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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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에 발표된 챈들러의 첫 장편 소설인 이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거듭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욱 세련된 추리기법과 강력한 서스펜스로 독자의 숨결까지 조정할 만큼의 스릴러들이 즐비한 요즘에도 침식(侵蝕)당하지 않는 어떤 인간적 향수 때문이 아닐까? 작가가 탄생시킨 사설탐정‘필립 말로’로부터 잃어버린, 혹은 밀어놓은 인간성에 대한 무의식적 소망을 발견하게 되는 까닭일 것이다. 사람의 진심에 대한 존중과 배려, 세상을 대하는 정의로운 신념에 대한 자기 감시와 같은 오늘의 세상에서는 찾기 어려운 개성에 대한 매혹일 것이다. 또한 위선이 없기에 투박하고 자칫 오만과 적의를 불러일으키기까지 하는 진솔한 인물에 대한 자연스런 애정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매혹적인 인물의 탄생만으로 이 작품의 대중적 공감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오랜 풍화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도덕성, 윤리의식을 비롯한 인간사회의 부조리를 관통하고 있는 빛나는 통찰의 서사이며, 절제된 형용, 너절한 긴장이나 선정적 자극을 배제한 문장에도 불구하고 추리소설의 완성적 묘미를 잃지 않고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는 작가적 역량에 기인하고 있어서 이지 않을까?

 

산뜻하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필립 말로가 사건 의뢰의 상담을 위해 명문 부호인 스턴우드 가문의 대저택을 방문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스턴우드 가(家)의 둘째 딸인 카멘의 맹랑한 첫 대면에서 눈치 빠른 독자에게 당대에 만연하고 있던 상류층의 무례와 방탕이 주제를 견인하는 주요 소재이리라는 암시를 한다. 노쇠하고 병든 스턴우드 장군의 자존심과 혈연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의뢰의 내용은 둘째 딸의 빛을 상환해달라는 정중함을 위장한 채무통지의 진의를 밝혀달라는 것이지만, 애정을 가지고 있던 첫째 사위의 돌연한 사라짐과 막연한 관련성에 대한 의혹의 규명이기도 하다.

 

말로는 노인의 작은 자존심과 믿음에 대한 의지를 헤아린다. 채권자로 서명된 가이거를 찾아 나선 탐정은 그가 고서점으로 위장된 음란물 제작 및 거래자임을 알게 되고, 그의 거처에서 동향을 탐색하던 중 총격소리와 급하게 뛰쳐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진 한 남자를 목격하게 된다. 집 안에는 마약으로 정신을 잃은 스턴우드 가의 둘째 딸과 흥건한 피와 함께 바닥에 누워있는 가이거의 피살체를 발견하게 된다. 노인의 작은 자존심, 명예, 의뢰인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말로는 카멘이 그 자리에 있었던 흔적을 지워버린다. 협박의 다름 아닌 의혹의 채무통지를 보낸 당사자의 불온한 신원뿐 아니라 살해됨으로써 사건은 단순함을 일순간에 넘어선다.

 

이어서 스턴가의 운전기사가 차량과 함께 의문의 사체로 발견되고, 피살자인 가이거의 음란도서가 반출되어 옮겨진 장소에서 또 하나의 살인을 목격하게 된다. 관할 경찰과 수사담당 검사에게 말로는 자신이 살해 현장에서 목격한 사실을 진술하지만 스턴우드 가와의 관련성은 모두 은폐한다. 여기서 필립 말로의 정말 멋진 명언들이 등장한다. 바로 소설 속 허구의 인물에게 반하게 되어, 챈들러를 일약 최고 수준의 작가반열에 올려놓은 그 문장일 것이다.

 

의뢰인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과 자유를 건 위험한 현장에 거침없이 뛰어들고, 의뢰인의 이름을 보호하기 위해 검사 앞에서 사건의 내용을 당당하게 제외시켰음을 선언하는 말로의 행위이다. 일개 사설탐정의 이러한 헌신적인 행위에 대해서 “이 모든 일을 해서 얻는 게 뭔가?”하고 검사가 묻자, 말로는 대답한다. “일당 25달러와 소요경비를 청구하죠.” 그리곤 다음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런데 그 정도의 돈 때문에 이 지역의 법 집행을 맡은 사람들 중 절반의 미움을 사겠다는 건가?”

“저도 마음에 안 듭니다. 하지만 제가 하는 일이 뭡니까? 전, 사건을 맡고 있죠. 저는 생활을 위해서 팔아야 할 것은 팝니다. 하느님이 주신 약간의 용기와 사고력, 그리고 의뢰인을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밀고 나아가는 마음입니다.”

아마 ‘정의(正義)란 자기 자신의 것을 소유하고 자기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한‘플라톤’의 말, 즉 정의란 단순히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받으며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는 이 단순한 진실 이상의 미덕이 어디 있겠는가? 신뢰가 팍팍 쌓이는 이 말에 그 누가 적의를 가지겠는가?

 

이것으로 의뢰된 사건은 종료된 듯하지만, 노인의 의뢰내용 이면에 감추어진 사라진 사위‘러스티 리건’과의 관련성은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스턴우드 장군의 집사로부터 사건 종결의 통지를 받지만 플라톤의 정의처럼 말로의 직분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탐정의 목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배후자로 심증을 지닌 ‘에디 마스’라는 자의 아내와 동행 도피했다는 풍문은 더욱 말로의 직관을 유혹한다. 남편이 실종된 스턴우드가의 첫째 딸‘비비안 리건’과 에디 마스의 석연찮은 관계, 말로가 혹여 자신의 남편을 찾으려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은폐된 우려의 가면은 실종사건의 진실을 향한 국면으로 전환된다.

 

마약과 문란한 성생활, 도박, 주류밀매 등 상류계층의 부정한 부의 원천과 도덕적 타락은 스턴우드가의 자식들과 그들의 일상을 에워싼 산업을 통해 소설의 환경을 가득 채운다. 아파트에 몰래 들어가 침대위에 알몸으로 누워 유혹하는 카멘의 탐욕스럽고 히스테리적인 성욕을 자제시키고 내치는 탐정 말로의 냉엄한 행동에서 무언가 알아차려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노인이 애처롭게 기다리는 것, 그러나 가문의 작은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하는 노인이 눈을 감기 전에 알아서는 안 될 그 무엇의 진실이 바로 이 질병적 성적 탐닉처럼 감추어져 점차 부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소설의 제목인 죽음의 상징 언어인 빅 슬립(big sleep)에 이미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선악의 획일화되고 편협한 구별이나 신분, 지위, 과거의 내력, 성의 구분 등으로 인간을 판단하지 않으며, 오히려 범죄자에게 조차 깊은 인간적 연민을 짙게 발산하며, 어떤 장식도 위선도 없이 시대와 인간 자신의 내부를 바라보게 하는 담담한 문장이 더욱 서사를 돋보이게 하는 작품이다. 훌륭한 소설 앞에 더 이상의 내 조잡한 수사(修辭)는 여기서 맺는 것이 옳은 선택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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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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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 어떤 감정적 수사(修辭)도 없이 하나의 행위가 진행된다. 니켈도금 수갑이 한 남자의 목을 파고들고 경동맥이 파열되어 피가 용솟음친다. 발버둥 치던 다리의 움직임이 이내 멈추어 버린다. 여기엔 그저 죽음의 형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흥분도, 공포도, 악의도. 마치 신(神)의 행위처럼 말이다. 악의 신, ‘안톤 시거’는 이렇게 부보안관을 살해하고 도로를 질주한다. 그리곤 영문을 모르는 이의 차를 막아서고 양미간에 도살장용 스턴건으로 압축공기를 양미간에 박아 넣는다. 낭자한 피 웅덩이가 만들어지고 차를 옮겨 탄다.

 

그를 제어할 어떠한 힘도 세상에는 없을 것 같은 불가항력의 기운이 느껴진다. 무력감...

소설은 이 거대한 악의 힘을 무력하게 지켜보고 있어야 할 뿐인 인간의 역사를 투영한다. 여기에 “인생은 매 순간 갈림길이고 선택”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명제, 어느 순간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으로 초래된 일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되는 인간의 운명이 이어진다.

 

영양 사냥을 하던 용접공의 쌍안경에 4륜 구동 트럭과 죽은 듯한 사람과 개의 형상이 들어서고, 마약 밀매단들간의 무수한 총격의 흔적과 피로 얼룩진 사체들을 발견하게 된다. 사막에 점점이 이어진 혈흔을 따라가던 사냥꾼 ‘루엘린 모스’는 지폐 가득한 240만 달러의 가방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인생 전체가 새로이 결정되는 순간에 직면한 것이다. 인생을 생명의 사투에 내거는 선택을 한다. 돈 가방을 손에 쥔다.

이제 사신(死神)과 사냥꾼의 대결,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냉정한 세계가 펼쳐진다. 이 세상에서 보기 힘든 것이라는 넝쿨째 들어온 행운, 40파운드의 종이더미에 이 시대는 삶을 걸게 한다. 돈이 자유와 행복이라고 모든 이들이 합창하는 세상이기에. 그러나 예견되는 도피와 죽음에 도전해야 한다.

 

세상은 이들만의 무법천지가 아니라는 듯이 부하를 잃은 보안관 ‘벨’의 시선이 놓여진다. 그런데 이 노인의 언행이 여간 시원치 않다. 마치 방관자이고 관찰자 같은 사변(思辨)적 언어만 횡설수설한다. “저기 어딘가에는 진정한 파괴의 예언자가 있었다. 나는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 , 수많은 인명의 피살과 마약, 기관총, 산탄총, 권총 등 어지러이 널린 총기들이 의미하는 거대한 범죄가 존재하고, 자신의 관할지역 시민이 알 수 없는 범죄조직에 쫓기고 있음에도 역사의 불가피성, 죄의식, 회한, 증폭되는 시대의 잔혹성을 주절대기만 한다.

 

“아주 기묘한 역사, 역사의 어느 구석을 둘러봐도 지독한 피비린내를 풍기는 역사”임을 성찰하는 노인의 인식이 설사 진실일지언정, 살인자에 다가서기 위한 적극적 행위를 해야 하지 않는가? 고작 쫓기는 남자의 여자에게 찾아가 자수를 권유하는 행동에 머문다. 이것은 벨 자신의 사변처럼 악의 역사라는 당위에 대한 무기력으로서 노인의 존재가 의미없음 이듯이, 소설의 서사나 구성적 측면에서도 그를 위한 공간이 없어야 마땅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인간 세상은 이처럼 제어할 수 없는 사신의 시대라는 의미일까? 인간이 어찌 신에 대항 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참혹한 총격전, 돈의 회수를 위한 마약 밀매조직과 살인 전문가, 도망자의 선혈이 뒤 엉킨다. 추적을 뿌리쳐야 하는 도망자 모스와 악의 화신인 시거의 집요하고 거침없는 추격은 인간의 모든 감정이 응고된 채 지극히 건조하고 표정없는 행동으로 그 을씨년스러움을 더한다. 신의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인간의 애처로운 도피 행각처럼. 결국 역사란, 인간의 세계란 이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노인의 사변을 지켜 볼 필요가 있다. “자기가 누구이며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평생동안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잘못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들 누가 이 일을 하고 있단 말인가? 악의 신인 살인자 시거조차 자신의 행위를 신의(信義)를 지키기 위한 행위라 하고 있으며, 선(善)의 대리자인 노인 자신마저도 “인간이라면 영혼을 내 맡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자신은 그러지 않을 테다.”라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세상의 종말을 목전에 두었음에도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을 향한 묵시록, 그 경고를 넘어서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욕정에 병들고 동물성에 얽매여, 그것은 스스로 모르나니, 나를 거두어 영원한 예술품으로 만들어주오.”라는 예이츠의 시(詩),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Sailing to Byzantium」의 한 구절처럼 인간 존재로서의 환멸을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흥건한 핏빛이 지면의 도처를 채우는 이 음울한 한 편의 스릴러가 던지는 세상의 무력감이 너무도 무겁게 가슴을 짓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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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 / 비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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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가 쓴 <시시포스의 신화> 중 인간의 숙명성에 대한 심원한 다음의 문장은 스러져가는 이 작품 속 인물들이 빼앗긴 것, 바로 그것일 것이다. “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은 충분히 가득 차오른다.”

아마 이것의 패러독스한 해석이 깊게 내려앉은 고립무원의 둔덕, 생존의 희망, 그 가능성마저 상실시키는 음울한 이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젊음의 일탈, 그 해방적 쾌락의 공간이 호기심과 탐험으로 각색된 여정의 불안으로 이동하고, 그 불안이 두려움이 되며, 마침내 온통 죽음의 불가피성에 직면하는 공포로 전율하게 된다. 구원의 희망이라는 기대치가 마음에서 그 존재를 잃어버리는 순간, 절망은 인간을 내습한다. 알지 못하던 죽음의 그늘, 그 실체를 비로소 인지하게 되고, 알게 됨으로써 희망이 사라진다. 희망이 사라진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죽음의 공포, 그 유혹이다.

 

작열하는 태양, 열대의 바다, 젊은 육체들의 갈망 그득한 웃음소리와 술, 그리고 음악에 몸을 맡긴 독일, 그리스, 미국의 청춘남녀들이 멕시코 휴양지의 낮과 밤을 채운다. 제프와 에이미, 에릭과 스테이시 이렇게 두 쌍의 미국인 청춘들은 심해 가이드로 우연히 만난 독일청년 마티아스의 떠나버린 동생에 대한 사연을 듣게 된다. 고고학현장 발굴 인원인 한 여성을 찾아 떠난 동생을 찾기위해 동행의 제안을 하고 이들과 주점에서 만난 그리스 청년 파블로 등 6명은 이렇다 할 준비도 의지도 없이 가벼운 휴가여행의 기분을 지니고 낯선 장소로 출발한다.

 

이들을 목적지로 안내하던 고물트럭은 정글 앞에서 멈추고, 현지인 운전사는 이들이 가고자 하는 곳은 아무도 없다라는 의미인 듯, 알 수 없는 언어로 강하게 만류하지만 6명의 젊은 이방인들은 이를 무시하고 발길을 향한다. 정글과 개간지를 통과하면서 마야인들의 작은 부락을 만나지만 어느 누구도 이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지만, 이들에게 다가온 한 명의 건장한 마야의 남성으로부터 떠나라는 의미의 이해 할 수 없는 언어와 행동의 메시지를 받고 발굴지로 추정되는 경로를 찾아 발길을 돌린다. 언어의 불통이 지니는 오해와 왜곡, 그리고 불신, 서로 소통이 되었더라면...

이 소설의 얄궂음은 이 다른 언어로 인한 소통의 차단, 불능성, 무력성을 반복한다. 그리스인과 미국인의 의사불통, 마야인과 이들의 소통불능, 문화의 기원인 언어의 차이, 문명적 오만함을 극복하지 못할 때 야기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와 낭패, 그 무능력의 어두운 단면이기도 할 것이다.

 

마침내 이들 일행은 마야인들의 미심쩍은 감시 속에서 발굴지로 보이는 폐허에 이르는 길을 찾아내고,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러나 황급히 말을 타고 달려온 마야인은 그들에게 둔덕으로 오르지 말 것을 표현하지만 둔덕의 경계에 무성하게 자란 초록의 넝쿨에 발이 감긴 에이미를 보자 많은 숫자로 늘어난 마야인들은 태도를 바꾸어 총과 화살을 겨누고 이들에게 경계가 된 넝쿨식물의 안 지대인 둔덕을 오를 것을 강요한다. 그러다 넝쿨식물 사이로 드러난 사람의 뼈와 소지품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해골이 된 사체는 바로 마티아스의 동생 헨리히임을 알게 된다. 무엇인가에 흡입된 듯이 살이 사라지고 하얀 뼈들만 드러낸 이해 할 수 없는 모습, 당황과 참담함, 살해의 위협에 내몰린 이들은 둔덕을 오르고 발굴단의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텐트를 발견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다.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이 없을 때, 자신들의 합리적 이성에 반하는 현상을 마주 할 때, 이해 할 수 없는 위협이 자신들을 에워쌀 때, 인간은 무력감과 가공할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이들이 들어선 황량한 폐허, 정글의 무더위와 함께 줄곧 괴롭히던 파리와 모기떼마저 사라진 지대, 낯선 초록의 넝쿨 식물이외에는 어떠한 생물도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환경임을 일행 모두가 인지했을 때, 이미 이들은 폐허의 둔덕에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곤 발굴단원으로 보이는 해골의 잔재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들을 살해한 주체가 바로 선홍색 꽃을 맺은 넝쿨식물임을 납득하기에 이른다.

 

인간의 욕망을 꿰뚫는 넝쿨에 기만당하고, 그리스인의 척추부상, 에릭의 다리 중상, 보잘 것 없는 식수와 식량은 일행의 생존적 열망을 떨어뜨린다. 토사물을 흡입키 위해 달려드는 넝쿨의 재빠른 움직임, 기생을 위해 에릭의 상처를 뚫고 신체 속으로 들어간 넝쿨, 하반신의 마비로 죽음의 문턱에 선 그리스인의 하체를 먹어대는 무성한 넝쿨의 집요한 공격, 이를 피해 폐허를 벗어나려 하지만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막아선 마야인들의 화살과 총신들은 오직 그들이 떠나올 때 남긴 메시지를 확인할 그리스인의 친구들에 대한 기다림이라는 구원의 기대만을 남긴다.

 

생존의 희망은 오직 외부로부터의 구조밖에 남은 것이 없음을 인정할 때, 그러나 그 구원조차 가능성이 퇴색하게 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목마름과 배고픔, 잠에 빠질 때마다 인간의 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달려드는 음험한 식물의 공격, 자신의 앞에 죽음만이 놓여 있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 그리고 바로 옆의 연인과 동료들이 넝쿨식물에 의해 살해당하고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만 할 때, 우린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우리의 그 잘난 이성은 아무런 기지도 발휘하지 못한다.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몰래 물을 들이켜고, 한정된 열악한 식량을 삼켜버리는 이기심, 타인의 약점을 힐난하고, 시기하고 의심하며 감정의 싸움에 몰두한다. “굳이 넝쿨이 죽일 필요 없지. 너희들 스스로 자초하고 말거야.”라는 자조의 말처럼 희망이 떠나버린 인간은 생존을 위한 투쟁심, 생의 의욕을 상실하고 만다. 자멸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기다리고 희망하고 견디는 것 뿐”이라며, 삶의 가능성, 생의 의지를 지키기 위한 견뎌냄, 인내의 지혜를 다짐하지만 희망의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인간을 삶의 시험에 돌입하게 한다. 결국 저 시시포스처럼 인간은 모든 것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됨을 수긍하고, 보기를 바라지만 어둠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아는 맹인이 되어 계속해서 전진한다. 그리고 바위는 또다시 굴러 떨어진다. 소설은 이같이 결코 해피엔딩을 보여주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사라지고 난 그곳에 또 한패의 젊은 그리스인들이 둔덕을 넘어 동료의 이름, 파블로를 외치고 있으니.

 

빈틈없이 독자의 뇌리를 채우는 가득한 공포, 심연보다 깊은 표현할 길 없는 아득한 공포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끝 간 데 없이 마음을 죄어온다. 그럼에도 책을 놓을 수 없는 이 기묘한 매혹을 무어라 할 수 있을까? 희망이 상실된 지대, 그곳에 좌초된 인간들의 뒤늦은 깨달음, 그리고 탄식을 절로 나오게 하는 인간의 본성들, 터질 듯한 공포의 괴성을 같이 질러댈 것만 같은 그 소스라치게 하는 악마적 전율을 조작해대는 치밀한 문장의 마법일까? 초자연적 스릴러! 진정한 압도적 호러 걸작이라 왜 아니라 하겠는가? 공포를 이해할 줄 아는 독자들에게 감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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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 / 비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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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보다 깊은 표현할 길 없는 아득한 공포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끝 간 데 없이 마음을 죄어온다. 터질 듯한 공포의 괴성을 같이 질러댈 것만 같은 악마적 전율을 몰고오는 치밀한 문장의 마법, 공포를 이해할 줄 아는 독자들에게 감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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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몽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2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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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우연, 그리고 신비의 그늘을 드리운 5편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된 경이롭다 할 정도의 반전이 돋보이는 연작소설이다. 용의자, 범인 추정의 인물적 트릭이 아니라 우연이 필연으로, 신비가 논리와 과학적 이성으로 전환됨으로써 사건의 본질적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그야말로 반전의 지존을 마주하게 된다고 할까?

한낱 망상에 불과한 듯 보이는 에피소드적 사건이 무의식속에 새겨진 과거 시간의 은밀한 실체라는 진실을 드러내고, 우연의 동시성은 필연이라는 계획된 행위의 은폐인가 하면, 논리적 육감이라는 인간의 신비로운 직관의 세계는 태곳적부터 인간 생체에 축적된 감관적 지식, 바로 과학적 이성에 가닿는 인간 정신에 대한 빼어난 관찰이 그것이다.

 

첫 번째 수록된「꿈에서 본 소녀」는 열 살 어린 시절의 꿈에 나타났던 ‘모리사키 레이미’라는 소녀를 현실에서 발견하고 그녀의 잠든 방에 방문했다 엽총의 사격을 받고 도망치던 청년의 단순 치사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십 칠년 전 당시에 출생치도 않았던 꿈속에서 본 소녀를 연인으로 확신함으로써 발생한 터무니없어 보이는 사건, 기이한, 설명할 수 없어 신비롭게 보이기만 하는 이 ‘꿈’의 진실을 추적하게 되면 현실 속의 많은 실체를 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C.G.융이 설파한 무의식의 심연을 탐험하는 문학 판(版)이라 할까? 어린 시절 동네 단짝 친구였던 신코짱이라는 소녀의 죽음과 그녀의 인형에 얽힌 추억, 잠재의식 속에서 소년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던,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조종당하던 존재의 진실들에 연결된 망각된 사실들이 드러남으로써 단순한 에피소드는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전혀 다른 성질의 복잡한 사건으로 변화된다.

 

「영(靈)을 보다」라는 두 번째 작품 역시 이처럼 사건의 본질이 완전히 전복되고 있는데, 여기에 유령의 환영을 보는 순간 또 다른 장소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우연’적 동시성에서 은폐된 필연성을 발견하는 이성의 시선이 더해진다. 충동적 살인에서 자살 위장의 실패와 계획살인을 읽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신비주의 사건담당’이라는 살짝 유치한 별명을 지닌‘구사나기’형사와 대학동창인 물리학 교수 ‘유가와’의 협력수사라는 인적조합으로 구색을 더한다. 즉 신비와 우연이라는 의혹의 이면 뒤에 감추어진 진실을 추적하는 과학적 지성에 대한 찬사라 할까? 그러나 인간 지성의 접근을 불허하는 신비와 우연의 영역은 정말 없는 걸까?

 

작가는 호기롭게 물리학 교수‘유가와’의 과학적 지성을 통해 불가해한 신비와, 우연의 지대란 없다는 듯이 사건의 본질을 규명하지만 마지막에 수록된 다섯 번째 작품인「예지몽」의 여운을 남기는 문장은 인간의 이해가 따르지 않는 영역의 존재를 암시한다. “엄마, 또 이상한 꿈을 꿨어”, “ 그 아주머니가 아래로 떨어져”, “남자랑 같이 어두운 계곡 같은 데로 떨어져”..... 독자들에게 한 번 해결해 보라는 과제일까? 아니면 불가해의 영역에 대한 의혹의 시선인가?

 

세 번째 작품은 인간의 감관으로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폴터가이스트(Poltergeist)’ 현상을 제재로 하고 있다. 시끄러운 영(靈)이라고 불리는 으스스한 기운과 저절로 사물이나 구조물이 덜덜 떨어대는 현상은 실로 온 몸의 솜털조차 곤두서게 할 것이다. 건강용품 서비스 엔지니어인 남편의 실종, 남편이 갇혀있으리라 추정되는 주택과 이질적인 주택점유자들과 이상 행동, 그리곤 저녁 8시만 되면 사시나무 떨 듯 진동하는 주택에서의 기이한 소음은 여자의 논리적 육감을 이끈다. 어쩌면 육감이란 고대로부터 인간의 몸에 층층이 쌓여온 오묘한 감관의 능력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학적 이성보다 열등한 것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이「떠드는 영혼」은 이러한 인간 정신세계의 탐색 못지않게 흥미로운 은유가 덧대어 지는데, 부도체인 유리막대가 열을 머금자 전도체가 되고, 마침내 그 열로 인해 녹아버려 소멸해버리는 것이다. 탐욕으로 인해 자신조차 파멸하고 마는 인간 심리의 도덕적 통찰이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삶의 존속을 좌우하는 ‘돈’, 이것이 주체이고 인간이 객체로 전락하고 만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로 인해 사람들은 살해하고, 살해당하며, 스스로 생을 끊기도 한다.

 

돈의 노예가 된 인간, 이러한 관점에서 네 번째 수록작인 「그녀의 알리바이」는 「떠드는 영혼」의 또 다른 판본이라고도 할 것이다. 빈사상태에 빠진 가업을 존속시키기 위해 벌어지는, 즉 돈을 위한 죽음의 이야기다. 다만 용의자의 지위를 피하기 위한 자기변호의 입증수단인 ‘알리바이’라는 보편적 이해가 전도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발상의 전복이 소설을 이끈다. 수사의 시선을 오히려 용의자 자신에게 집중시킴으로써 사건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보편적 이성은 이에 무능함을 노출 시킨다.

 

『예지몽』은 이렇듯 꿈을 신비주의로서만이 아니라 현실적 현상에 토대를 둔 인간 욕망의 실현수단이자 의지의 발현이라는 과학으로서의 심리적 표상으로 실현시킴으로써 우리들이 의식의 표면으로만 이해 할 수 없었던 신비와 우연의 허상을 해체하여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이성의 무능지대를 종횡누비면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탐색하고 진실 접근의 통로를 안내하는 것이다. 정교한 트릭과 아울러 주도면밀한 사건과 의식 흐름의 구성, 의문의 여지없는 명쾌한 추리까지, 가히 완벽한 또 하나의 미스터리 걸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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