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기술 멈퍼드 시리즈 3
루이스 멈퍼드 지음, 박홍규 옮김 / 텍스트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20세기 문화비평가의 예언적 비판이 오늘에 더욱 새롭게 읽히는 것은 왜일까? 당시 급진적이라는 비판을 받기까지 한 기계주의적 물질문명의 폐해는 오늘 더욱 분명하게 인지되는 실제가 되어있다는 의미에서일 것이며, 오히려 적기의 담론이기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금의 세계는 획일성, 규칙성, 기계적 정확성이 인류 역사의 어떤 시기보다 비범한 수준에 이른 사회이다. 이러한 기계주의적 특성이 인류를 물질적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게 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인간적 가치의 근원인 ‘반복적 질서’에 대한 이해가 맹목적 운명에의 굴종에서 빠져나와 생존적 안정감과 자기 치유적 가치의 발견에 중심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기계적 규칙성이라는 도구로서의 기술에 너무 비싼 대가를 치렀다는 보상 심리가 지나쳐 인류 문명의 한 축인 미적 상징으로서의 예술, 인간의 주관적 세계를 박탈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이것은 파편화된 인간들의 소통부재, 권력과 돈에 대한 강박적 신경증, 정서적 불감증, 활력없는 수동성과 위축된 욕망의 삶, 물질적 부품화 된 대체 가능물로서의 인간과 같은 비인격적 질서가 인간을 압도한 인간성 상실의 음울함으로 그려내는 오늘의 담론에 다름 아니다.

책은 이처럼 현대문명의 과도한 과학기술에의 집착이 인간을 반복과 단조로운 행동에 내몰고, 규율과 규칙성에 종속시켜 폭력적 소외와 무감각 상태에 매몰시켰으며, 그 결과 윤리적 기준과 절연되고, 의식과 유리되어 자기 파멸적, 인류 문명의 치명적 파괴로 내닫는 물질 종속의 불구화된 인류 사회의 재생을 위한 경건한 문명 통찰이자 제언이라 하겠다.

 

적은 분량의 저술이지만 매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는 삶의 새로운 시선들과 가치로 응축된 기술(記述)이어서 어느 한 문단이라도 빼놓고 서술한다는 것은 결코 이 책을 제대로 말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인간적 가치의 양축인 인간의 주관적 세계인 상징으로서의 예술(art)과 객관적 세계인 기계적 질서로서의 기술(技術; technics)의 균형을 찾기 위한 인류의 자각과 인간성 회복과 자기 억제를 향한 현상적 비평과 방법론적 제안이라는 대의로 정리하는 것이 그나마 양심적이고 책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소개가 될 것이다.

 

부연한다면, 인간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단순한 그림자로 축소되어 본연의 상상력과 생존능력까지 상실하기에 이른 오늘의 세계에 대한 다각적이고 신랄한 비평으로서, 물질, 권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요, 정서적 미성숙자들이 판치는 과도한 객관성이라는 폭력적 무지에 대한 질책이다. 또한 인간다움의 복원, 즉 삶의 의미 있는 순간을, 풍부성을 인간에게 되돌려 주기위한 기획이라 할 것이다.

 

다만 예술의 한 지류인 문학을 주목하는 법인(凡人)으로서 ‘예술발전 3단계’의 설명을 통해 예술가와 예술의 형식과 위상의 당위성에 대한 비평은 이 자리에서 정리해두고 싶다. 이 욕구는 더욱 전체주의화하는 한국인의 의식세계와 한국문학의 근작(近作)들에 대한 독자로서의 아쉬움에 기인한 것인데, “인간 손아귀에서 너무 빨리 벗어나거나 무의식속으로 침전될 수 있는 경험의 소중한 부분들을 더욱 영속적인 형태로 만들고 강력하게 투사하고자 하는 욕구”로서의 예술이라는 기초적 정의에는 부합하지만 정말 지고(至高)의 예술 작품은 왜 발견할 수 없으며, 정신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획일화하려는 권력의 의지는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의 답변을 비로소 찾아낼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이다.

 

즉, 이것은 왜 한국의 주류 담론이 편협하고 획일화된 전체주의적 폭력성에 경도되고 있는가에 이르게 하고, 예술다운 예술은 실종되어 고작 유아적 자기 동일시의 세계에서 허우적대고 있는가의 현주소를 확인케 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의 기본은 ‘멈퍼드’의 지적처럼 자기몰두, 자기 동일시로부터 시작된다. 이를테면 ‘나 좀 봐줘’라는 자폐증적이고 유아기적인 자기애가 예술의 1단계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 여기에 머물고 만다면 예술의 소통능력과 나아가 새로운 삶을 가져오는 예술의 유대형성으로서의 능력을 찾을 길이 없어진다. 성장하지 못하고 멈추어버린 미숙함, 혹은 아이로서의 퇴행적 양태를 보일 뿐이다.

 

요즘 한국문학을 보면 많은 작품들에서 아래와 같은 부정과 증오의 퇴행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나 자신을 미워합니다.” “세계를 증오합니다.” “당신을 미워합니다. 죽어버려라!” 이처럼 자신을, 세계를 절망의 상태로 몰아가는 광적 폭력, 공허한 자기파괴만 있는 것인데, 이것은 오직 예술가 자신만을 위한 약효밖에 없음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정서적 미성숙, 아마 사물, 도구, 객관에 편중된 교육으로 양육된 기계주의적 물질시대의 소산일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주류적 담론을 형성하는 미디어 매체에서도 동일하게 발견하게 된다.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아이의 옹알거림, 이 원시적인 자폐증세가 오늘 한국의 정신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여기에는 상호소통이란 존재할 수 없다. 유아적 자기애만 있는 세계, 공포와 불안, 폭력적 무지, 독선만이 넘실댄다.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 파시즘의 음울한 세계이다.

 

예술 발전의 2단계는 비로소 ‘나 좀 봐’라는 단순한 주목의 세계에서 인정받는 무엇인가를 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기과시가 상호소통으로 나아가는 단계이다. 즉, 사회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물질 기술사회가 상실한 ‘사랑’, ‘인간의 유대’를 회복키 위해서, 특히 미적 상징의 본질적 특성으로서의 예술의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전히 미흡하다.

예술가의 자아는 예술작품에 용해되고, 작가의 개성과 문화의 한계를 초월한, 즉 자신의 상실이라는 더 높은 힘과 대리자로의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 전인격적으로 삶 전체를 감싸 안고, 삶의 비극적 모순을 유화시키는 그런 것으로서. 우리에게, 인간에게 진짜의 삶을 돌려주기 위해 삶의 양면을 극복하고 자기를 내려놓는 그 완전한 책임의 세계를 체험 할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나는 교만하게도 자신은 ‘객관적’인 지성을 갖추었다고 말하는 쓰레기 같은 일부 종편채널 등 미디어의 패널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고 싶다. 객관적이라는 말의 뜻은 ‘자신만의 감정이나 충동, 의욕을 갖지 못하거나 그런 것들을 습관적으로 묵살하는 성향’일 뿐이라고. 더구나 객관적이기 위해서는 주관까지도 포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임을. 바로 이 주관을 결여한 세계, 미적 상징을 과소평가하고, 자본과 권력, 물질에 정신을 내어준 세계, 이 불구의 세계가 이들이 말하는 객관적 세계인 것이라고. 예술이 실종된 세계, 바로 그것이라고.

 

이러한 무지의 악의가 인식을 지배하는 사회에 혐오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의 배척에 대한 불복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몸 자체를 왜곡하고 해체하는 예술가들의 자기부정, 자기증오의 노골적 투사로 예술을 비정상화하는 도피의 세계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인간 삶과 정신에 어떠한 새로운 형식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지금 예술은 잃어버린 삶의 요소인 인간성 회복에 자신을 내놓아야 할 때인 것이다. 자기애의 부정도, 자기애에 정지해서도, 그리고 고작 소통에 안주해서도 될 일이 아닌 것이다. 공리적, 합리적 관심이 미적 관심을 압도하는 비인격화된 물신의 세계는 예술만이 구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세계는 잠시 정지하고 상징의 세계를 복원하기 위한 혹독한 자기억제의 노력이 언제쯤 공감과 실천의 발걸음 내딛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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