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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지 말아요 - 당신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특별한 연애담
정여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평점 :
표제인 ‘잘있지 말아요’라는 이 어색한 문장은 우리가 좀체 사용하지 않는 부정어이기에 곧 발화자(發話者)의 지극한 소망이 반어적으로 표현된 것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뻔히 속마음이 읽히지만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부정이다. 들키고 싶지 않으면서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 사랑을 시작하는 이들의 마음이란 이처럼 드러냄과 숨김의 경계를 정의할 수 없는 은밀한 정신세계임을 보여준다.
세상의 그 어떤 말이 ‘사랑’이란 단어만큼 설렘, 환희를 안겨 줄 수 있을까? 그리고 세상 모두를 가진 것만큼, 세상 그 무엇도 필요치 않을 만큼 영혼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사랑이 잊히고 마침내 사라져가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정신세계에 깃든 상징의 세계, 감성의 공간이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에 의해 쫓겨나고 내몰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인간의 감성은 바짝 말라붙어 사랑조차도 이성으로 재단하려 들기 시작했다. 그 풍요롭던 상징의 세계가 사라지고 수량적 합리주의 세계가 정신세계의 전체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결국 합리주의에 내몰린 사랑은 고독하게 구석에 쪼그리고, 그 광활한 영역을 상실한 채 자기애(自己愛)라는 편협의 공간에서 홀로이 골몰하는 인간들을 양산한다. 자기 자신만을 물고, 쓰다듬고, 빨고, 훌쩍이는 이 정신병적 에고의 세계, 그래서 타인에 대해서는 냉담하고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며, 혹은 무관심하고 배타적이기까지 한 파편화된 개인들로 넘쳐난다.
이제 타자를 향한, 타자로부터 시작되는 사랑을 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의 현상이 되어버리고 있음이다. 더구나, 이 유아적인 자기애의 세계는 끝없이 자신만을 봐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를 보아주기만을 주장하는 세계이고 보니 그 무심함에 절망하고, 진절머리를 낼 뿐이다. 그리곤 사랑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이 코미디에 어찌 조소를 날릴 수 없겠는가!
이러한 오늘의 정신세계에서 ‘정여울’의 감성적 지성이 꺼내든 ‘사랑’의 에세이는 유효하고 시의적절하다 아니할 수 없다.
“사랑, 연애, 이별, 인연”이란 4개의 장으로 구성된 아름다운 예술비평, 사랑의 현상학이라 할 이 책은 문학 및 영화 작품에 흐르는 그 무수한 사랑의 현상들을 통해 삶의 진정한 맛, 단지 생존을 위한 삶이 아닌 살아있음의 축복을 더듬어, 사랑의 의미와 진실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이것에 정신을 동원하는 것은 정말 새삼스런 즐거움에 휩싸이게 한다.
첫사랑의 가공할 떨림과 미련과 아쉬움의 감정에서 이내 나를 잃어버리고, 나란 존재를 내려놓음으로서 비로소 삶 전체를 감싸 안는 새로운 생명력으로서의 생애를 시작하는 지고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삶의 비극적 모순을 유화시키는 감성적 통찰로 빼곡하다.
이반 투르게네프의「첫사랑」, 다나베 세이코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트루먼 커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 스티븐 크보스키의『월 플라워』,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토마스 만의「베니스에서의 죽음」, 표도르 토스토엡스키의 『죄와 벌』등 근현대 걸작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들의 사랑이라는 삶의 완성을 위한 행로는 작가의 탁월한 정서적 감수성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성을 한층 성숙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37편의 이 사랑의 현상학에서 아마 가장 깊게 지금의 나와 공명한 것은 우연히도 2013년 노벨문학상 수장작가인 앨리스 먼로의 「곰이 산을 넘어오다」를 빌어 사랑이란 ‘놓음’의 시간이요, 새로운 만남의 시간임을 일러주는 에세이라 하겠다.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 가장 낯선 타인으로 바라봐야 하는 순간을 비로소 이해함으로써 진정 사랑에 이르는 남편 ‘그랜트’의 아내 ‘피오나’를 향한 내려놓기의 숭고함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기를 버리고, 오직 대상의 자유와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마음, 그 온전함의 윤리 이상 어떠한 것도 왜소해지고 만다. 이것은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히로인인 ‘홀리’의 가면마저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 소유의 갈망에서 놓아주는 ‘폴’이나,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와 같이 예술가 ‘아셴바하’ 의 미소년 ‘타치오’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 모아지는 것, 성숙하고 결실있는 사랑이란 자신의 상실, 죽어도 여한이 없음을 깨닫는 그것일 것이다. 사랑이란 바로 이 내려놓기의 윤리! 라는 것을.
타자의 존재를 처음으로 강력하게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는 연애라는 세상의 이해를 향한 첫걸음에서 시작하여 타자와 성숙한 소통을 하고 마침내 자신의 모든 것을 대상에게 내어줄 수 있음으로서 정말의 유대가 형성되며 비로소 삶의 모순을 넘어 살아있음의 축복이 되리라는 것을. 그래서 세계가 이러한 사랑으로 넘실댄다면 그 어떤 이데올로기가 필요할 것이며, 전망이 필요하겠는가? 연애만 하려드는 유아적 미성숙이나 격정적이고 낭만적 달콤함이란 사랑에 머무는, 혹은 제도의 틀 내에서만 성공할 수 있는 합리주의적 사랑을 말하는 정체된 이 세계에 진정한 사랑을 복원하기위한 노력은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해서도,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칠 수 없는 영구한 본성이어야 할 것이다. 내 사랑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이 책은 그 현주소를 깨우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