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고독
박형숙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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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의 틈바구니, 그 욕망의 지대

 

어쩌면 나는 소위 안정된 가족생활, 즉 공고한 일부일처의 관계만을 유일한 이상으로 보는 관념의 거부에 막연한 동의를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현실과 환상의 좁은 틈바구니에서 겨우 존재하느라 힘들었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쓴 이 작품집에 대한 '작가의 말'속에서 그 거부의 실체를 보고자하는 충동이 일었다고해야겠다. 누군가는 이 관념의 거부를 넓게 정의하여  '불륜(不倫)'이라는 한 단어에 가두어 두려하고  "불륜 소설은 쓰레기다."라고 그 통속성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를 회피하는 위선"이라고 대응하는 식의 진부한 사회적 시선을 반복하고 싶지도 않으며,  또한 불륜도 사랑인가? 간통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어떠한 것인가? 라는 식의 관음증적 연민, 혹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거나, 서로의 몸에 자신을 기록하기 위한 정사(情事)라는 식의 언어의 향연과 같은 수 많은 되풀이에도 관심을 둘 여유가 없다.

 

오직 "좁은 틈바구니"라는  이 경계지대, 소위 '불륜(不倫:Infidelity)'이라고 푹넓게 정의되는 상황의 영역,  상대자에 대한 신의를 가진 정인(情人)을 배반하는 행위, 보다 좁게 정의하자면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적 관계' 를 맺는 사람들이 거니는 그곳에서  '겨우 존재'하는, 이 욕망의 지대에서 존재하려고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내적 풍경, 그 인간적인 진실을 이야기하려는 작가의 의지에 매력을 느꼈다고하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겠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내게 좁은, 즉 현실과 환상의 틈바구니라는 존재지역, 그곳의 정서를 탐색하는 여정이 된다.

 

작품집의 모두에 있는 [풀 스토리]에서 그 환상의 첫 이미지를 엿볼 수 있다.  자신의 친구'태환'과 관계를 맺은 아내 '미령'에게 남편 '영수'는 왜 그랬어라고 묻는다. 그녀의 대답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에 가 닿아있다. "그냥 궁금 했어, 내가 얼마나 자유로울수 있는지" .  궁금해서 새롭거나 모르는 것에 대해 알고자 하는 호기심의 발동이었다것이다. 이 소설의 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위선을 걷어낸 진실의 마주함이랄까? 

 

두번 째 수록작인 [한 낯의 꿈]에 이르면, '처음", "미지의 가능성"과  같은 신비감에 대한 현혹, 그 환상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을 유부녀인 '미희'라는 여성은 "가정보다 더 소중한 것",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욕망"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상대자인 남성은 "성욕"에 불과한 것이라고 조롱하지만 말이다. 작품 [아홉번 째 고독]에서는 현실과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을 왕래하며, 그 경계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세무사의 아내가 등장하여 '아홉번째 고독(9th-solitude)'이라는 허영끼 가득한 아이디를 사용하는 소설가의 미궁에서 진실을 묻는다. "사랑인가요?", 그러나 묻는 순간 대상은 사라지고 만다. 현실에 발을 지탱하지 않은 그 허구, 아니 환상의 부질없음과 공허함이 잔뜩 묻어난다.

 

소설 속  환상의 실체 유형 몇가지를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현실은 결혼제도 내에 있는 남녀이고, 환상은 욕망의 진실에 족쇄를 채운 금기와 금지의 실체이다.  여기서 오늘의 성(性) 이데올로기로서의 섹슈얼리티(sexuality)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작품 [한 낯의 꿈에서], 유부녀 '미희'는 "죄의식이란 한낱 불투명한 의식의 그림자"라고 자신과 유부남과의 성적 만남, 즉 불륜이라는 금지의 언어를 한 방에 돌파해낸다. 게다가 [칠월의 풀밭]이란 단편에서는 "이별만이 사랑을 아름답게 해주죠. 이별 없는 사랑은 부패"라고 하면서 늘 돌아설 준비를 하는 그런 관계, 어쩌면 성적 쾌락이라는 이익만을 향유려는 듯한 성 심리의 한 단면을 그려내기도 한다.

이처럼 이 틈바니구니에 서있는 사람들의 정서는 불투명한 의식의 그림자라는 죄의식, 전적으로 소유하지 못하는 불안감, 의심, 이별의 준비와 같은 현실성과 자유, 아름다움, 도취, 위안, 최상의 기쁨 등의 환상, 혹은 감정과 윤리 사이의 숨막히는 갈등 속에 놓여있다.

 

그러나 단편[비행]에서 아내 일탈의 추억을 상징하는 재즈의 선율을 담담히 수용하는 남자, [한 낮의 꿈]에서 아내가 출근 한 후 자신의 집에서 유부녀와 정사를 나눈 후 문득 "아내의 잔소리가 귓가에 살아나기 시작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라는 남자가 있는가하면, [칠월의 풀밭]속 여성 '성하' 처럼 세상의 모든 남자를 자신의 안에 담으며, 또한 남편을 사랑하는 여자, 또 다른 육체를 꿈꾸는 욕망을 말하는 여자가 있다. 남자와 여자의 성적 쾌락의 궁극이 어디에 있는지 극명한 대비를 느끼게한다. 이 대비는 자신의 친구와 성관계를 맺은 아내 미령이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이 느껴졌다."고, 또한 소설 [비행]에서 남편 '나'는 결혼의 이유를 "위생적이고 뒤탈 없고, 돈 안 드는 섹스"라고 주장하고, 단편[린의 수치]에서 전임강사 '나'는 여(女)제자로부터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육체적 관계를 맺은 여자의 심리적 도달점은 수치심"이란 것을 비로소 이해하는 것처럼, 성기 위주의 남성의 섹슈얼리티, 그리고 여성의 에로스적 본능, 즉 성과 사랑의 교호()로 진화한 여성의 섹슈얼리티, 나아가서 여성의 결혼에 대한 기대는 지금 오늘 우리의 결혼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녀간 간극의 심연을 보여준다.

 

이러한 오늘날 여성의 성적 태도, 오랜동안 성적지위를 향상시켜온 여성들의 성 관념이 여전히 가부장적 태도에 머물러있는 남성의 그것과 괴리를 일으키고, 그 파열음은 더욱 커지기만 하는듯 하다. 소설 속 남자들은 오직 유혹 또는 정복의 테크닉이라는 방면에서만 사랑의 전문가가 되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들의 직업이나 일에서 자기정체성을 찾으려 하지만, 여주인공들은 처음, 새로움, 우발성과 같은 낭만적 사랑의 에로틱한 효력이 성적인 만족과 행복을 보장할것이라는 환상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바로 이 '새로움'이라는 환상의 공통성이 보이며, 이는  미래의 시간을 향해 유대를 공유하며,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고 서로에게 민감해질 준비가 되어있음이라는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성(性)이란 단어 만큼 억압된 언어도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문자 그대로 윤리적이지 않다는 불륜(不倫)이라는 광의의 단어로 남녀의 성을 포괄적으로 금기시하고 있다. 이 금기의 부조화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부정의 언어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이 환상의 공통성에서 우리는 보다 공고한 결혼관계, 부부관계, 연인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앤서니 기든스'가 말한 '합류적 사랑'의 정의처럼 남녀 "두 사람의 정체성이 각기 달랐음을 인정한 위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협상해가는 그러한 사랑", 그리고 "관능의 기술을 결혼 관계의 핵심에 도입" 한 그런 사랑의 관계로, 바로 에로티시즘은 신체의 감각을 통해 표현되는 감정을 의사소통이라는 맥락에서 가꾸어가는 것, 곧 쾌락을 주고 받는 기술임을 이해하는 것이지 않을까?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감히 이 소설집을 성적 쾌락의 상호적 성취를 결혼과의 유지 또는 해소를 좌우하는 핵심요소로 그려낸 수작(秀作)이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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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11-03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읽지 않아 필리아(비의식) 님의 논리만 가지고 여쭈어 보겠습니다. 결국 필리아(비의식) 님의 결론은 (부부 사이의) 사랑은 “쾌락을 주고 받는 기술임을 이해하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것일 텐데요. 이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역시 사랑이 아닌 ‘배신 혹은 불륜(不倫)’이라는 계기였습니다. 필리아(비의식) 님의 논리 전개에 그렇게 나타나 있죠. (혹은 박형숙 소설의 이면에요.) 그렇다면 사랑은 사랑 그 자체만을 통해서는 인식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저런 물음 묻고 보니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까닭은 사랑과 쾌락에 대한 개념적 착종을 일으킨 것 같아서요. 무슨 말씀이냐면, 사랑이란 개념에는 정신적/추상적 가치가 더 강하게 내재된 것 같고, 쾌락이란 개념에는 물질적/물리적/감각적 요소가 핵심적인 것 같다는 것이죠. 문학이라는 것을 논리에 치중해 분석하는 것은 그야말로 너무 건조한 것일 텐데요. 그렇더라도 소설가나 소설비평가는 개념적 착종에 너무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험한(?) 편견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필리아 2015-11-04 06:50   좋아요 0 | URL
네, 쾌락을 주고 받는 기술이지요, 그런데 님의 말씀은 쾌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의 문제같군요. 결혼이라는 남녀의 결합과 유지에 대해서 님의 지적처럼 감각을 경시해서는 않된다는 것이구요, 소위 관념적이고 정신이기도 한 사랑과의 융합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합류적 사랑`이지요. 편견이라 비판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 일천한 감상평에 성심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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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우엘벡 지음, 김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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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갗이 직접 부딪히는 섹슈얼리티, 그러나 점점 이를 회피하는 현대인들의 정신작용과 행동양식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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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심연 위에 걸쳐진 가느다란 나뭇가지˝라고 말하던 [이탈리아 구두]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그리곤 ˝이제 여기까지 왔어˝라는 마지막 말의 의미가 더욱 절절해진다. `헤닝 만켈`,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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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더스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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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본 리뷰에는 소설의 내용이 있습니다.

 

[엔더스]의 전작인 [스타터스]를 읽고 나는 "생명윤리에 대한 도덕적 성찰을 이끄는 작품"이라고 소감을 썼었다. 그리곤 비정한 '신체강탈'의 가상세계라는 소재의 참신성과 스토리의 달달한 맛에만 머물 수 없는 소설이라고 했다. 그만큼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진중함이 소설의 전체를 이끌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엔더스]는 전편의 무거운 주제의식을 떨어내면서 이야기의 재미를 증폭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정통 추리소설의 장점을 겨냥하기라도 한듯 미스터리와 긴장감있는 속도, 그리고 독자의 기대를 멋지게 뒤집어버리는 대반전, 게다가 TV리얼리티쇼를 방불케하는 생존게임식 요소까지 구성과 스토리의 전개가 놀라울 정도이다. 그렇다고 '리사 프라이스'가 아무런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외모라는 게 너무 과대평가 되고 있다는 거야. 아름다움은 홀로 스타의 기준에 맞추는 게 아니라, 너한테 맞추는 거야" 와 같이 성형중독 사회를 꼬집는가하면, "백신이 허용된 특권 계층...정치인, 장성, ~(중략)~ ...유명연예인이나 상위 부유층 미들이 있었다." 처럼 생물학전으로 전멸한 중년세대인 '미들'중에서도 부를 거머쥔 소수계층이 생존하고 있음을 비추고 있다. 이는 자본집중 사회의 편중과 왜곡된 부의 윤리의식을 배경화하려는 작가의 의지라 할 것이다. 이러한 배경의 세계를 기반으로 십대의 소년 소녀인 '스타터스'들의 신체렌탈을 주도했던 바디뱅크인 일명 '프라임 데스티네이션(Prime Destination)'의 파괴가 있은 직후 이 탐욕과 부도덕한 집단의 수장인 '올드맨'의 집요한 추적과 열여섯 소녀 '캘리'의 용기있는 대결이 펼쳐진다.

 

프라임데스티네이션에 자신의 신체대여를 위해 머리에 칩이 이식되었던 스타터스들은 '메탈'이라고 불린다. 올드맨은 바디뱅크가 붕괴되었으나 메탈 추적능력을 통해 이들을 납치, 매매의 대상으로 삼는다. 프라임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식된 칩을 개조했던 캘리에게 올드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녕 캘리, 내가 그리웠지?" , "나는 여전히 어떤 칩이라도 접속할 수 있어", "게다가 무기로도 바꿀 수 있지"

동생 타일러의 신발을 사주기 위해 대형 쇼핑몰을 찾은 캘리의 눈 앞에서 시위라도 하듯 메탈이 폭발하고, 유리와 금속 파편이 캘리위로 비처럼 쏟아질 때 그녀를 방패처럼 막고있는 스타터를 느끼게 된다. '하이든', 그는 올드맨과 추종자들의 추적을 피해 캘리의 도피를 돕고, 올드맨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알린다. 아버지에 대항해 캘리와 그녀의 동생 타일러를 보호하고, 자신의 비밀주거지에 도망자들인 메탈들에게 안식의 공간을 제공한다.

 

그러나 습격을 받은 이들의 비밀공간은 파괴되고 같이 기숙하던 메탈들은 납치당하고 만다. 이윽고 올드맨의 접속기술은 더욱 진전되어 캘리의 신체를 통제하기에 이른다. 통제영역을 벗어나 그를 파괴하기 위한 캘리와 하이든의 쫓고 쫓기는 긴장국면은 지속되고, 캘리에게 아빠의 목소리가 접속되어 들려온다. 올드맨의 변조된 가장일까, 아빠가 생존하여 계신걸까? 캘리는 혼란에 빠진다. 이 혼란은 여타 메탈들과는 달리 캘리에게 이식된 칩의 변조과정에서 변이된  '다중접속'의 가능성, 그리고 확신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신체에 여러사람의 정신이 진입하여 사용할 수 있는 독보적인 존재, 탐욕의 화신인 올드맨이 캘리를 추적하는 이유이다.  생명의 객체화, 대상화, 생산물화의 극치이다. 인간 고유의 정체성은 완전히 실종되고 오직 재화, 황금의 논리만 작동한다.

 

드디어 올드맨의 정체, 붕괴된 바디뱅크인 프라임의 조직 동기가 드러나는 반전이 시작된다.  "프라임이 존재하는 온전한 이유는 스타터 노예제의 끝이었어"  

그리고 캘리의 의식속에 들려오는 협박의 목소리 인물인 브로크만의 실체가 드러난다. 독자가 굳건히 믿고 있었던 존재들에 대한 기대와 앎이 산산조각이 나며, 지금까지의 이야기 전개를 다시 수습하기 시작해야 한다. 캘리와 하이든 일행이 싸워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캘리의 다중접속 능력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거래상품으로서의 최고 가치를 지닌 소녀, 캘리의 도전은 다시 시작된다. 자신을 통제하고 장악하는 힘에 대항하여 그 힘을 상대에게로 역전시키는 능력, 대반전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복과 통제의 가치로 과학기술을 사용하려는 계층의 야욕, 윤리적 감각이 실종된 비정한 신체 강탈의 가상 세계를 뛰어난 스토리 전개 역량에 버무려낸 SF와 추리문학의 결정판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혹시 [미들스]라는 제목의 후속 작품을 기대한다면 작가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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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타르, 왜 철학을 하는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지음, 코린 에노도 해제, 이세진 옮김, 이성근 감수 / 북노마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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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타르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지 않는다. 이처럼 원점에서 철학을 찾으려는 것은 스스로 침잠하는 그 본질을 망각한 실착행위(실수)라고 비판한다.  그래서 '왜 철학하는가'라고 묻는다. 사실 우리들은 일상적 삶 속에서 '철학'을 말할 기회는 거의 없으며, 현실의 실제와는 동떨어진 형이상학적 세계의 한가한 사유정도로 여기기까지 한다. 그런데 과연 철학이 이렇게 삶의 실제와는 이격된 존재일까? 만일 그렇다면 인간의 삶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철학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야하지 않았을까?

'왜' 하느냐는 물음은 이러한 의미에서 이미 우리의 삶속에 실제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전제이며, 또한 "의문시 되는 대상의 실제적 현존과 가능적 부재"가 함께하고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제 리오타르는 급진적인 전개에 착수하는 듯하다. 바로 이 물음 자체가 '욕망'의 본질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욕망이란 자신에게 없는 것(부재)을 향해서 나아가듯 대상에게로 향하는 움직임이지 않은가? 현존하는 것이 자기에 대해서 부재하든가 부재가 존재하는 한에서 욕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존의 모든 관계는 부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라고 썼던 '라캉'의 이 당연한 말에서 욕망이야말로 우리 존재의 주인임을 확인하게 된다. 철학은 왜 하는가? 라는 물음의 답은 바로 인간은 '왜 욕망하는가?' 로 답변된다. 그래서 이 책은 '욕망' ,  본질상 자신의 결합속에 존재와 부재를 품고 있는, 그러면서 한데 뒤섞지 않고 함께 지탱하는 그 힘을 찾아가는 여정이 된다.

 

'플라톤'의 [향연]中 '소크라테스'를 유혹하는 '알키비아데스'와의 대화를 통해 철학과 욕망의 관계를 흥미롭게 풀어나간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매혹적인 아름다움, 자신의 몸을 대가로 소크라테스의 지식을 얻고 싶어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요구하는 대가인 지식을 내놓을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고 알키비아데스의 거래제안에 모호하게 답한다. 아테네의 최고 스타인 알키비아데스는 이렇게 철학자를 정복하려 했으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더욱 몸이 달아 안달이나고 되레 종국에는 소크라테스의 노예가 되고만다. 소크라테스가 짐짓 위선을 떤 것일까?  "지혜란 결코 자신을 믿지 않기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다.  "항상 상실되고 새롭게 부재의 현존을 찾아나서는 것이 지혜"이니 소크라테스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을 보인것이다. 물론 알키비아데스의 거래가 실착행위인것만은 아니다. 결국 자신을 내어주는 방법으로 소크라테스에 안겼으니 어찌보면 리오타르의 해석처럼 알키비아데스는  "정념의 멋진 게임"을 한것이며, '헤겔'의 말처럼 "노예는 주인의 주인"이니 말이다.

 

이 재미있는 일화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지혜'를 찾는대신에 '자신이 왜 찾는가를 찾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철학한다는 것은 바로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라는 기막힌 답변이 된다. 플라톤은 이 일화에서 이처럼 철학을 얘기하는 것으로 만족했을까? 여기에는 이미 사물화할 수 없는 것을 '사물화'시키는 인간들의 논리에 반성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있다. 지혜를 마치 소유가 가능한 사물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논리를 중단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철학은 현실의 삶 깊숙이, 인간의 일상적 삶 자체이다. 이렇게 리오타르와 얘기하다보면 철학은 어떤 주제에 대한 사색이 아니라 모든 세상의 정념들이 있으며, 스스로에게 말하는 담론을 통해서 자신을 파악하는 한 순간 한순간이 된다는 것을 절로 깨우치게 된다.

 

리오타르는 이 욕망과 철학의 관계성을 통해 왜 철학을 하는지 더욱 밀고나간다. '철학의 기원'에서는 일자(一者)의 상실, 의미의 죽음, 다시말해서 인류가 일자, 통일성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로인해 상실감과 분열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의미'를 탐색하는 것처럼 당연한 행위가 없다고 주장하며, '철학과 말'에 대해서라는 강의를 통해서는 "사유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사유를 표현하는 것이 말"이라는, 사유를 사물처럼 여기는 생각에 딴죽을 걸며 사물화적인 발상을 비판하고, 생각도 이미 말이며, 생각하는 바를 명명할 수 없다면 아직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절대 명제를 선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4편의 소르본 대학 예비교양과정 강의)은 4편인 '철학과 행동에 대해서'라는 강의에서 방점(傍點)을 찍는다. "사유가 현실에 이르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현실이 사유에 이르러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철학은 자기 시대의 현실적인 문제의식에 호응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또한 이데올로기는 형이상학의 세계, 비인간적 세계, 내세 따위를 말함으로써 문제의식에 대한 화답이나 실제 사람들을 일깨우고 확립하는 방식 자체가 현실세계에서 벗어나 실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철학이야말로 현실에서 체험되는 '결핍'에서 비롯되기에 다른 것에 대한 욕망,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다른 관계 조직에 대한 욕망이 낡은 사회적 형식들을 뛰어넘지 못하는 데서 현실성이 나오는 것이라고, 철학이야말로 현실의 삶이며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리오타르는 그야말로 걸출한 철학의 정의를 내린다. "욕망이 있기 때문에, 현존속에 부재가 있기 때문에, ~ (중략) ~ 또한 권력이 아닌 우리의 권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얻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소외되고 상실됨으로써 사태와 행위, 말해진 것과 말하기의 사이가 벌어지고 말았기 때문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말을 통하여 결핍의 현존을 증명하지 않을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철학을 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너와 나, 우리들, 우리사회에는 철학이 실종된 듯하다. 자기 욕망의 부정, 자기의 현존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들끓는 사회, 즉 반성이 없는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 된다. 철학하는 사회, 그 진솔하고 사유와 풍부한 욕망이 넘실되는 사회를 그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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