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송이 백합과 13일간의 살인 율리아 뒤랑 시리즈
안드레아스 프란츠 지음, 서지희 옮김 / 예문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수사 영웅의 현란한 액션과 천재성에 의존한 과장된 허구의 영미식 추리문학과 다르며, 굳이 트릭이나 함정을 동원한 지적 게임류의 단순한 유흥도 아니다. 실화라는 사회적 실제로서의 추리소설로서 리얼리티가 부각되어 있는 메시지 중심의 작품이라 정의하고 싶다. 서스펜스, 액션, 트릭을 걷어내고 하나의 완벽한 추리문학으로서 읽는 즐거움을 잃지 않으며, 도덕적 감수성을 집요하게 자극하는 문제적 주제를 지니고 있다.

 

한 송이 백합과 이해할 수 없는 성경의 구절이 적힌 편지와 함께 문화계의 거물이 거세된 나신(裸身)의 피살체로 발견된다. 수사 경찰은 살인자의 살해 동기나 피살자의 어떠한 일탈행위도 발견하지 못하지만, 독자는 왜 살인이 시작되었는지 그 동기를 알고 있다. 살인자에 대한 연민을 지니고 있기에 그가 진행하는 처단이 완성되기를 바라게 되면서, 어느덧 수사의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기대하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게 된다.

 

어쨌든 살인자의 처단행위는 동일한 양태로 지속되지만, 범인이 보내오는 살인예고 편지와 사건현장 피살자들의 시신 옆에 남겨진 쪽지이외에 어떠한 단서도 없어 경찰은 속수무책의 상태에서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잇단 피살자들이 사회 각 분야를 대표하는 거물들이고, 이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미지의 권력조직을 형성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추정하기에 이른다. 이 추정은 점차 사실로 드러나고 담당 수사관 ‘율리아 뒤랑’은 살인자의 행위에 암묵적인 동조를 보이기까지 한다.

 

이것은 문화, 산업, 종교, 정치 등 사회 각 분야의 거물이라는 피살자들의 신분을 통해 권력의 자기 억제력의 실제를 확인케 하는데, 그 부패성과 남용성이라는, 곧 자기 쾌락과 이익에의 복무라는 권력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소설은 권력이라는 속물적 지위, 성공과 명성이라는 허망한 덕목이 결코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도덕성과는 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권력과 도덕성의 역비례라는 메시지와 더불어 피살자들의 극한 이기주의의 야만성이 드러나는데, 이들이 축적한 지위와 부가 아이들과 성적 약자들을 자신들의 일회용 쾌락 도구로 삼는, 즉 인간성 부재의 편협한 자기애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 대한 성찰이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라는 자본주의의 토대는 이처럼 권력의 확장과 유지에 있으며, 이것은 다름 아닌 타자의 무한 지배를 통한 자기애의 완결적 충족이상이 아닐 뿐이라는 의미에 닿는다.

 

이에 더해 피살자 모두가 한결같이 자신들의 실명을 은폐한 채 칼리굴라, 네로, 키케로 등으로 불리는 것은 사회 최상의 권력자들의 네트워크인 조직화된 권력의 폐쇄성과 은밀성이란 것임을 보여준다. 그 떳떳지 못함, 그래서 권력은 공적이라는 외부 세계에서는 친절과 고귀함으로 내면의 탐욕을 위장한다. 이 위선의 가면은 주변을 현혹하고 기만하기 때문에 좀처럼 그 수심(獸心)을 입증하기가 어렵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은폐되어 있는 막강한 권력조직의 범죄성을 입증하고 처단하기 위해서는 현실 속에서 일선 경찰의 수사 접근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소설은 사건 수사관들이 상급기관인 검찰은 물론 수사협력 기관들인 관련 경찰동료조직 등에 대해 불신의 경계 속에서 수사를 고통스럽게 진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권력의 자기 은폐성과 유지보존을 위한 폭력성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극한의 용기가 필요하다. 이들의 범죄 사실을 경찰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이의 불안이 극명하게 표현되고 있는데, 자신은 물론 가족의 생명까지 담보로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를 삶의 욕구에서 내려놓아야 비로소 가능할 용기인 것이다.

 

아마 이 작품의 위대성은 여기에 있다 하겠다. 난공불락의 촘촘히 연결된 권력 망(網)의 해체가 자기 내면의 실체를 확인한 바로 망의 내부자에게 시작될 때 그 가능성이 실현된다는 것이며, 그 반성의 자기인식으로 부터의 용기란 사랑의 궁극인 자기 내려놓기라는 것이다. 자신이 추구했던 권력, 바로 그 권력의 야만성으로 인해 빼앗긴 자식들과 그로 인해 삶의 가능성을 상실한 아내,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곧 자기를 잃어버리는,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것으로서의 사랑인 것이다. 추악한 권력과 사랑의 숭고함의 대결, 살인자에 대한 연민과 동조의 심리 저변에는 결코 배제되지 않는 인간의 ‘사랑’이란 고귀한 정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살인이 미덕일 수밖에 없는 이 모순의 세계, 그 절망에서 우리를 그나마 구원하는 것은 사랑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추리문학 고유의 읽는 즐거움에 파렴치한 아동 성산업, 이익과 쾌락적 착취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행동하는 권력의 본성과 점차 조직화되는 권력 네트워크(網)의 세계, 그리고 이 불온한 세계에 대항하는 인간의 빼앗길 수 없는 정신으로서의 용기와 사랑이 정교하게 직조된 수작(秀作)이라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