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그 어떤 감정적 수사(修辭)도 없이 하나의 행위가 진행된다. 니켈도금 수갑이 한 남자의 목을 파고들고 경동맥이 파열되어 피가 용솟음친다. 발버둥 치던 다리의 움직임이 이내 멈추어 버린다. 여기엔 그저 죽음의 형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흥분도, 공포도, 악의도. 마치 신(神)의 행위처럼 말이다. 악의 신, ‘안톤 시거’는 이렇게 부보안관을 살해하고 도로를 질주한다. 그리곤 영문을 모르는 이의 차를 막아서고 양미간에 도살장용 스턴건으로 압축공기를 양미간에 박아 넣는다. 낭자한 피 웅덩이가 만들어지고 차를 옮겨 탄다.

 

그를 제어할 어떠한 힘도 세상에는 없을 것 같은 불가항력의 기운이 느껴진다. 무력감...

소설은 이 거대한 악의 힘을 무력하게 지켜보고 있어야 할 뿐인 인간의 역사를 투영한다. 여기에 “인생은 매 순간 갈림길이고 선택”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명제, 어느 순간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으로 초래된 일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되는 인간의 운명이 이어진다.

 

영양 사냥을 하던 용접공의 쌍안경에 4륜 구동 트럭과 죽은 듯한 사람과 개의 형상이 들어서고, 마약 밀매단들간의 무수한 총격의 흔적과 피로 얼룩진 사체들을 발견하게 된다. 사막에 점점이 이어진 혈흔을 따라가던 사냥꾼 ‘루엘린 모스’는 지폐 가득한 240만 달러의 가방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인생 전체가 새로이 결정되는 순간에 직면한 것이다. 인생을 생명의 사투에 내거는 선택을 한다. 돈 가방을 손에 쥔다.

이제 사신(死神)과 사냥꾼의 대결,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냉정한 세계가 펼쳐진다. 이 세상에서 보기 힘든 것이라는 넝쿨째 들어온 행운, 40파운드의 종이더미에 이 시대는 삶을 걸게 한다. 돈이 자유와 행복이라고 모든 이들이 합창하는 세상이기에. 그러나 예견되는 도피와 죽음에 도전해야 한다.

 

세상은 이들만의 무법천지가 아니라는 듯이 부하를 잃은 보안관 ‘벨’의 시선이 놓여진다. 그런데 이 노인의 언행이 여간 시원치 않다. 마치 방관자이고 관찰자 같은 사변(思辨)적 언어만 횡설수설한다. “저기 어딘가에는 진정한 파괴의 예언자가 있었다. 나는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 , 수많은 인명의 피살과 마약, 기관총, 산탄총, 권총 등 어지러이 널린 총기들이 의미하는 거대한 범죄가 존재하고, 자신의 관할지역 시민이 알 수 없는 범죄조직에 쫓기고 있음에도 역사의 불가피성, 죄의식, 회한, 증폭되는 시대의 잔혹성을 주절대기만 한다.

 

“아주 기묘한 역사, 역사의 어느 구석을 둘러봐도 지독한 피비린내를 풍기는 역사”임을 성찰하는 노인의 인식이 설사 진실일지언정, 살인자에 다가서기 위한 적극적 행위를 해야 하지 않는가? 고작 쫓기는 남자의 여자에게 찾아가 자수를 권유하는 행동에 머문다. 이것은 벨 자신의 사변처럼 악의 역사라는 당위에 대한 무기력으로서 노인의 존재가 의미없음 이듯이, 소설의 서사나 구성적 측면에서도 그를 위한 공간이 없어야 마땅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인간 세상은 이처럼 제어할 수 없는 사신의 시대라는 의미일까? 인간이 어찌 신에 대항 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참혹한 총격전, 돈의 회수를 위한 마약 밀매조직과 살인 전문가, 도망자의 선혈이 뒤 엉킨다. 추적을 뿌리쳐야 하는 도망자 모스와 악의 화신인 시거의 집요하고 거침없는 추격은 인간의 모든 감정이 응고된 채 지극히 건조하고 표정없는 행동으로 그 을씨년스러움을 더한다. 신의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인간의 애처로운 도피 행각처럼. 결국 역사란, 인간의 세계란 이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노인의 사변을 지켜 볼 필요가 있다. “자기가 누구이며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평생동안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잘못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들 누가 이 일을 하고 있단 말인가? 악의 신인 살인자 시거조차 자신의 행위를 신의(信義)를 지키기 위한 행위라 하고 있으며, 선(善)의 대리자인 노인 자신마저도 “인간이라면 영혼을 내 맡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자신은 그러지 않을 테다.”라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세상의 종말을 목전에 두었음에도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을 향한 묵시록, 그 경고를 넘어서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욕정에 병들고 동물성에 얽매여, 그것은 스스로 모르나니, 나를 거두어 영원한 예술품으로 만들어주오.”라는 예이츠의 시(詩),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Sailing to Byzantium」의 한 구절처럼 인간 존재로서의 환멸을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흥건한 핏빛이 지면의 도처를 채우는 이 음울한 한 편의 스릴러가 던지는 세상의 무력감이 너무도 무겁게 가슴을 짓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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