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39년에 발표된 챈들러의 첫 장편 소설인 이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거듭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욱 세련된 추리기법과 강력한 서스펜스로 독자의 숨결까지 조정할 만큼의 스릴러들이 즐비한 요즘에도 침식(侵蝕)당하지 않는 어떤 인간적 향수 때문이 아닐까? 작가가 탄생시킨 사설탐정‘필립 말로’로부터 잃어버린, 혹은 밀어놓은 인간성에 대한 무의식적 소망을 발견하게 되는 까닭일 것이다. 사람의 진심에 대한 존중과 배려, 세상을 대하는 정의로운 신념에 대한 자기 감시와 같은 오늘의 세상에서는 찾기 어려운 개성에 대한 매혹일 것이다. 또한 위선이 없기에 투박하고 자칫 오만과 적의를 불러일으키기까지 하는 진솔한 인물에 대한 자연스런 애정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매혹적인 인물의 탄생만으로 이 작품의 대중적 공감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오랜 풍화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도덕성, 윤리의식을 비롯한 인간사회의 부조리를 관통하고 있는 빛나는 통찰의 서사이며, 절제된 형용, 너절한 긴장이나 선정적 자극을 배제한 문장에도 불구하고 추리소설의 완성적 묘미를 잃지 않고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는 작가적 역량에 기인하고 있어서 이지 않을까?

 

산뜻하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필립 말로가 사건 의뢰의 상담을 위해 명문 부호인 스턴우드 가문의 대저택을 방문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스턴우드 가(家)의 둘째 딸인 카멘의 맹랑한 첫 대면에서 눈치 빠른 독자에게 당대에 만연하고 있던 상류층의 무례와 방탕이 주제를 견인하는 주요 소재이리라는 암시를 한다. 노쇠하고 병든 스턴우드 장군의 자존심과 혈연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의뢰의 내용은 둘째 딸의 빛을 상환해달라는 정중함을 위장한 채무통지의 진의를 밝혀달라는 것이지만, 애정을 가지고 있던 첫째 사위의 돌연한 사라짐과 막연한 관련성에 대한 의혹의 규명이기도 하다.

 

말로는 노인의 작은 자존심과 믿음에 대한 의지를 헤아린다. 채권자로 서명된 가이거를 찾아 나선 탐정은 그가 고서점으로 위장된 음란물 제작 및 거래자임을 알게 되고, 그의 거처에서 동향을 탐색하던 중 총격소리와 급하게 뛰쳐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진 한 남자를 목격하게 된다. 집 안에는 마약으로 정신을 잃은 스턴우드 가의 둘째 딸과 흥건한 피와 함께 바닥에 누워있는 가이거의 피살체를 발견하게 된다. 노인의 작은 자존심, 명예, 의뢰인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말로는 카멘이 그 자리에 있었던 흔적을 지워버린다. 협박의 다름 아닌 의혹의 채무통지를 보낸 당사자의 불온한 신원뿐 아니라 살해됨으로써 사건은 단순함을 일순간에 넘어선다.

 

이어서 스턴가의 운전기사가 차량과 함께 의문의 사체로 발견되고, 피살자인 가이거의 음란도서가 반출되어 옮겨진 장소에서 또 하나의 살인을 목격하게 된다. 관할 경찰과 수사담당 검사에게 말로는 자신이 살해 현장에서 목격한 사실을 진술하지만 스턴우드 가와의 관련성은 모두 은폐한다. 여기서 필립 말로의 정말 멋진 명언들이 등장한다. 바로 소설 속 허구의 인물에게 반하게 되어, 챈들러를 일약 최고 수준의 작가반열에 올려놓은 그 문장일 것이다.

 

의뢰인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과 자유를 건 위험한 현장에 거침없이 뛰어들고, 의뢰인의 이름을 보호하기 위해 검사 앞에서 사건의 내용을 당당하게 제외시켰음을 선언하는 말로의 행위이다. 일개 사설탐정의 이러한 헌신적인 행위에 대해서 “이 모든 일을 해서 얻는 게 뭔가?”하고 검사가 묻자, 말로는 대답한다. “일당 25달러와 소요경비를 청구하죠.” 그리곤 다음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런데 그 정도의 돈 때문에 이 지역의 법 집행을 맡은 사람들 중 절반의 미움을 사겠다는 건가?”

“저도 마음에 안 듭니다. 하지만 제가 하는 일이 뭡니까? 전, 사건을 맡고 있죠. 저는 생활을 위해서 팔아야 할 것은 팝니다. 하느님이 주신 약간의 용기와 사고력, 그리고 의뢰인을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밀고 나아가는 마음입니다.”

아마 ‘정의(正義)란 자기 자신의 것을 소유하고 자기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한‘플라톤’의 말, 즉 정의란 단순히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받으며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는 이 단순한 진실 이상의 미덕이 어디 있겠는가? 신뢰가 팍팍 쌓이는 이 말에 그 누가 적의를 가지겠는가?

 

이것으로 의뢰된 사건은 종료된 듯하지만, 노인의 의뢰내용 이면에 감추어진 사라진 사위‘러스티 리건’과의 관련성은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스턴우드 장군의 집사로부터 사건 종결의 통지를 받지만 플라톤의 정의처럼 말로의 직분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탐정의 목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배후자로 심증을 지닌 ‘에디 마스’라는 자의 아내와 동행 도피했다는 풍문은 더욱 말로의 직관을 유혹한다. 남편이 실종된 스턴우드가의 첫째 딸‘비비안 리건’과 에디 마스의 석연찮은 관계, 말로가 혹여 자신의 남편을 찾으려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은폐된 우려의 가면은 실종사건의 진실을 향한 국면으로 전환된다.

 

마약과 문란한 성생활, 도박, 주류밀매 등 상류계층의 부정한 부의 원천과 도덕적 타락은 스턴우드가의 자식들과 그들의 일상을 에워싼 산업을 통해 소설의 환경을 가득 채운다. 아파트에 몰래 들어가 침대위에 알몸으로 누워 유혹하는 카멘의 탐욕스럽고 히스테리적인 성욕을 자제시키고 내치는 탐정 말로의 냉엄한 행동에서 무언가 알아차려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노인이 애처롭게 기다리는 것, 그러나 가문의 작은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하는 노인이 눈을 감기 전에 알아서는 안 될 그 무엇의 진실이 바로 이 질병적 성적 탐닉처럼 감추어져 점차 부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소설의 제목인 죽음의 상징 언어인 빅 슬립(big sleep)에 이미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선악의 획일화되고 편협한 구별이나 신분, 지위, 과거의 내력, 성의 구분 등으로 인간을 판단하지 않으며, 오히려 범죄자에게 조차 깊은 인간적 연민을 짙게 발산하며, 어떤 장식도 위선도 없이 시대와 인간 자신의 내부를 바라보게 하는 담담한 문장이 더욱 서사를 돋보이게 하는 작품이다. 훌륭한 소설 앞에 더 이상의 내 조잡한 수사(修辭)는 여기서 맺는 것이 옳은 선택일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