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 / 비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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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가 쓴 <시시포스의 신화> 중 인간의 숙명성에 대한 심원한 다음의 문장은 스러져가는 이 작품 속 인물들이 빼앗긴 것, 바로 그것일 것이다. “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은 충분히 가득 차오른다.”

아마 이것의 패러독스한 해석이 깊게 내려앉은 고립무원의 둔덕, 생존의 희망, 그 가능성마저 상실시키는 음울한 이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젊음의 일탈, 그 해방적 쾌락의 공간이 호기심과 탐험으로 각색된 여정의 불안으로 이동하고, 그 불안이 두려움이 되며, 마침내 온통 죽음의 불가피성에 직면하는 공포로 전율하게 된다. 구원의 희망이라는 기대치가 마음에서 그 존재를 잃어버리는 순간, 절망은 인간을 내습한다. 알지 못하던 죽음의 그늘, 그 실체를 비로소 인지하게 되고, 알게 됨으로써 희망이 사라진다. 희망이 사라진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죽음의 공포, 그 유혹이다.

 

작열하는 태양, 열대의 바다, 젊은 육체들의 갈망 그득한 웃음소리와 술, 그리고 음악에 몸을 맡긴 독일, 그리스, 미국의 청춘남녀들이 멕시코 휴양지의 낮과 밤을 채운다. 제프와 에이미, 에릭과 스테이시 이렇게 두 쌍의 미국인 청춘들은 심해 가이드로 우연히 만난 독일청년 마티아스의 떠나버린 동생에 대한 사연을 듣게 된다. 고고학현장 발굴 인원인 한 여성을 찾아 떠난 동생을 찾기위해 동행의 제안을 하고 이들과 주점에서 만난 그리스 청년 파블로 등 6명은 이렇다 할 준비도 의지도 없이 가벼운 휴가여행의 기분을 지니고 낯선 장소로 출발한다.

 

이들을 목적지로 안내하던 고물트럭은 정글 앞에서 멈추고, 현지인 운전사는 이들이 가고자 하는 곳은 아무도 없다라는 의미인 듯, 알 수 없는 언어로 강하게 만류하지만 6명의 젊은 이방인들은 이를 무시하고 발길을 향한다. 정글과 개간지를 통과하면서 마야인들의 작은 부락을 만나지만 어느 누구도 이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지만, 이들에게 다가온 한 명의 건장한 마야의 남성으로부터 떠나라는 의미의 이해 할 수 없는 언어와 행동의 메시지를 받고 발굴지로 추정되는 경로를 찾아 발길을 돌린다. 언어의 불통이 지니는 오해와 왜곡, 그리고 불신, 서로 소통이 되었더라면...

이 소설의 얄궂음은 이 다른 언어로 인한 소통의 차단, 불능성, 무력성을 반복한다. 그리스인과 미국인의 의사불통, 마야인과 이들의 소통불능, 문화의 기원인 언어의 차이, 문명적 오만함을 극복하지 못할 때 야기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와 낭패, 그 무능력의 어두운 단면이기도 할 것이다.

 

마침내 이들 일행은 마야인들의 미심쩍은 감시 속에서 발굴지로 보이는 폐허에 이르는 길을 찾아내고,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러나 황급히 말을 타고 달려온 마야인은 그들에게 둔덕으로 오르지 말 것을 표현하지만 둔덕의 경계에 무성하게 자란 초록의 넝쿨에 발이 감긴 에이미를 보자 많은 숫자로 늘어난 마야인들은 태도를 바꾸어 총과 화살을 겨누고 이들에게 경계가 된 넝쿨식물의 안 지대인 둔덕을 오를 것을 강요한다. 그러다 넝쿨식물 사이로 드러난 사람의 뼈와 소지품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해골이 된 사체는 바로 마티아스의 동생 헨리히임을 알게 된다. 무엇인가에 흡입된 듯이 살이 사라지고 하얀 뼈들만 드러낸 이해 할 수 없는 모습, 당황과 참담함, 살해의 위협에 내몰린 이들은 둔덕을 오르고 발굴단의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텐트를 발견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다.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이 없을 때, 자신들의 합리적 이성에 반하는 현상을 마주 할 때, 이해 할 수 없는 위협이 자신들을 에워쌀 때, 인간은 무력감과 가공할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이들이 들어선 황량한 폐허, 정글의 무더위와 함께 줄곧 괴롭히던 파리와 모기떼마저 사라진 지대, 낯선 초록의 넝쿨 식물이외에는 어떠한 생물도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환경임을 일행 모두가 인지했을 때, 이미 이들은 폐허의 둔덕에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곤 발굴단원으로 보이는 해골의 잔재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들을 살해한 주체가 바로 선홍색 꽃을 맺은 넝쿨식물임을 납득하기에 이른다.

 

인간의 욕망을 꿰뚫는 넝쿨에 기만당하고, 그리스인의 척추부상, 에릭의 다리 중상, 보잘 것 없는 식수와 식량은 일행의 생존적 열망을 떨어뜨린다. 토사물을 흡입키 위해 달려드는 넝쿨의 재빠른 움직임, 기생을 위해 에릭의 상처를 뚫고 신체 속으로 들어간 넝쿨, 하반신의 마비로 죽음의 문턱에 선 그리스인의 하체를 먹어대는 무성한 넝쿨의 집요한 공격, 이를 피해 폐허를 벗어나려 하지만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막아선 마야인들의 화살과 총신들은 오직 그들이 떠나올 때 남긴 메시지를 확인할 그리스인의 친구들에 대한 기다림이라는 구원의 기대만을 남긴다.

 

생존의 희망은 오직 외부로부터의 구조밖에 남은 것이 없음을 인정할 때, 그러나 그 구원조차 가능성이 퇴색하게 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목마름과 배고픔, 잠에 빠질 때마다 인간의 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달려드는 음험한 식물의 공격, 자신의 앞에 죽음만이 놓여 있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 그리고 바로 옆의 연인과 동료들이 넝쿨식물에 의해 살해당하고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만 할 때, 우린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우리의 그 잘난 이성은 아무런 기지도 발휘하지 못한다.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몰래 물을 들이켜고, 한정된 열악한 식량을 삼켜버리는 이기심, 타인의 약점을 힐난하고, 시기하고 의심하며 감정의 싸움에 몰두한다. “굳이 넝쿨이 죽일 필요 없지. 너희들 스스로 자초하고 말거야.”라는 자조의 말처럼 희망이 떠나버린 인간은 생존을 위한 투쟁심, 생의 의욕을 상실하고 만다. 자멸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기다리고 희망하고 견디는 것 뿐”이라며, 삶의 가능성, 생의 의지를 지키기 위한 견뎌냄, 인내의 지혜를 다짐하지만 희망의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인간을 삶의 시험에 돌입하게 한다. 결국 저 시시포스처럼 인간은 모든 것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됨을 수긍하고, 보기를 바라지만 어둠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아는 맹인이 되어 계속해서 전진한다. 그리고 바위는 또다시 굴러 떨어진다. 소설은 이같이 결코 해피엔딩을 보여주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사라지고 난 그곳에 또 한패의 젊은 그리스인들이 둔덕을 넘어 동료의 이름, 파블로를 외치고 있으니.

 

빈틈없이 독자의 뇌리를 채우는 가득한 공포, 심연보다 깊은 표현할 길 없는 아득한 공포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끝 간 데 없이 마음을 죄어온다. 그럼에도 책을 놓을 수 없는 이 기묘한 매혹을 무어라 할 수 있을까? 희망이 상실된 지대, 그곳에 좌초된 인간들의 뒤늦은 깨달음, 그리고 탄식을 절로 나오게 하는 인간의 본성들, 터질 듯한 공포의 괴성을 같이 질러댈 것만 같은 그 소스라치게 하는 악마적 전율을 조작해대는 치밀한 문장의 마법일까? 초자연적 스릴러! 진정한 압도적 호러 걸작이라 왜 아니라 하겠는가? 공포를 이해할 줄 아는 독자들에게 감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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