은폐한 채 칼리굴라, 네로, 키케로 등으로 불리는 것은 사회 최상의 권력자들의 네트워크인 조직화된 권력의 폐쇄성과 은밀성이란 것임을 보여준다. 그 떳떳지 못함, 그래서 권력은 공적이라는 외부 세계에서는 친절과 고귀함으로 내면의 탐욕을 위장한다. 이 위선의 가면은 주변을 현혹하고 기만하기 때문에 좀처럼 그 수심(獸心)을 입증하기가 어렵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은폐되어 있는 막강한 권력조직의 범죄성을 입증하고 처단하기 위해서는 현실 속에서 일선 경찰의 수사 접근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소설은 사건 수사관들이 상급기관인 검찰은 물론 수사협력 기관들인 관련 경찰동료조직 등에 대해 불신의 경계 속에서 수사를 고통스럽게 진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권력의 자기 은폐성과 유지보존을 위한 폭력성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극한의 용기가 필요하다. 이들의 범죄 사실을 경찰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이의 불안이 극명하게 표현되고 있는데, 자신은 물론 가족의 생명까지 담보로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를 삶의 욕구에서 내려놓아야 비로소 가능할 용기인 것이다.

 

아마 이 작품의 위대성은 여기에 있다 하겠다. 난공불락의 촘촘히 연결된 권력 망(網)의 해체가 자기 내면의 실체를 확인한 바로 망의 내부자에게 시작될 때 그 가능성이 실현된다는 것이며, 그 반성의 자기인식으로 부터의 용기란 사랑의 궁극인 자기 내려놓기라는 것이다. 자신이 추구했던 권력, 바로 그 권력의 야만성으로 인해 빼앗긴 자식들과 그로 인해 삶의 가능성을 상실한 아내,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곧 자기를 잃어버리는,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것으로서의 사랑인 것이다. 추악한 권력과 사랑의 숭고함의 대결, 살인자에 대한 연민과 동조의 심리 저변에는 결코 배제되지 않는 인간의 ‘사랑’이란 고귀한 정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살인이 미덕일 수밖에 없는 이 모순의 세계, 그 절망에서 우리를 그나마 구원하는 것은 사랑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추리문학 고유의 읽는 즐거움에 파렴치한 아동 성산업, 이익과 쾌락적 착취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행동하는 권력의 본성과 점차 조직화되는 권력 네트워크(網)의 세계, 그리고 이 불온한 세계에 대항하는 인간의 빼앗길 수 없는 정신으로서의 용기와 사랑이 정교하게 직조된 수작(秀作)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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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지 말아요 - 당신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특별한 연애담
정여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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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인 ‘잘있지 말아요’라는 이 어색한 문장은 우리가 좀체 사용하지 않는 부정어이기에 곧 발화자(發話者)의 지극한 소망이 반어적으로 표현된 것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뻔히 속마음이 읽히지만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부정이다. 들키고 싶지 않으면서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 사랑을 시작하는 이들의 마음이란 이처럼 드러냄과 숨김의 경계를 정의할 수 없는 은밀한 정신세계임을 보여준다.

 

세상의 그 어떤 말이 ‘사랑’이란 단어만큼 설렘, 환희를 안겨 줄 수 있을까? 그리고 세상 모두를 가진 것만큼, 세상 그 무엇도 필요치 않을 만큼 영혼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사랑이 잊히고 마침내 사라져가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정신세계에 깃든 상징의 세계, 감성의 공간이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에 의해 쫓겨나고 내몰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인간의 감성은 바짝 말라붙어 사랑조차도 이성으로 재단하려 들기 시작했다. 그 풍요롭던 상징의 세계가 사라지고 수량적 합리주의 세계가 정신세계의 전체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결국 합리주의에 내몰린 사랑은 고독하게 구석에 쪼그리고, 그 광활한 영역을 상실한 채 자기애(自己愛)라는 편협의 공간에서 홀로이 골몰하는 인간들을 양산한다. 자기 자신만을 물고, 쓰다듬고, 빨고, 훌쩍이는 이 정신병적 에고의 세계, 그래서 타인에 대해서는 냉담하고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며, 혹은 무관심하고 배타적이기까지 한 파편화된 개인들로 넘쳐난다.

 

이제 타자를 향한, 타자로부터 시작되는 사랑을 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의 현상이 되어버리고 있음이다. 더구나, 이 유아적인 자기애의 세계는 끝없이 자신만을 봐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를 보아주기만을 주장하는 세계이고 보니 그 무심함에 절망하고, 진절머리를 낼 뿐이다. 그리곤 사랑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이 코미디에 어찌 조소를 날릴 수 없겠는가!

이러한 오늘의 정신세계에서 ‘정여울’의 감성적 지성이 꺼내든 ‘사랑’의 에세이는 유효하고 시의적절하다 아니할 수 없다.

 

“사랑, 연애, 이별, 인연”이란 4개의 장으로 구성된 아름다운 예술비평, 사랑의 현상학이라 할 이 책은 문학 및 영화 작품에 흐르는 그 무수한 사랑의 현상들을 통해 삶의 진정한 맛, 단지 생존을 위한 삶이 아닌 살아있음의 축복을 더듬어, 사랑의 의미와 진실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이것에 정신을 동원하는 것은 정말 새삼스런 즐거움에 휩싸이게 한다.

첫사랑의 가공할 떨림과 미련과 아쉬움의 감정에서 이내 나를 잃어버리고, 나란 존재를 내려놓음으로서 비로소 삶 전체를 감싸 안는 새로운 생명력으로서의 생애를 시작하는 지고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삶의 비극적 모순을 유화시키는 감성적 통찰로 빼곡하다.

 

이반 투르게네프의「첫사랑」, 다나베 세이코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트루먼 커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 스티븐 크보스키의『월 플라워』,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토마스 만의「베니스에서의 죽음」, 표도르 토스토엡스키의 『죄와 벌』등 근현대 걸작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들의 사랑이라는 삶의 완성을 위한 행로는 작가의 탁월한 정서적 감수성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성을 한층 성숙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37편의 이 사랑의 현상학에서 아마 가장 깊게 지금의 나와 공명한 것은 우연히도 2013년 노벨문학상 수장작가인 앨리스 먼로의 「곰이 산을 넘어오다」를 빌어 사랑이란 ‘놓음’의 시간이요, 새로운 만남의 시간임을 일러주는 에세이라 하겠다.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 가장 낯선 타인으로 바라봐야 하는 순간을 비로소 이해함으로써 진정 사랑에 이르는 남편 ‘그랜트’의 아내 ‘피오나’를 향한 내려놓기의 숭고함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기를 버리고, 오직 대상의 자유와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마음, 그 온전함의 윤리 이상 어떠한 것도 왜소해지고 만다. 이것은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히로인인 ‘홀리’의 가면마저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 소유의 갈망에서 놓아주는 ‘폴’이나,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와 같이 예술가 ‘아셴바하’ 의 미소년 ‘타치오’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 모아지는 것, 성숙하고 결실있는 사랑이란 자신의 상실, 죽어도 여한이 없음을 깨닫는 그것일 것이다. 사랑이란 바로 이 내려놓기의 윤리! 라는 것을.

 

타자의 존재를 처음으로 강력하게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는 연애라는 세상의 이해를 향한 첫걸음에서 시작하여 타자와 성숙한 소통을 하고 마침내 자신의 모든 것을 대상에게 내어줄 수 있음으로서 정말의 유대가 형성되며 비로소 삶의 모순을 넘어 살아있음의 축복이 되리라는 것을. 그래서 세계가 이러한 사랑으로 넘실댄다면 그 어떤 이데올로기가 필요할 것이며, 전망이 필요하겠는가? 연애만 하려드는 유아적 미성숙이나 격정적이고 낭만적 달콤함이란 사랑에 머무는, 혹은 제도의 틀 내에서만 성공할 수 있는 합리주의적 사랑을 말하는 정체된 이 세계에 진정한 사랑을 복원하기위한 노력은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해서도,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칠 수 없는 영구한 본성이어야 할 것이다. 내 사랑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이 책은 그 현주소를 깨우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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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70
소스타인 베블런 지음, 홍기빈 옮김 / 책세상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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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블런의 경제학을 부분적으로나마, 그러나 그의 주요 개념을 접할 수 있게 해준 이 책이 고맙지 않을 수 없다. 수요공급곡선, 한계효용, 수확체감의 법칙과 같은 고전경제학이라는 썩은 구조물에 여전히 의존하는 경제학에 대한 무지의 교만을 반성 할 수 있는 중요한 근간을 제공하고 있음에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정작‘자본’의 본성을 엉뚱하게 정의하고 있다 보니 이것의 흐름인 경제를 제대로 착안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삶의 바탕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놓여 있다는 굳은 믿음만큼 이것의 정체를 알고 있지는 못한 것이 실상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생산요소의 하나이며, 생산성에 관여하여 이윤을 창출하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 오늘의 주류 경제학의 교조적 믿음이다. 자본이 과연 산업의 생산에 기여하기는 할까? 그렇다면 산업 생산에 관여하는 이를테면 산업자본이란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자본주의 태동기의 자본과 21세기 지구화된 시대의 자본의 내용은 동일한 것인가? 이들 물음에 대해 답변할 수 있어야 오늘의 경제가 야기하는 무수한 혼란과 문제점들을 규명하는데 그나마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자본의 본성에 대한 두 개의 논문과 현대의 영리적 자본에 대한 하나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기 산업자본과 무형자산의 자본화라는 화폐자본으로서의 투자개념, 그리고 영리적 자본인 금융자본의 본성을 파헤치고 있다.

 

1. 산업자본의 정체

 

우린 ‘자본주의’라 불리는 체제하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을 다시금 상기하는 것은 새삼스러울 만큼 친근해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이것을 전통적인 개념으로 정의하면 ‘산업자본에 대한 소유권의 지배적 형태를 띠는 사회’를 일컫는다. ‘베블런’의 관점은 이 정의에서 말하는 ‘산업자본에 대한 소유권’이란 공동체 전체의 무형자산을 독점하기 위한 제도라는 토대에 놓여있다. 이로부터 무수한 물음이 가능해진다. 아마 자본가들은 산업자본이란 공동체 전체의 자산이라는 말에 경악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물질문명의 역사를 더듬으면 ‘공동 지식 축적의 성장과 활용의 역사’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소위 자본재가 되는 것들이 어떻게 쓸모 있는 경제적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되는지를 추적하면 산업자본이 특정 개인의 소유권 대상이 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것인지를 이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마제석기부터 오늘의 거대한 산업장비의 개개에 이르기까지 집단 전체에 고루 스며있는 지식의 공동축적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유형 자산으로 불리는 어떤 물질적 산업장비인 자본재가 이것이 속한 공동체의 오랜 기간의 경험과 창의성을 통해 천천히 일구어낸 정신적 추출물이라는 비물질적 기술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할 때,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어리석음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반론의 제기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누군가 뛰어난 개인이 인류지식의 역사에는 단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던 기술이나 이론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설혹 가능하다고 해도 이것이 과연 공동체의 경제적 삶을 위해 바로 가치를 지닐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공동체 전체의 지식 축적이 토대를 제공하지 않으면 한 개인의 창의성이란 것도 있을 수 없으며, 일정한 성과를 가져오지도, 공동체 전체의 지식 축적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아무런 효과도 낳지 못한다. 즉 공동체의 지식수준이 이것을 수용할 수 있는 만큼 제고되는 것, 해당 공동체의 문화가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사회적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쓸모 있는 경제적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공동체 구성원에 대대적인 학습과 관습의 확산을 이루고서야 자본재가 된다는 것이다.

 

또다른 이의 제기도 가능할 것이다. 자본재라는 것은 이처럼 모두 공동체의 축적된 지식과 경험이라는 비물질적 자산의 추출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산업장비와 같은 본질적 유형자산이나 인간 노동의 생산력처럼 그 자체만의 경제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고. “물질 자체가 지니고 있는 근원적” 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는 것인데 아마 심한 착각일 것이다. 어떤 기계 장비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기술적 진보에 의해 새로운 기계장비로 대체하게 되었을 때 옛 기계장비는 고물상으로 간다.("goes to the junk-heap!") 이것은 물질 자체가 지니고 있는 근원적 힘은 자본재가 아니라는 입증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결국 자본재라는 물질적 산업장비 역시 ‘물체의 사용 가능성’이라는 산업 혹은 경제 집단의 이해 함수에 불과한 것이라는 의미로 귀환한다. 인간의 노동력 역시 근력과 같은 동물로서의 육체적 힘이 아니라 생산의 효율을 결정하는 기술적 정도에 따른 노동력이라는 측면에서 공동체의 축적된 정신적 산물이라는 토대를 벗어날 수 없다.

 

이제 이러한 자본재가 어떻게 특정 개인들의 소유가 될 수 있었는가하는 과제가 남는다. 예컨대, 자본주의가 어떻게 오늘의 인간 사회 대부분을 결정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고작 수공업과 같은 개인의 물질적 점유가 부담되지 않았던 18세기 이전의 시대에, 자본재란 해당 공동체의 지적 공유물로서 특정인 소유 대상이 될 필요도 없었으며, 되지도 않았다. 이것에 장애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인데, 산업혁명처럼 거대 산업장비의 집산은 개인의 노력으로 마련 할 수 있는 수준과 크기를 넘어서게 되고, 이로서 이들을 소유한 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자본의 권력구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본재가 비로소 이윤을 목적으로 전용되기 시작한 것으로서, 소유자들은 공동체 전체의 무형자산을 독점하기 위한 제도로서의 소유권 원리의 구체화, 제도화를 향한 폭력의 역사를 질주하게 된 것은 새삼 반복 할 얘기도 아닐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베블런의 ‘자본재의 생산성’이라는 부제를 가진 논문,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1)」는 자본주의란 공동체의 자산을 자본가 개인들이 폭력적으로 강탈한 제도화의 결정체이고, 또한 ‘산업자본’이란, 공동체의 지식과 경험의 축적인 비물질적 자산임을 확인하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2. 무형 자산의 자본화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1)」이 ‘산업자본’화된 자본재의 본질을 규명하고, 이의 독점화라는 소유권 원리의 제도가 자본주의 요체임을 논의하였다면 , 논문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2); 투자, 무형자산, 금융의 거물」은 화폐가치로서 자본화되는 자산의 유형적 속성과 “자본을 매물로 삼는 거래”로서의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라 하겠다.

베블런은 이를 위해서 화폐 소득을 낳아주는 가치적 소유물로서 자본을 유형자산과 무형자산으로 구분하고, 생산요소로서 갖는 산업적 쓸모와의 관련성 유무에 구별의 착안점을 두고 있다. 즉 후자는 전자와 달리 공동체의 효용에는 아무런 봉사도 하지 않으면서 오직 소유자 개인의 이득에만 관여하는 자산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물질적 장비와 같은 유형 자산이 공동체의 이익에 복무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물질적 장비의 소유자는 공동체의 비물질적 장비에 대한 사용권의 전유는 물론 해당 소유물의 남용, 방기, 다른 사람이 쓰지 못하게 할 권리까지 획득함으로써 일종의 권력과 소득 획득 능력을 보유하게 된다. 이 소유자는 소유물의 축소, 지연 사용이 자신의 금전상의 이득을 제공한다면 공동체의 효용과는 역행한다. 즉 자신의 차등적 이점이 된다면 공동체 전체의 경제적 이익이란 애초에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투자에서 나오는 이득의 양이 그 자본재가 실제 공동체에 가져다 준 효용이라는 의미에서 물질적 유용성과 동일하다거나 일정한 비례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도 없으며, 오로지 자본가의 금전적 욕망 충족에만 관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자신의 산업 효율성을 통제하여, 타경쟁자의 효율성을 방해하거나 공급의 제한, 가격의 압박 전략이 차등적 이점으로 확립되면 이것은 무형자산의 한 항목이 되어 자본화 된다. 즉 비효율성이 자본화 된다는 것이다.

 

물질적 자산으로서의 자본재가 이러한 비효율성의 얼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류, 공동체를 해치는데서 가치를 얻기도 한다. 예컨대, 공동체 전체의 희생을 대가로 차등적 이익을 얻는 무기공장과 같은 군수 산업이 있으며, 낭비의 관행, 허영심, 환상을 이윤의 원천으로 삼는 패션, 호화사치품, 광고회사처럼 왜곡의 형식으로 사용하여 자본화 가능가치를 획득하기도 한다.

결국 현대 경제에서 유형자산 조차도 기술적 유용성이나 공동체의 효용이 아니라 소유자에게 얼마나 소득을 낳아주는가라는 자본으로 측정되는 양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더욱 주목 할 것은 산업과 영리기업의 속성이 이질적이라는 점에 있다. 오늘날 기업은 ‘주식회사’라는 자본 주체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는 자본시장의 발달을 의미한다. 이로서 자본 자체인 기업은 거래대상이 되었으며, 그 가치는 지속적인 미래소득을 평균이상으로 가져다주는가에 의존하게 되었다.  자본화된 유, 무형자산이란 ‘권력’의 다름 아님을 확인하였듯이 평균 이상의 안정적 이윤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해당 기업이 경제적 과정을 둘러싼 사회 전체에 대하여 얼마큼의 권력을 가지게 될 것인가, 그리고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이제 자본은 더 이상 산업 생산과 직접적 관련을 갖지 않으며, 인수합병이나 유가증권의 거래를 통한 이익 실현을 위해서 움직일 뿐이다. 자본이라는 지배구조가 경제의 최상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는 곧 금융거물, 거대 자본가가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산업 생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오직 자기 이윤의 실현을 위해서만 움직인다. 결국 시장 지배력이라는 권력 확장이 곧 이윤의 획득이므로, 시장은 오직 권력 암투의 장소 이상이 아니게 된다. 이처럼 자본의 본성이란 ‘권력’임을 설파한 베블런의 선견은 금융거물이 지배하는 오늘의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탁월한 시선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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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기술 멈퍼드 시리즈 3
루이스 멈퍼드 지음, 박홍규 옮김 / 텍스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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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세기 문화비평가의 예언적 비판이 오늘에 더욱 새롭게 읽히는 것은 왜일까? 당시 급진적이라는 비판을 받기까지 한 기계주의적 물질문명의 폐해는 오늘 더욱 분명하게 인지되는 실제가 되어있다는 의미에서일 것이며, 오히려 적기의 담론이기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금의 세계는 획일성, 규칙성, 기계적 정확성이 인류 역사의 어떤 시기보다 비범한 수준에 이른 사회이다. 이러한 기계주의적 특성이 인류를 물질적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게 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인간적 가치의 근원인 ‘반복적 질서’에 대한 이해가 맹목적 운명에의 굴종에서 빠져나와 생존적 안정감과 자기 치유적 가치의 발견에 중심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기계적 규칙성이라는 도구로서의 기술에 너무 비싼 대가를 치렀다는 보상 심리가 지나쳐 인류 문명의 한 축인 미적 상징으로서의 예술, 인간의 주관적 세계를 박탈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이것은 파편화된 인간들의 소통부재, 권력과 돈에 대한 강박적 신경증, 정서적 불감증, 활력없는 수동성과 위축된 욕망의 삶, 물질적 부품화 된 대체 가능물로서의 인간과 같은 비인격적 질서가 인간을 압도한 인간성 상실의 음울함으로 그려내는 오늘의 담론에 다름 아니다.

책은 이처럼 현대문명의 과도한 과학기술에의 집착이 인간을 반복과 단조로운 행동에 내몰고, 규율과 규칙성에 종속시켜 폭력적 소외와 무감각 상태에 매몰시켰으며, 그 결과 윤리적 기준과 절연되고, 의식과 유리되어 자기 파멸적, 인류 문명의 치명적 파괴로 내닫는 물질 종속의 불구화된 인류 사회의 재생을 위한 경건한 문명 통찰이자 제언이라 하겠다.

 

적은 분량의 저술이지만 매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는 삶의 새로운 시선들과 가치로 응축된 기술(記述)이어서 어느 한 문단이라도 빼놓고 서술한다는 것은 결코 이 책을 제대로 말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인간적 가치의 양축인 인간의 주관적 세계인 상징으로서의 예술(art)과 객관적 세계인 기계적 질서로서의 기술(技術; technics)의 균형을 찾기 위한 인류의 자각과 인간성 회복과 자기 억제를 향한 현상적 비평과 방법론적 제안이라는 대의로 정리하는 것이 그나마 양심적이고 책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소개가 될 것이다.

 

부연한다면, 인간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단순한 그림자로 축소되어 본연의 상상력과 생존능력까지 상실하기에 이른 오늘의 세계에 대한 다각적이고 신랄한 비평으로서, 물질, 권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요, 정서적 미성숙자들이 판치는 과도한 객관성이라는 폭력적 무지에 대한 질책이다. 또한 인간다움의 복원, 즉 삶의 의미 있는 순간을, 풍부성을 인간에게 되돌려 주기위한 기획이라 할 것이다.

 

다만 예술의 한 지류인 문학을 주목하는 법인(凡人)으로서 ‘예술발전 3단계’의 설명을 통해 예술가와 예술의 형식과 위상의 당위성에 대한 비평은 이 자리에서 정리해두고 싶다. 이 욕구는 더욱 전체주의화하는 한국인의 의식세계와 한국문학의 근작(近作)들에 대한 독자로서의 아쉬움에 기인한 것인데, “인간 손아귀에서 너무 빨리 벗어나거나 무의식속으로 침전될 수 있는 경험의 소중한 부분들을 더욱 영속적인 형태로 만들고 강력하게 투사하고자 하는 욕구”로서의 예술이라는 기초적 정의에는 부합하지만 정말 지고(至高)의 예술 작품은 왜 발견할 수 없으며, 정신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획일화하려는 권력의 의지는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의 답변을 비로소 찾아낼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이다.

 

즉, 이것은 왜 한국의 주류 담론이 편협하고 획일화된 전체주의적 폭력성에 경도되고 있는가에 이르게 하고, 예술다운 예술은 실종되어 고작 유아적 자기 동일시의 세계에서 허우적대고 있는가의 현주소를 확인케 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의 기본은 ‘멈퍼드’의 지적처럼 자기몰두, 자기 동일시로부터 시작된다. 이를테면 ‘나 좀 봐줘’라는 자폐증적이고 유아기적인 자기애가 예술의 1단계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 여기에 머물고 만다면 예술의 소통능력과 나아가 새로운 삶을 가져오는 예술의 유대형성으로서의 능력을 찾을 길이 없어진다. 성장하지 못하고 멈추어버린 미숙함, 혹은 아이로서의 퇴행적 양태를 보일 뿐이다.

 

요즘 한국문학을 보면 많은 작품들에서 아래와 같은 부정과 증오의 퇴행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나 자신을 미워합니다.” “세계를 증오합니다.” “당신을 미워합니다. 죽어버려라!” 이처럼 자신을, 세계를 절망의 상태로 몰아가는 광적 폭력, 공허한 자기파괴만 있는 것인데, 이것은 오직 예술가 자신만을 위한 약효밖에 없음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정서적 미성숙, 아마 사물, 도구, 객관에 편중된 교육으로 양육된 기계주의적 물질시대의 소산일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주류적 담론을 형성하는 미디어 매체에서도 동일하게 발견하게 된다.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아이의 옹알거림, 이 원시적인 자폐증세가 오늘 한국의 정신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여기에는 상호소통이란 존재할 수 없다. 유아적 자기애만 있는 세계, 공포와 불안, 폭력적 무지, 독선만이 넘실댄다.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 파시즘의 음울한 세계이다.

 

예술 발전의 2단계는 비로소 ‘나 좀 봐’라는 단순한 주목의 세계에서 인정받는 무엇인가를 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기과시가 상호소통으로 나아가는 단계이다. 즉, 사회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물질 기술사회가 상실한 ‘사랑’, ‘인간의 유대’를 회복키 위해서, 특히 미적 상징의 본질적 특성으로서의 예술의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전히 미흡하다.

예술가의 자아는 예술작품에 용해되고, 작가의 개성과 문화의 한계를 초월한, 즉 자신의 상실이라는 더 높은 힘과 대리자로의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 전인격적으로 삶 전체를 감싸 안고, 삶의 비극적 모순을 유화시키는 그런 것으로서. 우리에게, 인간에게 진짜의 삶을 돌려주기 위해 삶의 양면을 극복하고 자기를 내려놓는 그 완전한 책임의 세계를 체험 할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나는 교만하게도 자신은 ‘객관적’인 지성을 갖추었다고 말하는 쓰레기 같은 일부 종편채널 등 미디어의 패널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고 싶다. 객관적이라는 말의 뜻은 ‘자신만의 감정이나 충동, 의욕을 갖지 못하거나 그런 것들을 습관적으로 묵살하는 성향’일 뿐이라고. 더구나 객관적이기 위해서는 주관까지도 포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임을. 바로 이 주관을 결여한 세계, 미적 상징을 과소평가하고, 자본과 권력, 물질에 정신을 내어준 세계, 이 불구의 세계가 이들이 말하는 객관적 세계인 것이라고. 예술이 실종된 세계, 바로 그것이라고.

 

이러한 무지의 악의가 인식을 지배하는 사회에 혐오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의 배척에 대한 불복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몸 자체를 왜곡하고 해체하는 예술가들의 자기부정, 자기증오의 노골적 투사로 예술을 비정상화하는 도피의 세계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인간 삶과 정신에 어떠한 새로운 형식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지금 예술은 잃어버린 삶의 요소인 인간성 회복에 자신을 내놓아야 할 때인 것이다. 자기애의 부정도, 자기애에 정지해서도, 그리고 고작 소통에 안주해서도 될 일이 아닌 것이다. 공리적, 합리적 관심이 미적 관심을 압도하는 비인격화된 물신의 세계는 예술만이 구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세계는 잠시 정지하고 상징의 세계를 복원하기 위한 혹독한 자기억제의 노력이 언제쯤 공감과 실천의 발걸음 내딛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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